조선의 장수인물들6 - 송흠(宋欽)
- 송흠(宋欽,1459∼1547); 향수 89세 -
-어린 시절
송흠(宋欽)은 전남 영광(靈光, 후일 장성으로 개편) 삼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知止堂),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그는 어려서도 재주가 뛰어났으며, 천성이 유순하고 덕이 넘쳐 주위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집을 떠나 이웃 마을 봉인(奉寅)의 서당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때 ‘한 달에 한 번만 집에 오라’는 다짐을 어기고 찾아오자, 모친은 한밤중인데도 그를 쫓아 보냈다고 한다. 그만큼 엄격하였다.
그의 집안 내력은 실로 ‘충효(忠孝)’ 자체였다. <중종실록>에도 "송흠 집안은 가법(家法)이 엄격하여 결코 의리에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송흠의 처가 또한 충신 집안이었다. 처조부 봉여해(奉汝諧)는 '단종(端宗) 복위운동'으로 처형을 당한 충신으로, 학문이 깊어 '사경석의(四經釋義)'를 남겼다. 집안 내력을 본받아, 송흠의 아들(송익경)도 후일 청백리가 되었다고 한다. 실로 부전자전이었다.
-관직 생활
송흠은 22살(1480, 성종 11년) 생원시(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제출한 '이제관천하부(二帝官天下賦)'에서 그는 나라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은’ 요순(堯舜)을 칭송하였다.
“하늘이 무슨 마음인가. 오직 공평일 뿐이라. 성인은 어떤 마음인가. 모름지기 하늘을 본받을 뿐이라네. 천하는 공기(公器)라서 어느 한 사람이 사유할 수 없다네!”
24세(1492년)에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다가, 32세(연산군6년,1500)에 헌납이 되었는데 2년 후 그가 올린 상소가 문제가 되어 장(杖) 100대에 처해 졌고, 38세(연산군12년,1506)에는 압송되어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58세(1516년, 중종 11)에 홍문관 정자(正字)로 복직하여 박사(博士)· 지평(持平)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70세(1528년)에 담양부사가 되고, 3년 후 장흥부사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으로 옮겼고, 76세(1534년)에는 전라도관찰사(종2품)가 되었다.
그는 종일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까지 지냈다. 이는 그가 목민관(牧民官)으로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청렴결백한 생활과 뛰어난 효행으로 모든 관원의 모범이 되어 임금과 조정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효행
송흠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행으로 많은 사람의 추앙을 받고 7차례나 상을 받았다. 그는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고향 부근 10여 개 고을의 원을 자원하였다.
그는 76세에 전라 감사(관찰사)가 되자, 이듬해 ‘모친(당시 99세) 곁에서 모시게 할 수 있게 해달라’며 사직을 청했다. 당시 실록에는 평하기를, “송흠의 나이가 지금 76세인데, 기력이 강건하며 총명이 줄어들지 않았고, 어버이를 정성으로 받들어 모시며, 관(官)에서는 청렴하고 근심하며 자기 몸은 검소하게 가져 늙어서도 그 지조를 고치지 않으므로 사림(士林)이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결국 송흠은 왕의 특허로 전라감사를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늙은 모친을 2년여간 극진히 간호하였다. 식사때마다 음식은 반드시 먼저 맛을 본 후에 모친께 드렸다고 한다. 모친이 101세에 타계하자, 송흠은 80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청백리
송흠은 50여 년간 벼슬을 하면서 청렴결백을 실천한 청백리이다. 벼슬이 높아도 명예나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지방 수령으로 있으면서도 오직 청렴 검소하게 살며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펴는데 충실했다. 그는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아 가솔들이 모두 곤궁한 생활을 하였으며, 먹을 식량마저 자주 떨어졌다.
1529년(71세) 담양부사 시절 ‘고을에 재임하는 동안 모친을 봉양하는 데 외에는 처자와 첩, 종은 굶주림과 추위만 가까스로 면할 정도였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집에 한두 섬의 양식도 없었다.’고 한다.
그가 74세(중종27년, 1532)에 장흥부사로 있을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는데, 실록에는 이렇게 평하였다. “송흠은 매양 늙은 부모를 위하여 지방 수령으로 (자원해) 나아가 봉양하느라 1년도 조정에 있지 않고 호남의 7∼8개 군현과 주부(州府)를 돌면서 다스렸다. 모두 공평과 염간(廉簡, 검소 간솔함)으로 임했기 때문에 많은 치적이 있었으며,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당시 청백리가 되려면 동료들의 평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과 의정부의 검증 외에도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최고 수장들이 추천, 심사하여 통과되어야 했다. 이 어려운 심사를 거쳐 청백리로 선정되는 것만도 큰 영광인데, 송흠은 그 청백리에 무려 5번이나 뽑혔다.
-삼마태수(三馬太守)
송흠은 보성군수부터 옥천·여산군수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런데 그는 부임지에 갈 때마다 다른 수령과 달리, 체면이나 권위를 도외시한 채 언제나 말 세 필만 받았다. 당시는 고을 수령이 부임할 때나 임기를 마칠 때 감사 표시로 고을에서 가장 좋은 말 8마리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송흠은 늘 3마리(한 필은 본인,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로 총 3필)만 받아 갔으며, 다른 물건을 실은 말은 없었다. 신임 사또의 행렬이 고작 조랑말 세 필이었으니, 얼마나 검약 간소한 행차였는지 알 수 있다. 그 후 사람들은 송흠을 ‘삼마태수’라 불렀으며, 이후 ‘삼마태수’는 청백리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옛날 목민관 중 제가(齊家, 집안을 바로 다스림)의 모범적인 인물로 송흠(宋欽)을 거론했다. “효헌공 송흠이 수령으로 부임할 적마다 신영마(新迎馬) 3필뿐이었으니, 대개 공이 타는 말이 1필, 어머니와 처가 각 1필씩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삼마태수라 하였다.”
-학문
송흠은 학문도 높아서 ‘호남 성리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조선의 호남 선비 중에 가장 선배격이다. 문묘에 배향된 하서 김인후보다 50년 먼저 태어난 호남 유학(儒學)의 제1세대로, 호남 사림의 튼튼한 맥을 잡아준 '사림(士林)의 대부'였다.
송흠은 그 후 양팽손 –나세찬 – 송순- 안처성 – 양응정 – 김인후 – 임형수 등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좌장이었다. 그의 학통을 직접 이어받은 수제자들로는 양팽손, 양응정, 최경희, 백광훈, 최경창, 김경희, 정명세 등이 있다. 특히 송흠에게 제일 먼저 수학한 양팽손은 많은 제자가 따랐는데, 그중 아들 양응정과 김경희가 중심인물이다. 양응정 문하에는 당대에 시문으로 이름을 떨친 백광훈과 최경창이 수학했고 최경훈, 최경창과 함께 임진왜란의 3형제 의병장으로 유명한 최경희도 그 문하이다.
송흠은 송흠-송순-정철로 이어지는 문인들을 배출함으로써, 면앙정가를 지은 송순과 관동별곡·사미인곡·성산별곡을 지은 정철 등 가사문학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그는 지력이 뛰어나서 성리학뿐 아니라 수학(數學)에도 두루 정통했었다고 한다.
-철저한 자기 관리
호남에서 재상(宰相)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하면서도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으로 는 송흠을 제일로 쳤다고 한다. 그는 젊어서부터 집에 있을 때도 종일 의관(衣冠)을 반듯이 하고, 조금도 몸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서책(書冊)만을 대하였다. 고을 안의 후진(後進)을 접할 때는 비록 나이 젊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당(堂)에서 내려가 예절을 다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옛날 목민관 중 제가(齊家, 집안을 바로 다스림)의 모범적인 인물로 송흠(宋欽, 1459∼1547년)을 거론하고 있다.
그가 장흥부사 시절 청백리로 녹선될 때, 실록에도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행실과 지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중종은 송흠을 가선대부로 올려주고, 청백리의 자손을 서용하는 일을 이조에 명하기도 했다.
그는 자식들에게도 가훈을 철저히 실천하게 했다.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일의 근원은 충효 밖에선 찾을 수 없으니, 진실한 사람됨은 충효가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윗사람을 섬기고, 백성을 통치하는 자는 충효가 아니고는 행동할 수 없다.”
그가 기술한 <만세사업론> <문인물선약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물의 근원이 맑으면 흐르는 물도 맑게 흐르며, 표적이 바르고 정직하면 그림자 또한 반듯하다.” “윗사람이 좋으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더 좋은 것이다.” -「지지당집」
송흠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렇게 평했다.
“송흠은 청결한 지조를 스스로 지키면서 영달을 좋아하지 않았다. .... 벼슬이 또한 높았지만, 일찍이 살림살이를 경영하지 않아 가족들이 먹을 식량이 자주 떨어졌었다. 육경(六卿, 6조판서)에서 은퇴하여 늙어간 사람으로는 근고(近古)에 오직 이 한 사람뿐인데…… 도내에서 재상이 된 사람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는 송흠을 제일로 쳤다고 한다.”
그가 호로 삼은 지지당(知止堂)에는 그의 깊은 인생관이 담겨 있다. ‘지지(知止)’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노자』는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 하였고, 『대학』에도 “멈춤을 알아야 뜻을 정할 수 있다(知止而后 有定)” 하였다.
그가 세운 관수정 (觀水亭) 뜰 아래에는 <관수정기> <가훈비> 등이 새겨져 있다. <관수정기>에는 "……그 물결을 보고 그 물의 근원 있음을 알고, 그 맑음을 보고 그 마음의 사특함을 씻어버린 뒤에라야 가히 관수(觀水)가 될 것이다.……" 하였다.
송흠이 87세(명종 원년, 1545)에 남긴 ‘가훈(家訓)’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주자의 시에 이르기를 ‘모든 일은 충과 효밖에는 바랄 것이 없다’ 하였으니 대저 사람이 사람됨은 다만 충과 효에 있을 따름이다.…… 아! 사람이고서 효도하지 않는다면 사람이겠는가. 또 사람이고서 충성하지 않는다면 사람이겠는가. 그러기에 효도하고 효도하지 않음과 충성하고 충성하지 않음은 곧 그 사람의 사람답고 사람답지 못한 것이 어떤가를 돌아볼 뿐이다. 생각하노니 나의 자손들은 삼가하고 경계할진저.”
송흠은 혼인관 또한 확고하였다. 언제나 “혼인을 함에 있어서 재물과 벼슬을 고르는 일은 오랑캐가 할 짓이며, 사대부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경계했다. 그리하여 그의 자제들은 모두 가난하면서도 행실(行實)이 있는 집안의 자제들과 통혼을 하게 했다.
-<묘갈명>
-퇴임과 임종
송흠은 모친상이 끝난 다음 80세(중종33년, 1538)에 다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 정이품)로 특진되어 이조·병조판서에 연달아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수차에 걸쳐 상소하여 고령으로 물러날 것을 간청했다.
중종은 마지못해 이를 윤허했다가 3년 후(중종36년), 청렴하고 충성스런 송흠을 잊지 못하고 다시 그를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했다. 송흠은 궐내에 들어가 사은한 다음, 다시 고향에 머물 수 있게 해줄 것을 간청했다.
송흠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날, 조정의 많은 재상과 명사들이 한강(漢江)까지 나와, 청백리가 떠나는 길을 전송했다. 당시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관원은 임금의 윤허가 없으면 도성을 함부로 나올 수 없었으나, 이날은 정승들이 특별히 왕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던 것이다.
중종은 평생을 청백리로 가난하게 지내온 송흠에게 국록을 내리기 위해 고향에 있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품계를 올려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경연청의 정이품 벼슬)에 제수하는 특전을 내렸다.
송흠은 노년에 고향에 내려와 자연을 벗 삼으며 자적하였다. 명종 2년(1547)에 노환으로 작고하니, 그의 나이 89세였다. 송흠의 묘소는 관수정 바로 뒷산에 있다. 그는 영광의 수강사(壽岡祠)에 제향 되었다.
-외침 대비책
송흠은 말년에도 나라를 걱정하였으며, 86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전투용 함선인 ‘판옥선(板屋船)을 우리 수군(水軍)의 주력함으로 실전 배치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무기와 화약의 개량 등 ‘수군(水軍)의 개혁’을 제안하는 상소를 올렸다(중종 39년).
“...전함(戰艦)은 더욱 중요한데, 탈 만한 전함이 없다면 양장(良將)· 정졸(精卒)이 있어도 어떻게 적을 막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해안 여러 고을에 그 조잔(凋殘)· 풍성(豐盛)을 짐작하여 전함의 수를 나누어 정하여 감독해 만들게 하되, 배를 만들 때는 반드시 널빤지로 장벽을 만들어 모두 당인의 배와 같이 해야 합니다. 전함이 갖춰지고 나면, 군졸이 다 믿는 것이 있어 편안하게 여길 것입니다. 또 화포· 궁전(弓箭)· 창검(槍劍) 등의 물건도 해마다 단련하고 달마다 단련한다면, 적선(敵船)을 만나도 우리가 어찌 저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 ....
장수를 가리는 것이 첫째이고 군졸을 뽑는 것은 또 그다음인데 군졸을 뽑으려면 장수된 자가 마땅히 군사들이 몸이 씩씩한지 활을 잘 쏘는지를 보아 선택하여 서로 혼동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
우리나라의 변장은 적선(敵船) 하나를 만나도 낭패하여 감히 대항하지 못하니, 만일 왜적이 자기 나라의 배를 몽땅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침략해 온다면 또한 장차 어떻게 감당해 내겠습니까. ....”
그의 주장은 후에 실현되었다. 그의 상소 내용을 받아들여, 판옥선(板屋船)과 화포(火砲)의 개량 등이 이루어졌다. 그 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주력 전투함으로 이 판옥선과 개량된 화포가 사용됨으로써, 이순신 장군의 전승 신화가 만들어지는 기반이 되었다.
-관수정(觀水亭)과 기영정(耆英亭)
송흠이 81세(1539년) 때 장성군 삼계의 시냇가에 건립한 관수정(觀水亭)은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정자이다. ‘맑은 물을 보며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정자의 내부에는 당대 친우인 홍언필, 전안국, 성세창, 신광헌, 김인후, 임억령 등의 제영(題詠)이 다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전퇴인 골기와의 팔작지붕 건물로 겹처마를 돌렸다.
관수정에는 송흠의 원운(愿韻) 한시(漢詩)와 '관수정기' 등을 비롯 김안국, 소세양, 양팽손, 송순, 임억령, 김인후, 유사 등 당대 23명의 차운시를 새긴 27개 현판으로 가득 차 있다. 당대 남도의 대표 인물들이 관수정에 모두 모여들었음을 알 수 있다.
관수정 옆을 흐르는 용암천 바로 건너편에는 또하나의 정자인 ‘기영정(耆英亭)’이 있다. 기영정은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宋麟壽, 1487-1547)가 1543년, 송흠이 85세에 임금의 명을 받아 지은 것이다. 기영정이란 ‘나이 많고 덕 높은 노인 중에 가장 빼어난 사람을 기리는 정자’라는 의미이다.
중종은 낙향한 송흠을 위해,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에게 특명을 내린다. '송흠을 위해 정자를 지어주고 큰 잔치를 베풀라'는 것. 그래서 지어진 정자가 바로 '기영정(耆英亭)'이다.
과연 정자 건립 후, 1544년(송흠의 나이 86세) 기영정에서 나주목사 조희가 주관하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와 나주, 영광, 장성, 진원 등 주변 10개 고을의 수령, 지역 선비, 주민 등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모였다.
정자 바로 뒤에는 중종이 직접 지은 '어제기영정기(御製耆英亭記)'를 새긴 비가 군신 간의 아름다운 정을 기리고 있다.
-명주 호산춘(壺山春)의 개발
전통명주 ‘호산춘’은 예로부터 유명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인데, 송흠이 중종 10년(1515) 여산(지금의 익산, 옛 명칭은 호산壺山) 부사로 부임했을 때 빚어 전승시켰다고 한다(보통 춘春이 들어간 술은 맛있기로 유명하다). 『연려실기술』에는 “송흠이 여산군수가 되었을 때, 고을이 큰길 옆이어서 찾는 손님들은 많은데 대접할 것이 없어서,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호산춘’이라 했다.”고 전한다.
송흠(宋欽)의 시문집 <지지당유고(知止堂遺稿)>에는 호산춘(壺山春)의 주조법이 수록되어 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도 이를 확인하는 기록이 나온다.
송흠이 여산군수로 있을 당시, 여산은 서울로 올라가는 관원이나 지방으로 새로 부임해 가는 관원은 물론, 일반인의 왕래가 많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 때문에 공사 간에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서 대접하기에 힘겨울 뿐 아니라, 또 대접할 만한 마땅한 특산물도 없었다. 물론 공용에 드는 경비는 마땅히 백성들에게서 거두면 되는 것이지만, 백성을 아끼던 송흠으로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그 지방의 좋은 물을 이용해, 특별한 방법으로 호산춘(壺山春)이라는 술을 빚어 공무로 찾는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이 술은 큰 호평을 받았으며, 경비도 크게 줄이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최부와의 일화
송흠이 ‘삼마태수’로 거듭난 계기가 된, 아름다운 의리 이야기가 『지지당유고』에 나온다.
당시 송흠은 정자(正子, 정9품)로 홍문관에 있었고, 같은 곳에 나주 출신의 응교(應敎, 정4품)인 금남(錦南) 최부(崔溥,1454~1504)라는 사람이 있었다. 최부(崔溥)는 송흠의 5년 선배였는데, 과거는 10년이나 빨리 합격해서 벼슬이 훨씬더 높았다. 최부는 탁월한 식견과 매서운 언론으로 훈구파의 안일과 연산군의 방종에 맞서던 인물이었다. 마침 이들은 같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는데, 두 집의 거리가 15리에 불과했다.
하루는 송흠이 최부의 집에 찾아가 대화 중에, 최부가 말하기를 “자네는 어떤 말을 타고 왔는가.” 물었다. 송흠은 ‘역마’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최부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역마를 준 것은 그대 집까지인데, 어찌 여기까지 역마를 타고 왔단 말인가? 사행(私行)에 공용의 역마를 타다니!” 하며 질책했다. 그 말에 송흠은 부끄러워서, 귀가할 때는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갔다.
강직한 최부는 조정에 돌아온 즉시 그 사실을 알려, 송흠을 파직시켰다. 송흠이 최부에게 찾아와 사직 인사를 하니, “자네는 아직 젊네. 앞으로도 마땅히 조심해야 할 것이네.” 하였다.
그 후로도 송흠은 그를 원망하지 않고 스승으로 모셨으며,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무오사화에 관련되었던 최부는 다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는데, 그때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송흠이었다. 그가 ‘여한이 없는가’ 물으니, 최부는 부모 산소에 아직 석물(石物)을 세우지 못했고, 시집보내지 못한 막내딸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였다.
최부가 죽은 후에도 송흠은 과연 그를 잊지 않았다. 훗날 송흠은 전라감사로 부임하자, 최부의 조상 묘소에 비석 등 석물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그의 막내딸을 영광군수 김자수(金自修)의 아들과 잘 정혼시켜 주었다고 한다.
글; 무 애 (한국선도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