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베리아
위치: 아프리카 서부
인구: 5,361,393명 (2023년 추계)
수도: 몬로비아
면적: 111,369.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라이베리아 공화국 (Republic of Liberia)
기후: 열대몬순성기후
민족 구성: 크루족, 밧사족, 크펠레족
언어: 영어
정부/의회형태: 과도정권
종교: 그리스도교(66%), 토착종교(20%), 이슬람교(14%)
화폐: 라이베리아 달러 (L$)
국화: 후추나무
대륙: 아프리카
국가번호: 231
GDP: USD 2,158,000,000 (2017)
인구밀도: 44명/㎢
전압: 100V / 50Hz, 120V / 60Hz
도메인: .lr
라이베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서아프리카의 공화국. 북서쪽은 시에라리온, 북쪽은 기니, 동쪽은 코트디부아르, 남서 해안은 대서양과 접해 있다. 건국과 가장 관계가 깊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흑인 자유민들로, 19세기에 이주해왔다. 라이베리아 경제는 개발도상의 시장경제로 농업 및 철광석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편 1980년대초의 연료비 상승과 내전 및 기타 문제들로 인해 특히 철광산업 부분의 경제성장이 꾸준히 감소추세에 있다. 보건 및 주택환경은 보다 나은 보건시설 마련에 힘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비한 상태이며, 생활수준 역시 낮아 임금이 서구에 비해 크게 낮은 실정이다.
자연환경
대서양을 따라 560km 가량 뻗어 있는 라이베리아 해안지대는 석호와 홍수림(紅樹林)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낮은 모래지대이다. 한편 내륙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복이 완만한 낮은 구릉들이 띠 모양을 이루며 해안선과 나란히 늘어서 있는데, 울창한 열대우림이 이곳을 덮고 있다.
내륙 깊숙이 들어가면 여기저기에 나지막한 산(해발 180~600m)이 있는 개석된 고원지대가 나타나며, 숲은 울창하지 않다. 기니 국경 가까이에 있는 님바 산은 라이베리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게스트하우스힐(Guest House Hill)에 해발 1,850m의 봉우리가 있다. 주요하천은 남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들어가며, 코트디부아르와 국경을 이루는 카발라 강은 부분적으로 항행이 가능하다.
기후는 연중 온화하며, 우기(5~10월)와 건기(11~4월)가 뚜렷하다. 사헬 지대의 삼림벌채와 가뭄 등으로 건기가 긴 지역도 있다. 연평균 기온은 북부 고지대가 18℃, 해안지대는 27℃ 정도이며, 연강우량은 해안지대가 5,100㎜이지만 내륙으로 갈수록 적어져 내륙 오지는 1,800㎜이다. 국토의 약 40%가 열대 우림지대로, 이곳에는 쇠나무·캠우드·위스모·마호가니 등 여러 종류의 재목이 자란다. 또한 원숭이·침팬지·영양·뱀·악어 등과 같은 야생동물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코끼리·들소·표범도 살지만 멸종위기에 놓여 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은 국토의 약 4%에 해당하며, 철광석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국민
라이베리아의 인구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후반까지 증가하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감소 추세를 보였다. 이후 1998년 인구 증가율 7.8%를 기록하며 급격히 증가했고, 2000년대 이후로도 증가 추세를 유지해오고 있다. 2023년 기준 인구는 536만 1,393명이며 인구밀도는 53명/㎢이다. 총 인구 대비 도시거주자와 농촌거주자는 각각 절반씩이며, 15세 이하 인구의 비율은 42%를 차지하고 있다.
라이베리아 건국과 가장 관계가 깊은 사람들은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흑인 자유민들로, 이들은 역사적으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Americo-Liberian)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대부분 1820~65년에 라이베리아로 이주해왔다.
지금도 때때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흑인들이 이주해오고 있지만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은 전체 국민의 소수에 불과하다. 라이베리아 토착 아프리카인들은 언어학상 만데족·크와족·멜족(서대서양) 등의 3부족으로 나뉘며, 크펠레족·토마족·마노족으로 이루어진 만데족은 라이베리아 북부·북서부·중부뿐만 아니라 다른 이웃나라에서도 살고 있다. 해안지방의 바사족·데족·그레보족·크루족과 내륙 및 남부에 살고 있는 크란족·사포족 등의 종족들은 모두 크와족에 속한다. 멜족은 북부지방에 사는 골라족, 키시족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어
영어가 공용어로서(1986년 헌법) 실제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영어의 변종을 라이베리아 영어라고 한다. 그 외에 31개에 달하는 여러 부족 언어도 쓰이지만 부족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많지 않다. 영어 외에 20여 종의 소수 민족 언어가 사용되고 있다.
사회와 문화
1939년 이래 7~16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각각 3년으로 되어 있으나 해당 학령 어린이의 절반 정도만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라이베리아대학교(1862년 단과대학으로 설립, 195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가 몬로비아에 있다.
보건 및 주택환경은 보다 나은 보건시설 마련에 힘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비한 상태이며, 생활수준 역시 낮아 임금이 서구에 비해 크게 낮은 실정이다. 해안지대와 농촌 사이에 경제 및 사회적 격차가 뚜렷한데, 이것은 현금 본위의 경제가 최근에야 내륙으로 전파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으로 원래 미국식민협회(American Colonization Society:1816 설립)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해방노예들을 위한 근거지로 세워진 곳이다. 이 단체는 1821~22년 메수라도 곶에 작은 식민지를 세웠으며, 1822년말 감리교 목사 제후디 아시문이 이 식민지의 지도자이자 실질적인 라이베리아의 창설자가 되었다.
1824년 이 식민지를 라이베리아라고 이름지었으며 중심 거주지를 몬로비아라 불렀다. 라이베리아 최초의 흑인 총독 조지프 젱킨스 로버츠는 1847년 라이베리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국경을 확장했으며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법 노예거래를 근절시키기 위해 힘썼다(→ 노예제). 프랑스, 영국과의 국경분쟁은 1892년 라이베리아 국경을 명시한 마지막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프랑스는 계속 국경을 넘어 침입해 들어왔으며, 1919년 라이베리아가 통치할 수 없는 오지 5,180㎢를 프랑스에 넘겨주는 조약을 맺었다.
라이베리아의 경제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속 악화상태에 놓여 있다. 차관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라이베리아는 1926년 파이어스톤타이어고무회사(Firestone Tire and Rubber Company)에 40만㏊를 양도하고 외채를 갚기 위해 500만 달러를 빌렸다. 이 차관으로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라이베리아는 강제노동 및 노예매매에 관계했다는 혐의를 받아 국제연맹의 조사(1931)를 받기도 했다. 경제는 집권정부가 물러나고 파이어스톤사(社)와 새로운 협정안이 체결되면서 회복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라이베리아 고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미국은 이 나라와 방위조약을 맺어 몬로비아에 도로, 국제공항, 심해항구를 건설해주었다.
1944∼71년 라이베리아의 대통령은 윌리엄 V.S. 터브먼이었는데 1980년 쿠데타로 그 후계자가 축출되면서 1세기 이상 계속되었던 트루휘그당(黨) 통치가 막을 내렸고, 동시에 내륙에 사는 토착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아메리카라이베리아인들의 오랜 정치적 지배도 끝났다. 경제악화가 쿠데타를 일으킨 한 원인이었으나 이 쿠데타를 승리로 이끈 인민구제평의회(People's Redemption Council)도 그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1985년에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에서 1980년 쿠데타를 이끌었던 라이베리아 전군 사령관 새뮤얼 K. 도우 장군(쿠데타 전에는 특무상사)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6년 취임했다. 1989년 도우 대통령의 이전 동지들이 일으킨 반란이 1990년 내란으로 발전해 라이베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그 와중에서 도우가 암살되었으며, 첨예한 민족적·정치적 대결이 벌어졌다. 서아프리카의 다국적 군대인,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ECOWAS) 소속의 감시단이 파견되어 치안유지에 나섰으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집단간의 대립으로 혼란은 계속되었다.
1990년대 중반을 거치는 동안 여러 과도정부가 세워졌다. 내전은 1996년 8월의 휴전협정을 거쳐 1997년 대통령선거와 총선에서 찰스 테일러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마침내 종식되었다.
종교
2008년 기준으로 종교는 기독교가 85.6%, 이슬람교는 12.2% 정도로 파악된다.[9]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나 여러 사회 제도가 기독교 중심으로 운용된다. 초기 미국 출신 이주자들과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자의 대부분은 개신교이나, 로마 가톨릭교도도 상당수 존재한다. 라이베리아에서 믿어지는 개신교 신앙은 애니미즘과 같은 아프리카 토착 종교의 영향도 강하게 받은 모습을 보인다. 국민의 2/3가 그리스도교도, 1/7이 이슬람교도이며, 1/5 가량이 전통 신앙을 따른다.
라이베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라이베리아와 한국은 1964년 3월에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한국은 1973년 7월에 라이베리아에 상주공관을 개설했다가, 라이베리아에 내전이 발생하여 1992년 3월에 대사관을 폐쇄하고 주 나이지리아 대사가 공관을 겸하고 있다. 라이베리아는 1983년에 주한 라이베리아 대사관을 설치했다가 1991년 9월에 폐쇄했으며 주 일본대사가 한국 대사를 겸임하고 있다. 한편 라이베리아는 1973년 12월에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1987년 11월에 발생한 'KAL기 폭파사건' 이후 단교하여 모든 인적·물적 교류를 금지시켰다.
한편, 1982년 5월에 도우 라이베리아 국가원수가 방한하여 양국의 친교관계를 더욱 돈독히 했으며, 각종 국제회의에서도 한국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는 우방으로 자리를 굳혔다. 이후 라이베리아에서는 1988년 2월에 힐(Hill) 하원의장 및 존슨(Johnson) 외무장관이 방한했으며, 2013년 5월에는 보아카이(Boakaj) 부통령이 방한하여 한국의 대통령을 면담했다. 한국에서는 1986년 8월에 이원경 외무장관, 1988년 8월에 의원친선협회 사절단이 방문하여 우호관계를 다졌고, 이후에도 장관급 고위 인사가 방문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라이베리아는 그들의 경제·사회개발사업에 한국이 동참해주기를 희망하여, 1984년에는 한국 건설업체가 국제규모의 도로건설공사를 수주한 바 있다. 기술협력분야에서는 1982년의 경제기술협력협정 체결이후 주로 농업부문의 기술을 전수해 왔다. 이 밖에도 라이베리아에 의료단을 파견하고 물자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실질적인 경제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20년 기준 라이베리아의 대한국 수출액은 200만 달러, 수입액은 15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유연탄·선박·알루미늄 등이며, 주요 수입품은 선박·자동차 등이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의료협정(1970년 7월), 항공협정(1978년 9월), 무역협정 및 문화협정(1981년 5월), 경제기술협정 및 사증(비자)면제협정(1982년 9월) 등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2019년 기준 라이베리아에는 41명의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446명의 라이베리아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문화교류도 활발하여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예술단을 파견하고 초청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