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최규하 대통령
황장진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박사께서는 1919년 7월 16일 원주시 평원동에서 아버지 최양오 공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치악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
박사께서는 원주시 봉산로 134, 원주역사박물관 옆 전통가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6년 원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 1970년 한국외국어대학 명예 문학박사, 85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석께선 1946년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직에 첫발을 디뎠다.
공직을 농업관리로 출발하였으나 1951년에는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발탁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외무부 차관 시절에는 메모지로 달력을 잘라서 만들어 썼다. 거기에 빽빽이 매일의 일정을 적었다. 볼펜은 1968년 미국의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한미회담에서 쓰던 것을 가져와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맷돌과 돌절구도 썼다고 한다.
외교부 국장으로 인도를 찾았을 때 일이다.
비행기 사정이 좋지 않아 국장께서는 그냥 2~3일을 호텔에서 지낼 판이였다. 한인회장 등이 “그래도 타지마할은 꼭 보고 가십시오. 자동차는 우리가 준비했습니다.”고 권했다. 그러자 수행외교관은 “그렇게 하시죠”라고 했는데, 최 국장은 “난 여기 공무로 왔소, 세금으로 출장 나온 내가 어떻게 관광하겠소. 대신 인도 신문을 좀 구해주시오”라고 말하고는 끝내 호텔에만 머물다 왔다.
외무부장관 시절, 큰아들이 말레이시아에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옥스퍼드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서 유학을 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아들에게 “한국의 젊은이라면 군대에 갔다 와야 한다.”며 불러들여 군에 입대시켰다. 공직 생활 중 문중 사람들은 주변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누이의 총리 전담 의사에 대한 진료 청탁도 봉투를 주어 돌려보냈다.
1959년엔 주 일본대표부 공사로서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 제11, 12, 13차 총회와 제4차 한일회담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구현할 수 있는 외교기반을 마련하였다. 1967~1971년 외무부 장관 시절에는 주, 말레이시아 대사시절부터 준비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 각료회의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다.
1973년 외교 특별보좌관 시절에는 석유파동으로 온 세계가 힘들 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을 직접 설득하여 안정적으로 원유를 확보하였다.
1975년 12월 총리 취임 이후 주말에도 현장을 살피며 행동하는 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늘 “부인 조심, 비서 조심, 자녀 조심”이라는 말로 공직자의 부패를 경계하였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12월에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국가 위난 상황 속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0.26.사태가 가져온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재빨리 극복하면서 국민 대다수의 찬동을 받는 민주헌법을 만들었다. 이에 의한 새로운 정부의 수립과 이양,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여 공고한 한·미 군사 유대로 한반도 안전 보장에 힘썼다. 제2차 세계석유파동의 어려움 속에서 원유자원확보로 효율적인 국가 경제운영 등의 국정 목표를 추구하였다. 한 예로 대통령은 당시 경제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던 중동지역 국가들과 우호를 증진하고자 순방길에 나서기도 했다.
대통령 권한대행 때 했던 긴급조치를 풀고 점진적 정치의 활성화에 힘썼다.
한·미 사이 군사 외교 당국 간의 긴밀한 협조로 이루어졌던 북한에 대한 강력한 몇 차례의 경고와 중동과의 석유 외교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변화와 개혁을 차분히 추구해 나갔다.
8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에 영어의 달인 ‘선비 대통령’로써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공명정대한 국정 운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주치의도 두지 않은 대통령이었다.
“우리 국민은 하나를 알려드리면 열을 이해하는 뛰어난 분들”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외무부장관에서 총리를 거쳐오는 동안에도 가정부를 둔 적이 없었다. 아침저녁 식탁은 시래기 토장국에 김치와 산채 몇 가지가 전부였다.
광부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평생을 연탄을 때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연탄을 집게로 날라 연탄보일러로 방을 덥힌 일도 있었다. 선풍기는 딸이 태어날 때 사들인 것으로 수십 년 동안을 사용하였다. 에어컨도 장남이 미국서 쓰던 것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었다.
대통령은 ‘남이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는 것을 본 뒤라야 건너는 사람’이었다고 평을 했다. 외교관이면서도 골프를 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식단도 역대 대통령 중 아주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재직 시절 음식도 국수, 콩자반, 냉면, 나물 등이었으며 술도 즐기지 않았다. 그나마 술을 마실 때는 과일주와 나물에 생선구이나 전골 등을 들었다고 한다.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최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참으로 아쉽다.
1980년 대통령직을 사임한 다음, 1981년에는 국정자문회의 의장이 되었다.
평생을 올곧고 청빈하게 지내다가 2006년 10월 22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10월 26일 국민장의 예로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에 안장되었다.
1994년, 원주의 생가터를 현석께서 원주시에 기부하였다.
원주시는 이 터에 현석께서 유소년 시절을 보낸 생가를 되살렸다. 태를 묻은 고향 원주를 잊지 못하던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
강원도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대한민국의 청렴한 공직자상을 보여준 대통령이었다.
원주시민들,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바람직한 공직자상이다.
강원도민들, 모두가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
* 이 내용은 (재)최규하대통령기념사업회에서 펴낸 책자에서 뽑아 다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