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모진 세월도 지루하지 않는지 도깨비 풀은 씨앗들을 허공에 움켜쥐고 있다. 안개에 덮힌 길을 여유롭게 굽어보며 가끔씩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바람과 풀, 나무와 새들 모두 고개 돌리고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도깨비 풀도 일렬횡대 전투태세 준비를 한다. 끈질긴 기다림 끝에 행인과 하루종일 싸우다 보면 작살처럼 작열하던 태양도 서서히 빛을 잃고 어둠을 맞이하고야 만다.
물안개 가득한 강가
긴 꽃술을 내민 풀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손을 잡습니다
꽃술과 꽃술이 손을 잡은 아침 강 가, 물안개 뿌옇게 꽃술을 덮고 울
먹이는 물살에 안개를 피웁니다
마치 희망을 피워 올리듯 물 안개 가득한 강가,
바위 외롭게 솟아나 섬처럼 나를 부르고
나 또한 저 편 강가에서 그대를 부릅니다
안개가 휘장처럼 가리워져
내 목소리 강가에 닿지 못하고 메아리로 되돌아 옵니다
치마폭같은 산자락은 애처로운듯 산꽃 붉게 적시고 하염없이 흔들립니다
방금 돌아온 산새 집 나간 아이처럼 밤새도록 꾸르륵 거립니다
내유년의 뻐꾸기 소리
몇해만에 와도 고향은 그대로다
비바람과 눈발에 채여 세월을 이겨낸 숲 한 쪽에선 뻐꾸기가 운다
내 마음은 자꾸 유년의 길목으로 빠져드는데
나뭇단 한짐 지고 저산을 넘던 추억에 가슴 저리다
뻐꾸기 소리도 아직도 귓속에 쟁쟁하다
그래서 어둠도 찾아오지 않는 걸까
하늘 중편에 걸린 낮달이 얼음처럼 차고 시리다
산중턱의 바위도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 바위에 올라 흘러가는 구름 따라가면 어딜까
곰곰히 생각하다 예라 모르겠다, 이곳이 내집이고 내 고향이다
풀썩 드러누워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무엇인가 귀 간질이는 소리 있어 조용히 들어보니
아, 그건 영락없는 뻐꾸기 소리다
연평도의 눈물 1
평화롭던 연평도에 포연 다발로 피어올랐다
수백발의 포성이 해안선을 뒤흔들고
따스한 집들이 화염에 휩싸여 타오를 때
개미들처럼 오종종 섬을 떠나는 행렬이 있었다
백주대낮의 날벼락에
가진 것 모두 버리고 혈혈단신 뭍으로 올라왔다
포성과 포연이 휩쓸고 간 연평도,
눈시울에 젖어 흐느낄 때
땅굴 숭숭한 개머리 해안포엔
미친개의 눈빛 같은 그늘만 서늘히 내려깔렸다
툭흐면 반도에 불벼락 내린다고
신들린 듯 거품 물고 저주 퍼붓더니
급기야 연평도의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유전처럼 내려왔던 세습의 광란이
가공할 공포를 몰고 왔던가
깡마른 몸 곧 쓰러질듯 초최하지만
반도에 대한 집념 유전처럼 질겨서
아예 섬 하나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찌할꺼나, 저 연평도,
이글거리는 저들의 눈동자만 봐도
포탄 날아왔던 개머리 해안포만 봐도
두려워 오금저리는 사람들,
섬 하나 텅 비어 유령의 울음소리 들끓어도
고향을 떠겠다며 눈물 쏟는 사람들,
이미 포성은 멎은 지 오래지만
찬바람에 깃발 찢어지는 꽃게잡이 배와
포탄에 박살난 흉흉한 집들만
파도소리 껴 앉고 무서움 살살 달래고 있다
누런 달이 조등처럼 걸린 산골
어느땐가 홀홀단신으로
깊은 산에 살고 싶은 때가 있었다
라디오도 소용없고, 컴퓨터도 쓸모없는
더구나 한 물간 삐삐도, 휴대폰도
이곳에선 속수무책인 그런 깊은 산 속에서 살고 싶은 때가 있었다
차라리 바람에 실려오는 꽃향기도 날려버리고
부모님의 소식을 알려주는 까치도 날아오지 말고
집나간 누이 그렁그렁 눈물 맺히는 슬픈 편지도 오지 말고
어머니의 생사만 꿈속에서 오락가락하여
누런 달이 조등처럼 걸린 깊은 산골
어느땐가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로 귀를 씻고
마음 속 먼 길에 조용히 귀를 대어 본다
먼 산방에서 들려오는 소리 지나가는 바람 밖에 없다
깊은 산 계곡의 밤은 겨울처럼 차고 시리다
성탄절 아침
성탄절 아침에도 눈발은 흩날리지 않는다
하느님은 이제 이 땅에 축복의 기회를 뺏은 것인가
예수님이 허공에 양팔을 벌리고 있어도
함박눈은 흩날리지 않고
주름진 옷 속으로 뼛속시린 냉기만 스며든다
강아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뛰어논다
강아지들만 좋아 저들끼리 성탄절을 즐기고 있다
크리스챤은 많아도 이 땅 구석구석 �는 냄새가 나
하느님이 아예 은총을 내리지 않는걸까
성탄절이 뭔지도 모르는 강아지들만
개구장이마냥 좋아
양팔벌린 예수상을 보며 뭐라 짖어대고 있다
꽃뱀에게
먼 산으로
햇살 한 점 물고 가나이다
문지기처럼 또아리 또르륵 틀고 앉은 꽃뱀에게
환한 꽃소식 전해주러 가나이다
가도가도 솟구친 수풀과 수풀사이
반질반질한 외길로
그리움처럼 타오르는 찔레꽃 덤불
이를 악물고 참던 꽃망울들
들볶이던 햇살에 비로소 함박웃음을 짓나이다
먼길, 땅끝
먼길, 땅끝까지 울어대는 휴대폰 가락에
풀들도 잠시 마음을 열까
누군가 보지않아도 홀로 잎을 튀우고
누군가 보지 않아도 스스로 꽃망울을 만들며
풀들은 묵묵히 휴대폰 가락을 듣고 있었다
안개깔린 조용한 산언덕아래
풀 한포기 꺾어 향기를 맡으며
살짝살짝 휴대폰 번호를 누르고 싶다
저녁노을
나무는 열매를 맺기위해 온 정열을 불태운다
꽃을 피우기 위해 저렇게 꼿꼿이 서 있는게 아니다
꽃은 다만 열매를 위한 희생일뿐,
꽃이 아름다운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열매를 위한 것이다
열매가 저리 달콤한 건 꽃이 내어준 사랑 때문이다
한 알의 열매를 맺기위해
나무는 저녁 노을에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오직 침묵으로 차디찬 바람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기적소리
열차가 기적소리 울리며 떠난 자리에
진달래꽃 뜨겁게 피어납니다
삼 등 칸에 탄 서민들의 애환입니다
천둥소리
살아서도 무섭게 총질하던 사냥꾼이
죽어서도 구름산을 뛰어넘는 모양이다
눈감으며
고운 꽃사슴을 상상하더니
아마 꽃사슴 향해 총질하는 걸게다
젖은 눈 훔치며
이별을 기도하는 여인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보며
꿈인 듯 생시인 듯 목울대 울컥이더니
봄밤
저수지가 몇 발짝 앞인데도 앞이 흐릿하게 보인다
들풀이 피워무는 안개 다소곳이 차오르고
그 속에 노랑 물들인 꽃들이 저리도 곱다
안개에 가린 길이 얼핏 사라진다
그 안개 풀어지기까지 햇살은 아직도 먹장구름 속에 머물러 있다
푸른 멍이 든 들꽃의 이파리들 감격해서 떨고
개구리들이 알을 낳는지 벼포기들 살짝 흔들리고 있다
조금 있으면 봄밤이다
여태울지 못한 날들을 개구리들은 내내 울 것이다
귀청을 때리는 저 소리들, 마음은 벌써 개구리들을 부르고 있다
안개로 뒤덮혔던 어둠이 개구리알처럼 얇게 풀어진다
낙화
듬성듬성 붙어있는 꽃봉오리들이
슬픔처럼 뚝뚝 떨어지는 것은 늦가을 바람 탓이리라
늦가을 바람이 주는 교훈을 바람은 잘 기억하리라
빨리 꽃봉오리 털고 열매맺어야
헐벗은 사람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맨 땅에 떨어진 꽃봉오리들,
슬픔처럼 메말라가는 것에 가슴 저리다
살아생전 티끌 하나 없이 맑은 꽃잎들이
죽어서는 거뭇한 저승꽃으로 덮히는 것은
인간과 하등 다름 없으랴
나는 안다
그 꽃들이 왜 일찌기 낙화를 하는지를,
나는 이 사실을 아는데 마흔해의 긴 세월이 흘렀다
방금 또 하나의 꽃봉오리가 눈물 흘리며 맨 땅에 떨어진다
하늘도 진하게 울었는지 서편 쪽 얼굴이 유난히 붉다
안화리 연가 1
마을입구 표시판도 없는 저기 저 곳이 안화리란다
사시사철 시멘트 도로로만 통하는 안화리,
몇 채 안되는 가난한 집의 지붕까지 색색의 폐인트로 칠해져
이제 그 옛날의 순한 맛을 �을 수 없었다
마을 뒷 편 참나무 골짝으로 풀어져 내려오던 황토길도
이제는 억새꽃, 갈대꽃, 자운영으로 뒤덮혀 막막히 산길을 끊었다
산길을 밟으며 제사 지내로 오던 흰 두루마기 아버지와
철없는 강아지처럼 그 뒤를 쫑쫑 따르던 내 옛날의 추억은
시멘트로 덮힌 마을 골목길처럼 문명에 묻혀 버렸다
이제 내 유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들국화를 꺾어들고 논두렁을 달리던 재잘거림도
산꽃 한 다발을 움켜쥐고 산 길을 타던 떼거리 웃음도
어디에서 찾을 수 없었다
마을은 그냥 그렇게 버드나무 휘영청 늘어진 나뭇가지로
다시 싹돋을 새순을 기다리며
살랑이는 저수지 물살에 깊은 상념을 드리우고 있었다
낙화
연한가지에 아스라히 매달려있는 꽃송이들도
오랜세월 그 향기에 취하지는 못한다
찬비오고 바람불면 떨어질 것들,
맨 땅은 그 꽃잎을 받을 즐거움으로 분주하다
벌들이 와서 붕붕거리면 무엇하랴
그것은 벌들이 내지르는 통곡소리,
곧 꽃이 질 듯 나뭇가지 몇 개가 허공에서 술렁인다
안개가 몰려와 그 꽃송이들을 촉촉히 적시면
꽃나무는 설움에 겨운 듯 붉은 눈물을 철철 흘린다
오늘 아침 말끔히 쓸어놓은 마당가 한 쪽이
시든 꽃잎으로 얼룩져 있다
별
텅 빈 강가에 서 보아도
빈 나룻배는 오지 않습니다
날은 저물어 꽃은 빛깔을 숨기고
반짝이는 별들만 흐르는 물살에 젖습니다
님 그리워 내지르는 메아리는
아련한 강물끝 강가에 닿지 못하고
싸락눈만 몰고 오는 비명소리로 가득합니다
손꼽아 세어도 셀 수 없는 모래알들
그것들이 하늘의 별이라면
지금쯤 내 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남몰래 흐르는 눈물 숨기시고
허름한 치마폭에 찢어지는 가난 숨기시고
그렇게 쓰러져가는 말목처럼 서서
하늘의 별이 되신 어머니
꽃잎하나로도 우주의 깊이를 안다
꽃잎 하나로도 우주의 깊이를 안다
똑같은 형체의 꽃잎들이 서로 크기를 맞추고
색색의 색깔을 칠해 강강술래하듯 둥근 톱날을 세우고 있다
꽃잎 하나 이빠진 자리, 바람이 불어오면 불꽃처럼 일렁이는
수술들이 뜨겁게 암술을 둘러싸고 있다
벌과 수술이 서로 입을 맞춰야 달콤한 과육을 맺는 꽃잎들,
그 꽃잎 하나 어느 것도 내 버릴것이 없다
밤나무 숲의 밤새 하나
풀들이 아무리 꽃술을 늘려본들 저편 강가에 닿겠습니까
모래알만 수북하고 찬 물살만 사운대는 저녁 나절,
저편 강가 너무 멀어 내 지르는 손나팔 소리 어디 닿겠습니까
꽃술은 늘어져 가녀린 물살에 닿아 하늘거리고
물살은 그대 마음에 젖어 심한 폭풍을 일으킵니다
그대여, 강가에 서서 망부석이 되시려오
목놓아 불러도 메아리만 되돌아오는 저 편 강가,
밤나무 숲에 숨은 밤새 가슴 아프게 울어댑니다
나목의 꿈
말쑥하게 옷을 벗은 겨울나무를 보아도 겨울이 꽤 깊었음을 안다
푸른 옷 몇 장 걸치지 않는 그 모습으로도
깊어가는 겨울이 춥지도 않느냐
나무야, 사랑하는 겨울나무야
양털같은 눈옷을 걸치고 꽁꽁 얼어붙은 추위속에서 봄꿈을 꾸어 보렴
이제라도 겨울나무 아래 그 깊숙한 땅 속 펌프를 돌려야 겠다
파랗게 살얼음 낀 물관속으로 따스한 물이 흐르면
내년 봄날 다시 연분홍 꽃물 살포시 번져가겠네
그러면 저물어가는 저녁 해도
얼어붙은 겨울나무를 따스한 햇살로 온 몸 감싸 않겠네
폭설
폭설이 가슴까지 쌓인다 한들 내 마음까지 덮겠습니까
깊은 계곡 어디선가 소나무의 곁가지 부러지고
내 부러진 척추만큼 아파도 소나무는 그냥 깊은 눈발에 묻힙니다
산은 깊을수록 눈바람 소리 더 거세지고
눈발에 부딪히는 산의 비명소리 더 처절합니다
깊은밤이면 어스렁거리던 짐승들은 다 어디로 가고
산은 그냥 산 그림자로 우뚝 서서 내 눈앞을 막습니다
폭설은 그만 내리면 싶은데 하늘은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놈의 세상이 큰 죄를 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