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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산상수훈, 천국 시민의 새로운 법
구속사적 개관
제 5-7장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소위 산상수훈(山上垂訓)이다. 산상수훈에는 여러 가지 내용의 교훈이 있으나 그것은 모두 다 이제 성육신하여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죄인을 위한 구속 사역의 성취에 대한 구약(舊約)의 약속들과 예언을 일단 성취하시고 새로이 인간 구속과 구원의 최종 실현인 천국 구원을 다시 재림하여 개시하실 것에 대한 새 약속 곧 신약(新約)을 주신 예수께서 이제 이런 당신의 초림으로 개시된 신약 시대에 천국 구원의 계시를 새로 받은 자들이 행해야할 새 시대의 새 기준으로 예수께서 직접 입법(立法)하신 새 법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는 다음처럼 보다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태초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언약을 범하여서 본래는 그 언약의 내용대로 이제 영원히 죽어야할 인간에게 새로이 다른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예수가 일단 인간이 범한 죄의 대가인 죽음을 대신 당하여 죄 값을 치르는 대신 그 죄를 범한 인간 자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또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내용의 약속을 주셨다. 그리고 이 옛 약속 곧 구약을 중심으로 구약 시대가 진행되게 하셨다. 그런데 이제 예수는 그 옛날의 약속의 말씀대로 세상에 오신 후에 구속사역을 일단 성취하셨다. 그리고 나서, 즉 일단 옛 언약을 성취하시고 나서 예수는 새로이 훗날 다시 와서 즉 재림하여 당신께 회개하고 나아온 교회를 위하여 당신의 구속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을 개시하시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새 언약을 주셨다.
그리고 자신의 초림 (初臨) 이후부터 재림(再臨) 때까지는 곧 신약 시대에는 구약을 계승 발전시킨 신약을 중심으로 구속사가 새로이 그리고 보다 확대되어 전개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우리 주 예수의 초림 및 구속사역의 완수로 일단 죄악의 구속의 근거가 성취되었다. 따라서 이제는 예수의 구속사역을 예표 ․ 예언했던 동물 희생제사 제도 및 각종 율법을 통하여 신약을 예표하는 것에 그치는 제한성을 가진 구약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하는 소수의 구약 선민이 제한적 선민의 지위를 누리던, 즉 예수의 구속사역과의 예표적 관련성 하에서만 선민의 지위와 신분을 누리던 구약시대와는 달리 성도 곧 영적 선민이요 참 선민인 모든 이방 족속 출신의 성도들이 천국(天國)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죄인의 신분을 벗고 하나님 안에서 축복을 누리는 나라가 실제로 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국이 이미 이 땅에 현재 임한 것은 분명하지만 세상 종말 이후 개시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천국에 비할 때에는 현재의 천국은 그 육적 실현은 유보되었고 또 영적으로도 온전한 실현이 이루어진 것이 못되는 제한성이 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상, 천국 구원은 물론 지옥 심판까지 동시에 유보(留保) 하시고 택한 자가 모두 다 회개하기까지 구속사의 전개를 계속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현재 임한 천국은 영육 간에 온전한 것이 아니라 그 육적 실현은 현 세상의 종말 이후에 비로소 개시될 것으로서 영적으로만 임했으나 그 영적 실현도 현 세상에서는 제한적인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신약시대의 상황을 두고 천국은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already, not yet)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표현한다.
이에 이처럼 당신의 초림으로 새로운 신약시대를 열으신 예수님께서는 부분적 구약 계시가 전체적 신약 계시로 발전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그 온전한 성취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즉 새 시대를 맞은 성도들에게 그 옛날 모세를 통해 주어졌던 구약의 율법과 그 관련 말씀을 능가하는 새로운 법을 제 2위 성자이신 당신께서 직접 세우사 당신의 재림 때까지 지킬 성도의 새로운 삶의 규범(規範)이 되게 하시고자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주셨던 것이다.
또한 깊이 묵상할 때 실로 예수께서 주신 산상수훈의 법은 우리에게 마땅한 삶의 원리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인 동시에 이런 법을 주신 것은 이를 지키게 하여 그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천국 시민의 완전한 삶의 모습을 제시하여, 사실 성도가 스스로의 인격과 힘으로는 이를 지킬 수가 없음을 깨닫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이를 기준으로 살게 하며, 또한 그렇게 되지 못하였을 때 정직하게 회개할 때에만 구원이 주어질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서 주어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즉 예수님은 우리가 산상수훈을 다 지켜서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이를 결코 다 지킬 수가 없으며 다만 당신 안에서 이를 성실하게 지키고자 노력하게 하여 성도는 궁극적으로는 오직 예수의 공로(功勞)를 의지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고자 산상수훈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산상수훈을 대할 때마다 그것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각오를 새로이 하는 등시에' 결코 이를 다 지킬 수 없으나 당신께 회개하며 믿고 따르고자 애쓰는 자에게 값없는 구원을 결국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과 공로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감사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산상수훈 자체의 전반적 이해는 마 제 5장 연구 자료를, 각 부분의 교훈은 해당부분 문단 강해를 보라.
외울 말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형제의 비판의 자세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기도의 확신
7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생명의 문과 참 선지자의 기준
13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15 ○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신앙의 실천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산상수훈 종결
28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본문 & 자료노트
원어 연구-7:3, 깨닫다
'깨닫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노에오'( )는 전치사 '카타'( )와 동사 '노에오'( )의 합성어이다. 여기서 동사 '노에오'는 '누스'( )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누스'는 '정신'(mind), '지성'(intellect)을 뜻하며 성경에서는 주로 '마음'이라고 번역되었다(눅 24:45; 롬 1:28). 이 용어의 동사형은 '노에오'( )로서 '의도적으로 마음에 새겨두다'(마 24:15) '마음으로 인식하다', '알다'(엡 3:4). '깨닫다'(막 13:14), '생각하다'(딤후 2:7)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 '카타'( )라는 접두어가 부가되었다. 이것은 원래 '~아래에'라는 뜻의 전치사이다. 그러므로 '카타노에오'가 '아래까지 즉 아주 깊은 곳까지 세세하게 생각하고 깨닫다', '깊이 숙고하다' '자기 마음속을 살피다'라는 아주 강한 의미의 용어 이다.
한편 본절에서 '카타노에오'와 댓구를 이루는 단어는 '보다'라는 의미의 동사 '블레포'( )이다. 이는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카타노에오'가 자기 마음 속 깊은 곳을 살피는 것을 가리킨다면, '블레포'는 단지 눈으로 사람의 겉모양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로 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는 남의 조그만 잘못을 보기보다 자기 마음속 깊은 곳을 살펴서 그 마음이 얼마나 부패하였는가를 깨달을 것을 교훈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심성은 생각지 못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다고 해서 형제를 정죄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외식된 행위와 관련된 예수님의 교훈이다.
원어연구-7:5 외식하는 자
마 6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7:1-5 비판에 대한 10대 교훈
1 | 남을 비판하면 자신도 비판받음(마 7:1,2) |
2 | 남을 독선적으로 비판해서는 안됨(마 7:3) |
3 |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함(마 7:3-5) |
4 | 남을 비판한 대로 자신도 하나님의 심판받음(눅 6:37,38) |
5 | 남을 외모만으로 비판해서는 안됨(요 7:24) |
6 | 남을 비판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는 것임(롬 2:1) |
7 | 믿음이 연약한 자의 의심을 비판해서는 안됨(롬 14:1-3) |
8 | 인간은 서로 비판할 자격이 없음(롬 14:10-12) |
9 | 경솔한 비판으로 남을 상심케 해서는 안됨(롬 14:15) |
10 | 참된 비판은 오직 심판주 하나님밖에 할 수 없음(약 4:11,12) |
원어연구-7:2 헤아리다
본권 막 4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7:1-12 산상수훈과 바리새인들의 태도 비교
산상수훈 | 바리새인 | |
의의 정의 | 내적인 의(義)가 우선이고 외적 의는 나중임(마 5:1-16) | 외적인 규례 준수를 곧 의로 여김(눅 18:9-14) |
죄의 정의 | 죄는 행위 문제만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임(마 5:17-48) | 외적인 규례를 준수치 않는 것을 곧 죄로 여김 (마 23:23-25) |
의의 목적 | 하나님께 보여지는 것이지 인간의 칭찬을 위한 것이 아님(마 6:1-18) | 인간들에게 보여져서 칭찬을 듣기 위한 것임 (마 23:2-12) |
우선 순위 | 하나님이 우선적이며 재물은 나중임 (마 6:19-31) |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좋아함(눅 16:14) |
비판 문제 | 비판하지 말라함(마 7:1-5) | 맹렬히 비판함(눅 18:9) |
보감-7:7-11 기도 응답의 15대 요건
막 11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7:13-27 구원과 멸망의 대조적 표현들
예수님은 구원과 멸망의 진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전하시기 위해 서로 대조되는 낱말의 표현들을 사용하셨다. 다음에서 이 상호 대조의 표현들을 살펴보자.
구원의 표현 | 멸망의 표현 | |
1 | 좁은 문 | 넓은 문 |
2 | 찾는 이가 적은 곳 | 찾는 이가 많은 곳 |
3 | 생명으로 인도함 | 멸망으로 인도함 |
4 | 협착한 길 | 넓은 길 |
5 | 좋은 나무 | 못된 나무 |
6 | 아름다운 열매 | 나쁜 열매 |
7 | 지혜로운 자 | 어리석은 자 |
8 | 말씀을 듣고 행함 | 말씀을 행치 않음 |
9 | 반석 위에 지은 집 | 모래 위에 지은 집 |
주요 주제-7:1-29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 비교
눅 6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7:28,29 본서에 나타난 예수의 위대함에 대한 증거
마 17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7:1-29 산상수훈의 이해
마 5장 연구 자료 참조.
도표-7:1-29 산상에서 행한 예수의 20가지 설교
산상 수훈(山上重訓)은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 전 기간에 걸쳐 강화하신 본서 5대 강화(discourse)중 첫 번째 강화이다. 성도가 하나님께 대하여, 또 사람들에 대하여 마땅히 취할 윤리에 대해 잘 설명된 산상 수훈의 20가지 설교는 다음과 같다.
내용 | 성 구 | |
1 | 팔복 | 5:1-12 |
2 | 성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 | 5:13-16 |
3 | 율법의 완성자 예수 | 5:17-20 |
4 | 살인에 대한 새 법 | 5:21-26 |
5 | 간음에 대한 새 법 | 5:27-30 |
6 | 이혼에 대한 새 법 | 5:31,32 |
7 | 맹세에 대한 새 법 | 5:33-37 |
8 | 원수 사랑의 실천 법 | 5:38-48 |
9 | 구제 생활 | 6:1-4 |
10 | 기도 생활 | 6:5-8 |
11 | 주기도 | 6:9-15 |
12 | 금식 생활 | 6:16-18 |
13 | 재물과 하나님 | 6:19-24 |
14 | 염려와 하나님 신앙 | 6:25-34 |
15 | 타인 판단 금지 | 7:1-6 |
16 | 기도와 확신 | 7:7-12 |
17 | 좁은 문과 넓은 문 | 7:13,14 |
18 | 거짓 선지자 경계 | 7:15-20 |
19 | 불법 행하는 자 책망 | 7:21-23 |
20 | 반석 위에 지은 집 | 7:24-29 |
보감-7:7-11 성도에 대한 예수님의 10가지 보증
1 | 축복의 보증(말 3:10; 마 6:33) |
2 | 기도응답 보증(마 7:7; 요 16:24) |
3 | 치유의 보증(마 8:16; 12:13) |
4 | 용서의 보증(마 9:2; 요일 1:9) |
5 | 안식의 보증(마 11:29; 히 4:3) |
6 | 구원의 보증(마 26:28; 요 3:16) |
7 | 동행의 보증(막 6:50; 히 13:6) |
8 | 천국 유업의 보증(요 14:2; 약 2:5) |
9 | 승리의 보증(요 16:33; 빌 4:13) |
10 | 영원한 안전의 보증(행 23:11) |
7:1-6 비판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법과 윤리를 소개하고 있는 산상 수훈(山上重訓)은 드디어 본장을 끝으로 마무리 된다. 따라서 얼른 보기에 단편적인 교훈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본장의 내용은 실제로 앞장의 내용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산상 수훌 전체의 결론에 해당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앞의 두 장 제 5,6장에서 천국 시민인 성도들이 지녀야 할 생활의 원리를 제시하신 예수께서는. 본장에서는 천국 백성으로서 성도들이 지녀야 할 실천적 규범에 대해 강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시다(고전 4:20).
그 가운데 본문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여 비판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성도가 죄악을 지적하고 불의에 대해 경고하며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까지 금하는 것은 아니다(6절; 마 5:37).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죄와는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하며 불의와는 일절 타협과 양보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본문은 자신이 심판주 하나님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 곧 다른 사람의 사소한 허물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막상 자기 자신의 심각한 과오는 가급적 덮어 두려는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 자세를 지녀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실제로 누구든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자는 아무도 없으며' 성도들 역시 죄와 허물로 이미 죽었던 자들이지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사죄의 은총으로 인해 구원과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은 자들이다(엡 2:1-5).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질책하기에 앞서서,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더 이상 죄악에 빠져 살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로 인도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살펴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판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이러한 본문이 가져다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와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므로, 눈앞에 보이는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려고 애쓰기보다 눈에 보이지 야는 사탄의 궤계에 맞서 싸우려고 애써야 한다(엡 6:11-13).
② 성도들은 이웃의 잘못을 비난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먼저 깨닫고 바로잡는 겸손과 지혜를 지녀야 한다. 다른 사람의 범죄를 비난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자신도 동일한 불의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은 모든 인간이 죄악의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갈 6:1).
③ 성도들은 형제와 이웃을 독선과 아집으로 판단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되나 그렇다고 사랑이라는 명목과 허울 아래 죄악과 무분별하게 타협해서도 안 된다. 성도들은 죄악과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레 11:45).
7:1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 여기서 '비판하다'(크리노)는 '정죄하다', '심판하다' 등의 법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은 사람에게 비판받는 것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본문은 뒷 구절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의 조건철로 사용됐는데 문제는 이 구절의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의 시점이 언제냐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때를 현세적인 것(Chrysostom)으로 보기도 하고 종말에 있을 심판의 때(Carr)로 보기도 한다. 범죄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 세상에서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교훈은 현재와 미래를 포괄하는 보편적 교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시제가 일회적 사건임을 강조하는 부정과거형으로 쓰였으며 최종적이며 완전한 심판이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미래적 의미가 보다 더 강조된다고 볼 수도 있다(Lenski).
비판하지 말라. - 무슨 일에든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고 마치 자신이 재판관인양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오직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만이 공의로 판단하시고 죄를 정죄할 자격을 가지신 심판주이 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도 똑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 자신은 의인인양 외식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월권행위요 교만한 죄악인 것이다(롬 2:3;14:10). 본장 자료노트, '비판에 대한 10대 교훈' 참조.
7:2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 인간의 행위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은 성경에 실례로 여러 번 나타난다(삿 1:7; 계 18:6,10).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빚진 자에게 긍휼 없는 법적 조치를 내린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 없는 심판을 내리심이 보여진다(마 18:21-35). 자신도 허물이 있는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이 없는 정죄 행위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도 긍휼 없는 심판을 받게됨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 '헤아리는(메트레오)'은 숫자 계산이나 물건을 어떠한 척도로 측정하는 것 등에 사용되는 단어이다. '비판'이 법정적인 용어라면 '헤아림'은 경제적인 용어로 본절에서는 두 용어를 모두 사용하여 타인에 대한 긍휼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7:3 어찌하여 …티는 보고…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티'와 '들보'는 서로 크기에 있어서 큰 대조를 보이고 있는데 본절에서 '티'는 '작고 부분적인 죄'를, '들보'는 '크고 전체적인 심각한 죄'를 상징한다. 즉 본절의 표현과 같이 실제로 '들보'가 눈 속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티'와 '들보'는 작은 죄와 큰 죄를 대조하며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당시 유대 지역에 잘 알려진 격언적인 교훈(Tholuck)인 듯하다. 한편 이러한 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은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 책망하신 내용이다. 이러한 실수는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범하기 쉬운 것으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주로 범한 죄였다. 즉 그들은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율법으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과 올가미를 씌워 정죄하기를 좋아했으며, 심지어 그들의 그러한 행위는 그들이 섬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들이 진실되게 지킨다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정죄하여 십자가에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7:4 나로…빼게 하라. - 큰 죄를 범하고 있는 자가 사소하고 작은 문제를 갖고 있는 자를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 모순되는 일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가 쉬운 것은 마음이 깨끗한 자는 자신에게 있는 조그마한 죄에 대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반면 죄가 많아 양심이 더러워진 자는 죄책감이 없어 자신이 의인이라는 교만한 생각을 가지고 남의 조그마한 죄까지도 들춰내어 정죄하며 판단하기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하라(아페스)'는 '허락하다'란 뜻을 갖는 매우 위압적인 명령어로서 자신의 판단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음을 보여 준다(마 3:15).
7:5 외식하는 자여. - '외식하는 자'는 '연극배우'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극단적인 형식주의자였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해 예수께서 즐겨 사용하신 표현이다(마 23:13,15,23,25,7,29). 마 6:2 주석 참조. 한편 마 6장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 '기도', '금식'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셨는데, 본장에서는 '남을 비판하는' 문제에까지 범위를 확대시키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하시는 중에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난하시며 그들과 같이 행하지 말라고 교훈하신 사건을 마태는 23장에서 두드러지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외식화되어 있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진정한 신앙의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 외식하는 자들에게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신 말씀이다. 남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바른 순서이며 필수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에 들보가 있어 눈이 정상이 아니면 모든 것을 바로 보고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후에야 밝히 보고…빼리라. - '밝히 보고(디아블레포)'는 '시력을 회복하다'란 뜻으로 쓰이기도 했으나(막 8:25) 여기서는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란 의미가 강하다. 진정으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낸 사람이라야 한다. 즉 자기 죄를 회개하고 깨끗한 양심을 가진 자만이 남의 죄를 바로 지적하고 회개하도록 촉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들보로 가리워진 눈으로 남의 눈의 티를 빼내려 하면 티를 빼기는커녕 오히려 남의 눈에 큰 상처를 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자기 죄를 회개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여 형제의 죄를 회개케 해야 한다.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 본절을 앞뒤 구절과는 관련이 없는 독립된 교훈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Bruce, Johnson), 본절은 1-5절의 연속된 교훈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는 교훈을 잘못 이해하여 자칫 본질적인 죄악에 대해서조차 묵인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에 대비해 본절에서 영적 분별력을 갖고 죄악과는 구별된 삶을 살도록 제자들에게 교훈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거룩한 것'과 '진주'는 천국 복음을 상징하고(마 13:44,45, Wesley), '개'와 '돼지'는 복음에 대해 적대적이며 의도적으로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Calvin).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의도적으로 복음을 훼방하는 '개'와 '돼지' 같은 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부르시며 지옥의 심판을 선포하셨다(마 23:33). 세리와 창기도 사랑으로 대하신 예수께서 유독 이들에게만은 긍휼 없는 저주를 선포하신 사실은 본절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염두에 둔 말씀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던지지 말라'는 그러한 자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결된 삶을 살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롬 12:2).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 이는 '개'와 '돼지'가 거룩한 것과 귀한 진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좋은 것을 준 자를 공격한다는 내용이다. 결국 본절은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복음을 전해도 소용없고 오히려 복음 전파자들을 핍박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과 같은 말씀이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복음을 핍박하였던 것이다.
7:7-11 응답받는 기도의 자세
예수께서는 앞 단락 1-6절에서 천국 시민의 실천 규범으로 맨 먼저 형제와 이웃에 대해서는 독선적 아집과 편견을 버리고 관용할 것(1-5절)과 죄악에 대해서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과감하게 단절할 것(6절)을 교훈하셨다. 이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천국 시민의 두 번째 실천 규범으로, 간절하고 인내력 있는 기도를 하도록 교훈하고 계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제대로 하나님께 간구해 보지도 않고서 쉽게 포기해 버리거나 아예 기도의 무용론(無用論)을 주장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려
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도가 믿음을 갖고 확신 있는 기도를 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교훈하시고 계시다(9-11절).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나 능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의 기도 자세나 확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인내하며 간구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크신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기도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7,8절). 그것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방법은 삼중적인 의미를 지니면서도 뒤로 갈수록 더욱 강조되고 적극적인 의미를 지녀 점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구한다'는 것은 자기의 결핍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그것을 채워주시도록 호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구한다'는 말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결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자기 결핍을 인식하지 않고는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찾는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한 것이다. 즉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인같 스스로의 노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위에 인내를 더한 것을 말한다. 즉 구하는 자는 그것이 성취되기까지 믿음으로 바라며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결국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깨닫게 하고 있다.
① 성도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약 4:2)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자는 자기 아버지의 집에 있는 풍족한 양식을 두고 엉뚱한 곳에서 굶주리는 아들과 비슷하다(눅 15:16,17). 성도가 기도할 때마다 반드시 후히 주시고 결코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성도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이시다(약 1:5).
② 진정한 기도에는 실천적 행동과 인내가 등반된다. 마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농부처럼(약 5:7) 그리고 재판관에게 가서 자신의 원한을 하소연하는 과부와 같이(눅 18:1-7), 끈질긴 자세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성도야말로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한다(엡 6:13; 빌 4:6; 살전 5:17).
7:7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 - 기도할 것을 삼중적이면서 점층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여기서 '구한다'는 것은 자기의 결핍을 인식하고 자기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분에게 호소한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이러한 호소나 탄원은 기도의 대상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전제한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자비를 믿는 믿음을 뜻한다. 또한 '찾는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한 것이다. 즉 진정한 기도는 호소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힘써 활동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예를 들어 성경 지식을 얻기를 소원하는 자는 이를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실제로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드린다'는 것은 구하는 것에 행동을 더하고 그 위에 참는 것까지 더한 것이다. 즉 구하는 자는 그것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하며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본절에 나오는 삼중적 권면은 모두 현재 시상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성도들이 끊임없이 구하고 찾으며 두드려야 할 것을 나타내준다. 그러나 본절에는 삼중적인 권면뿐만 아니라 이어 삼중적인 보장이 나오는바 본절이 보다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기도 행위 자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신실하게 응답하신다는 사실이다(11절).
7:8 구하는 이마다‥‥열릴 것이니라. - 앞절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재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본절은 앞절에 비해 기도에 대한 응답의 사실을 보다 구체화시킨다는 특징이 있다. 즉 앞절에서는 '너희에게'란 표현으로 보편적인 기도 응답의 원칙을 밝히고 있으나 본절에서는 기도의 주체를 '이마다', '이가'로 표현함으로써 기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자 개인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응답 역시 개별적으로 이루어짐을 암시한다. 한편 본절에서는 구하는 이에게 하나님이 주신다는 단순한 진리를 언급할 뿐 '무엇'을 구할 때 반드시 주시겠다는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성경에서 언급되어지는 기도 응답의 일반적인 조건을 해답으로 제시할 수 있다. 즉 앞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하는 것은 반드시 응답 받을 것'이라는 뜻으로 본절을 해석할 수 있다.
7:9,10 너희 중에 누가‥‥있겠느냐. - 본절에서 '떡'과 '생선'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구한 필요한 것을 의미하고, '돌'과 '뱀'은 아들에게 전혀 무가치하고 해로운 것을 가리킨다. 즉 아들이 필요한 것을 구할 때 무가치하고 해로운 것을 줄 부모가 없음을 밝힘으로 성도의 영적 아버지이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확신시키는 말씀이다. 한편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질문 형식으로 진리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심으로 교육의 효과를 극대화시키셨다.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 여기서의 '악함'은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 즉 원죄로 인한 악한 경향을 가리킨다. 인간은 누구나 죄 아래 태어나 죄의 영향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를 통해 전제되고 있다(시 14:1-3; 53:1-3; 전 7:20). 그러나 그러한 죄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식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이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 '악한 인간'과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비교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근거로 구하는 자에게 분명히 응답하여 주실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청중들'을 아들이라 지칭함으로써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밝혀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이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좋은 것. - 병행 구절인 눅 11:13에서는 '성령'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 본절의 '좋은 것'을 ① 영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며 (Marshall). ② 단순한 물질적인 것으로 보기도 한다(Schweitzer). 그러나 마태와 누가의 병행 구절의 내용이 거의 흡사한 점으로 보아 '좋은 것'과 '성령'이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리고 표현상 이러한 차이점이 발생한 것은 마태의 독자는 유대인들이었고 누가의 독자는 이방인이었다는 사실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즉 유대 인들은 누구나 '가장 좋은 것'은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약에서 이미 메시야의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을 약속했고(욜 2:28,29) 유대인들은 그 날을 고대하며 성령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구하면 누구에게든지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좋은 것'이 '성령'을 의미하는 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구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바 이들을 위해서 누가는 '성령'이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주시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기도에 관한 교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말씀이었음도 알 수 있다.
7:12 황금률
계속해서 천국 시민의 실천 규범을 제시하고 계신 예수께서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자 천국 시민의 가장 지고한 행동 규범을 제시하신다. 이것은 성도들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의 행동의 지침이며 원리로 삼아야 하는 기준이므로 이른바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 불리워진다. 그런데 이 말씀은 결코 이해 타산적인 생각으로 남을 대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철저한 이타적(利他的)인 윤리 규범으로, 언젠가 상대방으로부터 보답 받을 것을 기대하며 대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에 감사하여 무조건적으로 남을 돕고 대접하라.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고 싶어하는 바로 그 수준으로 남을 대접하라는 교훈이다. 결국 이 말씀은 이기적(利己的)인 인간들로 하여금 내가 남에게 기대하는 만큼 남도 나에게 그 이상으로 기대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나의 요구의 양은 남에 대한 자기 부인과 자기 헌신의 양임을 깨닫게 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이 말씀에 대한 완전한 모델이 되어 주셨다(빌 2:8; 요일 4:10).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들 역시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행동을 본받아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7:12 그러므로. - 이는 바로 앞선 교훈과 연결하여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으므로'란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포괄적으로는 '산상 수훈 전체의 교훈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황금률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대접하라. - '황금률(The golden rule)'로 불리우는 유명한 말씀으로 마 6:33의 말씀과 함께 산상 수훈의 가장 핵심적인 교훈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교훈으로 '네가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행치 말라'(외경 토비트 4:15) 등이 있으나 이것은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본문과 구별된다. 즉 예수님의 '황금률'은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라는 보다 적극적인 교훈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을 잘 나타낸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은 죄를 짓지 말라는 부정적인 차원을 넘어 선과 사랑을 행하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명령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의 모델이 되시었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권고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율법과 선지자'란 구약 전체를 가리키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마 5:17 주석 참조. 따라서 본문은 본절의 교훈이 구약 율법과 교훈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이는 후에 예수께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신 것(마 22:37-40)과 같은 내용이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최고 정신인 사랑을 버리고 법조항만 지키려 했기 때문에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고 타락하여 예수께 심한 책망을 들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말씀(마 5:17) 또한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7:13,14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
12절에서 인간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지녀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 원리를 제시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제시하신다. 예수께서 제시하신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난다. 물론 여기서 '좁은 문'과 '좁은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참되고 유일한 길(요 14:6)이요' 문(요 10:7)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러한 '좁은 문'과 '좁은 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 시작부터 끝까지 고난의 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시종일관(始終一貫) 좁고 협착한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결단을 내린 사람은 매순간 고난을 이겨야 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이 요청된다.
반면 세상적인 삶의 특성은 '넓은 문'과 '넓은 길'이라는 말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즉 세상적인 삶은 사람들에게 넓고 편안해 보일 뿐만 아니라 자유로워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좁은 문' 및 '좁은 길'을 택한 사람과 '넓은 문' 및 '넓은 길'을 택한 사람의 결과는 '생명'과 '멸망'이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준다. 즉 '좁은 길'과 '좁은 문'을 택한 사람들에게는 현재 감당하는 수고와 고난과는 족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반면, '넓은 길'과 '넓은 문'을 택한 사람들에게는 현재는 편하다 할지라도 그들 앞에는 오직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비록 그 길이 힘들고 외로우며 또한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결코 뒤돌아서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넓은 길과 넓은 문이 보장해 주는 우선 당장의 편안함에 이끌려 거기로 들어가면, 결국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멸망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① 성도들은 세상의 풍조와 유행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으며, 특히 악인의 죄를 좇거나 죄인의 길에 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시 1:1; 롬 12:2).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저 주위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답습하다가는 필연적으로 멸망에 이르는 넓은 길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② 성도들은 좁은 길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舊習)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2-24). 왜냐하면 세상에 속한 모든 무거운 것들과 얽매이기 쉬운 죄의 짐을 벗어 버려야만 비로소 우리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힘차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12:1).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적음이니라. - '좁은 문'과 '큰 문', '협착한 길'과 '넓은 길', '생명'과 '멸망'이 각각 대칭 구조를 이룬다. 인생에는 두 개의 문과 길이 있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협착한 길을 지나 생명으로 가게 되고' 큰 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을 지나 멸망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좁은 문'은 신앙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으로 회개와 같은 신앙의 결단을 의미하며, '협착한 길'은 신앙 안에서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임을 의미한다. 반대로 '넓은 문'은 불신앙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넓은 길'은 불신앙의 삶이 훨씬 편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좁은 문'과 '큰 문'을 선택한 결과는 '생명'과 '멸망'이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께서는 생명과 멸망으로 가는 두 문을 제시하시고 제자들에게 '좁은 문'을 선택할 것을 교훈하셨다. 또한 생명으로 가는 인생의 길이 험하고 협착하여 이를 선택한 사람은 의를 위하여 억울하게 핍박을 받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천국의 복이 있다고(마 5:10-12)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신앙의 길에 격려와 위로를 주셨다. 또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적고 '큰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을 것임을 말씀하시어 신앙의 길이 외로운 길임을 밝히셨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는 말씀으로 신앙의 길이 좁고 어려운 것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약속을
주심으로 좁은 길을 걷고 있는 자들에게 영적인 승리를 약속하셨다.
7:15-29 실천적인 믿음
마 5장에서부터 시작된 산상 수훈의 결론에 해당되는 본문은 지금까지 소개된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에 대한 실천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좋은 나무와 못된 나무(15-20절), 진정한 제자와 거짓 선지자(21-23절),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24-27절)를 서로 비교함으로써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행함이 있는 믿음'(약 2:14-26)의 자세를 지니도록 일깨우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해 아무리 종교적으로 화려한 업적을 남기고 뭇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롭고 선한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결국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께로부터 준엄한 책망과 배척을 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일방적인 순종과 실천만 강요하시지 않고, 친히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심으로써 우리의 실천적 믿음에 대한 모범을 보이셨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은 온갖 율법을 다 준수하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 직이려고 하지 않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보여준 모습(마 23:3,4)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약 1:22-25). 만약 누구든지 믿음이 있노라 말하면서 행함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영혼이 없는 몸을 소유한 자와 같다. 결코 우리가 행함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함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을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이자, 이미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② 성도들은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으되 경건의 능력은 갖추고 있지 않는 거짓선지 자들에게 미혹당하지 않도록 영적 분별력을 지녀야 한다(딤후 3:5; 요일 4:1). 말 끝 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때때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신비한 이적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삶 가운데서 실천적인 신앙 자세와 참된 경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면, 성도들은 단호히 그를 배척해야 된다(약 1:27).
③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야 말로 성도가 그 어떤 환난과 역경을 만나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삶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에 근거한 신앙을 지닌다면, 언젠가 시련과 고난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 마치 바람과 홍수에 무너지는 모래 위의 집처럼, 우리의 신앙 역시 뿌리 채 흔들리고 말 것이다(고전 3:10-15; 고후 13:5).
④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되면 예수님께서는 오직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영위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하신다(마 25:31-46).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재산을 소유했었는지. 혹은 얼마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날이 되면 입에 발린 신앙고백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신 삶과 가르침대로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고 실천했는지만 주님께서는 살피실 것이다(약 2:23-25).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이다. 제 9권 예언서 개론 '선지자의 이해' 참조.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위임받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권위로 거짓된 사실을 선포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 전하며 가르치므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계속 존재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 끝 날까지 여전히 계속 존재할 것이다(렘 6:14; 8:11; 마 24:24; 벧후 2:1; 요일 4:1). 따라서 성도들은 말씀을 분별하여 그들의 거짓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겔 13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양의 옷을 입고‥‥노략질하는 이리라. - 거짓 선지자들이 겉으로는 선한 양처럼 위장하고 있으나 속은 이리와 같이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차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즉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기회가 닿으면 순식간에 양을 잡아가는 이리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있으므로 성도는 이들의 정체를 잘 알지 못하여 미혹되기 쉬우며 이들에게 미혹된 자는 결국 비진리 가운데 빠지며 멸망하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에서는 이러한 자들을 경계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7:16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해 내는 방법은 그들의 행동을 면밀히 살피는 것이다. 비록 거짓 선지자들이 말로 자신을 위장하여 사람들을 속일지라도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본성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악하며 무익한 식물을 상징하며, '포도'와 '무화과'는 사람에게 유익한 식물을 상징 하는 것으로 거짓 선지자에게서 선한 행실이 나을 수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7:17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 본문은 나무는 그에 속한 열매만을 생산한다는 자연 법칙을 통해 거짓 선지자가 끝까지 자신을 위장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예수께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법칙을 비유하여 영적 이치를 쉽고도 명확하게 교훈하시는 훌륭한 선생이셨다.
7:19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 예수께서는 인간 세상에서 가시나무와 엉겅퀴 같이 무익하고 해로운 나무를 태워버리는 사실을 비유로 사용하셔서 거짓 선지자들이 최후에 당하게 될 진노의 심판을 말씀하셨다(마 3:10). 거짓 선지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의 열매로 인해 비 진리임이 드러날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7:20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15-19절 내용의 결론이다. 한편 여기서의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판단 기준인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행 일치적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이는 모든 시대에 걸쳐 거짓 선지자를 판단하는데 기준이 된다. 사실 인간들은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능력에 대해 경외감을 가지며 그것을 행하는 자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고 좇아 갈 수 있는 여지가 많다. 때문에 인간의 이러한 속성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의 판단 기준을 제시하시고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좋은 열매임을 확실하게 교훈하신 것이다(21-27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 '주(퀴리오스)'는 삶을 주관하는 '주인'이란 의미이며 초대 교회 시대에는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적 칭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졌고 믿는 자들의 형제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입술로만 '주'를 부르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예수를 부인하는 거짓 신앙고백을 가리킨다. 즉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같이 위장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않아 나쁜 열매를 맺는 자들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자들은 결코 마지막 심판 때에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을 선언하셨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확실한 조건이 제시되고 있다. 즉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자만이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의 시민인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호칭함으로써 자신과 하나님의 본질적 관계 및 자신만이 완전한 하나님 말씀의 계시자임을 암시하셨다.
7:22 그 날에. - 예수의 재림 때, 즉 마지막 심판의 때이다(살후 1:7-10; 계 16:14).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 예수의 심판대 앞에서 조차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자신의 행위가 주를 위한 것이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천국 시민의 자격은 입술의 고백과 외형적인 행위에 있지 않다. 오직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한 사랑의 실천만이 천국 시민의 유일한 자격인 것이다.
7:23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 '밝히 말하되(호몰로게소)'는 권위를 가진 '공적 선포'(profess: NIV, declare: RSV)를 뜻하는 말이다(Bengel).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치 않았던 자들의 자기변호에 대해 근엄한 심판을 내리시는 주님의 심판주로서의 권위가 내포된 표현이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 여기서 '알다'는 지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지(全知)하신 예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모든 행위에 대해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을 완전한 공의로 심판하실 수 있는 것이다(요 1:47,49; 2:24,25; 21:17). 따라서 여기서의 '앎'은 선택적 사랑과 친분을 의미하는 것이다(암 3:2; 요 10:14; 고전 8:3; 갈 4:9; 딤후 2:19).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와 친분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말하고 가르쳤지만, 실제로는 예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예수님의 선고에서 증명되어 진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 시 5:5의 말씀을 인용하여 불법자들에 대한 단호한 심판을 선언하신다. 구약에서 '불법'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동참하지 않은 죄를 가리킨다. 그들은 많은 일을 '주의 이름으로' 행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곧 그들이 예수의 사랑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지 못함으로 인해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 예수께서는 앞에서 신앙의 열매, 즉 행함이 없는 자들이 심판받을 것을 언급한 후 산상 수훈의 결론으로 예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받을 복과 듣고 행치 않는 자들이 받을 벌을 대조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람의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는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에 있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하느냐 행치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마치시면서 청중들에게 말씀에 순종할 것인지 불순종할 것인지의 양자택일의 결단을 촉구하신 것이다.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 본절과 병행을 이루는 눅 6:48에서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마태는 자연적인 기초를 말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인공적인 기초를 말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마태가 독자로 생각한 유대인의 집짓는 풍습과 누가가 독자로 생각한 이방인의 집짓는 풍습의 차이에 그 원인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신앙의 실천을 집의 기초에 비유한 것은 양자가 공통적 이다. 결국 본문은 말씀을 듣고 행하여 든든한 기초 위에 집을 지음 같이 신앙의 터를 굳건하게 세운 자의 경건한 신앙을 묘사한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지혜로운'은 깊이 생각하고 통찰력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앞일을 내다보아 폭우가 내려도 견딜 수 있게 반석 위에 집을 지음 같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부딪치는 온갖 어려움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자인 것이다.
7:25 비가 내리고 장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 지혜로운 자는 모진 비바람과 창수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비하여 반석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그 집은 무너지지 아니한다. 이는 이 세상에서 닥치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듣고 행한 자는 망하지 아니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7:26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말은 우기와 건기가 확연히 구분되는 팔레스틴의 와디(wadi, 평소에는 건조하게 말라 있다가 비가 오면 물이 흐르는 강, 수로) 지역에 집을 짓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러나 반드시 다가올 우기를 내다보지 못하고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는 폭우가 몰아치면 그만 그 집을 잃고 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집을 잘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폭우가 내리자 그 집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자의 비유를 통하여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하지만 말씀을 듣고 행치 않아 마지막 날에 심판 받게 될 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7:27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에게 임할 멸망의 심판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평상시에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도 만약 그들이 거짓된 신자라면 갑자기 닥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는 가차 없이 멸망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즉 입술로만 '주여' 주여'하며 실제적으로는 말씀에 불순종 하는 거짓 신앙인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폭우 시 무너짐 같이 하루아침에 그 실상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팔복의 선언으로 시작된 산상 수훈은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으로 마쳐진다. 결국 산상 수훈에 나타난 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과 심판은 각 개인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7:28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 마태는 산상 수훈의 기록을 마치면서 예수님의 설교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은 그 이전에 그 어떤 자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충격과 놀라움을 주는 권위 있는 말씀이었다. 마 5장 연구자료, '산상 수훈의 이해' 참조. 특히 산상 수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2,28,32, 34,39,44)란 표현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심판주이심을 나타내는 표현(21-23절) 등은 예수를 단순한 인간으로 생각했던 무리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듣고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는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8)를 통해 설명하셨다.
7:29 그 가르치시는 것이‥‥아니함일러라. - 당시 대중들은 전반적으로 율법을 연구한 서기관들이나 율법해석에 능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을 배웠다. 이에 비해 갈릴리 목수 출신으로 전문적인 율법 교육을 받지 못한 예수의 가르침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가르침보다 더욱 권위가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율법 교사들은 탈무드 등을 인용하여 율법을 해석한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직접 계시의 주체자가 되어 진리를 선포하였으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용어로 진리의 핵심을 생명력 있게 전달했으므로 사람들은 큰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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