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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2. 17
⊙ 심대평(국민중심당·충청), 박근혜(한국미래연합·영남), 김윤환(민주국민당·영남) 등은 기성 정당 벽 넘지 못하고 실패
⊙ 호남인들의 정권교체 욕구 높은 것이 ‘호남 新黨’에는 걸림돌
⊙ 문재인 계속 버티면 호남 逆風 불 수 있어, 손학규 복귀가 방법일 수도
⊙ 천정배에게 ‘호남 정치’ 주장할 카리스마, 능력, 자격 있나
4·29 재·보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이 전패(全敗)했다. 수도권 3곳(서울 관악을, 인천 서구 강화을, 경기 성남 중원)에서 새누리당에 완패했다. 뿐만 아니라 야당의 심장인 광주(光州) 서을(西乙)에선 무소속 천정배(千正培) 후보에게 의석을 내주었다.
천정배 후보는 지난 3월 “광주 정신을 되찾겠다”며 새정연을 탈당했다. 선거기간 내내 ‘이대로는 안 된다’며 ‘야권 심판론’을 들고나왔다. “분열을 거듭하며 정부 여당에 확실한 견제를 하지 못하는 새정연을 대신하겠다”는 주장를 내세워 압승한 것이다. 천 후보는 2만6256표(52.4%)를 얻어 1만4939표에 그친 새정연 조영택 후보(29.8%)를 큰 차이로 누르고 승리했다. 호남에서 선거 때만 되면 통용되던 ‘미워도 다시 한 번’ ‘묻지 마 기호 2번’이라는 호소가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전통적 텃밭인 광주에서 득표율이 무려 22.6%p나 차이가 난 것은 그만큼 친노(親盧) 새정연에 대한 호남 민심의 뿌리 깊은 반감이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천 후보는 당선 일성으로 “내년 총선까지 ‘뉴 DJ(새로운 김대중)’들, 참신하고 실력 있고 국민을 섬기는 인재들을 모아서 비전 있는 세력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신당 창당을 사실상 공식화한 것이다.
▲ '뉴DJ’를 외치는 천정배 의원은 지난 5월 7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다.
안이한 文在寅 대표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라는 초대형 호재(好材)를 가지고도 참패한 새정연은 거센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텃밭인 광주를 지켜내지 못하고 ‘서울의 광주’라고 불리는 관악을 선거에서 27년 만에 패배한 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수도권에서 외면당했고, 광주에서 탄핵당했다는 것은 문재인(文在寅) 대표를 간판으로 내년 총선(總選)을 치를 수 없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이른바 ‘식물 대표론’이다.
이렇다 보니 ‘문재인 사퇴론’이 부상(浮上)할 수밖에 없었다. 조경태(趙慶泰) 새정연 의원은 “이미 문재인 대표는 지도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국민들이나 다수의 당원은 문재인 대표의 말과 행동에 대해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작년 7·30 재·보선에서 충격적인 패배 직후 대표직을 사임했던 김한길 전 대표는 “지금은 문 대표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오로지 친노의 좌장(座長)으로 버티면서 끝까지 가볼 것인지, 아니면 그야말로 야권을 대표하는 주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결단을 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동교동계(系)로 분류되는 박지원(朴智元) 의원도 “문재인 대표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가면 안 된다”며 “책임질 일은 책임지고 국민과 당원 앞에 그 의사를 밝히는 게 건강한 당으로 다시 일어서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천정배 의원 당선에 대해선 “문 대표가 바람직하게 하고 있느냐를 (광주가) 평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의 실패’인가 ‘야당의 실패’인가
반면에 문재인 대표는 “친노 자체가 없다”면서 친노 패권주의(覇權主義)를 부인한다. 그 이면(裏面)에는 재·보선 참패가 ‘문재인의 실패’가 아니라 ‘야당의 실패’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문 대표가 재·보선 패배 직후 밝힌 말에 잘 묻어나 있다. 그는 “당을 더 개혁하고 통합하고 단합시켜 국민으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받아서 잘하는 정당으로 만드는 것이 책임지는 자세라고 생각한다”면서 당 대표직 고수 방침을 밝혔다.
이런 안이하고 편의주의적인 사고 속에서 문 대표는 선거 패배 후유증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당을 오히려 혼돈 속으로 빠뜨렸다. 결과적으로 재·보선 이후 사태가 수습되기는커녕 하루가 멀다 하고 ‘친노-비노(非盧)’ 갈등이 새롭게 터져 나왔다. 정청래(鄭淸來) 최고위원의 ‘공갈’ 발언과 주승용(朱昇鎔) 최고위원의 ‘사퇴’ 표명 소동에도 이런 계파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대표적 친노계 의원인 노영민(盧英敏) 의원은 “최고위원직을 수행하는 건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면서 주 최고위원을 비판했다. 문 대표 역시 “최고위원의 회의 출석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말했다. 비노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문 대표가 ‘주승용-정청래’ 분란에 대해 사과하면서 “친노 수장(首長)이라는 말이 없어질 때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지만 공허하게만 들린다. 그렇다면 왜 문재인 대표가 선거 참패 직후 “재신임을 받겠다”는 정면 돌파 카드보다 말의 유희에만 몰입하는 것일까?
노무현(盧武鉉) 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김병준(金秉準) 국민대 교수는 “문재인이 대표에서 물러나면 친노도 와해되기 때문에 문재인 체제 수성(守城)에 더욱 목을 매는 것이다”고 분석했다.
문재인 대표가 ‘3철(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전해철 의원)’로 통하는 비선(秘線) 조직에 둘러싸여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오죽하면 정세균(丁世均) 등 당의 4선 이상 중진 의원 모임에서도 “당 지도부는 의사 결정을 공식 기구를 통해 공개적으로 하라”는 주문까지 했겠는가.
천정배 의원의 호남 신당론(新黨論)은 일종의 틈새 전략이다. 선거 패배가 몸에 배어 있는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지긋지긋한 계파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새정연에 대해 호남을 중심으로 새로운 야권 세력을 태동시키려는 것이다.
한국 정당사를 보면 지역주의에 기반 한 유력 정치인들이 탈당(脫黨)해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려고 했지만 무참하게 실패한 사례들이 많다. 한마디로 패배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忠淸黨’ 꿈꾸었던 국민중심당
▲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심대평 국민중심당 대표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함께 자유선진당을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충청에 기반을 둔 심대평(沈大平) 전 충남지사의 행보였다. 심대평은 충남 공주 출신이다. 대전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대전시장과 3선 충남 도지사를 지냈다. 1995년, 1998년, 2002년 충남 도지사 선거 때 모두 JP가 1995년 창당했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소속이었다.
그는 2005년 10월 19일 자민련을 탈당해 경북 문경을 지역구로 하는 신국환(辛國煥) 의원 등과 이른바 ‘중부권 신당’을 창당하기로 하고, 2006년 1월 17일에 ‘국민중심당(國民中心黨)’을 창당했다. 당 대표는 심대평과 신국환이 맡았고 구(舊) 자민련 인사 중 한나라당에 입당하지 않은 인사들이 다수(多數) 합류했다. 국민중심당은 한나라당의 행정수도 이전 반대에 대한 반발로 창당된 만큼 충청도에 기반 한 지역주의 정당의 색채가 강했다.
2006년 국민중심당은 지방선거에 나섰지만 초라한 성적표를 거뒀다. 기초단체장은 7명(3.04%), 광역의회 의원 15명(지역구 13명 + 비례대표 2명: 2.05%), 기초 의원 67명(지역구 56명 + 비례대표 11명: 2.32%)을 얻는 데 그친 것이다.
이후 2007년 4·25 재·보궐 선거에서 심대평 대표는 지역 연고와 열린우리당의 무공천(無公薦)에 힘입어 이재선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닷새 후 공동대표였던 신국환 의원이 느닷없이 중도개혁통합신당을 창당하겠다며 탈당했다. 2007년 5월에는 이인제(李仁濟) 의원이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심대평 대표는 2007년 대통령 선거에 국민중심당 후보로 입후보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3일 이회창(李會昌) 전 한나라당 총재가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자,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했다.
반쯤 성공한 忠淸黨 - 자유선진당
대선 이후 이들은 2008년 2월에 자유선진당(自由先進黨)을 창당했다. 결과적으로 국민중심당은 자유선진당으로 흡수된 셈이다. 총재는 이회창, 대표는 심대평이 맡았다. 그해 제18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은 충청권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지역구에서 14석, 비례대표 4석을 차지해 원내 제3당이 되었다. 자유선진당은 2석의 의석을 갖고 있던 창조한국당(대표 문국현)과 함께 ‘선진과 창조의 모임’이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심 대표도 충남 공주·연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회창 총재와 심대평 대표의 동거(同居)는 오래가지 않았다. 2009년 8월 30일 심대평 대표는 갑자기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탈당을 선언했다. 그는 “설득이 통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적 당 운영으로 당 지지율을 2%대에 머무르게 하는 이회창 총재와 당을 같이할 수 없다”면서 “충청권을 지키고 이익을 대변한다고 하면서도 총재로 인해 당의 운영이 왜곡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면에는 당시 청와대에서 솔솔 나오던 ‘심대평 총리론’에 이 총재가 반대한 것을 못마땅해했다는 분석이 있다.
이후 심 대표는 2010년 4월 1일 국민중심연합을 창당했지만, 그해 6·2지방선거에서 공주시장, 공주시의원 등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당이 몰락하자 그는 이회창의 자유선진당 복당을 결심했다. 국민중심연합과 자유선진당은 2011년 10월 10일 합당했다. 심 대표는 다시 당 대표를 맡았다.
자유선진당은 충청권 지역정당이라는 것 말고는 뚜렷한 정체성(正體性)이나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은 5석만을 건졌다. 심 대표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출마해 민주통합당 이해찬 후보와 맞붙었지만 패한 후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자유선진당은 이인제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으면서 2011년 5월 당명(黨名)을 선진통일당으로 바꾸었다. 선진통일당은 이후 뚜렷한 족적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2012년 10월, 제18대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으로 흡수됐다. 그래도 자유선진당은 다른 당과의 연대(連帶)를 통해서지만,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반쯤은 성공한 지역정당이었다.
朴槿惠의 실패한 ‘영남 신당’ - 한국미래연합
▲ 2002년 5월 17일 한국미래연합 창당대회에서 당기를 흔드는 박근혜 대표.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다시 한나라당으로 흡수됐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한나라당 부총재로 있던 2002년 2월 28일 한나라당을 탈당, 그해 5월 17일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38명의 창당 발기인 가운데 정치인이라고는 박근혜 의원 자신과 김한규 전 의원이 전부였다.
‘박근혜 신당’에 대한 국민 지지율은 한때 25%에 육박했고, 대선 3자 대결에서도 만만찮은 가능성을 보였다. 2002년 5월 6일 실시된 미디어리서치 조사 결과에서는 노무현 후보 41.4%, 이회창 후보 34.2%, 박근혜 의원 10.5%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해 6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미래연합은 참패했다. 광역·기초단체장은 한 명도 내지 못했고, 광역의원을 두 명 배출한 게 전부였다. 그나마 대구와 부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된 것이다. 미래연합은 대선을 앞둔 2002년 11월에 한나라당과 합당했다.
대구·경북 등 영남을 기반으로 한 ‘박근혜 신당’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은 2002년 2월부터 6월까지 30~35%의 안정적인 정당 지지도를 보였다(〈표1〉).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도 한나라당은 16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11명(68.8%), 232개 시장·군수·구청장은 140명(60.3%)을 당선시켰다.
미래연합은 ‘박근혜’라는 비교적 지명도 높은 정치인을 자산으로 갖고 있었다. 하지만 후보들의 낮은 인지도와 자금난을 극복하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양강(兩强) 구도를 뚫고 나가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정치 거물’들의 참패 - 민주국민당
▲ 2000년 3월 8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국민당 창당대회. 왼쪽부터 박찬종·김광일·김윤환·이수성·조순·장기표·신상우·이기택씨.
2000년 4월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공천학살’을 단행했다. 김윤환(金潤煥)·이기택(李基澤)·백남치(白南治)·오세응(吳世應) 등 거물·중진 의원들을 낙천(落薦)시킨 것이다. 이회창 총재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공천개혁을 통해 개혁 이미지를 선점(先占), 2002년 대권 고지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반발하여 김윤환 등은 통합민주당 출신의 조순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 2000년 3월 8일에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했다. 한마디로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창당한 지역주의 정당이었다. 하지만 4월 13일 총선에서 민국당은 지역구(강원) 1석과 비례대표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반면 한나라당은 65석이 걸린 영남 지역 선거구에서 64석을 석권했다. 나머지 한 석은 울산에서 무소속이 당선됐다.
지역구 득표율도 민국당은 3.7%에 불과한 반면, 한나라당은 39.0%로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35.9%)보다 많이 득표했다.
민국당은 2001년에 자민련·한나라당과 함께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통과시켜, DJP 공조를 파탄 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창당을 주도한 인물들이 대거 은퇴하면서 2002년 대선에서는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2004년 총선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하여 정당법에 따라 등록이 취소되었다.
성공한 ‘박근혜’ 마케팅 - 친박연대
▲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인사들은 2008년 3월 19일 미래한국당에 입당한 후 당명을 ‘친박연대’로 바꾸었다. 왼쪽부터 전용원·이규택·서청원·홍사덕·엄호성 前 의원.
지난 2008년 제18대 총선 당시, 친이계(親李系)가 주도한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서청원(徐淸源)·홍사덕(洪思德)·김무성(金武星) 등 친박(親朴) 성향의 의원들을 대거 낙천시켰다. 친박계는 이에 반발해 집단 탈당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 살아서 돌아오라”며 이들을 응원했다.
그해 3월 19일, 서청원·홍사덕 등 탈당 의원들은 미래한국당이라는 작은 정당에 입당했다. 미래한국당은 2007년 9월 정근모(鄭根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만들었던 참주인연합의 후신(後身)이었다. 이들이 이런 무명(無名) 정당에 입당한 것은, 총선을 불과 20여 일 앞둔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신당을 창당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종의 우회상장(迂回上場)이자, 대한민국 정당 사상 최초의 M&A였다.
미래한국당에 입당한 친박계 인사들은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는 정당’이라는 의미로 당명을 ‘친박연대’로 변경했다. 특정 정치인을 염두에 둔 당명도 헌정 사상 최초였다. ‘박근혜’라는 인기 정치인의 이름을 차용(借用)한 전략은 대박을 쳤다.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고, 친박계에 대한 공천학살을 곱지 않게 보던 유권자들이 표를 던진 것이다. 총선에서 친박연대는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쳐 총 14석을 차지, 한나라당·민주당·선진당에 이어 제4정당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지역구 당선자보다 비례대표 당선자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친박연대는 지역구에서는 51명이 출마해 6명(부산 1, 대구 3, 경기 1, 경북 1)이 당선됐다. 지역구 정당 득표율은 3.7%에 불과했다. 지역 기반을 보면 친박연대는 사실상 ‘영남정당’이었다. 하지만 정당 투표에서는 13.25%를 득표, 8석(16.7%)을 차지했다.
이는 제3정당이었던 선진당(4석·6.84%)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박근혜 정당’이라는 마케팅 전략의 승리였다.
친박연대의 돌풍으로 한나라당은 유탄(流彈)을 맞았다. 2007년 대선에서 531만 표의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한 후 불과 4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모두 153석을 얻어, 반수(半數)를 겨우 넘겼다.
친박연대는 2010년 2월 12일 당명을 미래희망연대로 바꿨다가, 2010년 7월 4일 한나라당과 통합했다.
과거 사례들을 비교해 보면 천정배 의원이 추진하려는 ‘호남 신당’은 국민중심당(심대평)과 한국미래연합(박근혜)의 경우와 유사하다. 두 사례 모두 심대평·박근혜라는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유력 정치인들이 당내 주류(主流) 세력에 반발해 탈당, 신당을 창당했다.
명분은 ‘정당 개혁’과 ‘새로운 정치’였지만, 선거에서 패해 ‘개인 정당’으로 전락했고, 결국은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시작은 화려했지만 끝은 빈약한 ‘시화종빈(始華終貧)’이었다.
그러면 천정배 의원은 ‘몸집 불리기’에 성공, 기존의 거대 정당들과 같은 링에서 싸울 수 있게 될까? ‘호남 신당’은 성공해서 야권 개편의 핵심 변수가 될 수 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변수(變數)가 있다.
1. 호남 민심
‘정치 학습론’과 ‘호남 소외론’의 충돌
호남 유권자들은 정치 학습 능력이 뛰어나다. 과거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았던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생존을 위한 적응 능력을 잘 키워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호남 특유의 ‘저항적 지역주의’를 만들어내 체화(體化)했다.
그런 의미에서 호남 유권자들의 지상(至上)과제는 당연히 정권교체이다. 성완종 파문 이후 국가미래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권교체 지수가 높게 나왔다. 정권교체 지수(Regime Change Index・RGI)란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었으면 좋겠다’는 비율을 ‘새누리당이 다시 집권하면 좋겠다’는 비율로 나눈 수치이다.
RGI 지수가 1이면 두 비율이 같은 것이고, 1보다 높으면 정권교체 욕구가 더 많은 것이다. 반대로 1보다 작으면 집권당의 재집권 욕구가 더 많은 것이다. 통상 RGI 수치가 2 이상이면 정권은 교체되기 쉽다.
조사 결과, 전체 RGI 지수가 1.49로 나타났다. 호남의 경우, RGI가 무려 6.55였다. 대선의 결정적인 변수인 중도층에서는 2.45였다. 2040세대에서도 2.50에서 5.18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높았다.
호남 유권자들은 이런 정권교체 가능성과 열망이 천정배 의원의 ‘호남 신당’으로 물거품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전략적으로 내년 총선에서 천정배 의원을 밀어줘야 지금까지 새정연으로부터 받은 소외(疏外)를 보상받을 수 있다는 기류도 분명히 있다. 이런 기저(基底)에는 내년 총선에서는 “새정연과 천정배가 각자도생(各自圖生)한 다음 대선을 앞두고 다시 결합해서 정권을 창출하면 된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야당이 분열되어 내년 총선에서 패배해 정권 창출이 요원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면 이런 시나리오는 탄력을 받기 어렵게 된다. 2002년에 대구・경북을 배경으로 하는 박근혜 의원이 미래연합을 만들었지만,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보수・영남 민심은 결국 이회창의 한나라당을 지지했다. 천정배 의원의 ‘호남 신당’도 비슷한 처지에 처하게 될 수 있다.
‘동교동 카드’와 ‘손학규 카드’
그렇다고 문재인 대표가 책임을 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천정배 의원이 내세우는 ‘뉴 DJ 플랜’에 입각한 ‘호남 신당’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동교동계에 기회를 한번 주는 것이다.
그동안 호남 민주계는 노무현・문재인 등 영남 출신 대선 후보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당권(黨權)에서는 늘 소외되었다. 이번에 당권-대권 분리를 토대로 동교동계가 당의 중심에 서게 되면 최소한 ‘호남 신당’은 제어할 수 있다.
대표 경선에 나섰던 박지원 의원이 “문 대표는 제일 높은 지지를 받는 야당 대통령 후보이고, 그 길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럴 경우 “호남 지역주의에 기대어 ‘도로 민주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동교동계가 호남을 안정시키고 내년 총선에서 불이익을 걱정하는 비노계의 근심을 잠재울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해 볼 만은 하다. 그런 후에 ‘문재인, 안철수, 박원순’ 빅(big)3 간의 공정하고 역동성(力動性) 있는 대권 경선(競選) 환경을 만들면, 새정연으로서는 실(失)보다는 득(得)이 클 수 있다.
반면에 문 대표가 ‘친노 패권주의’를 청산한다면서 사무총장 등 핵심 당직자를 비노 세력으로 교체하고 안철수 의원 측과 협업(協業)을 통해 당을 쇄신하면서 현행 지도체제를 고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미봉책으로는 호남의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어렵다.
만약 ‘문-안’ 연대가 ‘동교동 배제’로 이어지면 호남 민심은 급격하게 악화되어 ‘호남 신당론’은 탄력을 받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새정연의 분당(分黨)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치에 불가능이란 없다. 동교동계와 천정배가 결합해 ‘뉴 DJ 신당’을 만들 수도 있다. 제1야당이 새정치국민회의와 ‘꼬마 민주당’으로 분열되어 총선을 치렀던 1996년 상황이 재현(再現)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내년 총선에서 ‘호남 자민련’이 탄생될 수 있다.
친노 세력이 이런 최악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좋은 카드가 하나 있다. 바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 후 칩거하고 있는 손학규(孫鶴圭) 전 대표를 복귀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내 친노와 비노 간의 전략적 균형 상태를 이룰 수 있다.
문제는 손학규 전 대표가 호남의 적통(嫡統) 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호남 민심’을 다스리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손 전 대표가 당에 복귀한 후 정권 창출을 위한 강도 높은 당 쇄신을 추진하면서 천정배 의원이 당에 복귀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면, ‘호남 신당론’은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도 있다.
2. 새정연의 변신
‘계파 청산’ 對 ‘수권 정당 능력 강화’
4·29 재・보선 참패 이후 집단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새정연의 변신 여부도 중요한 변수이다.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다”며 당 대표가 된 지 석 달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문재인 대표는 참패했다. 선거 패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 대표가 보여준 ‘극단과 배제의 리더십’이 핵심이다. 단적으로, 유세 과정에서 박지원 의원을 비롯한 동교동계는 뒷짐을 졌고, 김부겸·박영선·정세균 등 당의 간판은 좀체로 눈에 띄지 않았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부패 정치 청산이 화두(話頭)로 부상했는데도 새 정치의 아이콘이라는 안철수 의원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작년 7·30 재·보선 때 문 대표가 단 한 번도 지원 유세를 하지 않았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새정연 내에서 ‘친노’에 대한 반감은 임계점(臨界點)에 다다른 양상이고 ‘친노 피로감’이 호남엔 만연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 총선에 임할 광주 지역 국회의원들이 야권 재편 움직임에 휩쓸리면, 새정연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특히 총선을 앞두고 새정연 공천을 받지 못한 당내 인사와 원외(院外) 인사들이 천 의원을 중심으로 ‘호남 신당’ 또는 무소속연합의 형태로 뭉칠 가능성이 있다.
문재인 계속 버티면 ‘호남 逆風’
▲ 지난 5월 8일 새정연 최고위원회의에서 정청래 최고위원의 발언에 분개한 주승용 최고위원이 회의장을 나가고 있다. 회의장 벽에는 ‘절체절명의 각오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문재인 대표가 물러나도, 그대로 눌러앉아도, 새정연의 문제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있었던 재・보선에서 새정연이 모두 패배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황이 다르다. 당장 몰아치고 있는 ‘호남 신당론’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문 대표의 사퇴 이외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리얼미터가 4·29 재·보선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4월 30일~5월 3일) 결과, ‘새정치연합이 못한 결과’라는 응답이 60.9%로 나타났다. ‘새누리당이 잘한 결과’라는 응답은 22.7%에 그쳤다. ‘새정연이 못한 결과’라는 응답은 광주에서 72.2%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런 상황의 심각성을 무시하고 문 대표 체제가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지 않고 적당히 넘어가려고 하면 호남 역풍을 맞을 것이다. 천정배 의원은 그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릴 것이다. 정청래 최고위원의 막말과 주승용 최고위원 사퇴 파문처럼 새정연 내 계파 갈등이 지금처럼 계속되면 ‘천정배 신당’의 공간은 넓어질 수밖에 없다.
친노 패권주의가 청산되면 호남 민심은 새정연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다. 현재 새정연은 친노-비노 간의 계파 갈등도 문제지만,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이기 때문이다.
보수 우위의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새정연이 가야 할 길은 수권 정당으로서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최근 공무원 연금 개혁 과정에서 새정연은 ‘대책 없는 포퓰리즘’으로 자기 부정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개혁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개악(改惡)으로 치달았다.
4·29 재·보선 이후 한국갤럽이 실시한 조사(5월 6~7일)에 따르면 대통령 지지도는 39%로 변함이 없었다. 정당 지지도는 새누리당이 41%, 새정연이 24%였다. 새누리당과 새정연에 대한 정당 지지도 격차는 지난 2월 8일 문재인 대표가 선출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벌어졌다.
이런 결과는 재·보선 결과가 영향을 미친 면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새정연이 공무원연금 개혁 과정에서 보여준 인기영합적인 행태가 더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상향(50%)을 주요 골자로 여야(與野)가 합의한 공무원연금 개정안에 대해 ‘반대’(42%)가 ‘찬성’(31%)보다 높았다. ‘매월 국민연금 보험료를 더 내고 향후 연금 수령액을 늘리는 것이 좋다’(32%)는 방안보다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면 현행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54%)는 방안을 선호했다. 새정연이 고집하고 있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유권자인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새정연이 이렇게 일반 국민들의 생각과 동떨어진 정책을 내놓으면 내놓을수록 수권 정당의 이미지는 약화된다. 야당 심판론에 입각한 ‘호남 신당’은 탄력을 받게 된다.
3. 천정배의 능력과 자격
‘金大中의 길’ vs. ‘鄭東泳의 길’
천정배 의원이 과연 호남 민심을 규합할 만한 카리스마와 능력, 자격을 갖고 있느냐도 중요한 변수이다.
“광주 정치를 바꾸고 호남 정치를 살려내겠다”고 나선 천정배 의원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활동하던 인권변호사 출신이다. DJ의 권유로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 경기도 안산에서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를 시작으로 16~18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다. 2012년 총선 때는 서울 송파에 출마해 낙선했지만 이번 재・보선에서 화려하게 부활, 5선 의원이 됐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법무부 장관과 열린우리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이라고 불리면서 ‘개혁정치’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적도 있다.
이러한 화려함 못지않게 천 의원은 치명적인 약점(弱點)을 갖고 있다. 그는 2003년 ‘지역주의 청산’을 외치면서 민주당을 뛰쳐나와 열린우리당 창당에 앞장섰다. 지역구를 안산, 송파, 광주 광산을로 옮겨다닌 것도 흠이다. “DJ 정권 때 권력의 단맛을 본 뒤 자신의 입지를 위해 야멸차게 야당을 뛰쳐나왔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천 의원은 내년 총선 야권 연대에 대해 “우선 호남에서 새정치연합의 일당 패권 독점 구조를 깨뜨리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정책이나 비전면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진보, 확고한 개혁노선을 가진 사람들을 모을 생각”이라면서 “국민모임 등의 분들과 서로 협력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천 의원은 국민모임 합류에 대해서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확언했다.
최근 이희호 여사가 자신을 예방(禮訪)한 천정배 의원에게 “최근 DJ정신을 계승한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물론 감사하다. 그러나 정쟁(政爭)의 논리로 거론돼선 안 된다”고 말한 것도 부담이다. 그 직후 천 의원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야권 분열을 일으킬 생각이 없으며, 신당을 만들 계획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정동영의 실패
천 의원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천정배 의원의 행보 속에는 ‘정동영 몰락’의 DNA가 숨어 있다. 정치 입문에서 현재까지의 정치 행보를 추적해 보면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민주당(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까지 지낸 정동영 전 장관은 지난 2009년 4・29 재・보선 때 전주 덕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때 정 후보는 72.3%의 압도적인 득표로 승리했지만 그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정 후보는 당시 “개인의 유불리에 앞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국면을 지켜볼 수 없었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었다. 그는 불과 6개월 전에 있었던 대선에서 500만 표 이상의 차이로 대패해 당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안겨주었다. 그의 재・보선 출마는 ‘자숙(自肅)은 짧고 탐욕은 긴 행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때부터 호남 유권자들조차도 그를 더 이상 나라를 맡길 지도자로 받아주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천정배 의원이 신당을 창당할지 아니면 무소속연대를 할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과거에 지역주의를 청산하겠다고 한 사람이 이제는 호남 신당을 만들겠다면서 지역주의에 기대면 과연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까? 호남 일당독점(一黨獨占) 구조를 만든 원조(元祖)가 DJ인데 ‘뉴 DJ’를 만들어 호남 패권주의를 깨겠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는가?
탐욕이 숨어 있는 명분은 몰락의 씨앗을 잉태하기 마련이다. 천정배 의원이 실패한 정동영의 길을 걷지 않으려면 겸손해야 한다. 자신은 개혁의 주체이고 상대는 개혁의 대상이라는 오만한 자세로는 성공할 수 없다. 용기는 종종 겸손을 무너뜨린다.
호남 재편을 통한 새로운 변화는 야권 전체 분열로 연결될 수 있다. 지금 다수의 호남 유권자들이 변화를 갈망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호남 신당’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천 의원은 이 시점에서 과거 심대평(국민중심당)・박근혜(한국미래연합) 두 사람이 왜 실패했는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김형준 /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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