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아는 것이 힘이지만,
깨달아 안 것이 아니면 나의 것이 아니다.
깨달음만이 인간을 놀라게 만들고
그 놀람을 기쁨으로 바꾼다.
그리고 기뻐야 깨달은 대로 사는 능력이 생긴다.
배워서 아는 것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스스로 깨우친 깨달음이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주께서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귀를 열어’ 주신다.
이렇게 귀가 뚫린 자는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사 50: 4, 5)한다.
여기서 아침마다 ‘깨우치다(to arouse)’에 사용된
히브리어 우르는 ‘깨다(to wake)’는 뜻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듯이
깨어난 앎이 깨달음이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이 자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이 깨어지기까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눈을 뜨게하는 깨달음은
부서지는 고통과 함께 온다.
깨달음의 과정은 전투적이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이김’과 ‘깨달음’을 하나로 보았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를
새번역 성경은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고 번역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카탈람바노는
comprehend, perceive, overtake 라는 뜻이다.
깨달음이 곧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이 전투를 위해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화두를 붙들고 문을 잠근다.
그리고 먼저 깨달은 각자(覺者)는
수행자들에게 화두를 던진다.
깨달음을 위한 단골 화두는
‘뜰 앞의 잣나무’ ‘삼서근’ ‘니 뭐꼬?’ ‘무’이다.
‘뜰 앞의 잣나무’는 언젠가 내가 들어갈 관이요,
‘삼서근’은 내가 죽을 때 입을 옷이다.
‘니 뭐꼬’나 ‘무’는
죽음에 대한 심원(深遠)한 질문이다.
결국 그들이 깨달은 것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이거나,
아니면 자기가 신이라는 것이지만,
그렇게 깨달은 사람도 결국 죽음 앞에서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아포리즘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종횡하는 깨달음은
세상을 사는 지혜가 뛰어난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은
하나님을 아는 앎이다.
배워서 아는 지식은
머리가 좋으면 알 수 있지만,
인격적 앎은 사랑하는 마음의 둥지에서 눈을 뜨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없기 때문이다.
깨닫는 귀는 애정에서 오는 것이다.
그것을 솔로몬은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아 5:2)라고 노래했다.
곁에 자는 아빠가 듣지 못하는
아기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사랑하는 엄마는 듣는다.
겨우내 잠자고 있던 나무가
봄이 되면 따뜻한 기운을 맞아 눈(胚芽, bud)이 튼다.
배아의 눈(眼, eye)을 트게 하는
봄 기운이 무엇일까?
배아의 눈을 트게 하는 것은
희망의 바람이 아니라 절망의 바람이다.
자신의 진짜 모습은 절망의 순간에 드러난다.
죽음에 대하여 초연했던 사람도
죽음을 맞아 당당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은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기가 그렇게도 믿었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 아닌 타자에게로 눈을 돌린다.
절대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겸손은
절망을 딛고 일어선다.
절망의 손수건으로 마음을 정결케한 사람에게서
말씀을 듣는 눈이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