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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세례인 요한의 등장과 사역 및 예수의 세례와 족보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3:1-4:13절까지 이어지는, 이제 장성한 예수께서 완전하신 유일한 인자(人子)로서 불완전한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공생애를 개시하시기 직전에 공생애 개시를 위하여 세례인 요한을 통하여 그리고 스스로 준비하신 사실을 보도하는 일련기사의 개시 부분이다.
먼저 1-6절은 이미 예수의 선구자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세례인 요한이 그 옛날 구약 예언의 말씀 그대로 등장하였음을 보도한다. 다음 7-14절은 세례인 요한이 예수의 선구자로서 예수의 등장에 즈음하여 백성들을 미리 예비시키기 위하여 회개의 세례(Baptism)를 베풀며 전한 메시지의 내용과 그리고 15-20절은 특히 그가 예수의 선구자로서 예수의 등장에 대하여 예고한 메시지의 핵심과 그가 당대의 집권자인 헤롯(Herod Antipas)을 비판하다 투옥된 사건을 간략히 보여 준다.
21-22절은 주께서 공생애를 개시하시기 위한 첫 단계로 자신의 선구자인 세례인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를 받으셨던 사건을 보도한다. 마지막 단락인 23-38절은 문맥상으로는 일종의 중간기사로서 이제 곧 공생애를 개시하실 완전하신 유일한 인자 예수의 아담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 족보를 요약제시 하고 있다.
전반부인 1-20절은 마치 그 옛날 왕이 행차할 때에 왕이 보낸 사자(使者)가 앞서 가며 그 길을 평탄케 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왕의 도래(到來)를 예고하였듯이 그 자신도 하나님이 예수의 선구자로 이적적으로 예비한 한 특이한 사람인 세례인 요한이 이제 곧 도래할 인자 예수의 등장에 앞서 출현하여 사람들의 심령을 회개시켜 주를 예비케 하며 주의 도래를 예고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세례인 요한의 외침에 대하여 일부는 회개한 반면 대부분의 세상은 무관심하였으며 세상 권력자인 헤롯일가는 그를 정치적 이유로 투옥시켰음도 보여준다.
이를 구속사적으로 개관할 때에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얻는다. 먼저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의 등장과 사역은 멀리는 구약의 예언들(사 40:3-5; 말 3:1; 4:6)의 가까이는 천사가 사가랴에게 준 예언의 성취였다(눅 1:15-17). 어느 한 사건이 있기 오래전에 그에 대한 예언(prophecy)
이 있었고 그것이 후에 그대로 성취되면 우리는 그 예언을 주신 분은 신적 존재이며 그 이루어진 사건은 신적 개입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누가는 물론 사복음서의 기자들 모두가 그렇듯이 예수 사역의 여러 측면은 모두 구약의 예언들을 그대로 성취한 것임을 보여 준다. 본문의 세례인 요한의 등장도 구약 예언의 성취의 한 예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인 요한의 등장은 신적섭리(Providence)에 의한 것이며 그가 주께 대하여 전한 모든 증거는 모두 다 절대적 신빙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나아가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이 이러하니 더욱 많은 그리고 더욱 세밀한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는 일찍이 주께 대한 예언과 나아가 주가 새로 주실 예언들을 담고 있는 성경의 증거대로 우리의 참 구주(the Saviour)시며 또 절대 신뢰 할 수 있는 유일 한 분임 도 알게 된다.
둘째, 우리는 본문에서 세례인 요한의 메시지 그대로 주를 맞기 위해서는 먼저 심령의 회개가 필요하다는 구속사적 진리에 새삼 주목해야 한다. 회개로써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이의 해결을 주께 의뢰하지 않는 자는 주를 만날 필요도 없고 또 만나보아야 아무런 구원의 효력도 얻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 문제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 문제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러 오신 구주이시며 그 죄의 해결은 회개하여 주의 구속희생의 은총을 얻음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례인 요한이 지적하였듯이 심령의 회개는 실생활에서의 변화까지 동반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런 회개의 경고는 세례인 요한의 심판 경고가 보여주듯이 단순히 도덕적 당위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훗날 이를 근거로 하여 영생과 영벌이 결정되게 되는 무서운 법적 당위성까지 가진 것이다.
셋째, 우리는 세례인 요한을 투옥시킨 헤롯(Herord Antipas)의 행태에 대해서도 유의하여야 한다. 영적으로 볼 때 헤롯은 그 옛날 아담을 유혹하여 타락시킨 이래 이 현재 세상에서 세상 끝 날까지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엡 2:2)의 사주를 받은 세상 권력의 대표였었다. 헤롯이 세례인 요한을 핍박한 것은 사탄과 세상이 복음과 주의 종을 핍박한 것이었다. 또한 세례인 요한이 주의 등장을 예고하다 투옥된 것은 그가 그의 탄생과 사역에서도 주를 예표하였듯이 그의 수난으로도 주의 수난을 예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도 세상은 주님과 주님의 복음 나아가 이를 전하는 주의 종들을 억누를 수 없었다. 주의 복음은 영원하여 지금도 우리 앞에 영생과 영벌의 기준으로서 제시되고 있지 않은가!
한편 21-22절의 예수의 세례식과 그에 연이어 들려온 하늘의 증거는 짧지만 매우 심오한 구속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자신은 죄가 전혀 없으시므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나 예수는 먼저는 자신은 본래 제 2위 성자이셨으나 죄인의 구속주가 되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죄인과 같은 낮은 자리에 낮추심(빌 2:6-8)을 더욱 확증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후대 교회가 당신의 모범을 따라 세례의식을 지키도록 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다. 또한 더욱 오묘한 이유로는 사실 세례는 훗날 성도들이 자신과 연합하여 구속의 공로를 힘입을 통로였는 바, 비록 그 참 연합의 효력은 오직 성령 세례만이 주는 것이 있지만, 그 성령 세례의 외적 상징인 물세례의 중요성도 인정하사 이를 당신이 먼저 받으신 것이었다(롬6: 5; 고전 12:13).
한편 이제 공생애의 개시를 눈앞에 두고 겸손히 세례를 받으신 주님을 향하여 성령은 비둘기의 형상으로 강림(降臨)하고 성부는 음성으로서 예수를 성자로 인정 선포하는 말씀이 있었음이 보도되었다. 이것은 먼저는 예수가 인자요 동시에 성자로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심을 선포하는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성삼위 일체(Holy Trinity)의 동의와 참여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임을 예시한 것이다. 나아가 앞서 있었던 세례인 요한의 예수에 대한 증거와 대조할 때 세례인 요한이 땅의 대표로 예수를 메시야(Messiah)요 구주로 인정했다면 이는 하늘도 예수를 메시야요 구주로 인정 선포한 것임을 강력히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팔레스틴 땅에 오셔서 인자의 삶을 살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은 겸손과 사랑, 신성과 능력 그 자체이신 우리의 구주이시다.
마지막 단락인 23-38절은 예수의 족보를 보도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모계 즉 마리아쪽으로 본 예수의 족보를 예수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모든 인간의 조상인 아담(Adam)에게까지 나아가 결국 인간 전체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된 족보이다. 물론이는 아담에서 예수에게 이르는 장구한 혈통의 전승을 모두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중요 인물중심으로 기록한 약식 족보(略式族譜)이다. 이 족보를 열린 눈을 가지고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 이 족보는 그야말로 예수를 중심으로 태초부터 종말까지 전개되는 구속사의 진리와 그 전개를 응축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듭 강조한 사실이지만 누가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사실 중 주께서 죄로부터 순결한 유일한 인자로서 아담 이래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구속 희생하사 인간을 창조 당시의 상태로 회복시켜 구원을 주시는(엡 2:1-8) 측면을 강조한 복음서이다.
이를 전제하면 이 족보가 갖고 있는 구속사적 의의도 깨닫게 된다. 이 족보는 먼저 예수는 태초 아담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 모든 인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섭리(The God's Providence)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사람의 아들 곧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이 그와 연결되고 또 그가 모든 인간과 연결된 인자(人子) 그 자체가 되셨음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결국은 그가 모든 인간의 대료로서 인간을 위하여 구속사역을 행할 법적 근거가 성립되었음과 아울러 그의 구속의 효력이 모든 인간에게 끼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되었음이 강력히 암시된다. 다시 말하면 아담에서 시작된 죄의 역사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에 이르러 구속의 역사로 전환되어 그 구속(redemption)이 모든 인간에게 끼치게 되었음이 이 족보의 맥을 통하여 강력히 암시되고 있다.
또한 이 족보는 예수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로 태초부터 예수에게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간 역사 전체를 걸쳐서 계속 예비되고 진행되어 왔으며 또한 향후로도 종말까지 인간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인간으로 성육신 하사 인간을 구속 구원해 주신 주님의 구속사(救贖史) 또한 영원히 진행될 것(히 7:24,25)이라는 사실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외울 말씀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2)
세례 요한의 등장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세례 요한의 회개 선포
3 요한이 요단 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7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
15 ○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의 투옥
18 ○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예수의 세례와 하늘의 선포
21 ○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예수에서 아담까지의 족보
23 ○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25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26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27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28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29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30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31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32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33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34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35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37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본문 & 자료노트
주요 주제-3:1-10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
본장 연구 자료 참조.
도표-3:1-6 세례 요한에 대한 성경의 묘사
1. 오실 메시야를 기다린 자(마 11:3)
2. 여자가 낳은 자 중 큰 자(마 11:11)
3.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마 11:11)
4.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마 11:13)
5. 의롭고 거룩한 자(막 6:20)
6. 주 앞에서 큰 자(눅 1:15)
7.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눅 1:76)
8. 죄 사함을 위한 회개 선포자(눅 3:3)
9. 주의 길을 예비한 자(눅 3:4)
10. 물 세례를 베푼 자(눅 3:16)
11. 랍비(눅 3:26)
12. 주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눅 3:28)
13. 선지자보다 나은 자(눅 7:26)
14. 주의 사자(눅 7:27)
보감-3:7-14 참된 회개의 결과로 나타나는 삶의 변화
1. 다른 사람들을 겸손한 마음으로 섬김(창 50:17,18)
2.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려함(민 22:34)
3.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게 됨(삼하 24:17)
4. 죄악된 과거 생활에서 완전히 떠나게 됨(스 6:21)
5. 자신 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도 재물을 사용함(눅 3:11; 19:8)
6. 자신의 직업에 정직하고 성실히 임하게 됨(눅 3:13,14)
7. 자신의 현재 상황에 감사하게 됨(눅 3:14)
8. 자신의 부당한 행위들을 진심으로 뉘우치게 됨(눅 19:8)
9.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되, 원수라도 사랑하려고 노력함(롬 12:18-21)
10. 불만족과 불평의 생활에서 기쁨과 감사의 생활로 변화됨(살전 5:16,18)
원어 연구 -3:14, 무소하지
'무소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쉬코판테오'로서 이는 '쉬콘'과 '파이노'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여기서 '쉬콘'은 '무화과'(마 7:16)를 지칭하는 명사이며, '파이노'는 어떤 물건을 밝게 '비취나'(요 1:5; 벧후 1:17), '보이다'(마 6:5; 막 :7), 번개가 '번쩍이다'(마 24:27) 등의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따라서 원래 '쉬코판테오'가 가지는 의미는 빛깔이 퇴색하여 윤기가 없는 무화과를 윤기가 나도록 잘 닦아서 마치 번개가 칠 때의 번쩍임처럼 밝게 보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무화과 장사들이 무화과를 팔 때 싱싱하지 않은 무화과를 윤이 나게 잘 닦아 소비자의 구매욕을 충동질하여 무화과를 팔던 당시의 풍습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 의미가 확대되어 돈을 벌기 위해 남에게 속임수를 쓰는 행위를 지칭하게 되었다. 이에 이 단어는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다'(공동 번역)라는 의미에서 '토색하다'(눅 19:8)라는 뜻으로 달리 번역되기도 했다.
특별히 영역본인 NIV역에서는 '무소하지'를 '거짓되이 송사하다'(accue falsey)로 옮기고 있는데. 이 경우 남의 물건이나 돈을 착취하기 위해 죄 없는 사람을 거짓 증거를 가지고 고소하여 감옥에 가두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에서 세례인 요한이 군인들에게 지적한 죄. 곧 '무소하는 것'이란 자신의 직분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토색하거나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군인들에 대한 이러한 세례인 요한의 지적을 통해 우리 자신도 거짓된 행동이나 말 등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일은 없는지, 또 그러한 행동을 의식지 못한 채 무심코 행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난제해설 -3:23-38
마태와 누가의 예수 족보 대조 및 그 차이점의 조화
사복음서에서 가장 큰 난제 중의 하나는 동일하게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마 1:1-16; 눅 3:23-38). 이에 두 족보의 특징들을 대조하여 살펴보고, 또 차이점들을 서로 조화시켜 봄으로써 이 난제를 해결해 보고자 한다.
1. 마태의 족보 기록 목적
마태가 자신의 책 첫머리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 족보는 부친 요셉의 족보로서 다윗과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까지 하향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족 혈통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이시며, 태초 이래 구속주에 관해 계시한 모든 약속과 예언의 성취자이시고, 아울러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이 대망하던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마태의 기록 목적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는 선민으로서의 혈통을 중시하는 그들의 특성에 맞게 예수가 선민의 최고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임을 강조했다. 또 유대인의 족보 기록 방식을 철저히 지켜서 7의 2배수인 14대(代)씩 세 그룹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인의 족보 기록 방식에 관해서는 역대상 7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마태는 족보에 여자 이름은 결코 기록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관습과는 달리 5명의 여자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육적인 혈통을 초월하여 믿음이 더 우선됨을 암시하고 있다.
2. 누가의 족보 기록 목적
예수의 공생애가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누가의 예수 족보는 모친 마리아의 족보로서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과 아브라함을 거쳐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창조자이신 하나님에게까지 상향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가 예수는 인류 가운데 가장 완전한 인자(人子)로서 온 인류의 궁극적 소망을 성취하시는 구세주이시며, 동시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한 창조 당시의 인간의 완전한 모습을 회복케 하시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인류는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죄와 저주 아래 있게 되었으라,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생명 가운데 있게 된 것이다(롬 5:12,19). 더욱이 누가가 모친 마리아의 족보를 중심으로 예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는 일찍이 구속주(救贖主)가 여자의 후손으로 오리라고 한 예언(창 3:15)의 성취자이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 두 족보의 대조
위에서 언급한 바 두 족보는 두 저자의 서로 다른 기록 목적에 따라 각각 독특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 세부 사항은 마 1장 자료노트의 도표를 참조하라.
4. 두 족보의 차이점의 조화
두 족보가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다른 자료에 근거하여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기록 방식에 있어서, 혹은 기록 범위에 있어 서로 다르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단지 문제는 두 족보에서 다윗과 아브라함 사이의 족보는 거의 일치하는데, 예수에서 다윗 사이에 일치하는 이름이 단 3명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태는 예수의 부친인 요셉의 부친을 야곱으로 기록하나 누가는 헬리로 기록한다. 또 마태는 다윗의 아들을 솔로몬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나단으로 기록한다. 그리고 인원수에 있어서도 누가가 마태보다 훨씬 많이 기록한다. 이러한 차이점들을 조화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마태는 예수의 왕적 족보를, 누가는 제사장적 족보를 기록했다는 견해.
이는 다윗과 예수 사이의 족보에 대해서는 가능한 설명이나 다윗과 아브라함 사이의 족보에 대해서는 타당성이 없다.
② 마태는 예수의 부친 요셉의 실제적인 족보를.
누가는 법적인 족보를 기록했다는 견해, 이는 마태와 누가가 각각 다르게 소개하는 요셉의 부친 야곱과 헬리가 이복 형제였으며, 헬리가 자식 없이 죽고, 그 아내와 야곱이 계대 결혼법(신 25:5-7)에 따라 다시 결혼하여 낳은 것이 요셉이라는 견해에 근거한 것이다. 이 견해는 상당히 지지를 받고 있으나 뚜렷한 증거가 없다.
③ 마태는 예수의 부친 요셉의 족보를, 누가는 모친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했다는 견해, 이렇게 볼 때 헬리는 요셉의 부친이 아니라 마리아의 부친이 된다. 본문 23절에서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라는 말씀에서 누가는 요셉의 족보가 아닌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암시를 발견한다. 즉 사람들은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으나 실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난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동일한 유다 지파라는 사실만 입증된다면 이 견해는 가장 타당한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세 견해 중 어느 하나를 옳다고 확정지어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의 한계로 성경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여 성경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이다. 성 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해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깨달으나 장차는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고전 13:12).
인물 연구-3:2 가야바
요 11장 연구 자료 참조.
인물 연구-3:3-17 세례 요한
막 1장 연구 자료 참조.
역사 배경-3:12,13 팔레스틴의 세리직
눅 19자아 자료 노트 참조.
3:1-20 세례인 요한의 사역
이미 앞서 살펴본 1,2장에서 본서의 저자 누가는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 기사 및 탄생 기사를 병행하여 교차시켜 소개하였다. 이제 본장에서도 다음 장(눅 4장)에서부터 시작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메시야되신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1-20절)과 하나님을 기원으로 하는 예수의 족보(24-38절)를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누가가 세례인 요한과 그리스도를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것은 아마도 그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했던 베드로(행 10:37)와 같이 세례인 요한의 출현과 사역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즉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사역과 그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의 사역을 구약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 시대를 여는 연속 선상의 동일한 사역으로서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본문은 세례 요한 사역의 역사적 배경과 시작(1-6절), 회개의 선포 및 세례(7-14절), 그리스도 증거(15-17절), 투옥 사건(18-20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누가는 세례인 요한 사역의 역사적 배경을 서술함에 있어서 다음 장에서부터 소개될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복음에 역사적 객관성과 실재성을 부여하기 위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배경, 인명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여튼 세례 요한의 출현은 이미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사 40:3-5) 그의 사역은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각성하고 회개케 함으로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는 것과 그 메시야를 소개하고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역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선구자요 말라기에 예언된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로서의 그의 외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 부분(7-9절)에서 그는 행함이 있는 참된 회개 없이 물세례를 받는 것은 무익하다는 사실을 경고하며 더 늦기 전에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세례인 요한은 구원의 조건은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 진정한 회개를 통한 삶의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두 번째 부분(10-14절)은 누가만이 독특하게 기록하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생활 윤리를 교훈하고 있다. 이 교훈은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주는 것인데,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돕고 공정하며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권면한다. 이것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누가의 깊은 이해와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세 번째 부분(15-17절)은 세례인 요한의 선포 중 가장 핵심적인 것으로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야를 소개하고 있다.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 뿐이며 메시야는 눈에 보이는 세례가 아니라 참된 세례를 주실 분이고 종말에 심판을 행하실 분이심을 선포한다. 이상에서 열거된 세례 요한의 사역과 관련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누가는 시기적으로 훨씬 뒤에 있었던 사건인 세례 요한의 투옥 사건을 본문에 앞당겨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복음의 핵심이 세례 요한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지게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 세례 요한에 대한 기사는 다음절에 나타나는 예수의 수세 사건(21절)을 끝으로 본서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① 회개하여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세례인 요한의 선포를 통해서 우리는 진실한 회개의 심정을 가지며 삶의 자세에 변화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게 됨을 알게 된다(마 7:15-21).
② 세례 요한이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며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의 사명만을 다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냈듯이 우리들도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자세를 항상 견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3:1 디베료 가이사. - A.D. 14-37년 사이에 로마 제국을 통치한 로마 제 2대 황제로 로마 초대 황제이자 그의 양아버지였던 아구스도(Augustus)가 A.D. 14년에 죽자 그 위를 계승했던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케사르'(Tiberius Julius Caesar)를 가리킨다.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참조.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 디베료는 A.D. 14년에 즉위했다. 따라서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되는 때는 A.D. 28년이 된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출현한 때는 A.D. 28년이 될 것이다(3:2,3).
그러나 세례 요한의 출현 시기를 A.D. 28년으로 계산하면 예수께서 3년 반의 공생애 기간을 마치고 A.D. 30년 봄에 죽으셨다는 것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례인 요한은 예수보다 약 6개월 먼저 났는데 예수께서는 그의 나이 30세인 A.D. 27년에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열다섯 해'가 순수하게 디베료의 단독 통치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부친 아구스도와의 약 2년간의 공동통치가 합산된 기간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즉 실제로 세례인 요한이 출현한 시기는 A.D. 26년이 되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 - 로마의 유대 지방 파견 제 6대 총독으로 10년 동안(A.D. 26-36년) 재임한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의 재판을 주도하여 십자가형을 선고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마 27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 여기서 '헤롯'은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로서 헤롯 대왕이 사마리아인 아내 말다스(Malthace)에게서 난 아들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통치한 분봉왕(B.C. 4년-A.D. 39)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헤롯은 거의 다 이 헤롯 안디바를 말한다. 헤롯 안디바에 대해서는 마 14장 연구자료를 참조 하라. 반면 마 2:1-19, 눅 1:5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대왕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에 대해서는 마 2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에서 '분봉왕'이란 헬라어 '테트라르케스' 또는 '테트라아르케스'로서 본래의 의미는 한 지역의 1/4을 다스리는 사람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원래의 의미는 쓸어버리고 소규모의 지역을 통치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들은 지위의 독립성과 권력에서 제한성을 지녔다. 마 14:1 주석 참조.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분봉왕으로. - 빌립(Philip)은 헤롯 대왕이 예루살렘의 클레오파트라에게서 얻은 아들로 그의 이복 형제이자 장인이며, 헤로디아의 전남편이었던 빌립과는 구별된다.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역사적 배경' 참조. 그는 B.C. 4-A.D. 33년까지 이두래와 드라고닛(Traconitis)지방을 통치했다. 특히 그는 바네아스(Banias)를 확장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로 개명했고, 벳새다를 확장하여 '벳새다 줄리아스'로 명명하기도 했다.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 혹자는 루사니아(Lysanias)가 그 당시(A.D. 28년경) 통치자가 아니라 그 이전 사람임을 주장하면서, 누가가 이 부분에서 연대적 착오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Wellhausen). 그러나 다메섹 서부에서 발견된 1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비문은 루사니아가 당시 분명한 아빌레네의 통치자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Grdlenberg). 한편 아빌레네는 다메섹 서북 약 16km 지점의 지역이다.
3:2 안나스와 가야바가‥‥있을 때에. - 예수와 세례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당시의 종교적 정황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안나스(Annas)는 A.D. 6년 총독 구레뇨(Quiriaius)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후, A.D. 15년 유대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Valerius Gratus)에 의해 해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해임된 후에도 계속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요 18:13,24). 안나스의 뒤를 이어 이스마엘(Ishmael), 엘르아살(Eleazar), 시몬(도mon) 등이 차례로 대제사장직을 계승했는데 그들은 모두 합하여 불과 3년도 채 대제사장직에 머물지 못했고 A.D. 18년에 안나스의 사위인 가야바(Caiaphas)
가 대제사장직에 올라 A.D. 26년 로마에 의해 해임될 때까지 대제사장으로 재임했다. '가야바'에 대해서는 요 11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본래 유대에서의 대제사장직은 세습직이며 또한 종신직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제사장을 그들 마음대로 임명 또는 해임시켰다. 그러한 결과 실제로 B.C. 37년부터 A.D. 26년 사이에 무려 28명의 대제사장이 출현하기도 했다. 하여튼 대제사장직은 로마 정권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지만,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는 대제사장직이 종신직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유대에는 로마 정부에 의해 새로 임명된 대제사장과 비록 로마 정부에 의해 해임되었지만 대제사장으로 존경받는 대제사장이 공존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에는 종종 '대제사장들'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기도 한다(마 21:23,45). 한편 누가가 세례인 요한의 사역 훨씬 이전에 해임된 안나스 대제사장을 가야바와 동시에 언급하는 이유는 안나스가 오랫동안 대제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유대 사회에 맡은 영향력을 끼쳤던 까닭에 해임된 이후에도 실질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매문이다. 즉 외형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으나 막후 실권자는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였던 것이다. 이렇듯 누가는 외형적인 상황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정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요 18:13에서 예수님이 잡힌 후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 먼저 끌려간 것이 아니라. 안나스에게 먼저 끌려간 것은 그 당시 유대의 종교적 실세를 잘 보여 주는 실례라 하겠다.
빈 들. - 여기서 빈 들은 유대 광야를 가리키는 말로(마 3:1) 요한은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기거하며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삶을 준비했다(눅 1:80), 이제 그 요한에게 드디어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것이다.
사가랴의 아들‥‥임한지라. - 누가는 세례인 요한이 소명을 받는 모습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소명을 받을 때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묘사한다(렘 1:2,4; 욜 1:1). 즉 요한은 말라기 이후 470여년 만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것이다.
3: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세례인 요한은 요단 강 부근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이처럼 요한이 요단 강 부근에서 사역을 시작한 이유는 아마도 그 곳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 수 있는 물이 풍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세례인 요한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 요한의 사역을 한 마디로 정리해 놓은 구절이다. 즉 요한은 회개를 외치며 자기 죄를 자복하고 나아오는 자에게 세례를 베풂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영접하기에 합당하게 준비시켰던 것이다. 마 3:2,3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누가는 '회개'를 '죄 사함을 얻게 한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회개가 불신앙과 온갖 죄악으로부터의 돌이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 본절에서 6절까지는 사 40:3 이하의 인용으로 마태나 마가가 사 40:3 한 절만 인용하고 있는 반면(마 3:3; 막 1:3), 누가는 사 40:3-5을 포괄적으로 인용하고 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평탄케 하라. - 사 40:3-5은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유대 땅으로 귀환할 때(B.C. 537년), 그들과 함께 돌아오실 이스라엘의 참 왕되시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이었다. 고대에는 왕이 어느 지역을 행차할 경우 선구자가 앞서 가서 왕의 행차를 외치고 왕이 탄 마차가 지나가기 쉽도록 하기 위해 인근의 사람들을 모아 도로를 고쳐 평탄케 했다. 이러한 왕의 선구자의 사명을 공관 복음서의 기자들은 세례인 요한의 사명과 결부시켜 그를 메시야의 도래가 임박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마음을 바르게 고쳐(회개) 그들이 메시야를 영접하기에 합당한 존재들로서 세울 선구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 여기서 '예비하라'(헤토이마사테)는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 하라' 라는 뜻으로, 본절은 결국 세례 요한의 사명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사역을 행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준비하는 선구자였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주'(퀴리오스)는 사 40:3에서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여기서는 이 땅에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첩경을 평탄케 하라. - 여기서 '첩경'(트리부스)은 '왕의 대로'를 가리킨다. 그리고 '평탄케 하라'(유데이아스)는 '곧게 하라', '바르게 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절은 왕의 대로를 바르게 하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본절은 세례인 요한의 사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 주는 바, 그는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도록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회개시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는 사명을 가졌던 것이다.
3:5 모든 골짜기가‥‥평탄하여질 것이요. - 왕의 행차를 알리는 선구자에 의해 왕의 대로가 평탄케 닦여지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메시야를 맞기 전에 우리 자신들의 마음 속에서 준비되어져야 할 영적, 도덕적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모든 골짜기', '모든 산과 작은 산', '굽은 것', '험한 길'은 우리 마음 속에 놓여져 있는 교만, 오만, 간사함, 무관심, 냉정함, 고집 등 메시야를 영접하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을 가리킨다. 이러한 장애물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제거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영접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Matthew Henry). 다시 말해서 우리가 회개하여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질 때 그리스도는 비로소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시고 우리는 그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되는 것이다.
3:6 모든 육체가‥‥구원하심을 보리라. - 누가는 이 부분을 70인역(LⅩⅩ) 사 40:5의 앞부분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란 부분을 생략한 채 부분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육체'라는 것은 전 인류를 나타내는 히브리 용법으로(마 24:22; 벧전 1:24) 세계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행 28:28의 언급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특별히 본서가 이방인을 위하여 쓰여진 것임을 생각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이가 없이 전 인류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 본서의 목적이다. 하여튼 메시야의 세계적인 구원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으로 구체화 되어졌고, 이 세상 마지막 날의 큰 구원에서 절정에 이를 것이다(Lenski).
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 요한은 그의 세례를 받기 위해 무리를 지어서 그에게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진노의 경고를 선포한다. 그런데 마 3:7-10에 따르면 세례인 요한이 진노의 경고를 선포한 대상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 중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왔었고, 요한은 이들에게 죄를 책망하는 진노의 경고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독사의 자식들아. - 성경에서 '뱀'은 사탄의 상징이다(창 3:1-15). 따라서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은 사탄의 후예라는 말이다. 즉 세례인 요한은 지금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일꾼이라고 자처하지만 종교적 위선과 기만 그리고 도덕적 타락으로 똘똘 뭉쳐 있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사탄의 자녀와 같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진정 회개하지 않는 자는 혈통적으로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주장한다 할지라도 결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가 없으며 사탄의 자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누가 너희를 가르쳐‥‥피하라 하더냐.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임할 무시 무시한 진노들(사 13:9; 습 1:15; 말 3:2)을 피하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로 몰려왔다. 그들은 아마도 세례인 요한이 베푸는 세례가 장차 임할 진노를 피할 수 있게 하는 의식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요한은 이들을 향해 준엄한 경고를 선포한다. 특별히 요한의 선언은 어떠한 외적인 종교 예식으로도 장차올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진정한 회개 없이 받는 세례는 여기에 위선적 행위를 추가함으로써 더욱더 하나님의 진노 속으로 자신을 빠져들게 할 뿐인 것이다.
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세례인 요한은 다가올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선 먼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을 촉구한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 여부는 삶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형식적인 죄의 고백은 결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세례란,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자기 삶의 내적 변화의 외적 표적으로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그 증거인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외적 물세례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받아야 할 세례는 내적 변화 뒤에 따르는 성령 세례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행 8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속으로 아브라함이‥‥말하지 말라. - 세례인 요한의 영적 통찰력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자만심을 꿰뚫고 있다. 즉 유대인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구원을 보장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혈통을 이어 받았어도 그것이 그들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단호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함은 물론(요 8:33-37), 아브라함은 그 후손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영원한 근거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없다'라고 까지 호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혈통이나 민족적 특권의 외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롬 4:1-25). 즉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은 회개를 통한 믿음을 소유한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 여기서 '돌들'에 대해서는 요단 강가에 널려 있는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Carr, Vincent)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자부했던 유대인의 반대 개념으로의 '이방인'들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Lenski, Schiirmann). 어느 견해를 취해도 무방하나 두 견해를 종합하여 일차적으로는 단순히 돌을, 이차적으로는 이방인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즉 세례 요한은 지금 이스라엘로 하여금 선민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과 같이 여긴 유대인들의 자긍과 교만함을 꺾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들이 돌과 같이 여겼던 이방인들을 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드실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한의 말에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즉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신다면 비록 돌 같은 이방인의 마음이라도 변화시켜 구원 얻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며, 둘째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구원의
순서는 분명 유대인이 먼저요 이방인이 다음이다(롬 1:16).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구분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즉 누구나 참다운 회개와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누구나 회개와 믿음이 없으면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갈 3:7).
3:9 이미 도끼가‥‥놓였으니. - 나무뿌리에 도끼를 갖다 놓았다는 것은 곧 그 나무를 찍어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본절은 참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특별히 도끼가 '뿌리'에 놓였다는 것은 심판의 철저함과 완벽함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종종 소멸시키는 불로 언급되고 있다(말 4:1; 마 13:). 특별히 구약은 선악간의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여 악인의 심판을 '나무를 찍어 불에 던지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사 10:33; 렘 46:22), 결국 세례인 요한은 지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하고 있으면서 세례만 받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에게, 진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기 원한다면 회개할 뿐만 아니라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3:10 무리가 물어 가로되‥‥무엇을 하리이까. - 본절에서 14절까지는 세례인 요한에게 다가와서 질문하는 세 그룹의 집단이 등장한다. 즉 '무리'(10절), '세리'(12절), '군병'(14절)들이 세례인 요한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을 듣고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질문하고 나선 것이다. 그 가운데 본절에 나타나는 '무리'(오클로이)는 그들 자신을 구별하는 아무런 특별한 것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일반 사람들을 가리킨다(Lenski).
3:11 옷 두 벌 있는 자는‥‥그렇게 할 것이니라. - 세례 요한은 진정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사랑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Marshall). 즉 세례인 요한은 자기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과 나눌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옷'에 해당하는 헬라어 '키토나스'( )는 '겉옷'을 의미하는 '히마티온'( )과는 달리 남녀가 공용으로 입는 '속옷'을 가리킨다. 팔레스틴 지방은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곳이므로 저녁에 기온이 떨어지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속옷을 두벌 입는 경우도 있었고, 예비용으로 여러 벌을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속옷을 한 벌의 속옷도 없이 추위에 떨어야만 하는 자들과 나누어 가질 것을 요한은 요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음식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요한이 새롭고 낮선 율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 이미 선포된 율법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레 19:18), 예수님 역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임을 말씀하신 바 있다(마 22:39-40).
3:12 세리들. - 세례인 요한에게 다가온 두 번째 그룹은 세리들이다. 이 세금 징수업자들은 로마 총독의 관할 하에 있었는데 로마의 각 속주에는 눅 19:2에 나오는 삭개오와 같은 세리장이 있었고, 그 밑에 세금과 관세를 실제적으로 거둬들이는 세리들이 있었다. 본문에 나타난 세리는 후자의 세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세리들은 일정한 금액을 로마에 바치고 수출입에 대한 관세나 상품의 통과세에 대한 징세권을 얻었다. 그런데 이들은 로마 정부를 위하여 동족의 주머니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권을 위하여 세금 징수 과정에서 온갖 부정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민족의 반역자나 창녀나 살인자, 도둑과 같은 부류의 죄인들로 취급되어 매우 심한 경멸과 멸시를 받아야만 했다. 심지어 세리의 돈은 약탈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성전과 회당의 봉납물로도 받지 않았다. 한편 세리들이 세례인 요한에게 다가간 것을 보면 요한이 세리들의 직업 자체를 경멸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세례인 요한은 세리들을 한 인격으로 대우한 것이다. 세리에 대한 이러한 자비로운 태도는 예수님에게서도 볼 수 있다. 즉 예수님은 세리들과 같이 식사도 하시고 세리들을 친구로 삼으셨으며 (막 2:15-16), 또한 세리였던 마태를 사도로 부르기까지 하셨던 것이다(마 9:9-10).
3:13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 '늑징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랏세테'의 원형 '프랏소'는 '수행하다', '실행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는 '세금이나 이자를 징수하다' 라는 뜻으로 쓰여졌는데 '강제로 징수하다'라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Marshall). 즉 세례인 요한은 합당한 회개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요구하는 세리들의 질문에 대해 합당한 세금 징수를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례인 요한은 진정한 회개의 표시로서 세리의 직업 자체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삶의 변화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례인 요한은 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사회 구조 자체를 뒤엎는 혁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현실 도피를 요구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는 오히려 각 개인이 처해 있는 자리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고 정의롭게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각 개인을 세워 주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때 사회는 아름답게 변화되기 시작하는 법이다.
3:14 군병들. - 세례인 요한을 찾아온 세 번째 그룹은 군병들이었다. 여기서 '군병들'(스트라튜오메노이)은 징집된 군인들이라기보다는 직업적인 용병들을 가리킨다(Plummer, Lenski), 이들은 빌라도 혹은 헤롯의 군인들로서 아마도 일종의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하며 세리들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도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들은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고문하여 돈을 빼앗음은 물론 심지어 개인적으로 돈을 강탈하기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연히 사람들에게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임에 분명하다.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요를 족한 줄로 알라. - 여기서 '강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세이오'는 '강하게 잡아 흔들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협박하여 돈이나 재산을 갈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소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코판테오'의 뜻 역시 '속이다', '수탈하다' 뜻으로 여기서는 '허위 명목으로 강탈하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절은 협박이나 허위 명목으로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하지 말고 자신들의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말이다. 사실 당시 군인들은 봉급이 매우 적어 그들의 생계를 위해서 협박과 중상 모략과 같은 부정한 방법으로 백성들의 돈을 갈취 했다고 한다(Robertson). 그 결과 사회 질서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핍절해 갔을 것임에 분명하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요한은 군병들에게 자신들의 봉급에 만족할 것을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 제시한 것이다.
한편, 무리, 세리, 군병들에게 세례인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제시한 것은 그들의 생활 또는 직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회개와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거둬야 함을 교훈해 준다. 아울러 요한이 제시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한 가지로 통일성을 이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이다. 진실로 우리에게 사랑의 모습이 있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인정받을 것이요, 만일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여김 받지 못할 것이다(마25:31-46).
3:15 백성들이 바라고‥‥심중에 의논하니. - 세례 요한 당시의 유대 사회에는 메시야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가 강하게 부각되었던 때이다. 그러한 때에 세례인 요한이 나타나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선포하자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은 최고조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하면 세례인 요한의 확신에 찬 외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례인 요한이 메시야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까지 하였다. 다만 그들은 세례인 요한이 유다지파 출신이 아니라는 것과 메시야가 오면 베풀리라고 했던 구약에 예언된 이적을 세례 요한이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사 11:1; 29:18,19) 그가 메시야라는 확신은 하지 못했다. 특별히 여기서 '의논하니'(디알로기조메논)라는 말은 '변론하다', '추론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백성들 사이에서 세례인 요한이 메시야인지 아닌지 의견이 매우 분분했음을 보여 준다. 요 1:19,20을 보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요한에게 직접 물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6,17절은 그에 대한 세례인 요한의 답변이다.
3:16 나는 물로‥‥그는 성령과 불로. - 요 1:20을 보면 세례인 요한은 자신이 메시야인가를 묻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단호하게 부인한 것으로 나타난다. 반면 여기서는 세례인 요한이 그의 직임과 그리스도의 직임을 비교, 제시함으로써 그가 그리스도가 아님을 밝히고 나아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한편 구약 시대에는 물로 부정해진 몸이나 물건을 씻음으로 정결의식을 행하였다
(레 15:5-27; 16:26-28; 신 23:10,11).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의 물세례는 죄로 오염되어 부정해진 몸을 씻어내고 정결케 됨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하겠다(히 10:22). 그러나 물세례는 어디까지나 죄씻음에 대한 상징적 행동이요,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요한 역시 예표적 존재에 불과하다. 진정 우리의 죄 씻음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며 그 성령을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 세례인 요한은 오실 메시야가 자신과 비교할 때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하고 있다. 본문의 '신들메'라는 것은 신발을 발에 고정시켜 주는 끈을 가리킨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발은 오늘날의 신발처럼 발전체를 덮는 것이 아니라 끈으로 발과 연결시켜 신는 일종의 샌들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신을 벗을 때는 반드시 끈을 풀어야만 했는데, 종을 두고 있는 집에서는 종들이 그 끈을 풀어 주거나 매어 주곤 했다. 지금 요한은 바로 이 상황을 그리스도와 자신에게 도입하여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들메를 풀만한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메시야의 선구자로 이 땅에 온 요한의 철저한 소명 의식과 모든 선지자 보다 나았던 세례인 요한(마 11:9)의 지극히 겸손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실 것이요. -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는 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힘은 물론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을 증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과 불세례에 대해서는 그것이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와 같은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로 대립된다.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령 세례를 신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로, 불세례를 불신자 위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 한다(De Wette, Meyer). 반면 후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령 세례와 불세례를 다같이 신자 위에 임할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석하고 '불'을 성령의 사역적인 측면을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한다(Alford, Bengel). 이 가운데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다. 왜냐하면 헬라어 원문을 보면 전치사 '엔'( )이 '성령'과 '불'을 동시에 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성경에서 '불'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했지만, 성도들을 정결케하는 연단의 불로도 사용되었다(말 3:2-5).
3:17 손에 키를 들고‥‥불에 태우시리라. - 본절은 농부가 타작하는 모습을 통해서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여기서 '키'(프튀온)는 탈곡된 곡식을 알곡과 쭉정이로 분리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기구로, 그것이 손에 들렸다는 것은 심판의 임박성을 보여 준다 하겠다. 한편 여기서 사용된 단어들의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면 '타작마당'은 의인과 악인이 혼재되어 있는 '이 세상'을, '알곡'은 '의인'을, '쭉정이'는 '악한 자'를, '키를 손에 든 자'는 세상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를 가리킨다. 또한 '곳간'은 의인의 영원한 안식처로의 '천국'을 상징하며, '꺼지지 않는 불'은 악인들의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을 상징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본절은 최후의 심판과 그로 인한 의인과 악인의 영원한 분리를 보여 준다 하겠다.
3:18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 세례인 요한의 메시지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경고의 말이었지만 회개하는 자에게는 도리어 좋은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자에게는 요한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게 하고 영원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정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좋은 소식을 전하다'에 해당되는 '유엥겔리제토'는 '복음을 전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원사역을 가리킨다. 그와 같이 요한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구속 사역을 예비하는 선구자적 삶을 충실하게 살았다.
3:19 분봉왕 헤롯. -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를 가리킨다. 1절 주석과 마 14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 - 여기서 '그 동생'은 헤롯 대왕과 대제사장의 딸이었던 마리암네(Mariamne) 사이에서 태어난 헤롯 빌립 1세(Horod Philip l)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로 이두래(Iturea)와 드라고닛(Traconitis)을 다스렸던 분봉왕 빌립(Horod Philip ll)과는 구별된다.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참조. 한편 '헤로디아'는 헤롯 안디바와 헤롯 빌립 1세의 이복 형제였던 아리스토블루스(Aristobuls)의 딸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의 삼촌인 헤롯 빌립 1세와 결혼하여 살로메라는 딸을 낳는다. 그런데 당시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가 그 동생 빌립의 집을 방문했다가 헤로디아와 불륜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결혼하기 위해 헤로디아는 빌립과 이혼하고 헤롯 안디바는 그의 아내 였던 아라비아 아레타스(Aretas)왕의 딸과 이혼한다. 여기서 '헤로디아의 일'이란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헤로디아와 안디바의 결혼은 유대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이요 죄악이 아닐 수 없었다(레 18:16; 20:21).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 동방에서의 군주에 대한 비난은 곧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 그러나 광야의 선지자 세례인 요한은 헤롯 안디바와 헤로디아의 잘못된 결혼과 부도덕함을 과감히 책망하고 나섰다. 즉 세례인 요한은 힘 없는 일반 백성이나, 사람들에게 경멸당했던 세리 ․ 군병들에게만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왕에게까지 담대히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세례인 요한의 헤롯과 헤로디아에 대한 책망은 일반 백성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이것은 헤롯에게 위기감을 조성시켜 주었다.
3:20 이 위에‥‥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 여기서 '더하여'에 해당되는 '프로스티데미'는 '첨가시키다' 또는 '같은 종류의 또 다른 행동을 하다', '계속하다'는 의미로, 이는 헤롯이 세례 요한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둠으로써 더 큰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졌음을 나타내 준다. 이때 세례인 요한은 베레아 지역에 위치한 마케루스(Machaerus) 성의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Josephus). 한편 헤롯 안디바가 요한을 옥에 가두게 된 경위, 요한의 죽음, 헤롯 안디바가 헤로디아와 결혼한 결과 등에 대해서는 마 14:3-12 본문과 주석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으니 그곳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세례 요한의 투옥은 시기적으로 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이를 이곳에 언급한 것은 복음의 핵심이 세례인 요한에게서 예수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사실 세례인 요한의 기사는 다음 절(21절)에서 예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을 끝으로 본서에서 사라진다.
3:21,22 예수의 수세(水洗)
앞단락(1-20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 요단 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인 요한의 사역을 소개했다. 이제 본문은 세례인 요한의 사역이 막을 내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소개하기에 앞서,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 준비로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마 3:13-17; 막 1:9-11; 요 1:29-34).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였는데 죄나 죄의식이 전혀 없으셨던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만 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세례 받으심은 그의 사생활을 끝내고 공생애를 시작하는 표적이었다. 즉 요한의 세례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죄인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을 상징하는 바, 예수님께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그의 이전까지의 사적 생활을 청산하고 구속사역을 수행할 메시야의 공적 생애가 시작되었음을 알리신 것이다.
둘째, 예수의 세례 받으심은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루기 위한 절차였다(마 3:15). 즉 예수께서는 회개의 세례를 받을 만한 죄가 전혀 없으신 의로운 분이셨지만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기까지 낮아지셨고(빌 2:6-8), 이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과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할 죄인들을 동일시하여 그들을 대신해 율법의 저주를 홀로 감당하사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의 상징인 물세례를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은 그 자신이 죄성(罪性)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요 1:29) 온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실 존재였기 때문이다.
셋째, 후일에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시기 위해서였다(고전 12:12,13). 예수가 세례인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이유에 대해서는 막 1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예수께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와 그 위에 임했다(22절a).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절)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메시야로 직접 인정하셨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예수는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동시에 받으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동시에 메시야로서의 인정을 받으셨으며 그의 공생애를 시작할 1단계 준비를 마치셨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에 대해서는 행 8장 연구 자료를 참조 하라. 그런데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강림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즉 그것은 인간을 구속하는 하나님의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력 사역이라는 것이다. 즉 성자는 자신을 회생하고 구속사역을 감당하시고, 성령은 성자를 능력으로 도우시며 성부는 그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며 인도하시는 것이다.
3:21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 본절과 다음절은 예수의 수세와 관련된 기사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기사는 사 복음서에 모두 다 기록되어져 있다(마 3:13-17; 막 1:9-11; 요 1:29-34). 그런데 마태는 세례인 요한이 예수께 세례주기를 매우 꺼려했던 사실을 좀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마 3:13-15) 누가는 단지 세례인 요한의 사역이 그 절정에 다다랐을 때 예수께서도 많은 백성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만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누가가 수세 사건을 간략하게 언급한 이유는 이 사건을 통하여 세례 요한의 사역이 막을 내리고, 이제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그의 사역을 시작하시게 됨을 부각시키고자 의도했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예수의 세례 받으심이다. 누가는 이로써 세례인 요한에 대한 기사를 종결짓고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기술을 시작하려 한다. 한편 세례인 요한의 세례는 분명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세례였다(3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나 흠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죄의식도 없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세상 죄를 담당하시고 속죄할 그의 구속사역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의를 이루기 위함 이었다(마 3:15). 이에 대해서는 마 3:13에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곳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기도하실 때에. -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는 달리 독특하게 예수께서 수세 후에 기도하셨음을 적고 있다. 이처럼 기도를 강조하는 것은 성령을 강조하는 것과 함께 누가의 특징이다. 하여튼 예수께서는 일생을 통하여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는데(눅 6:12; 9:28; 22:42; 23:34) 본절은 그 가운데 본서에 처음 나타나는 기도의 장면이다.
하늘이 열리며. - 여기서 '열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네오크데나이'는 단순 과거 부정사로서 어떤 사실이 실제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환상이나 혹은 예수의 마음 속에 일어난 인상(印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눈을 들어 목격하신 것이다(막 1:10), 에스겔(겔 1:1)이나 스데반 역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행 7:56, Lenski), 하여튼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발생하려는 상황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다시 그의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Marshall). 아울러 이는 예수의 공생애 시작을 격려하는 하나님의 위로인 동시에 하나님과 예수께서 하나이심을 시사한다.
3:22 성령이 형체로‥‥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 예수의 수세시 성령이 임한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의 증거가 된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는 것을 마태나 마가가 단순히 '비둘기같이'라는 표현만을 쓴 반면(마 3:16; 막 1:17), 누가는 여기에다 '형체로'(소마티코 에이데이)라는 말을 첨가 시키고 있다. 헬라어 '소마티코스'는 '몸으로'라는 뜻이며 '에이도스'는 '형식, 겉모양'이란 말로서 볼 수 있는 형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은 결국 예수 자신이나(막 1:10), 요한이(요1:32-34) 성령의 실체를 보았음을 의미한다(Marshall). 한편 성경에서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는 짐승이다.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특징과 그의 성품을 나타내고 있다할 것이다. 하여간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임재는 구약 예언의 성취로, 그가 인류를 구원하도록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임을 보여 준다(사 11:2; 42:1; 6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 성령의 임재하심과 함께 들린 음성은 예수의 공생애 시작을 승인하며, 격려하는 아버지의 음성이다. 이 음성은 변화 산에서(마 17:5), 수난 주간(요 12:28)에 다시 들렸다. 즉 하나님은 이 말씀을 예수님의 공생애 처음, 중간, 마지막에 반복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께서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음을 확증하신 것이다. 물론 이는 성자 예수의 사역에 대한 성부의 격려와 사랑의 보장의 표시였다. 한편 본문의 '사랑하는'에 해당되는 '아가페토스'는 독립된 칭호라기보다는 '아들'(히오스)을 수식하는 말로, 이 말이 아들이나 딸에 붙어 수식되어지면 '외아들', '외동딸'의 뜻이 된다. 따라서 '아가페 토스'는 '독생자'(모노게네)와 동등한 의미를 갖는다(요 3:16). 따라서 이 말은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의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관계를 보여 준다. 한편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엔 소이 유도케사)는 무시제 부정과거(timeless aorist)로서 성자가 성부의 무한의 기쁨의 대상이 됨을 보여 준다. 이 말을 풀어보면 '내가 너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기뻐하였다'는 의미로, 여기에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하여금 메시야의 과업을 수행하도록 임명한 사실과 함께 위로와 격려의 말이 포함되어져 있다. 아무튼 예수가 세례를 받음은 자기 스스로 '세상 죄'를 담당하셨음을 공적으로 확증하는 일이었다. 또한 이때 성령이 임재하심은 예수에게 이 모든 사역을 감당할 능력을 부어 주심의 표징이었다. 여기에 하늘로부터 울려 나오는 성부의 말씀은 예수의 구속 사역의 승인이자 보장으로써 인류 구속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역사와 경륜을 입체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3:23-38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앞 단락(21,22절)에서는 공생애 사역의 준비로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에서 누가는 그리스도의 공생애가 시작되기 전에 그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 성경에서 대부분 족보가 시작될 때에는 지금까지의 역사가 끝나고 소개된 족보에 나타난 주인공의 시대가 새롭게 시작된다. 그래서 본문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새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족보를 소개한다. 한편 마태도 그의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족보(마 1:1-17)를 다루고 있는데 이 두 족보의 기록을 보다 자세히 비교해서 살펴보면 복음서 저자의 관점에 따라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마태와 누가의 예수 족보의 대조 및 차이점의 조화'를 참조하라. 누가의 예수 족보의 특징과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마태는 족보를 시작으로 복음서를 진행하지만 누가는 중간에 족보를 소개한다. 이는 예수가 본서의 중심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② 족보의 범위에 있어서 마태가 이스라엘의 기원인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예수님까지 언급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이스라엘이 원하던 메시야요 유대인의 왕임을 강조한 반면 누가는 예수님으로 시작하여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창조주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 뿐 아니라 전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또한 예수를 첫 사람인 아담과 비교하여 둘째 아담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즉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와 모든 인류가 사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지만 둘째 아담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속하실 것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이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기원이 되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③ 마태는 족보의 명단을 14대씩 세 그룹으로 분류하여 구성한 반면 누가는 그저 조상들의 명단을 단순히 배열하기만 했는데 이는 객관적 기록 자체를 중시하는 누가의 저작 특징을 잘 보여 준다.
④ 마태가 요셉의 족보인 반면 누가는 마리아의 족보를 사용하고 있는데(23절 주석 참조), 이는 예수께서 성경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창 3:15)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삼십 세쯤 되시니라. -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이 삼십 세쯤일 때였다고 기록한 사람은 누가 혼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공관복음서 기자들에 비해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다룬 누가의 섬세한 필치를 볼 수 있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할 무렵 그의 나이가 삼십 세쯤 되었다는 사실은 유대 사회에서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레위인들이 제사장으로 봉직할 수 있는 나이가 30세였으며(민 4:3,47), 산헤드린 회원 자격이 될 수 있는 나이가 또한 30세였다. 또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와 다윗이 왕위에 오른 나이도 30세였다(창 41:46; 삼하 5:4). 따라서 예수가 삼십 세에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은, 예수가 그의 사역을 시작하심에 있어 정신적, 육체적, 종교적인 모든 면에서 모든 준비가 완벽했음을 의미한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38절까지는 예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족보는 마태가 기록한 족보(마 1:1-17)와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또한 본 족보의 특징 및 의의에 대해서는 본장 23-38절 강해를 참조하라.
헬리. - '헬리'('Hai)는 본 족보에 요셉의 아버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 1:16에 의하면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의견들이 제시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견해를 둘만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마태의 족보를 요셉의 족보로 보고, 누가의 족보를 마리아의 족보로 보아 본절에는 비록 헬리가 요셉의 부친인 것처럼 나타나나 사실은 마리아의 부친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Coon, Bengel, Clarke). ② 마태는 다윗에서부터 요셉에 이르는 법적 계보를 제시한 반면, 누가는 요셉이 속한 실제적 계보를 제시했다는 것이다(Hervey). 이 견해에 의하면 형이었던 야곱이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야곱의 동생 헬리의 아들 요셉이 다윗 왕가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두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전자의 견해가 대체로 지지를 받고 있다.
3:24 맛닷. - '선물'이라는 의미로, 25,26절의 '맛다디아'라는 이름과 비슷하다.
레위. - '레위'(15)의 의미는 '친함' 이다. 이 이름은 29절에서 다시 한 번 더 나타난다. 그곳에서 레위는 시므온의 아들이며 맛닷의 아버지로 나타나는데 본절의 레위나 맛닷과는 동명이인이다. 이 외에 성경에 나타나는 레위는 '레아'의 몸에서 태어난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가 있는데(창 29:34) 그는 레위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멜기. - '멜기'의 의미는 '왕'이다. 예수의 두 조상 이름으로서, 한 사람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네 번째 조상이며, 다른 한 사람은 28절에 나타나는 스룹바벨 이전의 삼대 째 사람이다. 얀나. - '조롱하다'라는 뜻으로 이 이름은 이곳 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3:25 아모스. - '아모스'(12)는 '짐을 지고 나르는 사람' 혹은 '강한'이라는 의미이다. 이 이름은 이외에 예언자 아모스(암 1:1), 또 이사야의 아버지 아모스(왕하 19:2)에게서 볼 수 있다.
나훔. - '나훔'의 의미는 '위안, 동정'이다. 이 외에 12소선지 중 한 사람인 나훔이 '니느웨' 성이 장차 황무해 질 것을 예언한 선지자로 유다 왕 히스기야 때 활동했다(나 3:7).
에슬리. - 이 이름의 의미는 '나를 가까이 함'으로서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는다.
낙개. - 이 이름의 의미는 '빛' 혹은 '빛나다'의 의미로서, 대상 3:7의 '노가'와 비슷하다.
3:26 마앗. - '마앗'(Mdaa)은 '끓는 것'이란 의미로 대하 29:12; 31:13에 나오는 '마핫'과 같은 뜻이다.
서머인. - 히브리어로 시므이( )로서 이 이름의 뜻은 '몰약 성'이다.
요섹. - 본절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 이름이다.
3:27 요아난. - 히브리어 '요하난'의 헬라어 음역으로 여호와는 인자하심' 이란 뜻이다. '스룹바벨'의 손자이다.
레사. - '레사'는 '황태자'란 의미의 아람어 이름이다.
스룹바벨. - '스룹바벨'의 의미는 '바벨론에서 낳음'이란 뜻이다. 그는 유다 왕 여호야긴(여고냐)의 손자로서, 바사 왕 고레스 때 유대인을 이끌고 고국으로 귀환한 후 유대 총독이 되었다. 그는 귀국할 때 예루살렘 멸망 당시(B.C. 586년) 느부갓네살이 약탈하여 갔던 성전 기명을 찾아가지고 왔으며, 성전과 성곽을 재건하였다(스 1-5장). 스룹바벨에 대해서는 느 12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스알디엘. - '스알디엘'의 의미는 '빚지다'이다. 마 1:12에도 스룹바벨의 부친은 '스알디엘'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곳 외에도 스 3:2; 학 1:1에서 동일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상 3:19에는 스룹바벨은 '브다야'의 아들로 기록되어져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계대 결혼에 의한 결과이다. 즉 스알디엘과 브다야는 형제간으로 스알디엘이 아들이 없이 죽자 브다야가 그 형수와 결혼하여 스룹바벨을 낳아 그 형의 가문을 이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상 3:17-24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네리. - 이 이름의 의미는 '등불'이다. 그런데 본절은 네리가 스알디엘의 아버지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대상 3:17이나 마 1:12에는 스알디엘의 아버지가 여고냐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스알디엘이 본래는 네리의 아들이나 뒤에 여고냐의 양자가 된 까닭일 것으로 추정된다(Plummer, Machen).
3:28 여기서부터 구약에 언급되지 않은 이름들이 많이 열거되면서 다윗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멜기. - 스룹바벨의 증조부로 24절의 멜기와는 동명이인이다.
앗다. - 이 이름의 뜻은 '붙들다' 로서 스룹바벨의 고조부이다.
고삼. - '나누다'라는 뜻으로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엘마담. - 이 이름의 의미는 '광대'이다. 이것은 창 10:26의 '알모닷'과 비교되어진다.
에르. - 에르의 의미는 '간수자'이다. 이곳 외에 성경에 나타난 경우를 살펴보면 첫 번째로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장자로 가나안 여인의 소생인데 악하므로 여호와의 치심을 받아 죽었다(창 38:7; 민 26:19). 두 번째는 '유다'의 차자 '셀라'의 자손이다(대상 4:21).
3:29 예수. - '구세주', 혹은 '여호와의 구원'이란 의미로 구약의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인데, 유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
엘리에서. - '하나님이도우심' 이란 뜻으로 구약의 '엘리에셀'과 같은 의미의 이름이다(창 15:2; 출 18:4).
요림. - '여호와의 칭찬'이란 뜻으로 이곳에만 나타난다.
3:30 시므온. - 시므온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이다. 다윗 시대와 포로 시대 이전 사이에 살았던 사람이다.
유다. -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으로서 '찬송'이라는 의미이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와 동일 이름이다.
엘리아김. - 왕하 18:18에 나타난 엘리야김과 같은 의미의 이름으로, 역시 포로 이전 시대 사람이다.
3:31 멜레아. - '멜레아'의 의미는 '충만'이란 뜻으로 이 이름은 이곳에서만 나타난다. 다윗의 고손자(高孫子)이다.
멘나. - 멘나도 역시 이곳에서만 볼 수 있으며, 다윗의 증손자이다. 이 이름의 뜻은 '큰 고통' 이다.
맛다다. - 이 이름의 의미는 '선물'이다. 다윗의 손자이며 스 10:33에서는 '맛닷다'로 되어 있다.
나단. - 나단의 의미는 '양심' 혹은 '주는 자' 이다. 본문의 나단은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다(삼하 5:14),
다윗. -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아브라함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삼상 16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3:32 이새. - 다윗부터 아브라함에 이르는 족보는 마 1:2-6까지의 족보와 거의 비슷하다. '이 새'는 '주의 선물'이라는 의미인데, 그는 유다 지파 출신으로, 베레스의 후손인 보아스의 손자요, 오벳의 아들이며, 다윗왕의 아버지이다. 그는 막내 다윗을 포함하여 일곱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삼상 17:12-14; 대상 2:16). 성경은 이 이새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사 11:1,10).
오벳. - 이 이름의 의미는 '경배자' 혹은 '종'이다. 모압 여인 룻이 보아스에게 낳아준 아들로서 다윗의 조부이다.
보아스. - '보아스'는 '유력자'라는 의미로, 룻의 남편이며 다윗 왕의 증조부이다. 보아스에 대해서는 룻 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살몬. - 여리고 성에 있던 기생 라합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은 유다 지파의 자손이다(마 1:4).
나손. - 이 이름의 의미는 '점쟁이'이다. 그는 아미나답의 아들로, 아론의 아내인 엘리세바의 남자 형제이다(출 6:23). 모세가 인구 조사를 할 때 유다 지파의 대표로서 모세를 도왔으며, 회막을 세우고 봉헌할 때 제 1일에 예물을 드렸고 광야 생활 동안 유다 지파의 족장으로 활동하였다(민 1:7; 2:3; 7:12; 10:14).
3:33 아미나답. - '고귀한 친척'이라는 뜻으로 아론의 아내 엘리세바의 아비이다(출 6:23).
아니. - 이 이름의 뜻은 '높은 땅'이다. 대상 2:9과 마 1:4에는 아미나답과 헤스론 사이에 '람'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람'과 '아니'는 동일인이 아닌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마 1:4 주석을 참조하라.
헤스론. - '헤스론'은 '둘러싼', '울타리'란 의미이다. 그는 베레스의 아들로 유다의 손자이다(창 46:12; 대상 2:5; 4:1). 그의 자손은 유다 지파의 헤스론 가족을 이루었다(민 26:21; 대상 2: 9 이하).
베레스. - '베레스'는 '깨뜨림', '파열'이란 뜻으로, 유다와 다말 사이에 난 아들이다. 세라의 쌍둥이 형이다(창 38:30; 46:12).
유다. - 야곱의 넷째 아들로 레아가 하란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는 다말에게서 쌍둥이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그에 대해서는 창 38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3:34 야곱. - 이삭이 60세에 얻은 아들로 쌍둥이 형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서 얻은 이름이다(창 25:26). 이후 야곱은 두 명의 아내와 두 명의 첩에게서 모두 12명의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12지파가 형성되었다. 야곱에 대해서는 창 3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이삭. - '웃음'이란 뜻으로, 아브라함이 100세, 리브가가 90세였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다. 이삭에 대해서는 창 24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아브라함. - '열국의 아비'라는 뜻으로 유대 민족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후 한 평생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까닭에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창 23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데라. - 데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로서 우르에 살면서 아브라함 외에 나홀, 하란을 낳았다. 그는 우르에서 하란으로 이사한 후 그곳에서 205세에 죽었는데(창 11:24-32), 수 24:2을 보면 그는 우상 숭배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우상 숭배의 가정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이 나왔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나홀. - 이름의 뜻은 '화가 난 사람'이다. 데라의 아버지이며 아브라함의 조부이다. 그는 셈 계열의 자손으로 148세까지 살았다(창 11:22-25; 수 24:2).
3:35 스룩. - 셈의 후예인 '르우'의 아들이다. 스룩은 30세에 나홀을 낳았으며, 그 후 200년을 지내며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창 11:20-23 ; 대상 1:26).
르우. - '친구', '동료'란 뜻이다. 셈족 사람으로 벨렉의 아들이다.
벨렉. - '나누다'라는 뜻으로, 이는 그가 태어날 무렵에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인류가 흩어진 까닭에 얻은 이름이다(창 11:8-9).
헤버. - '헤벨' 또는 '에벨'을 달리 번역한 것이다.
살라. - '보내다'의 뜻으로 창 10:24; 11:13; 대상 1:18,24에는 '셀라'로 기록되어 있다.
3:36 가이난. - 아박삿의 아들이다. 이 이름은 70인 역의 창 10:24과 11:12에서 누가가 인용한 것으로 히브리 원문에는 없다.
아박삿. - 셈의 셋째 아들로서 창 10:22,24; 대상 1:17,18에는 '아르박삿'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셈. - '셈'은 노아의 맏아들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간주된다. 또한 그는 그 주변 대부분의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조상이기도 하다(창 10:21-31; 11:10-26). 그는 만취하여 벌거벗은 아비 노아의 하체를 뒷걸음쳐 들어가서 덮어 줌으로써 축복을 받았는데, 창 11:10에 의하면 홍수가 끝난 지 2년 후에 그의 나이가 백 세가 되었고, 그때에 아르박삿을 낳은 것으로 나타난다.
노아. - 노아는 아담으로부터 셋을 통한 9대손인 라멕의 아들로,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아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음으로써 인류의 두 번째 조상이 되었다. 그는 600세에 홍수를 겪었고 그 후 350년을 더 살다가 950세에 죽었다(창 9:28,29).
레멕. - 셋의 자손으로서 므두셀라의 아들이며 노아의 아버지이다. 구약 성경에는 라멕으로 나타난다. 그는 182세에 노아를 낳고 777세까지 살았다(창 5:25-31; 대상 1:3).
3:37 므두셀라. -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에녹의 아들로, 969세의 수(壽)를 누림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되었다.
에녹. - 아담의 7대손으로 하나님과 깊은 영교를 나누는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운 자이다(창 5:22-24; 히 11:5,6).
야렛. - 셋 계열의 자손으로 마할랄렐이 65세에 낳은 아들이다. 창 5:20에 의하면 야렛은 962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마할랄렐. - 이름의 뜻은 '찬양'이다. 아담의 5대손으로 야렛의 아버지이다.
가이난. - '게난'의 다른 이름으로(창 5:9-14; 대상 1:2), 셋의 손자이다.
3:38 에노스. - 셋의 아들로 90세에 게난을 낳았다. 그는 게난 외에 다른 많은 아들들과 딸들을 두었으며 그의 향년은 905세였다(창 5:6-11). 창 4:26에 의하면 에노스 때부터 공적인 여호와 예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셋. - 아담과 하와 사이에 난 셋째 아들로서 가인에 의해 살해된 형 아벨을 대신하여 태어났다. 거룩한 그리스도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에 이르고 있다. 셋은 105세 때 에노스를 낳았으며 912세까지 향수하였다(창 4:26; 5:6-8).
아담. - 아담은 '사람'이란 뜻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최초의 인간이다. 아담에 대해서는 창 5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마태가 예수의 족보를 아브라함에게서 부터 시작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아담과 하나님에게까지 소급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해 기록된 책인 반면 본서는 이방인을 위해 기록된 까닭에 인류의 기원을 밝힘으로써 인류 기원에 관한 이교의 설화를 정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밝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에 에게 전혀 차별이 없다(롬 10:12)는 복음의 보편성을 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②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와 흠이 없으신 둘째 아담으로 전 인류를 구속하신 완전하신 인간이셨음을 드러내려는 본서의 저작 의도 때문이다.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 누가는 아담을 직접 만드신 하나님에게까지 족보를 소급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예수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에게서 난 인류의 한 사람임을 강조하고, 또한 인류의 기원을 밝힐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셨음을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연구 자료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은 이사야가 예언한 바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고통과 희망을 상징하는 장소인 광야에서 주의 도래를 외치는 자였다(사 40:3). 또한 세례 요한은 주의 도래에 앞서 죄에 경도된 세상을 깨워 회개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러 메시야에 앞서서 온 엘리야였다(말 4:5,6). 즉 세례 요한은 예수의 선구자(forerunner)였다.
사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다루기 전에 먼저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의 사역부터 기술하고 있다. 또 예수께서는 자신의 선구자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비로소 공생애 사역을 개시하셨다. 또한 세례 요한은 예수의 등장 이전에 와서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도래를 예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자신에게 나아왔을 때 바로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Messiah) 곧 그리스도(Christ)임도 공개적으로 증언하였다. 나아가 그는 그의 탄생과 죽음에서도 예수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을 철저히 예표함으로써 실로 주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그의 삶 자체로서 수행했던 것이다.
이처럼 세례 요한이 우리 주 예수의 선구자의 사명을 구약의 예언 그대로 성취하였다는 사실은 결국 주 예수의 메시야직의 진정성에 대한 증거의 하나로서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나아가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철저한 삶은 우리 성도에게 주의 제자로서의 삶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1.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면모
세례 요한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까지 이르는 그의 삶 전체가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삶이었다. 그리고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도래에 대한 것이었다.
1) 탄생
세례 요한의 탄생은 수태가 불가능했던 나이 많은 부모에 의한 것으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따른 기적적인 탄생이었다(눅 1:5-80). 이러한 그의 기적적인 탄생은, 물론 질적으로는 비교가 안 되지만,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이라는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 이러한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해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은 그의 복음서에서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에 앞서 보내신 것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요 1:6). 이처럼 세례 요한은 그 탄생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예표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2) 그의 생활과 사역
누가는 세례 요한의 탄생 기사를 기록하면서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 1:17)고 하였다. 과연 세례 요한은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의 전 삶을 바쳤다.
그는 구약 시대의 엘리야 선지자처럼 어릴 때부터 광야에서 살았으며 약대(camel) 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을 먹고 살았다. 이는 그의 삶이 나실인(Nazirite)으로서 철저히 구별된 정결한 삶이었으며(눅 1:15) 하나님의 율법에 철두철미한 삶이었음을 보여준다(눅 11:1). 그리고 이러한 그의 삶은 당시 탐욕과 부정으로 가득한 유대지도자들의 삶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것이었다.
한편 세례 요한의 삶 자체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도 철저히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먼저 그는 메시야의 도래에 앞서 유대인들을 준비시키고자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으며, 회개한 자들에게는 그 회개의 증거로서 장차 주께서 주실 성령 세례를 예표하는 물세례를 베풀었다. 이는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장차 도래할 메시야를 영접할 영육간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사역을 감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그리스도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에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 자신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며 예수 그리스도는 최대한으로 높이고 자신은 철저히 낮춤으로써 오직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을 충실히 감당하였다(요 1:27).
이를 볼 때 세례 요한의 순결한 생활 자체와 열심과 겸손으로 사역한 하나님의 일꾼이란 점에서 그는 절대 순결한 인자요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역한 주 예수를 예표한 것이었다. 나아가 그의 사역 목적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하기 위한 점이었다는 사실에서 그의 생활과 사역은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생활과 사역이었다.
3) 그의 메시지와 증언의 내용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요. 1:19-28). 또한 그는 결정적으로 예수가 자신에게 나아오셨을 때 예수가 바로 자신이 예고했던 그리스도이심을 공개적으로 증언함으로써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소명을 다하였다(요 1:29-34).
세례 요한은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와 그의 새로운 아내 헤로디아에 의해 처형되었다(막 6:17-29).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이유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자신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법적으로 결혼한 사실에 대해 세례 요한이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앙갚음을 위해서였지만 이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추종함으로써 그가 정치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다가 당한 그의 죽음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부르짖다가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묘하게 예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4) 죽음
세례 요한은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와 그의 새로운 아내 헤로디아에 의해 처형되었다(막 6:17-29).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이유는 표면상으로 볼 때는 자신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와 불법적으로 결혼한 사실에 대해 세례 요한이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앙갚음을 위해서였지만 이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추종함으로써 그가 정치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다가 당한 그의 죽음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부르짖다가 유대 지도자들의 손에 죽임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오묘하게 예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2.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
1) 광야에서 외치는 자
구약 성경 이사야서는 예수의 선구자로 사역할 세례 요한을 예언적으로 묘사하여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사 40:3). 이는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메시야의 도래와 그를 맞기 위한 회개의 메시지를 외칠 것을 지칭한 것인 동시에 영적으로는 더욱 오묘한 뜻도 갖고 있다. 광야(廣野)란 영적으로 세속의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곳이다. 따라서 광야는 처절한 고독과 시련 속에서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의 삶을 시작하는 고통의 장소인 동시에 희망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 예수의 도래를 외침으로써 예수를 기점으로 구약(舊約)이 가고 신약(新約)이 도래하는 위대한 구속사적 전환이 이루어짐을 시사했던 것이다.
2) 약속된 엘리야
말라기 선지자는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예언했다(말 4:5,6). 그리고 예수께서도 오리라 한 엘리야가 바로 세례 요한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1:14; 17:11). 구약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엘리야(왕상 18:30-40)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당시 바알 우상에게로 향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여호와 신앙을 회복케 하는 데 전심전력 했었다.
한편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 도래에 앞서 세상에 와서 자신들의 입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면서 그 마음은 여호와께 떠나 온갖 불의를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시켜 참 신앙을 회복케 하는 사역을 감당함으로써 영적으로 엘리야와 동일한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약 시대의 엘리야 선지자나 세례 요한이나 다같이 패역한 백성들의 마음을 완전히 돌이키는 일에는 실패하였다(마 17:12).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희생을 통한 구속사역의 성취로써 백성들의 패역한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용서를 가져옴으로써 양자 간에 완전한 화해를 이루셨다(엡 2:14-17).
3) 구약과 신약의 가교(架橋)로서의 구속사적 지위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전개 과정에서 세례 요한의 등장은 그가 예수의 선구자로서, 또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신약을 새로 여신 예수를 세상에 소개하고 증언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의 가교가 되었다는 점에서 실로 심오한 의의를 갖는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마 11:12,13)라는 말씀은 세례 요한이 구약 시대를 마감한 인물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세례 요한은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이다. 따라서 그의 삶은 철저히 구약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나실인으로서의 규례를 철저히 준수하였으며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였다(마 11:16-19; 눅 7:31-35), 이런 세례 요한이 구약을 대표하여 새로운 시대, 신약 시대를 도래시킨 예수에 대하여 증언함으로써 결국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하였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신·구약 시대의 가교(架橋)로서의 세례 요한의 역할에 대하여 암시하시면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고 하셨다. 이 역설적인 표현은 구약에 속한 인물이 비록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위대하였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통하여 비로소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한 천국 구원의 은총과 계시의 체험에 있어서는 신약시대의 미천한 자에게도 오히려 못 미침을 말한 것이었다. 이는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24)는 주의 말씀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3. 의의
먼저 우리는 세례 요한이 수백 년 전에 예언된 구약 예언들의 말씀 그대로 왔고 또 그가 구약의 대표로서 신약을 도래시킬 예수의 메시야직을 증언하는 사역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또한 구약 예언대로 오사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신약을 새로 여신 예수의 사역이 태초부터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고 예언된 대로 분명히 이루어진 사건인 것처럼 신적 기원을 가진 사건이며 나아가 우리 주 예수의 메시야직도 절대적 진정성을 가진 것임을 새삼 입증시켜 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금 구약과 신약이 서로 연속되어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속의 진리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여주는 절대적 계시이며 우리 주님 또한 우리의 절대 유일의 구주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이런 신·구약 성경과 주님이 주시는 우리의 구원이 확실함을 믿고 감사하게 된다.
한편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세례 요한이 초림하실 메시야와 새로운 신약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며 기다렸던 것처럼 재림하실 메시야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을 기다리고 있다. 더욱이 현대의 우리는 세례 요한의 시대와 달리 천국 구원에 관한 온전한 계시가 주어진 상태에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스스로가 실로 광야에서 정결한 삶을 살았던 세례 요한의 삶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아직도 주를 믿지 않으며 분명히 도래할 예수의 재림을 아직도 확신하지 않는 자들에게 역사의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 소리를 높여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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