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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스데반 집사의 최후 설교와 순교
구속사적 개관
실로 태초 아담의 타락 직후 제 1위 성부 하나님(God, The Father)이 세우신 구속(救贖)의 법은 구약을 관통하여 각종 예언과 예표로 주어져 오다가 제 2위 성자 하나님(God, The Son)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수난으로 일단 성취되었다. 그러나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택한 성도들이 주의 구속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을 충분한 시간의 확보를 위하여 주의 구속 사역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은 세상 끝날 주의 재림과 전우주에 대한 심판 이후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천국으로 유보되도록 섭리되었다. 그리하여 구속의 법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구약의 성취로 초림하신 '주님은 일단 구약(舊約)의 말씀대로 성취된 구속 사역의 실현으로서 세상 끝날에 이루어질 당신의 재림과 그 이후의 천국 구원에 대한 새 약속 곧 신약(新約)을 남기시고 일단 숭천하셨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의 강림으로 개시된 같은 신약시대이기는 하되 예수께서 직접 세상에 계시던 때와도 달리 주께서 일단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그리고 구속 사역이 최종 실현되는 역사 종말까지의 장구한 중간기의 구속사가 전개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에는 비륵 구속 사역의 결과가 온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사역으로 구속 사역이 이미 성취되기는 하였는 바 근본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단절하던 죄의 문제가 법적으로는 해결되어 인간과 하나님이 교제할 길이 트였다(히 4:14-16). 그리하여 제 3위 하나님(God, The Holy Spirit)이신 성령께서 오순절 강림 사건으로 역사 속에 임하였으며 향후 각 성도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성도는 택한 성도의 모임인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본장을 포함해 제 1-7장까지 이어지는 일련 기사가 바로 모든 구약 예언과 약속의 성쳐로 오사 신약을 여신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으로 일단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고 승천하신 직후 오순절 사건으로 강림하신 성령의 인도로 구약 선민(選民)의 수도였던 예루살렘(Jerusalem)에서부터 향후 세상 끝날까지 신약 선민의 생활 중심이 된 교회가 주께서 공생애(公生涯) 동안에 미리 훈련시키신 사도들을 통해 내외의 핍박과 역경을 이겨내고 이제 막 태동되던 격변기의 역사를 보도한다.
보다 상술하자면 먼저 제 1장은 십자가 수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주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구속 사역이 온전히 실현되는 때인 당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대한 거듭된 약속과 동시에 향후 당신의 재림 매까지의 구속사를 주도하실 성령 강림의 약속을 주시고 숭천하셨던 대전환기적 상황을 보도한다. 그리고 다음 제2장은 주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이루어져 먼저 주의 사도와 120문도(門徒)가 크게 변화되어 예루살렘에서부터 초대 교회가 태동되게 된 역동적 사건을 보도한다. 다음 제 3-5장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이 전날 예수를 처형시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핍박과 내부의 갈등을 무릅쓰고 성령의 인도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를 급신장시켰음이 보도된다. 그리고 제 6-7장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사도들 외에 교회의 실무를 관장할 집사(deacon)들을 선출하는 등 기본적 조직을 정 비 할 정도로 발전하였음과 아울러 그에 따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박해도 더욱 거세어져서 마침내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殉敎) 사건인 스데반 순교 사건이 발생하였음이 보도된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전장 말미에 기록된 대로, 예수의 도를 전하는 대신 모세 및 구약율법과 성전에 대해 모독하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모독한다는 죄목으로 유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체포된 스데반이 이에 대한 변중적 설교(1-53절)를 마치고 거룩하고도 당당히 순교(54-脚절)하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스데반의 순교(殉敎) 사건은 어쩌다 우연히 일어난 단회적 사건만은 아니다. 이는 그 옛날 우리 주 예수를 자신들의 편견과 이해타산에 얽매여 무고하게 처형했던 유대주의자들(요 11:45-53; 19:6-16)이 다시 예수의 부활과 구속의 복음을 전하는 초대 교회를 폅박하여 일어난 순교 사건으로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갈등의 연장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즉 스데반의 순교 사건은 구약의 일부 내용을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곡해한 유대주의자들이 태초부터 이어져온 구약과 이제 주님이 구약을 확장 성취하시고(마 5:17,18) 새로 주신 신약 등 신,구약 모든 계시에 근거한 초대 교회 기독교를 핍박하여 발생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유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순교를 앞두고 행한 그의 변중적(辨證的)설교의 내용과 순교 사건은 유대교와 초대 교회 기독교의 근본적인 갈등을 이해하지 않으면 은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먼저 이를 개략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제 2위 성지 하나님으로서 결국 하나님 자신이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분으로서 전우주에 대하여 창조자로서 설대적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셨다. 한편 주님은 이제 태초 이래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을 위하여 성부 하나님(Ged, The Father)이 세우신 구속(redemption)의 법 즉 인간의 죄값을 다른 존재 곧 궁극적으로는 성육신(聖肉身)하신 성자 예수 자신이 대신 갚으며 희생하는 대신, 인간 자체는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려는 공의와 사랑의 법인 구속의 법과 그러한 구속의 법이 하나님이 직접 예비하신 어린양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하여 일단 성취될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구약(舊約)의 거듭된 약속과 예언을 이루시고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성육신 강림하신 분이셨다(요 3:16-21). 동시에 이처럼 초림(初臨)하사 일단 십자가 수난을 통하여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후에 다시금 훗날 당신이 재림(再臨)하사 현 세상의 역사를 종결시키시고 모든 인간을 당신이 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회개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가르시고 각각 천국의 영생과 지옥의 영벌을 주실 것을 약속 예언하는 새약속 곧 신약(新約)을 주신 분이셨다. 따라서 주님은 이미 그 신분상 메시야이셨으며. 또 성육신하여 택한 죄인을 위하여 구속 희생하여 주신 후 이를 근거로 이 땅이 아닌 하늘 나라를 세우시고 영원한 축복속에 통치하실 것을 약속, 예언하심으로 전 구속사적 메시야직을 수행한 분이기도 하였다. 또한 우리 주님을 통하여 신 ․ 구약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었다. 주님은 공생에 동안 바로 이런 자신의 메시야 신분과 사역에 대하여 그리고 당신으로 인해 서로 연속되며 또한 신약이 구약을 계숭 완성하는 관계에 있는 신 ․ 구약의 구속사적 관계에 대해서도 분명히 선포하셨다.
한편 유대인들은 다름 아니라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으로서 구약 계시를 먼저 받았고 또한 그 혈통을 통하여 우리 주님께서 성육신하시어 태어나도록 약속되고 예비된 선민이었다. 즉 그들은 구약 시대 구속사의 전개의 퉁로요 그 주역(主役)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역사상 단 한번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구약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참된 계시인 구약 전체에 의거한 구약 기독교와 달리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자기들 편의대로 곡해한 소위 유대교(the Judaism)라는 저들의 종교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소위 신 ․ 구약 중간기 시대(B.C. 5-1세기)부터 저들은 전민족적으로 잘못된 계시관을 갖게 되었다. 즉 먼저는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약으로 확장 계숭될 때에만 의미를 갖는 구약의 본질에 대하여 오해하였으며(마 22:23-32), 또 하나님의 계시인 구약과 달리 인간의 전통과 사상에 불과한 장로(長老)들의 유전(tradition)까지를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히 하는 잘못된 계시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처럼 인본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잘못된 입장에서 오직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왜곡 해석하여 잘못된 교리를 갖던 중 특히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에 대하여 심각한 오해를 갖게 되었다. 즉 그들은 본래 제 2위 하나님이신 성자(God, The Son)의 성육신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이 그저 다윗(king David)의 후손 중 한 사람이 언젠가 메시야로 등장할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리고 구약 선민인 유대인 자신들만을, 그리고 이 지상나라에서만 영원한 지배자 민족으로 만들어 줄 정치적 메시야가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인본주의적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잘못된 구원관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주님께서 참 메시야로 세계 만민 모두를 위해 오썬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어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셨던 당신의 신분과 당신의 구속 사역 그리고 구속 사역이 최종 실현될 참된 메시야의 나라 곧 천국은 이 땅이 아니라 세상 끝날 새하늘과 새땅에서만 이루어지며 이러한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당신의 구속 사역에 대한 믿음 뿐임을 선포하시자 그들은 주의 말씀이 신 ․ 구약 성경 전체의 진리임을 인정치 않고 오직 구약의 일부 내용에 입각한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지고 예수를 배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위 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이며 또 주님이 주신 신약에 따라 그의 복음을 믿는 것은 구약과 구약시대의 율법들을 폐기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계승 확장한 더욱 온전한 진리를 믿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하여 구속사의 시대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새로이 확장되었으며 또한 주의 복음을 믿는 신앙만이 신 ․ 구약 전체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정통긍(正統性)을 가진 신앙이었다.
그럼에도 앞서 설밍한대로 인본주의적, 민족주의적 오류에 빠져 구약 계시를 왜곡하고 주님이 주신 신약 계시를 거부한 유대주의자들은 그들의 종교정치적 기득권을 앞세워 전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무고히 처형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패역을 오히려 당신의 구속 사역을 이루는 기회로 삼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 교회 의 성 도들까지 계 속 핍 박하였던 것이다.
이제 거시적 관점에서 전구속사를 조망(眺望)할 때에 이처럼 유대주의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수와 그를 따르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생명을 젓으면서까지 억누르고자 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토록 엄청난 순교의 피를 흘려가면서까지도 살아남아 오늘날의 우리에게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 끝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까지 도도히 계승될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정성(眞正性)을 보여 준다. 이제 여기에 담긴 구속사적 의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구속사 전개를 위한 통로로 택하신 선민(選民)이었다. 즉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모든 열방 민족을 대표한 제사장 나라였으며 거룩히 구별된 민쪽이었다(출 19:6). 이렇게 모든 열방 민족의 대표격인 유대인들이 온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 척 했다는 것은 결국 온 인류가 다 제 2위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배척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보편적 부패와 하나님께 대한 패역을 보여 준다.
둘째, 이렇게 전인류의 대표격이었던 선민 유대인의 불순종에서 드러나듯이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이것을 당신의 구원 섭리가 이루어지기 위한 계기로 삼으셨다. 그리하여 먼저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배척은 택한 백성의 구속을 위한 예수의 대속(代贖) 희생의 기회가 되었다. 또한 예수의 부활과 숭천 이후,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이 세상에 임하신 성령(聖靈)의 인도로 교회를 갓 건림한 초대 교회에 대한 유대인의 배척은 전날 주님이 이미 예언하신 대로 신약 시대에는 복음이 구약 시대와 달리 세계의 모든 이방인에게 전달되게 되는 촉진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먼저 그분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은총이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 준다(요 3:16). 또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한번 작정(作定)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즉 사탄과 인간의 어떤 방해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필히 성취됨을 보여 준다. 이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절대 사랑의 확증은 구속 사역의 최종 실현인 천국 구원과 영생에 관해 예수께서 새로 주신 새 예언과 새 약속도 필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의 확실한 보중이 되는 것이다(롬 5:5).
셋째, 선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렇게 하나같이 예수를 배척하였다는 사실은 태초 에덴 동산에서 바로 자신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성철를 막바지에 두고 그 계획을 저지코자 사탄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훼방 공작을 펼쳐 왔는가를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몸서리치는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그리고 예수의 구속 사역 성취 기간 동안에 그리고 성령이 폭발적으로 강림하신 직후인 초대 교회 시대에도 이같은 항해 공작을 폈던 사탄(the Satan)이 이제 구속 사역의 최종 목표점인 천국 도래를 위해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가 임박한 이때에, 즉 영원히 무저갱속에 갇힐 것이라는 예언(계 20:10)의 성취가 임박한 지금, 그가 벌이는 최후 발악이 얼마나 더 극심할 것이저는가? 이를 생각할 때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고 또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사탄과 그 악한 세력을 담대히 대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한편 위에서 밝힌 유대교와 초대 교회와의 오랜 갈등을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의 하나로 체포된 스데반이 순교 직전에 남긴 변중적 설교를 보도한 본장 전반부 1-53절의 각 문단 구분과 개별 문단의 기본 의의는 해당 문단강해를 보라. 또한 후반부 54-60절의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 사건이 된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살펴보아야 할 순교에 대한 이해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라.
외울 말씀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족장 시대의 교훈
1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3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5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7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 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8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 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10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11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16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모세의 역사의 교훈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19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 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21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23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24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25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34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우상 숭배의 교훈
37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행하여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41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42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성전 숭배의 모순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 집사의 순교
54 ○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7:1-60 스데반 집사 신앙의 6대 특성
1.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신앙(6:3-5)
2.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신앙(6:3-5)
3. 착함으로 나타내 보이는 실천적 신앙(6:8; 7:2-53)
4. 자기의 믿는 바를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신앙(6:9,10)
5. 주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신앙(7:54-60)
6.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신앙(7:60)
도표-7:1-60, 본서의 설교들
설교자 대상 내 용
1. 베드로 오순절 날의 군중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의미, 예수의 죽음,
부활 승천에 대한 증거(2:14-36)
2. 베드로 성전에 모인 군중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이 바로
메시야임을 증거, 회개 촉구(3:11-26)
3. 베드로 산헤드린 공회원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 앉은뱅이
치유 증거(4:5-12)
4. 베드로 산헤드린 공회원들 예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 성령
받은 자들이 이 일의 증인임을 변론
(5:29-32)
5. 스데반 산헤드린 공회원들 이스라엘의 죄악된 역사를 비판함과 아울러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의 죄를 책망(7장)
6. 베드로 이방인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음 설교(10:34-43)
7. 베드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경위 증언과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증거(11:4-18)
8. 베드로 안디옥의 회당에 모인 예수가 바로 구약 예언의 성취로 오신
군중들 메시야이심을 증거(13:16-41)
9. 베드로 예루살렘 공회원들 구원은 할례로써가 아닌 오직 예수의
은혜로써 얻음 선포(15:7-11)
10. 야고보 예루살렘 공회원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되며 단지
경건만이 요구됨을 설교(15;13-21)
11. 바울 예루살렘의 장로들 거짓 교사와 선지자들에 의한 성도들의 미혹
을 경고, 자신의 가르침을 붙잡으라는 권면
(20:17-35)
12. 바울 예루살렘 군중들 자신의 회심 경위와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된
경위에 대한 변호(22:1-21)
13. 바울 아그립바왕 자신의 과거와 회심 경위, 예수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신 메시야이심을 증거(26장)
14. 바울 유대인 지도자들 로마에 죄인으로 잡혀온 자신의 무고성 증거,
자기 민족에 대한 유대인으로서의 사랑표명
(28:17-20)
신학용어-7:54-60 순교(殉敎)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기독교 전역사(全歷史) 속에는 맡온 순교자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사람들로 인하여 온갖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복음 전파는 중단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황성해져서 오늘날 전세계 구석 구석까지 교회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본문에서는 그렇게 많은 순교자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의 순교 장면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에 순교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들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용어의 정의
영어에서 '순교'를 뜻하는 '마터덤'(martyrdom)과 '순교자'를 뜻하는 '마터'(martyr)는 헬라어 '마르튀스'( )에서 유래하었다. '마르튀스'는 일반적으로 '증거', '증인'이라는 뜻의 법정 용어로 쓰였다(마 18:16; 히 10:28). 그러던 것이 종교적인 측면에서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자(계 1:5; 3:14)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증인' 혹은 '증거'라는 뜻을 갖는 이 단어가 '순교자'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은 증인 중의 최고의 증인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증거나 믿는 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쳐 그 진정성을 입증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행 22:20; 계 2:13).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전하신 구속의 진리가 참됨을 입증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순교하신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이시다.
따라서 여기서 '순교'(殉敎)라고 할 때는 생명을 바쳐서 그리스도를 부인치 아니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가리키며 그 행위자를 '순교자'라고 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복음에 대해 증거한 12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을 가리켜 '증인'(헬. 마르튀스)이라 했다(행 5:41; 9:16). 그리고 최초외 순교자었던 스데반을 가리켜서도 '주의 증인'(행 22:20)이라 했는데 이는 '순교자'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더 정확하다.
2.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들
로마 황제 네로(Nero. A.D. 54-68년)의 기독교 대박해가 있기 이전까지도 박해가 엄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약에 기록된 바 스데반과 주의 형제 야고보(행 12:2) 이외에 그혈게 많은 순교자는 없었던 것같다. 그러나 네로의 박해 이후부터 A.D. 313년 콘스탄틴누스(Constantinus. A.D. 306-337년)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는 계속되었으며 따라서 수많은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 이 순교자들을 여기서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대표적인 순교자들만을 도표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박해자 비 고
1. 스데반 유대 종교 지도자 최초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 30년경
2. 야고보 헤롯 아그립바 12사도 중의 한 사람, 44년경
3. 바울 네로 이방인의 사도, 67년경
4. 베드로 네로 12사도 중의 한 사람, 68년경
5. 안디바 도미티안 버가모 교회의 성도, 90-96년경
6. 아그나티우스 트라얀 안디옥 교회의 감독, 97-117년경
7. 폴리캅 아우렐리우스 서머나 교회의 감독, 166-180년경
8. 저스틴 아울렐리우스 순회 교사, 161-180년경
9. 이레니우스 세베루스 리용의 주교, 200년경
10. 히폴리투스 마시미안 로마의 장로, 235-236년경
11. 예루살렘의 알렉산더 데키우스 예루살렘 교회의 주교, 249-251년경
12. 오리겐 발레리안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257-260년경
13. 식수투스2세 바라리안 로마 교황, 257-260년 경
인물연구-7:1-50, 스데반
본장 자료노트 참조
풍습-7:8, 할례
수 5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7:8, 성경의 주요 언약
출 서론 특별자료 참조
3. 의의
누구나 반드시 순교를 해야만 그 신앙이 참됨을 입증받는 것은 아니다. 순교하지 않고도. 또 순교할 상황이 주어지지 않은 때에도 위대한 신앙을 보인 인물들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러나 순교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위대한 정신을 일깨워준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 성도는 언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꺼이 고난받을 준비 곧 자기 십 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눅 9:22-27). 더욱이 상황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분명히 증거하지 않으면 안될 때, 기꺼이 자기 생명을 바쳐서라도 그 진리를 고수하고 선포할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한다.
우리 한국 교회를 돌아보더라도 이러한 순교의 정신을 발휘했던 신앙의 선배들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100배의 결실을 맺듯, 한 사람의 순교가 수많은 복음의 결실을 가져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토대가 된다.
보감-7:1-53 스데반의 설교 속에 나타난 5대 역사적 교훈: 교훈의 목적
1. 아브라함으로부터 얻은 교훈(1-8절):
1) 모세 율법을 절대시 했던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약속이 율법보다 먼저 있었음을
상기시키고자함(갈 3:17)
2)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음을
인식시키고자 함(롬 4:20,21)
2. 요셉으로부터 얻는 교훈(9-19절):
1) 선민이라는 자만심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본래는 작은 민족에
불과했던 그들 민족을 하나님이 은혜로 택해 주셨음을 상기시킴(출 1:5; 12:37,38)
2) 형제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렸으나 하나님의 보호로 영화롭게된 요셉처럼,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죽으셨으나 다시 부활하셨음을 암시함(벧전 1:3)
3. 모세로부터 얻은 교훈(20-36절):
1) 유대인들이 모세틀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보다도 모세 자체를
더 숭배하는 경향을 지적함
2) 모세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신앙인들이 될 것을 촉구함(엡 4:1)
4. 우상숭배에 대한 교훈(37-51절):
1) 조상들의 영적 무지로 말미암은 우상 숭배의 죄가 현재의 유대인들에 의해서도
자행되고 있음을 지적함(레 26:1)
5. 하나님의 종 핍박과 관련된 교훈(52,53절):
1) 조상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것처럼 현재 유대인들도
성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옴을 지적함
보감-7:41, 우상의 본질
왕상 16장 자료노트 참조
삽화-7:41, 금송아지 우상
역사배경-7: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출 1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7:20-36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본 모세 생애의 3구분
1. 1기(1-39세)
1)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로 출생(20절)
2) 친부모의 집에서 석달동안 양육됨(20절)
3) 바로의 딸의 양자로 왕궁에서 길러짐(21절)
4) 애굽의 학술을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함(22절)
2. 2기(40-79세)
1)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기 시작함(23절)
2) 동족과 싸우는 애굽 사람을 쳐죽임(24절)
3) 동족으로부터 비난과 오해받음(26-28절)
4) 미디안 땅으로 도주하여 아들 둘을 낳고 살음(29절)
3. 3기(80-120세)
1) 시내산 광야에서 주의 천사를 만남(30절)
2)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킬 지도자로 소명 받음(34절)
3)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나옴(36절)
4)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함(36절)
보감-7:36 출애굽 40년의 주요 20대 사건의 예표와 교훈들
민 11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7:59 성경상 특이한 죽음의 실례
1. 나답과 아비후: 하나님이 보내신 불에 삼키워 죽음(레 10:1,2)
2. 고라외 이백오십인: 땅이 갈라져 그 속에 빠져 죽음(민 16:31-33)
3. 시스라: 여인에 의해 말뚝에 박혀 죽음(삿 4:21,22)
4. 삼손: 블레셋인의 집을 무너뜨리고 그 속에 파묻혀 죽음(삿 16:37)
5. 엘리: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음(삼상 4:18)
6. 골리앗: 소년 다윗의 물맷돌에 이마를 맞아 죽음(삼상 17:49)
7. 압살롬: 상수리나무에 머리 털이 걸려 걸려 죽음(삼하 18:9-15)
8. 하만: 남을 죽이고자 세운 나무에 자신이 매달려 죽음(에 7:10)
9. 예수: 죄가 없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눅 23:13-46)
10. 가룟 유다: 스스로 목매어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온 채 죽음(행 1:10)
11. 아나니아와 삽비라: 베드로의 경고를 듣자마자 혼이 떠나 죽음(행 5:1-10)
12. 스데반: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음(행 7:59,60)
원어연구-7:54-60 (마음에) 찔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프리오'인데, 이것은 '톱으로 켜다'라는 뜻의 '프리오'에 '~을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디아'가 접두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톱질하여 조각조각 내다'이다. 그리고 비유적으로는 '정신적으로 철저히 난도질 당하다' 또는 '화가 나서 마음이 심란하다'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행 5:33). 그러므로 본문에서 '(마음에) 찔려'의 의미는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가 아니라 '심히 노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정도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행 2:37에는 베드로의 설교를들은 무리들이 '마음에 쩔려' 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카타뉘쏘'이다. 이는 '~아래로', '철저히'라는 뜻을 갖는 전치사 '카타'와 '(바늘이나 가시 등으로) 찌르다', '꿰뚫다', '깊이 사무치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 '뉘쏘'가 합성된 단어이다. 따라서 이는 '양심의 가책이나 고통으로 괴로워하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마음에 찔려'(헬, 디아프리오)는 극한 분노로 인하여 매우 불안해진 마음 상태를 가리키나, 행 2:37에서의 '마음에 찔려'(헬, 카타뉘쏘)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한 마음의 괴로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동일하게 번역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이처럼 완전히 다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떠한 마음 자세로 듣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자기 아집과 완악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적일 때는 분노가, 순전함과 기쁨으로 받을 때는 깊은 깨달음이 있게 된다.
보감-7:54-60 순교에 임한 스데반의 자세
1. 어떤 위험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함(행 4:29)
2. 죽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함(행 7:56)
3. 자신을 죽일 자들조차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함(행 7:60)
4.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서도 용기와 평안을 잃지 않음(딤후 4:7,8)
5.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죽기까지 충성함(계 2:10)
7:1-19 스데반의 설교-족장 시대의 역사를 통한 교훈
본장은 전장 마지막 단락(행 6:8-15)에 이어서 스데반이 순교 직전에 공회 앞에서 행한 설교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스데반의 설교는 본서에 기록된 설교 가운데 사도가 설교하지 않은 유일한 것으로 베드로나 바울의 설교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통성을 변중하고 있다(행 3:22,23). 특히 스데반의 설교는 다른 설교보다도 이스라엘의 구속사적 역사를 서술하여 거기에 담긴 교훈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유대인들의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스데반의 설교는 매우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스데반은 일단 이스라엘 역사를 서술하여 당시 유대인들 스스로가 거기에 담긴 교훈과 자신들의 행동을 비교하게 끔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데반 당시의 상황과 설교 각 부분에 서술된 역사적 사실 자체를 잘 비교하여 이해해야 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각 단락별로 소개하기로 하고 먼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볼문을 족장 시대의 역사를 기술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언약과 믿음에 의하여 흐르고 있음을 소개한다. 구성은 두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아브라함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음으로 구원의 소망을 주셨고 이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웅답하여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을 통하여 율법보다 이전에 있던 언약과 믿음을 강조하고 형식적인 율법 조항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의 불신을 지적한다. 그래서 구원의 계시는 원래 언약에 의해 주어진 것이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교훈한다(롬 4:9-13).
두 번째 부분은 요셉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에 대해 소개 하고 있다(9-16절). 스데반은 희비(喜悲)와 영욕(榮辱)이 엇갈린 요셉의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경륜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요셉의 모습을 강조한다(창 37-50장). 또한 형들의 간교한 음모에 희생되지 않고 영광을 얻은 요셉의 모습을 유대인의 수난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예표로 삼고, 이러한 예수님을 박해하고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은연 중에 나타내고 있다. 한편 스데반이 아브라함과 요셉의 일생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족장 시대를 개괄한 것은 자신이 이런 구약적 전통에 충실한 자이며 자신이 전하는 복음도 구약의 언약과 어긋나지 않는 것임을 변론하기 위함이었다.
이상의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사랑 없이는 결코 구원의 소망이 있을 수 없으며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갈 3:14).
② 올바른 신앙은 신 ․ 구약 어느 곳에 편협되지 않고 신 ․ 구약을 꿰뚫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바로 이해하게 될 때 정립된다는 것이다.
③ 하나님은 언약을 변개치 않으며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므로 우리의 구원 또한 변함없이 이루신다는 것이다(민 23:19; 히 1:10-12).
7:1 대제사장이 가로되. - 여기서 대제사장은 행 4:6에 나오는 '가야바'를 가리킨다. 그는 A.D. 18-36년에 대제사장직을 수행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냐. - '이것'은 행 6:13,14에서 스데반의 적대자들이 내세운 거짓 증거를 가리킨다. 그 거짓 증거는 그가 말하기를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고 유대인들의 규례를 고치겠다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스데반의 적대자들이 스데반을 놓고 이 증거로 고소하자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은 피고에게 최후의 진술 기회를 주었다. 그것은 곧 피고의 입을 통해 사실의 진위를 최종적으로 판명하고자 함이다.
7:2 스데반이 가로되. - 대적자들의 고소건에 대하여 사실성 여부를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스데반은 자신이 죽음의 위기 앞에 직면해 있음을 감지하였을 것이다(54-60절).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변호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구속사적 언약과 그것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구약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자기를 죽이려하는 자들을 깨우치려 하고 있다. 참으로 성령이 충만한(행 6:35) 스데반은 진리를 위하여 자신을 초개같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밝히는 데 진력하고 있으니 그의 그러한 자세는 참된 하나님의 종의모습이 아닐 수 없다.
부형들이여. - 자기를 죽이려고 음모하는 사람들에게 스데반은 적대감을 품지 아니하고도리어 다정하게 '부형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자기보다 연장자(長者)인 것에 대한 존대의 표현이자 공동의 조상을 가졌다는 동일 민족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Hervey, Calvin). 스데반의 설교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으로 시작하는 데에서도 이 동일 민족 의식은 분명히 보여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스데반이 구약의 율법을 적대하지 않는다는증거이니 따라서 산헤드린이 이러한 스데반을 모세와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고소한 것은 전혀 사리에맞지 않는 옳지 못한 송사임을 반증해 준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 스데반의 설교가 아브라함에서 출발하는데 주목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율법과 언약'을 말함에 있어 모세를 언급하나(행 6:11,14) 스데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모세를 신성시하고 모세의 율법에 얽매있었으나 스데반은 언약의 시초가 아브라함임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때에. '하란'(Haran)은 메소보다미아의 니느웨와 북수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고대 성읍이다. 그리고 '메소보다미아'는 유브라데 강 서쪽에 위치한 고대 도시로서 메소보다미아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본절에서 얘기하는 것은 보다 정확히 '갈대아 우르'를 가리키는 바(창 11:31) 본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렀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창 12:1-4을 보면 하나님은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은 상충되는 것처럼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첫 부름을 받고 부친 데라와 같이 하란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데라가 죽을 때까지 정착하다가 그 하란에서 다시 동일한 부름을 반복하여 받고 가나안으로 간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Lenski).
영광의 하나님. - 여기서도 과거 아브라함에게 현현하셨던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영광'(독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세키나'( )이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출 16:7; 40:34,35; 레 9:6,23; 시 29:3). 신 12장 자료노트 '세키나' 참조.
7:3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자기가 몸담고 있던 고향 땅과 그곳의 친척들을 버리고 단출하게 직계 가족들만 데리고 하란으로 향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도 제자 중 하나가 부친의 장사를 위해 가게 해달라고 청했을 때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케 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 8:21,22). 그 까닭은 약속의 땅으로 부름받은 자들이 세상과 친척에 얽매여서는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친척을 등한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과 혈연에 매여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고향과 친척을 다 버리라는 명령은 받았으나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장소는 지정받지 못했다. 그는 단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는 말씀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정확히 갈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히 11:8).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의 행위였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같은 믿음을 보시고 저를 지켜 보호하여 온전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들인 것이다.
7:4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연대상의 문제가 있다. 아브라함은 데라가 70세 때 태어났고(창 11:26), 데라가 하란에서 죽었을 때 데라의 나이는 205세였다(창 11:32). 따라서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날 때 135세여야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75세라고 기록되어 있다(창 1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기 60년 전에 하란을 떠났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또 본문의 내용과 상층된다. 그러나 이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창 11:26에서 데라는 70세에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 창 11:26은 장자인 하란이 (창 11:28) 태어난 해를 데라가 70세 때였다고 기록한 것이며 아브라함은 하란보다 60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보면 데라는 130세에 아브라함을 낳았고 205세 때에 죽은 것이 된다. 그러면 연대기적 모순도 없으며 본문의 내용과도 상충되지 않는다. 이외에도 여러 설명이 있으나 자세한 것은 창 11:26 주석을 참조하기 바란다.
7:5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자식도 없는. -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처음 도착한 곳은 세겜 땅이었다(창 12:6). 거기서 약속을 다시 받고(창 12:7)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겼다가(창 12:8)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갔다가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로 돌아왔다(창 13:3). 이처럼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으나 나그네처럼 살았다. 물론 그가 겨우 땅을 마련한 곳이 있긴 하였으나 그것은 거주지가 아닌 막벨라에 있는 무덤이었다(창 23장). 게다가 이 땅은 이삭이 태어난 후에 산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났고(창 12:4), 백세에 이삭을 얻었다(창 21:5).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10세 어렸으며(창 17:17), 막벨라 굴을 산 때가 사라의 나이 127세 때였으므로(창 23:1) 이때는 곧 아브라함이 137세 때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하여 52년간 자기 소유인 땅 한뼘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25년간 자식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그동안 계속해서 천지의 주재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롬 4:16-22).
7:6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종을 삼아.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다(5절). 그러나 그 약속이 성취되기 전에 먼저 저들이 타향에서 종이 되어 고난을 받으리라고 예언하시고 계신다. 이는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서는 이러한 고난이라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성도의 신앙의 성장 과정도 이와 같이 영광의 면류관을 받기까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연단의 과정이 요청된다.
사백 년 동안. - 창 15:13의 인용이다. 그러나 실제 기간은 정확히 430년이었다(출 12:40; 갈 3:17). 한편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이와 관련하여 400년과 430년이란 숫자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숫자를 대략적으로 기술하던 관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Lightfoot).
7:7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 '종 삼는 나라'는 애굽을 지칭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대로(창 15:14)애굽을 치시고(출 7장-12장) 마침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다(출 12:29-51).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 '이곳'은 정확히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을 가리킨다(출 3:12). 그러나 본문에서는 포괄적인 의미로 '약속의 땅', 즉 시내 산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가나안의 모든 지경을 지칭한다.
7:8 할례의 언약을…주셨더니…행하고. -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에서 번성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언약의 상징이다(창 17:1-14). 이 할례는 먼저는 유대인에게 주신 언약의 상징이요, 그 다음으로는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이 받은 믿음을 따라 모든 사람이 그 자취를 좇을 구원의 상징이다(롬 4:9-13). 따라서 스데반이 본문에서 할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구속사적인 차원에서 할례가 언약의 상징이 되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것은 스데반의 설교의 마지막 부분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못한 사람들아'(51절)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즉 스데반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의 언약이 단지 육체적 의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받아 참 구원에 이르러야 함을 창 17:9-14을 인용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7:9 여러 조상이. - 여기서 '여러 조상'이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요셉을 제외한 나머지 형제들을 지칭한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고 그들은 각기 12지파의 조상이 되었다(창 46:8-27).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열두 사람을 자신들의 열두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8절).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 창 37장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스데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다음의 구속사의 위치에 요셉을 두고 있다. 요셉은 실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잇는 구약의 인물 중에서 독특한 그리스도의 그림자로 여겨지고 있다. 즉 그는 죄없이 형제들의 질투와 모략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가 '환난'을 겪고 애굽의 총리라는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 이것은 흠없는 그리스도가 동족인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의 모략에 의해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의 예표로 이해된다.
7:10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치리자로 세웠느니라. -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와 모략으로 인해 애굽으로 팔려갔으나 하나님은 무죄한 요셉을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셨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은총과 지혜'를 주시어 오히려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셨고, 그로 하여금은 애굽의 치리자로 세우게 하셨다(창 41:38-41). 여기서 스데반이 말하는 의도는 요셉을 높이 세운 것이 인간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요셉 자신도 알고 인정한 사실이다(창 45:8).
7:11 온 땅에 흉년들어…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 창 41:54,56; 42:2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이 흉년은 7년 동안 애굽과 가나안과 그 일대 전지역을 망라하는 온 지면에 걸쳐 있었다. 그래서 가나안에 머물러 있던 야곱과 요셉의 11형제들도 양식이 없어 고통 중에 있었다.
7:12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 창 42:1-3의 내용이다. 야곱은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서 곡식을 사오라고 종용하였다. 이때에 야곱이 보낸 아들들의 수는 베냐민을 제외한 10명이었다. 한편 본문에서 스데반이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냈다고 표현한 것은 후에 야곱이 애굽에 친히 내려감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창 46:1-7).
7:13 또 재차 보내매. - 창 43:1-2의 내용이다. 첫 번째 가서 사온 양식이 다 떨어지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다시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종용하였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 야곱은 아들들의 첫 번째 애굽 방문 때에는 요셉의 친형제 베냐민을 동행시키지 아니하였다(창 42:4,15). 그러나 두 번째 방문 때에는 요셉의 엄명에 의해 베냐민을 대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창 42:20; 43:3). 그리하여 베냐민을 보게 된 요셉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신이 요셉임을 형제들에게 밝혔는데(창 45:1-8) 본절은 바로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 각고 끝에 형제들을 만난 기쁨에 요셉은 대성통곡을 하였고, 그 소리가 바로의 궁에 들려 급기야 바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창 45:2,16). 그리하여 바로는 요셉에게 그의 부친과 모든 가솔들을 데려 오도록 허락하였는데 본절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이것이다(창 45:18).
7:14 친족 일흔 다섯 사람. - 바로의 허락을 받고(창45:18) 요셉은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및 그 친족들을 애굽으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숫자상의 문제가 발생되고 있는데 본문에서는 75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창 46:27에는 70인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70인역(LXX)에는 75인으로 되어 있는데 스데반은 이 70인역을 따른 것 같다(Hervey, Toussaint). 이 숫자상의 난점은 아마도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자손이 총 66인에다(창 46:26) 이미 애굽에 있던 요셉과 두 아들(므낫세와 에브라임) 그리고 야곱 자신을 더한 수가 70인이며, 70인역은 여기에 요셉의 손자 5인을 합친 것으로 이해된다(민 26:28-37; 대상 7:14-21). 창 46:27 주석 참조.
7:15 내려가…거기서 죽고. - 야곱과 그 아들들, 즉 유대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죽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그들이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아마도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유업의 땅이 아니요 나그네로서 살아 갈 땅임을 암시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리고 진정한 유업은 하늘 가나안 곧 천국임을 시사해 주기 위함인 듯하다(히 11:13-16).
7:16 세겜. -예루살렘 북방 58km 지점의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에 위치한 성읍이다. 일찍이 히위 족속의 추장 하몰이 이곳에 정착, 성읍을 건설하고 그의 아들의 이름을 따 '세겜 성'이라 명명하였다(창 33:18). 세겜에 대해서는 창 34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아브라함이…값주고 산 무덤에. - 아브라함이 은 400을 주고 산 것은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이었다(창 23:16). 그리고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 100을 주고 밭을 산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야곱이었다(창 33:19). 또 야곱이 묻힌 곳은 아브라함이 산 막벨라 굴이며(창 49:29-33), 요셉은 출애굽 때에 그의 유언에 의해 세겜에 장사되었다(출 13:19; 수 24:32). 그러나 요셉 이외의 조상들은 가나안 땅으로 이장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그들은 헤브론에 묻혔다고 한다. 이처럼 장지(葬地)와 그 장지를 산 사람의 이름이 엇갈리는데 이에 대해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① 스데반의 기억에 오류가 있었다(Calvin, Meyer). ② 스데반이 창 23:16과 창 33:19; 수 24:32의 두 사건을 경황 중에 하나로 보았다(Bengel). ③ 모든 조상들이 사마리아의 세겜에 묻혔다는 사마리아 전설을 따른 것이다(Lightfoot, Jerome, Knowling, Plumptre). 그러나 이 중 어떠한 견해를 취하든 본문의 문제는 미해결의 난점을 그대로 안고 있다.
7:17 때가 가까우매…애굽에서 번성하여. - 애굽으로 내려갈 때에 이스라엘인의 수는 불과 70인이었으나(14절 주석 참조), 출애굽 당시에는 장정의 수만 무려 60만에 달했다(출 12:37,38).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뭇 별들의 수만큼 번성케 하리라 약속하셨는데(창 15:5), 그 언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그처럼 번성한 것은 또한 저들을 종노릇하는 땅에서 구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창 15:13,14)이 성취되리라는 산 증거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역경 속에서 성취되어 갔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고난 속에서 번성하여 갔던 것이다.
7: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 - 요셉이 섬긴 왕은 애굽을 정복한 힉소스 왕조 때의 바로로 여겨지고 있다. 이 힉소스 왕조가 무너지고 애굽의 원주민이 재집권한 애굽 18왕조가 등장하였다. 본문의 '새 임금'은 이 18왕조의 세 번째 왕인 투트모스 1세(Thutmose I, B.C. 1539-1514)로 여겨지고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1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7:19 궤계를 써서……어린아이들을…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은 이스라엘 민족이 창성하는 것을 보고 위기감과 적의를 느끼고 이스라엘 백성을 멸절시키고자 하였다(출 1:9,10), 그리하여 첫 단계로 그들에게 힘든 노동을 시켜 체력을 소모시켰으나, 오히려 그들은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였다(출 1:11-14). 이에 다음 단계로 산파들에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자 아이를 출생할 때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한 산파들이 그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출 1:15-22). 본절은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7:20-36 스데반의 설교 - 모세를 통한 교훈
족장 시대의 역사를 서술하여 이스라엘이 선민이 된 것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섭리의 결과임을 밝히고,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간접적으로 책망한 스데반(1-19절)은 계속되는 본문의 설교에서 모세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모세의 출생 및 성장 배경(20-22절)과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모세의 인간적인 계획과 열심 및그것의 실패로 인한 도피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 등이 언급되어 있다(23-36절).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의 전수자요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던 모세를 지나치게 영웅시하면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에 스데반은 모세의 일생을 역사적으로 서술하여 먼저 모세와 율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다른 유대교인들과 다름이 없음을 보여 줌으로써 백성들의 그에 대한 고소가 억지인 것을 밝힌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세의 생애 중에서 인간적이고 실패했던 부분을 드러냄으로써 실패자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은혜를 부각시킨다. 즉 스데반은 모세의 생애를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섭리를 면면히 소개함으로 율법과 출애굽의 주체는 모세가 아닌 하나님임을 증거하고, 율법과 모세를 숭배하면서도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이 모세의 모습을 통하여 율법과 모세를 숭배하면서도 율법의 완성자요, 모세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오셨으나(히 3:1-6) 자신들의 전통과 형식 주의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배척한 유디 인의 완악함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처음에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여 그의 사명을 거절했던 모세가 후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음을 깨달았다면(출 4장) 유대인들도 복음에 곧은 목을 숙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함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부인하며 복음을 대적하는 악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인간의 실패와 좌절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일어나는 기회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며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사 41:10; 고전 12:27).
②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며,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시며 온 우주와 천지 만물의 진정한 주권자가 되신다는 것이다(행 14:14,15).
7:20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 극적인 상황 설명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창대하므로 위기 의식을 느낀 애굽의 새 임금이 모든 남자 아이를 죽이고 있는 절박한 시기에 하나님의 사람인 위대한 모세가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할 때 헤롯이 위기 의식을 가지고 예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모든 갓난 남자 아이를 죽인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마 2:16). 이에 대하여 벵겔(Bengel)은 '그 슬프고도 적절한 시기에 모세가 태어났다고 했거니와 참으로 괴롭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보내 주셨다'라고 평가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 '하나님보시기에'(창 1:4,12,18,21,25,31), '여호와 앞에서'(창 10:9), '하나님 앞에서'(욘 3:3) 아름답다 등의 표현은 성경에서 극히 '아름답다'또는 '좋다'는 것을 나타낼 때 쓰던 표현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도 쓰였긴 하나(왕상 15:26; 왕하 3:2) 여기서는 표현의 대상이 완벽하게 아름답고 좋을 때 이러한 표현들이 사용된 것과 연관이 있다. 즉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모세는 그처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왔다고 스데반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출 2:1).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 모세의 부모들은 아기 모세가 너무 준수하였기 때문에 바로의 명령대로 죽이지 아니하고 석 달간 집에 숨겨 키웠다(출 2:2).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라 마침내 더 숨겨 키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모세를 작은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띄워 버렸다(출 2:3,4).
7:21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 이는 출 2:5-10의 내용이다. '바로의 딸'은 전승에 의하면 투트모스 1세(Thutmose I)의 딸 '하셉수트' (Hatshepsut)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당시 바로였던 투트모스 1세에게 아들이 없어 그의 딸인 하셉수트가 왕위 계승자였고 따라서 모세도 당연히 왕세손이 되었다고 한다(Josphus). 실제로 그녀는 후에 자신의 남편인 투트모스 2세와 더불어 22년간 애굽을 통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여기서 '가져다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네이라토'로 '양자를 삼았다'는 뜻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멸절시키려는 바로의 계획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자손 하나를 자신의 왕손으로 삼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이처럼 비록 계획은 인간이 세우나 그 경영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잠 16:1).
7:22 학술을 다 배워... 능하더라. - 당시의 고대 개굽은 수학과 천문학, 의학 등에 있어 세계 문명의 선두주자였다. 모세는 이러한 문명의 왕실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웠다. 게다가 그는 과학, 수학, 천문화, 지리학, 의학 뿐만 아니라 왕가에서 필히 배워야 할 시도자의 처세법과 통치술도 터득하여 실로 다방면에서 능통했을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애굽의 왕으로서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길을 걸을 준비를 탄탄히 다지게 하신 것임이 틀림없다(Robertson).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 모세가 호렙 산에 이르러 하나님을 뵙고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모세는 자신이 '말에 능치 못하다'고 하였다(출 4:10). 이는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데 실상 그것은 모세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회피하려고 하나님께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그러한 모세의 태도가 모세의 겸손에서 기인한 것이라고도 하나 출 4:14을 보면 모세가 자꾸 회피하므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노를 발하신 것은 모세가 마땅히 할 일을 거절했기 때문임을 분명히 해준다. 즉 본절에 나와 있듯 모세는 말에 능하면서도 능치 못하다고 거짓 구실을 대었던 것이다.
7:23 나이 사십이 되매. - 이는 구약에 기록이 없는 내용이다. 단지 구약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끌어 내기 위해 애굽의 바로에게 갈 때 그의 나이 80세였으며(출 7:7), 출애굽 이후 비스가 산에서 죽을 때 120세였다(신 34:7)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가 바로의 궁중에서 왕자로 생활하다가 자기 동족에 대해 눈을 뜬 것이 그의 나이 사십 세 때의 일이라는 것은 이 스데반의 견해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이 스데반의 견해에 따르면 모세는 40년간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모든 학문을 연마하였고, 40년간 광야에서 목자 생활을 하면서 연단 받았고(30절), 그후 40년간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며 지도자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36절).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 본문의 '돌아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켑토마이'는 '문병하다' 또는 '방문하다'는 뜻으로 본래 병자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눅 1:68; 7:16; 히 2:6). 그러나 여기서는 모세가 자기 백성의 고통을 알고 나서부터 자기 백성을 돌아볼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24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 출 2:11,12의 내용이다. 모세는 압제당하는 자기 동족의 원통함을 보고 의로운 분노를 일으켰다.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일을 보고 눈감음으로 일생 바로의 궁에서 안락과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인지라 의분을 참지 못했다. 한편 스데반은 여기서 '한 사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인간은 비록 '한 사람'일지라도 그 한 인격이 소중함을 암시해 주고 있다.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 압제받는 한 사람의 원통함을 보고 의분을 참지 못한 모세는 압제하는 자를 죽여 버렸다. 그러나 그의 의분은 땅의 일만 살핀 의분이었지(출 2:12), 궁극적으로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롬 12:19). 그리하여 그는 이 일로 말미암아 광야로 도망가게 되었다(출 2:15). 이처럼 하나님의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는 법이다. 때문에 모세는 자기 백성을 출애굽시키기까지 아직도 40년을 광야에서 더 연단받아야 했다. 23절 주석 참조.
7:25 저는…깨닫지 못하였더라. - 모세가 압제 받는 자기 종족을 위해 애굽 사람을 죽일 당시 실제로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구약에 언급이 없다. 그러나 출 2:10-14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어렴풋이나마 모세가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Bruce, Toussaint). 사실 모세는 그러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애굽 사람을 죽이기까지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동족들이 그것을 깨달아 모세를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는 오히려 광야로 쫓겨 도망가게 된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 된 데에는 아직 하나님의 작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근본 이유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Calvin).
7:26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 출 2:13의 내용이다. 모세는 같은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화해시키려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인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압제 당하는 가운데서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동족 간에 싸우는 것이 못마땅하고 안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어디서든지,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만을 내세우며 공동의 삶과 운명을 저버리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처럼 이 어리석은 두 유대인도 모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해타산만을 위해 다투고 있었다.
7:27 밀뜨려…누가 너를…우리 위에 세웠느냐. - 출 2:14의 내용이다.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해를 중재하려는 모세에게 싸우던 두 유대인은 오히려 대들었다. 이는 모세가 바로의 양자임을 모르고 한 행동이었거나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네가 호사한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사정을 알겠느냐는 식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밀뜨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사토'는 전치사 '아포'와 '밀다'라는 동사 '오데오'의 합성어로 '곁에서 밀어내다'는 뜻이다. 즉 서로 싸우던 두 사람은 중재자로 나선 모세를 자신들에게서 밀쳐내고 오히려 배척한 것이다(Robertson).
7:28 또 나를 죽이려느냐. -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어 주고 있는 말이다. 모세가 애굽사람을 쳐죽인 것은 그 애굽 사람이 자기 종족을 구타했기 때문에 구해주려 했던 마음에서였다. 그런데도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고 화해시키려는 모세에게 '애굽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고 하는 것은 모세의 신중을 한 터라도 이해하지 못한 소치에서나온 말이 아닌 수 없다. 이처럼 모세의 심중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는 것은 기대밖의 일이다. 실제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고서도 불평과 불신으로 광야 생활을 보냈다(출 5:21; 14:11,12; 32장).
7:29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 '미디안 땅'은 시내 산이 있는 시내 반도를 지칭한다(출 2:15; 3:1). 자기 종족의 입발림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바로를 피해이 광야로 도망와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출 2:14-15). 그러나 미디안 땅에서의 나그네 생활은 결코 허송 세월이 아니었다. 모세는 그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기까지 신앙의 연륜을 쌓았으며, 고독하게 자신과 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미디안 땅에서 자신의 후손인 두 아들, 즉 게르솜(출 2:22)과 엘리에셀(출 18:4)을 낳았다.
7:30 사십 년이 차매. - 스데반은 모세가 40세에 민족의식을 자각하고(23절) 미디안 광야로 도주하여 40년간 그 광야에서 생활하였고, 이후 40년 간 자기 백성을 인도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36절). 즉 그는 40년씩 3기(期)로 모세의 일생을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서 여기서의 40년은 제 2기의 40년, 즉 미디안 땅에서의 광야생활 40년을 말한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보이거늘. - 본문의 '천사'는 '여호와의 사자'(출 3:2)로 히브리어로는 '말라크 야웨'이다. 그런데 '말라크'는 '보냄을 받은자', '파견된 자'라는 뜻으로, 이를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천사(마 2:20,23)나 선지자(학 1:13) 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육신(Incarnation)하기 이전의 성자 하나님, 즉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Calvin). 왕하 1장 자료노트, '여호와의 사자' 참조. 한편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받은 장소에 관해서 출 3:1은 '호렙 산'이라고 하고 있으나 본문은 '시내 산'이라고하고 있다. 이는 '호렙'이 산맥의 이름이며 '시내'는 그 산맥의 한 산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아니면 반대로 '시내'가 산맥이고 '호렙'이 산일 수도 있다. 여하튼 시내 산과 호렙 산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산이 아니라 한 산을 지칭하는 두 개의 명칭임에는 틀림없다. 출 3:1 주석 참조. 다음으로 가시나무는 시내 반도에 흔한 하찮은 나무로 천대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사자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가시나무에 '불꽃'으로 나타나 모세와 말씀하셨던 것이다. 출 3:2 주석 참조.
7:31 광경.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라마'( )는 '환상'(Vision)을 의미한다(행 16:9). 따라서 모세가 본 것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본 것이었다. 창 3:2에 의하면 모세가 본 '떨기나무 불꽃'은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즉 그 불꽃은 물리적인 현상에 의해서 연소하여 생긴 불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신비로운 불꽃이었다. 따라서 모세는 환상을 보는 듯한 감정을 느껴 '기이히 여겼다'.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 '경이감이 없이는 배움이 없다'(Mazzni)는 말이 있듯이 모세는 신비한 불꽃에 경이감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여기서 '알아보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노에사이'( )는 '깊이 알다', '주의 깊게 관찰하여 인식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세가 본 현상은 단순한 환상이 아닌 실제적으로 일어난 초자연적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의 소리 있어. - 출 3:2에는 '여호와의 사자'로 본문 30절에는 '천사'로 본절에서는 '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실상 동일하게 2위 성자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들이다(30절 주석 참조).
7:32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이 이름은 구속사적 언약과 관계하여 언급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출 3:6; 4:5; 왕상 18:36; 마 22:32) 하나님의 불변성과 언약의 필연적 성취를 나타내 준다. 행 3:13 주석 참조.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이 불변성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실 때 이 명칭을 인용하셨다(마 22:32). 즉 이것은 부활하여 영생에 들어 갈 모든 성도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인 것이다.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워떨지 아니할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의인이란 하나도 없어(롬 3:10)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롬 3:23). 따라서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이처럼 두려워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Calvin). 한편 본문은 모세가 두려워하여 '감히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나, 출 3:6에서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렸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감히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차마 보지 못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31절의 '알아보다'는 말이 '주의 깊게 관찰하여 인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31절 주석 참조) 그에 비추어 본절의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없었다, 즉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7:33 네 발의 신을 벗으라. - 출 3:5의 내용이다. 그런데 이는 모세가 선 곳 자체가 거룩하기 때문에 신을 벗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곳이 예루살렘이든 어디든 자연계 자체가 거룩할 수는 없다. 대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거룩한 곳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유일한 장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요 4:21). 그리고 하나님의 영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곧 거룩한 예루살렘이며 그곳에서 누구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4:23,24). 다음으로 '신'은 죄악에 오염된 인간의 온갖 더러움과 그 성품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같은 신을 벗으라는 것은 곧 타락한 인간이 죄악된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니 죄악을 벗어버리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도 의미하는 것으로, 곧 모세가 완전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출 3:5 주석 참조.
7:34 내가 정녕히 보고…듣고…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 '정녕히 보고'는 '이돈 에이돈'으로 '내가 보고 또 보고'라는 뜻의 강조 용법이다(창 37:8; 삿 4:9).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창 15:14) 항상 이스라엘을 지켜보고 계셨다. 그리고 지켜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통곡 소리를 들으셨다(출 3:7). 또한 이렇게 보고 듣고 계셨던 하나님은 보고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내려오셨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치밀한 사역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은 사태를 관망하시거나 경청하시지만 아니하시고 때가 되면 직접적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시다. 한편 여기서 '구원하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셀레스다이'는 '직접 구출하기 위하여'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으로부터 끌어내어 주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7:35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보내셨으니. - 이제 스데반은 지금까지 역사적 사실을 열거만 하던 태도에서 벗어나(2-34절)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을 첨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을 첨가함으로 스데반은 당시 모세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와 스데반 당시의 유대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배척한 어리석음을 연결시켜 질타한다(51절-53절). 실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부한 모세를(27절; 출 2:14)선택하사 이스라엘의 주재자와 법관으로 삼으셨다(34절 ; 출 3:10). 그런 점에서 모세는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다(마 27:22). 한편 모세가 구속주되신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것은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다'는 말씀으로 더욱 명확해진다. '속량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뤼트로텐'은 그 동사형이 '구속한다'는 뜻의 '뤼트로마이'이며, 명사형도 '구속'이라는 '뤼트론'이다. 따라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낸 것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속'하신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마 20:28; 막 10:45; 롬 3:24; 고전 1:30; 엡 1:7).
7:36 이 사람이…인도하여…기사와 표적을. -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넌 후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에서 그들을 인도하였다. 이 모든 기간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전무 후무한 기사와 표적을 많이행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은 바로에게 내렸던 열 재앙(7-12장)과 홍해를 가른 이적(출 14장)이다. 물론 그러한 이적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또한 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을 증거해 주는 것이었다.
7:37-43 스데반의 설교-불순종의 죄
앞서 스데반은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지적하였다(20-36절). 본문은 바로 그러한 모세의 명령을 거부하고 불순종하여 우상숭배를 행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죄악된 모습을 지적함으로써같은 죄악을 답습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스데반의 설교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시고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원하게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도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하고 불순종하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불신앙적인 모습은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사이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하는 데서 극에 달했다(출 32:1-6). 나아가 그들은 광야 40년 동안의 생활을 불순종으로 점철지었다. 실로 그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스데반이 여기서 이처럼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모세가 '나와 같은선지자'(신 18:15)라고 예언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의 말씀에 불순종한 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 모세의 사역을 존경하며, 그의 율법을 엄격히 준수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모세가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가 오자 그를 배척하고 죽이는 죄악까지범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스데반까지도 율법을 거스리는 자로 고소하였던 것이다. 이에 스데반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의 역사를 서술하여 당시 유대인들 자신들의 모습과 비교하게 함으로써, 그들도 조상들과 다름없이 불순종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 준수가 형식에 치우친 것임을 책망한 것이다. 결국 스데반은 자신을 율법을 거스리는 자로 고소한 유대인들의 고소는 오히려 그들 자신이 당할 것임을 설파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7:37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이 모세라. - 베드로도 같은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이는 신 18:15의 내용이다. 유대인들은 이 모세의 말을 읽고 메시야를 기다렸으나 정작 그와 같은 선지자인 예수가 왔을 때에는 배척하였다. 그들은 모세가 한 말을 기억은하고 있었으나 그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신 18:15 주석을 참조하라.
7:38 광야 교회. - '광야 교회'(테 에클레시아 엔 테 에레모)란 출애굽 후 광야에서 생활했던 하나님의 백성 전체 곧 이스라엘의 총회(출 19장; 신 18:16) 를 가리킨다. 이것을 스데반이 교회라고 칭하는 것은 그 광야의 총회가 신약교회의 그림자였었음을 말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즉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던 자들이 이스라엘 총회였던 점에 비추어 이를 오늘날 주께로부터 복음을 받고 있는 성도의 무리 곧 교회의 그림자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도. -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지칭한다. 본래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죄 가운데 놓여 있어 그 생명의 말씀을 온전히 준행할 수 없었으니 오히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되었다(롬 7:10). 그래서 모세의 '생명의 도'를 완전케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마 5:17).
7:39 모세에게…거절하며… 애굽으로 향하여. -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부터 모세를 원망하였다. 동족을 화해시키려 할 때에도(출 2:14), 바로에게 애굽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청원한 일로 인하여 저들의 고역이더 가중되었을 때에도(출 5:21), 애굽의 군대가 홍해를 앞두고 진격해 왔을 때에도(출 14:11,12) 저들은 모세를 원망하였다. 그리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었을 때에도(출 16:3), 모세가 40주야를 시내 산에 올라가 머물며 십계명을 받을 때에도(출 32장) 그리했음은 물론, 만나를 먹으면서도 더 나은 식탐을 하였고(민 11:45), 또한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서도(민 14:3) 그들은 계속 모세를 원망하고 도리어 과거에 압제받던 애굽의 생활에 대한 향수를 토로했다. 이는 저들이 애굽에서 생활하는 동안 몸에 배인 노예 근성 탓이었긴 하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저들을 구원해 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탓이었다. 그러기에 저들은 그처럼 원망만 하는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멸절하고 만 것이다(민 14:26-35).
7:40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만들라. - 이는 출 32:1을 인용한 것으로 출 32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가 이제 곧 내려올 때가 되었는 데도 불구하고 지체하자 몇 날을 참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어 우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스데반이 이처럼 조급하고 당장의 표적을 구하는 어리석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한 것은 이를 신약 시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과 연결시켜 그들이 예수를 배척하고 엉뚱한 메시야를 기다렸음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는 말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즉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낸 하나님의 종 모세를 모른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메시야이신 예수를 버렸던 것이다(마 27:22,23).
7:41 송아지를 만들어…제사하며…기뻐하더니. - 모세가 산 위에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말라'(출 20:4)는 말씀을 듣고 있을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을 종용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우상이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낸 자신들의 신'이라고 하며 그 우상 앞에서 절하고 춤추며 기뻐하였다(출 32:4-6). 즉 저들은 가장 입숙한 시간에 가장 중차대한 범죄를 행했던 것이다. 한편 이 송아지 숭배는 이스라엘인들이 애굽에서 사는 동안 배운 것으로 애굽인들의 아피스(Apis) 숭배와 연관이 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출 32장 자료노트, '애굽의 송아지 숭배'를 참조하라.
7:42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의 행동을 보시고 권념(眷念)하지 않으시고 우상 숭배하도록 버려두셨다는 의미이다(Lenski). 여기서 '하늘의 군대'란 '자연계의 피조물들', 즉 '일월성신'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엄벌하셨는데, 그 대가로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도록 하셨다(민 14:33, 34). 그런데도 그 후손들은 어리석게도 끊임없이 우상 숭배를 행했다(신 4:19; 17:3; 왕하 21:3,5; 렘 8:2; 19:13; 습 1:5).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있었느냐. - 암 5:25을 인용한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형식적 제사 행위를 꾸짖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암 5:25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7:43 본절은 암 5:26의 인용으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죄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몰록의 장막. - 몰록(Moloch)은 암몬족의 국가신으로 일명 '몰렉', '밀곰', '밀감'으로도 불리웠다(레 18:21; 왕상 11:5; 왕하 23:10; 렘 49:3). 이 우상은 황소 머리에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제의시(祭儀時)에는 어린 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치곤 했다(신 12:31; 겔 16:20). 한편 암 5:26에는 몰록대신 식굿(Sikkuth)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앗수르인들이 섬기던 성신(星神)이다. 왕하 1장 연구자료, '근동 국가의 우상들' 참조. 레판의 별. - 암 5:26에는 '기윤'(Chiun)으로 되어 있는데, 이 '기윤'은 앗수르인들이 숭배하는 토성(土星)이었다. 시리아어로는 이 토성이 '렘판'(Remphan)으로 불리웠는데, 이것이 헬라어로 고쳐지는 과정에서 '레판'(Rephan)으로 변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선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였으니 이 예언대로 결국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끌려갔다(왕하 23:26-27; 대하 36:11-21).
7:44-50스데반의 설교-성전 숭배
스데반은 앞서 이스라엘 조상들의 불순종했던 과거 역사를 서술하여 당시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그들의 조상들과 비교케 함으로써 그들 역시 조상들의 불순종을 그대로 답습하는 죄악을 행하였음을 지적하고 실제로 율법을 거스린 장본인은 스데반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를 고소한 유대인들임을 설파했다(37-43절). 이어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의 그에 대한 두 번째 고소 내용과 관련하여 성전 숭배의 잘못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후 광야에서 모세를 명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음이야 하나님과 백성들의 만남의 장소로 성막을 짓게 했다. 따라서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는데 솔로몬 때에 이르러서는 고정적 건축물인 성전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성전은 율법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로 부각되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이 갖는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성전을 숭배하는 잘못을 범하여 형식적인 성전 예배와 성전 제사를 마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만능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스데반은 하나님은 성전에 국한될 수 없는 온 우주의 통치자이심과 성전 역시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유대인들의 외식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신앙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스데반의 설교는 실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충격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실 솔로몬도 일찍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면서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하면서 성전의 보잘 것 없음을 고백했다(대하 6:18). 이러한 성전을 유대인들은 그것이 지니는 참된 의미,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우상시하였으며, 성전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을 모독한다고 고소했는가 하면(마 26:61), 스데반 역시 성전 모독죄로 고소하기까지 한 것이다.
한편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요 4:24.)
② 하나님은 온 우주의 통치자요 주권자로 시공의 제한을 받으시는 일이 없으며 무소부재하시다는 것이다(시 145:4; 렘 23:24).
③ 바른 전통과 교훈은 지키고 보수해야 하지만, 잘못된 전통과 교훈은 과감한 개혁을 통해 생명력 있는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7:44 증거의 장막. - 43절의 몰록의 장막과 대조되고 있다. 이 '증거의 장막'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의 돌판을 보관한 장막이기 때문에 '증거의 장막'으로 불리웠으며(민 9:15; 10:11), 또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는 장소였기 때문에 '회막'이라고도 불리웠다(출 27:21; 신 31:14). 이 장막은 모세가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하에 그대로 지은 것이다(출 25-27장).
7:45 받아…가지고…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 '받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덱사메노이'는 전치사 '디아'와 '받다'는 뜻의 동사 '데코마이'의 합성어로 '물려받다', '계승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증거의 장막, 즉 회막은 모세에게서 여호수아에게로 넘겨져 여호수아는 그것을 가나안 땅으로 가지고 들어 갔으며(수 4:16), 다윗에게까지 전해졌다(삼하 6:17).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출 39장 자료노트, '성막의 역사'를 참조하라.
7:46 다윗이…달라 하더니. - 모세에게서 여호수아로 이어진 회막은 계속 다윗의 대에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팔레스틴 주변을 평정하고, 화려한 궁전에서 생활하던 다윗이 하나님의 성막이 초라한 것에 마음이 아파 크고 견고한 장막, 즉 성전을 건축하고자 마음 먹고 선지자나단을 통해 하나님께 여쭈었다(삼하 7:2).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다. 그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이었다. 즉 다윗은 전쟁을 통해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평화의 전인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다. 대상 22:8 주석 참조.
7:47 솔로몬이…지었느니라. - 다윗은 하나님의 집(오이콘)을 지으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대신 다윗의 아들이 지을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삼하 7:12,13; 대하 6:9). 이에 다윗은 비록 자신이 성전을 건축하진 못했지만 장차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재료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솔로몬은 그것을 가지고 마침내 성전을 건축하였다(대하 34장; 5:1).
7:48 지극히 높으신 이. - 천지의 주재자이시요, 만물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지칭한다.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 '손으로 지은 곳'이란 헬라어로 '케이로포이에토스'로 본래는 사람이 만든 것, 즉 우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사 45:16; 호 8:4). 그러나 여기서는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가리킨다. 스데반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위해 지어진 성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성전 안에서만 계시지 아니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의 단일 성소인 예루살렘 성전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던 처소였으나 하나님은 그곳에 제한적으로 존재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처인 성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휘장이 찢어짐으로 그 역할의 종말을 고했다(마 27:51; 막 15:38). 아무튼 본문에서 스데반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의 속성이다. 이에 대해서는 솔로몬도 자신의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고백한 바이니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하 2:6 주석을 참조하라.
7:49,50 하늘은 나의 보좌요…지은 것이 아니냐. -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구속사의 맥락을 개요해 내려온 스데반(2-47절)은 이제 이사야 66:1,2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설교의 대단원을 맺으려 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모든 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요, 유대인들이 섬기고 있는 성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들이라는 것이 스데반의 결론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선조들이 행했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을 배척하고, 썩어질 피조물을 우상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고발하고 있다. 실로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 자신도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하며 성전의 보잘 것 없음을 고백했다(대하 6:18).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 성전을 우상시하여 신성 모독죄가 아닌 성전 모독죄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막은 것이다(마 26:61-68).
7:51-53 스데반 설교의 결론
주지하다시피 스데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 서술을 통해 완악하고 패역했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모습과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을 스스로 비교케 함으로써 당시 유대인들 또한 이스라엘 조상들과 동일하게 같은 죄악을 답습하고 있음과, 그를 고소했던 유대인들의 주장과 같이 오히려 유대인들 스스로가 율법을 거스리고 성전을 우상시하는 어리석은 잘못을 범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했다(1-50절).
이어지는 본문은 스데반 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스데반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 서술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책망한 것과는 달리 본문에서는 직접적으로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고 있다. 즉 스데반은 먼저 이스라엘 조상들이 완악하여 의인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것을 지적하고 이어 당시 유대인들은 그 조상들의 완악함을 그대로 답습하여 성령을 거스리고 옛날 선지자들이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의인, 곧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죄악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지키지 않았음을 통박하고 있다. 실로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 조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완악해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처하고 자랑했으나 진정 잘못된 전통과 특권 의식에만 사로잡혀 하나님의 참된 선민이라 부를 수 없는 표면적 유대인에 불과했으며(롬 2:28,29),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교만과 영적 무지로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끝내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를 범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이 사실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스데반마저 돌로 쳐 죽이는 완악함을 보인다. 결국 이러한 스데반의 설교는 본서 전체의 맥락에서 주지해보건대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된 당위성을 보여 준다할 것이다.
한편 이상의 본문 내용을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한 자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교만하며 형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이켜 보자.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 스데반의 설교의 결론부이다. 50절까지는 구속사의 맥락을 설명해 왔으나 본절부터는 지금까지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을 통렬하게 꾸짖고 있다. 즉 스데반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어리석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꾸짖을 때 사용하던 용어로 청중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역사상 이스라엘은 참으로 목이 곧은 백성들이었다(출 33:3,5; 34:9). 그들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들은 표적과 기사가 눈 앞에 보여질 때에만 하나님을 경외했을 뿐 이내 다시 우상을 섬겼다. 그 대가로 그들은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였다(히 3:17,18). 그리고 수도 없이 이방 나라들에게 정복되어 핍절한 생활을 하였다(왕하 23:26,27; 대하 36:11-21). 이는 저들이 육체의 할례는 받았으나(수 5:8) 마음의 할례는 받지 못하였으며(레 26:41), 그리하여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항상 성령을 거스려. - 사 6:10의 내용을 바탕으로 말한 것이다. 사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는 것'(고전 12:3)처럼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고는,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온전히 진리 가운데 거할 수 없다.
7:52 너희 조상들은…예고한 자들을…죽였고. -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리라고 예언한 선지자들을 죽였다(느 9:26).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해 톱으로 몸이 잘리우는 죽음을 당했고, 예레미야는 애굽 땅에서 동족의 손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Bruce). 이처럼 그들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여러 모양으로 죽이는 역사적 범죄를 자행하였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도 '너희가…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 23:35)고 말씀하셨다.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 본문의 '그 의인'은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Calvin). 본서에서는 본절 이외에 3:14과 22:14에 두 번 사용되고 있다. 본래 '의인'이란 '무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그'라는 대명사가 있어 한 사람의 의인, 즉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요 1:29). 따라서 본문이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잡아 죽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마 26:57; 27:35,50). 이처럼 유대인의 조상들은 메시야가 오실 것에 대하여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지금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를 죽였다.
7:53 천사의 전한 율법. - 이는 율법을 천사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것으로 믿는 유대인의 전통 사상에 입각한 말이다(갈 3:19; 히 2:2). 이러한 사상은 신 33:2에 근거하고 있는데 곧 여호와께서 율법을 갖고서 강림하셨을 때 '그 우편에 천사들이 함께 있었다'(LXX)는 구절이다(Hervey). 그러나 혹자는 본절의 '천사'를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ightfoot).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 이렇게 천사의 중보를 통해 '율법'을 받고도 유대인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물론 문자적인 의미의 규례들은 지켰으나 그 이면에 새겨진 진의를 깨닫지 못했으니 깨닫지도 못한 것을 지킬 수는 없었다.
7:54-60 스데반의 순교
스데반의 능력있는 설교(1-53절)는 강팍하고 완악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심히 상하게 하여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를 발생시킨다. 종교 지도자들의 목적은 공정한 송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의 정죄를 통한 초대 교회의 박해에 있었기에 그의 설교를 진지하게 경청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명의 스데반이 의외로 논리 정연하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자신들의 위선과 악행을 정확히 지적하자 저들은 시기와 분노가 일어나서 대만을 돌김 겨 죽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의 중심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순교(殉敎)의 원인이다. 산헤드린 공회는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 그에게 신성 모독죄와 율법 파괴 죄를 적용하였다(행 6:13,14), 그래서 스데반은 율법에 따라 성 밖에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다(58절; 레 24:11-14). 지도자들이 스데반을 죽인 진짜 이유는 자신들의 종교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즉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사도들을 박해한 것처럼 스데반을 죽인 것이다. 더구나 로마의 속국으로 사형 집행권이 없었던 유대 공회에서 사형을 결정하고 시행했다는 것은 이들의 행위가 분명히 불법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둘째는 순교의 태도이다. 스데반은 시종일관 성령충만한 모습을 유지하였고(55,56절) 심지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를 죽이는 데 가담한 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중보의 기도를 드렸다(59,60절). 이러한 스데반의 모습은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드러내어(눅 23:34)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됨을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스데반을 죽인 종교지도자들의 태도는 살기가 등등하였고, 악한 분노로 가득차있어 스데반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54,57절).
셋째는 순교의 결과이다.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는 박해가 가중되었고 성도들이 흩어지는 어려움을 당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도피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복음이 유대 전 지역과 사마리아 및 땅 끝까지 전파되는 복음의 확장을 가져왔다(행 8:1-3). 더욱이 스데반의 죽음은 그 죽음의 증인이 되었던 청년 사울(58절)을 복음의 사도로 변화시켜 이방 세계의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행 9:15).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섭리이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닫을 수 있다(롬 8:28).
한편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완악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복음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알 수 있다. 즉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곧 회개할 길을 찾았으나(행 2:37),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정곡을 찌르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데반을 죽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은혜로 전파되지만 이를 받는 수신자의 태도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즉 복음은 이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근거가 되며, 반대로 거부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근거가 된다(요 5:24).
7:54 이 말을 듣고. - '듣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쿠온테스'는 현재 분사형으로 '듣고 있는 중에'라는 말이다. 이는 곧 스데반이 말을 아직 마치기도 전에 유대인들이 노여움을 표시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Robertson).
마음에 찔려. - 그들이 노를 발한 것은 스데반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반대로 스데반이 너무 자신들의 치부를 정곡으로 찔렀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도 노를 발한 것이다. 즉 저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51절)로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진리의 말을 한 사람을 해하려 든 것이다.
이를 갈거늘. - 개역 성경에 표현된 이 '이를 갈거늘'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프리온토'는 '크게 노하다'라는 의미이다. 동일한 단어가 행 5:33에서는 원의(原意)대로 '크게 노하여'로 번역되어 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를 말한 스데반의 변론과 책망은 도리어 청중의 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고전 1:18) 임을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7:55 성령이 충만하여. - 항상 성령을 거스리던 이스라엘의 조상들 및 성령에 의해 마음의 할례를 받지못한 당시 유대인들과 대조가 되고 있다. 즉 스데반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성령에 충만하였으나(행 6:3,5,8,15),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줄 곳 하나님을 거역하여주의 성신(聖神)을 근심케 하였다(사 63:10).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성경에는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에 대한 기록이 많다(마 26:64; 눅 22:69; 엡 1:20; 골 3:1; 히 1:3). 그런데 여기서 '우편'이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즉 여기서 우편이란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와 명예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데반은 바로 그러한 권위와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을 영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진리를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이제 순교할 스데반을 맞이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선 친히 보좌에서 일어나 서셨고 스데반은 그 영광의 주님을 주목하였다(Bengel, Lumby, Vincent, Bruce). 이처럼 스데반은 참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므로 사단의 궤계를 받아 대적하는 자들도 그가 영광의 주께로 가는 길을 방해할 수 없었다.
7:56 하늘이 열리고. -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맞이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과 이야기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셨거니와(요 1:51), 실로 스데반은 그 하늘이 열리고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인자가…서신 것을 보노라. - 예수께서는 자신을 호칭하실 때 이 '인자'(人子)란 칭호를 주로 사용하셨다(마 8:20; 막 8:31; 눅 6:22; 요 1:51). 이 칭호는 복음서에서 주로 보이는데, 마태복음에서는 30회, 마가복음에서는 15회, 누가복음에서는 25회, 요한복음에서는 12회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에서 위의 복음서 이외에는 본절과 계 1:13; 14:14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록의 인자는 복음서와 본절의 '인자'(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와 달리 '호모이논 휘온 안드로푸'로 되어 있어 엄격히 말하면 '인자'라기 보다 '인자 같은 이'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복음서 이외에 '인자'를 사용한 곳은 본절 뿐이다. 이 '인자'는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란 뜻으로 첫째는 예수의 성육신(Incarnation) 사건, 둘째는 예수의 수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을지니고 있다. 이에 눅 12장 자료노트, '인자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7:57 큰 소리를 지르며. - 마음에 찔리는 것이(54절) 극에 달한 상태를 보여 준다. 즉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드러난 것과는 달리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한 것을 본 유대인들은 더 이상 인내하기 힘들었다. 더욱이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 것(55,56절)을 스데반이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둔 것이라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그같은 신성 모독자 스데반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Bruce).
귀를 막고. -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성령에 충만하여 하는 스데반의 말은 패역한 자들의 마음에 좌우에 날선 검처럼 예리하게 파고들었다(히 4:12). 이에 마음이 찔린 저들은 회개하기는 커녕 도리어 더 이상 듣기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귀를 막은 것이다.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에 완악한 유대인들은 제대로 반론을 펴지 못하였음은 물론(행 6:10),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의 지식으로도 저를 이기지 못하였다(54절). 이처럼 어떠한 것으로도 이길 수 없게된 유대인들은 이제 최후의 수단으로 또다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행 5:40 주석 참조.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 레 24:14에 의하면 신성 모독죄를 범한 죄인을 죽이고자 할 때에는 진밖으로 끌어내어 머리에 안수한 후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진 밖에서 죄인을 돌로 칠 때에는 먼저 낭떠러지에 죄수를 세운 후 그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리고 증인으로 선 자들이 먼저 돌을 던지고 그 다음에 군중들이 모두 돌을 던져 죽였다(신 17:5). 이렇게 해서 죽은 자의 시체 위엔 돌무더기가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실 때에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 나가셨는데(막 15:22)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다'(히 13:12)고 애절하게 기록하고 있다.
옷을 벗어… 발 앞에두니라. - 증인들이 왜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는지 확실치 않다. 다만 추측컨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 앞에 자신들의 옷을 벗어 놓음으로써 자신들의 위증에 대한 책임을 전가시키고자 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행 6:13). 즉 사울은 스데반을 박해하여 죽이는 데 동조했던 자였는 바 증인들은 그 사울에게 자신들의 안전을 부탁하였던 것이다(행 22:20).
사울이라 하는 청년. - 이 사람은 후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 중 한 사람이 된 사도 바울이다(행 9장; 13:9). 그는 우리에게 바울(Paul)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의 유대명은 사울(Saul)이다. 바울은 사울이라는 유대명의 로마식 이름이다(행 13:9). 그는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으로 당시에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행 22:3). 그러한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주님께 부름 받아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다(행 9:1-9). 아마도 사울은 스데반이 죽을 당시 청년의 나이로 그 재능을 인정받아 산헤드린 공회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해서는 롬 1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7:59 돌로 스데반을 치니. - 당시 유대인들의 공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요 18:31). 인명(人命)에 대한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은 로마에게 있었던 것이다. 행 4:5 주석 참조.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당시의 법을 어기고 스데반을 돌로 쳤다. 그럼에도 로마의 권력은 이러한 불법을 묵인했던 것 같다. 혹자는 이 사건이 유대 총독 빌라도의 퇴임(A.D. 36년) 후 그 후임자 마르셀루스(Marcellus)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처 로마의 공권력이 개입하지 못한 것으로도 추정하는데 분명치 않다(Bruce, Hervey).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다만 성자는 성부께 영혼을 의뢰하였고 스데반은 성자이신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맡겼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7:60 무릎을 꿇고. - 돌에 맞은 스데반은 설 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데반이 무릎을 꿇은 것은 꼭 돌에 맞아 기력이 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간곡히 간구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돌에 맞아 기력이 없었다면 그냥 쓰러져야 마땅 할텐데 그는 혼신을 다해 쓰러지지 않고 무릎을 끓는 자세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도할 때에 예수께서도 무릎을 꿇었고(눅 22:41), 초대 교회 성도들도 무릎을 꿇은 사실에 의해 잘 뒷받침된다(행 9:40; 20:36; 21:5).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59절의 기도에 이어 다시 한번 십자가상에서 하신 주님의 기도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눅 23:34).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 대해서도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 스데반의 자세야 말로 이미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른'(엡 4:13) 자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주께서 말씀하셨고 당신 스스로 실천하셨거니와(눅 23:34). 주님의 제자된 스데반도 그 말씀을 따라 실천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 '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코이메데'로 평화로운 죽음의 상태를 나타낼 때 종종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잔다'고 표현했으며(막 5:39),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잔다'고 표현하셨다(요 11:11). 죽은 자를 이렇게 성경이 잔다고 표현하는 것은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이다(고전 15:20). 아무튼 스데반은 이렇게 순교하였는데, 이 순교는 초대 교회의 첫 순교였고 이를 기점으로 기독교 박해는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본장 자료노트, '순교' 참조. 그러나 이 박해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각지로 흩어져 오히려 이곳저곳에 전파되었다(행 8:1,4). 곧 스데반의 흘린 피로 말미암아 복음은 세계 각지로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그 신앙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연구자료
스데반-초대교회 최초의 집사이며 순교자
1, 인적 사항
① 스데반은 '면류관'이라는 뜻.
② 이방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
③ 예루살렘 초대 교회 최초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행 6:5).
④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행 7:59,60).
2. 시대적 배경
A.D. 30년경에 주로 활동함. 이 시기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하심이 수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때로서 오순절 사건과 함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전파됨에 따라 온 예루살렘이 떠들석하게 된 때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고 전파하는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 때문에 구약의 일부를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왜곡한 자신들의 교회에 대한 심각한 위협과 도전을 느끼게 되었다. 행 서론 특별자료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 참조. 이 때문에 자신들이 유대 사회 속에서 가진 정치적 기득권을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을 가했는데, 스데반은 그 첫 번째 희생물이 되었다.
3. 주요 생애
1) 집사 피택 이전
(1) 이방에서 출생 - -
(2) 예루살렘에서 도주 - -
(3)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신자가 됨 AD. 30년 행 6:5
(4) 집사로 피택됨 AD. 30년 행 6:5
2) 집사 피택 이후
(1) 기사와 표적 행함 AD. 30년 행 6:8
(2) 각지에서 온 유대인과 변론 AD. 30년 행 6:9
(3) 공회원들에게 붙잡힘 AD. 30년 행 6:12
(4) 공회에서 변증 AD. 30년 행 7:1-53
(5) 천상의 예수님을 봄 AD. 30년 행 7:55,56
(6) 돌에 맞아 순교함 AD. 30년 행 7:57-60
4. 성품
① 구제 사업을 관리할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로 뽑힐 만큼 성도들로부터 신망을 얻은 신의있고 믿음직한 자(행 6:5,6).
② 기사와 이적을 행하기도 하고 설교를 통해 전도한 것으로 보아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자(행 6:8).
③ 아시아와 근동 각지에서 온 유대인들의 갖은 변론을 감당해 낸 것으로 보아 지혜가 뛰어난 자(행 6:9).
④ 공회에서 변론할 때에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조리있고 일목 요연하게 설명할 만큼 말씀에 대한 열심과 해박한 지식을 소유한 자(행 7:1-53).
⑤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 앞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용기있고 담대한 자(행 7:54-58).
⑥ 죽음의 순간에도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을 소유한 자(행 7:60).
5. 구속사적 지위
①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행 7:59,60).
② 은혜와 권능과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던 자(행 6:5,8,10).
③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자(행 7: 55,56).
6. 평가 및 교훈
① 스데반은 평신도의 자리에서 사도 못지 않은 하나님의 복음의 사자로까지 부상(浮上)한 자였다. 곧 그는 그리많은 신앙의 연륜이 없었음에도 참된 믿음 생활과 성실과 열심으로 인해 교회 내에 중요한 지도자로 떠올랐고, 설교자의 임무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성숙은 예수를 믿은 시간적 연륜이 아닌, 얼마나 자신의 삶을 믿음 생활과 성령의 인도하에 내어 놓느냐에 좌우됨을 보게 된다(막 10:31; 벧후 3:18).
② 스데반의 삶은 '은혜'와 '지혜'와 '권능'이 넘치는 그야말로 성령 충만한 삶이었다(행 6:3,5,8, 0; 7:55). 실로 이같은 성령 충만한 삶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스데반과 같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항상 성령의 충만을 힘입고,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주의 은혜와 권능을 힘입는 풍성한 삶을 살도록 하자.
③ 주의 말씀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던 스데반은 모함을 받아 재판석에 선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거할 수 있었다(행 7:1-53). 이같이 하나님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은 성도만이 언제 어디에서나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엡 6:14-17).
④ 스데반이 자신의 맡은 바 책임인 구제 사업뿐 아니라 선교와 이적을 통해 복음 전파에도 충실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최초의 순교자라는 명애를 안겨 주셨다(행 7:54-60). 아울러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초대 교회의 질적, 양적 성장을 이루도록 하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내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마 25:21).
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도리어 자신을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의 사유(赦宥)를 빌었던 스데반의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행 7:60). 우리 역시 어떤 무리들에게 애매히 고통 당하게 될 때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어야 하겠다.
7. 핵심 성구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행 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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