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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묵시의 기록을 시작하는 삼중 서론
구속사적 개관
계시록이란 본래 태초의 천지 창조의 완성 일자와 관련되어 완성, 선체, 안식 등을 상징하는 거룩한 숫자로서 본서의 묵시 기록을 위한 기본 숫자인 '7'에 해당하는 일곱 교회, 곧 당시의 소아시아 전역 및 로마 제국 전역의 초대교회는 물론 오고 올 세대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A.D. 1세기말의 초대교회 시대 당시 소아시아의 7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의 형식으로 기록된 책이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끊임없이 사탄과 세상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고 또 직면해야 할 교회가 이 땅에서 가져야 할 바른 자세에 대한 교훈을 제시함과 아울러 현 우주와 역사의 대 종말(大終末)에 대한 묵시(黙示)를 기록함으로써 교회가 세상의 멸망과 신천신지의 도래를 확신하고 예비하는 구속사적 비전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역동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힘과 소망을 전해주는 책이다.
이처럼 현 우주와 역사의 종말의 도래 과정이라는 대 주제를 그것도 묵시 문학이라는 신비하고도 심오한 양식으로 기록한 말씀을 주 내용으로 하는 계시록의 첫 장인 본장은 그러한 묵시의 기록을 시작하는 삼중의 서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 1-3절은 묵시의 주체 또는 기원이 그리스도 예수요 저자인 요한 자신은 이를 충실히 기록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아가 이 묵시를 읽고 듣고 지키는 자 모두에게 복이 있다는 사실 등 묵시의 신적 권위와 그 가치를 먼저 개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음 중반부 4-8절은 앞서 밝힌 대로 본 요한계시록이 그 형식에 있어서는 당시 소아시아의 7교회를 대표로 하여 그들에게 보내는 서신의 형식으로 세상 종말의 묵시를 기록한 사실을 반영하여 7교회를 향한 서신서 형식의 문안 인사말 및 시작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때에도 일반 서신의 인사말과 달리 향후 기록될 내용이 요한 자신의 교훈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직접 주신 종말에 대한 묵시를 기록한 것이라는 사실이 거듭 암시되고 있다.
끝으로 후반부 9-20절은 본서에 기록된 묵시의 말씀의 내용을 직접 주시며 또 그 기록을 직접 명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묵시적 현현(顯現)을 기록함으로써 결국 본서에 기록된 묵시의 신적 기원과 권위를 최종적으로 확정해 주고 있다.
이처럼 이제 세상 종말에 대한 중대하고도 심오한 묵시의 말씀을 기록하기에 앞서 삼중으로 본서에 기록된 묵시의 신적 기원과 권위 그리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는 본장 말씀의 구속사적 의의는 실로 중대하다.
첫째, 본장의 기사는 전체적으로 본서의 묵시는 십자가 구속 수난을 성취하시고 지금은 하늘에 계시지만 세상 끝 날에 재림하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가 직접 주셨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는 이런 본 계시록의 말씀만이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 주는데 그치지 않고 전성경이 궁극적으로는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가졌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이다. 이는 결국 우리 모든 인생이 유한한 인간의 눈으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땅에 사는 동안 그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 있는 절대적인 삶의 기준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각성시켜 준다. 실로 성경이 그리고 성경만이 세상 끝날까지 이 땅에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일한 진리와 삶의 기준이 된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만약 성경이 없다고 하면 그 얼마나 혼란스러운 결과가 야기될 것인가를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둘째, 본장의 말씀은 직․간접으로 구속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셔서 현재 하늘에 계신 주님은 장차 재림하실 것이고 그 때가 곧 세상 역사의 심판과 종말의 날인 동시에 새 세상의 시작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Eschatological vision)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우리 모든 교우에게 이 땅과 이 역사가 아니라 새 하늘과 역사를 희구하는 구속사적 역사관과 인생관을 가져야 할 필연성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나아가 이는 우리 성도가 그 어떤 삶의 상황에 처해서도 역동적 소망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놀랍고도 비밀스러운 힘의 근본이기도 하다(사40:31:고후 4:16).
외울 말씀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머리말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일곱 교회를 향한 인사와 찬양
4 ○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8 ○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시를 주시는 그리스도의 모습
9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그리스도의 계시 기록 명령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본문 & 자료노트
신학용어:1:1 예지
창 49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1:3 계시록에 나타난 '복있는 자'들
1.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1;3)
2. 주 안에서 죽은 자(14:13)
3. 깨어 의의 옷을 입고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16:15)
4.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된 자(19:9)
5.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20:6)
6. 예언의 말씀을 가감이 없는 자(22:7,18,19)
7.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22:14)
주요주제-1:4:11 계시록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계 2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1:7 그리스도의 재림 양상에 대한 묘사
마 26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1:8 알파와 오메가
이는 헬라어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파'(Α)와 마지막 글자인 '오메가'(Ω)를 병렬시켜 놓은 것으로 원문에는 '토 알파 카이 토 오메가'( )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알파'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최초', '최상'이라는 뜻으로서 '완전'을 상징한다. 그리고 '오메가'는 '끝''마지막'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두 글자가 나란히 병렬로 쓰일 때는 관용적으로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 또는 '전체와 완전함'이란 뜻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관용구의 성경적 용례를 볼 때 이는 대부분 성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었다(계 1:8; 22:13). 물론 하나님께 대한 이같은 관용적 표현은 헬라인의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구약적인 배경에서 나은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표현했다(사설 6:4; 8:12). 이는 하나님이 창조자와 구원자로 모든 만물의 존재의 원천이요 근거가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계시록이 아닌 신약의 다른 책에서도 비록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시며 만물의 존재의 목적이 되시며 최후로 만물에 대해 심판할 자이심을 나타내는 표현들은 얼마든지 있다(골 11:8; 히 1:1-3; 요일 1:1). 따라서 하나님을 '알파와 오메가'로 고백하는 것은 곧 창조자요 구원자이신 그분의 절대 주권을 철저히 인정하는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감-1:13-16 천상(天上)의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죄인의 구속주(救贖主)로 오셨을 때에는 죄인된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겸손히 비천하게 오시었다(빌 2:6-11). 그러나 당신의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천상의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광과 존귀가운데 거하고 계신다(히 2:9). 그리고 현재 주님은 만장의 왕, 만유의 주로서 모든 만물과 이름 위에 역사하시며 군림하시고 계신다. 다음에 이런 천상의 영광스러우신 주님의 모습을 본문의 묘사에 따라 살펴보자.
1. 전체 모습-인자 같은 분: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의 모습
2. 몸-발에 끌리는 옷: 대제사장으로서의 존귀함
3. 가슴-금띠: 왕으로서의 위엄
4. 머리와 털- 흰 양털과 눈 같음: 지혜와 성결
5. 눈–불꽃 같음: 하나님의 통찰력과 공의
6. 발- 풀무에 단련된 빛난 주석 같음: 심판주로서의 영광과 심판의 필연성
7. 음성- 많은 물소리 같음: 심판주로서의 권능과 위엄
8. 오늘손- 일곱: 교회를 권능으로 지키심
9. 입- 좌우에 날선 검: 한치의 오차도 없는 엄정한 심판
10. 얼굴- 해가 비추는 것 같음: 영광과 거룩
주요주제- 성경에 나타난 주요 숫자의 상징적 의미와 용례
계 14장 연구자료 참조
지도-1:9 밧모섬의 위치
1:1-3 머리말
본서는 극심하게 가해지는 로마의 박해로 말미암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는 반드시 자기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는 박해자들과 악인들을 심판하시사 궁극적으로 승리하시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미래의 될 일을 알림으로써 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기 위해 쓴 책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 교인들을 위로한다는 직접적인 목적 하에서 기록된 본 기록은 일차적으로는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는 보편적인 의미를 가진 책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본서는 초대 교회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기록된 책이지만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意味)와 목적(目的)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악의 세력과 투쟁하면서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 포괄적(全包括的)으로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계시이다. 1:4 주석 참조.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본서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1:1-20은 본서의 서론부에 해당하는 곳으로 묵시를 시작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에 이은 2:1-3:22은 본서의 본론 제 1부로서 아시아 주의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4:1-18:24은 본론 제 2부로서 최종적인 대종말 직전의 소위 말세에 있을 대환난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고, 19:1-22:5은 본론 제 3부로서 현세상의 종말과 신천신지의 도래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22:6-21은 본서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묵시를 끝맺는 말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위에서 살펴본 다섯 부분 가운데 서론부에 해당하는 '묵시를 시작하는 말'을 기록하고 있는 1:1-20은 다시 ① 머리말(1:1-3), ② 문안 인사와 송영(1:4-8), ③ 그리스도의 계시(1:9-20)라는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맥락하에 본 단락은 그 세 단락 중 맨 처음에 위치하고 있는 머리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본서가 다른 서신들과는 다른 묵시적(黙示的) 내용을 가진 예언서라는 것을 밝히고자 저자는 여타(餘池)의 서신들이 가지고 있는 서신서 도입 형태(4-8절) 앞에 본서의 본질적 성격을 규명해 주는 본문을 배치시켜 놓고 있다. 즉 본서는 형식상으로는 서신서이지만 실제로는 예언서이기 때문에 서신서의 형식을 부여해 주는 다음 단락 앞에 진정한 의미로서의 실제적인 서론인 머리말을 본서의 맨 앞에 이처럼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본서의 성격(性格)을 특징 지워주는 명칭과 목적, 그리고 본서의 내용이 원저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요한에게 전달된 경위(經緯)가 기록되어 있으며(1절). 그 다음에는 본서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밝히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2절), 마지막에는 축복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3절).
저자는 일반적인 서신들과는 달리 본서가 난해한 예언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형적(典型的)인 서신서 형태의 도입부 앞에 이처럼 본서의 신적 권위(神的權戚)를 선언하는 머리 글을 기록해 놓음으로써 감히 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하는 예봉(銳錡)을 꺾고 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에게는 복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본서의 말씀을 믿고 그에 순종하도록 암시해 주고있다. 이러한 저자의 의도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므로 ① 본서가 전능하시고 미쁘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우리는 이 말씀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부터 이 말씀을 지켜야 하며. ② 믿고 지키는 것과 아울러 본서의 내용들을 읽고 들은 대로 실천하여 진실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복에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2:10: 4:4: 딤후 4:8; 약 1:12; 벧전 5:4).
1:1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 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에게 주신 것이요, 그의 천사를 그의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니라
주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 - '계시'(啓示)에 해당하는 헬라 원어는 '아포칼쉽시스'이다. 이 말은 '숨은 것이 드러나다', '감취었던 것이 나타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로서 각 명목에 따라 계시(Revelation)와 묵시(Apocalypse) 두 가지로 번역된다. 즉 '아포칼쉽시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 보이시는 행위와 그 내용 전반을 광범위하게 가리키는 조직 신학적 용어인 계시와, 하나님의 계시 중에서도 주로 종말에 대한 당신의 섭리를 그것도 소위 묵시 문학적 양식으로 드러내시는 행위 및 그 내용만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성서 신학적 용어인 묵시 두 가지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어서 각 문맥마다 정확히 번역하여야 한다. 그런데 본서는 후자의 의미에 가깝게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묵시 문학적 양식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계시라는 번역보다는 묵시로 번역해야 마땅하다. 한편 이 하나님의 묵시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표현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갈 3:17, 딤전 2:5; 히 9:15). 또한 하나님께서 이 중보자에게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으며(요 5:22,27),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을 끝 날까지 인도하실(마 28:20) 교회의 머리되시기 때문이다(엡 1:22; 4:15).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시지만 그것에 대한 성취는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기 때문에 세상 심판과 성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며 따라서 그것에 관한 계시도 결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도 불리는 것이다(요 3:34,35; 5:20-24: 7:16; 8:28; 12:49; 14:10,24; 16:15; 17:8).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Jesus)라는 고유 명사와 '그리스도'(Christ),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직무상의 칭호가 결합된 것인데 , '그리스도'(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야'(마쉬아흐)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가 바로 구약 성경이 예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대망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 주는 호칭임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호칭과 관련해서는 마 1:1 주석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보다 참조하라.
반드시 속히 될 일을. - 하나님은 미쁘시사(고전 1:9; 요일 1:9) 자기가 말씀하신 계시의 내용을 반드시 이루신다. 여기서 '반드시'(데이)란 절대적인 확실성을 뜻하는 말이다(Lohmeyer). 그러므로 본서의 내용들은 필히 이루어질 틀림없는 내용들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서에 주어진 묵시의 말씀들은 반드시 성취되는 동시에 또한 속히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안에서 본서에 계시된 내용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보증되기 때문이다(22:20; 벧후 3:8-13).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 '그 종들'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천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단 8:15,16; 9:2;슥 1:19; 눅 1:26-31)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 관사 '그'(the)가 붙은 것과 관련해서, 혹자는 이 천사를 사가랴와 마리아에게 각각 나타나 세례인 요한과 예수의 수태를 고지(告知)해 준 가브리엘(Gabriel, 눅 1:11-20,26-38)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Walvoord). 그러나 이 천사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단지 본절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이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계시의 전달 경로를 보여 준다 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요한(John)은 요한복음 및 요한일,이,삼서의 저작자이기도 한 사도 요한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가리켜 '종'(servant)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된 모든 성도는 이제 의의 종이며(롬 6:17.18)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할 자들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롬 1:1)이나 베드로(벧후 1:1) 등도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칭하였다(Walvoord).
지시하신 것이라. -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는 천사를 통해 요한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본서는 요한계시록, 또는 요한묵시록이라고 명명되고 있지만 사실상은 요한의 창작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며, 요한의 계시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록이다. 한편 '지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마이노'는 '상징으로 표시하다', '상징으로 알게 하다'는 말이다(Greijdanus, Walvoord). 그러므로 본절은 우리에게 계시록은 직접적이고 명확한 언어가 아닌 상징적인 언어들로 우리에게 주어진 묵시의 말씀이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거하였느니라.
요한은‥‥증거하였느니라. - 본절은 1절의 내용과 연관되어 있다. 요한이 증거한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요한에게 환상으로 증거하셨다(9-20절).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the testimony of Jesus Christ)를 보았고, 그 본 것을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은 내용상 같은 말이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거기에 기록된 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 때가 가까움이니라.
이 예언의 말씀. - 본서에 여러 차례 나타나는 표현이다(10:11; 19:10; 22:6,7,10, 18,19). 이 표현으로 보건대 본서의 저자는 본서를 하나의 예언서로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즉 본서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로 하여 이 세상에 일어날 소위 말세의 대환난 및 최종적인 일련의 대종말 사건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며, 따라서 반드시 성취될 말씀이라는 의미가 이 표현 속에는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본서가 하나님의 계시로서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묵시 문학(Apocalyptic Literature)과는 구별된다는 것과, 자신 또한 예언자적 위치에서 본서를 기록했다는 것을 본문의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읽는 자와 듣는 자들. - '읽는 자'(호 아나기노스콘)는 단수로, '듣는 자들'(호이 아쿠온테스)은 복수로 되어 있어, 본문은 한 사람이 큰 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회중(會衆)이 그 읽는 말씀을 듣는 유대인의 회당(Synagoue) 예배 형태를 반영하고 있다. 즉 초대교회의 성도들 역시 유대인의 회당 예배 형식과 유사한 형태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으며, 그것에 따라 저자도 그러한 개념을 그대로 본문을 기록하는데 사용한 것이다(Plummer). 한편 유대인의 회당 예배 형태에 관해서는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회당의 이해'를 참조하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은 그 자체로도 복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천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의 심령 가운데서 죽은 말씀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실행하여야 하며, 그리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것이다(22:7).
한편 본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자의 특징을 일곱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본문의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이제 그 나머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둘째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다(14:13). 셋째는 주의 재림 때에 깨어 있어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들이다(16:15). 넷째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다(19:9). 다섯째는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다(20:6). 여섯째는 본서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가감 없이 지키는 자들이다(22:7). 일곱째는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이다(22:14). 한편 이상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해당 주석을 참조하라.
때가 가까움이라. - 여기서 '때'(카이로스)는 '작정된 시간', 즉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예언을 이루시는 때를 가리킨다(Johnson, Robeson), 그런데 그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오늘날 말세(末世)에 살고 있는 자인 우리들에게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교훈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다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2-44)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1:4-8 문안과 찬양
본문은 본서가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어져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질 하나님의 묵시의 말씀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도입부인 1:1-20에서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서신적 형식을 띠고 있는 인사말 부분이다.
저자는 앞단락인 1-3절에서 본서의 성격과 원저자(原著者)를 규명하는 내용을 기술한 뒤에, 이제 일반적 서신서들이 취하고 있는 전형적(典型的)인 도입부의 형태, 곧 송신자, 수신자, 축도라는 인사말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가 이처럼 앞 단락에 이어 또 하나의 서론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본서가 실제로는 서신서가 아닌 묵시의 예언서이지만 형식상으로는 당시 아시아 주 안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서의 형태로 쓰여졌기 때문에. 1:1-3에는 본서의 진정한 서론이라 할 수 있는 머리 글을 기록해 놓고. 본문에는 서신서의 형식을 주기 위해 전형적인 서간문의 시작하는 말을 중복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 따르면 송신자는 요한이요(4절), 수신자는 당시 아시아 주라고 불리우던 지역에 있던 일곱 교회이다(4절). 그리고 수신자들에 대한 축도는 본서의 특성과 어울리게 영원한 통치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어지고 있다(4b,5a절). 한편 전형적인 인사말을 하고 난 저자는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을 가진 그답게 인사말 뒤에 본서의 주인공 되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송가(頌歌)를 기록하고(5b,6절). 마지막으로 다시 오시는 주님이 심판주로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오셔서 심판하실 것을 확신 있게 선언한다(7절). 그리고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 곧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시며 심판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처음과 끝을 주관하시는 영원한 전능자라고 선언한다(8절). 곧 그리스도는 세계를 시작케 하신 창조주요,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요, 세상의 악을 종결시킬 심판자로서 세계의 시작(창조)과 끝(종말)을 주관하시는 전능자라고 저자는 선언하고 있다.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아시아 주에는 많은 교회들이 있었는데 왜 그 많은 교회들 중 굳이 일곱 교회만이 본서의 수신자로 선정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칠일 동안 창조하셨다는 그 일곱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창 2:2,3). 그래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절대적 완성(完成)을 상징하는 완전수요, 전체(全體)를 상징하는 보편수(善遍數)를 의미했다. 저자는 바로 '7'이라는 숫자가 이처럼 절대적 완성과 보편을 의미하고 있다는 상징성에 기초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는 본 서신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한 모든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이며, 하나님의 교회는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보전되고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곱이라는 교회를 수신자로 선정한 것이다. 한편 '7'이라는 숫자는 본서의 기본수로서 본문 이외에도 본서에서는 무수히 등장하거나, 아니면 배경 개념으로 은유되어 있다. 따라서 본서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이 숫자에 대해 독자들은 명확히 이해해 둘 필요가 있다. 자세한 것은 주석에 언급되어 있으니 주석에 설명된 내용을 참조하라.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는다. 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창조주요(요 1:3), 심판주로서(요 5:22) 하나님과 동등한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시다(빌 2:6).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전능하시고 높으신 위엄 있는 하나님으로 섬겨야 하겠다. ② 주님은 재림하실 때에 공개적으로 오신다. 따라서 오늘날 스스로 재림주(再臨主)로 자처하며 여기저기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때에 우리는 그러한 자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오직 맡은 바 자기 삶에 충실하면서 만군의 주로 오시는 주님을 대망하도록 하자(마 24:5,23,24).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과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요한은. - 저자는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자신을 '요한'(John)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는 그만큼 본서의 저자가 초대 교회 교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친숙한 인물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이는 본서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었음을 증거한다(Plummer).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 본문에서 '일곱 교회'란 형식적인 수신자를 말한다. 여기서 '형식적'이라는 말은 '외형상'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본서의 실제 수신자는 본문이 직접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일곱 교회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당시 초대 교회의 모든 교회이며, 더 나아가서 이차적으로는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인데, 그러한 실제 수신자를 상징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외형상 전체를 지칭하는 완전 수 '일곱'에 맞추려고 당시 아시아 주 내에 있던 많은 교회들 중 의도적으로 '일곱 교회'만을 형식적 수신자로 선택했다는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Asia)는 로마 제국당시 로마의 행정 구역 중 하나로 소아시아 서편에 있던 주(州)이다(행 2:9; 고전 16: 19). 이곳에는 본서에 열거된 일곱 교회(11절) 외에 골로새, 막네시아, 드로아 등의 여러 교회가 있었는데 여기서 유독 일곱 교회만을 언급한 것은 그 7이라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가 '완전, 충만, 전체' 등이므로 결국 이를 통하여 교회의 완전성을 상징하고자 했기 때문이며(Augustine), 또한 모든 교회를 보편적으로 상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Kuyper). 또 무엇보다도 7은 숫자와 형상의 상징성을 극히 중요시하는 묵시 문학의 하나인 본서에서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는 기본 완전수이다(12,16,20절; 4:5; 5:1; 8:21; 10:3; 13:1). 즉 저자는 이러한 7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여 결국 그리스도께서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그 계시를 주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 관해서는 계 14장 연구자료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또 본서에 나타난 일곱 교회의 위치에 대해서는 계 2장 연구자료.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교회'를 참조하라.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 - 이 말은 헬라어로 '호 온 카이 호 엔 카이 호 에르코메노스'( )로서 본서에 몇 번 반복되어 나타나 친다(8절; 4:8; 11:17; 16:5). 이는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lamwho I am)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절대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다(말 3:6). 특히 '장차 오실 이'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그때 하나님께서 온 인류 가운데 심판주로 임재하실 것(20:11-15)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Ladd).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 스가랴는 하나님의 영을 여호와의 일곱 눈으로 비유하였는데(슥 4:10), 본서 저자도 하나님의 영을 일곱 영으로 표현하고 있다(5:6). 즉 본문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일곱 천사가 아니라 성령을 지칭한다. 여기서 '일곱'이란 수 역시 성령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또한 그분이 모든 교회와 관계하여 사역하심을 의미한다(Johnson. Ladd). 그런데 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은 삼위일체(三一-體)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성령의 영광과 권위를 나타내 줌은 물론 성령께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신분과 그 각자의 사역에 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 중 '삼위일체' 관련 부분을 참조하라.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충성된 증인. -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성부(聖父)께 복종한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었다(마 26:42; 빌 2:8).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으며(요 5:30),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하였다(요 7:16). 한편 본서에서 '증인'(마르튀스)이란 단어는 그 자체가 진리를 전파하고 수호한 자 및 이를 위해 순교한 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실로 그리스도는 어느 모로 보나 목숨을 바치기까지 세상에 하나님을 증거한 충성된 중인인 것이다(사 55:4).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충성된 증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사 부활하시어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었다(고전 15:20,23). 여기서 '먼저 나셨다'는 말은 바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이다(Walvoord). 즉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의 머리를 밟고 일어나심으로(창 3:15) 장차 사망의 권세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낼 선봉자가 되신 것이다(Ladd).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昇天)하사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셨다(빌2:5-11). 그리하여 본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는 자신이 창조한 우주 만물을 주관하며 지배하는 통치권을 다시 행사하시게 되셨으며, 또한 자기 백성들의 구주(救主)가 되심은 물론 세상의 심판주가 되신 것이다.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서는 당시 로마 제국을 통치하면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황제들조차 그 권세 아래 있었음은 새삼 말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은 당시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 당하던 기독교인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Plummer).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요한은 도입부에서 이렇듯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수신자들에게 축도를 주고 있다. 여기서 '은혜'는 헬라식 인사말이고 '평강'은 전통적 유대식 인사말이다. 이중 '은혜'(카리스)는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내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의미한다. 그리고 '평강'(에이레네)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 및 그로 인한 평안을 의미한다(롬 5:10,11). 이처럼 참된 은혜와 평강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니 요한은 그것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처럼 논리 정연하고 완벽한 인사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Lenski).
우리를 사랑하사‥‥피로‥‥죄에서‥‥해방하시고. - 인간을 사랑하신 주체는 하나님이시며(요 3:16; 롬 5:8)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율법의 정죄(定罪)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시키셨다(5:9; 14:3,4; 마 20:28; 요 8:34-36; 갈 3:13; 딤전 2:6; 히 9:12; 벧전 1:18). 한편 풀피리안 사본(P)에는 '해방하시고'(뤼산티)가 '씻기시고'(루산티)로 되어 있으나 의미상에는 큰 변화가 없으므로 중요시 할 문제가 아니라고 여겨진다(Johnson, Robertson). 즉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도말(塗妹)하신 것이나 그 결과 우리가 죄의 종 노릇하던 것에서 해방된 것이나 그 근본 의미는 동일하므로 두 표현의 차이에 관한 것은 중요치 않다. 한편 예수께서 자기의 피로 성도들을 구속하신 사실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이 롬 5:8,9; 6:22에서 상세히 언급하고 있으니 그곳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근본 목적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사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임은 물론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예수의 사역은 오로지 성부(聖父) 하나님을 위하는 일에만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에 관해서는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매우 잘 증거해 주고 있다(요 6:38-40; 8:42; 10:37,38; 17:4).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두 가지 결과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단순히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게 한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낱말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전제로 하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백성은 나라, 곧 왕국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며 성도는 그 나라의 백성들이다(Robertson).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은 아담의 범죄 이래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창 3:22-24)를 회복시키시사 각 사람 이 각각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히 10:19).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마 27:51)은 이제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었다. 즉 그리스도는 흠이 없는 분으로서 단번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 동물 속죄 제사를 성취하셨으며 이제 하나님과 함께 계시사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 하고 계시니 모든 성도는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히 8:26-28; 9:28). 우리는 이를 가리켜 신학적으로 '성도의 만인 제사장 직'이라고 일컫는다. 한편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 되도록 하신 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즉 모든 사건과 역사와 행위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귀결되며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어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겔 36:22).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 '영광'(독사)은 '명예'나 '명성'을 의미하는 말이나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그분의 신성(神性), 거룩하심, 존귀와 위엄, 권능 등을 뜻한다. 그리고 '능력'(크라토스)은 '세력'이란 뜻으로 하나님의 권세, 즉 통치권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모두 사람이 취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하나님의 속성들을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통해 결국 요한은 그리스도를 분명 하나님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세세토록'(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톤 아이오논)은 직역하면 '세대들의 세대들에게로'(unto the ages of the ages)라는 말로서 '끝없이 계속되는 영원'을 의미한다. 이는 본서에 12회나 나타나는 용어이니 본서 전체를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1:18; 4:9,10; 5:13; 7:12; 10:6; 11:15; 15:7; 19:3; 20: 10; 22:5).
아멘. - '아멘'(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멘'을 그대로 음역한 것으로, '견고한', '확실히'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대개 문장의 끝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또는 '그대로 좋다'는 의미로 사용된다(시 106:48). 그러나 때로 문두(文頭)에서 확실한 강조를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요 1:51). '아멘'에 대해 보다 자세한 내용은 대상 16장 자료노트에 언급되어 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 이 사실은 예수께서도 친히 예고하신 내용으로(마 24:30; 26:64; 막 14:62), 다니엘이 본 환상과 관련해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 사항이다(단7:13), 성경에서 종종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견적(可見的)으로 나타내 주는 상징물로 언급되어 있다(출 13:21; 14:16,19).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계의 구름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어떤 상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Greijdanus). 그러나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자연계의 구름으로 보는 것 또한 틀린 이해는 아니다(Lange).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이나 재림의 형태에 관해 언급한 것을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근거 없이 상징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님이 승천하실 때에도 승천하시는 주님을 구름이 가리웠으며(행 1:9) 천사는 그 모습 그대로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증거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근거 없이 상징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는 결코 옳지 못하다(행 1:11). 적 그리스도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 본절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켜 왔고 또한 미혹시키고 있음을 볼 때 오히려 이것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더 건전하고 바람직한 이해 자세라고 여겨진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 주님의 재림의 공개성(公開性)을 분명히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예수께서는 초림시(初臨時)에는 비록 몇몇 사람만이 아는 가운데 비공개적으로 임재 하셨지만 장차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이 땅에 재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6)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여 자칭 예수라 하거나 재림주로 자처하는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 이 말은 슥 12:10의 내용과 같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한 로마 병정이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다(요 19: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그를 찌른 자들'이 복수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그 병정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찌르게 한 배후 세력인 로마 관원들과 유대 관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나아가 주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자들 역시 주를 찌르는 자와 같다는 점에서(마 25:45; 요 15:18, Ladd, Plummer) 복수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님께서 모든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사 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로마 병정에게 찔림을 받았다면 주님의 찔림은 결국 우리 모두의 죄악을 인한 것이므로 광범위하게는 우리 자신들도 그 가운데 포함된다고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은 예수 재림의 날, 즉 하나님의 최후 심판의 날까지 살아있을 모든 인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이 애곡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던 동안 자신들이 예수 믿지 않은 것에 대하여 안타까워해서가 아니다(Lenski). 불신자들의 심령은 강퍅하여 끝까지 예수 믿기를 거부한다. 오직 그들이 애통해 하는 이유는 그들이 받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Ladd).
그러하리라 아멘. - 이 말에 해당하는 원어 '나이 아멘'은 실상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어의 '나이'는 히브리어의 '아멘'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즉 본문은 동일한 의미의 단어를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음역으로 중복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아멘 아멘'과 같은 뜻으로,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말을 최상급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편 '아멘'이라는 용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6절 주석을 참조하라.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와 오메가. - 이는 '처음과 끝' 또는 '시작과 나중', '전체와 완전함'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으로서 본문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분이요 또한 우주 만물을 시작케 하신 창조자이시자 이를 심판하시는 최후 심판자이시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장 자료노트의 원어연구를 참조하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오실 분. -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항상 존재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주 만물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분으로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라 칭(稱)하신 것이다. 한편 본절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4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전능한 자. - 헬라어로 '호판토크라토르'인 이 단어는 영어로는 '옴니포텐스'(omnipotence)로 번역되는데 인간의 유한한 능력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무한하고 완전한 능력'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사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섭리하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 '신론' 중 '하나님의 주권적 속성'을 참조하라.
1:9-20 그리스도의 계시
본서의 머리말인 1:1-3에서 본서의 성격(性格)과 원저자(原著者)를 밝히고, 앞 단락인 1:4-8에서는 전형적(典型的)인 서신적 문안과 그리스도에 대한 송가(頌洙)를 기록한 저자는 이제 본 단락에서는 자신이 본서의 계시(啓示)를 받은 장소는 어디이며, 본서의 원저자이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고, 원저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어떠한 경위(經練)를 통해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는가를 보다 상세하게 언급하고있다. 즉 본 단락은 간략하게 언급된 1:1-3의 머리 글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 부연 설명을 해주고 있는, 삼중 서론으로 되어 있는 본장의 세 번째 서론 부분이다.
본문의 내용에 의하면 저자가 밝히는 계시의 수신지(受信地)는 밧모섬이며(9절), 계시를 주신 원저자는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영광되시고 거룩하신 자로서 우주적 교회 공동체률 주관하시며(12-16절), 사망을 이기시사 구주되시고 심판주되신 그리스도이시다(18걸). 한편 저자는 바로 이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의 감동을 받아(10잘) 환상 중에 본 모든 것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도록 명령을 받고(11:17,19,20절) 본서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우리의 구주가 아니라 우주적 교회 공동체의 머리로서 무한한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만유(萬有)를 다스리시며, 종국에는 자기 백성의 집합체인 교회 공동체가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는 전능자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의 일원(一員)인 우리들은 비록 삭막한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고 있지만 결코 낙심하지 말고, 우리보다 더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신앙인이 행해야 할 바를 버리지 아니하고 승리한 초대 교회의 신앙의 선배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승리를 온전하게 보증하시는 전승자이시며, 구주되시고 심판주되시는 그리스도를 의뢰하는 가운데 우리도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정진하자.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동참하는 자라. -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는 물론 로마 황제와 정부로부터 조직적이고 공개적으로 핍박을 당하는 처지에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고난을 참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그러한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그 왕국에 대한 기대와 고난에 참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원문에서 '형제'와 '동참하는 자'가 하나의 관사로 묶여 있는 것이 그 연관성을 더욱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한편 저자가 독자들에게 이처럼 동질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동질성을 통해 본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열게 하는 동시에, 독자들도 자신과 같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도록 용기를 주기 위함이다.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 - '예수의'라는 말은 '엔 이에수'로 '예수 안에서'라는 의미이며, '환난'(들립시스)은 '압박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는 '바실레이아'로 '하나님의 왕국'을 지칭하며, '참음'(휘포모네)은 '아래서 머문다'는 뜻으로 '압박을 견딘다'는 뜻으로 의역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예수 안에서 나 요한은 성도된 너희들과 함께 그의 왕국을 기다리며 세상의 압박을 견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Moffatt).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 2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전치사 '디아'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본절 전체의 의미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 전치사 '인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로 볼 수도 있고(Clarke, Spitta),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하여'로 이해할 수도 있으며(Weiss, Lüke, Bleek),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Barklay, slummer, Vincent). 그러나 요한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절해 고도(絶海孤島)인 밧모섬에 노구(老軀)를 이끌고 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리고 요한이 계시를 받기 위하여 밧모섬에 갔다는 것 역시 너무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견해가 가능성이 있다. 즉 앞부분에서 저자는 성도들과 고난에 동참했다고 하였으며, 밧모라는 섬이 유명한 귀양지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증거하다가 박해로 인해 밧모로 유배되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사실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유대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81-96)의 기독교 박해 때 체포되어 밧모섬으로 유배당하였다고 하며, 그후 도미티아누스가 죽고 네르바(Nerva, A.D. 96-98)가 등극하자 석방되어 에베소로 귀환하였다고 한다(Eusebius, Clement of Alexandria, Iranaeus).
밧모. - 에베소에서 남쪽으로 약 90km, 사모스에서 남서쪽으로 46km지점에 있는 에게해(Aegeansea)의 스포라데스 군도(Sporades Group) 중의 한 섬으로 오늘날에는 '팔모사'(Palmosa)로 불리운다(Robertson). 길이 17km, 너비 10km의 작은 섬으로 탄광이 있었고, 당시 이곳에는 많은 범죄자들이 유배되어 왔으며 그 탄광에서 노역을 했다고 한다(Victorious). 현재 그 섬 남쪽에 요한이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지는 '계시의 굴'이 있고, 1088년 그 인근에 사도 요한의 수도원이 세워졌다. 밧모섬의 위치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의 지도를 보다 참조하라.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 - 본문의 '주의 날'(테 퀴리아케 헤메라)은 '재림의 날'을 지칭하는 '주의 날'인 '헤 헤메라 투 퀴리우'(살후 2:2), '헤메라 퀴리우'(벧후 3:10)와는 달리 오늘날의 '주일'을 지칭한다(마 28:1; 막 16:2; 눅 23:56; 요 20:19). 초대교회 교인들은 점차 유대인의 안식일 대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지켰는데(행 20:7; 고전 16:2) 요한도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도중에 성령에 감동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주일(主日)에 대하여서는 고전 16장 자료노트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참조하라.
성령에 감동하여. - 이 말을 직역하면 '내가 성령 안에 있게 되었다'는 뜻으로, 성령으로 인하여 황홀경에 빠졌음을 의미한다(행 10:10; 22:17; 고후 12:1-4). 그러나 이 상태는 비몽사몽의 상태가 아닌 자의식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Greiidanus). 저자는 이처럼 성령의 감동으로 이상 중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이성(理性)을 분명히 가진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절)를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를 요한이 정확하게 기록한 글이라는 것이 내증(內證)되고 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 - '크다'는 것은 전능자의 위엄(8절)을 나타내는 말로 여기서 '큰 음성'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가리킨다(Plummer). 그리고 그 큰 음성이 나팔 소리와 같다는 것은 저자 요한을 큰소리로 일깨워 부르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백성을 불러모으거나(민 16:2) 파수꾼이 경고할 때(겔 33:6), 전쟁 때(겔 7:14), 절기 때(레 23:4) 등에 분 것에서 나타나듯이 주로 백성들의 주의를 촉구하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주의를 환기시키는 큰 음성으로 요한의 주의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시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보내라. - 이 말은 이미 1절에서 밝힌 바 있듯이 본서의 기록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된 것임을 다시금 분명히 밝히는 구절이다.
일곱 교회. - 본절에 열거된 일곱 교회에 대해서는 계 2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이들 일곱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것임은 이미 4절 주석에서 살펴본 사항이다.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일곱 금촛대. - 20절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되어 있다. 즉 촛대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일곱 촛대는 앞 절의 일곱 교회를 지칭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교회를 다 지칭한다. 4절 주석 참조. 한편 촛대가 금촛대인 것은 금이 귀하고 아름답고 불변하는 속성을 가진 것 처럼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아름다우며 하나님의 보호 하에서 불변하는 것임을 나타내 준다(Lenski, Vincent).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분. - 본절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 '인자'(人子)는 단 7:13에 배경을 둔 용어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예수께서도 스스로를 인자라고 칭하셨는데(마 8:20; 9:6; 26:2; 막 14:41; 눅 6:22; 17:22,24,26,30; 요 1:51; 12:23,34; 13:31) 이는 자신이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시면 서도 성육신(成肉身)하신 것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눅 12장 자료노트, '인자(人子)의 이해' 참조. 한편 본문이 이 예수를 촛대 사이에 계시는 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치 구약 시대 당시에 대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촛대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듯이 언제나 교회 가운데 계셔서 자기 백성의 대제사장으로서(히 9:26)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리시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출 28:4,8; 레 16:4에 의하면 이러한 차림은 대제사장의 옷차림이다. 또한 이는 왕의 차림과도 유사하다(사 6:1). 즉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대제사장과 왕으로서 존귀와 위엄을 지니고 계신 분임을 묘사한 것이다(단 10:5,6). 요한은 환상 중에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대제사장이시요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횐 양털 같고 눈 같으며. - 단 7:9과 같은 표현으로 양털 같고 눈과 같은 '흰 머리털'은 영생, 지혜, 성결을 상징한다(시 51:8; 사 1:18), 왜냐하면 '흰 머리'는 노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노인은 그 지내온 인생의 긴 연륜 만큼이나 지혜와 경험을 축적하고 있으며, '희다'는 것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성결하시다는 것을 나타낸다(Moffatt, Walvoord).
눈은 불꽃 같고. - 단 10:6에 언급된 메시야에 대한 묘사 '그 눈은 횃불 같고'라는 말을 반영한 것으로. 여기서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과 냉엄한 공의를 나타내 준다(렘 17:10). 사실 모든 인간은 불꽃 같이 밝은 그리스도의 눈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으며 (마 10:26)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지 않아 죄악의 더러움으로 얼룩진 자들은 모두 소멸될 수 밖에 없다(신 4:24).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 본문도 단 10:6에 의거한 표현이다. 발은 몸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견고하여 장차 그 원수를 짓밟을 때에(마 22:44) 영광된 승리를 성취할 것임을 시사해 주는 표현이다. 이전에 십자가를 메고 가실 때의 주님의 발은 상처 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발에 못이 박혀 피를 흘렸으나 장차 심판의 주로 오실 때의 주님의 발은 그와 정반대로 세상을 딛고 원수를 심판하실 영광과 권능의 발인 것이다(19:15, Johnson).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 겔 43:2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을 하나님의 음성을 묘사할 때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진 분임을 시사한다. 한편 '많은 물'은 거대한 홍수가 엄습할 때 나는 소리로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권능과 위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다는 본문의 표현은 주님의 권능과 위엄이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실로 지금도 주님은 전능의 주재자이시거니와 이 세상 마지막 날에 발하실 주님의 음성은 모든 인간에게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거대한 음성이 될 것이니 그 소리를 듣는 모든 불신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놀라며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6:15,16; 9:6).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 성경에서 '오른손'은 대개 능력과 힘을 상징한다(출15:6; 시 45:4; 겔 21:22). 그러므로 '주님의 오른손'은 주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의미한다(시 20:6; 44:3). 다음으로 '일곱 별'은 '교회의 사자들'(20절), 곧 '우주적 교회(catholic church)를 지키는 하늘의 천사들'을 지칭한다. 즉 주님은 천사들을 세워 자신의 교회를 지키고 계시며, 그 천사들은 주님의 권능의 오른손 안에 온전히 사로잡혀 그 오른손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 이러한 비유는 신약과 구약에서 자주 나타나는 비유이다(사 11:4; 49:2; 시 45:3; 57:7; 64:3; 149:6; 잠 12:18; 눅 2:35; 엡 6:17; 살후 2:8; 히 4:12). 이 비유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살아 운동력이 있는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성과 뭇 사람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예리함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다(히 4:12). 또한 이는 각 사람의 정사(正邪)를 정확하게 말씀의 잣대로 재어 심판하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의 칼날을 의미하기도 한다(Walvoord). 한편 혹자는 이 좌우의 검을 율법과 복음에 적용시키기도 한다(Tertullian, Richard).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요일 1:5에서 요한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하였다. 이 '빛'(포스)은 '태양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 지혜, 사랑, 진실, 성결 등과 같은 종합적인 하나님의 속성들을 의미한다(요일 1:5). 그런데 요한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함에 있어서도 이렇게 그의 영광되고 거룩하며 진실되고 사랑이 넘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은 변화산에서도 드러났는데(마 17:2; 막 9:3), 장차 만물이 새롭게 회복되는 그날에(롬 8:18-25)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도 빛나게 될 것이다(마 13:43).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녀들도 훗날 썩어질 것을 피하여 썩지 않을 몸을 입고 또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벧후 1:4).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선 자면 누구나 겪게 되는 상태이다(단 8:17,27; 10:9; 마 17:6; 눅 5:8; 행 26:14). 사실 죄인된 인간(롬 3:23)은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모두가 거꾸러지며 죽을 수 밖에 없다(출 33:20). 따라서 비록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는 성도란 할지라도 아직 죄의 성향을 지닌 육신이 완전히 성화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할 경우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처럼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죽은 자 같이 된 것이다.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 '오른손'은 능력의 상징으로(16절 주석 참조), 그 손을 얹은 것은 담대함을 부여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죽은 것 같이 된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힘을 주시며 격려하시는 주님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 준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 8절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의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8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곧 산 자라. - 여기서 '산 자'(호 존)라는 낱말은 '지금 살아 있는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전에도 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자, 곧 영원히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4,8절). 즉 본문은 전 절(17절)의 '처음이요 나중이인 자'를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산 자'는 '영원한 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 '전에 죽었다'는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사실(마 27:50)을 지칭한다. 그러나 온 인류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어(마 28:6; 벧전 1:3) 영원하신 자신의 본래 속성을 회복하셨다. 즉 그리스도는 다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지위를 회복하신 것이다(마 16:19). 그러므로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를 죽었다가 영생하신 분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 여기서 '음부'(陰府)란 헬라어로 '하데스'이며, 히브리어로는 '쉐올'에 해당한다. 이 용어가 구약에서는 단순히 무덤을 의미하거나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의 구별 없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가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왕상 2:2,9; 욥 3:13; 30:23; 시 89:48; 사14:9; 겔 32:28). 욥 14장 연구자료, '히브리인의 음부 개념' 참조. 그러나 이러한 구약의 음부 개념은 점차 발전하여 신약에 이르러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 중 불신자의 영이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중간기 처소로 이해되었다. 이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낙원'이 있는데 이는 죽은 성도의 영이 가서 일시적으로 거하게 되는 사후의 중간기 처소로 이해된다(눅 23:43). 눅 23장 자료노트 참조. '음부'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종말론' 중 '중간기 처소로서의 낙원과 음부' 부분을 참조하라. 다음으로 본문이 말하는 '사망'이란 육체적 죽음을 당하여 음부에서 있던 자가 최후의 심판을 통해 영원히 죽게 되는 둘째 사망을 의미한다(20:14). 한편 성경에서 '열쇠'란 대개 절대적 '권세'를 상징한다(마 16:19). 그러므로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심판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이다(요 5:22,24).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부활하시사 사망을 이기셨고 그 이기심으로 자기 십자가로 구속하신 자들을 사망에서 해방시키셨기 때문에(롬 8:1,2),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무서운 권세를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생명과 천국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의 권세로 말미암아 영생과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
1:19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 여기서 '본 것'은 본서를 쓰고 있을 당시 저자가 본 환상을 말하며(10-18,20절), '이제 있는 일'은 당시 일곱 교회가 처한 정황을 지칭한다(2,3장). 그리고 '장차 있을 일'은 종말에 대한 예언적 사실을 뜻한다(4-22장). 요한은 주님이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하라고 명하셨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본서의 본격적인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해 쓰여졌음을 다시 한 번 언급함으로써 본서의 계시가 확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절)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비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스테리온'은 사도 바울이 즐겨 쓰던 용어이기도 한데 본서에 4회 사용되고 있다(10:7; 17:5,17). 이 말은 본래 동방의 신비 종교에서 주로 사용한 용어이나 신약에서는 '신비'(마 13:11), '비밀'(살후 2:7),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롬 16:20; 고전 2:7; 엡 1:9), 또는 '그리스도의 내재'(골 1:27; 2:2) 등과 같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감추어진 것을 의미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다. '계시'(啓示)라는 말이 '감추인 것이 드러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1절 주석 참조) 계시서인 본서에서 '비밀'(秘密)이라는 낱말이 종종 사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써, 요한은 그리스도에 의해 종말에 행해질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을 보았고 본 비밀을 드러내도록 기록하라고 명령받은 것이다(19절).
사자. - '사자'(앙겔로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천사'를 의미하나 때로 인간을 의미할 때도 있다(눅 7:24; 9:52). 그래서 혹자는 본문의 사자가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본서를 전달하기 위해 보낸 사자(使者)이거나(Ladd) 아니면 당시 그곳 '교회의 감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Zahn. Hendriksen). 그러나 묵시 문학에서는 이것이 인간을 지칭하는 예가 없으며(Johnson). 본서에서도 67회 사용되고 있으나 모두 하늘의 사자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본문의 사자는 '교회를 시키는 하늘의 천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Robertson, Origen, Moffatt, Justin). 한편 일곱 별과 일곱 촛대에 관해서는 이미 12,16절에서 언급하였으니 그 부분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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