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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최초의 순교자
1-16절, 스데반의 설교--족장들
[1-3절]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스데반 집사는 구약성경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으나, 사도들의 지식에 비하면 그의 지식은 불완전해 보인다. 그는 당시 통용된 70인역 헬라어역 구약성경(LXX)과, 필로와 요세푸스에 의해 보존된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적 견해에 익숙해 있었다고 보인다.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즉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이 사실을 명확히 말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하란에 와 거하였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므로 그가 하나님의 명을 좇아 하란을 떠났다고만 기록되어 있다(창 11:31-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란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는 것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창세기 15:7,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느헤미야 9:7, “(레위인들의 기도)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우상숭배의 환경을 떠나 하나님 중심의 새 민족과 새 국가를 시작하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땅은 가나안 땅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실 천국을 예표하였다. 이 세상은 우상숭배로 인해 멸망할 장망성(將亡城)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 패역한 세상에서 구원받기를 원하셨다(행 2:40).
[4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메타 토 아포다네인)[죽은 후에](NASB, NIV)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었고,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났다고 기록한다(창 11:26, 32; 12:4). 아브람이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났다면 그는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는 말씀에 잘 맞지 않는다. 아브람이 세 아들들 중 막내라고 가정해도 큰 형과의 나이 차이가 60년이나 된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차라리 아브람은 데라가 70세에 낳은 아들이었고 그가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 데라는 아직 145세이었고 아브람이 그곳을 떠난 후에도 60년이나 더 하란에서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11장 끝에 “데라는 205세를 살았고 하란에서 죽었다”는 말은 그 사건이 12장의 사건보다 시간적으로 앞선 것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모세가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었다고 본다(창 25:17과 25:20; 35:28과 37:2 참조).
[5-7절]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셨으나 그곳을 차지할 때가 되지 않았고 단지 약속하셨을 뿐이었다. 아직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창세기 15:13-1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손들이 이방 땅에서 나그네가 될 것이고 400년 동안 고통과 학대를 당할 것이며 그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학대하였던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그곳에서 건져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오랜 세월 후의 일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 같은 신약 성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오랜 세월 후의 일들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8절]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로서 할례의 규례를 주셨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를 덮고 있는 표피 끝을 베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죄악성을 잘라내는 성결을 상징하며 그것은 중생(重生) 곧 거듭남을 의미하였다고 본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먼저 죄씻음을 받아야 한다. 죄가 사람의 죽음과 불행의 원인이므로 하나님의 진리의 요지는 사람이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죄성은 정결함을 얻어야 하고 거룩하고 정직한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다.
[9-10절]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는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었다. 시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한 무서운 죄악이었다(마 27: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하셨고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져내셨다. 물론 요셉은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나님께서는 성결한 삶을 기뻐하신다. 성결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복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려고 애쓴 요셉을 기이한 방법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
[11-14절] 그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요셉을 먼저 애굽에 보내셔서 총리가 되게 하신 것은 가족들을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뜻이 있었음과 같다.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든 큰 흉년에서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구원이었다. 요셉은 아버지와 형제들을 애굽으로 초청했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거주하게 된 까닭이었다. 이 점에서 구약성경 창세기는 출애굽기에 꼭 필요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
스데반은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을 청하였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많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헬라어 70인역 구약성경에 근거한 내용이라고 보인다. 헬라어 70인역 성경 창세기 46:20은 야곱의 자손으로 애굽에 내려간 자들의 수의 합계를 75명이라고 말하는데, 그 수에는 요셉의 손자 5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은 그들을 빼고 70명이라고 말하였다.
[15-16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스데반은 야곱과 그 자녀들이 다 세겜에 장사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략적 표현이었다. 야곱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산 마므레(헤브론, 창 23:19)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되었고(창 50:13) 요셉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서 산 땅에 매장되었다(수 24:32; 창 33:19). 그 외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들은 요셉처럼 세겜에 묻혔을 수도 있다. 스데반이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무덤을 샀다”고 한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 샀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데반이 증거한 구약 역사 속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게 불러내셨다. 그것은 불경건한 세상을 떠나 하나님 중심의 새 삶을 살라는 뜻이었다. 그는 우리도 이 패역한 세상에서 불러내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며 다 지나가는 허무한 것들이다(요일 2:15-17).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소망하고 그가 약속하신 주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요 죄씻음의 상징인 할례의 규례를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새 언약의 표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 이제 우리는 오직 한가지를 힘써야 하는데, 그것은 곧 죄 없는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한 삶이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 부모와 형제들을 구원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그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고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임 당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풍성케 하시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어떤 환난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순종해야 한다.
17-36절, 스데반의 설교--모세를 부르심
[17-19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모든 일은 때가 있다. 전도서 3:1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다. 그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왕위에 올랐고 그는 이스라엘의 번창을 막기 위해 그들을 학대했고 어린아이들을 나일강에 버려 죽게 했다. 요셉을 국무총리로 등용했던 애굽 왕은 애굽의 중왕국시대(주전 2000-1780년경)의 제12왕조 중 센우스레트 3세(대략 주전 1888-1852년경)이었을 것이며,12) 본절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신왕국시대(주전 1546-1085년경)의 제18왕조 때를 가리킬 것이다.13) 출애굽기 1장에 보면, 그 새 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자 아기가 출산하면 나일강에 던지도록 명령하였다(출 1:8-22).
[20-22절]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소피아)[지혜, 학문]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모세의 출생 시기는 이렇게 민족적으로 어려운 때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모세는 출생하자마자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그의 기쁘신 때에 그의 기쁘신 방법으로 이루신다.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 그가 부모의 집에서 단지 석 달을 길리우고 나일강에 버려졌지만, 강에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의 딸은 그를 발견하고 측은히 여겨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같이 길렀다. 또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유모로 소개되었고 그를 양육하게 되었다(출 2:1-10). 모세는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친 어머니의 품과 기도와 사랑과 경건한 교훈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고 보인다.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의 왕궁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가 양육되게 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40년간 애굽 사람의 지혜와 학문을 다 배웠다. 그는 당시 애굽의 가장 좋은 궁중 교육을 받았다. 그는 말과 행위에 힘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법을 배웠고 많은 신체적 훈련도 받았을 것이다. 그의 몸은 튼튼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23-25절]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사람이 자기의 삶의 목적을 깨닫고 사명을 느끼는 연령은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40세는 일반적으로 늦은 감이 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아직 부족하였다. 그는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그를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해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죽였다. 그는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었다. 그는 공부도 많이 했고 몸도 건강하고 싸움도 잘했다. 그에게는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의감까지 있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의 그의 여러 가지 준비는 필요했지만, 그런 것들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더욱이,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없었고 또 자기의 동족들은 그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다고 생각해주지도 않았다.
[26-29절]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사람들아,](NASB, NIV)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모세는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 간의 싸움을 말리며 화해시키려 했으나 그들은 그의 중심을 알아주지 않았고 도리어 그가 살인자라는 사실만 알려졌다. 모세는 두려워 도망쳐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젊은 시절의 꿈과 자존심은 여지없이 꺾이었다. 그는 그 이후 좌절과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하였다. 그는 도망자가 되었고 미디안 광야에서 오랫동안 양치는 목자로 살아야 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며 민족을 위해 고상한 꿈을 가졌던 그가 며칠 사이에 들판에서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고 날마다 양치는 일에 전념하여야 했던 것이다.
[30-35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카이 뉜 듀로 kai; nu'n deu'ro)[이제 오라]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것은 모세를,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낼 자로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특별 훈련의 기간이었다. 그 40년 동안 모세는 그에게 혹 남아있을 교만한 마음과 자존심을 비우는 철저한 겸손 훈련을 받았음에 틀림없고 또 많은 인내의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과 기도로 많이 교제하였을 것이다. 광야는 그에게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가장 적합한 장소이었다. 이처럼 미디안 광야 40년은 모세에게 겸손과 인내와 기도의 훈련기간이었다.
40년이 찬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모세는 그 광경을 기이히 여기며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렸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오라,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었다. 그것은 모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그의 기쁘신 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때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절했던 그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와 구원자로 부르셨던 것이다.
[36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였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한 자이었다.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사용하셨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다. 모든 일은 때가 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 3:1).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섭리하신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고 우리의 구원은 더욱 그러하다. 로마서 8:30,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처한 환경여건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다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를 이루시는 과정이다. 우리는 하나님 곧 세상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둘째로, 모세는 어려운 시대에 죽을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기이한 보호와 양육을 받았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갓 낳은 아기들을 죽이려 했던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 자라게 되었다. 그는 애굽의 학문과 지식을 배웠고 무술도 통달했을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만한 지식과 언변과 건강과 지도력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는 좌절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실패했다. 그를 부르시고 쓰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사람 편에서 준비는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많은 단련이 필요하다. 잠언 16:9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했다.
셋째로, 모세가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 생활을 통하여 철저히 자신을 꺾고 겸손 훈련, 인내 훈련, 기도 훈련을 잘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르셨고 그를 세워 사용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 야곱은 하란에서 20년간 훈련을 받았다. 요셉은 애굽에서 10여년간 종으로 훈련받았다.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 다니며 10여년간 훈련을 받았다. 모세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치루어야 할 여호수아는 모세 곁에서 40년간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소년 예레미야에게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라고 말씀하셨다(렘 1:18).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며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성도들과 교회 직분자들은 세상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겸손과 인내와 기도의 많은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이다.
37-50절, 스데반의 설교--우상숭배에 떨어짐
[37절]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주]14) 하나님[우리 하나님]15)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부르시고 보내셨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 자이었다(신 18:15). 모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은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주셨다. 사무엘을 비롯하여 여러 선지자들이 보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러나 모세가 말한 ‘나와 같은 선지자’는 사도행전 3:22-24의 사도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증거된 대로 특별한 선지자이신 메시아를 가리켰다고 보인다. 메시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시는 참 선지자이시다. 그는 모세보다 크신 참 선지자이시다.
[38절]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살아있는 말씀]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는 시내산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과 동일시되시는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다고 본다. 스데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교회라고 불렀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총회’ 혹은 ‘회중’이라는 말(민 16:3)은 신약성경에 ‘교회’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가진다. 교회는 건물이나 어떤 조직을 가리키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과 함께 있었고 살아있는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글자나 소리가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친 음성이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레미야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9-41절]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셨고 보내셨고 그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조상들은 모세를 거절했고 그에게 복종치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다. 애굽은 하나님 없는 세상이다. 애굽에서의 생활은 물질 중심, 쾌락 중심의 죄악된 생활이다. 거기에는 술취함과 방탕함이 있었고 경건함이나 거룩함이나 절제함이 없었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세상적인 삶을 좋아한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 시내산 위로 올라간 후, 이스라엘 백성은 40일을 참고 기다리지 못하여서 아론에게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청했다. 아론은 모세의 동역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행하였다. 그들은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한 일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사하며 기뻐하였다. 그들은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출 32:18-1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크게 노하셨다. 그는 그들을 완전히 멸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그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들을 용서하시기를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말을 들어 그들을 당장 다 멸하지는 않으셨으나, 그 날에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 레위 지파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3천명이나 죽임을 당하였다(출 32:28).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들의 모습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잘 나타낸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절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 대신 우상숭배에 떨어졌다.
[42-43절]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너희]16)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데서 돌이키셨고 그들을 우상숭배에 버려두셨다. 본문은 송아지 숭배가 하늘의 군대 곧 별 숭배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떠나 나온 후 광야에서 송아지를 숭배한 것은 열왕 시대의 바알과 아세라 숭배와 일월성신 숭배로 이어져 내려갔다.17) 스데반은 아모스 5:25-27의 글을 인용한다. 그가 인용한 성경구절은 히브리어 본문이 아니고 당시에 통용되었던 헬라어역 본문이라고 보인다. 단지 맨 끝에 ‘다메섹 밖에’라는 말이 ‘바벨론 밖에’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본문은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식굿은 헬라어 스케네[장막]로 번역되었고 ‘너희 왕’은 ‘몰록’으로 번역되었다. ‘몰록’ 혹은 ‘몰렉’은 바벨론 신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기윤은 헬라어 레판18)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로마의 농업 신인 토성(Saturn)을 가리킨다.19) 송아지는 농경 사회에서 풍년과 다산(多産)의 신으로 숭배되었고 별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송아지 숭배와 별 숭배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히 진노하셨고 그들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고 바벨론 밖으로 흩으셨다.
[44-47절]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 거처](전통본문)20)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증거의 성막을 주셨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시내산에서 본 모양대로 만든 것이었다. 그 성막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였을 때 가지고 들어갔고 다윗 때까지 보존되었다. 성막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가 있었고, 성막 제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를 섬길 수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 중심, 법궤와 성막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였다. 또 그는 성전을 건립하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고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성전 건축이 이루어지게 하셨다.
[48-50절]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사 66:1-2)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발받침]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며 땅은 그의 발받침이다.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 속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그러면 성막과 성전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구름으로 자신의 특별한 임재(臨在)의 표시를 나타내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제한되지 않으신다. 성막과 성전의 참된 의미는 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 구원의 길을 보이는 것,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를 증거하는 데 있었다. 또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의 긍휼로 받으심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에도,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도, 또 왕국의 역사 끝까지 항상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순종치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막 제도, 성전 제도를 통해 제사장 곧 중보자를 주시고 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를 섬기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새 삶을 모형적으로, 예표적으로 보이신 제도이었다. 성막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근거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말씀과 기도, 성령의 감동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고 감사하며 전적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상 사람들이 만든 집에 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영이시며 완전하신 영이며 또 초월하신 영이시다. 그는 결코 사람들이 만든 성전 안에 제한될 수 없는 분이시다. 단지, 그는 땅 위의 성전에 그의 임재의 영광을 보이시며 또 그 성전을 통해 죄인들이 자기에게 나아와 교제할 수 있게 하실 뿐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율법은 사람들로 죄를 깨닫게 하며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준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며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금은보화보다 귀하다(시 119:72).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귀히 여겨야 한다.
둘째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숭배와 부도덕에 떨어졌다. 인류 역사는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역사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육신의 쾌락과 즐거움을 가장 크게 여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대신에, 영화를 보고 스포츠를 보는 즐거움을 크게 여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있는 뿌리깊은 죄성을 알고 그것을 늘 경계하고 이 세상의 죄악된 것들과 헛된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일서 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셋째로, 구약의 성막과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상징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상징했다. 구원받은 우리는 개인적으로도, 교회적으로도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된 말과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베드로전서 2:5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교훈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 거하며 그의 피로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 안에서 힘을 얻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감사하며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51-60절, 스데반의 순교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집사 스데반이 유대인 공회 앞에서 한 증거 혹은 설교의 결론은 그들의 죄에 대한 책망이었다. 스데반은 그들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곧다는 책망을 반복하여 받았다. 출애굽기 32:9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출애굽기 33:3에 보면, 모세도 그들에게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했고, 출애굽기 33: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하라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9:6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말했고, 신명기 9:13에 보면, 그는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하였다. 목이 곧다는 말은 교만하고 마음이 완고하다는 뜻이다. 신명기 31:27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노라”고 말하였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말도 비슷하다. 신명기 10:16에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교훈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6:10에서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라고 말했다. 예레미야 9:2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에스겔 44: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말은 마음이 교만하고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없고 깨닫는 마음이 없는 자들, 곧 중생하지 못한 자들을 가리킨다. 스데반은 그들을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면서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교만과 무지(無知)는 성령을 거역하게 만들고 그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든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중생치 못한 자들의 모습이다.
[52-53절]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프로도타이)[배반한 자들](KJV, NASB)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천사들]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했고 의로우신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한 자들을 죽였고 이제 그 후손들인 그들이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다고 말하였다. 당시의 유대인들, 유대의 지도자들, 공회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죄 없으신 그 의인을 배반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이시며 아담 이후 모든 사람 중에 유일하게 죄 없는 분이시다.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한일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메시아께서는 죄 없는 사람이셔야 많은 사람의 대속 제물이 되실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3년 동안 많은 말씀들을 들었고 많은 기적들과 병 고침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인 예수님을 거절하고 배반하였고 정죄하여 죽게 했던 것이다.
[54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의 증거하는 말을 들은 유대인 공회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 그의 말대로 예수께서는 사형당할 만한 악인이 아니셨다. 그는 죄가 없는 자이셨다.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한 것이 죄라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그를 정죄할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를 정죄하였다. 성경은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함으로 그를 죽였다고 말한다. 그들도 양심으로는 예수께서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전하는 말을 듣고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들의 악한 감정은 이미 그들의 이성과 양심을 어둡게 만들었다. 얼마 전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경건한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회개하여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었다. 그러나 스데반 앞에 있던 공회원들은 회개치 않았다. 설교를 듣고 회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55-56절]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다. 성령께서는 그의 속에 충만히 거하셨고 그를 감동하셨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지지하셨음을 보인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사건 때에 하늘이 열렸다고 종종 증거한다. 에스겔 1:1, “제30년 4월 5일에 내가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마태복음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스데반은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 신약성경은 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고 아홉 번 말하였으나(롬 8:34; 엡 1:20; 골 3:1;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 계 3:21), 본절에서는 그가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셨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주께서 핍박당하는 스데반을 격려하시고 지지하심을 나타낸다. 주 예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거나 서 계신다는 말씀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된 권위와 능력과 영광을 누리심을 보인다. 주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동일한 권위와 능력과 영광을 가지고 교회와 세상을 통치하신다.
[57-60절]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영]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공회원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쳤고 돌로 쳤다. 그들에게는 들을 귀도, 깨닫는 마음도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는 날에 사울이라는 한 청년은 가까이에서 그의 죽음을 보았었다. 그 사울이 후에 사도가 된 바울이었다. 사람들이 옷을 벗어 그의 발앞에 둔 것을 보면 그는 그 일에 주동적 인물들 중 하나이었던 것 같다. 바울은 후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라고 말했다(행 22:20).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최후에 대해 두 가지를 증거한다. 첫째, 스데반은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예수께서도 숨이 끊어지시기 전에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46).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라고 교훈하였다(벧전 4:19). 스데반이 자신의 영을 하나님께 부탁한 것은 그가 하나님과 천국과 내세를 확신했음을 보인다. 둘째, 스데반은 그를 돌로 치는 원수들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 실천한 것이었다(마 5:44; 눅 23:34).
본문에 ‘잔다’는 말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표현이다. 밤에 잠자는 자들이 아침에 깨듯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할 때가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그러할 것이다. 그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고전 15:51-52; 살전 4:16-17).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유대인의 공회원들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했고 스데반을 핍박하였다. 겸손함과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의 은혜를 사모하며 겸손과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참으로 믿고 충성한 스데반은 순교의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순교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천국과 영생과 우리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며 우리 영을 하나님께 의탁할 때 가능하다. 주 예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셔서 그를 진실히 믿고 따르는 자들을 격려하시고 지지하신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며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그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셋째로,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을 본받아 실천한 것이다. 우리도 순교자 스데반의 사랑과 용서를 본받아 우리의 원수들까지 사랑하고 그들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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