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자의 시 세계
인식과 지각(知覺)의 조화, 그 진실
김 송 배
(시인 /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1. 자아 탐색과 예비적 기원
현대시에서 자아 인식의 문제는 창작에서 상당한 부분을 교감하게 된다. 이는 인식론에 근거한 철학적 사유(思惟)가 아니라, 시인들 특유의 상상력으로 지각(知覺)하는 자아의 탐색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심리적 현상이다.
이러한 인식의 개념을 철학쪽에서 살펴보면 ‘한 가지의 감각적으로 파악된 것을 그 보편적인 의미와 일치시키는 것과 보다 더 보편적인 성격을 띤 특징들을 통해서 이 의미를 규정하는 것. 그래서 인식(erkenntnis)이란 지각과 경험에 바탕해 있으면서 이 두 가지를 넘어서는 사고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의는 현실적으로 주워져 있는 상황을 그저 감각적,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어떤 것의 의미’를 미리 이해하고 있음으로써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박후자 시인이 첫 시집『그림자를 세워 집을 짓는다』(2001. 10. 청송시원)를 상재한 후 그동안의 역작들을 모아 다시『망각의 솔기를 깁다』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이러한 인식의 문제에 대한 그의 지각적 정서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는 것도 그가 이미 첫 시집에서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자연을 꼭 껴안아 보고 싶어’진다는 지각의 인식이 항상 그의 사유에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 시집에서는 특징적으로 인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서정성 복원이라는 대명제의 탐구를 위해서 다양한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 현현되는 것도 그가 간구(懇求)하는 자아가 어떤 지향성으로 정립해야 하는가를 시의 모티브(motif)이며 확고한 주제의 향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별과 만남은 달빛아래 스텝을 바꾸고
그 후 40여년
돌 속에서 꽃을 찾으려
만져보고 두드려보고 돋보기로 살펴보았다
꽃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수히 두드린 돌의 상처가
뜻 모를 무늬로 음각 될 때
어렴풋이 돌의 마음이 꽃이라는 걸 느낀다
생은 꽃으로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정으로 돌을 쪼아 새기는 것임을 뒤늦게 안다
--「인연」중에서
봉숭아 꽃물빛 얼굴을 기다리는 사이
누군가 나를 찾아주길 기다리며 움추렸던
긴 세월이 숨 가쁘게 지나간다
술래잡기 한 평생이 문틈사이로 보인다
--「술래잡기」중에서
이 두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살펴보았다’거나 ‘느낀다’, ‘뒤늦게 안다’ 그리고 ‘보인다’는 등의 어조가 어떤 사물이건 관념이건 간에 자아와 결부해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의 근저는 ‘돌 속에서 꽃을 찾으려 / 만져보고 두드려 보고 돋보기로 살펴’ 본 후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박후자 시인이 ‘꽃’과 ‘돌’의 상관성을 대칭적으로 상황을 설정하여 ‘생은 꽃으로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 정으로 돌을 쪼아 새기는 것’이라는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음미하고 있어서 아름다운 꽃의 모습이 이젠 ‘돌의 상처’로 변해 있음을 지각하게 된다.
한편 ‘긴 세월이 숨 가쁘게 지나간’ 후에 ‘술래잡기 한 평생이 문틈사이로. 볼 수 있는 인식과 지각의 조화를 탐색하고 있다. 이 또한 ’생‘과 ’한 평생‘이라는 시간성과의 융합으로 자아를 근원으로 한 중심축에서 존재를 탐색하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물안개 몸을 부벼 너의 눈물 닦아주는 것을 / 오늘 아침 내가 보았다(「꽃밭 앞 주차장」 중에서)
- 바다에 떠 있는 보름달만이 / 안전벽에 난타하는 너를 보았다(「주문진 밤바다」중에서)
- 나를 비껴간 빛 / 내 것이지 못한 시간과 / 걷지 못한 길들 / 아슴프레 보이네(「탄생」 중에서)
- 어떤 이는 샛별을 발견하지만 / 나는 가늠할 수 없는 너와의 거리를 본다(「도서관에서」 중에서)
- 상처가 황홀한 꽃이라는 걸 / 해지는 저녁에 비로소 안다.(「상처가 아름다울 때」중에 서)
- 너의 구부린 등 뒤에서 / 내 삶의 허리를 본다(「꽃을 든 새 아가」중에서)
박후자 시인은 이러하듯이 ‘보았다’거나 ‘본다’ 혹은 ‘안다’는 등의 어조로 자아를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내 것이지 못한 시간’과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너와의 거리’이며 ‘내 삶의 허리’를 지각하는 인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예비적 기원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예감에서 발현된 간절한 기원이기도 하다. 이는 ‘떠나고 싶다 / 안개 마을 / 잡히지 않고 흐릿한 그 무엇을 향해 / 물안개로 서성이며 / 떠도는 그립자 / 춤추는 여인의 가슴으로 / 두 팔 벌리고 / 햇빛 쏟아지는 강변 갈대숲 / 은빛 화살로 꽂히고 싶다(「은유의 공간」전문)’와 같이 ‘싶다’는 희구(希求)의 언어가 많다는 점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그는 작품「인내」에서도 ‘계단 아래 풀밭에서 바람의 향기를 맡고 싶다’거나 「멜론바」에서 ‘흘러가지 못한 여름날의 꿈 / 타는 목마름의 계절 얼려둔 / 그날의 망설임들 / 어적어적 깨물어 먹고 싶다’는 기원은 그의 예감적 언어 ‘노을빛 물드는 餘白(「내 이름」중에서)’, ‘주름 잡히는 시간의 낙화(「꽃들의 수화」중에서)’, ‘저 불투명하고 두터운 구름(「12월 마지막 날에」중에서)’, ‘선명한 무늬의 꿈(「꿈(1)」중에서)’ 그리고 ‘영혼도 옷을 입어 선명한 시간(「꿈(2)」중에서)’ 등으로 현현하여 자아 탐색의 한 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2. ‘내 마음의 빈집’과 시적 진실
박후자 시인이 다시 자아 탐색의 여과장치를 거쳐서 심도 있게 몰두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진실의 복원으로써 성찰의 감도(感度)를 높이는 일이다. 이것은 삶의 궤적(軌跡)에서 추출한 사유(思惟)의 원형들이 실재 현실의 모순들과 충돌할 때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성찰로서의 심리적인 변환이라고 할 수 있다.
얼기설기 하늘 비치는
맨 살의 나무 줄지어있다
잎도 꽃도 다 떨어진 후에야
너의 심장이 보인다
가늘고 긴 나뭇가지며 삭아 달아진 철심
지지 배배 악보로 엮어
천만번 매만진 둥지
따뜻한 겨울 꿈도 깨어나는 3월
아들 딸 출가시키고
포플러나무 우듬지에
단단하게 지어진
내 마음의 빈집
--「나무의 심장에는 까치가 산다」전문
가득 차서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
목까지 찰랑찰랑한
그리움
이름 한 번 부르면
동심원의 물결 흘러넘칠까
숨도 쉴 수 없습니다
오직 바람 속으로
증발하는 뜨거운 체온
내 안의 비워짐을 기다릴 뿐.
--「찻잔」전문
그렇다. 박후자 시인은 우선 텅빈 까치집에서 ‘내 마음의 빈집’으로 이미지를 정리하고 있다. 한 사물에서 상상력이 융합하면서 현현된 정서의 지향점이 궁극적으로 시적 진실과 그가 구가하려는 시 정신의 투영이 ‘빈집’으로 귀결됨으로써 비움의 미학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시 ‘찻잔’에서도 ‘내 안의 비워짐을 기다’리는 어조는 ‘찻잔’의 속성은 비우는데 있어서 그가 ‘가득 차서 아무 말 할 수 없습니다’는 어조와 대칭을 이루면서 비운다는 자체가 ‘그리움’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비움의 미학은 존재론이나 인식론에서 가장 중심축이 되는 정서의 표정이다. 일찍이 하이데거가 주창한 ‘본시의 나로 돌아가는 것’을 존재의 이유로 내세웠다면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면서 획득한 박후자 시미학의 원류가 되는 비움이라는 명제가 그의 시적 진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비움은 채근담(菜根潭)에서 말하는 마음을 비우면 본성이 나타난다(心虛則性現)는 고전을 보면 도가(道家)나 선가(仙家)에서 볼 수 있는 견성(見性)에 해당한다. 이 견성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망녕과 미혹(迷惑)을 떨쳐버리고 자기 본디의 천성을 깨닫는 것이다.
흔히들 불가(佛家)에서 쓰는 언어이지만, 하이데거의 존재철학과 유사한 점으로 우리 인간의 정신문제가 명백하게 제시되는 교훈이다. 이러한 비움의 시학을 갈망하는 시인들의 정서는 존재에서 탐색된 자아 성찰의 중요한 범주(範疇)에 속하게 된다.
박후자 시인이 이러한 성찰에 이르기 까지는 현실적 갈등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가령, ‘넘어지고 굴러서라도 오르고 싶은 마음 / 바라보는 마음에 더욱 향기를 품을 수 있다는 갈등(「향적봉을 바라보며」중에서)’이 있으며 ‘머물러 옛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싶어도 / 뒤로 흔들 앞으로 흔들 / 머물 수 없는 숲속의 가파른 길을 / 가속으로 치닫는다(「여름」중에서)’는 등의 어조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그의 성찰과 상관되는 인식과 갈등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 팔랑팔랑 흔들리는 푸른 손끝이 / 바로 저예요(「소망」중에서)
- 떠날 것도 다가설 것도 없는 / 섬 안의 산 / 너를 만나 / 지친 나를 내려놓는다(「망각의 솔기를 깁다」중에서)
- 버릴수록 평화로워 지는가 / 내가 / 저 액자에 걸린다(「바닷가 커피숍에서」중에서)
- 찾지 못한 나의 스위치(「神의 영역」중에서)
- 현대의 벽은 숫자라고 그림자 없는 벽 속에 나를 가둡니다(「벽」중에서)
- 지는 해 이마에 닿아 / 비에 젖은 꽃잎, 내 마음을 모른 채 / 흘러 흘러갑니다(「겅가의 돌」중에서)
이렇게 ‘나’를 반추하는 어조가 인간의 지향적 진실을 정립하기 위한 내면의 절규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서 절실하게 갈망하는 비움에 대한 의식은 결론적으로 다음 작품 「고목」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어머니라 불리우는 오래된 나무
나이테 안 생애를 조금씩 비워낸다
희망과 절망이, 사랑과 미움이
부스럼 딱지로 떨어져 나가
진액이 말라가면서 더욱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영혼은
양 어깨에 날개가 돋아나기를 기다린다
3. 서정성 복원과 ‘꽃’의 명상
박후자 시인은 이와 같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의 탐구와 더불어 자연 서정에도 혜안(慧眼)을 멈추고 있다. 특히 그는 ‘꽃’에 관한 명상에 심취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꽃’의 상징이나 이미지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표상하지만, 그는 꽃과 시간성을 결합함으로써 서정성의 복원이라는 명제의 해법을 탐색하고 있다.
꽃 속에는 꽃의 강물 흐르고
몸속에는 욕망의 강물 흐른다
한 번 폭우에도 범람하여 물길이 바뀌는 강
영혼의 삶 찾아 집을 나선다
헛바퀴 돌리는 타이어의 비명
찌익~
무늬로 남긴 채
모내기 하는 농부의 논두렁을 바라보면
가슴가득 안겨오는 바람의 길
푸른 물결만 철썩대는 해변에
해당화 한 그루 꽃이 피었다
한 생의 情恨을 우려낸 붉은 꽃잎
버릴 수 없는 것도 버려야 도달하는 바다
그 물결 앞에서
아직도 금빛 가슴에 고인 물을 안고 있는 너는
파도가 걸러낸 강물의 영혼인가
여기 작품 「해당화를 찾아서」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해당화 한 그루’에서 ‘영혼의 삶을 찾’고 있다. 또한 ‘꽃의 강물’과 ‘욕망의 강물’을 대칭적으로 적시하여 ‘한생의 情恨’으로 반전시키는 효과를 ‘강물의 영혼’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가 명상하는 ‘해당화’와의 교감은 그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그는 ‘버릴 수 없는 것도 버려야 도달하는 바다’라는 내면의 진실을 메시지로 전달하여 자연과 인간의 공존의식을 좀더 구체화하는 언술들로 독자들의 공감대를 높이고 있다. 이는 그가「복사꽃」에서도 ‘하르르 하르르 / 꽃잎은 떨어져도 // 꽃받침과 꽃술은 / 마디마디 남아 // 자기가 꽃인 양 / 착각하고 있는 // 참으로 대책 없는 / 사랑나무다’라는 명상적 언어의 함축은 외형적인 사물에 대한 표피적 언술이 아니라, 깊은 묵시적 성찰이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시적 구도는 현실적 갈등과 고뇌의 여과장치로서 ‘꽃’의 미감(美感)에서 추출한 아름다움에 대한 동화(同化assimilation)와 투사(投射project)라는 자연 인격화의 두 원리를 동시에 적용하는 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초록이 넘치는 꽃밭
빛바랜 사진을 품고 있는 너
가지만 스쳐도 향기롭던 6월의 꿈
깨어나지 못한 너에게 장마 비가 내린다.
자주 빛 꽃술에 겹겹이 쌓인 그리움
젖은 줄기에 매달려 가슴만 뜯는구나
천둥치고 번개일어
어디선가 감전사하는 불꽃같은 사랑이 있다
색 바랜 꽃잎 모두 떼어내
저 빗속으로 떠내려가라
기다림이 미덕인 시대는 별빛 속에 묻혀
낙화 하지 않는 꽃은 꽃이 아니다
또한「백일홍」에서도 시학에서 운위(云謂)하는 감상적 오류(感傷的 誤謬pathetic fallacy)에 기인한다. 이는 자연물(꽃)에 인간의 능력과 감정을 부여하여 인간화시키는 상황 설정이다. 이 ‘백일홍’은 ‘빛바랜 사진을 품고 있는 너’라고 의인화하고 ‘저 빗속으로 떠내려가라’는 객관성을 부여하여 그는 ‘백일홍’과 동체(同體)로서의 동질성을 구가하고 있다.
이러한 시법은 결론적으로 그가 ‘기다림이 미덕인 시대는 별빛 속에 묻혀 / 낙화하지 않는 꽃은 꽃이 아니다’라고 인식 단정을 함으로써 인간과 자연과의 시적 접맥(接脈)을 구도화하는 특성을 읽을 수 있게 한다.
한편 이러한 자연 사물은 시간성과 상관을 갖게 된다. 계절적 의미의 요소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멸의 불꽃 타오르는 허공에 / 사계절 마른 꽃을 뿌린다(「승부역」중에서)’거나 ‘반백 년 전 저 건너에 피어나던 우리의 꿈(「참나리」중에서)’, ‘추억으로 흩어지는 눈의 발길이여 / 사랑을 지우고 무슨 다시 올 봄날 / 꽃을 기다리는가(「산음리에서」중에서)’ 그리고 ‘내 목소리 그대에게 닿지 않는 / 진공의 시간 흐르고 흘러 / 인연이 아니었다고 눈감은 자리 / 그리움의 봉오리 커져만 갔네(「백목련」중에서)’ 등의 어조는 꽃과 시간의 융합에 투영된 그의 진실이다.
밟히고 눌린 어깨너머
꽃봉오리 벙글어
너의 꽃도 피고
나의 체념도 피어
흔들리는 것은 꽃이 아니었네
--「섬진강변 자운영」중에서
그러나 박후자 시인이 여망하는 서정성 복원의 근간(根幹)에는 자아와 현실과의 화해(혹은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로서 긍정과 부정이 내재되어 있다. ‘너의 꽃’과 ‘나의 체념’ 혹은 ‘흔들리는 것은 꽃이 아니’라는 어조가 이를 명징하게 적시하고 있다.
4. ‘그리움의 주소’ 또는 ‘기다림’
박후자 시인은 서정적 이미지는 자아와 자연 등 다양한 상관성에서 탐색하고 있으나 ‘그리움’이라는 원초적인 심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작품에서 중심축을 형성하는 이 ‘그리움’의 현주소는 바로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정서의 향방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시적 대사물관이나 관념의 범주에서 이탈할 수 없는 순박한 시 정신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자아와 현실의 대비 인식과정에서 생성된 그의 인생관이며 철학일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천성적으로 체질화한 지적 소양과 인품을 겸비한 시인 정신을 보유하고 살아왔다는 점을 간과하지 못한다.
그는 서정적 자아와 사물의 관계를 그의 지적 자양으로 확인하면서 이미지나 상징을 부여하고 있어서 외연(外延)의 잡다한 사물(혹은 일상생활)을 수용하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투영, 포괄하는 시법의 구사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욱한 안개가 길을 막는다
저 고요한 바다 속 밀어
지상의 노래가 되고 싶었나
비도 못 되고 빛도 못 된
그림자도 없이 떠도는
회색 너울 속에 글썽인 눈물
육신을 빠져나온 자유로움이
바닷길에서 마음속 현을 울린다
집 떠난 너의 노래
내 그리움은 펑퍼짐 한데
안개야 기다리면 걷히겠지만
그리움의 주소는 찾을 수 없다
--「안개 짙은 바닷길」전문
여기에서 ‘그리움의 주소를 찾을 수 없다’는 부정적인 어조는 바로 ‘기다림’을 전제로 한 긍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한생의 일출을 기다리는 밤’에 ‘등불을 끄고서야 보이는 얼굴(「가을밤의 낙서 2」중에서)’이 그의 내면에서 숙성된 정서와 교합하면서 현현된 관조(觀照)의 범주까지 함축한다.
이처럼 ‘그리움’은 사랑을 매체로 한다. 누군가의 말대로 사랑은 우리들 혼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 미지(未知)의 것에 향하여 갖는 성스러운 그리움이라고 했다. 그는 ‘달빛을 업고 있는 한옥 대문’과 ‘보일 듯 말 듯한 별들 / 옛 기억을 찾아 떠나고 / 빗장 지른 대문 앞(「그리움 그 후」중에서)’에서 ‘그리움의 주소’를 찾고 있다.
이러한 상상의 배경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존재한다. 그는 첫 시집에서도 ‘어머니’의 형상화가 많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도 ‘어머니’의 이미지가 많이 투영되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와 상통한다. 이것은 단순한 사모곡이나 모성회귀를 위한 관념의 표현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성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심저(心底)에서 발현되면서 이제 한 어머니로서의 교훈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아련하고 달착지근하게 / 졸음 속 파고드는 어머니 내음 (「비단 향기」중에서)’이며 ‘어머니를 비껴간 시간의 꽃무늬도 예쁘게 / 햇살비치는 옷을 뜨개질 하(「비 내리는 밤」중에서)’고 있으며 ‘어머니는 흙으로 돌아가셨지만 그릇은 남아 / 큰 스님의 화두 같은 울림(「항아리」중에서)’을 듣고 있다.
박후자 시인에게서 이러한 그리움은 다시 ‘어머니의 기억만으로도 / 어린 시절 꽃물이 든다(「인사동 귀천에서」중에서)’는 회상의 늪을 지나가고 있다. 이것이 곧「시간이 태어나고 있다」에서 ‘심한 입덧으로 헛구역질하던 / 시간은, 시간을 낳아 / 배고픈 어린 것들 / 어머니를 찾고 있다’라고 현재의 어머니로 변환하고 있다.
이 현존의 ‘어머니’는 자신이거나 가족의 일원이거나 상관없다. 다만, ‘어머니’로서의 그리움이 동질의 정서로 접맥되고 있음에 유념하게 된다.
어쨌거나 박후자 시인은 서정적 자아의 인식을 탐색하는 서정시인이다. 시인의 지각은 만유(萬有)의 사물과 조화를 지향하고 어떤 경우에는 화해로써 해법을 실현하려는 고뇌가 따른다. 그것이 그 시인의 시적 진실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꾸준히 ‘생명의 오브제(「그리움 그 후」중에서)’를 그가 추적하고 탐구하는 그리움의 시적 반경(半徑)에서 박후자 시학의 정립에 화두(話頭)를 설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