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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양의 사표(師表)
박인수 / 법학전문대학원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임교수로 발령을 받으면서 이경운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5·18 민주화운동 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역사적 매듭을 짓고 있으나, 당시로는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언론과 지역이나 인사들은 광주사태 또는 광주폭동 등으로 부르고 있었다. 더욱이 87년의 상반기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6·10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이한열 열사의 사망사고 등으로 80년의 봄 못지않게 민주화와 개헌에 대한 열망이 강하던 시기였다. 나아가 광주는 5·18 당시 무고하게 희생되었던 수많은 시민들을 위한 보상과 명예회복을 위한 정치적 주장의 중심에 있었다.
80년대 중반 프랑스 Paris 2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서둘러 귀국한 후 영남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해 9월부터 전남대학교로 가게 되었다고 여러 교수님께 인사차 들렀더니, 대부분의 교수님께서는 지역색을 걱정하시면서 염려의 말씀을 주셨다. 프랑스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셨던 분께서는, 오히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올 정도의 능력이 있으면 광주에서도 잘 적응할 것이니 축하할 일이다면서 격려해 주셨다.
그동안 학위취득과 논문 작성 등으로 학문만을 바라보며 생활하여 온 터인지라 사회로서는 초년생이었다. 광주에서 첫 둥지를 틀어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모험으로 다가오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립하여 독립된 활동을 하게 되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하면서 광주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미 서울과 파리와 같은 대도시의 낯선 환경을 경험하였던 덕분에 비록 처음이긴 하였으나 광주 생활에 대해서도 젊은 패기와 자신감으로 가득하였다. 더군다나 88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하여 개통한 대구·광주 고속도로를 불편없이 다니도록 하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선물해 주신 짙은 남색의 현대차 프레스토는 나름대로 생활의 멋을 뽐내기에도 충분하였다. 학문적 비전과 경제적 기반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으므로 강의와 학생지도에도 최선을 다하고자 하였다.
학생들은 비록 신임 교수이긴 하지만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교수라는 사실에 상당한 호감을 보여주었으며, 나 또한 전남지역의 우수한 학생이 운집해 있는 전남대의 법과대학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지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학생들과의 대면을 성실하고 진솔하게 하도록 하였다.
당시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놀라왔던 것은 학생들이 민주와 역사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대단히 높았다는 것이다. 불과 수개월 전까지 함께 하였던 영남대 학생들과 비교해 보면서 전남대 학생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광주의 아픈 상처가 현재도 진행형이었지만, 이를 치유하고자 하는 눈물겨운 인내와 승화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역사에 대한 인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는 학생들이 교수님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깊은 존경심과 신뢰도 인상적이었다. 전남대의 많은 교수들이 5·18 당시 시국선언과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해임되었다가 수년간의 복직 투쟁 끝에 마침내 복직된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 법과대학의 당시 최고 원로교수였던 이방기 교수님이 계셨다. 자그마한 체구에 마른 체격이었지만 소탈하고 솔직하며 부드러우시지만 강단있는 분이었다. 무엇보다 불의나 잘못된 것에는 언제나 불호령을 내리는 분이셨기 때문에 법과대학 학생들에게는 스승이면서 동시에 민주화의 대부와 같은 분이었을 것이다. 이방기 교수님께서 중심에 계시는 한 학생들은 언제나 교수들을 믿고 따르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대구 출신 신임으로 광주 생활에 적응하려고 하는 것이 법과대 교수들 눈에도 비쳐졌던지, 모든 학사업무와 학교생활 전반에 항상 나에게 우선권을 부여해 주다시피했다. 20명에 가까운 선임 교수들이 계셨으니, 아무리 당당하려고 해도 그렇게 보여지지 않았던 모양이고 따라서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계셨다. 신임이자 막내이며 나아가 대구 출신이라는 사실 자체가 만들고 있는 환경이었다. 나름대로 감사하고 고마웠다. 그러나 이러한 배려 자체가 경우에 따라서는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당시 전남대에는 대구를 포함한 영남지역 출신의 교수도 10여 명 있었으며, 더군다나 같은 법과대학 소속의 행정학과에도 고등학교 후배가 나보다 2년 전부터 근무하고 있었다. 이분들에게 학교와 광주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물어보면 대체로 영호남의 갈등과 편견을 느끼고 계시다는 반응이 주류였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나로 인하여 오히려 학과 교수님들이 항상 양보하는 입장에 서 계시다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와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해 주면서도 표면화하지 않고 묵묵히 내색하지 않는 분이 이경운 교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구 출신이면서 초임으로 광주라는 낯설고 말투 다른 지역에서의 직장생활이 어려울 것이며, 이미 영호남 갈등과 반목이 만만치 않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이를 원만하게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역차별에 가까운 특혜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이 교수님의 진심 어린 배려심이 다른 교수님들에게도 감동으로 와 닿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이 교수님의 배려가 법과대학의 모든 교수님과 교직원에게도 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이 교수님의 평소 언행과 인품이 모든 분들의 모범이자 귀감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혜에 가까운 행운을 누린 결과 나는 지금도 영호남의 지역적 차별이나 편견을 과감히 부정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직장이나 사회에서의 소수자 보호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자 하고 있다.
이 교수님의 배려와 양보는 나의 학문 영역 형성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도와주셨다. 90년대 중후반부터는 공법영역에서 헌법과 행정법 교수를 구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나, 80년대 후반까지는 헌법과 행정법 교수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오히려 공법교수로 일반화되고 있었다. 물론 서울의 일부 대형대학에서는 80년대에도 헌법과 행정법 교수를 구분하고 있었으나,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에서는 공법 교수가 헌법과 행정법 강의를 학기별로 나누거나 또는 함께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남대학교 발령 당시 행정법 전임교수로 예정되어 있었다. 전남대학교도 거점 국립대학교이므로 당시에도 헌법 교수와 행정법 교수를 구분하고 있었다. 발령이후 3학기 동안에는 행정법 원론, 각론, 연습 강의에 집중하면서, 논문은 프랑스 헌법에 관한 내용을 발표하였다. 헌법 강의는 이방기 교수님과 김명재 교수님이 맡고 계셨는데 김 교수님께서는 학위취득을 위해서 독일의 대학에 유학 중이셨으니 강의는 이방기 교수님께서 전담하고 있었다. 4학기째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헌법 강의를 할 교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헌법전공자로서 행정법 강의만 하고 있던 참이었으니, 헌법 강의에 대한 욕구가 생겨났다. 그러나 행정법 교수로 발령받았으니 선뜻 헌법 강의를 자원하기도 쉽지 않았다. 며칠을 고민하였다. 이 교수님께서 알아채고 계시는 것 같았다. 속내를 털어놓고 의논하였더니 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다.
그러나 사정을 따지고 보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교수님께서는 당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는 막바지 기간이었기 때문에 내가 헌법 강의를 하게 되면서 이 교수님께서는 행정법 강의 부담을 최소한 한 강좌 더 하셔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당신의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후배 교수를 위하여 선뜻 양보하여 주신 이 교수님의 배려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인품의 표출이 아닌가 생각이 미쳐지면서 새삼 고개 숙여진다. 이렇게 하여 헌법강의와 행정법 강의를 함께 하는 기간 중에 학과에서는 다시 행정법 신임교수를 공채하게 되었다. 신임 행정법 교수인 정연주 교수가 부임한 이후 나는 헌법 강의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특히 프랑스 헌법에 대해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강의와 학문에 대한 자부심 나아가 사명감을 가슴 깊이 되새기게 된 것도 이러한 계기에서부터 구체화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전남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수도권 대학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도 있었으나, 이 교수님을 위시한 홍기문, 정종휴, 안동준, 김명재, 노용우, 김정완, 장신, 정병석 교수 등 친근한 동료 교수님들이 계시는 전남대학교를 떠나기 싫었다.
광주가 제2의 고향이 되고, 전남대가 모교같이 느껴지면서 전남대에 연착륙하고 있던 즈음에 예기치 못하게 어머니께서 별세하시게 되었다. 아내는 아내대로 홀 시아버지 봉양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이고, 아우들 내외도 성의를 다하였고, 아버지께서도 혼자 생활하시며 허전함을 메우시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하시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여의신 후 커다란 이층 양옥집에 홀로 계시는 아버지를 뵙게 되면 점점 민망하게 느껴졌다. 정들어 있고 따뜻한 전남대이지만, 아버지의 곁을 지켜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교수님과 또 의논하였다. 늘 나의 의견과 결정을 존중하여 주시던 분이었기 때문에 내 심경을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이 교수님의 의견은 분명하였다. 다른 사유로 전남대를 떠난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유하겠지만, 아버님 봉양을 위해서라면 더이상 만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답변을 주셨다. 90년대 초반에도 법과대학의 교수 자리를 구하는 것은 결코 녹녹치 않은 것이었다. 더군다나 지역을 대구로 한정한 상황에서는 언제 자리가 나게 될지도 막연하였다. 2년 정도의 기간이 지날 때쯤 모교인 영남대에서 헌법 교수 공채를 공고하였다. 지원자가 많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지원자와 최종 경합 끝에 마침내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막상 학교를 옮기려고 하니 한편으로는 아쉬움과 송구함으로 여러 교수님들 뵙기가 옴추러 들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대감과 비전으로 가슴 부풀어지기도 하였다.
이 교수님에게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알렸다. 교수님께서 자택으로 내외를 초대해 주셨다. 자택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을 의심하면서 다시 보았다. 사모님께서 이미 예견 하셨던지 설명해 주셨다. 거실에는 아무런 가구나 비품도 두지 않고 필요하면 방석만 둔다는 것이었다. 평소 청빈과 검소함을 체질화하고 계시던 분이셨지만, 집에서도 이를 생활화하면서 참선과 명상,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면서 학문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학자의 면모를 텅 비어있는 공간이 웅변하는 것 같았다.
이미 여러차례 사모님을 뵌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교수님처럼 훤칠한 키와 미모는 잘 알고 있었으며 간단한 인사 정도는 하였으나, 막상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이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사모님께서는 교직 경력과 건강관리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었다. 기억에 선명하게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그때까지 15년 동안 저녁 식사는 하지 않으시는 것이 자신의 건강법 중의 하나라는 것이었다. 놀라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건강은 결코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자기 관리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보여주신 것이었다.
불가에서 강연하고 있는 비움과 무소유를 생활하고 계셨던 교수님 내외께서는 천방지축 뛰어다니면서 여러 교수님과 교류하거나 하루종일 연구실에서 박혀 있거나 퇴근할 때는 동료 교수들과 무리 지어 저녁식사를 하고 밤늦게서야 귀가하였던 나에게 무언으로 가르침을 주셨다. 이후 나의 개인적 생활관은 서서히 변화하게 되었으며, 보다 규칙적인 생활 습관, 교수로서의 청빈낙도 나아가 가정 화목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생활 태도를 형성해 가기 시작하였다.
교수로서 학문의 길에 들어서고 학문의 방향을 설정하였던 30대 중후반 7년여의 세월을 함께한 전남대와 광주를 떠난다는 것이 생각보다 아쉬움과 미련이 크게 와닿았다. 무엇이 가장 큰 아쉬움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역시 이경운 교수님과의 이별이 가장 먼저 와닿았다. 한국인으로서 프랑스 빠리 소르본느 법과대학 최초의 헌법학박사라는 자긍심으로 패기 만만하였으나, 당시 이경운 교수님께서 전남대학교 법과대학으로 부임할 수 있도록 나아가 당신 자신을 내려놓고 항상 양보하고 배려해 주면서 부족한 나를 전남대와 광주 생활에 연착륙시키면서 적응할 수 있도록 묵묵히 돌봐 주시지 않았다면, 역마살이 있는지 항상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니고 바깥 활동에 몰두하는데 익숙하였던 내 개인적인 성향을 볼 때 30대 중후반에 수많은 난관에 봉착하면서 좌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교수님의 겸양과 배려는 동료 교수로서가 아니라 어떠한 스승도 할 수 없는 생활 철학을 심어주고 학문을 심어 준 스승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수님과 아쉬운 이별을 조금이라도 달래볼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함께 한국공법학회의 회원이었기 때문에 학회 참석에 의해 간간히 만나뵐 수는 있겠다는 생각에 다소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나는 학회 활동을 성심껏 하였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학회에서나마 이 교수님을 만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나를 더욱더 학회 활동으로 쏠리게 하고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하지 않았는가라는 생각도 들게 한다.
무등산에 자주 오를 수 없겠다는 아쉬움도 상당하였다. 광주에서의 생활 중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무등산에 오르는 것이었다. 무등산에는 수많은 산행 루트가 있다. 산행 시간에 맞추어 갈 수 있는 코스를 훤히 꿰고 있었다. 주말이면 무등산 뿐만 아니라 광주 인근 나아가 전남과 전북지역의 명산을 산행하였지만, 주중에는 몇 차례씩이나 무등산을 산행하였다. 부임 초 교수아파트에 거주할 때부터 시작하였던 산행을 백운동에 있는 목우아파트로 이사한 이후에는 학교 출퇴근시에도 당일 강의와 회의 일정 등에 따라서 시간이 나면 무등산에 올랐다. 무등산 산행을 즐기게 된 배경에도 이 교수님이 자리잡고 있다.
교수로서의 일상에는 신체적 활동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연구실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바로 강의준비 또는 논문작성 등에 전념하게 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식사나 강의 또는 회의가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출퇴근도 자동차로 하였기 때문에 걷는 것조차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경운 교수님께서 증심사에서 출발하는 무등산 산행을 제안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산악회 활동을 하던 친구들과 함께 팔공산 산행을 하고, 대학시절에도 간혹 운문사나 지리산 등을 산행한 적이 있었지만, 대학원과 유학시절 동안에는 산행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산행 전날 제법 많은 비가 왔으나, 산행일에는 날씨도 화창하고 기온도 적합했다. 모처럼의 산행이었으니, 다소 힘에 부치는 구간도 있었으나, 짙은 녹음으로 덮여있는 산이 품어내 주는 향긋한 상큼함이 더욱 좋았다. 이 첫 번째 무등산 산행 이후 틈만 나면 무등산을 찾아 나섰다. 주말이면 아내와 아이들과 동행하기도 하고, 주중에는 혼자서도 산행하였다. 계절별 무등산이 주는 정취를 느껴가고 있었다.
무등산의 매력에 빠져들 즈음 주말 산행 중에 우연히 무등산 규봉암 인근에서 이 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께서는 대학원 학생 시절부터 규봉암을 자주 찾으셨다고 했다. 규봉암은 정상인 서석대의 뒤 편에 위치하고 있지만 장불재에서 돌아가면 거의 평길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지만 산행시간이 다소 길어 일반인이 규봉암 산행하기는 쉽지 않은 코스에 해당한다. 교수님을 규봉암 인근에서 만난 것이 무등산을 더욱 자주 찾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02년 연구재단 해외파견교수로 선정되어 Paris 1 대학의 G. Marcou 교수님의 초대로 9월 프랑스로 갔다. 아이들도 이미 대학에 진학하였기 때문에 가족 모두가 함께 갈 수 있었다. Cité International de Université Paris (CIUP)의 Deutche de la Meurtre 관의 4층 아파트에 입주하였다. 유학생 시절에는 CIUP에 가족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 공간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학생용 원룸만 있는 것으로 알고, 몇 달간 CIUP에 있은 후 아파트를 구하기 위해 Paris 시내를 샅샅이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새로웠다.
Paris1 대학의 GRALE 연구소장이었던 G. Marcou 교수님과 함께 유럽연합과 지방자치에 관한 연구를 본격화하였다. Paris 생활에 익숙해 있던 2003년 봄에 전남대 김명재 교수께서 연락을 주셨다. 현재 하노바에 있으며, 이경운 교수님도 연구년이어서 독일의 뮌스터 대학에 와 계시다는 내용이었다. 이 교수님과 김 교수님을 하루 속히 뵙고 싶었다. 국내에서가 아니라 유럽이라고 하니 더욱 반가왔다. Paris로 오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일정이 충분하지 않아 Paris로 가는 것은 어려우니, 대신 하노바에서 만나 함께 뮌스터로 가는 것이 어떠냐는 말씀이었다. Paris로 오면 이곳에서 며칠이라도 여행안내도 하고, 식사도 함께 하였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일정이 여의치 않다고 하시니 내가 하노바로 가는 것으로 하였다. 뮌헨, 하이델베르흐, 프라이부르흐, 괴팅겐 등 독일의 여러 도시를 다녀 보았으나 하노바는 처음이었다.
하노바 대학에서 김명재 교수님을 만나 하노바 시내를 간단히 돌아보고 점심을 식사한 후에 바로 뮌스터로 향하였다. 이 교수님은 연구년 2년 동안을 생활하기 위하여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커다란 단독주택을 사용하고 계셨다. 학교까지는 주로 자전거로 다니신다고 하였다. 당시에도 독일은 자동차 배기가스로 인한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었으니 자전거 출퇴근이 이 교수님의 생할철학에도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뮌스터 대학을 세 사람이 함께 방문하였는데, 캠퍼스의 울창한 고목 가로수들이 퍽이나 인상적인 유서깊은 대학이었다.
방문하는 동안 주된 논의는 이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인 대학의 자치를 독일대학과 프랑스대학 그리고 우리나라 대학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물론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장단점에 대하여도 서로의 생각을 공유해 볼 수 있었다.
뮌스터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 해외파견 초청교수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이 교수님과는 학회에서 간간히 뵙는 경우가 있었으나, 학회 활동에서 주는 시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간단한 인사말만 주고 받았을 뿐 속내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17년 이 교수님께서 좌장을 맡으신 학회가 있어 반가운 마음에 학회에 참석하였다. 뵙지 못하였던 그 기간에 이미 정년퇴임을 하고 나주로 내려가 전원생활을 하며 간단한 텃밭도 가꾸고 계시다는 소식을 주셨다. 이 또한 조용히 자연을 관조하며 비움의 철학으로 생활하시는 이 교수님의 성향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었다. 텃밭을 일구시는 이 교수님을 머리 속에서 그려보았다. 학문과 철학과 생활이 결코 서로 멀리 떨어져 제각각인 것이 아니고 이 삼자가 어울어져 하나가 되어 있으면서, 자연과 전원 속에서 사회와 제자를 지켜보며 사랑하고 계실 이 교수님께서 겸손하며 인자한 모습으로 염화시중과 같은 미소를 소리없이 빙그레 지으실 것 같았다.
삼인지행(三人之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고 했던가! 우리는 수많은 스승님과 제자들을 만나고 또 서로 교류한다. 그러나 스스로의 겸양으로 스스로의 품격과 향기를 스스로 품어내고 있는 스승을 만날 수 있는 제자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 자신도 그를 닮아서 흉내라도 내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를 향한 그리움과 존경심이 가득하다. (202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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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글 부담'에서 벗어나시게 됨을 축하드립니다. 영남인이 호남에 가서 우정을 얻는 귀한 체험을 따뜻하게 읽었습니다.(제가 학생들을 인솔해서 광주를 갔던 기억도 함께 떠오릅니다.) 또한 동료 교수로 만나서 사표(師表)가 되는 이야기도 지금까지는 처음 나온 사례네요. 시야를 넓혀 주시는 글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께서 이쪽으로 한번 나들이 하셔도 좋지 않을까요?
탑재하였던 화일을 열어 원본 원고 중 오탈자, 맞춤법 등을 친절하게 수정하여 원본원고를 다시 올려주신 편집위원장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김 위원장님께서 주신 아이디어를 활용하여, 사제동행 출판회가 있으면 그분들을 초대해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