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다드의 서, 제18장 죽음에 대하여
힘발을 뺀 동행자들이 다시 한 번 스승 주변에 모이는 동안, 엄청난 양의 물이 산에서 흘러 내려 바다로 들어갔다.
그때 스승은 ‘전능의 의지’ 에 대해 강의했다. 그러다 갑지기 이야기를 멈추고 말했다.
“다급해진 힘발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 우리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부끄럽기 때문에 이곳까지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아비말, 가서 그를 데려오라.”
아비말은 나가서 금방 힘발을 데리고 돌아왔다. 힘발은 눈물에 젖어 흐느꼈으며, 무척이나 초췌한 표정이었다.
미르다드가 말했다.
“이쪽으로 오라, 힘발.
아아, 힘발, 힘발. 아버지는 죽은 탓에 슬픔이 마음을 좀먹고, 피가 눈물로 변하도록 놔 두는가? 그대 가족이 모두 죽었을 때는 어쩌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부모, 형제자매가 그대의 손과 눈에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났을 때는 어쩌겠는가?“
힘발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내 아버님은 비명횡사했습니다. 바로 어제, 아버님이 막 사신 송아지가 아버님의 배를 찌르고 머리를 밟아 뭉갰습니다. 전 방금 그 얘기를 들었습니다. 슬픕니다, 아 아, 슬픕니다.”
힘발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진정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미르다드가 말했다.
“그리고 송아지는 그대가 보낸 돈으로 사신 것이기에 더욱더 아버지의 죽음이 괴롭겠지.”
힘발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정말 말씀 그대로입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알고 계시는군요.”
미르다드가 말했다.
“그리고 그 돈은 미르다드에 대한 사랑을 팔아 구한 것이지.”
미르다드가 말했다.
“그대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힘발. 그의 형체와 그림자도 죽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상태로 변한 그의 형체와 그림자에 대해 그대 감각이 죽어 버린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조악한 눈으로는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한 형체와 그에 따르는 희미해진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다.
숲속의 히말라야 삼나무 그림자는 그 나무가 배의 돛대가 되었을 때의 그림자, 사원의 기둥이 되었을 때의 그림자, 교수대의 발판이 되었을 때의 그림자와 똑같지 않다. 또 햇빛에 비친 히말라야삼나무 그림자는 달빛 아래서의 그림자, 별빛 아래서의 그림자, 새벽녘 자색 안개 아래서의 그림자와 똑같지 않다.
그러나 그 히말라야 삼나무는 제 아무리 모습이 바뀌더라도 히말라야 삼나무로서 계속 살아간다. 숲의 다른 히말라야삼 나무가 그 나무를 더 이상 예전의 벗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잎새 위의 누에는 비단고치 속의 번데기가 벗이라는 걸 알수 있는가? 번데기는 날개를 가진 나방이 벗이라는 걸 알 수 있는가?
흙 속의 밀알은 땅 위의 줄기가 혈연이라는 걸 알 수 있는가?
대기 속의 수증기나 바닷물은 높은 산 협곡에 있는 고드름이 자신의 형제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지구는 우주의 심연에서 날아온 운석이 형제자매 별이라고 분별하겠는가?
도토리나무는 도토리한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아버지는 지금 그대의 눈이 익숙히 않은 빛 속에 있으며, 그대로선 판별할 수 없는 형체 속에 있다. 그 때문에 그대는 아버지가 이젠 안 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물질적 자아는, 어디로 옮겨지고 어는 곳이 변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신성(神性) 의 빛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 때까지는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다.
오늘은 나무의 푸른 가지였다가 내일은 벽에 박힌 못이 되어버릴 나무토막은 자기 속에 있는 불꽃에 의해 완전히 타 버릴때까지는 그 형체와 그림자는 변할지라도 계속 나무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내면의 신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는 죽어 있을 때나 살아 있을 때나 계속 인간이다. 내면의 신에 의해 소멸되는 것은 인간이 ‘유일자’ 와 한 몸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을 사람들이 제멋대로 일평생이라고 부르는 눈깜박할 순간 속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모든 시간은 생의 시간이다, 나의 동행자들이여.
시간에는 정지도 없고 시작도 없다. 또 시간에는 나그네가 원기 회복을 위해 휴식을 취할 여인숙도 없다.
시간은 감각에 의해 창조된 수레바퀴다. 그 수레바퀴는 감각에 의해 공간이라는 허공을 돈다. 그대들은 계절의 놀랄 만한 변화를 느끼고, 그 때문에 만물은 변화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계절을 펼쳤다가 거두는 힘은 영원히 하나이며 똑같은 것임을 그대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그대들은 사물의 성장과 쇠퇴를 느끼고, 쇠퇴는 성장하는 모든 사물의 종말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성장과 쇠퇴를 만드는 힘 자체는 성장도 하지 않고 쇠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대들은 잘 알고 있다.
그대들은 미풍과 비교하여 질풍의 속도를 느낀다. 그리고 질풍이 훨씬 빠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질풍을 움직이는 것과 미풍을 움직이는 것은 똑같은 것이며, 질풍과 더불어 산책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그대들은 알고 있다.
그대들은 얼마나 경솔하게 믿어 버리는가! 감각이 마련한 속임수 하나하나에 얼마나 쉽게 속아 버리는가! 상상력은 어디로 갔는가? 상상력에 의해서만, 그대들을 놀라게 하는 모든 변화가 눈앞의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으련만.
어떻게 질풍이 미풍보다 빠를 수 있는가? 미풍에서 질풍이 생긴 것이 아닌가? 질풍은 미풍을 운반하고 있는는 것이 아닌가?
지상을 걷는자여, 자신이 걷는 거리를 어떻게 측량한단 말인가? 산책을 하든 빠른 걸음으로 걷든, 그대들은 지구의 속도를 타고서 지구 자체가 돌고 있는 우주 공간으로 운행되는 것 같은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지구 역시 다른 존재에 의해 운반되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와 속도가 똑같은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 늦음은 빠름의 어머니. 빠름은 늦음을 운반하는 손.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점에서 볼 때 늦음과 빠름은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성장은 성장이고, 쇠퇴는 쇠퇴라고 말하는가? 왜 양자는 서로 적대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쇠퇴하지 않고서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 적이 있었던가? 성장하지 않고서 뭔가 쇠퇴한 적이 있었던가?
그대들은 끊임없이 쇠퇴함으로써 성장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끊임없이 성장함으로써 쇠퇴하는 것이 아닌가?
죽은 자는 산 자의 토양이 아니던가? 산 자는 죽은 자의 곡창(穀倉)이 아니던가?
만약 성장이 쇠퇴의 아이라면 쇠퇴는 성장의 아이. 만약 삶이 죽음의 어머니라면, 죽음은 삶의 어머니.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점에서 볼 때, 두 가지는 진실로 한 몸이다. 탄생이나 성장을 기뻐하는 것은 죽음이나 쇠퇴를 슬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다.
왜 가을만을 포도의 계절이라 말하는가? 나는 겨울에도 포도가 익고 있다고 말하겠다. 그때 포도는 아직 눈에 띄지 않게 고동치면서 잠깐 졸고 있는 수액(樹液) 에 불과하지만, 포도주를 꿈꾸고 있다. 봄 역시 포도의 계절. 그때 포도는 에머랄드빛 작은 구슬 같은 부드러운 포도송이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름 역시 포도의 계절. 그때 포도송이는 자연스럽게 커지면서 알맹이는 부풀어오르고, 그 뺨은 태양의 황금빛으로 물든다.
만약 각각의 계절이 자기 속에 다른 사계절을 품고 있다면 모든 계절은 진정 시간과 공간의 모든 점에서 볼 때 하나이다.
그렇다. 시간은 최상의 마술사. 인간은 최상의 단골손님.
인간은 쳇바퀴 속의 다람쥐를 꼭 닮았다. 시간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인간은 시간의 움직임에 포로가 되어 그 움직임에 실려가기 때문에, 어느덧 자기 자신이 그것을 움직이는 손임을 믿지 않게 되고, 빙빙 도는 시간을 멈추게 할 시간도 내지 못한다.
인간의 숫돌을 핥는 고양이와 똑같다. 고양이는 자기 혀에서 스며나온 피를 숫돌에서 스며나온 피라고 믿고서 핥는다. 인간은 시간의 테두리에서 흘린 자신의 피를 시간이 흘린 피라 여기고서 핥으며, 시간의 수레바퀴 살에 잡아뜯긴 자신의 살을 시간의 살이라고 믿고서 탐욕스레 먹는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허공을 돌고 있다. 감각기관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것 외에는 지각할 수 없다. 그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모든 것은 시간의 수레바퀴 테두리 안에 있다. 따라서 사물은 나타났다가는 계속 사라진다. 시간과 공간 속의 어떤 점에서 소멸한 것이 다른 점에서 나타난다. 어떤 자의 입장에서 계속 올라가는 것이 다른 자의 입장에서는 계속 내려가는 것이다. 어떤 자의 입장에서 낮인 것이 다른자의 입자에서는 밤이다. 그것은 모두 보는 자가 ‘언제 어디에’ 있는가에 달려있다.
벗들이여, 시간의 수레바퀴의 테두리 위에서 삶과 죽음의 길이 있다. 왜냐하면 원을 그리는 움직임은 결코 종말에 이르지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움직임은 모두 원을 그린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시간의 악순환에서 결코 해방될 수 없는 것일까?
아니다. 인간은 신의 성스러운 ‘자유’를 계승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돌고 있지만, 그 축은 영원히 정지해 있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축이 신이다. 만물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신의 주변을 돌고 있지만, 신은 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정지해 있다. 만물은 신의 ‘말씀’ 으로부터 생겨나지만, 신의 ‘말씀’ 은 신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축에서는 모두가 평안. 테두리에서는 모두가 흔들림. 그대들은 어느 쪽에 있고 싶은가?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시간의 테두리에서 빠져나와 축에 도달하라. 흔들림의 구토에서 벗어나라.
시간이 그대 주변을 돌게 내버려 두라. 그러나 그대 자신은 시간과 더불어 돌지 않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