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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행위로 열매 맺는 삶
1-12절, 비판과 기도에 대하여
[1-5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주께서는 비판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간혹 남을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주께서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일을 완전히 금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남의 잘못된 사상이나 행동을 판단하고 비판해야 그것을 따르지 않고 본받지 않을 수 있다. 주께서는 특히 교회의 질서와 거룩을 위해 교리적 오류나 윤리적 오류를 판단하고 비평할 책임을 교회 전체, 특히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주셨다. 그는 마태복음 18:18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교회의 권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6:17에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고 말했고, 또 디도서 3:10에서는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했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 4: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말했다.
주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비판의 행위 자체를 정죄하신 것이 아니고 그 비판이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비슷한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더욱이, 주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다. ‘티’는 작은 결점을 말하고 ‘들보’는 큰 결점을 말한다. 사람은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하거나 보아도 작게 여기고 남의 결점은 잘 보고 그것을 크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큰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작은 결점을 크게 여기고 그것을 비평하기 쉬운 것이다. 자신의 큰 결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작은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께서는 그런 사람을 ‘외식하는 자여’라고 부르셨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이 옳고 남이 틀렸고 자신이 선하고 남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 자신이 더 큰 결함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작은 결점을 비평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고 자신의 큰 결점을 찾아 고치려 해야 할 것이다.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과 진주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귀한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보며, 개와 돼지는 무지하고 악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고의로 하나님과 그의 종들과 그들이 전하는 진리를 거절하고 대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발로 밟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도자들에게도 해를 입힌다.
하나님의 진리 속에는 죄의 지적과 정죄, 즉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 형벌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깨닫는 자는 회개하며 구원의 진리를 감사하게 받을 것이지만, 그러나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기분 나쁜 말들에 불과할 것이다. 사도행전에 많이 기록된 대로, 사도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악한 자들은 그들을 비방하였고 다른 이들까지 선동하여 그들을 해치려 했다(행 13:45, 50; 14:5, 19; 19:9 등). 사람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함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침이 있어야 한다. 참된 구원은 회개, 즉 겸손히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동반한다.
[7-8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주께서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세상일도 이치가 비슷하겠지만, 이것은 기도에 대한 진리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은 더 간절해지는 기도를 나타낸다. 또 ‘그러면’이라는 말의 반복은 기도의 응답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향해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응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구하지 않으면 무엇을 받을 수 없다.
기도는 단지 우리가 어떤 필요와 부족을 느낄 때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의지할 때 더 잘할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에 비례한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고, 믿음이 적으면 조금 기도할 것이며, 믿음이 강하면 많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기도의 본을 보이셨다. 그는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또 밤에 기도하셨으며 때로는 밤새도록 기도하셨다.
주께서는 기도 응답을 강조하시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낙심치 않고 더욱 잘 기도할 수 있다. 기도 응답을 믿지 않는 자는 응답이 더디면 낙심할 수도 있겠으나, 응답을 믿는 자는 낙심치 않고 더욱 열심히 기도할 것이다.
[9-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주께서는 기도의 응답에 대해 한 비유로 설명하셨다. 사람은 무엇을 구하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거나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부모는 없다. 악한 인생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된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의 기도 응답을 믿을 뿐 아니라, 그가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을 믿어야 한다. 그는 좋으신 아버지이시며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온 세상을 섭리하시며 특히 참된 교회들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했다(롬 8:28).
[12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물론 인간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으나, 문맥이 보이는 바와 같이 기도의 교훈의 결론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려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위해 살고 시간과 돈과 힘을 드린다면, 그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돈과 힘을 드리지 못하고 드려도 부스러기를 조금 드리고 오히려 그의 미워하시는 것들, 즉 이 세상의 죄악되고 헛된 것들을 좋아하고 그런 것들을 위해 살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의 좋은 기도 응답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평소에 그에게 좋은 것을 드려야 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일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한 점들을 성찰하고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큰 결점이 있는데 남의 작은 결점을 지적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교리적, 윤리적 거룩함과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남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것도 매우 조심해야 한다. 또 남을 비평할 때에도 공개된 일이 아닌 경우는 먼저 당사자에게 개인적으로 말해야 하고, 또 공개된 일의 경우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신중하게, 덕스럽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구원의 거룩하고 복된 진리를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무지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냥 던지듯이 전하면 우리는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에게 하나님께서 계심과 사람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전하고 깨우치며 또 사람은 누구나 죄인임과 그 죄의 심각함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때 필요한 이런 준비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믿고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신자의 특권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으나,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며 또 기도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 읽기와 기도,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13-14절, 좁은 문, 좁은 길
[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문’은 구원의 방법을 가리키며, ‘길’은 구원받은 자의 생활방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구주로 믿어야 함을 말한다. 주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며 구원의 진리시요 영생이 되신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였다(딤전 2: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사도 베드로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증거했다(행 4:12).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또 우리는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성경 교훈만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는 고난의 길을 가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 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25).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고난이 예상된다. 그들은 고난을 각오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주께서는 심지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가족보다, 우리 자신보다 그를 더 사랑하고 따라야 한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후 그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며,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행 14:22). 또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디모데후서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했다(딤후 3:12).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삶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좁은 문이며 좁은 길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로 믿어야 하고 성경의 교훈만 따르고 어려운 희생과 고난도 각오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 그것은 다원주의의 문이다. 그것은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종교다원주의의 문이며, 모든 철학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포용하는 상대주의의 문이다. 그것은 세상 사랑, 돈 사랑, 육신의 쾌락 사랑도 포용한다. 그것은 기독교 안에도 들어와 있다. 천주교회는 오래 전부터 이방종교들과 세상의 풍습들을 포용하였고,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과 은사주의도 그런 경향을 가진다. 거기에는 오직 관용이라는 한 가지의 덕만 있고 성경적, 역사적 기독교 같은 배타주의는 악으로 간주되고 배척을 받는다.
그러나 그 넓은 문과 그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한다. 다원주의, 포용주의의 사상은 마귀의 사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배치된다. 그것은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로 하여금 회개치 못하게 만들며 그 죄 가운데 거하게 만든다. 요한계시록 18: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정신]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세상은 각종 더러운 정신들의 집결지이다. 교회들도 배교하며 다원주의적이고 포용주의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자들이 많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많은 종교인들이 그리로 가고 있고 또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사람들도 그리로 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참된 신자들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아니다.
넓은 문과 넓은 길과 대조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힘들어서 찾는 이들이 적다. 역사적, 성경적 기독교는 배타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천국 가는 길이시며 인생의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요 14:6). 또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가족보다, 또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마 10:37-38). 주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막 16:1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주를 세상에 주지 않으셨다(행 4:12).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딤전 2:5). 성경적 기독교는 배타주의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구주이시며 성경만 진리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은 우리의 주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절제하며 성경의 교훈에 복종하는 것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우리에게도 죄성과 죄의 습관이 남아있다. 우리에게는 항상 내면적 싸움이 있다.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고 절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오늘날같이 교회가 넓어져서 속화된 때에 옛신앙, 성경적 신앙, 보수신앙을 지키는 것은 좁은 길을 걷는 것이다. 많은 목사들과 교인들이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전통적, 정통적 교리들을 저버린 자들이 많다. 이런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시대적 풍조를 반대하고 옛길을 붙드는 것은 편협하거나 극단적이게 보이는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이 어렵고 외롭고 힘든 길일지라도 오직 성경의 교훈대로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이 길만이 영생의 길이다.
그러나 좁은 문을 찾고 좁은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고, 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하였다(고전 1:18, 22-24).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시는 자들만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이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따를 것이며 또 성경 교훈대로 바르게 살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며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성경만 믿고 성경 교훈대로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시대에 자유주의, 교회연합운동, 신복음주의, 은사주의로 가지 말아야 하고 오직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말씀의 바른 교훈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죄성과 연약성을 극복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인내하고 절제하며 영광의 천국만 바라보고 이 세상의 헛된 것들을 사랑치 말고 신구약성경의 가르침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정직하게 살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게,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영생의 길이다.
15-29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자이다. 이 일은 오늘날 목사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들, 거짓 목사들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전하는 자들, 즉 비진리를 전하고 올바르지 않은 말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 자기의 생각을 전하는 자들, 자기 자랑이 많은 자들, 세상적 수준의 생각과 도덕을 전하는 자들, 성경의 충실한 본문 해석 대신에 세상적인 이야기들, 허탄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자들, 성경 진리들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 바른 교회와 멀어지게 하는 자들, 바른 종들을 비방하고 그들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고후 12:16-17; 갈 4:17),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주께서는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중적이며 위선적이며 겉과 속이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려고 와 있는 사탄의 사자들이다. 그들은 겉만 보아서는 잘 모른다. 그들의 사상과 인격성을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들은 사심(私心)이 있고, 물질욕, 명예욕, 권세욕 등이 있다. 그런 자들은 교회 헌금을 불필요한 일들과 부당한 일들에 과다지출하고 헌금을 남용하고 교회 공금을 부당하게 취하고 헌금을 세상적인 사업들에 투자하고 교인들의 투자금을 떼어먹는다. 성도들은 이런 거짓 목사들을 분별하여 물리쳐야 한다.
[16-20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혀 불에 던지운다. 이와 같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 참 목사와 거짓 목사는 그의 행위로 분별할 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그의 외모의 훤칠함이나 유창한 말만 가지고 그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탄의 사자들도 그런 점들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의 종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은 그 행위들이다. 사람은 그의 행위로 판별된다. 그 행위란 그의 경건성과 도덕성의 행위를 가리킨다. 그의 행위가 경건한가, 깨끗한가, 의롭고 정직한가, 선한가, 진실한가? 이것이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새 생명은 단순히 말에 있지 않고 거룩한 인격과 삶에 있다.
하나님의 종들과 마귀의 종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백히 구별된다. 요한일서 3:10은,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거짓 목사들은 그 행위로 분별된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들이 찍혀 불에 던지우듯이, 불경건, 사욕(私慾), 불의, 악, 교만, 거짓을 추구하고 행하는 목사들은 천국에서 제외되고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참된 경건과 도덕성이 없는 자들은 참으로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던지울 것이다.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주여, 주여’ 하는 고백은 입술만의 고백일 수 있고 입에 발린 말에 불과할 수 있다. 진정한 고백은 마음의 고백이어야 하며, 그것은 행위로 나타나는 고백이다. 사람의 행위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마음먹기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거짓된 목사들은 입술로는 주님을 부르지만, 그들의 고백이 진실한 마음의 고백이 아니므로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헛된 고백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고백이다.
주께서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부자(父子) 관계이시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는 것이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선한 행위가 없는 입술만의 고백은 죽은 고백에 불과하다. 의롭고 선한 행위는 참된 믿음의 표시이다.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지만, 믿는 자는 반드시 의롭고 선한 행위들을 가져야 한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은 선한 행위가 있는 자이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의 증거가 된다. 사람이 행위로 천국 가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 없이 천국 가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반드시 인격과 행위의 변화로 나타난다. 입술의 신앙고백이 있어도 선한 행위가 없다면 그는 구원받은 자가 아닐 것이다. 그의 고백은 헛된 고백에 불과할 것이다(마 3:8-10). 사람의 행위는 마음의 표현이다. 회개한 자는 반드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못했으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 날은 마지막 심판의 날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중에는 거짓 선지자들, 즉 거짓 목사들이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열심으로 하셨듯이, 사탄도 하나님의 일 방해하기를 열심으로 행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일으켜 일하게 하셨듯이, 사탄도 그의 사자들을 일으켜 다양한 거짓된 운동들을 일으켰다. 거짓 목사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목사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심지어 귀신도 쫓아내고 많은 기적도 행하였다. 본문은 사탄도 그의 종들을 통해 기적들을 행할 것을 보인다.
그러나 거짓 목사들의 위선은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데서 드러났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도무지’라는 원어(우데포테)는 “내가 너희를 안 적이 없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그들이 기적을 행했던 행위들이 주님과 상관없이 행해졌음을 뜻한다. 거짓 목사들이 주님께 거절당한 까닭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위가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이다.
누구든지 악을 행하면서 구원받은 줄로 생각하고 마지막 심판대에서 주께 인정받을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악인을 구원하시지만, 그를 악에서 건져 선한 사람을 만드시는 것이지 악한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다. 행위는 사람의 구원을 판별할 수 있는 표가 된다. 아직도 악을 떠나지 않은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가 참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주 앞에 복종하고 말씀의 교훈대로 사는 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의롭고 선한 행실로 우리의 믿음의 진실함을 나타내어야 한다.
주께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마지막 심판대에서 버림받은 이유는 불법을 행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었고 천국과 영생과 상관없는 자들이었고 마귀와 상관된 자들이었고 지옥과 상관된 자들이었다.
[24-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주께서는 그의 산상보훈의 결론으로 행위에 대한 강조를 하신다. 계명의 실천이 중요하다. ‘누구든지’는 모든 제자들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 ‘나의 이 말’은 산상보훈 전체를 가리킨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 여기에 ‘집’은 사람의 인격과 삶을 가리킨다. 주의 말씀 순종의 행위는 그의 신앙 인격과 삶을 견고하게 만든다. 그런 자는 정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이다. 폭우나 폭풍은 우리가 세상에서 당하는 시험과 환난, 질병과 궁핍 등을 상징한다. 순종의 행위로 자기의 신앙을 견고케 한 자에게는 그 어떤 시험과 환난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고 또 이길 것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사람과 같다. 말씀 순종의 행위가 없는 자의 인격과 삶이라는 것은 겉모양은 살아 있으나 실상 죽은 것과 같다. 그가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교회생활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는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자와 같다. 이런 자의 집은 폭우와 폭풍이 올 때에 무너지며 그 무너짐이 심할 것이다. 행함이 없는 교인들은 시험과 환난이 닥쳐올 때 크게 흔들리고 넘어질 것이다. 참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28-29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왜냐하면 그의 가르치시는 것은 권세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기관들은 아마 많은 지식과 말이나 표현의 아름다움으로 가르쳤을 것이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로 하나님의 진리를 명료하고 은혜롭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오늘날 거짓 목사들을 가리킨다. 나무는 열매로 알듯이, 참 목사와 거짓 목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그의 인격과 행위이다. 그의 바른 교리 사상은 기본이며, 특히 그의 경건성과 도덕성 즉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지, 또 그가 죄를 멀리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자인지가 그가 참 목사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표가 된다. 그가 역사적 기독교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면 두말 할 것도 없이 거짓 목사이다. 또 그가 선하고 진실한 도덕성이 없다면 그는 확실히 거짓된 목사일 것이다.
둘째로, 사람의 정직하고 선한 행위는 그가 천국에 들어가는 자라는 한 증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입술만의 고백, 즉 입에 발린 형식적 고백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주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21절).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입술의 고백뿐 아니라, 마음의 고백이 필요하고, 그 마음의 고백은 반드시 정직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포함하지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살고 서로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셋째로, 주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이며 홍수가 나고 폭풍이 불어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자이며 홍수가 날 때 그 집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4-25절). 우리의 믿음은 주의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성장하고 견고해지며, 그러면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닥쳐와도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설 것이다. 이것이 지혜로운 참 성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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