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무한리필-불곡산의 봄을 보며>
산행일 : 2017.4.2
(남쪽에서 바라본 불곡산 전경:글쓴이 앨범)
펼쳐 든 우산에 후드득거리며 떨어지는 봄비가 제법 사납다. 며칠 내내 미세먼지로 인해 뿌옇던 공기를 씻겨주고 겨우내 메마른 대지를 촉촉히 적셔주는 고마운 단비다. 계절에 좀 둔감한 놈인지라 3월 다 가고 청명 한식이 돼야 봄을 느끼고 라이프스타일을 새로이 한다.(”젠장~개뿔도 없는 주제에 무슨 라이프 운운...ㅋㅋ” “뭐?!! 나라고 스따일 좀 찾으면 안되나?” “네, 많이 찾으세요~ ㅋㅋ” ) 그러고 보니 어제(4/4)가 청명淸明 오늘(4/5)이 한식寒食이다. 이 두 날이 양력으로 어떻게 되나 궁금했던 적이 있었는데 ‘청명淸明에 죽으나 한식寒食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재미있는 속담을 뜯어보다가 매년 하루 이틀 차이로 앞뒤로 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하튼 이즈음에 비가 한번 뿌려주고 풀빛이 짙게 파릇파릇해져야 비로소 겨울을 미련 없이 보낸다. 마침 ‘제2산악클럽’ 총무가 카페에 올려놓은 이수복 시인의 ‘봄비’ 첫 연에 마음이 잠시 머문다.’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 평소 마초의 이미지를 풍기지만 가끔 서정적인 감성을 드러내기도 하는 사내다.(술
마시고 엉클어지지만 않으면 좋으련만…쯧쯧^^) 그런가 하면 어느 TV앵커도 봄비 오는 날이라고 당나라 시인 두보의 ‘춘야희우春夜喜雨’를 소개한다. 봄날 밤에 가늘게 소리 없이 내리며 만물을 적시며 생명을 키워내는 그 비를 향해 두보는 ‘봄밤에 내리는 기쁨의 비’라고 찬양한다.
(사진 출처:카라 앨범)
한때는 주중에 햇빛이 쨍쨍하다가 주말만 되면 우중충하거나 비가 내려 야속한 하늘을 원망한 적이 많았는데 요새는 날씨 운이 따라 일요일에 쾌청한 공기 속에서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비 내리는 水曜日에 잠시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니 지난 일요일 따스한 봄볕에 걸어간 산길이 더 달콤하게 느껴진다. 개발로 끊어진 맥을 건너뛰고 시작한 우리들은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산보하듯 걸으면서 아파트 단지 사이로 길을 이어가고 넓은 차도를 건넌다. 흔적이 없어진 정맥을 더듬어 가는 행렬이 거지떼 같아 보였는지 초라한 민가의 개마저 우리에게 왕왕 짖어댄다. 길을 가면서도 ‘이 길이 정맥길이 맞나?’라고 의심을 품어도 보지만 원래부터 금을 그어놓은 게 아니니까 이 산과 저 산을 보면서 어떻게든 이어만 가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햇볕보다 그늘이 좋아지고 길섶에 싹들이 움트는 모습에서 봄의 기운을 완연하게 느낀다. 한 살 아래 옥자의 붉은 티셔츠에서도 봄은 오고 있다. 옥자, 불교신자인 그녀의 닉네임은 ‘윤대덕화’로 저 멀리 남쪽바다 섬처녀 출신인데 총각선생님 따라 서울로 왔는지 척박한 섬 생활이 싫어 육지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다소곳하면서 인품에 향기가 느껴지는 여성이다. 체격은 작지만 여태 산 타면서 흐트러지거나 지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며 후덕한 마음씨에서는 봄의 온기가 느껴진다.
도락산 가는 길 어느 묘지 옆 평지에서 한바탕 숭어회 잔치가 벌어진다. 닉 ‘나르샤’가 오래
전에 예고하여 준비한 메뉴인데 양도 많아 밥 대신 회로 배를 채운다. 양도 양이지만 제철 숭어가 적당하게 냉장 숙성된 탓에 식감도 좋아 입에서 사그락 사그락 씹히는 게 천하일미다. 정작 준비 제공한 주인공은
사정 상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대원들에게는 가히 잊지 못할 콸러티 있는 아침식사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자원봉사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래 좋은 날 잡아 멸치회로 한번 쥑여야지 ㅎㅎㅎ. 태정 선배께서 묻는다. “호산 아우, 다음에 내가 홍어 준비해올 건데 먹을 거야? 홍어 못 먹는다고 들었는데.” “형님, 먹겠습니다. 팀을 위해서라면.” 사실 난 삭힌 홍어는 냄새도 못 맡지만 대원들을 위해 가져오는 음식이라면 뭐든지 함께한다.(쿨~해 보이지만 실은 까탈스런 면도 있지 ㅋㅋㅋ) 예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마주한 사람에게 담배하냐고 물으니 ‘소셜스모커’라고 하기에 알아보니 평소에는 안 피우지만 상대방과 맞추기 위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 하더라. 못 먹는 홍어를 여러 사람과 어울려 먹으면 ‘소셜홍어’라고 해야하나ㅋㅋㅋ. 다 좋은데 삭힌 홍어 드시고 대중교통은 제발 타지 말아야 한다. 송장 섞는 그 냄새에 옆 사람들은 고문당하니까.
(사진 출처:은비지 앨범)
이날 여정이 짧아 양주의 명산 불곡산의 품에 안겨보려고 임꺽정봉을 거쳐 악어바위 능선으로 내려서는데 한북정맥 이어오는 코스 중에서 가장 많은 등산객과 마주쳐본다. 운악산 구간 때 약간 시끌벅적했지만 이날은 더 많은 아재 아줌마들이 아기자기한 바위산의 묘미를 즐기고 있다. 높지 않지만 산세와 조망이 빼어나고 긴장감을 주는 암릉이 줄지어 있어 산행의 재미를 만끽하게 하는 좋은 산이다. 저절로 생긴 바위 형상을 두고 흔히 동물의 생김새와 연관 지어 이름을 붙인다. 호랑이,곰,사자,독수리,코끼리,물개… 심지어 남근,여성까지 수많은 바위명이 존재하지만 내 기억으로 가장 이미지가 일치하는 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여기 불곡산 악어바위다. 비록 이번에는 한눈 팔다 놓쳤지만 누가 보더라도 악어 등짝의 무늬와 머리를 연상할 수 있다. 어떤 조각가가 일부러 만들었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또 한 군데는?(억수로 궁금하시죠 ㅎㅎㅎ) 에이~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송추 여성봉이다. 어떤 사람은 어디 어디에 있는 남근석이 진짜로 닮았다고 하는데 보는 사람의 취향과 관심에 따라 다르니까. 여성봉에 안 가보신 분들은 살짝 한번 가서 보고 느껴보기를 권한다.(특히 3월 초순 골에 쌓인 눈이 약간 녹아 물기가 촉촉히 흘러내릴 때 가면,아하~짝!짝!짝! (~점잖으신 분들께 질퍽거려 죄송~ㅋㅋㅋ))
(사진 출처:청노루 앨범)
내려와 뒤풀이로 들른 곳은 돼지고기와 술을 한정 없이 제공하는 무한리필 음식점이다. 삼겹살,목살,항정살,주물럭갈비에 막걸리,소주까지 1인당12,500원에 마음껏 먹어도 된다? 양이 많으면 질이 떨어진다는 만고의 진리를 터득하고 있기에 사실 ‘콸러티’(요즘 정맥길
대원들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는지 이 말을 무척이나 많이 쓰네요^^)는 기대 않고 먹었는데 생각보다 고기
맛이 있었다. 한때 우리와 호남정맥을 같이 걸었고 이 지역 관청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상도’가 추천했다고 한다. 원래그런 말이 있다. 타지에 가서 맛집 찾으려면 인터넷보다는 동네 택시기사나 면/읍사무소에 물어보고 가면 후회 않는단다. 무한리필이라는 상술에 이겨보려 하지만 널려 있는 음식 앞에서는 식탐도 없어지고 먹을수록 만족도도 떨어지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용하여 심리학 경제학 차원에서 식당주인에게 패하는
게임이다.
(사진 출처:청노루 앨범)
계절이 바뀌면서 어김없이 봄은 또 왔다. 우리의 생명은유한하지만 자연은 한없이 리필되고 봄도 꽃도 매년 무한리필이 된다. 음식점에 리필되는 고기는 금방 신물이나는데 매년 오는 봄의 향연에는 식상하지 않는다. 아마도 자연에 반응하는 감정의 힘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으니까 그러리라 여겨진다. 언젠가 이 감정이 고갈되면 저 자연의 아름다움에도 무감각해지겠지. 감정이나 열정이 식은 상태에서 육체적 건강은 껍데기일 뿐이고 돈도 무용지물이다. 느낌이 살아 있으면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고 막걸리 한잔하면서도 인생담론을 펼칠 수 있다. 내 인생에 돈도 아니고 건강도 아닌 이런 감정과 열정이 계속 리필되기를 소망해본다. 봄을 탄다고 해야 하나 햇빛 따스한 봄날에는 가슴 그윽이 봄향 풍기는 아낙 손 잡고 진달래 불타는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 그런 기분을 매년 봄에 느끼고 싶다.
2017. 4.5
虎 山
첫댓글 저도 돈도 아니고 건강도 아닌 무한한 열정이 계속되길 소망해 봅니다...열정이 식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겠지요?? ㅎㅎ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맞아요 열정이 식으면 모든 것에 의욕이 떨어져서 건강관리든 산이든 다 싫어져요~
호산아우님 글에 잠시취하고 그날의 산행길을 눈으로 그려보네요 항상 무궁무진한 글 너무 소중히 잘 읽고 내려갑니다
항상 태정 형님의 열정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