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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亂 일등공신 元均<3>-역사가 외면한 영웅
*조선왕조실록과 ‘수정실록’*아호 淸愉, 本誌 會長
조선왕조는 개국 초부터 역사의 기록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사관제도를 엄격하게 시행했다. 사관들은 조정에서 행해진 언동(言動)은 물론 나라 안팎에서 벌어진 사실들을 낱낱이 기록하였는데, 이를 ‘사초(史草)’라 한다.
실록의 근거가 되는 사초는 당대의 군(君)․신(臣) 그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비밀리에 보관해 공정성이 지켜지도록 하였다. 임금의 재위 기간에 기록된 사초들은 임금이 승하하면 실록청을 개설하여 편찬하게 된다. 그리고 편찬 실록이 끝나면 누구의 기록인지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일정한 곳에서 물에 씻어 버리는 세초(洗草)를 행하였다. 이는 사관들이 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실록 편찬의 과정은 「선조실록」 편찬시에도 결코 변함없는 원칙이었다.
임진․정유왜란이 끝나고 45년이 흐른 1643년(인조 21년)에 대제학으로 있던 이식(李植:덕수 이씨. 이순신과 같은 일족)이 「선조실록」은 수정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 내용인즉 “역사는 일대의 전장(典章)이며 만세의 거울입니다. …나라에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며, 역사에 공정하지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고 하였다. 무릇 나라는 멸망시킬 수 있어도 역사는 소멸시킬 수 없는 것이 고금(古今)의 지론(至論)이라면서 ‘선조수정실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가운데 결국 이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이식은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선조실록」의 내용을 살펴보고는 몇 가지 부문을 뽑아 직접 수정실록 편찬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역사적인 기록인 사초(史草)를 바탕삼지 않고 대신 비문(碑文), 행장기(行狀記), 야사(野史), 잡기(雜記) 등을 수집하여 ‘수정실록’을 편찬했다. 이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편자인 이식의 문벌인 이이(율곡), 이순신(충무공), 그리고 이완(李莞:인조 때 무관)에 대한 기록들이 많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문벌 중심의 기록이라는 점보다도 수정 과정에서 이순신과 전공을 앞다투었던 원균에 관한 사실을 상당부문 왜곡해 기록했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도망만 다닌 겁장으로, 이후에는 이순신을 모함한 인물로 묘사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전사하자 그동안의 공적까지 깎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과연 원균은 이식의 주장과 같이 그러하였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가 거느린 전함과 전구를 모두 바다에 가라앉히고, 휘하에 있는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킨 다음에 홀로 옥포만호 이운용, 영등포만호 우치적 등과 더불어 남해현 바다 앞에서 밤을 지새운 다음 뭍으로 올라와 적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그때 이운용이 이에 반대하면서 “통제사께서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았으니 그 대세로 보아 이곳 임지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이곳은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니 이곳을 잃어버리면 호남이 위험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수병들이 비록 흩어졌다고는 하나 다시 모을 수도 있으며, 또한 호남의 수군에게 지원을 청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매, 원균이 그의 계책에 따르기로 하고 율포만호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에 실린 내용). 이 기록은 후세에까지 원균을 무능한 겁장(怯將)으로 인식하게 만든 ‘수정실록’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초기에 원균은 정말 이 기록처럼 수군을 해산시키고 도망하기에 급급했던 것일까?
다른 기록들을 살피기에 앞서 앞의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그 내용의 모순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원균이 전함과 전구를 바다에 빠뜨리고 군을 해산시킨 뒤 도망가려 하자 이운용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며 말렸다는 내용이다. 이운용은 선조수정실록에서도 용장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러한 그가 원균이 전함을 빠뜨리고 수군을 해산시킨 후에야 싸울 것을 권했다는 것은 실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원균이 수군 1만여 명을 해산시켰다는 내용도 의심스럽다. 당시 조선 수군의 병력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1592년 임진년 당시 가장 많은 수군이 집결한 한산도 해전에서 이순신이 전함 40척, 이억기가 25척, 원균이 7척이었다고 하며 수군 병력이 모두 6천 명 정도였다. 이를 전함의 비율로 나눠 볼 때 이순신이 3천4백 명, 이억기가 2천 명, 원균이 6백 명 정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 또한 이날 해전은 임란 초기의 전투로 피해가 거의 없었던 조선 수군의 총집결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수사 한 사람의 휘하에는 5천 명 미만의 병력이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로 미뤄볼 때 수정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원균이 1만여 명의 병력을 해산시켰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내용이다.
원균은 이순신․이억기와 함께 옥포해전을 치를 당시 주장(主將)이 되어 공격을 했고 당시 조정에서도 그 공을 인정했다(선조실록 권26, 5월). 당포성 전경
만약 수정실록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전함을 빠트리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인이 어떻게 삼도수군의 연합전에서 주장을 맡을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정황으로 미뤄 볼 때 수정실록에 기록된 앞의 내용들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다. 수정실록에 기록된 앞의 내용은 선조실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다. 반면 4월 14일부터 5월 7일까지 20여 일 동안 원균이 이순신과 조정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나름대로 군사를 이끌고 적과 교전해 전과를 올렸다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원균, 정말 이순신을 모함했나?
원균과 이순신이 갈등을 빚게 된 것은 옥포해전 때부터다. 이순신은 원균의 지원요청에 뒤늦게 응하였는데, 승전을 올린 후 함께 올리기로 한 장계를 이순신이 단독으로 올려 원균과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선조실록 권84, 이에 대해서는 수정실록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은 포상에서도 이순신에 미치지 못하자 점점 갈등이 커져 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는 쟁공(爭公)을 다투는 과정에서 생긴 반목이었을 뿐, 악의적인 모함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서 더욱더 화합하지 못하고 갈등하자 조정에서는 급기야 두 장군에게 책임을 묻기에 이른다.
이 즈음의 상황을 수정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충청절도사(병사)로 전임시켰다. 원균이 이순신의 차장(次將)이 된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그의 지휘를 받지 않으니 이순신은 여러 번에 걸쳐 장계를 올려 사면을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도원수를 시켜서 여러 차례 원균의 공과 죄를 조사하도록 하니 원균은 더욱 분하게 여겨 험한 말을 많이 했다.’ 사천 선진리 성
이순신 또한 원균의 공이 없음을 장계하였는데 그중 한 가지는 사실과 다른 것도 있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원균의 편이 많아서 드디어 둘 모두가 탄핵되었다. 임금이 다시 비변사에 영을 내려 바로잡도록 하였는데, 그 결과 다만 원균을 육장(陸將)으로 전임만 시키고 이순신에게는 그 책임을 물어 앞으로 전공을 세워서 그 죄를 갚도록 하였다.
‘원균은 서울 가까운 곳에 부임하여 조정의 권력자들과 사귀면서 날마다 이순신을 헐뜯으니 이순신은 외로운 처지가 되어 위태롭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미워하고 원균을 추켜세우니 명(名)과 실(實)이 뒤바뀌어졌다(선조수정실록 27년 12월).’
이 내용을 보면 마치 원균은 충청병사로 영전되어 가고 이순신만 죄를 받은 충렬사(부산시 동래구 안락동)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미 종2품 가선대부로 있던 원균에게는 영전이 아니었고 오히려 전방에서 후방으로 밀려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수정실록의 내용처럼 원균이 권력자들과 모여 이순신을 모함했다면 오히려 이순신이 전출을 당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앞의 기록을 보면 오히려 이순신이 원균을 모함한 내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조실록 권85의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원균이 조정을 속여 어린 아들을 전공에 올렸다고 모함했는데 그때 원균의 아들은 이미 18세였다고 한다. 선조실록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상(上:선조임금)께서 답하여 가로되 “나의 생각으로는 이순신의 죄가 원균보다 더 심하다”(선조실록 27. 12. 1).’
이에 비면사에서 대답했다.
‘통제사 이순신이 이제 임금을 속인 죄가 있으니 마땅히 중한 벌로 다스려야 하오나 주사(舟師)가 할 일이 날로 급하므로 이럴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이득이 되는 계책이 아니오니 문책을 하되 공을 세워 그 죄를 갚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선조실록 27. 12. 1).’
이처럼 이순신의 잘못이 명백한 상황인데도 전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 조정의 조치는 원균에게 유리하기보다는 이순신에게 유리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유년에 이순신이 투옥되고 원균이 경상우수사 겸 통제사로 임명되어 그 빈자리를 대신하자 이는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해서 일어난 것처럼 원릉군(原陵君) 사우(祠宇)
수정실록에서는 적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이 투옥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가등청정을 잡으라는 소서행장의 정보에 의해 조정에서 내린 조치에 따르지 않고 지체하다 그 기회를 놓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체찰사 이원익이 왜군 진영에 방화한 것을 본인이 한 것처럼 거짓으로 장계를 올린 것이 또한 문제가 되었으며, 수정실록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순신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쫓아 싸우지 않고 나라를 등진 죄, 남의 공을 빼앗고 남을 모함한 죄, 방자하고 기탄 없는 죄(선조실록 30. 3. 13)’로 투옥된 것이니 원균 개인의 모함으로 그리 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칠천량 패전은 원균 장군 탓?
선조수정실록에는 칠천량 해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적은 우리 수군을 급습해서 깨트렸다. 통제사 원균은 패사(敗死)하고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했다. 또한 경상 우수사 배설은 달아나서 죽임을 면했다. 처음에 원균이 한산 통제영에 이르러 이순신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모두 바꿔 버렸고, 그 형벌이 법도가 없어 모든 장병들이 그로부터 떠나 버렸다. 권율은 원균이 적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면서 싸움에 나가지 않는다 하여 그를 불러 매를 쳤다. 원균은 분한 마음을 품고 돌아와서 드디어 주사를 이끌고 나아가 절영도에 이르러 제군을 독촉하여 전진했다. (중략) 원균이 배에서 내렸으나 끝내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칠천량에서의 패배는 모두 원균의 탓으로 여겨지는데 과연 그러했을까?
먼저 장병들이 원균을 따르지 않는 이유를, 원균이 이순신이 이미 만들어 놓은 제도를 바꾸면서 법도가 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들의 수장인 이순신과 오랜 쟁공으로 반목하던 원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이순신의 수하들이 따르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다음은 원균이 적을 두려워하여 싸우지 않기에 권율이 매를 쳤다는 내용이다. 당시 원균이 머뭇거린 이유는 주변 정세로 보았을 때, 수륙병진이 아니고서는 적을 물리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닐까.
당시 원균은 이런 정황을 조정에 올렸는데 비변사에서도 그 타당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내용이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선조실록, 권87). 따라서 원균이 적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렸다는 것은 맞지 않는 내용이라 하겠다.
이처럼 원균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강압에 못 이겨 해전을 치른 것이니, 모든 잘못을 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문제였다.
후에 선조대왕은 “원균은 반드시 패전할 것을 알면서도 할 수 없이 진을 떠나 적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괴멸당하고 순국하였다. 원균은 용맹함이 삼군에 으뜸일 뿐 아니라 그의 지략이 또한 출중했다. 나는 일찍이 원균이 지용(智勇)을 겸비한 장수로 그 운명이 때를 잘못 만나 공은 이지러지고 결국 패전하게 되어, 그의 마음과 행적이 정당하게 밝혀지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는 바이다. 오늘날 공(功)을 의논하는 마당에 그를 2등에 두려 하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리오. 원균의 눈이 또한 지하에서 감겨지지 못할 것이로다(선조실록 권163).”라고 했다.
이는 패전의 책임이 무리하게 공격을 명령한 조정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제반 사실들로 미뤄볼 때 칠천량 패전의 책임이 전적으로 원균의 탓이었다는 주장은 과장됐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원균 장군에 대한 관련 기록
「선조실록」을 보면-「선조실록」 권26:선조 25년 5월 10(기사)일~「선조실록」 권175:선조 37년 6월 25(갑진)일까지-원균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으나 실록의 분량이 많아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훌륭한 장군의 업적을 놓고 언쟁하기보다는 명확한 기록 부분을 발췌해 살펴본다.
필자는 이제 조정(朝廷)과 대신(臺臣), 그리고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에 대해 비교한 사료를 바탕으로 냉철하게 나열해 보고자 한다. 우선 각종 교과서에 집필된 내용 중 이순신의 하옥이 원균의 모함으로 이뤄졌다는 부분이다.
원균 장군의 외동아들인 원사웅(元士雄)은 정실 소생으로 선조 을해(乙亥)에 태어났다(1575년).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에 18세였던 원사웅은 궁마에 능했으며, 아버지 원균을 따라 해전에 참전하여 용맹을 떨쳤다. 원균 장군은 해전에서 왜적으로부터 노획한 병기와 승전 소식을 아들인 사웅으로 하여금 선조임금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이를 접한 선조는 매우 기뻐하며 승정원에 이르기를 “원균이 여러 번 병기를 올리고 이번에 또 대소(大小) 조총을 보내 70여 자루에 이르니 이로 보아 그 전공을 알 수 있다. 벼슬을 올려줌이 마땅하기에 그것을 가져온 원사웅에게 직을 제수하라.” 하였다(선조실록 27년 4월). 그리하여 원사웅은 직을 제수받고 상을 받았다.
이를 두고 이순신 장군은 “원균이 12살 남짓한 측실 소생(서자)을 군공에 참여케 하여 상을 받게 했다”고 하였으나 왕명(王命)으로 이를 조사한 이덕형의 보고서에 의해 이순신의 모함이었음이 밝혀졌다. 한음 이덕형의 보고서에 의해 누명이 벗겨진 것이 선조실록에는 선조 30년 2월 4일의 일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원사웅이 전사한 때는 선조 30년 7월(당시 23세)이었으므로 그가 18세에 전공으로 상을 받고, 23세로 전사하기 몇 달 전까지 이러한 모함성 논란은 계속된 것이며, 원균 장군의 가슴에도 결코 지울 수 없는 응어리가 맺히게 된 것이다.-이 문제와 관련해 선조실록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擠陷:악의적으로 남을 못된 곳으로 밀어 넣어 해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이순신 장군이 투옥된 이유가 원균 장군의 모함 때문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통설이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 비와 같이 이순신 장군이 원균 장군을 전공이나 아들에 대해서 모함했다는 기록은 정사(正史)인 선조실록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반대로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이식이 수정자(字)를 더해 기록한 선조수정실록에는 ‘원균이 권세가와 사귀면서 날로 순신을 헐뜯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음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순신이 원균을 속이고 밤을 새워 임금에게 올린 단독 장계의 내용에 관해, 그리고 그의 아들에 대한 모함(제함) 등에 대해 원균 장군은 조정․요로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사실 해명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을 것이다. 이는 자기 방어적 행위로서 정당한 주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데 이를 두고 어찌 모함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모함이란 무엇인가? 없는 사실을 꾸며 타인을 수렁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해명과 모함은 그 본의부터 다른 것이다.
여기서 이순신 장군이 투옥된 이유를 소상히 밝힌다면 원균 장군의 모함에 의한 것인지 스스로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순신, 무슨 죄목으로 투옥됐나
필자는 이순신 장군이 투옥된 죄목을 정사인 「선조실록」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하며, 이는 그의 치부를 드러내고자 함이 아니라, 다만 원균 장군의 모함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히고자 함에 그 뜻이 있다.
이순신이 하옥된 죄명은 欺罔朝廷無君之罪(기망조정무군지죄: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縱賊不討負國之罪(종적불토부국지죄: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奪人之功陷人於罪(탈인지공함인어죄: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無罪縱恣無忌憚之罪(무죄종자무기탄지죄: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이렇게 네 가지다. 이처럼 그의 죄명 가운데 어느 것도 원균 장군의 모함에 따른 것은 없다. 다시 그 죄목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欺罔朝廷無君之罪(기망조정무군지죄: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이다. 이는 부산 왜영의 소화사건에 따른 허위보고를 지칭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그 줄거리를 밝힌 바 있지만 좀더 상세히 내용을 들춰 본다.
도제찰사 이원익이 군관 정희운에게 영을 내렸고, 이에 정희운은 그의 심복인 허수석과 밀모를 하여 부산 왜놈들의 군영을 불살라 버린 통쾌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이순신 장군의 군관이 보고 들어 곧 보고했다. 보고를 받고 이순신은 이 사건을 스스로의 공인 것처럼 허위 장계를 임금에게 올린 것이다.
선조실록 30년 1월 1일자 그의 장계를 보면 ‘신(臣)의 제장 중에는 계략에 능하고 담력 있으며 용맹한 사람과 군관으로서 활을 잘 쓰고 용맹한 자가 있어 그들을 항상 진중(陣中)에 머무르게 하여 아침저녁으로 계책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리하여 지난달 12일 밤에 김난서 등과의 약속에 따라 대기하였다가 마침 크게 불어오는 서북풍을 틈타서 왜영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화광(火光)은 크게 번져 적의 가옥 1천 호와 화약고, 창고 두 채, 군기 등 군량미 2만6천 석이 쌓여 있던 창고와 집들이 일시에 타 버렸으며, 또한 왜선 20여 척이 연소되고 왜인 34명이 타 죽었습니다. (중략) 부산의 왜적들을 비록 다 태우지는 못하였으나 적군의 간담을 꺾어 버리게 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때 부산에 있던 자들에 의하면 적들이 “저희 나라에 있을 때에는 지진에 망하더니 여기에 와서는 화재에 망한다.”고 하였다 합니다. 안위와 김난서․신명학 등이 성심으로 힘을 기울여 마침내 성사를 하였으니 극히 가상타 할 것이며, 서두에도 밝힌 바와 같이 비밀히 꾀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니오라 각별히 논상하여 앞날을 장려케 하소서.’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 우의정이며 도제찰사인 이원익의 막하에 선전관으로 가 있던 이조좌랑 김신국으로부터 그 사건에 대하여 전혀 다른 장계가 조정에 올라왔다. 같은 날짜로 기록된 선조실록에 의하면 ‘지난날 부산 적군(왜영)의 소화 사건은 도제찰사 이원익이 군관 정희운에 영을 내려 희운의 심복인 허수석과 밀모를 하여 한 일이며, 그때 마침 이순신의 관군이 불타는 날에 와서 보고 돌아가서는 순신에게 보고를 하였더니 그 보고를 받은 순신이 스스로의 공이라 장계를 올린 것입니다. 이처럼 순신은 그간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그같은 장계를 올린 것입니다(선조실록 30.1.1).’라고 임금에게 보고 된 것이다.
이렇듯 부산 왜영의 방화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선조는 크게 노하였다. 그리하여 선조 30년 1월 27일에 어전 중신회의가 열리고, 그간 미루어 오던 이순신에 대한 모든 문제가 다뤄지게 된 것이다. 선조는 이 허위보고된 사건을 놓고 크게 노하면서 “비록 가등청정의 목을 베어 와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그날 중신 회의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했다고 한다. 특히 선조는 그 비망기에서 “신하로서 임금을 속이는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며 용서치 못한다(人臣欺罔者 必誅不赦).”라 하였다.
둘째, ‘縱賊不討負國之罪(종적불토부국지죄: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이다. 이 죄목은 조정의 명을 어기고 가등청정을 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조 27년 10월에 제2차 장문포 해전이 있은 이후부터는 해상에서의 전투가 약 2년 동안 소강상태였으며, 왜적들은 여러 번의 해전에서 계속 패하였으므로 감히 나와 싸우지 못하고 부산 등지에서 집결하여 전력소모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한편, 양국은 화의를 모색하는 중이었다. 이때에 소서행장은 첩자 요시다를 시켜 1597년 정유(丁酉)에 가등청정이 부산 앞바다로 건너가니 조선수군은 그를 사로잡으라고 경상병사 김응서에게 귀띔을 해 주었다. 두 나라의 화의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은 오직 강경론자인 가등청정 때문이며 이로 인하여 소서행장은 가등청정을 매우 미워하고 있었다. 이제 가등청정이 한 척의 배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생포하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보고를 김응서로부터 받은 조정에서는 위유사(慰諭使)인 황신을 통제사인 이순신에게 보내서 비밀히 명을 내려 출병해 가등청정을 잡으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적의 첩자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고, 둘째, 많은 병선을 움직여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면 적의 눈에 곧 띌 것이며, 셋째, 나갔다가 만약 적의 다른 간계 빠진다면 도리어 큰 해를 당할 것이고, 넷째, 부산 앞바다에는 병선이 쉴 만한 곳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러한 그의 판단은 무장으로서 신중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은 가등청정을 놓치고 말았으며, 이를 제보한 소서행장은 “손바닥을 보이는 것과 같이 가르쳐 주어도 능히 하지 못하니 참으로 천하에 용렬한 나라로다. 조선이 하는 일이 매사가 그 모양이다.”라고 조롱을 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하늘이 준 좋은 기회를 놓쳤다 하여 이순신 장군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선조 30년 1월 12일자 조정공론에서 선조는 “이제는 어찌 순신에게 청정의 머리를 잘라 올 수 있기를 기대하겠는가? 그가 다만 배를 거느리고 위세라도 부리면서 바다기슭에라도 돌아다니면 좋으련만 종시 성의조차 보이지 아니하니 참으로 가탄할 일이로다. (한참이나 탄식 끝에 한숨을 지으며) 이제 이 나라는 그만이야. 어찌하면 좋을고. 어찌하면 좋을고….” 하며 장탄식을 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이 사건이 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가 되었다. 이를 일명 요시다의 반간계(反間計) 사건이라고도 한다.
셋째, ‘奪人之功陷人於罪(탈인지공함인어죄: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이다.
이는 앞에서도 자세히 언급한 내용과 같이 옥포 등 초기 해전에서의 승전 소식을 이순신이 원균을 속이고 단독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의 공을 가로챘다는 내용이다. 다시 간추려 보면 ‘이순신은 임진년에 경사우수사 원균과 더불어 거제 해양 중에서 적선 50여 척을 무찔렀다. …그때 해전의 작전 계획과 선봉은 모두 원균이 한 것이었다. 대첩을 거둔 뒤 원균은 연명으로 장계코자 이순신에게 상의하였더니 순신이 서서히 장계하자 합의해 놓고 밤을 틈타 형조에 보고하였으되 전공을 모두 스스로가 세운 양 과장되게 하고 원균은 공이 없다고 하였다(선조실록 36. 4. 21).’
또한 ‘원균이 사로잡은 적장의 누선이 오히려 이순신에게 빼앗겼다(其所獲敵魁樓船 反爲舞臣所奪焉).’(선조실록 36. 4. 21)는 기록도 있다. 이것이 남의 공을 가로챈 죄, 탄인지공(奪人之功)이다. 남을 모함한 죄란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원균의 아들 원사웅은 정실 소생으로 18세 때 군공을 세워 상을 받고 23세 때 전사하였으나, 이순신은 원균이 12살 난 어린 소실의 자식을 군공에 붙여 상을 받게 하였다고 보고한다. 이것이 이덕형의 현지조사로 결국 모함으로 드러난 사건을 말한다. 바로 함인어죄(陷人於罪)를 말함이다.
넷째, ‘無罪縱恣無忌憚之罪(무죄종자무기탄지죄: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는 어떠한가?
선조 26년 7월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고 다음해인 27년 12월에 원균이 충청병사(병마절도사)로 전임되었다. 용맹스런 원균 장군이 떠나고 또한 항상 이순신 장군에게 독설을 해 오던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한 뒤부터 이순신 장군은 몇 해 동안 해전을 하지 않았다. 왜군도 전력 소모를 하지 않으려고 깊숙이 틀어박혀 소강상태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도원수나 제찰사를 통해서 적을 치라는 명을 수시로 하달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선조 임금은 그를 대신해서 세자인 광해군을 남방에 파견하여 명을 전달하라 했다. 세자는 부왕의 명을 받들고 전라도까지 내려가서 수차례에 걸쳐 이순신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세자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아니하였고, 일이 이에 이르자 선조는 크게 노하게 된다(선조실록 29년 6. 26). 이는 당시의 법도를 보아 지엄한 왕명(王命)을 거역했다는 일이었으며, 왕권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선조는 크게 노하고 대신들도 격노하는 등 조정은 온통 이순신의 탄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순신을 비호하고 감싸던 유성용(당초 이순신을 천거한 인물)까지도 그를 변호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결국 앞의 네 가지 죄명이 이순신에게 떨어지고 마침내 하옥되니 누구의 잘못도 아닌 스스로의 잘못인 셈이다.
결국 위의 네 가지 죄명을 두고 원균 장군과 결부시켜 모함 운운한다는 것은 결코 타당한 논리라 할 수 없는 적반하장(賊反荷杖)이었다.
이로써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의 관계는 그 매듭이 서서히 풀리고 또한 바로된 역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명확하게 밝혀졌다고 사료된다.
다만, 두 분의 죽음에 대해서는 오늘날 많은 설들이 분분하다. 원균 장군은 왜놈들이 겁이 나서 도망가다가 적의 칼에 살해됐다고 하고, 이순신 장군은 적의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것이 전쟁이 끝나면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결국 문책에 시달려 죽음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 두려워 적탄에 맞은 것처럼 꾸민 자작극이란 주장도 대두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오직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들과 싸우시다 장렬히 전사하신 분들인데, 후세를 사는 우리들이 그 죽음을 놓고 진부(眞否)를 논하기에는 너무 염치 없는 짓이 아니지 않은가? 오직 사가(史家)들의 진솔한 기록에 맡기고 다만 여기서는 이식(李植:덕수 이씨)이 쓴 ‘선조수정실록’에서 그가 이순신 장군을 위해 문자를 희롱하는 편벽한 소견으로 원균 장군을 여지없이 공박하였다는 점만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임진․정유왜란이 종식된 지 무려 45년이 흐른 뒤인 인조(仁祖) 21년(1643년)에 선조실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대제학으로 있던 이식은 수정실록을 편찬해야 한다고 상소했고, 끝내 당시 집권세력(서인)을 등에 업고 그 주장을 관철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개국된 이후부터 엄격히 제도화되어 오던 사초에 근거한 역사편찬제도가 역사상 처음으로 사초에 의하지 아니한 수정을 감행했던 것이다. 당시 임금조차 볼 수 없었던 왕조실록을 이식은 개인적 편견을 더해 ‘수정실록’으로 편찬했다.
왕조실록이 편찬되면 강화의 마니산, 무주의 적상산, 봉화의 태백산, 강릉의 오대산 등지에 설치되어 있는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길이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그 실록 뒤에 더해 있는 ‘선조수정실록’은 그 말미에 뒷날을 위하여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음인지 이식의 상소문을 그대로 게재해 놓는 한편, 그 편찬이 이식의 주관으로 이뤄진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영의정 김류에게 책임을 맡겼으나 실상은 이식이 이를 주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수정실록와 모든 책임은 이식에게 있다는 명확한 증거인 것이다.
국가의 위급함을 맞아 몸으로 거제 해양을 지켜냈고 급기야 장군의 아들인 사웅과 함께 전사를 하여 그 가문이 몰락해 버린 원균 장군. 6대 양자로 이어 가는 그 영체된 가문에서 일등공신이면서도 오늘날 그분에게는 잔인하게도 겁장, 약장, 심지어 역적으로까지 몰아붙이는 일련의 작태들은 과연 온당한 소행이며, 이것이 또한 사필(史筆)인가 무필(誣筆)인가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 없다. (‘壬亂 일등공신 元均’ 기행은 3회로 끝맺는다-편집자 주)
이런 글이 올라왔지 뭡니까
8번에 걸쳐 댓글을 올렸고 그것을 복사해서 짜집기했더니 공지사항에 넣은 글이 정리가 안되었더라구요!
회원여러분들도 반박댓글 많이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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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순신 장군은 한점 부끄럼없이 살다 가신분이다.
지금와서 욕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