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알바트로스 합평작(2017년 11월)

[홍억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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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하는 수필동인
알바트로스

  [ 11-12월 행사 일정 ]
23일 제3회 월례 홥평
12/14 부울경포대 행사
 

알바트로스
제3회 정기 합평회 _ 2017년 11월 23일(목)

 1. 니들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 변미순 –담당 김영희
 2. 마지막 배웅 /이시언 – 담당 김경애
 3. 알바트로스(Albatros) / 이미란 담당 정경자
 4. 현을 조율하다/엄옥례 – 노아영
 5. 펭귄의 선택 / 안연미 - 공도현
 6. 구급약 상자 / 서해숙 -이향수

1. 니들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 변미순
 
어느 식물원에 다육식물, 선인장으로 가득 메워진 곳을 관람하던 중이었다. 식물원 내 다육식물중 잎이 굵고 큰 용설란과 줄기가 대나무처럼 긴 호로죽에 누가 낙서를 해 두었다. 철수♡영희, 미순아 영원히 사랑한다 등등의 글이 칼로 새겨져 있었다.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졌고, 쉽게 흥분하는 나는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질렀다. “니들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남녀가 만나 호르몬 작용으로 인해 그 사랑이 아무리 깊고 뜨겁다고해도 그렇지 당췌 어떤 생각으로 이런 호작질을 하는가. 살아있는 식물에 칼을 드리대어 식물의 몸에 생채기를 내 가면서 지들 이름을 새겨놓고 싶은가. 나의 전공이 원예학이다보니 식물에 장난질 한 것에 잘 흥분하는 편이다. 심한 욕설을 퍼붓고 이성을 잃은 듯 씩씩거리고 있으면 과민하다고도 하고, 또는 늙은이 잔소리라고 하는데 정말 내가 심하게 반응하는 것인가? 심지어 천연기념물, 수백년된 고택의 기둥, 숲 속 정령이다 싶은 고목들에게도 호작질하는 작태는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있는데도 잔소리하지 말라는 것인가. 얼마전 만취상태로 경주 첨성대에 올라간 여대생에게도 그 잘못을 묻지 못한다는 것인가.
서울 남산 꼭대기에 자물쇠에 이름을 적고 자물쇠를 쇠기둥에 채워놓고 열쇠는 멀리 던져버리는 행사를 한다. 남산의 꼭대기 뿐만 아니라 어느 관광지를 가도 정상에는 젊은 청춘들의 사랑의 맹세가 판을 친다. 현란하고 무거운 자물쇠들이 모여 그 또한 장관처럼 연출이 되고 또 더 매달아 보라고 쇠기둥을 만들어 주기까지 한다. 버려진 엄청난 열쇠의 양은 산 아래 어느 기슭에서 남의 발에, 짐승들의 발에 짓밟히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가 보다. 그 수많은 자물쇠 연인들 중 몇 쌍이 인연으로 이어져 백년해로하고 있을까 묻고 싶다. 이 행동이 잘못이라기 보다는 큰 의미없는 유행에 온 나라 청소년이 꼭 해야하는 일처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만나기 시작하여 7년을 연애하고 결혼한 딸아이 부부는 지들 친구들 사이에서는 천연기념물이란다. 백일 정도 사귀어도 오래 사귀었다 하고, 해를 넘기면 주위에서 서로 지겹지 않느냐며 헤어짐을 부추기기도 한단다. 한결같은 성실함과 반듯한 인성이 좋고, 지들 아이의 아빠로, 엄마로 충분하겠다는 확신으로 결혼을 결심하였다는 딸아이 부부의 이야기에도 친구들은 그냥 웃지요 한단다. 너무 쉽게 사귀고, 너무 쉽게 헤어진다. 친구의 친구를 새 연인으로 삼기도 하는 일이 다반사이고, 우리 세대는 놀라 자빠질 관계도도 많다.
욕이 90%가 넘는 청소년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우울해 진다. 너무 험하여 흉내도 못내겠다. 심지어 친구들끼리 있을 때는 엄마, 아빠를 미친년, 미친놈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현실에 경악하였다. 부모에 대한 애정의 깊이 관계없이, 그런 억센 표현을 하면 자존감도 생기는 듯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으쓱해 지기도 한단다. 강한 말투로 자존감을 세우려한다는 잘못된 유행이 왜 이렇게 범람하고 있는 것인가. 아이를 유치원이나 학원을 보내어 제일 먼저 배워오는 것이 욕설이라는 것도 어떻게 해석을 해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얼굴의 첫인상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내뱉는 말투로 첫인상이 각인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는 부모, 선생님이 없어서는 아닐까?
말을 줄여쓰는 것은 또 얼마나 많던지 해설가가 따라 다니지 않으면 아이들의 대화를 알아 들을 수 없다. “생선 뭐 줄까?” 라는 언니 말에 “아직 생각 중이야” 하는 두 질녀들의 대화를 혼자 해석하고 있었다. 밥먹는 시간도 아닌데 언니는 왜 갑자기 동생에게 생선을 준다고 하며, 고등어, 갈치, 꽁치 중에서 답하면 되는 일에 저 동생은 또 왜 아직 생각중이라고 하고 있는가. 무슨 뜻인지 몰라 결국은 해석을 부탁하였고, 그제서야 생선은 생일선물을 뜻함을 알았다. 다이어트 한다더니 생선보다는 생일선물하면 에너지 소비가 더 많을건데 말마다 줄여쓰면서 다이어트는 왜 한다하는지 모르겠다.
인터넷 세상이고, 전 세계에서 그 빠름이 초고속이니 그만큼 인터넷관련 사고들도 많다. 하지만 사건에 대한 진지한 댓글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빠른 인터넷을 이용한 신중한 설문조사를 하면 그 빠름과 전체 의견을 수렴할 좋은 점도 많을 것인데 무기명으로 하는 각종 댓글들을 보면 깊이 있는 설문조사할 생각도 못한다.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댓글의 위력을 인정하고, 상대편을 고려한 심지있는 댓글들이 적혀져 빠르고 좋은 혜택을 받은 세상에서 네티즌 모두가 나날이 발전하면 좋을 것을 “아님 말고” 식의 무뇌적인 댓글로 안타까운 생명들이 꺼져가기도 한다. 심지어 도박, 성매매, 사기 등의 처죽일 사건들로 빗나가는 바가 깊어 실로 비참하기까지 하다.
내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 나팔바지가 유행하였다. 나팔바지 입고 일요일 친구들 만나러 나가는 내 뒷머리를 향해 혀를 차시던 엄마의 한마디. “온 동네 길청소는 니 바지가 다하고 다니것다. 빨래는 니가 해라” 엄마도 그때 우리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셨을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그 잔소리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냥 그시절의 어른과 아이들의 세대차이라고 하기에는 지적하고 고쳐가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나만의 오지랖인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꾸중을 한다는 것, 잘못을 지적하고 고쳐가기를 지도해 줄 수 있는 것이 짐승과 사람의 차이점이라고 한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바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하는 것을 멈추면 우리는 인간사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들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자식을 그냥 방관하고 있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자식을 하나 아니면 둘 겨우 낳은 세상이니 어찌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제대로 안내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오래전이지만 잊혀지지 않는 분이 계신다. 딸아이 유치원 원장님이였다. 아이 유치원 입학식 후 부모들을 따로 만나 아이를 잘 케어하겠다는 말씀 중 청소년이, 우리의 아이들이 잘못하고 있는 행동은 모두 지금 기성세대들의 책임이고, 또 그들에게 잘못을 지적하고 꾸중하기를 외면한 탓에 아이들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어른들이 포기하면 아이들은 자폭한다. 공공질서를 지키지 않는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사회악을 키우는 것이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이 먼저 이 세상을 포기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였다. 그분의 훈화를 마음에 새기고 난 어른으로써, 선생으로써 세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각오를 하였다. 인생을 살면서 참으로 기억되고, 받들고 싶은 말을 해주는 인연을 만난 것도 나의 축복인 듯하다.
앞에서 끌어주는 선생이 아니라 뒤에서 밀어주는 어른이 되고 싶고, 아이들이 몰라서 저지르는 짧은 소견들이 어른들의 보살핌으로 깊어갈 수 있도록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한다. 또한 그들이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면서 세상이 한없이 넓다는 것을 알게하고, 사회성을 높여가기 위한 다양한 체험과 관계를 이어가도록 길을 안내해주어야 한다. 또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그들의 본보기가 되도록 다듬어 가야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직업을 속일 수 없는 지 매번 글이 교육적인 테마로 마무리될 때마다 한계점인가 싶어 슬프지만 선생이 선생이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니들 사랑이 이루어진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광분할 것이 아니라 니들 사랑이 진실로 익어가는 열매가 될 수 있도록 안내자로, 선배로, 어미로 더 많이 나를 다듬어 가겠다고 다짐하여 본다.
 
 

2.마지막 배웅 /이시언
 

어머니의 호흡이 점점 얕아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고 간이 오그라 들었다. 주말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의사의 말이 있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으나 자식들에게 한마디 인사도 없이 떠나시는게 서러웠다.
간호사는 어머니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와 산소마스크를 거두었다. 핏기 없이 파리한 피부가 앙상한 뼈와 함께 드러났다. 구십년 세월을 견뎌온 육신이 훅 불면 날아갈 백지장 같다. 들숨과 날숨을 통하여 에너지를 모으고 뿜어내며 억척스럽게 사셨던 분이다. 이제 운명에 순종하여 외마디 말도 없이 누워 계신다.
부산 s교회의 권사인 언니와 안수집사 형부는 장례를 기독교 장으로 치르자고 했다. 살아생전 교회에 다닌 적은 없지만 병상에서 세례까지 받았기에 마땅히 기독교 식으로 하는게 옳다는 것이다. 반면 불심이 깊었던 오빠와 새언니는 언니의 의견에 반기를 들었다. 평생을 절에 다니며 부처님께 의지한 분이 심신이 나약한 상태에서 개종했다는 게 과연 옳은 판단이냐며 반박했다. 영혼의 문제라며 두사람이 맞서는데 양보할 기세가 안보였다. 고인을 향한 애틋한 심정에서 비롯된 충정이란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양보없이 팽팽히 맞서는 두 사람을 보며 자기세계에 빠진 아집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곡소리 구슬퍼야 하는 상갓집에서 벌어진 언니와 오빠의 신경전이 누가 알까 민망했다.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의 첫발을 떼는 어머니를 서로 모시려고 난리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다 받지 못한 효도를 고인이 되고서야 마저 받고 계신 걸까.
의식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는 자식의 안녕이 우선이셨다. 괜히 자식들에게 엉겨 붙어 불효를 만들까 염려된다며 돌아가시기 서너 달 전에는 아예 병원 생활을 고집하셨다. 홀로서기가 불가능했던 어머니는 이자식 저자식에 떠밀려 다닐 것을 미리 아셨지 싶다.
어서 빈소를 정해야했다. 안되겠다 싶어 다수결로 하자고 제의했다. 언니와 오빠도 내 의견에 따르겠다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똑 부러지는 게 없는 성격탓에 집안 대소사에 말발이 없던 나 였다. 그런 내가 어머니를 천국으로 모실지 극락으로 모실지 결정적 한표를 행사하게 되었다.
굴곡진 인생길에서 끔찍한 고초도 많이 겪으셨던 어머니, 이승의 설움을 말끔히 털어드리고 싶었다. 저승 가시는 길, 외롭지 않으시게 등불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고귀한 영혼으로 거듭나시어 풍요롭고 평안한 저승으로 안착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잃은 피붙이에게도 안온하고 따스한 위로가 필요했다. 슬픔을 풀어 헤쳐 목놓아 울 수 있는 빈소로 결정해야 했다.
석달전 아버지가 임종했을 때는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오빠가 먼저 도착했다. 오빠는 거리낌 없이 불자 빈소를 선택했다. 고인의 허기를 달래줄 제사상을 차리고 명복을 비는 자손들의 염원을 담아 향불을 피어 올렸다. 구십년 세월에 지친 아버지의 육신을 입관 한후 마지막 절을 올리면서 저승길에 사용하실 노자돈도 성심껏 드렸다.
이러한 절차들을 말없이 지켜보던 언니와 형부는 아버지의 마지막 배웅 인사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리고 가벼운 목례로 대신했다. 이에 오빠와 새언니는 보란 듯이 삼우제에 이어 사십구제까지 지성으로 올렸다. 오빠의 논리대로라면 아버지는 극락에 가셨을 것이다. 어쩌면 덕이 많은 어느 마나님의 자궁에 잉태 될 인연을 앞에 두고 축배를 드시고 계실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어떠실까. 아버지가 계신 그곳으로 가고 싶으실까. 문득 먹고 사는 일에 지치고 쓸쓸해 하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목소리가 크셨다.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고함을 치시고 명령하셨다. 언제 폭발할지 모를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셨고 절망하셨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떨었다. 힘없이 숨을 몰아쉬는 어머니 모습에 매일 매일이 우울하고 아찔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평정심을 잃을 때도 맞서지 않으셨다. 현모양처를 최고의 미덕이라 여기는지 양처의 덫에 갇혀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모들이 분에 못 이겨 가슴을 치셨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고루한 선비 사상을 들먹일뿐 바뀌지 않으셨다. 끊임없이 어머니 위에 군림하시고 자존심만 세우셨다. 어릴 적의 나는 아버지의 손에서 벗어나는 어머니를 꿈꾸었다. 지금의 나는 천국으로 발걸음을 옮기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환영처럼 보았다.
영가들의 임시 거치소인 빈소는 지하에 있었다. 어머니는 병원에 오실 때처럼 나가실때도 엘레베이트를 타셨다. 하얀 침상에 누워 한층한층 내려가셨다.
어머니를 모신 곳은 모태신앙을 자랑하는 여느 권사님의 빈소를 방불케 했다. 십자가가 박힌 자주색 비로도 천이 정면에 걸려있고 그 앞에는 수백 송이의 국화꽃이 청초하게 장식되어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감싸 안았다. 옅은 웃음을 머금고 계시는 사진속의 어머니는 편안하고 다소곳해 보였다. 동그란 볼에 살이 올라 있어 새벽녘의 창백하고 까실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영정 사진 앞에는 성경 책이 펼쳐졌다. 외롭지 않으시게 찬송가도 잔잔하게 흘러 나왔다.
제일 먼저 숙모님이 달려 오셨다. 아이고, 형님 이리도 급하게 가십니까. 이 좋은 세상 고생만 하시다가 ……. 불쌍해서 어쩌누.. 숙모님은 바닥을 치며 서럽게 우셨다. 한달전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도 숙모님은 병문안을 오셨다. 빠른 쾌유를 당부하시며 돌아서던 그날도 숙모님은 근심어린 눈시울을 붉히셨다.   오빠가 숙모님을 부축하여 식탁으로 모시고 나왔다. 그간의 자초지종 이야기를 나눈 후 수저를 드실 때쯤 숙모님의 눈은 말갛게 말라있었다. 가신 것은 안됐지만 그래도 편히 잘 가셨어. 구십이면 천수를 누리신거야. 호상이지. 호상이고말고...
조문객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한 결같이 호상이라고, 운명에 순응하셨으니 너무 슬퍼 말라고 위로했다. 빈소에서는 엄숙하고 서러운 낯을 하였지만 식탁에 앉으면 조문객들의 표정이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떡이 맛나다며 더 달라고 했고 수육이 쫄깃하니 씹는 맛이 있다고 했다. 술을 거나하게 마신 어떤 조문객은 농담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웃음소리가 화장실까지 들렸다. 나 역시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친척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동안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잊기도 했다. 곁눈질로 슬쩍 보니 형제들도 조문객과 담소를 나누면서 옅은 미소가 오르락 내리락 했다.   조문 화환도 연신 들어왔다. 빈소 입구에 긴 줄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조문객에게 음식을 나르고 흩어진 신발을 정리 하느라 앉을 새도 없었다.
칠십삼 년전 동짓달 스무사흩날, 열일곱 소녀가 열 아홉 청년을 만나 혼례를 치르던 날도 이처럼 떠들썩하지 않았지 싶다. 없는 살림에 차리는 살림이라 마땅한 예복도 없어 이웃에게 잠시 빌려온 옷을 입고 둘만의 식을 올렸었다. 그나마 자리한  몇몇 하객들에게 변변한 식사도 대접하지 못하여  신부는  미안하고 서러웠는데 이승을 떠나는 날, 어머니는 마지막 배웅을 하여준 이들에게 푸짐히 음식을 대접하셨다. 구십세까지 살아 호상으로 칭해졌기에 조문객의 발걸음도 가볍게 하셨다. 천국으로 떠나는 여행이 무겁지만은 않으셨지 싶다.
 
 

3.알바트로스(Albatros) / 이미란
 
캐디가 소리를 치며 풀쩍풀쩍 뛰고 야단이다. 동반자가 알바트로스를 했기 때문이다. 알바트로스는 골프 경기 중에 긴 홀에서 규정보다 3타를 줄여 홀에 공을 넣을 때 칭하는 말이다. 프로골퍼들도 알바트로스는 거의 경험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원한 희망이기도 하다.
동반자는 라운딩하기 전에 공이 잘 안 맞는 불평 하면서 시작했다. 뒤 바람의 도움을 받아았지만 평소 연습장에서 열심히 노력하더니 큰일을 해냈다. 모든 일에는 실력이 있어야 하지만 이처럼 운도 있어야 하나보다.
알바트로스는 하늘의 조상이 보낸 새라는 뜻으로 신천옹 信天翁이라고도 부르는데 폭풍우 속에서 하늘을 믿고 몸을 날린다는 뜻도 있다. 양 날개를 펴면 3m가 넘는 세상에서 가장 긴 날개를 가진 새다. 날개가 너무 커 날지 않을 때는 거추장스럽다. 물 위에서 살다 보니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어 평소에는 어린아이가 걸음마 배우듯이 뒤뚱거리고, 잘 걷지도, 날지도 못하여 바보 새라 부르기도 한다. 날렵하지 않고, 쉽게 날지도 못하여 사람들에게 잘 잡히고, 새끼 때는 거친 상어 밥으로 많이 죽어 숫자가 많이 줄고 있다.
거친 상어 떼 공격을 비롯한 주위 환경의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성장하여 어미 새가 되면 절벽에 오른다. 폭풍우가 몰아치면 바람의 세기를 파악하여 용감하게 뛰어내려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게 난다. 모든 새가 날기를 포기할 때 잠재력을 발휘하여 그 누구도 못하는 멋진 비상을 한다.
너무 큰 날개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폭풍우가 올 때를 기다리며 힘차게 비상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어려운 현실에 실망하며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준비하면 반드시 일어설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알바트로스는 보여준다.
이 새를 보노라면 문득 우리 작은 아들이 생각난다. 행동이 조금 느리고, 태평스러운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뒤처졌다.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꼭 짜진 한국의 교육프로그램을 힘들어했다.
그러나 EQ 지수가 비교적 높은 편이고 여러 방면에 잠재력이 있었다. 특히 창작 만들기 대회는 학교 대표로 뽑혀 대구시 대회에도 출전하곤 했다. 공장에서 공구와 재료를 가져다 아파트 베란다 일부분에‘만들기 방’을 만들어 주었다. 숙제를 끝내면 그곳에서 만들기를 할 수 있게 했다. 그 순간은 행복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만들었다. 자기 형 기술 만들기 숙제는 도맡아 으시대며 즐겁게 해주는 등 교과 밖의 여러 방면에서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꽉 막힌 우리는 교과과목에서 성적을 올려 좋은 대학을 마치는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많은 이들이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소수 집단의 서양식 교육이 이 아이에게는 적당하다고 추천했다. 외국에 이민 간 우리 아들을 잘 아는 나의 친한 친구가 보호자 역할을 해주겠다며 유학을 권했다.
아들 초등학교 친구 중에 몇 명이 중학교를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 확실한 판단 없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본인도 유학을 원했지만, 나의 보살핌 없이 홀로 서기를 하여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어, 도저히 아들을 믿고  떼어 보낼 자신이 없었다. 유학비도 계산해 보니 엄청난 액수였다. 우리나라에서 공부시켜보고 공부 쪽이 부족하면, 유학 보낼 돈으로 장사라도 시키면 되겠다는 얄팍한 계산을 했다.
 그 후 학교에 다니며 뒤처지는 학과를 개인지도 시켜 보충했다. 결과적으로 유학비와 비슷한 학비를 사용했지만, 학교생활 중 이런저런 복병에 부딪히며 힘들게 보내야 했다. 테니스, 탁구, 성악, 플롯 등 어떤 것에라도 취미를 가질까하고 여러 가지를 시켜보아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힘든 교과 중심의 학교 교육은 아이에게 무리였다. 틱 장애도 조금 보이고 학교에 시험이 있는 날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항상 배 아파하며 힘들어 했다. 모두 정신적인 문제라는 진단이 나왔다. 억지로 책상에 앉혀 놓았더니 앉은 자세가 바르지 못해 측추 측만증 증상까지도 보였다.
혼자서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미리 두려워 말고 용감하게 유학이란 폭풍우에 도전을 해보았더라면 어떤 결과를 이룰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아이가 힘들어할 때마다 넓은 천지에서 커다란 날개를 마음껏 펼쳐 비상할 기회를 막아 버렸다는 미안한 마음이 항상 가슴을 누른다. 선택하지 않는 길에 대해 미련과 후회가 뭉긋이 일어나곤 했다.
결국, 고등학교까지는 한국에서 마치고 대학은 중국서 다녔다. 그곳에서 나름대로 적응하여 학과 과정을 마쳤다. 직장도 쉽게 구해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아버지 밑으로 들어와 열심히 밑바닥에서부터 힘들게 하나하나 배우고 있다.
  다음 달에는 부산 기계 전에 나간다고 열심히 하나하나 준비하고 있다. 국내외 전시회는 자기가 담당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기가 맡은 일은 책임감을 느끼며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외국 전시회에서 많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
아들이 주위의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높게 비상하는 그 날을 꿈꾸며 차근차근 준비하면서 자신의 때를 참고 기다렸으면 한다. 그렇게 하노라면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나는 알바트로스처럼 힘차게 비상하는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힘찬 응원을 보낸다.

4.  현을 조율하다/엄옥례

가야,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현 하나가 파르르 떨릴 것 같다. 비운의 길로 사라진 미완의 왕국이기 때문일까. 그 슬픈 울림의 발원지를 찾아 떠난 길에 입속은 자꾸‘가야, 가야’를 읊조린다.
가야의 땅 고령, 정정골 테마 박물관 앞마당에 우륵 선생이 환생한 듯 좌정하여 가얏고 한 자락을 연주하고 있다. 가야의 역사와 선생의 발자취를 담아놓은 박물관을 돌아 나오니 그 옆에는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금장지가 보인다.알맞은 크기로 쪼개놓은 오동나무가 대숲 앞에 도열해 있다. 7년산 오동나무는 저 자리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썩을 곳은 썩고 휘어질 곳은 휘어지며 나무의 본성을 지워간다. 그러기를 다섯 해, 해와 달과 별의 기운을 받아야 고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울림통이 된다.
지금 선생의 까마득한 후예가 오동나무를 붙잡고 구슬땀을 흘린다. 명주실을 꼬아 현을 만들고 나무로 깎은 기러기발로 현을 받친다. 울림통을 깎고 그 위에 현을 치는 작업이 손으로 이루어진다. 재료에서 제작 그리고 조율까지 모두 오행의 힘으로 빚어 가야금은 자연 아닌 것이 없다. 게다가 빗소리, 바람 소리, 천둥소리에 대숲 일렁이는 소리까지 품었으니, 마음의 불협화음에 가슴이 답답할 때 가야금 운율에 몸을 맡기면 몸과 마음은 원시의 평안을 준다.
가야금은 전쟁에 지친 백성의 마음을 위무하기 위해 빚어낸 악기다. 백제와 신라의 틈에 낀 가야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외침을 막느라 국력이 쇠잔해진 가야의 왕은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예술가였던 우륵 선생에게 악기를 만들라고 하명했다. 전쟁을 하려면 무기를 제작하고 군사를 양성해야 하는데 악기와 악사라니. 왕의 생각은 달랐다. 악기를 만들고 소국마다 그에 맞는 곡으로 흥을 일으켜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그가 연주하는 리라 선율은 어찌나 아름답고 경이로운지 산짐승은 물론 감정이 없는 나무나 바위까지도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현실에서는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전쟁이 주는 심리적 충격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군인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음악으로 가라앉혔다고 한다. 이렇듯 음악은 신화와 현실을 초월해 사람의 내면을 다스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올봄부터 한 모임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을 이모저모 연구해 상처 입은 이들을 돌보는 모임이다. 12연맹 가야처럼 회원들은 색깔이 다양해 너도나도 모임을 자기 빛깔로 물들이고 싶어 한다. 제 생각을 꺾지 않아 회의를 하다보면 서로 짜증과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 치르듯 이리저리 부딪치는 일상인데, 충돌을 완화시키는 일에서 전면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 내게는 곤혹이다. 천성에 어울리지 않은 자리에 앉아 소임을 다하느라 이 말 저 말을 다 듣고 그것을 조율하다 보면 연일 입에 단내가 난다. 밥줄이 걸려있는 모임이기에 자리를 팽개칠 수도 없다.
이런 날, 집으로 돌아오면 억눌린 감정이 분출한다. 혼자 가슴을 치기도 하고 마음을 식히려 찬물을 들이켜기도 한다. 울고 웃고 고함을 치기도 한다.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소리 질러 노래 부르면 마음속이 후련해진다.
가만히 생각하면 내 울림은 흥을 돋우는 가락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물소리도 아니다. 길을 가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어깨를 치면 노려보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면 맞받아치는, 자극에 반응하는 소리는 날카롭고도 둔탁하다. 나의 내면의 소리가 타인의 심금을 울리려면 속을 얼마나 더 비워내야 할까.
어느새 내 삶도 지명의 고개를 넘었다. 제법 살았고, 알 만큼 아니 현명하다는 내 생각은 착각인 것 같다. 사람 또한 쪼개지지 않고 뒤틀리지 않도록 성품을 단련해야 음색 변화가 없는 공명상자가 되고, 거기에 잘 조율된 마음의 현을 더하면 조화로운 소리를 내는 현악기가 된다. 나태의 벌레가 시간을 갉아먹고 소소한 유혹에 심사가 뒤틀린다면 어느 목수가 나를 기둥으로 쓰며 어느 악사가 나를 연주할 것인가. 모든 소리를 품고 마음을 위무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내게 다가오는 어떤 시련도 견디어 볼 일이다.
모임을 맡은 지 그러구러 반년이 넘어간다. 모임이 있는 날, 시작 전에 목소리를 조율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눈을 감고 가야금 명상곡을 듣거나 그날의 주제에 맞는 노래를 함께 부르면 좋지 싶다. 감성이 말랑해지고 모난 마음들이 둥글어지면 다들 남의 소리에 귀를 빌려주고 마음을 열지 않을까. 마음을 통합하지 못해 모임이 흔들린다면 돌이라도 맞겠다는 심정으로 뜻을 펼치면 무엇인들 못 할까 싶다. 시작이 미미해도 시간이 흐르면 모두 가야금의 울림통처럼 아름다운 화음을 내리라 믿는다.
박물관 마당에서 옛 가야의 땅을 바라본다. 강물은 윤슬 반짝이며 남해로 흐르고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는 풍경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병풍처럼 둘러친 뒷산에는 오동나무가 커다란 잎을 펄럭이며 가야의 소리를 꿈꾼다. 하늘과 땅이 다 평화로우니 내 마음도 편안하다. 모처럼 마음의 현을 조율하고 나니 나 또한 현악기인 듯 가야금 선율을 흥얼거린다.

5. 펭귄의 선택 / 안연미
                                                                                                                    
남극의 펭귄들은 먹이를 구하러 바닷물에 뛰어들기 전에 한참을 망설인다. 먹잇감으로 기다리는 천적들 때문이다. 선뜻 뛰어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과감하게 먼저 뛰어든 첫 번째 펭귄의 선택이 참 용감하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용감한 사람을 첫 번째 펭귄(The First Penguin)이라고 한다.
누구의 힘으로 물에 뛰어든 것도 아닌 오롯이 자신의 선택이 결국 다른 이들에게도 용감한 도전정신을 이어가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첫 번째 펭귄의 이름값은 대단한 몫을 차지하는가 보다. 우리네 인생도 선택의 연속이다. 언제나 크고 작은 선택 앞에서 늘 망설인다. 갈등 끝에 선택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아니면 후회하고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욱이 젊은이들의 진로선택은 앞으로의 평생과도 연결된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대구시에서 의과대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사체험활동 프로그램을 열었는데 아들은 학교 대표로 뽑혔다. 의사체험은 사람들의 고귀한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되겠다는 아들의 심지를 굳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사춘기를 격동의 시기라 했던가. 아들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아들이 또 다른 문을 두드리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신발을 신던 아들이 인도영화를 저장해두었다며 컴퓨터를 가리키더니 꼭 볼 것을 당부했다. 영화를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마련한 줄로만 알고 식구들이 빠져나간 빈집에서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담아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세 얼간이’라는 제목의 인도영화였다. 얼간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인도 최고의 공학대학에 입학한 천재들이었다. 아버지가 정해준 대로 공학자가 되기 위해 입학한 젊은이가 겪는 고뇌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성적순으로 인생의 진로를 정하는 현실을 향해 일침을 놓는 젊은이들과 좋은 직업을 갖게 되길 바라는 부모의 입장을 대비시킨 과정이 꽤 진지했다. 세 명의 주인공은 차츰 진정한 꿈을 찾기 위해 분투했고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올 이즈 웰’(All is well)을 외치면서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삶의 지향점은 비록 다르지만, 이들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기를 원했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외쳤다. 내 아들은 왜 이 영화를 내게 권한 것일까. 선택의 갈림길에 선 자신의 처지를 알아달라는 것인가.
그날 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의 폭탄선언에 우리 부부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들의 설득은 집요했다. 보람 있게 잘 살고 싶다는 둥, 그러려면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했다. 의사는 굳이 자기가 아니더라도 진짜 하고 싶은 사람들이 하면 된다고 했다. 아들은 일그러졌을 내 표정과 아버지를 번갈아 보면서 제 결단을 인정해달라고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았던 아들은 가끔 엉덩이를 들썩였다. 안쓰러웠지만 애써 모른 체했다. 아들의 주장은 제법 그럴듯했지만 내 마음은 어림도 없었다.
그동안 자리매김해두었던 아들의 스펙이 나는 아까웠는지도 모른다. 정녕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라는 것을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굳이 험난하고 불확실한 길을 걷겠다고 하니 막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내게 아들은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했다. 힘은 들어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고 싶고 제가 하려는 일은 사람들 마음에 감동을 안겨주는 일이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번갈아 가며 아들을 설득했다. 좀 더 생각해보자던 남편은 아들한테 일주일간의 시간을 주었다. 아들의 마음을 돌이킬 심산인 듯했다. 아들은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여느 날보다도 더 활발해졌다. 새카맣게 타들어 가던 얼굴빛도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들이 다시 마음을 돌이킨 것은 아닐까도 은근히 기대했다. 약속했던 기일이 지나자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찾았다. 우리 부부는 아들의 마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아들은 지금 대학을 다니면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걷고 있다. 아들은 연극을 연출하는 일은 심장을 뛰게 한다고 한다. 무대 위의 설치물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고 무대 위에 올려서 공연 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며 힘든 일을 하면서도 행복해하는 아들의 표정은 때때로 내게 힘이 되기도 한다.
안개 덮인 산길을 오르는 일은 힘이 들 것이다. 하지만 용감한 펭귄의 도전정신에 햇살이 안개를 걷어가는 희망찬 길이 펼쳐지길 소망한다.
 

6. 구급약 상자 / 서해숙

새끼손가락을 다쳤다.약상자를 열고 연고를 꺼낸다. 포비딘으로 소독 하고 면봉에 연고를 묻혀 바르면서 상념에 젖는다. 입 꼬리를 올리던 나는 구급약 상자 속을 들여다본다. 단순한 상처에 바를 소독약과 연고가 있는가 하면 물파스부터 기초 구급약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웬만한 처치는 이 상자만 있으면 해결된다. 매사에 덜렁대는 나는 자주 다치므로 이 구급약 상자는 우리 집의 보물이다.
우리 부부와 딱 반대의 성향을 가진 P선배가 있다. 그부부가 모두 우리인생의 구급약상자다. 근 삼십년 동안 각종 도움을 받고 산다. P선배는 나의 직장 동료였고, 선배의 남편은 짝의 고등학교 동문이자 직장상사였다.
매사에 헐렁한 나는 남편과 P선배에게 늘 혼쭐이 난다. 둘은 매사에 빈틈이 거의 없다. 나를 나무랄 때의 냉정함도 닮았다. 한편 p선배의 남편과 나는 오지랖의 크기가 비슷하다. 다혈질의 성품도 같아서 열을 받으면 소금 뿌려진 미꾸라지 같다. 서로 반대의 성향을 가졌기 때문일까? 우리는 한 번도 낯을 붉힌 적이 없다. 이젠 매주 토요일 새벽에 목욕탕에서 만나고 콩나물국밥을 먹는다. 선배네는 우리보다 일 년 먼저 퇴직이라는 허무를 겪었기에 잘도 챙겨준다. 새해부터는 모닝커피를 곁들여서 3차까지 같이 보내기로 했다.
며칠 전에 한 건의 사고를 쳤었다. 남편의 새 차에 흠집을 낸 것이었다. 남편은 잦은 장거리 운전을 핑계로 연비가 싼 외제차를 샀다. 매사에 근검절약이 몸에 밴 남자가 차에 대해서만은 한 번씩 사치한다. 새 차는 난장이똥자루 만해서 국산차 중형 값 정도였지만 남편이 애지중지하니까 차키를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지난 주말에는 서울에서 내려 온 오빠를 대동하고 다녀야 할 곳이 많아 연비를 들먹이며 과감히 남편 차를 좀 타자고 했다. 덜 익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으로 키를 주는데 받아 나서는 내 맘도 천근이었다.
도대체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 대략난감 했다. P선배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차가 긁힌 사연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응급처치를 해 달라고 했었다. 안동 산 다슬기국과 책 한 권을 아부용으로 챙겼다. 남편께 그 집으로 직접 배달을 해 달라고 했었다. 남편이 심부름을 간 사이에 전화를 넣었다. 남편을 그냥 보내지 말고 차 한 잔을 먹여서 살살 달래 보라고 했다. 선배는 퉁명스레 “조심 좀 하지 알았다” 고 했었다.
룰루랄라 운동도 하고 집안일도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차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역시 그 분들이 내 인생의 구급약상자구나 하고 안도를 했다. 내 전략이 먹힌 것에 대한 기쁨에 달떠 P선배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하니 웬 걸 구급상사는 뚜껑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엔 남편에게 혼쭐이 나기엔 좀 억울했다. 동대구역에서 오빠를 태우고 부모님이 계신 요양원에 들를 때 까진 좋았다.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 안동의 모병원에서 지하주차장이 폐쇄된 줄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후진을 하면서 죽 긁혔다. 먼저 도착한 언니가 우리와 함께 문상을 하려고 기다린다는 전화가 마침 그때 왔었다. 하늘이 노랬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울어야 할 처지지만 건성으로 문상을 했었다. 오랜만에 만난 고종사촌들과 살갑게 정담을 나누지도 못했었다.
P선배 남편은 안 그래도 퇴직하고 심란할 후배에게 내가 왜 그 나쁜 소식을 한시라도 먼저 전해서 높은 혈압에다가 펌프질 시키냐고 했다. 이틀이 지났건만 남편은 모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이실직고 하는 내 성정을 아는 때문인지 남편은 차를 훑어보는 수고를 하지 않았나보다. 이일을 어쩐다? 정초부터 부부싸움을 하기에는 먹은 나이가 아까웠다.
구급상자의 처치가 필요해서 신년교례회를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우린 24시간 영업을 하는 찻집에서 모닝커피를 마주하고 앉았다. 선배부부는 잘못한 이가 용서를 빌라는 눈치를 주었다. 나는 남편의 손을 잡고
“여보 세상에 내가 믿을 이는 당신 밖에 없어요. 우리 앞에 계시는 두 분도 절대로 믿을 수가 없는 양반들이예요”
남편은 이 무슨 시추에이션 하는 눈빛으로 웃기만 한다. 긁힌 차에 관한 내 전략이 허사가 된 일을 말했다. 남편은 입만 쩍쩍 다시고 있었다. 신년회동을 기분 좋게 마무리해야 올 한 해 잘 풀릴 거라면서 선배부부는 상처 난 차를 보자고 했다. 허리를 ㄱ자로 꺾어야 보이는 흠집이었지만 운전석 밑에 거의 팔 길이만큼은 족히 긁혀 있었다. 둘 다 입을 맞춘 듯
“괜찮네 아이구 또 우린 많이 긁힌 줄 알았지 괜찮다 후배야 차는 소모품이고 저 정도는 그냥 타라. 이참에 둘이 차를 바꿔 타라”는 말까지 보탠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대형마트에 장을 보기 위한 용도로 덩치가 코끼리 만 한 차를 마련했었다. 바꿀 형편이 못되어서 지금껏 그냥 타고 있다. 남편 차는 덩치가 작고 날렵해서 바꿔 탐이 마땅하나 사고 경력이 화려해서 입을 떼지 못하고 있는 처지다. 원감이 긁어 먹고 운전기사들이 부딪치고 나 또한 만만찮게 사고를 냈었다. 아예 인터넷으로는 보험조차 들지 못하고 있는 처지다.
얏호! 그분들은 내 구급약상자가 확실했다. 우리가 얼굴을 붉힐 일만 있으면 재판을 하고 해결점을 찾아준다. 양가의 부모봉양과 인간관계, 아이들 학업문제며 반찬 만들기까지 물으면 언제나 정답을 말하고 속 시원히 해결해 준다. 근래는 게으른 나를 부추겨서 운동을 같이 한다. 한 달에 한 번 장거리로 운동을 함께 간다. 우린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부부모임을 할 것이다. 부디 오래 오래 토요아침 목욕회동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물휴지를 꺼내어 약상자의 뚜껑을 깨끗이 닦는다. 포비딘과 후시딘을 제자리에 넣는다. 소화제와 진통제도 재차 확인한다. 이 구급약 상자가 곁에 있는 한 우리부부의 애정전선 이상 무!
 

[안연미]

공도현 선생님~
제 작품 담당이시네요~^^
어쩌지요?
작품방에서 교정한 작품 참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교수님,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