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르트 시절의 미야기 히로아키(사진=야쿠르트)
Q. 최근 WKBL(한국여자농구연맹)에서 뛰었던 첼시 리 선수가 한국계가 아닌 순수 미국인
으로 밝혀졌습니다. WKBL과 법무부에 제출했던 자신과 아버지의 출생증명서가 위조된 것으
로 알려졌는데요. 리는 할머니가 한국인인 덕분에 WKBL 규정에 따라 ‘해외동포 선수’ 자격
으로 한국 무대를 밟아 맹활약을 펼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 미국인으로 밝혀지면서 리
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은 고사하고, WKBL 출전도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프로야구에서
도 이처럼 한국계임을 내세워 KBO리그를 밟았다가 훗날 순수 일본인으로 밝혀진 사건이 있
었다고 들었는데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싶습니다. -인천 송하진 -
A. 농구 쪽을 잠시 취재해봤습니다. 대부분의 농구 관계자가 “첼시 리가 순수 미국인이었다
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몇몇 구단에서 “리가 무슨
한국계냐, 딱 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한
구단 관계자는 “연맹의 허술한 검증과 온정적 혈통주의 그리고 승리 지상주의가 절묘하게
결합하면서 희대의 괴물이 탄생했다”며 “가뜩이나 부정적인 뉴스가 많았던 농구계에 또 다
른 대형 악재가 터졌다”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각설하고.
올드 야구팬이라면 ‘해외동포 선수’란 말에 뭔가가 떠오르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고 장명
부, 주동식, 김일융, 고원부 등 재일동포 선수들입니다. 1983년부터 KBO는 6개 구단의 전
력 불균형을 개선하고자 해외동포 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
시 조건은 ‘외국에 거주하는 해외동포 선수 가운데 부계나 모계가 한국인’인 이들이었습니
다.
전력 불균형 개선 못지않게 중요한 화두는 리그 경쟁력 강화였습니다. 프로 경험이 많은 국
외동포 선수들이 KBO리그에서 뛰면 한국 프로야구 수준도 올라가리라 예상한 것이지요. 문
제는 정보가 태부족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한국야구계에 도움을 준 이가 장훈(일본명 하리모
토 이사오) 선생이었습니다. 장 선생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동하는 재일동포 선수들이 누군
지 파악하고, 이들을 찾아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망설이거나 거절하는 선수가 있으면 재차 찾아가 설득을 거듭했습니다. 덕분에 1983년 장명
부, 이영구(이상 삼미), 주동식, 김무종(이상 해태) 등이 KBO리그 무대를 밟았습니다. 재일
동포 선수들의 활약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장명부는 혼자서 무려 30승을 따냈고, 주동식
과 김무종은 이해 해태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이들의 대활약으로 다른 구단에서도 재일동포 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재일동포인 줄 알았으나 나중에 순수 일본인’으로 밝혀진 것으로 알려진 김홍명도 있습니
다.
한국행을 결심했던 '점보 미야기'
김홍명의 일본명은 미야기 히로아키입니다. 1962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난 미야기는 요코하마
상고 시절 대단한 주목을 받습니다. 요코하마상고를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 대회) 4
강까지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고교 졸업반 시절 많은 프로 스카우트의 주목을 받았는데요. 무려 11개 구단의 스카우트가
미야기의 집을 찾아 입단을 설득했다고 하는군요. 결국 미야기는 198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야쿠르
트 스왈로스의 3순위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단합니다. 당시 프로 입단 동료가 하라 다쓰노리(요미우
리), 골든글러브 10회 수상에 빛나는 이시게 히로미치(세이부) 등이었습니다.
193cm의 큰 키로 미야기는 ‘점보 미야기’로 불렸습니다. 그만큼 팬들의 관심도가 높았지
요. 그러나 어깨, 팔꿈치 부상이 겹치면서 프로에선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1983년
18경기에 등판한 걸 제외하면 1984, 1985년엔 총 7경기에 등판하는데 그쳤습니다. 야쿠르
트는 기대 이하의 활약을 펼친 미야기를 1987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선수로 풀었습니다.
미야기는 여러 팀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지요.
프로 생활을 정리하려는 그때. 미야기에게 누군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제2의 야구인생을 살
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현역 지속 열망이 강했던 미야기는 흔쾌히 그 제안을 받
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만 해도 KBO엔 외국인 선수 제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방법은 하나. 미야기의 부계나 모계 가운데 어느 한쪽이 한국계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러면 재일동포 자격으로 KBO리그에서 뛰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지요.
당시까지 미야기는 일본인으로 알려졌습니다. 일본 부모를 둔 일본 국적의 평범한 야구선수
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 미야기는 한국땅을 밟는데 성공했습니다. 1988년 빙그
레 이글스에 당당히 입단한 것입니다.
그해 3월 2일 빙그레는 미야기와 계약금 5백50만 엔(당시 한화 약 3천200만 원), 연봉 500
만 엔(약 2천900만 원)에 정식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빙
그레는 일본 선수 미야기를 영입할 수 있던 걸까요? 이유는 미야기가 ‘재일동포 김홍명’으
로 입단했기 때문입니다. 빙그레는 ‘일본야구기구(NPB)에 신원조회 후 김홍명(일본명 미야
기 히로아키)를 영입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빙그레가 NPB에 신원조회를 하는 등 적법한 절차를 밟은 까닭에 미야기, 아니 김홍명의 빙
그레 입단은 이슈가 되지 못했습니다. 야구계도 ‘다른 구단처럼 빙그레도 재일동포 투수 한
명을 영입했구나’하는 정도의 관심만 보였지요.
일본 프로야구에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한 김홍명은 빙그레 유니폼을 입고 나름 좋은 활
약을 펼칩니다. 1988년 24경기(선발 22경기)에 등판해 8승 13패 평균자책 4.27을 기록했지
요. 선발로 등판한 22경기에서 7번의 완투와 1번의 완봉승을 거두며 김홍명은 특급까진 아
니어도 몸값 대비 효율이 괜찮은 재일동포 투수로 통했습니다. 1992년까지 김홍명은 10승
이상을 거둔 적은 없으나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꾸준하게 활약했습니다. 그러다 1992시즌
을 끝으로 빙그레를 떠납니다.
KBO리그 통산 성적은 119경기 등판 30승 31패 평균자책 4.43입니다.
김홍명인가, 미야기인가
한국을 떠난 뒤 정치계에 투신했던 김홍명에게 큰 사건이 터진 건 2003년이었습니다. 이해
일본의 유명한 야구주간지 ‘슈칸베이스보루(주간야구)’는 “한국명 김홍명, 일본명 미야기 히
로아키는 재일동포가 아니라 완전한 일본인”이란 기사를 게재합니다. 내용은 한마디로 다음
과 같았습니다.
미야기가 현역 생활 지속을 위해 1988년 한국 프로야구 빙그레에 입단할 때 ‘완전한 일본
인’임을 숨기고 재일동포 행세를 했다. 덕분에 별다른 제약없이 1992년까지 빙그레에서 뛰
었고, 한국야구계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따라서 미야기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뛴
최초의 일본인 선수다.
그 후 일본 방송사 TBS에서도 재일동포로 행세했던 미야기의 인생 역전을 다룬 프로그램을
방영합니다. 기사와 방송으로 ‘김홍명’은 허구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당시 일본
야구계가 깜짝 놀랐다고 하네요. 물론 이 기사와 방송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견도 많았습니
다. ‘정치적 공작이 숨어 있다’는 반론도 꽤 나왔지요.
그도 그럴 게 미야기는 보도가 나온 2003년 4월 자민당 소속으로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터
였습니다. 미야기와 표를 다투는 반대 진영에서 미야기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기려고 이 사
실을 언론에 슬쩍 흘렸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일부에선 ‘재일동포란
사실이 감표 요인이 될까 염려해 미야기 쪽에서 자신이 일본인임을 내세우려고 언론에 정보
를 제공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봤습니다. 어쨌거나 미야기는 ‘재일동포 행세 논란’으로 큰 홍
역을 치렀고, 선거에서도 낙선하고 맙니다.
자, 그럼 김홍명 혹은 미야기는 한국계였을까요? 완전한 일본인이었을까요?
김홍명이 빙그레에서 뛸 때 그 팀의 수장이었던 김영덕 전 감독은 “일본인일 리 없다”고 확
신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빙그레가 김홍명을 영입할 때 신원조회 절차를 거쳤습니다. 한국계임이 확인됐으니
까 빙그레 유니폼을 입은 걸 테고요. 두번째는 김홍명의 요코하마상고 대선배인 고 최인철
씨에요. 최 선생이 김홍명이 빙그레에서 뛸 때 구장에 자주 와서 격려를 해줬습니다. 최 선생
이라면 김홍명 가계를 잘 알았을 텐데 ‘김홍명이 일본인’이란 소릴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세 번째는 제가 잘 안다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전 난카이 호크스에서 투수로 뛰었던 재일동
포입니다. 빙그레에서 감독으로 있을 때 저, 고원부, 김홍명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이
였습니다. 모두 재일동포였으니까 아무래도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시간이 많았죠. 하지만,
단 한 번도 김홍명이 일본인이란 느낌을 받은 적이 없어요. 고원부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고. 일본에서 무슨 소리가 나왔는지 모르지만, 전 지금도 김홍명이 재일동포라
고 생각해요.”
김홍명과 함께 빙그레에서 뛰었던 선수 대부분도 그를 재일동포였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
다. 그러나 그를 의심했던 이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먼저 KBO리그에서 활동하던 재일동포
출신의 한 지도자입니다.
이 지도자는 김홍명을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시지요.
“처음 김홍명을 봤을 때부터 ‘이 친구는 재일동포가 아니다’라는 느낌 같은 걸 받았어요. 한
국어 구사 능력이 아예 제로인 데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어
요. 무엇보다 재일동포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뭔가 통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이 친구는 그
런 게 전혀 없지 않았나 싶어요. 김홍명과 야쿠르트에서 뛰었던 일본 야구인에게 물었더니
‘뭐요? 미야기가 재일동포라고요? 그 녀석과 10년째 알고 지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듣
지 못했습니다. 그럴 리 전혀 없습니다’하면서 펄쩍 뛰더군요. 그때 감을 잡았죠. ‘이 친구,
야구 계속하려고 한국계 행세를 하는구나’하고요.”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의 해프닝
“당시 김홍명을 둘러싸고 ‘재일동포가 아니다’라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다른 재일동포 선수
들은 한 번도 그런 의심을 받은 적이 없는데 유독 김홍명에 대해서만 그런 소리가 나왔죠. 사
실 확인을 해야겠다 싶어 법무부에 제가 직접 연락을 취했습니다. ‘김홍명의 부계나 모계 가
운데 한국계가 있는지 알 수 있겠느냐’고 물었죠.”
돌아온 답변은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확인하기 어렵겠다’고 하더군요. 당시는 지금까지 전산망이 잘 갖춰진 것도 아니고, 한·일
간 정보교환이 원활하던 시절도 아니었어요. 몇 번이고 다시 요청했지만, ‘백방으로 힘써도
부계나 모계 쪽까진 확인이 어렵다’고 했어요. 법무부에서도 확인하지 못하는 걸 KBO가 할
순 없는 일이었어요. 여기다 당시 김홍명의 재일동포 자격을 정식 문제 삼는 사람이나 구단
도 없었어요. 결국 더는 확인할 길이 없어 김홍명 문제를 일단락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전 총장의 노력에도 김홍명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이 든다. 빙그레는 김홍명 영입 당시 ‘NPB에 신원조회를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를
할 당시 야구계는 ‘빙그레가 김홍명의 재일동포 여부를 NPB에 확인한 것’으로 해석하는 분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당시 빙그레가 KBO를 통해 NPB에 신원조회한 건 김홍명의 재일동
포 여부가 아닌 ‘한국 프로야구에서 뛸 수 있는 자격 여부’를 확인하는 통상적인 신분조회
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재일동포 여부’는 어디에서도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선수
의 말과 소개인의 보증이 전부였습니다. 이 전 총장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시지요.
“1980년대만 해도 한국계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었어요. ‘출생증명서를 가져와라’ 하면 됐
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재일동포 선수들은 일본 태생의 일본 국적의 선수들이었고, 당시
엔 한국인임을 숨기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선수들이나 그 선수들의 부모님 출생증명서를 떼
오라고 요구하기도 힘들었어요. 그 순간 한국인임이 밝혀질 테니까요. 설령 그런 위험을 감
수해도 당시 일본 출생증명서에 우리가 알고 싶은 내용이 기재돼 있지 않는 경우도 많았습니
다. 어쩔 수 없이 선수가 ‘제 아버지가 한국계입니다’라고 주장하면 믿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선수를 구단들에 소개해주는 분들이 ‘이 선수가 한국계임을 제가 보증합니다’하면 그걸
또 믿는 수밖에 없었죠. 특히나 당시 한국야구계를 적극 도와주셨던 장훈 선생 같은 분이 보
증을 해주면 꼬치꼬치 깨 묻기 힘든 분위기였어요.”
일본인 미야기가 재일동포 김홍명으로 둔갑한 건 그래서 어수선했던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
의 해프닝일지 모릅니다. 어쨌거나 미야기는 5년 동안 ‘김홍명’이란 이름으로 한국 프로야구
에서 뛰었습니다. 그렇다면 미야기의 입장은 어떨까요.
기자가 수소문한 재일동포 선수 출신의 K씨는 미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현역 시
절 낯선 한국땅에서 미야기와 끈끈한 관계를 맺고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사이였습니다.
K 씨는 “미야기가 재일동포였는지는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사적인 영
역을 내가 이야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라는 게 이유였습니다.
다만,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재일동포 야구인들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편이
다. 연락이 끊겨도 한 다리 건너면 근황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미야기의 근황을 아는 재일동
포 야구인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라며 “미야기도 재일동포 야구인과 거의 어울리지 않는
다”고 귀띔했습니다.
과거 해태에서 뛰었던 주동식 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미야기 씨는 한국에서
뛸 때부터 우리가 전혀 모르던 선수였다.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미야기 씨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 없다. 재일동포 사회에서도 미야기 씨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말
했습니다.
K 씨는 기자와의 대화 말미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미야기 씨가 현해탄(대한해협)을 넘은 건 야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그
는 ‘피’보다 ‘야구’를 더 열정적으로 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일본인이냐,
재일동포였느냐가 이제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미야기 씨가 한국 야구계에 어떤 도
움을 줬고, 그가 한국야구를 통해 무엇을 배웠느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야기는 한국 시절
을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와서 옛 빙그레 동료를 보고 싶어하기도 하지
요. 하지만, 여러 논란 속에 곤란한 위치가 됐어요. 제 바람은 하나입니다. 설령 그가 일본인
이었어도 그가 한국 야구계에 헌신하려던 마음까진 오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기자는 미야기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가 재능 기부하는 야구교실
에도 연락처를 남겼으나 미야기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야구사는 미야기를 어
떻게 기억할까요? 어떻게 기억하든 그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사실만은 영원히 변하
지 않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제공 박동희 칼럼
첫댓글 꿈을 위해서 노력한 부분을 사람들이 기억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