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선생과 신사임당 묘소, 자운 사원, 경기도 파주시.법원읍 동문리
1. 율곡의 저서 [성학집요]의 정신 : 보편적 규범 중시. 성인들의 방법은 다르나 백성들의 마음을 중히 여기고 하늘의 참뜻을 존종.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다. 성인이 죽으면 또 다른 성인이 각 시대에 맞는 내용과 방법으로 백성을 가르침. 전통적 가치는 변함이 없으나 시대적 특수상황 중시. 가치가 시대에 알맞게 구현되어야 한다.
2. 이이의 성리학 학문적 경향은 주기론인데 한국적 성리학의 실천적 방향 제시을 제시한 것이다. 이이가 파악하는 이기론은 이理(정신적)와 기氣(물질적)는 구별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이와 기의 관계는 말을 탄 무사와 말과의 관계로 설명한다.(이승기발론 ; 理乘 氣發論)
3. 이 지역 유적이 잘 정비 된 데는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세심한 배려 덕분이다. 대통령은 그 바쁜 국사 중에도 전국의 역사유적을 가꾸고 보존하는 데 남다른 열정을 보이셨다. 이 점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4. 이이 선생은 학문적으로 기호학파, 경세적이었다. 성리학을 응용적으로 적용하여 정치와 생활에 실천적인 경향을 중시한 것이다. 사후에 내린 존칭 즉 시호가 문성이니 '문성공' 이시다. 이순신을 충무공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실은 이이는 충무공과 같은 집안이다. 덕수 이씨이다.
5. 이율곡 선생 신도비 중종 31년 1536년 강릉 외가 오죽현에서 태어나 6세 때까지 외가에서 살았고, 서울에서 1년을 보낸 후 임진강가 화석정이 있는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로 옮겼다.
6. 이율곡 선생을 모시는 자운서원
7. 이이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이 자운서원 뿐만 아니라 전국의 20 여 개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있다.
8. 자운서원 23세 때 이퇴계를 뵈었다.(퇴계는 59세)퇴계는 율곡에 대하여 “두뇌가 명석하여 많이보고 기억하니 후배란 두려운 것(後生可畏)” 율곡이 하직할 때 퇴계에게 청하니 퇴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 주었다. ‘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어서 귀한 것은 속이지 않는데 있고 벼슬하여 조정에 나가면 공을 세우려고 쓸데없는 일을 만들기를 좋아해서는 안된다.)
9. 유적지의 광장 한 부분 율곡은 13세에 진사가 되었고, 과거시험 아홉번에 모두 장원하였고 한꺼번에 겨우 열 줄밖에 못 읽는다고 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하였다.
10. 자운산 기슭에 있는 이율곡 가족묘 14기가 있는 곳으로 들어 가는 문
11. 여견문을 지나서 이율곡 신사임당의 묘가 있는 곳의 돌계단
12. 맨 먼저 아들 이경림의 묘가 나타난다.
13. 아들 이경림 묘
14. 우리나라 화폐 5만원권의 초상로 나오는 신사임당, 영원한 모성과 지성을 가진 여상상인데, 나이 겨우 48세에 별세하여 단명하신 것이 안타깝다. 아들 율곡 선생도 49세에 들아 가셨으니 수명이 짧았던 집안이었다.
15. 이율곡 선생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합장묘
16. 이율곡 형 이선 부부합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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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율곡 선생과 뒤쪽에 부인 곡산 노씨묘 깊고 넓은 안목을 가진 정치가이며, 봄바람같은 온화한 성품을 가진 위대한 德人으로 한번 우러러보아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19. 이율곡 선생과 뒤쪽에 부인 곡산 노씨묘 계모가 신경질적이고 술을 잘 마셨으면 율곡의 봉급도 제멋대로 쓰고 율곡은 손도 못되게 하였다. 마침내 율곡의 정성에 감동되어 사람이 달라졌다.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3년상복을 입었다. 1584년 49세로 시상을 하직하자 수의 만들 천조차 없었다. 영구가 서울을 떠나자 횃불을 들고 따르는 시민이 수십리.
20. 율곡 이이 선생과 부인의 묘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의 선생의 묘소에는 부인 노씨의 봉분이 그 뒤에 있다. 왜란 중 부인이 왜병에 항거하다 시녀와 함께 칼에 맞아 죽었다. 일년후 시신을 거두니 누가 누구인지 몰라서 였다.
21. 이율곡 선생 묘에서 바라본 모습, 바로 아래가 형 이선의 부부 합장묘, 그 다음 부모인 이원수와 심사임당 합장묘, 제일 아래 쪽은 아들 이경림 부부 합장묘
22. 불멸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이 세상은 부서지는 세상인 것을 그들은 그를 잊지 말자고 영영 잊지 말자고 비를 세웠다 그들은 그의 이름을 그 비에 새겨 세웠다. 고은 <어느 기념비, 제1연>
23. 꽃과 무덤과 비석이 흐린 날씨 속에서 얘기를 나눈다. 살아있는 것, 죽어있는 것 살지도 죽지도 않은 것, 어느 것이 더 오래 가겠는가?
24. 진달래와 벗꽃이 4월말에 아직 피었다.
25. 이율곡 선생묘 참배
26. 이율곡 선생의 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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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이원수 신사임당 묘앞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신사임당의 그림 초충도를 관람했었다.
30. 신사임당 묘 율곡이 16세 때 부 이원수가 수운판관이 되어 공무로 평안도 출장 갈 때 따라갔는데, 어머니 신사임당이 갑자기 병이 들어 돌아 가심에 임종도 못하고 여의고 말았다. 어머니를 여윈 율옥은 마음을 달랠길 없었는지, 18세 때 봉은사 금강산 유점사 등에서 승려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승려의 길은 그에게 맞지 않아 환속하였다.
31. 율곡 선생 얘기를 전해 듣고 내자는 신이 났다.
32. 젊을 때 이곳에 와서 신사임당 얘기를 들었다면, 사람이 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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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율곡 선생 유적지 화석정 이율곡 선생은 앞을 내다 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10만양병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심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조상의 고향인 이곳에 와서 지내셨다. 뒤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정치를 하러 들어 가셨는데, 그 사이 수년간 이 곳 율곡리 일원에서 학문과 교육을 하며 지내셨다.
35. 이율곡 선생 유적지 화석정,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의 별서인 평천장의 記文을 따서 조부 이숙함이 정자이름을 지었다. 여기는 크게 볼 거리는 없어도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율곡의 선견지명이 이곳에도 일화가 전한다. 이 정자에 기름을 많이 먹여두면 후일 쓰을일이 있다고 했다. 과연 왜란이 일어나 선조 임금이 칠흑같은 밤중에 이 곳 임진강을 건너 피난할 때 이 정자에 불을 붙여서 밝혀 도강 피난길을 도왔다는 얘기다. 물론 이 때는 율곡은 고인이 된 이후이다. 그런데 기대했던 이야기는 이곳 안내판 어디에도 없어서 서운하다.
36. 화석정에는 이율곡 선생이 8세 때 지은 한시를 돌에 새겼다.
花石亭 詩 이율곡 8세 시
林亭秋已晩 /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騷客意無窮 /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 /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에 잇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 /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 / 산위에는 둥근 달이 떠 오르고 江含萬里風 /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먹음었네. 寒鴻何處去 /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 / 울고 가는 길기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37. 화석정 안내문
38. 보이는 강은 화석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임진강(오른쪽편으로 경치) 화석정 바로 아래에 도로가 생겨 정취를 깨뜨린다.
39. 보이는 강은 화석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임진강(왼쪽편으로 경치) 화석정 바로 아래에 도로가 생겨 정취를 깨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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