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철학초고
K. 맑스,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제1초고
제1장 노동임금
임금노동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인 투쟁에 의해서 결정된다.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자본가 쪽이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자본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보다 더 오래 노동자 없이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들 사이의 단결은 상습적이고 효과적이지만, 노동자들의 단결은 금지되어 있고, 이는 그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또, 토지소유자와 자본가는 자기들의 수입에 산업상의 이익을 덧붙일 수 있으나, 노동자는 자신의 소득에 지대도 자본이자도 덧붙일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매우 심하다. 이렇게 해서 자본 및 토지 소유와 노동의 분리가 필연적⋅본질적이고, 더욱이 유해한 것이 되는 것은 노동자에 대해서뿐이다.(경철15)
노동임금을 정하는 최저한도의 임금 수준은 노동하는 노동자의 생계비이며, 노동자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고 노동자 종족들이 사멸하지 않을 만큼이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통상적인 노동임금이란, 순수한 인간생활, 다시 말해 가축 정도의 생존에 알맞은 최저임금이다.(경철15)
일반적으로 주목되어야 할 일은, 노동자와 자본가가 똑같이 손해를 입는다 해도, 노동자의 경우에는 손해를 입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존이지만, 자본가의 경우에는 그의 죽은 화폐가 낳은 이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경철17)
노동자는 자신의 물리적인 생활필수품 때문만이 아니라.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즉 [노동이라고 하는] 자신의 활동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수단을 얻기 위해서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경철17)
노임의 상승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과로를 일으키게 한다. 노동자들은 많이 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의 시간을 희생시켜, 모든 자유를 내던지고 탐욕에 봉사하는 노예노동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때 노동자는 스스로의 수명을 단축시키게 된다. 이와 같이 스스로의 수명단축은, 노동자 계급 전체에 대해서는 유리한 상태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서 항상 새로운 공급이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계급은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일부를 항상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경철17)
분업이 늘어나도, 자본의 집적이 늘어나도, 노동자는 더욱더 오직 노동에, 그것도 틀에 박히고 매우 일면적인, 기계적인 노동에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기계로 전락하고, 인간에서 벗어나 추상적 활동과 하나의 위(胃)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는 또한 더욱 시장가격이나 자본의 투하, 부자들의 변덕에만 의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다만 노동밖에 할 수 없는 인간 계급의 증가에 의해 노동자들의 경쟁은 높아지고, 따라서 노동자의 가격이 하락한다. 노동자의 이와 같은 처지가 정점에 이르는 것은 공장제도에서이다.(경철18)
번영하고 있는 사회에서 금리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상당한 부자들뿐이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본으로 무엇인가 장사를 하든가, 그 자본을 상거래에 투자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 사이의 경쟁은 심해지고, 자본 집중이 커져서, 대자본가가 소자본가를 파멸시켜, 이전의 자본가 일부가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이런 그들의 유입으로, 어떤 면에서는 거듭 노임의 하락을 당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소수의 대자본가들에게 더욱더 의존하게 된다. 자본가의 수가 줄어듦으로써 노동자를 둘러싼 그들의 경쟁은 이제 거의 없어지고, 노동자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노동자끼리의 경쟁은 그만큼 심해지고, 부자연스럽고, 폭력적이 된다. 따라서 중간 자본가 일부가 노동자 지위로 전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노동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의 일부는 거지 신세나 기아 상태로 전락한다.(경철18)
그러므로 노동자에게 가장 유리한 사회 상태에 있어서까지도, 노동자들에 닥치는 필연적인 결과는, 과로와 때 이른 죽음, 기계로 전락, 노동자의 눈앞에서 위협적으로 집적되어 가는 자본의 노예, 새로운 경쟁, 노동자 일부의 아사 또는 거지로의 전락이다.(경철18)
노동임금의 상승은, 자본가가 품는 것 같은 금전욕을 노동자에게 불러일으키지만, 노동자는 이 금전욕을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희생하지 않고서는 채울 수가 없다. 노동임금의 상승은, 자본의 집적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초^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더욱더 낯선 것으로 대립한다. 마찬가지로 분업은 노동자를 더욱더 일면적이고 의존적인 것으로 만듦과 동시에 인간 사이의 경쟁뿐 아니라 기계 간의 경쟁까지도 초래한다. 노동자가 기계로 전락되기 때문에 기계가 경쟁자로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자본의 집적은, 산업의 양을 증가시키고, 따라서 노동자 수를 증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집적에 의해 똑같은 산업의 양은 보다 많은 제품을 산출한다. 이는 과잉생산이 되어, 그로 인해 대부분의 노동자들의 실직하거나, 그들의 임금을 비참할 정도로까지 끌어내린다.(경철18-19)
요컨대, 쇠퇴하고 있는 사회 상태에서는 노동자의 궁핍은 누진적이 되고, 번영하는 상태에서는 복합적 궁핍, 발전이 정점에 이른 상태에서는 정체적 궁핍이 된다.(경철19)
그런데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사회는 행복하지 않으나, 가장 풍요한 사회 상태도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초래하며, 경제 활동(일반적으로 사적 이익 사회)은 그 가장 풍요로운 상태를 초래하므로, 사회의 불행이야말로 경제 활동의 목적이 되는 셈이다.(경철19)
그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부분, 또는 그가 인류를 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라고 하는 노예 계급을 번식시키는 데에 필요한 부분밖에 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경철20)
동시에 노동자가 무엇이든 살 수 있기는커녕 자기 자신과 자기의 인간성을 팔지 않을 수 없다고도 말한다.(경철20)
경제학자에 의하면, 노동자의 이해는 사회의 이해와 결코 어긋나지 않는데, 사회는 항상 필연적으로 노동자의 이해에 어긋난다.(경철21)
경제학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도 지대도 가지지 않고 노동만을, 더욱이 일면적이고 추상적인 노동만을 의지해서 생활하는 사람을, 다만 노동자로밖에 보지 않는다.(경철21)
경제학은 노동을 하고^ 있지 않을 때의 노동자를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고찰을 형사재판⋅의사⋅종교⋅통계표⋅정치⋅거지단속관 등에 일임해 버린다.(경철21-22)
한 나라의 산업 부문에서 발생한 노동시간의 증가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착취할 권리가 아직도 어디서든지 인정되고 있는 이상, 다소를 막론하고 다른 곳에도 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슐츠: 생산의 운동, p. 65)(경철23)
‘그러나 사회의 모든 계급의 평균소득이 늘어났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말이라고 해도, 그래도 또한 소득의 차이와 상대적인 소득격차가 커져서, 그에 따라 부와 빈곤의 대립이 격화되는 일은 있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총생산이 높아지기 때문인데, 총생산이 높아짐에 따라 욕구나 욕망이나 요구도 높아지고, 따라서 절대적인 빈곤이 줄어든 반면, 상대적인 빈곤이 늘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앞의 책, p. 65~66)(경철23)
‘프랑스에서 한 계산에 의하면, 현재의 생산 단계에서 사회의 모든 물질적인 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 1인당 하루 5시간의 평균 노동시간이면 충분하다고 계산했다. ⋯ 그러나 기계 장치의 개선에 의한 시간의 절약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장에서 노예 노동의 지속시간은 늘어날 뿐이었다.’(앞의 책, P. 67~68)(경철24)
기계화의 이런 급속한 진보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자본가들이, 어린이에 이르기까지의 하층 계급의 노동력을 매우 간단하고 값싸게 손에 넣을 수가 있기 때문에, 기계화라고 하는 보조 수단에 의지하지 않고 노동력을 사용하고 악용하고 있는 사정 바로 그것 때문이다.’(앞의 책, p. 70~71)(경철25)
노동자는 항상 노동을 판매하도록 강요받는다. 노동이 그때마다 판매되지 않으면 그 가치는 완전히 상실되고 만다. 노동은 현실적인 ‘상품’과 달라서 저장할 수도 없고 절약할 수도 없다. 노동, 그것은 생명이다. 이 생명은 매일 자신을 음식과 교환하지 않으면 손상을 받아 이윽고 죽고 만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이 하나의 상품이기 위해서는 노예제를 허용해야 한다.’(뷔레: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노동자 계급의 빈곤에 대해서 제1권, p. 49~50)(경철27)
‘따라서 노동이 상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가장 불행한 특성을 가진 상품이다. 그러나 경제학의 여러 원칙에 따른다 해도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거래의 자유로운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앞의 책, p. 50)(경철28)
산업의 목표는 부의 소유이지 인간의 행복은 아니었다.’(앞의 책, p. 20)(경철28)
노동자들을 소집한 산업이 그들을 살려두는 것은 그들이 필요할 때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없어도 해 나갈 수 있게 되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버리고 만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인격이나 힘을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의 가격으로 제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노동자에게 할당되는 노동이 길고 괴롭고 불쾌한 것일수록 지불되는 보수는 적어진다.(앞의 책, p. 68~69)(경철28~29)
제2장 자본의 이윤
이 소유가 그에게 직접 위임하는 종류의 힘이란 ‘구매하는 힘’으로, 타인의 모든 노동에 대한, 또는 그때 시장에 존재하고 있는 타인의 노동 생산물 모두에 대한 명령권이다.’(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1편, p. 61)(경철30)
따라서 자본은 노동과 그 생산물에 대한 지배권이다. 자본가가 이 권력을 갖는 것은 그의 개인적 또는 인간적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본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자본이 휘두르는 구매하는 권력, 그 무엇도 저항할 수 없는 이 권력이야말로 그의 권력인 것이다.(경철30-31)
자본이란 무엇인가? ‘어느 일정량의 집적, 축적된 노동이다.’(스미스: 앞의 책 제2편, p. 312) 자본이란 축적된 노동인 것이다.(경철31)
공급된 상품에 포함되는 노임을 최저가격까지, 즉 노동자가 노동을 하고 있는 동안 먹여 살릴 수 있는 생활비까지 바짝 줄일 수 있는 액수이다. 노동자는 그가 일을 위해 매일 사용되고 있는 한,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부양되어야 한다.(앞의 책 제1편, p. 197-198)(경철33)
‘자본가에게 있어 자본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이란, 항상 똑같은 확실성으로 최대의 이익을 거기에서 낼 수 있도록 사용하는 일이다. 이런 사용은 사회에 대해서 반드시 가장 효과적인 사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세이: 경제학 개론 제2권, p. 131)(경철35)
‘어떤 특수한 상업 부문이나 제조 부문을 경영하는 사람들의 특수한 이해는, 어떤 점에서는 공중의 이해와는 다르고, 오히려 그것과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기도 한다. 상인의 관심은 항상 시장을 확대하고, 판매자의 경쟁을 제한하는 데에 있다. ⋯ 자신들의 이해가 사회의 이해와 결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계급으로, 일반적으로 공중을 기만하고, 공중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는 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계급이다.’(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1편, p. 163, 165)(경철36)
경쟁이야말로 자본가에 대한 유일한 대항수단이다. 경제학이 하는 말에 의하면, 경쟁은 노임을 높이는 데에나, 상품을 싸게 만드는 데에도 좋은 영향을 주어 소비자 대중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경철36)
각 자본 간의 경쟁은 자본 간의 축적을 증대시킨다. 사적인 소유가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 축적이 이루어지면, 소수자에게로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자본이 자연의 추세에 일임되는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일이며, 본디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는 자본은, 경쟁에 의해서 더욱더 자신들의 자유로운 길을 열어 가게 된다.(경철36-37)
대자본가가 소자본가를 밀어내려고 할 경우, 그는 소자본가에 대해서도 어디까지나 자본가이기 때문에 노동자에 대해서 갖는 모든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대자본가는 이윤이 적어져도 큰 자본을 내세워 그것을 메울 수가 있고, 비록 일시적인 손해를 입는다고 해도 소자본가들이 파산하여 이 경쟁에서 해방될 때까지의 손실을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자본가는 소자본가^들의 이윤을 자기에게로 축적을 할 수가 있다.(경철38-39)
‘이에 비해 토지의 연속적인 분할이 입법에 의해 허용되고 있는 곳에서는, 프랑스의 경우처럼, 부채를 짊어진 소토지소유자의 수가 늘어나고, 그리하여 그들은 토지의 계속되는 세분화에 의해서 가난한 자와 불만분자의 계급으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이런 세분화와 과중한 부채가 늘어나면, 대공업이 소공업을 멸망시키는 것처럼, 대토지 소유가 소토지 소유를 다시 삼키고 만다. 그렇게 되면 다시 더욱 큰 토지 집합체가 이루어지므로, 토지의 경작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게 된 다수의 무산 노동자들은 다시 공업으로 몰리게 된다.’(슐츠: 생산의 운동, p. 58-59)(경철41)
개개의 공업 부문에서 부분적으로 과잉생산이 일어나 파산이 자주 생기고, 그에 따라 자본가와 고용주 계급 내부에서 재산의 불안정한 동요와 변동이 일어나, 경제적으로 파탄된 사람들의 일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한 결과, 갑자기 자주 노동의 중단이나 감소가 불가피하게 벌어지고, 임금노동자 계급은 이 불이익에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다.’(앞의 책, p. 63)
‘자산가들은 인간이 정하는 법률에 의해서, 모든 노동의 재료를 사용, 남용하는 권리, 즉 그 재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 그들은 이 법률에 의해, 무산자들에게 알맞은 시기에 항상 노동을 제공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충분한 급료를 그들에게 지불하는 의무를 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앞의 책, p. 413)
경쟁: ‘어느 경우에도 그는 항상 우연에 의해 농락되고 있고, 가장 강한 자, 가장 가난하지 않은 자, 가장 풍요한 자의 법률의 노예이다. ⋯ 이떤 곳에서는 부의 결핍이 있는데, 다른 곳에는 부가 과잉이고 낭비가 있다. (⋯) 피할 수 없는 귀결은, 파산의 상태화(常態化)와 만연, 오산, 갑작스런 파멸과 뜻하지 않은 행운이며, 상업의 위기, 실업, 주기적인 공급 과잉 또는 상품 부족이며, 임금과 이윤의 불안정과 저하이며, 격렬한 경쟁의 투기장에서의 물자, 시간과 노력의 소모 내지는 엄청난 낭비이다.’(앞의 책, p. 414-416)(경철43)
리카도에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생산물이야말로 그 전부이다.(경철43-44)
‘자본을 매우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이 자체는 유산계급과 그렇지 않은 무산계급의 대립을 격화시키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슐츠: 생산의 운동, p. 40-41)
주택임대자가 빈곤으로 인해 거두어들이는 터무니없는 이윤. 집세는 산업적 빈곤과 반비례 관계에 있다. 마찬가지로 몰락한 프롤레타리아의 악습(매춘⋅알코올 의존⋅전당포)으로부터도 이익을 끌어낼 수 있다.(경철46-47)
제3장 지대
토지소유자의 권리는 약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세이: 경제학 개론 제1권, p. 136) 토지소유자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 수확하고 싶어하고, 그 토지에서 얻어지는 자연적 생산물에 대해서조차 지대를 요구한다.(스미스: 국부론 제1편, p. 99)(경철48)
‘토지의 사용에 대해서 지불되는 가격이라고 여겨지는 한에 있어서의 지대는 당연히 하나의 독점가격이다. 지대는 토지소유자가 토지에 가하는 개량이나, 그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받아야 하는 것에도 결코 비례하지 않고, 오히려, 차지인이 손해 보지 않고 가능한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에 비례한다.’(앞의 책 제1편, p. 302)(경철49)
지대는 차지인과 토지소유자 사이의 투쟁을 통해서 결정된다. 경제학에서는 어디에서나 이해의 적대적 대립, 투쟁, 전쟁이 사회 조직의 기초로서 승인되어 있다.(경철50)
(1) 경제학의 원칙에 따르면, 토지소유자는 사회의 복지에 이해관계가 있^어, 사회의 인구와 인위적 생산 증진, 사회의 욕구 증진, 즉 한 마디로 말하자면 부의 증진에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제까지의 고찰에 의하면, 이 증진은 가난과 노예 상태의 증진과 동일하다.(경철54-55)
(2) 토지소유자의 이해는 차지인의 이해와, 따라서 사회의 중요한 일부분의 이해와도 적대적으로 대립한다고 하는 것은 경제학자 자신도 인정하는 바다.(경철55)
(5) 이렇게 해서 토지소유자의 이해는 사회의 이해와 일치하기는커녕 차지인⋅농노⋅제조업 노동자⋅자본가의 이해와 적대적인 대립 관계에 있는데, 토지소유자끼리의 이해까지도 경쟁 때문에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경철55)
일반적으로도 이미 대토지 소유와 소토지 소유 사이의 관계는 대자본과 소자본 사이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특수한 사정이 가해져서 대토지 소유의 축적과 대토지 소유에 의한 소토지 소유의 흡수가 무조건 야기된다.(경철55)
이 경쟁이 지니는 또 하나의 결과는, 토지 소유의 대부분이 자본가의 손에 떨어져서 자본가가 동시에 토지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 본디 소토지소유자들은 그 이전에 이미 자본가가 되어 있는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또 일부의 대토지 소유는 공업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경철58)
그렇다고 하면 마지막으로 귀결되는 것은 자본가와 토지소유자의 구별의 해소이다. 이렇게 해서 전체적으로 보면 주민의 두 계급, 즉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만이 존재하게 된다. 소유지의 이런 상거래와 상품으로의 전환이야말로 낡은 귀족제의 최종적인 붕괴인 동시에 화폐귀족제의 최종적인 완성이 된다.(경철58)
일반적으로 토지 소유와 함께 사유재산의 지배가 시작된다. 토지 소유가 사유재산의 기초인 것이다.(경철58)
관습이나 성격 등은 토지마다 변하고 토지와 하나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를 토지와 관련지우는 것은 인간의 성격이나 개성이 아니라 돈주머니가 그를 땅에 결부시킨다. 마지막으로, 영주는 자신의 소유지로부터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이익을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곳에 있는 것을 모두 소비할 뿐, 이의 조달에 대한 배려는 농노나 차지인에게 편안하게 맡겨버린다. 그것은 토지 소유를 둘러싼 귀족적인 관계이며, 이런 관계가 그 영주에게 낭만적인 영광을 던지는 것이다.(경철59)
이런 가상이 파기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즉 사유재산의 근원인 토지 소유가 사유재산의 운동 속으로 끌려들어가 상품이 되고, 소유자의 지배가 모든 정치적인 색채를 벗고, 사유재산의, 즉 자본의 순수한 지배로서 나타나고, 소유자와 노동자 사이의 관계가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경제적인 관계로 환원되고, 재산에 대한 소유자의 인격적인 관계가 모두 없어지고, 그 재산이 다만 사물적인 것밖에 되지 않는 물질적인 부가 되고, 토지와의 명예로운 결합이 이해의 결혼으로 대체되고, 인간과 마찬가지로 토지도 상거래가 되는 가치밖에 없는 것으로까지 전락해 버린다는 것 등은 필연적이다. 토지 소유의 근원에 가로놓인 것, 즉 파렴치한 사욕이 시니컬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안정된 독점이, 동적이고 불안정한 독점으로, 즉 경쟁으로 전환되어, 타인의 피와 땀의 결정인 토지가 바쁜 거래로 전환되는 것도 또한 필연적이다. 마지막으로 이 경쟁 속에서, 자본이라고 하는 형태를 취한 토지 소^유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지배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자본의 운동법칙은 소유자를 파멸케 하든가 번영하게 하든가 하기 때문에, 소유자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발휘한다는 것도 필연적이다. 이렇게 해서 ‘영주 없는 토지는 없다’라고 하는 중세의 속담은, ‘돈은 주인을 가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근대적인 속담으로 대체되어, 사람에 대한 죽은 물질의 완전한 지배가 표현된다.(경철59-60)
토지 소유의 분할은 독점의 근거인 사유재산을 폐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점의 현실존재에는 손을 대도, 독점의 본질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그 결과, 이 분할은 사유재산의 여러 법칙의 희생이 되고 만다. 즉 토지 소유의 분할은, 공업분야에서의 경쟁 운동에 보조를 맞춘 것이다.(경철60)
가능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현실 존재로까지 이른 독점의 폐지는 독점의 완전한 근절이다. 협동조합은, 이것이 토지에 적용될 경우 대토지 소유가 갖는 경제상의 이익을 분배하여, 토지 소유의 본디의 의도, 즉 평등을 비로소 실현한다. 또, 협동조합은, 이제는 농노제나 권력이나 터무니없는 재산신비설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토지에 대한 인간의 정이 넘치는 관계를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토지는 악랄한 장사의 대상은 더 이상 되지 않고, 자유로운 노동과 자유로운 누림을 통해서 다시 인간의 참다운 인격적인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경철60)
따라서 대토지 소유는 그 나라의 노동자와 그 모든 활동을 상태편 쪽으로 몰아냄으로써, 자신의 적인 자본이나 공업의 힘을 기르게 하고 이를 강화시킨다. 그것은 그 나라 대다수의 사람들을 공업화하고 따라서 대토지 소유의 적대자로 만든다. 일단 경쟁으로 내몰리면, 경쟁에 놓인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토지 소유도 또한 경쟁의 여러 법칙에 따른다. 토지 소유도 또한 불안정해져서 증감되고 이리저리 사람 손을 전전하여 그 어떤 법칙으로도 이미 그것을 소수의 미리 전해진 손 안에 유지해 둘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은 토지가 많은 사람의 손으로 분산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토지가 산업자본의 힘에 굴복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경철62)
영국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토지 소유는 그것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한, 조기에 그 봉건적 성격을 벗어던지고 하나의 공업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토지 소유는, 소유자에게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지대를, 차지인에게는 그 자본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이윤을 준다. 그 때문에 농업노동자(의 노임)은 최저까지 절하되고, 차지인 계급이 토지 소유에 안에 있으면서 이미 공업과 자본의 세력을 대표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최소한으로 절하되어 있던 노임은 새로운 경쟁에 견디기 위해 더욱 절하된다. 그러면 이는 필연적으로 혁명으로 귀결된다.(경철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