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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 장
드디어 현성비무대회 삼 일째. 결선이 열리는 날이다. 마지막 날의 비무대회장은 누구나 예상했듯이 난리통은 저만치 가라였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 하기위해 햇살이 비치기도 전에 몰려든 사람들끼리 곳곳에서 드잡이 질이 벌어졌고 때때로 피 튀기는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몫 건지려는 사람들은 입추의 여지없이 천막을 세워 즉석 음식점을 개업했고, 조그만 틈이라도 있으면 좌판을 깔아 놓았다.
강가에도 어디서 띄워왔는지 수많은 조각배들이 선착해, 그곳에서도 음식과 과자 특산품등 각종 상품들을 진열해 놓아 큰 시장을 방불케 했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비무대회장이 보이는 강가까지 도착한 진우청은 볼을 씰룩거렸다.
“비무대 위에서도 모자라, 이젠 지독한 독까지 뿌려서 날 죽이겠다고……?”
비무대 쪽을 쳐다본 진우청은 이를 갈았다.
“여기서 이런 비무대회를 열고 뭘 하려는지 몰라도 오늘은 아예 개판을 만들어주지…….”
뚱하게 내뱉은 진우청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어떤 자식이……!”
관중들 속으로 파고드는 진우청의 가슴에 밀린 사내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고개를 돌리다가 진우청의 덩치를 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어제의 승자임을 알아보았는지 놀란 눈빛과 함께 자진해서 길을 열어 주었다.
“저기 있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던 진우청은 어딘가를 노려보며 그 자리에 섰다.
진우청의 시선이 닫은 곳에는 화려한 천막이 하나 쳐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일견하기에도 칼날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내들이 엄중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보표들 같았다. 몇 명 되지 않았지만 그들만으로도 천막 주변은 철벽이 쳐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그 천막 한 가운데에 임문정이 앉아 있었다.
“돈이 많아서 그런지 호위하는 개들도 최상품이군.”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은 진우청은 다시 관중들을 헤집으며 걸음을 옮겼다. 진우청의 힘에 밀린 관중들이 좀 전의 사내들처럼 인상을 썼다가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길을 터주었다.
“임 형!”
한 자루 칼처럼 서 있는 사내들 앞에까지 접근한 진우청은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고함소리에 주변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뒤이어 임문정도 고개를 돌렸다. 임문정의 하얀 얼굴이 순간적으로 더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임 형! 여기 계셨구료. 한참 찾았소!”
진우청은 더없이 반가운 표정으로 임문정을 향해 다가갔다.
스스슥-
싸늘한 표정을 한 사내들이 미닫이문이 양쪽에서 닫히듯 움직이며 진우청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들 이러시오?”
걸음을 멈춘 진우청은 뚱한 표정으로 사내들을 내려다보며 낮게 깔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들은 진우청의 말에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칼날처럼 서 있었다.
“거 참!”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진우청은 제일 가까이 선 사내를 슬쩍 몸으로 밀었다. 움찔한 사내가 급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사내의 신형은 어느새 동료들보다 족히 두 걸음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
사내의 눈에서 폭광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가 아니었으면 당장 검이 휘둘러졌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스스스-
다른 사내들이 순식간에 밀려난 동료를 대신하며 다시 울타리를 쳤다. 그러나 간단하게 몸을 튼 진우청의 신형은 사내들이 친 울타리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동료 하나가 속절없이 뒤로 밀리는 것을 보고 잔뜩 경계하며 서 있었던 사내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몸으로 밀고 들어올 줄 알고 온 몸에 힘을 잔뜩 준 사이, 진우청의 신형은 그 굳은 몸들 사이로 바람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스읏!
잠시 굳은 표정으로 진우청을 쳐다보던 임문정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검병에 손을 대고 그대로 뽑아 휘두르려던 사내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주춤거리는 기색으로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진우청은 스스럼없이 임문정에게로 다가갔다.
“어서 오시오, 진 공자!”
어느새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온 임문정은 진우청에게 자리를 권했다. 진우청은 주저 없이 임문정이 권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임문정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벌컥 마셨다.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의 온몸에서 다 감추지 못한 살기가 금 간 독에서 물이 새듯 새어 나왔다.
“무슨 관중들이 이리 많은지……. 임 형 찾느라 진이 다 빠졌소!”
진우청은 물 잔을 내려놓으며 이젠 좀 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날 찾았소?”
잠시 진우청을 쳐다보던 임문정은 전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우선 내 일행들을 돌려보내 준다고 한 약속을 지켜서 고맙다는 말도 해야겠고, 또 어제는 너무 무례하게 군 것 같아 사과도 하고 싶었고…….”
진우청은 연신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만한 자리를 찾을 수가 없더군요.”
진우청은 빽빽이 들어찬 군중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진우청의 말에 임문정은 잠시 대화를 끊고 진우청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윽고 임문정의 입가에서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설마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임문정이 억양이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또 겸사겸사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
진우청은 슬쩍 임문정의 표정을 살폈다.
“말해보시오!”
임문정은 여전히 가면이라도 쓴 것 같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공동으로 우승하면 상금은 어떻게 주는 것이오? 반반씩 나누어 주는 것이오?”
전혀 예상 밖의 질문에 임문정의 눈빛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임문정은 다시 표정을 지우며 답했다.
“그런데 그런 건 왜 물으시오? 이제 진 공자는 출전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텐데요.”
“생각해 보니 좀 더 출전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소. 돈 만 냥이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진우청은 점점 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주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놈이 어디 가서 그만한 돈을 벌겠소? 그래도 맷집 하나는 자신이 있으니,
다섯 대 맞고 한 대 두드리는 식으로 싸우다가 같이 지쳐 나가떨어지면 공동우승도 가능하겠다 싶어…….”
진우청은 점점 복잡한 색을 띠는 임문정의 눈은 전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말만 했다.
“그런데 이 의자 정말 편하구료.”
상체를 흔들어 보던 진우청은 느긋하게 등을 젖히며 두 발을 탁자위로 올렸다. 탁자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실제로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아이쿠! 이게 웬 날벼락이냐?”
진우청은 황급히 다리를 들어올리며 발목을 주물렀다.
“정말 미안하오! 꽤나 비싼 것 같은데.”
진우청은 반쯤 바닥에 박힌 채 박살이 난 탁자 조각을 주워들며 말했다. 임문정의 눈빛이 다시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은 임문정은 입술을 움직였다.
“괜찮소. 급하게 구하다보니 보기와 다르게 부실한 물건을 구한 것 같소.”
임문정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다니 다행이오. 하긴, 뭐,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임 공자에게 이런 싸구려 탁자는 안 어울리기도 하지요…….”
고개를 끄덕거린 진우청은 그나마 온전한 부분까지 비틀어 부숴버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우청과의 몸싸움에서 밀려난 사내는 물론이고, 다른 사내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들이 이젠 쇠라도 녹일 듯 했다.
“이곳이 편할 것 같아. 염치 불구하고 파고들었는데 더 불편할 것 같소. 쩝!”
입맛을 다신 진우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가 많았소. 구경 잘 하시오.”
어색한 웃음과 함께 포권을 지어보인 진우청은 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 참! 이쪽이 아니구나!”
걸음을 옮기던 진우청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뒤에 선 사내를 향해 불쑥 다가갔다. 진우청과 부딪치게 된 사내가 급히 신형을 이동했다.
그러나 그 사내가 발을 디뎌야 할 곳에 공교롭게도 방석만한 진우청의 발이 먼저 위치하고 있었다.
툭!
경각심을 느낀 사내가 디디려던 발을 급히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슬쩍 상체를 움직인 진우청이 지극히 우연한 실수처럼 사내와 부딪쳤다.
우당탕-
사내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쿠! 이거 거듭 미안하오!”
다시 한 번 포권을 쥐어 보인 진우청이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진우청이 휘젓고 사라진 임문정의 천막에는 한참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임문정은 임문정 대로, 진우청에게 밀리거나 튕겨나간 보표들은 보표들 대로 입술만 굳게 닫은 채 석상처럼 서 있었다.
모두들 누군가에 부딪쳐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갈 사람들은 절대 아니었다. 그건 지독한 수치감과 함께, 팔 다리가 하나 잘려나가는 것보다 더한 좌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곰 가죽을 뒤집어 쓴 너구리였단 말이군. 후후!”
잠시 후, 임문정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게다가 이빨마저 더없이 날카롭단 것도 확인되었고…….”
임문정의 목소리가 점점 차가워졌다.
“혈갈쌍독(血喝雙毒)이 실패했단 말인가?”
임문정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새벽에 벌어진 인가장의 사건을 수습하느라 그들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어쩌면 그들은 어제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저 놈이 저렇게 멀쩡히 걸어 다닐 수가 없을 것이다.
완벽한 기회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그들의 장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했다.
어쨌든 어제저녁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확실했다. 그런 생각과 함께 임문정은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골치 아프게 돌아가지만 권주를 사양하고 벌주를 마시겠다면 그렇게 해 주지. 정윤(丁允)!”
독백을 끝낸 임문정이 보표 사내 하나를 불렀다.
“하명하십시오!”
“너는 관아로 달려가 인근에서 발견된 시체 두 구가 있는지 확인해라. 그리고 명성(冥成)! 너는 소중부에게 다시 한 번 갔다 와야겠다.”
임문정의 목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임문정의 천막 안을 한바탕 휘저은 진우청은 관중들 사이를 빠져나와 정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많은 사람들을 헤집고 움직이는 동안 백운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도 해천 노인의 집으로 갔으니 그곳에서 이여옥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백운 노인을 만나면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우청은 고개를 빼었지만 여전히 백운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사람을 못 봤다고 해서 어떤 사람도 자신을 못 보라는 법은 없다.
“진 공자님!”
등 뒤쪽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우청은 얼른 등을 돌렸다. 백운노인의 손녀 조수아였다. 잠시 떨어졌는지 백운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일찍 왔군요.”
진우청은 가볍게 목례를 건넨 후,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조수아의 얼굴을 담담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쉰 냥도 넘는 물건을 열 냥에 후려칠 정도로 암팡지고 영리한 기운이 얼굴에 넘쳐흘렀는데 지금은 사색이 된 표정이었다.
조수아 역시 이여옥이 인가장으로 간 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진우청은 그녀의 얼굴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아차! 하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의 이런 시선을 절대로 용납할 소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수아는 진우청이 예상하는 반응은 보이지 않고 무슨 말인가 꺼내려다 말고 하며 머뭇거렸다.
“할 말이 있으시오?”
진우청은 내심을 드러내지 않능 음색으로 질문을 던졌다.
“언니… 여옥언니가…….”
조수아는 금방 울먹이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몇 마디 꺼내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진우청은 조수아의 입에서 나온 여옥언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척 조수아를 쳐다만 보았다.
조수아는 이여옥이 집을 떠나 인가장으로 간 것을 진우청이 당연히 모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조수아 뿐만 아니라 그건 누구도 마찬가지이리라.
진우청 자신으로서는 두 번이나 직접 겪어본 인장호란 놈! 그런 놈에게 이여옥이 넘겨졌다는 사실에 조수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실상은 인장호가 아니라 임문정에게 넘겨졌다. 그것도 자신의 손에 의해서…….
그 사실까지 이 소녀가 알게 된다면? 또한, 집을 떠난 이여옥이 인장호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까지 알게 되면 이 소녀는 까무러치고 말 것이다.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약이라는 생각과 함께 진우청은 시치미를 떼고 무감동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왜 그러시오? 이 소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소?”
“어제 공자님과 춤을 추고 난 후 언니는…….”
“수아야!”
결심한 듯 빠르게 말을 꺼내려던 조수아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백운 노인이 어제의 그 젊은이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잘 주무셨습니까, 노인장!”
진우청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자네도 잘 잤는가?”
백운 노인은 한줄기 근심이 어린 안색을 애써 밝게 하며 대꾸했다.
“저야 잠이 오면 빙판 위에서도 자는 체질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진우청은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백운노인과 조수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별일 아닐세! 그리고 나로서도 이해가…….”
몇 마디 더 이어가던 백운 노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진우청은 백운 노인의 언행에서 이여옥이 무엇 때문에 동방회로 갔는지 물어보고자 하던 의도를 접었다.
백운 노인의 표정은 손녀 조수아 만큼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진우청 자신이 도리어 이 노인에게 이여옥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싶었다.
그녀는 결코 강압에 의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뭔지는 모르겠지만 굳은 결심과 함께 스스로의 길을 가고 있다고…….
“그런가요? 그럼 재미있게 구경하십시오.”
진우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젠 구면이 된 젊은이들과 조수아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백운노인의 제지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는 조수아의 눈빛은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질 말들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진우청은 모른 척 등을 돌렸다.
등을 돌린 진우청은 다시 군중 속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계속 군중 속으로 파고들던 진우청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유화성 일행이 눈에 띄었다. 오늘도 술을 한 잔 걸친 것처럼 피곤해 보이는 유화성! 그리고 그 옆으로 면사를 썼던 여인이 초조한 기색을 숨기며 서 있었다.
‘비밀이 많을수록 불편한 법이지.’
안절부절 못하는 백봉령주를 보며 진우청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미소와 함께 계속 옆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진우청은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돌렸다.
조부께서 좋아할 것 같은 사내! 유화결이었다. 여전히 칼날 같은 눈빛과 얼음 같은 표정의 그는 두 손 가득 뭔가 사들고 오는 유화경을 호위하며 유화성쪽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진우청은 잠시 어정쩡한 모습으로 두 남녀를 쳐다보았다. 어제 유화성으로부터 정식으로 소개를 받았으니 모른 체 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반가울 사이도 아니었다.
그들 남매 역시 그런 표정으로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시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는 생각과 함께 진우청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유화결은 입술은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 끄덕하고는 몸을 움직였다.
천성이 그래서일 뿐, 결코 오만하거나 누구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유화경은 너무 냉정한 유화결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는지 유화결의 옆구리를 쿡 찌르고는 오늘 잘 싸우란 말과 함께 유화결을 따라 유화성쪽으로 이동했다.
“쩝!”
착 달라붙는 무복을 차려입은 유화경의 몸매보다는, 그녀의 양손에 가득 들린 먹거리들을 보며 입맛을 한 번 다신 진우청은 비무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진우청은 비무대 앞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무대의 본부석이라 할 천막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비무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릴 때도 된 것 같은데 그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젠장!”
천막 가운데 자리에 앉은 소중부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평을 토했다.
아침 일찍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동방회 측에서 강요하다시피 들이민 대진표는 지방유지로서의 자존심을 뭉개버렸다.
대개의 경우 결승전의 대진표는 관중들이 모여들기 전에 미리 정해 커다란 천이나 종이에 써놓고 게시를 한다.
그런 후, 비무가 시작되면 그 대진표대로 비무를 벌여 결국 단 두 명의 승자만 남아 최종 결승전을 벌인다.
소중부와 몇몇 참관인들 역시 그렇게 하려고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그 대진표는 펼쳐보지도 못하고 쓰레기로 변하고 말았다.
동방회측에서는 자신들이 작성한 대진표를 들이밀며 그대로 진행하기를 요구했다.
무리한 요구였지만 동방회의 입김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참관인들은 소태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방회측에서 강요한 대진표는 여타의 것과 약간 달랐다.
이틀의 예선전을 통해 가려진 예순 네 명의 승자를 서른두 명씩 두 개의 조로 나누어, 제 일조 서른 두 명이 먼저 대결을 벌여 여덟 명의 승자를 가리고,
그 다음 제 이조 서른두 명에서 여덟 명을 가린 후, 그들 열여섯 명끼리 최종 결승전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무리가 없었다. 엎어치나 메어치나 그게 그거였으니까…….
그런데 또 한 가지 요구는, 그들 승자들이 서로 누구와 싸우게 될 것인지는 소중부가 비무대 위에서 발표할 때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비무자들은 자신의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언제 싸울지 조차도 소중부가 호명했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그들이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두 개의 조 중, 어느 조에 속했는지 하는 것뿐이었다.
싸울 상대를 미리 알게 되면 온갖 부정이 개입될 수 있다는 그럴 듯한 말로 동방회는 자신들의 요구를 정당화시켰지만,
그 속뜻은 결승전의 대진표를 자신들 마음대로 조작하고 주무르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참관인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연신 입맛을 다셨지만 이번 비무대회는 모든 면에서 동방회가 주최했기에 그들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뭘 하려는지 몰라도 그렇게 해 줍시다. 누가 누구하고 붙든 결국은 둘만 남아 승자를 가리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오,”
소중부는 역정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잠시 후 북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와아-”
“와!”
흐르는 강물이 놀라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 갈만큼 큰 함성소리들이 북소리를 따라 울렸다.
현성비무대회 사흘째이자 결선의 막이 오른 것이다.
북소리가 울린 후 소중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오늘 비무를 치르는 방식, 그러니까 동방회측에서 요구한 방식을 발표했다.
관중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지만 금방 그런 표정들은 지우고 어서 시작하기만을 재촉했다. 누가 누구하고 붙든 그들에겐 상관없었다.
그들은 어서 비무대 위로 결전자들이 오르고 되도록이면 치열한 승부가 벌어지는 것만 원했다.
비무방식을 설명한 소중부는 다음으로 제 일조와, 이 조에 속한 사람들의 명단만 공개했다. 그 명단은 며칠 전 인가장의 장주 인가덕의 손에 있던 대진표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거력패도 염호광 대신 절명자 오무평의 가명인 오덕관이란 이름과, 탈명철검 조탁 대신 유화성의 이름이 올라있었고,
진호산이란 이름이 제일 끝으로 올라 있었지만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인가장의 장남 인장호와 유가검보의 유화결은 제 이조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제 이조에는 광음마각 천개일과 독사편 동태승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 있었다.
동태승은 오늘 새벽 인가장에서의 싸움에서 오무평의 절명자에 가슴이 찔려 싸울 수 있을지 없을지 몰랐지만 이름은 등재되어 있었다.
각조의 명단을 공개한 소중부가 동방회의 지시대로 첫 번째 비무를 벌일 사람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 임문정이 보낸 보표 한 명이 급히 소중부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중부는 보표 사내의 전음을 듣고는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첫 번째 비무를 벌일 사람들의 이름이 또다시 바뀐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소중부는 표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었더라도 햇살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럼 비무를 시작하겠소.”
소중부의 선언과 함께 함성이 울렸다.
“산동에서 오신 전수윤(田守潤) 대협! 그리고 그 상대로 하남에서 온 진호산 소협은 비무대 위로 오르시오.”
소중부가 고함을 지르자 한 자루 검을 허리에 찬 중년 사내가 날렵하게 비무대 위로 날아올랐다.
산동출신의 전수윤이었다. 잠시 전수윤을 쳐다본 소중부는 비무대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전수윤은 이미 비무대 가운데로 와서 준비하고 서 있었지만 아직 그 상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진호산 소협 어서 비무대 위로 오르시오.”
소중부가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소중부의 고함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아지며 모두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예선에 출전하여 승리하긴 하였지만 자신이 입은 타격도 만만치 않아 왕왕 이렇게 불참 통보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땐 세 번을 호명하고, 그래도 비무대 위로 오르지 않을시 패배선언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부르겠소. 진호산 소협!”
소중부의 세 번째 호명이 길게 울려 퍼졌다.
“아이쿠!”
“어어- 이게 왜 이래!”
세 번째 호명 후에도 전수윤의 상대자는 나타나지 않아 소중부의 패배선언이 이어지기 직전,
관중석 한쪽에서 돌담이 무너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우루루 앞으로 무너지며 한 사내가 뛰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렇게나 지어낸 가명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가 근처에 있던 누군가 알아본 사람의 지적으로 허겁지겁 달려 나온 진우청이었다.
“와하하-”
한쪽을 무너뜨리다시피 하며 허둥지둥 비무대 위로 오르는 진우청을 보고 관중석에서는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어제는 닮은꼴의 사내, 여조명의 뒤를 이어 출전해 전혀 균형이 맞지 않는 옷차림으로 배꼽을 잡게 하더니 오늘은 옷은 그럴듯하게 바꿔 입었지만
하마터면 싸워보지도 못할 정도로 굼뜬 출전이 배를 잡게 만들었다.
“연화궁의 절세미녀다!”
예선에서 무흔살수의 비발을 흡사 여인들 보다 더 유연한 몸짓으로 상대하는 것을 보고 ‘연화궁의 절기가 아니냐?’ 라는 말과 함께
‘그렇다면 미녀들만 있는 연화궁에서 최고의 미녀가 탄생했다고’ 고함을 친 사내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와하하하-”
사내의 고함으로 비무대회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진우청의 늦은 등장에 뭔가 책망의 말을 하려던 소중부도 쓴웃음과 함께 두 사람을 비무대 중앙에 마주서게 하고는 몇 마디 형식적인 주지사항을 일러주었다.
이윽고 소중부는 손을 들어 비무 선언을 하고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진우청은 무심한 표정으로 전수윤을 쳐다보았다.
번쩍-
마주선 전수윤의 눈에서 섬광이 뻗어 나왔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동공을 태울 듯한 눈빛이었다.
진우청의 표현대로라면 전수윤의 전신을 둘러싼 호흡의 색깔이 죽음의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전신 혈맥으로 사부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용의 비늘처럼 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진우청은 낮고 길게 숨을 빨아 들였다.
아랫배에 가득 들숨이 뭉쳐지며 천룡신무를 추기위한 최상의 몸 상태가 되어갔다.
모든 감각이 최고조로 열리며 사부의 말씀대로 자신의 몸뚱이 하나는 자신 마음대로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
‘스읍-’
들숨의 반도 안 되는 날숨을 내뱉은 진우청은 다시 낮고 긴 들숨을 빨아들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진우청 내부의 움직임일 뿐, 외부로는 단 한 점의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우청의 무심한 기세에 전수윤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온통 허점투성이 같았지만 한 가닥의 호흡도 읽을 수 없었고, 실체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진우청이 손이 슬쩍 움직였다. 움찔 어깨를 흔든 전수윤은 전광석화같이 검을 빼들었다.
챙-
맑은 검명이 비무대 주변으로 흩뿌려지며 백색의 검인에서 양광이 반사되었다.
쓱쓱-
호흡을 감추고 있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올린 진우청은 머리를 긁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푸하하하-”
전수윤의 발검과 함께 격돌을 예상했던 관중들을 찰나적인 긴장을 풀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가까이 마주 선 전수윤으로서는 온통 경각심을 느끼게 만들었던 진우청의 움직임이었지만 관중들이 보기엔 너무도 태평스런 동작이었다.
그런 동작에 화들짝 놀란 전수윤의 발검은 한동안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전수윤의 눈이 처음보다 배는 더 강한 살기를 내뿜었다.
아는 것이 병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어디서 이런 촌놈이 있나 했으면 이런 망신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출전하기 전부터 비무보다는 처치해야 할 놈, 이기기보다는 죽여 버려야 할 놈이라는 당부와 아울러 무흔살수를 패대기친 놈이란 경고가 오히려 몸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어제 비발을 든 사내의 정체가 무흔살수란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그를 장난치듯 꺾어버린 진우청이기에 전수윤은 더욱 긴장 할 수밖에 없었다.
우웅!
이기기보다는 죽여야 할 놈인 진우청을 향해 전수윤의 검이 진동음을 토했다. 검에 실린 내력이 아지랑이처럼 흘러나와 주변의 공기를 점점 더 강하게 진동시켰다.
머리를 긁던 진우청이 이번에는 코를 후볐다. 훤히 드러난 진우청의 가슴을 직시하며 막 공격을 하려던 전수윤은 코를 후비며 흔드는 진우청의 손 때문에 타점을 놓쳤다.
전수윤은 또 다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묘한 방위, 묘한 손놀림! 머리를 긁다가 코를 향해 내려오는 손은 진수윤이 가격하고자 했던 투로였다. 진우천의 손은 교묘하게 그 투로를 방해하며 코를 후볐다.
“와하하하…….”
진우청의 움직임은 이번에도 극히 자연스러웠지만 전수윤의 움직임은 누가보아도 극히 경직되고 주춤거렸다.
가까이서 대면하고 있는 전수윤의 심정이야 어떻든 관중들의 눈에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긁는 동작에, 쾌속한 발검! 코를 후비는 동작에, 움찔한 뒷걸음질!
뿌드득!
전수윤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젠 고지식한 노인이 내게 가르친 춤이 뱀 춤이 아니라 천룡신무라는 깨달음을 만인 앞에서 확인할 순간인가?”
코를 후비던 진우청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휘리릭-
가슴께로 모아졌던 진우청의 두 손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가볍게 교차하는 것 같던 두 개의 손이 순식간에 천수관음의 손처럼 늘어났다.
손바닥 안에 갇힌 공기가 진흙 반죽처럼 뭉쳐지며 공간이 왜곡되었다.
공간을 왜곡시키고, 쳐다보는 사람의 시선과 정신마저 왜곡시킬 것 같은 손놀림이 순식간에 팔로, 그리고 철탑 같은 어깨로 전해졌다.
바위같이 단단한 어깨가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허물어져 내리는 어깨를 따라 깍지동이 같은 상체와, 통나무 같은 다리도 같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해야 했다. 하다못해 검날의 방향이라도 바꿔야 했다. 그러나 전수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평생이 지난 것 같은 순간이었지만 실상은 눈 한 번 깜짝하는 것만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앞에 선 진우청은 자신의 혼을 다 빼놓은 것 같은 움직임을 연출한 것이다.
“뭐야, 저건!”
관중들 속에서 의아한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긁적이고 코를 후빌 때는 화들짝 놀라며 검을 쳐들던 전수윤이 정작 진우청이 손을 흔들며 자세를 잡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있는 모습을 이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번의 손짓과 함께 몸을 푼 진우청은 장난은 그만 치겠다는 듯 정색을 하며 자세를 잡았다.
자세는 별게 없었다. 여전히 빈틈투성이고 하오문의 수법 하나 변변히 익히지 못한 것 같았다.
스윽-
전수윤의 발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지금 취하고 있는 진우청의 자세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위치는 양지(陽地)이고 자신은 햇볕이 들지 않는 음지(陰地)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우선은 양(陽)의 위치를 점하고 뒤이어 쾌속한 일검을 뿌릴 생각이었다.
그 순간 진우청의 발 또한 미세하게 움직였다. 천룡신무의 춤사위 속으로 녹아들며 호흡과 동작이 일치되는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전수윤의 눈매가 위로 치켜졌다. 자신의 위치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짙은 음지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여전히 허술한 자세였지만 진우청의 몸은 자신의 움직임에 그렇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래선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없다.
휘리릭-
전수윤은 진우청이 눈치 채지 못하게 유리한 방위를 점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어지럽게 검을 흔들며 신형을 움직였다. 공격전에 한 번 몸을 풀기라도 하는 동작 같았다. 그 동작과 함께 진우청과 자신 사이에 굳건히 묶여있는 음(陰)과 양(陽)의 끈을 잘라버릴 심산이었다.
흔들!
전수윤의 움직임에 따라 진우청의 어깨가 바람에 흩날리듯 흔들렸다. 무너지는 것 같기도 했고, 악기의 음률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전수윤은 가느다란 신음을 삼켰다.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자신과 진우청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형의 기운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기감(氣感)이 초인적으로 발달한 놈이다.’
전수윤의 뇌리 속으로 한 가닥 생각이 송곳처럼 꿰뚫고 지나갔다.
상대의 움직임과 그로인해 변하는 주변의 기운을 동물적으로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움직이는 느낌! 진우청의 움직임에서 전수윤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스윽!
전수윤은 검날을 틀었다. 역시 마찬가지! 진우청의 상체가 보일 듯 말 듯 옆으로 움직였다.
주르르-
전수윤의 이마를 타고내린 땀 한 줄기가 눈 속으로 흘러들었다.
“차앗-”
기합성과 함께 전수윤은 발끝으로 바닥을 박찼다. 점점 더 불리해지는 상황을 선공으로 타개하고자 함이었다. 도약과 함께 공격점을 예측할 수 없는 환검식이 펼쳐졌다.
다음순간, 진우청의 어깨와 팔도 물결처럼 흔들렸다. 동시에 허리와 다리도 물결이 되어갔다.
슈아악-
순식간에 다가온 전수윤의 검이 진우청의 가슴을 베어갔다.
‘베었다!’
전수윤은 내심 외쳤다. 그러나 바람 같은 움직임과 함께 백짓장 한 장 차이로 검을 비켜낸 진우청의 신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젠장!”
지극히 단순한 동작으로 자신의 검을 흘려버린 진우청의 움직임에 어이없는 심정이 된 전수윤은 대라환영검(大羅幻影劍)의 초식을 연속으로 뿌리며 진우청의 요혈을 공격해 들었다.
‘스읍!’
한 줄기 날숨과 함께 출렁하고 가볍게 움직인 진우청의 의식이 용무의 춤사위 속으로 녹아들었다. 어디로 피하고, 어떻게 공격해야할지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흐르는 대로 춤을 추면 몸이 먼저 알고 움직였다.
호흡과 동작을 끝까지 일치시키지 못하고 벌어진 전수윤의 동작이 훤히 보였고, 온갖 화려한 동작으로 휘두르는 검격이 거북이의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천룡신무의 동작 속으로 녹아들수록 그건 더욱 확연히 느껴졌다.
눈 한번 깜박이는 것을 백 개로 자른 순간만큼의 불일치도 허용하지 않고 호흡과 일치시켰던 용무의 수련은 초식에 얽매여 끊어지는 상대의 동작들을 훤히 읽을 수 있게 했다.
또한 그 수유의 순간 속으로 파고들 수도 있게 했다. 진우청은 손을 뻗었다.
‘엇!’
텅 빈 허공을 상대하는 기분을 느끼다 처음으로 자신의 검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을 받은 전수윤은 눈을 부릅떴다.
구름을 흩어내는 듯한 한 개의 손이 검신을 타고 올랐다. 전수윤은 쾌속하게 검신을 틀며 진우청의 손목을 베어갔다.
텅-
검신을 타고 오르던 진우청의 손등이 한 발 앞서 전수윤의 검신을 튕겨냈다. 전수윤의 검이 휘청 날렸다. 전수윤은 필사적으로 신형을 뒤로 뺐다.
‘대체 이건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연신 탁한 숨결을 뱉어내며 전수윤은 뚫어져라 진우청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검을 잡아오거나 쳐내오는 마지막 손짓은 단순했다.
그러나 그 손짓을 이끌어낸, 단 한 순간의 끊어짐도 없이 면면부절 이어지는 움직임은 구름이 흐르는 것처럼 가벼웠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공할 기운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단전에 힘을 주고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 저 깊은 곳을 가득 채우고 너울너울 흘러넘치는 그런 기운이었다.
한없이 자유롭고 충만한 기운! 휘몰아쳐오는 해일 같은 격랑은 아니었지만 해일마저 감싸 안고 허공으로 날려버릴 것 같은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기운이 점점 더 강하게 진우청의 전신을 감싸고 두꺼운 벽을 만들어갔다.
“하앗-”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함께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른 전수윤은 대라환영검의 이십사 초식을 한꺼번에 펼쳤다.
우우웅!
진우청의 몸이 제각각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전신을 감싼 기운이 한층 더 두껍게 퍼져나갔다. 어느새 전수윤의 검이 두꺼운 벽에 튕기며 연신 뒤로 밀려났다.
파앗-
회오리를 일으키며 두터운 막을 뚫고 나온 진우청의 손이 전수윤의 어깨를 잡아갔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진우청의 손은 의식만큼이나 빠르게 다가왔다.
전수윤의 어깨가 속절없이 진우청의 손아귀에 잡혔다.
“크윽!”
전수윤은 신음을 토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쇠갈고리 같았다.
붙잡힌 어깨에서 시큰 하는 이상한 감각이 밀려오고 그때부터 한 쪽 팔은 자신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혈을 틔우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젠 개판을 칠 차례군.”
휘익-
전수윤의 가슴 혈 한 군데를 더 건드린 진우청은 전수윤의 어깨를 세게 뿌리쳤다. 삼장의 거리를 가볍게 뛰어넘은 전수윤의 신형은 임문정의 천막을 향해 날아갔다.
훌쩍 날아오른 보표사내 하나가 전수윤의 신형을 받아들고 가볍게 바닥으로 내려서려 했다. 의도는 그랬지만 전수윤을 받아든 사내는 그대로 뒤로 밀리며 천막위로 떨어졌다.
와장창!
천막이 푹 꺼지며 다른 사람들이 손을 써볼 기회도 없이 기둥이 무너졌다.
파앗-
결국 다른 보표 사내 하나가 쾌검을 휘둘러 천막을 갈랐다. 갈라진 천막 사이로 전수윤의 신형을 받쳐 든 보표 사내가 떨어졌고, 천막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와아-”
“우리의 미녀 최고다.”
잠시 후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졌다. 언제 어디서건 패자에게 돌아가는 동정의 목소리는 승자를 향한 함성에 묻힐 뿐이다.
천막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의식을 잃은 패자에게 잠깐 동정의 눈길을 보낸 후, 즉시 승자를 향해 환호했다.
그들의 눈에는 진우청의 동작이 정형화된 초식을 뿌리는 사람들에 비해 뭔가 이상해 보였지만 오늘도 승리했다.
관중들은 그렇기에 더 환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진호산의 승리를 알리는 소중부의 목소리가 울렸다.
‘조금은 속이 풀리는군.’
내심 중얼거리며 손을 탁탁 튼 진우청은 비무대를 내려왔다. 비무대 계단 끝에서 모래바닥을 밟던 진우청은 임문정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임문정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등치고 간 빼 먹는 상인들에겐 필수의 덕목일진 몰라도 왠지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정 떨어지는 얼굴이었다.
진우청은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는 더 위험한 병신춤을 추는 인간을 내 보낼 것이 틀림없다.
“그건 그때 일이고…….”
진우청은 더 급한 일에 생각을 모았다.
“진호산……. 진호산이라 했겠다?”
자신이 만든 가명을 기억해내지 못해 탈락할 뻔한 진우청은 다시는 안 잊겠다는 듯 두 번 세 번 되뇌었다.
“서쪽의 친구들…….”
무심코 말을 하던 임문정은 입을 다물었다.
“숙부님께서 계셨다면 한바탕 눈총을 받았겠군. 장사꾼에겐 친구란 없다고 했는데 말이야.”
입맛을 다신 임문정은 말을 이었다.
“서쪽의 동업자들이 바보들만 보내준 건가 보군.”
전수윤을 쳐다본 임문정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지요. 그랬다간 자신들이 더 손해일 테니까요.”
임문정의 말에 옆에 서있던 문사차림의 젊은 사내가 주판알을 퉁기며 답했다. 두 사람 전혀 거리낌 없이 말했지만 그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은 문사차림의 사내가 모든 음파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가떨어지는 건가?”
“한 쪽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다른 한쪽은 너무 과소평가한 때문이지요. 그런 경우 절대로 이익을 보지 못하고 손해만 보게 되지요.”
차르르-
청년은 처음부터 계산을 다시 하겠다는 듯 주판을 흔들어 주판알을 모조리 흘러내리게 했다.
탁탁탁!
탁탁-
주판알을 튕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왔다.
“혈갈쌍독은?”
주판알 소리가 듣기 싫은지 인상을 찌푸리던 임문정은 주판을 튀기는 소리가 멈추자 물었다.
“저 놈 손에 당한 것이 확실합니다. 아직 제대로 휘두르는 모습은 보지 않았지만 쇠몽둥이자국이 확실했습니다.”
사내는 주판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저놈 때문에 노출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노출 되었습니다. 무흔살수와 혈갈쌍독…….”
사내는 빠르게 덧붙이다 임문정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최대한으로 평가해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마저 과소평가였군. 하지만 그게 덕이 될 수도 있지. 경각심을 훨씬 더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
임문정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한 사내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났다.
“제일검대가 움직였습니다.”
사내가 급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후!”
사내의 보고를 들은 임문정의 눈에서 한광이 뻗어 나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군. 이젠 더 이상 저 놈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같이 쓸어버리면 되니까.”
말을 마친 임문정은 고개를 돌렸다.
“멸성계(滅城計)를 발동시키라고 전해라.”
“복명!”
짤막하게 말한 사내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범부는 죄가 없지만 품속에 든 금덩이가 죄지.”
임문정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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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검대가 움직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