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1910년대 국외 이주 동포들의 민족 운동 답②
지도를 주고 만주(간도 포함), 연해주, 중국 각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민족 운동을 파악하는 문제는 자주 출제되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가) 서간도에는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등이 삼원보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어요.
이곳에 경학사라는 항일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고,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함께 실시하는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 무관 학교)가 세워졌어요(1911). 경학사는 뒤에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독립군(서로 군정서)을 조직하였습니다.
(나) 북간도 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왕청, 용정, 명동 등의 한인 집단촌이 건설되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간민회 등 자치 단체, 서전서숙(이상설), 명동 학교(김약연) 등 민족 학교, 중광단(후일 북로 군정서) 등의 무장 독립 단체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역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습니다.
(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08년에 최초의 해외 신문인 해조신문이 발간되었어요. 1911년 독립 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자치 조직인 권업회가 설립되었고,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1914년에는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어요.
① 해조신문은 연해주에서 발행된 한인 최초의 신문이고 권업신문은 연해주에 세워진 권업회의 기관지였습니다.
② 삼원보에는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1911)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함께 실시하였습니다.
③ 경학사는 신민회 회원들이 개척한 삼원보에 설치한 한인 자치 기관이자 항일 독립운동 단체입니다.
④ 대한인 국민회는 미주 지역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하였습니다(1910).
미국 본토, 하와이, 멕시코 등에 지부를 설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어요.
⑤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는 북만주 룽징(용정)에 건립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910년대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국외 이주 동포들의 생활
1. 만주 이주 동포
1910년대 | 독립 운동 기지 건설 → 무장 항일 운동 준비 서간도 삼원보 - 신민회가 주도, 경학사와 부민단 편성,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설립 북간도 용정촌과 명동촌 - 간민회, 중광단, 등 조직, 서전 서숙, 명동 학교 등 설립 |
1920년대 | 무장 독립 전쟁(봉오동, 청산리 대첩) 전개 → 간도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희생 많음, 3부 성립과 통합 운동 |
1930년대 |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활동 약화, 길림성 만보산 사건 발생(1931), 한․중 엽합 작전 전개 |
2. 연해주 이주 동포
1905년 이후 | 한인 집단촌(신한촌 등) 형성 - 국외 의병 운동의 중심지 역할 |
1910년대 | 13도 의군(1910), 성명회,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1914), 대한 국민 의회(1919) 조직 |
1920년대 초 | 볼셰비키 정권이 무장 활동 금지 → 민족 운동 약화 |
1930년대 |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1937) |
3. 일본 이주 동포
1910년대 | 산업 노동자로 취업, 1919년 2․8 독립 선언 발표 |
1920년대 | 조선 유학생 학우회(항일 민족 운동의 중심), 관동 대지진 때 학살(1923) |
중·일 전쟁 이후 | 한국인을 집단적으로 강제 연행 → 일제의 침략 전쟁 도구로 희생 |
4. 미주 이주 동포
20세기 초 |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 →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혹사 동서 개발 회사(고종 시기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을 위해 만든 회사(1902) -이민 공고를 내 이민자를 모집하고 이들을 하와이로 이주시킴 사진 신부에 의한 사진 결혼법은 1907년 이후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인 근로자를 위한 법 |
대한인 국민회 | ◦ 미주 지역 항일 운동의 중추 기관 ◦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지원 : 의연금 전달, 애국 공채 매입 ◦ 외교 활동 : 구미 위원부 지원, 뉴욕 약소국 동맹 회의에 박용만 파견 ◦ 군사 활동 : 박용만의 국민 군단, 제2차 대전 때에 한인군 편성 |
유사 기출문제
29회 고급 41번 문제
41. 미주 하와이에서의 민족 운동 답③
제시된 설명에 나타난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도착한 곳, 사탕수수 농장, 대한인 국민회가 권익을 보호해주었다'라는 내용을 통해, 밑줄 그은 '이 곳'은 미주 지역의 하와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의 하와이 이주는 미국의 요청으로 정부 차원에서 1902년 모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처음으로 모집된 사람들은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1903년 하와이에 도착하였어요. 하와이 이주를 계기로 미주 지역의 한인 수는 점차 증가하여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전명운이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스티븐스를 사살한 의거가 일어났어요. 이를 계기로 미주 지역 한인들의 민족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되었습니다(1910). 대한인 국민회는 미국 본토, 하와이, 멕시코 등에 지부를 설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어요. 또한 기관지로 신한민보를 발행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미주 지역의 교민 권익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독립군 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대조선 국민군단을 주도하여 만들었습니다.
① 권업회는 연해주 지역에서 조직한 자치 단체로, 권업신문을 발간하고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습니다(1914).
② 경학사는 신민회 회원들이 개척한 삼원보에 설치한 한인 자치 기관이자 항일 독립운동 단체입니다.
③ 대조선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독립군 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운 단체입니다.
④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는 북만주 룽징(용정)에 설립되었습니다.
⑤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은 비밀리에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도쿄의 조선 YMCA 강당에서 2·8 독립 선언을
하였습니다(1919).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8회 고급 44번 문제
44. 연해주 지역에서의 민족 운동 답③
별도의 설명이 없었더라도 지도에 표시된 지역이 연해주인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연해주 지역에서는 한인 집단촌인 신한촌이 건설되고(1911), 한인들의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하였으며,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나아가 1914년에는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어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 연해주 내 한인 단체를 망라한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고, 이 단체는 3·1 운동 직후 임시 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 의회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1918).
① 서전서숙은 이상설 등이 북간도의 룽징(용정)에 세워 민족 교육을 하였던 학교입니다(1906).
② 신한 청년당은 상하이에서 동제사의 청년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습니다(1918).
초대 당수는 여운형으로,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는 등 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③ 연해주에서는 권업회가 효과적인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습니다(1914).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일본과 함께 연합국에 가담하여 활동하면서 일제와의 관계 악화를 꺼려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탄압하여 본격적으로 활동하기는 어려웠습니다.
④ 대조선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독립군 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입니다.
⑤ 2·8 독립 선언은 도쿄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이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자극을 받아 발표한 독립 선언입니다(1918).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26회 고급 42번 문제
42.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대한 탐구 답②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표시하고 각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운동과 항일 무장 활동을 파악하는 문제 유형입니다.
자주 출제되는 주제이니, 지역별, 시기별로 반드시 공부해 두어야 합니다.
(가)는 북만주 지역 중 헤이룽강과 쑹화강이 만나는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지대에 해당합니다.
이 지역과 가까운 북만주((가)지역보다 조금 아래)에서는 1930년에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쌍성보 전투(1932)와 사도하자 전투(1933)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나)는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08년에 최초의 해외 신문인 해조신문이 발간되었어요. 1911년 독립 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자치 조직인 권업회가 설립되었고,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1914년에는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어요.
(다)는 북간도 지역입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왕청, 용정, 명동 등의 한인 집단촌이 건설되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간민회 등 자치 단체, 서전서숙(이상설), 명동 학교(김약연) 등 민족 학교, 중광단(후일 북로 군정서) 등의 무장 독립 단체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역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죠.
(라) 서간도(남만주) 지역에는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등이 삼원보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어요. 이곳에 경학사라는 항일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고,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함께 실시하는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 무관 학교)가 세워졌어요(1911). 경학사는 뒤에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독립군(서로 군정서)을 조직하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1932)와 흥경성 전투(1933)에서 일본군을 물리쳤습니다.
ㄱ - 나선 정벌은 효종 때인 1654년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가) 지역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던 사건입니다.
러시아가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으로 진출하면서 청과 국경 분쟁이 발생하였어요.
청은 러시아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군대 파병을 요청합니다. 이에 조선군은 1차 때는 닝안을 거쳐 의란에서,
2차 때는 쑹화강과 헤이룽 강이 만나는 어라이무청까지 가서 러시아군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어요.
ㄴ - 한인 애국단은 김구가 상하이에서 조직하였습니다(1931).
ㄷ - 운동주가 다닌 명동 학교(김약연)는 (다) 지역인 북간도의 용정에 세워진 민족 학교입니다.
ㄹ - 육정산의 정혜 공주 묘는 발해의 첫 도읍지인 동모산 근처에 있습니다.
제시된 지도의 (다) 지역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25회 고급 40번 문제
40. 만주 지역에서의 한민족 역사 답⑤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의 항일 독립 활동은 매회 빠지지 않고 출제되는 주요 출제 주제입니다. 따라서 시기별, 지역별로 활동 내용들을 잘 공부해 두어야 합니다.
만주 지역은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들의 활동 무대로, 이들 국가와 관련한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우리 민족이 이 지역으로 많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여러 곳에 한민족의 집단 이주지가 형성되었어요. 한인 집단촌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항일 독립 운동의 근거지가 되어 항일 단체나 독립군 부대가 세워져 활동하였습니다.
북간도 지역에 세워진 대표적인 한인 집단촌으로는 왕청, 용정, 명동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간민회 등 자치 단체, 서전서숙(이상설), 명동 학교(김약연) 등 민족 학교, 중광단(후일 북로 군정서) 등의 무장 독립 단체가 세워졌어요. 이 지역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죠.
서간도(남만주) 지역에는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등이 삼원보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어요. 이곳에 경학사라는 항일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고,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함께 실시하는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 무관 학교)가 세워졌어요(1911). 경학사는 뒤에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독립군(서로 군정서)을 조직하였습니다.
① 서전서숙은 이상설 등이 용정에 설립한 민족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② 안중근 의거지는 북만주 하얼빈에 있으며, 최근 이곳에 안중근 기념관이 세워졌어요.
안중근 의사는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침략에 앞장서는 등 동양 평화를 해치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어요(1909).
③ 북로 군정서군은 청산리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와 연합해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청산리 대첩, 1920. 10).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지역에서 지형을 잘 이용한 작전과 투지, 이 지역 일대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협력으로 6일
동안의 대전투 끝에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④ 신흥 무관 학교는 남만주 삼원보에 세워졌어요.
⑤ 최익현이 순국한 곳은 대마도입니다.
위정척사의 대표적 인물인 최익현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단식 끝에 순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3회 고급 42번 문제
42. 대한 광복군 정부 답⑤
22회에서도 연해주 지역을 파악하는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이번 회차에 연속적으로 출제되었네요.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연해주 지역에서 있었던 항일 운동과 이주 동포들의 생활을 파악하는 문제는 종종 출제되니 만주, 일본, 미주 지역과 함께 공부해 두세요.
문제 자료에 '권업회'가 만든 조직으로, 정부의 형태'라고 나와 있으니, 이는 대한 광복군 정부입니다. 대한 광복군 정부는 1914년에 조직되었으며,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선임하였어요. 어렵죠? 하지만 이 문제는 대한 광복군 정부에 대해 잘 몰라도 연해주 지역에서 조직된 정부였다는 것만 알 답지에서 연해주 지역 이외에서 조직된 단체나 사실을 제외하는 방법으로 답을 찾으면 됩니다.
연해주 지역은 지리적으로 국내와 가까워 1860년대 초부터 우리 동포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1910년 유인석, 홍범도 등이 중심이 되어 13도 의군(의병 단체), 이상설, 유인석, 이범윤 등이 성명회를 설립하기도 했어요.
1911년에는 한인 집단촌인 신한촌이 건설되고(1911), 이를 기반으로 한인들의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었습니다. 권업회는 한인의 단결과 지위 향상 및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에 힘썼으며,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어요. 1914년에는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과 연합국으로 참전하게 된 러시아가 한인들의 정치, 사회 활동을 탄압하면서 이 과정에서 권업회와 함께 해체되었어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연해주 내 한인 단체를 망라한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으며(1918. 1.), 이는 3·1 운동 직후 임시 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 의회로 발전하였습니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의 이동휘 등은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1918) 활동하기도 하였어요.
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외교 활동을 위해 미국에 두었던 조직입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마국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 활동에 주력하였어요.
②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1940년에 조직하였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1940년 9월 충칭에 자리잡고 미주 지역의 의연금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하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무장 투쟁을 통한 광복 투쟁을 강화하였습니다.
③ 2·8 독립 선언은 일본에서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 청년 독립단 등이 발표하였습니다.
④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신한 청년단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서
임시 정부 이름으로 외교 활동을 하게 하였습니다.
⑤ 대한 광복군 정부는 정통령에 이상설, 부통령에 이동희를 임명하였으며, 임시 정부의 효시 역할을 하였어요.
참고로 정통령이 된 이상설은 헤이그 특사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하지 않고 이 지역에서 독립 운동을 펴고 있었습니다.
국권 상실 직전에 만주와 연해주 접경 지역인 밀산부 한흥동에 독립 기지를 건설하였고, 13도 의군, 성명회, 권업회
조직에 참여하였습니다. 1915년에는 연해주를 떠나 상하이로 이동하여 신한 혁명당에 합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3회 고급 43번 문제
43. 서간도에 세워진 독립 운동 기지 답④
이 문제는 22회 고급 40번 문제와 동일한 유형의 문제로, 특정 지역에서 있었던 항일 독립 운동을 찾는 것으로, 자주 출제되는 유형의 문제입니다.
아래 유사 기출문제를 보면 알겠지만, 동일한 지도가 제시되었죠
'삼원보의 경학사가 설립한 학교'라는 첫 내용이 결정적인 힌트네요. 삼원보는 신민회와 신민회 회원들이 주도하여 서간도에 세운 국외 독립 운동 기지입니다.
서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데 앞장섰던 단체는 신민회였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신민회는 공화 정체의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어요. 신민회는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고 국내 의병 운동이 약화되자 국외 무장 투쟁 노선을 채택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신민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회원들은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경학사라는 항일 독립운동 단체와 신흥 강습소를 세웠습니다. 신흥 강습소는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다수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어요.
한편, 경학사는 부민단으로 계승되었고, 3·1 운동 직후 한족회로 개편됩니다. 한족회는 군사 기관인 서로 군정서를 설립하였고 신흥 강습소의 후신인 신흥 중학교를 신흥 무관 학교로 개편하였어요.
(가)는 만주와 러시아 국경 지대에 있는 밀산부 한흥동입니다.
이곳에서는 국권 피탈 직전 이상설, 이승희 등이 주도하여 독립운동 기지가 세워졌어요. 청산리 대첩 직후 독립군 부대들은 일제의 토벌 등을 피해 이곳에 집결해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단을 조직하고 시베리아 자유시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 참변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08년에 최초의 해외 신문인 해조신문이 발간되었어요. 1911년 독립 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자치 조직인 권업회가 설립되었고,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1914년에는 이상설을 정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어요.
(다)는 북간도 지역입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왕청, 용정, 명동 등의 한인 집단촌이 건설되었어요. 이를 바탕으로 간민회 등 자치 단체, 서전서숙(이상설), 명동 학교(김약연) 등 민족 학교, 중광단(후일 북로 군정서) 등의 무장 독립 단체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역에서 독립군 부대들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죠.
(마)는 상하이입니다.
1910년대 상하이에서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등이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2회 고급 40번 문제
40. 연해주 신한촌 답②
19세기 후반~ 일제 강점기 만주와 연해주, 중국 관내, 일본, 미주로의 한인 이주와 생활 모습, 민족 운동에 대한 문제도 종종 출제됩니다.
문제에 제시된 비문의 내용 중 '성명회와 권업희 결성',13도 의군 창설'을 통해 밑줄 그은 이곳이 연해주임을 알 수 있죠?
문제에 제시된 비문은 1999년 8월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곳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한촌 기념비’의 내용입니다.
신한촌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운이 기울어지자 국내외 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해 많은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1919년에는 망명 정부(대한 국민 의회)를 세워 국권 회복의 결의를 다졌던 곳이었어요.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1860)을 통해 이 지역을 차지하여 우리나라와 국경을 마주대하게 되었죠.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 한국인의 입국을 허용하고 토지를 제공하는 등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이주하였습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무렵에는 의병들을 비롯하여 이주 한인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곳곳에 한인 집단촌이 생겨나 국외 항일 의병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그 중에서 대표적인 곳이 신한촌이었어요. 이곳에는 한민회(1905), 13도 의군(1910), 성명회(1910), 권업회(1911), 대한 광복군 정부(1914), 대한 국민 의회(1919) 등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어요. 그리고 이들 단체들은 해조신문, 권업신문 등을 기관지로 발간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한인들의 무장 활동을 금지했기 때문에 독립군을 양성하여 직접 무장 투쟁에 나서는 데는 한계가 많았어요. 특히, 청산리 대첩 이후 독립군이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 당하는 자유시 참변(1921)을 당하였어요.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과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하면 한국인들이 일본을 지원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소련 당국에 의해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 수십만 명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가)는 만주와 러시아 국경 지대에 있는 밀산부 한흥동입니다.
이곳에서는 국권 피탈 직전 이상설, 이승희 등이 주도하여 독립운동 기지가 세워졌어요.
청산리 대첩 직후 독립군 부대들은 일제의 토벌 등을 피해 이곳에 집결해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단을 조직하고 시베리아 자유시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 참변을 당하기도 하였어요.
(나)는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입니다.
많은 동포들이 이주하였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08년에 최초의 해외 신문인 해조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 독립 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이를 기반으로 자치 조직인 권업회가 설립되어 독립 운동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설치하였으며,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다)는 북간도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왕청, 용정, 명동 등의 한인 집단촌이 세워졌어요. 이를 바탕으로 간민회 등 자치 단체, 서전서숙(이상설), 명동 학교(김약연) 등 민족 학교, 중광단(후일 북로 군정서) 등의 무장 독립 단체가 세워졌습니다. 이 지역에서 독립 군 부대들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죠.
(라)는 서간도입니다.
이곳에는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등이 삼원보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어요.
이곳에 경학사라는 항일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고,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함께 실시하는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 무관 학교)가 세워졌어요(1911). 경학사는 뒤에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독립군(서로 군정서)을 조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나), ②번입니다.
20회 고급 42번 문제
42. 일제 강점기 미주 이주 동포들의 활동 답②
'갤릭호'를 모르더라도 '사탕수수'는 더운 지역에서 재배하는 농작물이므로, (가)에 들어갈 지역은 더운 지역이겠네요.
'사탕수수'. '애니깽(밧줄의 원료가 되는 선인장)' 등의 내용이 나오면 한말~일제 강점기에 미주 지역(미국, 멕시코)으로 이주한 국외 동포들을 떠올리면 됩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미주 지역 동포들의 활동을 찾으면 되겠네요.
한인들의 미주 이주는 미국 하와이의 농장주들이 노동자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대한 제국 정부에 한국 농민의 이민을 요청해 이를 허락하면서 시작되었어요. 이에 사탕수수 농장 등에 필요한 노동자 모집을 위해 하와이 당국에서 파견한 데슐러는 한국에 동서 개발 회사를 세우고, 황성신문에 이민 모집 광고를 게재해 모집된 사람들을 1902년 12월에 처음으로 하와이로 보내죠.
1903년에 하와이에 첫발을 내딛은 동포들은 국내의 모집 광고와는 달리 사탕수수밭에서 감독의 채찍까지 맞으며 힘든 노동을 해야만 하였어요. 이주가 시작된 지 3년 만에 하와이에는 7000여 명의 동포가 살게 되었고, 일부는 미국 본토, 멕시코, 쿠바 등지로 이주해 갔습니다.
낯선 땅의 온갖 고난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주 동포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독립 공채의 구매나 의연금 모금 등을 통해 독립 자금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어요.
1908년에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스티븐슨(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있다가 미국에 귀국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활동을 함)을 사살하는 의거 활동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동포 사회에 애국심이 고조되어 미주 지역의 한인 단체들을 통합한 대한인 국민회가 조직되었습니다(1910). 대한인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 총회, 하와이, 연해주, 만주 등지에는 지방 총회를 설치하였고, 미국에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애국 성금을 전달하였어요.
미국으로 유학간 안창호는 1913년에 흥사단을 부활시켜 무실역행을 내걸고 군인 양성과 외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미국에 외교 활동을 위해 구미 위원부를 두기도 하였어요.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미주 동포들은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를 발족하여 재미 한인의 권리를 지켜나가면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 지원 등 다양한 지원 활동에 나섰고,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기도 하였어요.
① 서전서숙은 이상설 등이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에 설립(1906)한 민족 교육 기관이었어요.
② 대조선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하와이에서 결성(1914)하였습니다.
③ 대한 광복군 정부는 연해주에 세워졌던 망명 정부였어요(1914).
④ 대한 광복회는1915년 국내에서 박상진, 채기중 등이 애국 계몽 운동 계열의 비밀 결사들을 통합해 조직한 비밀
결사 단체로, 공화 정체의 근대 국민 국가의 수립을 지향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만주에도 지부를 설립했으며, 부호들에게 의연금 모집(군자금 모집) 및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어요.
⑤ 일본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 받아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고 2·8 독립 선언을 선포
하였습니다(1919).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8회 고급 42번 문제
42. 1940년대에 재일 한국인이 증가한 이유 답⑤
일제 강점기 인적, 물적 수탈에 대한 내용은 중요하게 출제되는 주제입니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경제 수탈에 대한 내용은 각 시기별(1910, 1920, 1930~40년대)로 구분하여 공부해 두어야 합니다.
문제에 주어진 그래프는 재일 한국인 수의 변동 추이를 나타낸 것이네요.
재일 한국인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특히 (가) 시기로 표시된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는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그 이유를 탐구해 보는 것이네요.
일본으로의 이주 모습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보자구요.
식민 통치 초기에 일본은 한국인의 일본 이주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일본 산업이 크게 발전하여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한국인의 이주를 허용합니다.
한국인의 일본 이주 허용 전 재일 한국인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유학생이었으나, 이주 허용 후에는 노동자들이었어요.
1930년대부터 일본은 만주 사변(1931), 중·일 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 전쟁(1941)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해 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강제로 동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후, 1939년에는 징용령을 내려 한국인을 강제 징용하였습니다.
강제 징용된 이들은 일본, 사할린 등의 군수 공장이나 광산, 비행장, 해군 기지 건설 공사장 등에 동원되었는데,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징용된 노무자 수는 대략 70여 만 명이 되었답니다.
또한 여성들도 근로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등의 이름으로 일본 등지로 끌고 가 노동력을 착취하였습니다.
이렇게 강제 동원된 재일 한국인 이주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한 지원병제도와 학병제, 징병제를 실시하여 많은 한국인 청년들을 침략 전쟁에 내몰았어요.
이러한 이유들로 1930년대 후반~1945년까지 재일 한국인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1945년에 재일 한국인이 감소한 이유는 일제의 패망으로 일시에 귀국하는 동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① 미쓰야 협정은 조선 총독부와 만주 군벌 사이에 체결(1925)한 것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독립군에 대한
단속, 인도 등을 규정한 것입니다.
② 1920년대의 일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급격히 발달한 일본은 일본 기업의 한반도 진출을 돕기 위해 1923년부터 한국과 일
본 사이의 무역에서 면직물과 주류를 제외한 모든 상품의 관세를 폐지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③ 1910년대의 일입니다.
총독부는 토지 소유 관계를 근대적으로 정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이 외에도 임야 조사 사업, 회사령, 삼림령, 어업령, 광업령을 공포하여 경제적 수탈 기반을 마련합니다.
④ 1920년대의 일입니다.
1923년 일본에서 발생한 간토(관동) 대지진의 수습 과정에서 일본 당국과 언론은 사회 불안을 한국인에게 돌리기 위
해 '조선인들이 방화,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일본인 살해, 강간하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립니다.
이에 한국인에 대한 적개심이 고조된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재일 동포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변을 겪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7회 고급 41번 문제
41. 간도와 연해주 이주 동포들의 활동 답②
이 문제는 서간도(남만주)에 위치한 삼원보와 러시아의 연해주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서 거주하던 국외 동포들의 활동을 파악하는 문제네요.
이 문제는 지역별, 시기별 국외 이주 동포들의 생활과 지도를 통해 정리하는게 좋습니다.
1. 만주 이주 동포
1910년대 | 독립 운동 기지 건설 → 무장 항일 운동 준비 서간도 삼원보 - 신민회가 주도, 경학사와 부민단 편성,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설립 북간도 용정촌과 명동촌 - 간민회, 중광단, 등 조직, 서전 서숙, 명동 학교 등 설립 |
1920년대 | 무장 독립 전쟁(봉오동, 청산리 대첩) 전개 → 간도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희생 많음, 3부 성립과 통합 운동 |
1930년대 |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활동 약화, 길림성 만보산 사건 발생(1931), 한․중 엽합 작전 전개 |
2. 연해주 이주 동포
1905년 이후 | 한인 집단촌 형성 - 국외 의병 운동의 중심지 역할 |
1910년대 | 13도 의군(1910), 성명회,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1914), 대한 국민 의회(1919) 조직 |
1920년대 초 | 볼셰비키 정권이 무장 활동 금지 → 민족 운동 약화 |
1930년대 |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1937) |
3. 일본 이주 동포
1910년대 | 산업 노동자로 취업, 1919년 2․8 독립 선언 발표 |
1920년대 | 조선 유학생 학우회(항일 민족 운동의 중심), 관동 대지진 때 학살(1923) |
중·일 전쟁 이후 | 한국인을 집단적으로 강제 연행 → 일제의 침략 전쟁 도구로 희생 |
4. 미주 이주 동포
20세기 초 |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 →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혹사 동서 개발 회사(고종 시기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을 위해 만든 회사(1902) -이민 공고를 내 이민자를 모집하고 이들을 하와이로 이주시킴 사진 신부에 의한 사진 결혼법은 1907년 이후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인 근로자를 위한 법 |
대한인 국민회 | ◦ 미주 지역 항일 운동의 중추 기관 ◦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지원 : 의연금 전달, 애국 공채 매입 ◦ 외교 활동 : 구미 위원부 지원, 뉴욕 약소국 동맹 회의에 박용만 파견 ◦ 군사 활동 : 박용만의 국민 군단, 제2차 대전 때에 한인군 편성 |
① 블라디보스토크 이주 동포들의 활동 내용입니다.
많은 동포들이 이주하였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08년에 최초의 해외 신문인 해조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1911년 독립 운동 기지인 신한촌과 이를 기반으로 자치 조직인 권업회가 설립되어 독립 운동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고 학교와 도서관을 설치하였으며,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② 신흥 강습소는 남만주 삼원보에 세워진 군사 간부 양성소입니다.
신민회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자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에 따라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등을 중심으로 남만주에 삼원보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로 삼았습니다.
그에 따라 경학사라는 항일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고,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함께 실시하는 신흥 강습소(후일
신흥 무관 학교)가 세워졌습니다(1911).
③ 서전서숙(이상설), 명동 학교(김약연)는 북간도의 용정에 세워진 민족 학교입니다.
④ 경학사는 삼원보에 세워졌습니다.
경학사는 뒤에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독립군(서로 군정서)을 조직하였습니다.
⑤ 대한인 국민회는 미주 지역의 하와이 이주 동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민족 운동 단체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3회 고급 49번 문제
49. 해외 이주민의 역사 답③
이 문제는 조금 어렵지 않았을까 판단합니다.
3점 배점에 어울리는 문제지만, 너무 디테일하게 출제되었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아마도 한국사를 공부한 대부분의 분들이 ③번일까? ⑤번일까를 두고 고민했을 것 같아요.
카페지기도 사진 신부, 사진 결혼법, 동서 개발 회사는 몰랐던 내용이라 이번에 공부하게 되네요...^^;
지도에 표시된 (가)는 독일입니다.
얼핏 프랑스하고도 겹쳐보일 수 있으나 독일의 루르 지방이랍니다.
1960년대 외화가 부족한 우리나라는 서독이 필요로 하는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외화를 벌어들입니다. 이때 루르 탄광 지대에 한국 광부 3,000명과 간호사 15,000명이 파견되었는데, 서독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은 한때 우리나라 수출 총액의 23%를 벌어들였답니다(1967).
(나)는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등의 중동 지역입니다.
1970년대 일어난 제1차 석유 파동으로 산유국들의 수입이 크게 늘면서, 중동 산유국들의 건설 투자를 크게 확대하는 가운데 우리 기업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석유 파동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중동은 아직도 우리나라 건설사들이 많은 건설 활동을 하는 곳입니다.
(다)는 중앙아시아 지역입니다.
중앙아시아와 우리 민족을 연결시켜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죠?
1937년에 소련의 스탈린이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사실....
(라)는 중국입니다.
대동 단결 선언은 1917년 상해에서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해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박용만, 이상설, 신규식 등의 14명이 발기하여 작성한 선언문입니다.
이 선언의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을 계승한 것은 일제가 아니라 선언문에 참여한 민족 운동가들이라는 것, 그리고 주권 재민의 민주공화정을 세우자는 것이었어요. 이 선언은 신한 청년당의 결성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화주의 및 삼권 분립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는 하와이를 포함한 미국입니다.
동서 개발 회사는 하와이 노동 이민자 모집을 위해서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사탕수수 농장 등에 필요한 노동자 모집을 위해 하와이 당국에서 파견한 데슐러는 한국에 동서 개발 회사를 세우고, 황성신문에 이민 모집 광고를 대대적으로 게재하고 서울을 비롯하여 인천, 부산, 원산, 진남포 등 전국 주요 항구 도시에 지부를 세워 하와이 이민 모집을 하였답니다.
이를 통해 모집된 사람들이 1902년 12월에 처음으로 하와이로 떠나게 되죠.
③ 사진 신부에의한 사진 결혼법은 1907년이후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인 근로자를 위한 법이랍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와는 관련이 없죠?
현대에 들어 농촌 총각들이 이 지역 여자들과 결혼을 추진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함정 삼아 답지를 구상한 것 같네요.
사진 신부와 사진 결혼법이란 하와이로 이주한 남자들이 조선인 신부의 사진만 보고 혼인한 것을 말합니다.
하와이로 이민을 온 수많은 미혼의 젊은 남성 노동자들을 위해서 하와이 주정부는 사진 결혼법을 합법화하여 사진 신
부로 하와이에 오는 여성들의 입국을 허가하고 영주권까지 주었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1회 고급 41번 문제
41. 국외 이주 동포들의 활동 답④
국외 동포의 삶, 독립 운동 발자취를 취재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을 취재할 계획인데 여기에 들어갈 장면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는 문제네요.
간단하게 지역별, 시기별 국외 이주 동포들의 생활을 정리하는게 나을 것 같네요.
1. 만주 이주 동포
1910년대 | 독립 운동 기지 건설 → 무장 항일 운동 준비, 삼원보에 신흥 학교, 용정-명동학교, 서전서숙 설립 |
1920년대 | 무장 독립 전쟁(봉오동, 청산리 대첩) 전개 → 간도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희생 많음, 3부 성립과 통합 운동 |
1930년대 |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활동 약화, 길림성 만보산 사건 발생(1931), 한․중 엽합 작전 전개 |
2. 연해주 이주 동포
1905년 이후 | 한인 집단촌 형성 - 국외 의병 운동의 중심지 역할 |
1910년대 | 13도 의군(1910), 성명회,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1914), 대한 국민 의회(1919) 조직 |
1920년대 초 | 볼셰비키 정권이 무장 활동 금지 → 민족 운동 약화 |
1930년대 |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1937) |
3. 일본 이주 동포
1910년대 | 산업 노동자로 취업, 1919년 2․8 독립 선언 발표 |
1920년대 | 조선 유학생 학우회(항일 민족 운동의 중심), 관동 대지진 때 학살(1923) |
중․일 전쟁 이후 | 한국인을 집단적으로 강제 연행 → 일제의 침략 전쟁 도구로 희생 |
4. 미주 이주 동포
20세기 초 |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 →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혹사 동서 개발 회사(고종 시기 조선인의 하와이 이민을 위해 만든 회사(1902) -이민 공고를 내 이민자를 모집하고 이들을 하와이로 이주시킴 사진 신부에 의한 사진 결혼법은 1907년 이후 하와이에 이주한 조선인 근로자를 위한 법 |
대한인 국민회 | ․ 미주 지역 항일 운동의 중추 기관 ․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지원 : 의연금 전달, 애국 공채 매입 ․ 외교 활동 : 구미 위원부 지원, 뉴욕 약소국 동맹 회의에 박용만 파견 ․ 군사 활동 : 박용만의 국민 군단, 제2차 대전 때에 한인군 편성 |
ㄷ - 대한 광복군 정부는 1914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워졌지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9회 고급 42번 문제
42.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 답②
프로그램 내용을 보면, 서전서숙, 청산리 대첩, 경신참변(간도참변)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과 공통으로 관련된 지역은 만주, 그 중에서도 북간도입니다.
만주 지역에서의 시기별 민족 운동을 간략하게 살펴 보죠.
1910년대 | 독립 운동 기지 건설 → 무장 항일 운동 준비, 삼원보에 신흥 학교, 용정-명동학교, 서전서숙 설립 |
1920년대 | 무장 독립 전쟁(봉오동, 청산리 대첩) 전개 → 간도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희생 많음, 3부 성립과 통합 운동 |
1930년대 |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활동 약화, 길림성 만보산 사건 발생(1931), 한·중 엽합 작전 전개 |
① 이상설은 간도의 용정에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로 세웠습니다.
서전서숙은 김약연이 세운 명동 학교와 함께 간도의 대표적인 학교였습니다.
② 해조신문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민회에서 1908년에 발행한 신문이었습니다.
③ 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대종교인 서일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중광단을 조직(1911)하였고,
이것이 모태가 되어 1919년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였습니다.
④ 훈춘 사건(1920. 10)은 일제가 봉오동 전투(1920. 6) 패배 후 독립군 부대의 활동 근거지인 간도로 대규모 일본군을
파병할 목적으로 조작한 사건입니다.
일제는 중국 마적단을 사주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방화를 저지르게 한 뒤, 이 사건을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 불량한 조선인 )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재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즉각 군대와 경찰을
출동시켰습니다.
⑤ 북로 군정서의 김좌진 장군과 대한독립군을 이끄는 홍범도 장군과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간도 지역의 청산
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는데, 이것이 청산리 대첩(1920. 10)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7회 고급 39번 문제
39. 관동(간토) 대학살(1923) 답①
제시된 신문 기사는 '1923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한국인 학살'에 대한 내용이니, 관동 대학살 사건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존과 항일 민족 운동 등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를 비롯해 국외로 이주하는 동포들이 많았습니다. 일본으로는 1920년대 전후로 노동자들 중심으로 주요 공업 도시로의 이주가 이루어졌어요. 이들은 도시 외곽에 빈민가를 이루고 차별과 멸시 속에 힘든 노동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1923년에 일본에서는 수도인 도쿄와 요코하마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해(간토 대지진) 14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대지진 참사로 사회가 혼란한 가운데 일본 당국은 일본인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하여 한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하여, 대지진으로 인한 일본의 사회 불안을 마치 한국인 탓인 것처럼 위장하였습니다.
일본 당국과 언론은 '한국인이 폭탄과 독약을 지니고 다니며, 방화를 위해 분필로 표식을 하고, 우물을 독약을 넣었다. 일본인을 살해하며, 일본 여인을 강간한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등의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퍼뜨렸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된 일본인들은 자경단 등을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서 일본인 사회주의자, 한국인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는데, 이때 최소 6,000명 이상의 재일 동포들이 학살당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이 혼란을 일본 내 공산당 세력을 뿌리뽑기 위한 기회로 활용해 사회주의자들이 조선인과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려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살해되었습니다.
① 당시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내려 이 사건과 관련한 보도를 일체 금지하였습니다.
② 민간인으로 구성된 자경단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대까지 동원하여 한국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였습니다.
③ 이 시기 일본은 사회주의의 보급과 노동자 계급의 성장에 따른 활발한 노동 운동, 쌀 소동 등으로 사회가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④ 일본 정부는 대지진에 따른 위기와 사회 혼란을 무마하기 위하여 공황에 빠진 일본인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해 관동
대학살을 조장하였습니다.
⑤ 관동 대학살 이후 일본은 군대·관헌의 개입, 학살은 은폐하고, 책임을 모두 민간 조직인 자경단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일부 자경단원을 형식적으로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3회 1급 40번 문제
40. 연해주 이주 동포들의 모습 답②
지도에 빗금친 지역은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 지역입니다.
러시아는 베이징 조약(1860)을 통해 이 지역을 차지하여 우리나라와 국경을 마주대하게 되었죠.
러시아는 새로 획득한 이곳을 개척하기 위해 한국인의 입국을 허용하고 토지를 제공하는 등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가난한 농민들이 많이 이주하였습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무렵에는 의병들을 비롯하여 이주 한인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곳곳에 한인 집단촌이 생겨나 국외 항일 의병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성명회(1910), 권업회(1911), 대한 광복군 정부(1914), 대한 국민 의회(1919) 등 독립 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어요.
하지만 러시아 당국은 한인들의 무장 활동을 금지했기 때문에 독립군을 양성하여 직접 무장 투쟁에 나서는 데는 한계가 많았어요. 특히, 청산리 대첩 이후 독립군이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 당하는 자유시 참변(1921)을 당하였어요.
1937년에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소련과 일본 간의 전쟁이 발발하면 한국인들이 일본을 지원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소련 당국에 의해 연해주 지역의 한국인 수십만 명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① 간민회와 서전서숙은 북간도 지역에 세워졌습니다.
③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동포들의 활동과 관련된 설명입니다.
④ 일본 이주 동포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서독과 관련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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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자세하게 설명이되어있어서 이해하기 쉽고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ㅎㅎ감사합니다!
이문제가 정말 어려운거같은데 파생문제랑 자세한해설.. 덕분에 이론은 안봐도 될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헷갈리는 부분입니다만 남만주 북간도 연해주로 나누어서 설명해주셔서 좋습니다 특히 지도를 넣어서 설명해주신점 최고입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설명이 많은 도움 되었어요~
이부분 너무 헷갈려요.....특히 지도가 함께 나오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더 어렵게 느껴지고....유사한 문제를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설 보면서 열심히 정리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