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9章 홀로 천만인을 상대하다.(雖萬千人吾往矣)
교봉은 한참 동안 운기행공을 했다. 갑자기 서북쪽의 지붕 위로부터 "스슥"하는 가벼운 음향이 두 번 일었다. 그는 즉시 어떤 무림의 고수가 지붕 위를 걸어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동남쪽에서도 그와 같은 소리가 두어 번 들려왔다. 처음 서북쪽에서 그 소리가 났을 때 교봉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동남쪽에서 그와 같은 소리가 들려오자 십중팔구 자기를 찾아오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직이 아주에게 말했다.
「내가 나가 보고 오겠소. 두려워하지 마시오.」
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봉은 촛불을 끄지 않은 채 방문을 반쯤 열어 놓고 몸을 옆으로 비껴 조용히 나가 후원 창밖으로 돌아가서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러자 객청 동쪽에 있는 한 칸의 땅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尙) 여덟째 나리요?」
서북쪽 지붕 위에 있던 사람은 웃으면서 말했다.
「관서(關西)의 기(祁)여섯째도 왔소.」
그러자 방 안의 그 사람은 말했다.
「그것 참 잘되었소. 함께 들어오도록 하시오.」
지붕 위의 두 사람은 함께 뛰어 내리더니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교봉은 속
으로 생각했다.
"관서의 기 여섯째라면 "쾌도기육"(快刀祁六)이라는 사람으로서 바로 관서땅의 유명한 호한이 아닌가? 그리고 상 여덞 째 나리라면 아마도 상동(湘東)의 상망해(尙望海)일 것이다. 소문으로 듣기에 이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나누어 주며 무공이 뛰어나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말하자면 음흉한은 아닐 것이다. 괜히 내가 쓸데없는 의심을 했구나. 그런데 그 방안에 있는 사람의 음성은 귀가 익은데 누군지 모르겠군."
그러자 상망해가 입을 열었다.
「염왕적(閻王敵) 설신의(薛神醫)가 갑자기 영웅첩을 널리 돌려 강호의 동도들을 초청하고 있소. 그런데 그 영웅첩에는 "영웅호걸들은 영웅첩을 보는 즉시 왕림해 주시길 바라오."라는 글귀가 적혀 있소. 포(鮑)형, 포형은 무엇 때문인지 알고 계시오?」
교봉은"염왕적 설신의"라는 말을 듣자 놀람과 반가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설신의가 바로 이 부근에 있었구나. 나는 멀리 감주(甘州)에 있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 있다면 아주 소저를 구할 수 있겠구나."
그는 일찌기 설신의가 바로 당금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의원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신의"라는 두 자가 너무나 유명했기 때문에 그의 본이름은 모두들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은 대부분이 과장된 것이지만 설신의는 죽은 사람을 살려 놓는다고 했으며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었어도, 아무리 중한 병에 걸려 있어도 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염라대왕마저도 설신의로 인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지옥의 사자를 보내 사람을 데려 오려고 할 때 옆에서 설신의가 종종 방해를 하며 사람을 살려 놓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의술이 신과 같이 뛰어날 뿐 아니라 무공 역시 탁월하다고 했다. 설신의는 강호 친구들과 사귀기를 좋아하며 또한 남의 병을 치료하게 되었을 때는 상대방에게 몇 초의 무공을 가르침받기를 즐긴다고 했다. 그에게 병을 치료받은 사람은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무공을 한두 수 전수해 주는데, 결코 자기의 무공을 숨기거나 하지 않고 자기가 제일 자랑하는 무공을 준수해 준다고 했다.
이때 쾌도기육이 물었다.
「포 노형, 이 며칠 무슨 장사를 했소?」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쩐지 방 안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있다 했더니 "몰본전"(沒本錢) 포천령(鮑天靈)이었구나! 이 사람은 부자를 털어서 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자로서 퍽이나 유명했다. 내가 개방의 방주 자리에 취임하는 날 그도 취임식에 참가했었지."
그는 방 안의 사람이 바로 상망해와 기육, 그리고 포천령이라는 사실을 알자 더 이상 그들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내일 아침 일찌기 포천령을 방문하자. 그리고 그에게 설신의가 있는 곳을 물어 보아야겠다."
이와 같이 생각하며 그는 방 안으로 되돌아오려고 했다. 그때였다. 포천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며칠간 마음이 괴로워서 장사할 흥미가 나야지. 그리고 오늘 들었는데 그는 부친과 어머니, 그리고 사부님을 죽였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듣자 더욱 더 울화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요.」
그가 손을 휘둘러 탁자를 한 번 힘주어 내려치는 소리가 "탁"하고 들렸다. 교봉은 그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음, 그는 나에 대해 말하고 있구나!"
이때 상망해가 입을 열었다.
「교봉이란 녀석은 명성이 자자했는데 거짓 인정과 의협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속여 온 것이 아니겠소? 그 누가 그와 같이 천인공노할 망행을 저지를 줄 알았겠소?」
포천령은 말했다.
「그가 개방의 방주로 있을 때 나는 그와 한번 만난 적이 있소. 나는 이제껏 그를 존경해 왔다오. 며칠 전 조(趙"셋째가 "그는 거란 오랑캐의 종자이다"라고 하기에 나는 화를 내며 그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으며 그와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언쟁을 벌이기도 했었다오. 하마터면 그와 손을 써서 싸울 뻔할 정도로 교봉을 변명했었소. 그런데 역시 오랑캐는 금수와 다를 바가 없는가 보오. 그는 일시 흉폭한 성격을 감출 수 있었지만 끝내는 그 흉폭한 본성이 드러난 것이 아니겠소?」
기육은 말했다.
「그런 그가 소림사 출신이며 현고대사의 제자라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구려.」
포천령은 말했다.
「본래 이 일은 지극히 은밀해서 소림사의 승려들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봉이 그의 사부를 죽이게 되자 소림사에서도 이젠... 남을 속일 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 그런데 그 교가라는 악적은 그의 부모와 사부를 죽이면 그의 출신 내력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오. 하지만 자기의 출신 내력을 감추려다가 더 큰 죄를 짓게 되었고 마각을 드러내게 된 것이지.」
교봉은 문 밖에 서서 포천령이 자기를 비방하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몰본전 포천령은 나와는 조금 교분이 있는 자이다. 그는 경솔하게 남을 헐뜯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저와 같이 생각하니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아! 이 교모가 이런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을 쓰게 되다니! 내가 아무리 변명을 해도 믿어 줄 사람은 없겠구나! 이후부터 성명을 감추고 은거해 버린다면 10년이 흐른 후 강호의 친구들은 나라는 존재를 잊어버리겠지?"
삽시간에 그는 커다란 좌절감을 맛보았다. 이때 상망해가 입을 열었다.
이 형제의 짐작으로는 설신의가 영웅첩을 돌리는 것은 바로 교봉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를 상의하기 위해서인 것 같소. 그 분 염왕적은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이고 말을 듣자하니 설신의는 소림사의 현관 현적 두 대사와도 교분이 돈독하다고 합니다.
포천령은 말했다.
「맞았소. 강호에는 근래에 교봉의 악행 이외에는 영웅첩을 돌릴 만한 일이 없었소. 자, 상형과 기형, 우리 몇 근의 고량주나 마시면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합시다.」
교봉은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아 아주의 방으로 되돌아 왔다. 아주는 그의 안색이 창백한 것을 보고 물었다.
「교나리, 적을 만났던가요?」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듯 물었다.
「상처는 입지 않았겠지요?」
교봉은 강호에 뛰어든 이래 친구에게는 존경을 받았고 적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어 왔었다. 이 며칠간 겪은 것처럼 경멸이나 천대를 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아주의 그와 같이 부드러운 말을 듣게 되자 다시 자부심이 솟구쳐 올라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그들 무지한 소인들은 이 교봉에 대해서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나를 모함하고 있소. 나를 모함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손을 써서 상처를 입히기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는 갑자기 크게 호기가 치솟았다.
「아주 소저, 내일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에게 가서 그대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할테니 안심하고 자도록 하시오.」
아주는 교봉의 그와 같은 천하를 굽어보는 듯한 태도를 보고 속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일었고 한편으론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눈앞의 이 사람과 모용공자는 매우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우 닮은 점도 없지 않았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하늘이 얼마나 높고 땅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무척이나 교만하면서도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데 교봉은 거칠면서도 호방하여 한 마리의 호랑이를 연상시켰고 모용공자는 의젓하여 한 마리의 봉황을 연상시켰다.
교봉은 큰소리를 한번 치고는 더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듯 의자에 앉더니 눈을 감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아주는 등잔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교봉의 얼굴 근육이 실룩이는 것이 아닌가?
이때 교봉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비통하고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는 갑자기 연민의 정을 느꼈다. "눈앞의 체격이 우람하고 거친 사내가 속으로 몹시 괴로워하고 있구나. 그리고 자기보다도 더욱 불행하구나"하고 생각했다.
이튿날 이름 아침, 교봉은 다시 내공을 아주의 몸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방값을 치르고 객점의 점원에게 한 대의 노새가 끄는 마차를 빌리도록 했다.
그리고 아주를 부축하여 마차에 태우고는 포천령이 기거하는 방 밖에 이르러 큰소리로 외쳤다.
「포형, 소제 교봉이 만나 뵈러 왔소!」
포천령과 상망해, 기육 세 사람은 밤새도록 교봉을 욕하다가 피곤한 나머지 그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교봉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각자 칼을 가진 자는 칼을 들고 검을 가진 자는 검을 뽑았으며 채찍에 능한 자는 채찍을 거머쥐었다. 세 사람은 무기를 드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자기의 무기에는 조그맣고 하얀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하얀 종이 위에는 교봉배상(喬峯拜上)이라는 조그마한 글자가 씌어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젯밤 그들이 잠자고 있을때 교봉이 벌써 이 방에 들어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교봉이 그들 세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다면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겠는가?
포천령은 연편을 도로 허리에 찼다. 교봉이 그들을 해치려 했다면 이미 어젯밤에 손을 썼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즉시 문을 열어젖히며 낭랑히 말했다.
「포천령의 목 위에 있는 머리를 교형이 취하고자 한다면 언제라도 와서 가져 가시오. 이 포모는 전문적으로 도둑질을 하여 왔으므로 자랑할 거리라고는 없소. 그러나 귀하는 부친과 모친, 그리고 사부마저 죽이지 않았소? 하물며 포천령쯤 죽이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소. 죽이려면 어서 죽이시구려.」
교봉은 포권의 예를 했다.
「그 날 산동성 청주부에서 헤어진 이후 어느덧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갔구려. 포형의 풍채가 여전한 걸 보니 정말 반갑소이다.」
포천령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는 몸이오만 오늘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소이다.」
교봉은 말했다.
「소문에 들으니 "염왕적" 설신의가 영웅첩을 크게 돌린다 하더군요. 불초도 한번 가보고 싶은데 세 분과 함께 가도 좋겠소?」
포천령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설신의가 영웅첩을 돌리는 것은 모두 너를 상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너는 살기가 귀찮아져서 홀로 그곳으로 가려는 것이냐? 도대체 어떤 의도로 혼자서 가려고 하는 것이냐? 오래 전부터 개방의 교방주가 대담하면서도 세심하며 지용을 겸비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만약 믿는 데가 없다면 스스로 함정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닌가? 나는 그의 속임수에 말려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봉은 그가 주저하며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말했다.
「교모에게는 설신의에게 부탁할 일이 있소이다. 그러니 포형이 안내를 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포천령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그의 독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니 그를 영웅회(英雄會)로 데리고 가서 수십 명이 포위 공격을 한다면 그에게 머리가 세 개 있고 손이 여섯 개 달렸다 하더라도 끝내는 패배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다."
속으로 여간 걱정하지 않았으나 그는 역시 교봉을 영웅회로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영웅연(英雄宴)은 이곳에서 70여리 떨어진 취현장(聚賢莊)에서 열리게 되어있소. 교형이 가시겠다면 더욱 좋은 일이요. 그런데 포천령이 미리 말해 두겠소만 본래 연회는 좋은 연회가 없고 모임도 좋은 모임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교형이 거기에 간다면 아마 위험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이 포천령이 먼저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교봉은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
「포형의 호의는 이 교모가 새겨 두겠소이다. 영웅연이 취현장에서 열린다면 주인은 유씨(游氏) 쌍웅(雙雄)이 아니겠소이까? 그곳은 익히 잘 알고 있으니 세 분은 먼저 떠나십시오. 저는 한 시간쯤 있다가 천천히 떠나겠소이다. 그래야만 모두들 나를 맞이할 준비를 할 것이 아니겠소?」
포천령은 고개를 돌려 기육과 상망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포천령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세 사람이 취현장으로 먼저 가서 교형이 왕림하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포천령과 기육, 상망해 세 사람은 방값을 치루고 말 위에 올라가 채찍질을 가하며 취현장을 향해 달려갔다. 세 사람은 길을 가면서 의논하고 추측을 해보았으나 교봉이 홀로 영웅연에 나오겠다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기육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포형, 교봉이 옆에 세워둔 그 마차를 보았소? 그 마차에 아마도 미심쩍은 일이 있을 것 같더이다.」
상망해는 말했다.
「설마하니 그 마차 안에 무슨 인물을 매복시켜 두었겠소?」
포천령은 말했다.
「설사, 그 마차 속에 사람들을 가득 싣는다 해도 7,8명 밖에는 싣지 못할 것이오. 교봉까지 합해야 열 명도 채 안 될 터인데 그 사람들이 영웅연에 와봤자 큰 바다에 한 척의 조그마한 배를 띠우는 것에 불과할 테니 그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무림의 고수들이 삼삼오오로 떼를 지어 길을 재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모두들 취현장의 영웅연에 참석하러 가는 무사들이었다. 이번 영웅연은 무예를 익힌 사람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다. 일정한 사람에게만 영웅첩을 돌린 것이 아니라 영웅첩을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참가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환영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영웅첩을 받은 사람들은 밤을 세워 쾌마로 동도들을 청했기 때문에 그 소식은 입에서 입을 통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다. 따라서 하루밤 하루 낮 사이에 아주 멀리까지 청첩장이 돌게 되었다. 하남성은 중원의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그 고장의 무림인들 이외에도 북으로 가거나 남으로 가는 무림의 인사들이 소식을 듣고 모조리 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각지의 영웅호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영웅연은 취현장의 유씨 쌍웅과 "염왕적" 설신의가 함께 이름을 내어 개최한 것이었다. 유씨 쌍웅인 유기(游驥)와 유구(游駒)는 재산이 많은 부호였다.
그리고 교제도 매우 넓은 편이었고 무공도 대단했으며 명성 또한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 설신의는 모든 사람들이 애써 그와 사귀고저 하는 인물이었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나 천하에 적수가 없다고 장담할 사람은 없었다. 설사 자기의 무공이 당장 무림에서 제일 간다 하더라도 병이 나지 않고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만약에 설신의와 같은 친구를 두게 된다면 그야 말로 하나의 목숨을 더 가지게 되는 셈이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절명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설신의가 치료를 해주겠다고 나서기만 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숨을 다시 건질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신의의 초청장은 그야말로 목숨을 구해 주는 부적과 다름없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본래 영웅첩(英雄帖)에 서명한 사람은 설신의, 유기, 유구의 세 사람이었다. 포천령과 기육, 그리고 상망해 세 사람은 취현장에 도착했다. 그러자 유씨 쌍웅의 둘째인 유가가 친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대청으로 들어서니 대청에는 이미 각지의 무사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포노형! 돈 많이 벌었소?」
「포형, 이 며칠 장사가 잘 되지요?」
포천령은 잇따라 공수의 예를 해보였다. 각지의 영웅들의 인사치례에 대답을 한 것이다.
유구(游駒"는 포천령을 동쪽에 있는 주인석으로 안내했다. 주인석에 앉아 있던 설신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포형과 기형, 그리고 상형, 세 분이 이렇게 왕림하여 주시니 이 늙은이는 그야말로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격이로소이다. 정말 고맙소.」
포천령은 재빨리 답례를 했다.
「설 어르신께서 부르신다면 이 포천령은 병이 나 꼼짝을 못한 다 하더라도 들것에 실려서라도 왔을 것입니다.」
이때 유씨 쌍웅 가운데 형인 유기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가 정말 병이 나서 꼼작 못하게 됐다면 오라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떠메인 채 설나리를 찾아왔겠지.」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유구가 입을 열었다.
「세 분께서는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을 테니 뒤에 있는 대청으로 가셔서 음식이라도 약간 들도록 하십시오.」
포천령은 말했다.
「음식은 천천히 먹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불초에게 한 가지 여쭈어 볼말이 있습니다. 설 어르신과 두 분 유나리께서 초청하신 여러 손님들 가운데 교봉이 있습니까?」
설신의와 유씨 쌍웅은 교봉이라는 이름을 듣자 하나같이 안색이 변하였다. 유기가 말했다.
「우리가 이번에 돌린 것은 영웅첩이외다. 보는 사람마다 오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포형이 교봉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포형은 그 교봉이라는 자와 무척이나 교분이 두터운가 보지요?」
포천령이 말했다.
「교봉이란 녀석이 취현장에 와 영웅연에 참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그 곳에 모여 있던 여러 군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객청에 앉아 있던 그들은 본래 제각기 떼를 지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포천령의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입을 다물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포천령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으나 삽시간에 조용해지고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하던 이야기를 중간에서 뚝 끊고 남들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되었다. 삽시간에 대청은 조용해졌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는 바람에 뒤의 객청에서 술을 마시며 떠드는 소리, 그리고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형편이었다. 설신의가 물었다.
「포형은 교봉 그 녀석이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포천령은 말했다.
「불초와 기형, 그리고 상형이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실, 말씀드리기가 부끄럽지요. 불초 세 사람은 어제 밤 크게 낭패한 꼴을 당했습니다.」
상망해는 잇따라 그에게 눈짓을 했다. 어젯밤에 일어났던 못난 일을 들추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포천령은 설신의와 유씨 쌍웅이 똑똑할 뿐 아니라 이 영웅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지혜로운 자들이 많아 자신이 조금이라도 무엇을 속인다면 반드시 그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천히 허리에 차고 있던 연편을 풀었다. "교봉배상"이라고 씌어있는 조그만 종이쪽지는 여전히 그 연편에 붙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그 연편을 설신의에게 바치며 말했다.
교봉은 우리 세 사람에게 오늘 이곳으로 온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어떻게 교봉을 만나게 되었고 또 그가 교봉에게 어떠한 말을 하였던가를 한 자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상망해는 수치스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포천령은 태연자약하게 그와 같은 이야기를 끝마치고 끝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교봉이라는 녀석은 거란의 종자가 아닙니까? 설사 그가 인정이 많고 의협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그를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이미 고약한 본성을 드러내어 하루가 다르게 큰 사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가 멀리 도망쳐 버린다면 뒤쫓아 잡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도우심인지 그 스스로 이곳에 달려오겠다니 그야말로 천만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유구는 생각에 잠기며 침울하더니 말했다.
「교봉은 지용을 겸비한 인물이라 들었소. 그리고 그의 재주는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군요. 필시 경망스런 필부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찌 영웅연에 참가하러 오겠소?」
포천령은 말했다.
「그에게 어떤 간교한 계책이 있을지 모르니 방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자연 좋은 계책도 많이 나올 테니 우리 모두 함께 의논해 보도록 합시다.」
그와 같은 말을 하는 사이에 밖에 또 다른 많은 영웅호걸들이 당도했다. 그 안에는 "철면판관" 단정과 그의 다섯 아들, 그리고 담공 및 담파 부부와 조전손등도 끼어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소림파의 현난, 현적 두 고승도 도착했다.
설신의와 유씨 형제들은 밖으로 나가서 그들을 환영하며 맞아 들였다. 이때 청지기가 들어와 보고했다.
개방의 서장로가 전공장로 및 집법장로, 그리고 송, 해, 진, 오 네 장로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뭇사람들은 흠칫했다. 상망해는 말했다.
「개방이 대거 교봉을 지원 차 나타났나 봅니다.」
단정은 말했다.
「교봉은 이미 개방에서 추방되었고 개방의 방주도 아니요. 나는 친히 그들이 서로 원수가 되는 광경을 목격하였소.」
상망해는 말했다.
「옛날의 의리를 깡그리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유기가 말했다.
「개방의 뭇 장로들은 모두 꿋꿋한 사내대장부들인데 어찌 시비를 분간하지 못하고 원수를 변호하겠소? 만약 교봉을 돕는다면 그야말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되지 않겠소?」
뭇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신의와 유씨 쌍웅은 개방의 사람들을 맞으러 나갔다. 개방의 인물들은 불과 열 두세 명에 불과했다. 군웅들은 마음을 놓고 한결같이 생각했다.
"거러지의 두령들이 교봉을 편들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 열 두 세명이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잠시 후에 개방의 사람들은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개방의 뭇사람들은 얼굴에 무거운 빛을 띠우고 있어 매우 심사가 어지러운 것처럼 보였다. 여러 사람들은 주인과 손님으로 나누어 앉게 되었다. 서장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설형, 그리고 유씨 집안의 두 분 노제, 당신들이 강호의 호걸들을 이곳으로 초청한 것은 바로 무림에 새로이 나타난 화근인 교봉 때문입니까?」
유기는 입을 열었다.
「바로 그렇소이다. 서장로와 개방의 여러 장로께서 일제히 왕림하여 주신 것은 커다란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오랑캐를 잡아 죽여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귀방의 여러 장로들께서 응낙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떤 오해가 생겨 쌍방 간의 화기가 깨어진다면 얼마나 유감스런 일이겠습니까?」
서장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 자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소. 본래 그는 폐방을 위해 적지 않은 공을 세웠소. 최근만 하더라도 우리가 서하 일품당의 암수에 넘어갔을 때 그가 나서서 구출해 주었지요. 그러나 사내대장부는 언제나 대국적인 면을 중시해야 하고 조그만 은혜는 뒤로 제쳐두어야 하지 않겠소? 그는 우리 송나라의 원수요. 폐방의 뭇 장로들은 비록 그에게 은혜를 입긴 했으나 사사로운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대의를 잊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외다. 대의멸친(大義滅親)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그는 지금으로서는 페방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외다.」
그 말이 떨어지자 군웅들은 다투어 손뼉을 치며 갈채를 보냈다. 유기는 곧이어 교봉이 친히 이 영웅연에 참가하러 온다는 사실을 밝혔다. 개방의 뭇 장로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들은 교봉을 따른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교봉의 하는 일이 용기도 있거니와 지략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약 교봉이 정말 혼자 이 취현장으로 달려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상망해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교봉이란 녀석이 일부러 우리에게 그런 전갈을 하게 하여 우리가 이곳에 다 모여 있을 때 먼 곳으로 도망을 치려고 그러는지도 모르지요. 이것이야말로 금선탈각(金蟬脫殼)이라는 계책이 아니겠소이까?」
오장로는 손을 뻗쳐 탁자를 한번 후려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빌어먹을! 그따위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교봉이 어떤 인물이오? 그가 언제 한번 한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있었소?」
상망해는 그에게 욕을 얻어먹자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노해 부르짖었다.
「당신은 교봉을 돕겠다는 것이지? 좋아, 이 상모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군! 자, 우리 한번 겨루어 봅시다.」
오장로는 교봉이 부모를 죽이고 사부님을 죽였으며 소림사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 여간 번민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슴 가득히 끓어오르는 울분을 누구에게 터뜨려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상망해가 분수도 모르고 그에게 도전을 해오는 것이 아닌가? 오장로는 몸을 흔들하며 대청 앞의 정원으로 나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교봉이 거란의 종자인지 당당한 한나라의 사람인지 아직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가 정말 거란의 오랑캐라면 이 오모가 첫 번 째로 그와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겠다. 그러나 교봉과 싸울 사람은 1,000명을 뽑는다 하더라도 너와 같은 후레자식에게는 차례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뭔데 이곳에서 큰소리를 치며 금선탈각이니 뭐니 지껄인단 말이냐? 이리 나오너라. 노부가 너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
상망해는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시퍼래졌다. 그는 "휙"하니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유기가 급히 끼어들었다.
「두 분은 모두 이 유모의 귀빈이시요. 그러니 이 유모의 얼굴을 봐서라도 서로 싸워서는 안 될 것이요.」
서장로 역시 말했다.
「오형제, 경망한 행동을 하지 마시오. 어떻게 하더라도 본방의 명성은 지켜야 할 게 아니겠소?」
그러자 사람들 가운데서 갑자기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개방에서 교봉과 같은 인물이 나타났으니 정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군! 모두들 그 명성을 돌보고 지켜야 할 것이외다!」
개방의 군호들은 그 말을 듣자 다투어 호통을 내질렀다.
「누가 한 말이냐?」
「사내라면 나서라! 사람들 틈에 숨어서 지껄인다는 것은 사내대장부의 할 짓이 못 된다!」
「어떤 후레자식이냐?」
그런데 그 사람은 한 마디를 던진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개방의 군호들은 그와 같이 비웃는 말을 듣자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상하였으나 말을 한 장본인을 찾지 못하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개방은 강호에서 제일 큰 방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개방의 군호들은 모두 거러지였다. 결코 예의를 따지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호통을 내질렀고 어떤 사람들은 상대방의 선조 십팔대대 까지 욕을 해댔다.
이와 같은 소란이 일고 있을때 한 명의 청지기가 총총히 달려와 유기의 곁에 서더니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무어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유기는 안색이 변해서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 문지기는 공포에 젖은 얼굴을 하고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유기는 설신의에게 귀엣말로 무어라고 했다. 그러자 설신의의 안색이 즉시 변했다. 유구는 그의 형님 곁으로 다가갔다. 유기가 유구에게 무어라고 몇 마디 말을 하자 유구 역시 안색이 확 변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되자 그 분위기는 한 사람에게서 두 사람에게로 전해졌고 두 사람에게서 네 사람에게로, 네 사람에게서 여덟 사람에게로 전해졌다. 떠들썩하던 대청은 삽시간에 쥐죽은 듯이 조용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교봉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설신의는 유씨 형제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다시 현난과 현적 두 승려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모셔 오게.」
그 청지기는 몸을 돌려 나갔다. 군호들은 긴장된 표정을 하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 자기편 사람들이 많아서 뭇사람들이 한꺼번에 덤벼들면 교봉을 즉시 난도질 해서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봉의 위명은 너무나 컸다. 더군다나 그가 혼자 왔다는 말에 더욱 불안해졌다. 군호들은 교봉에게 어떤 간교한 음모가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어 더욱더 전전긍긍 했다. 사방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따그닥, 따그닥" 하고 들려왔다. 그리고 수레바퀴가 석판 위를 구르는 소리가 "우르릉, 우르릉 "하고 들려왔다. 한 마리의 노새가 끄는 마차가 대문 앞에 이르는가 했더니 멈추지 않고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유씨형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이 너무나 무례하고 방자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쿵쿵"하는 소리와 함께 노새가 끄는 마차바퀴가 문턱을 지나게 되었다. 한 명의 대한이 손에 채 찍을 들고 마부석에 앉아 있었다. 노새가 끄는 마차의 휘장이 내려져 있어 그 안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군호들의 시선은 일제히 마차를 몰고 온 그 대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는 네모진 얼굴에 키가 컸으며 어깨가 넓었다. 그리고 눈썹과 눈에서는 절로 위엄이 우러나오고 있었다. 바로 개방의 전임방주 교봉이었다. 교봉은 채찍을 자기 옆자리에 놓더니 마부석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포권의 예를 했다.
「설신의와 유씨 형제가 취현장에서 영웅연을 베풀고 있는데, 이 교모는 중원의 형제들에게 비난을 받는 몸으로서 후안무치하게 영웅연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급한 볼 일이 있어 설신의를 뵙고자 당돌하게 찾아 왔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재차 깊이 읍을 했다. 그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교봉이 예의가 바르면 바를수록 뭇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어떤 음모를 준비해 놓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구는 왼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제자 네명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장원 안팎에 어떤 이상이 없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이때 설신의는 손을 맞잡고 반례하며 말했다.
「공께서는 무슨 일로 불초에게 부탁을 하러 왔소이까?」
교봉은 두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수레의 휘장을 걷고 손을 뻗어 아주를 부축 하여 수레에서 내리게 했다.
「불초가 변변치 못하여 이 소녀가 다른 사람의 장력을 받아 중상을 입는 것을 막지 못했소이다. 당금 세상에서 설신의 이외에는 고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당돌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무쪼록 설신의께서 이 소녀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군호들은 수레에서 십육, 칠세 정도의 처녀가 내리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군호들은 마차에 어떤 무서운 계략이 꾸며져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그 소녀는 몸에 담황색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광대뼈가 "툭"튀어 나온 소녀의 모습은 보기에도 징그러운 추녀였다. 원래 아주는 고소 모용씨가 강호에서 원망을 많이 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설신의가 아주의 내력을 알게 된다면 치료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허가집에서 옷을 새로 사서입고 수레 안에서 용모를 바꾸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의원이 진맥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남자나 나이가 많은 노파로 분장을 하면 쉽게 탄로가 날 것 같아 십 육칠 세 정도의 얼굴이 아주 못난 소녀로 분장을 했던 것이다.
설신의는 교봉의 그와 같은 말을 듣자 천만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들 방법을 강구하여 사로잡으려고 하는 교봉이 자기 앞에 환자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 아닌가? 설신의는 아주의 용모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용모도 아주 추악했다. 그러니 교봉이 이 나이 어린 소녀의 미색에 빠져 이곳에 나타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술에 밝은 만큼 체질이나 모습을 척 보기만 해도 사람 나름대로의 특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봉과 아주 두 사람이, 한 사람은 건장하고 거친데 반하여 한 사람은 약하고 섬세하여 전혀 비슷한 데가 없다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는 그들 두 사람이 친척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본 뒤 물었다.
「이 소저의 성씨는 어떻게 되며 귀하와는 어떤 관계인지요?」
교봉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아주를 알게 된 이래 다만 그를 아주(阿朱)라고만 불렀을 뿐 진짜 성이 주(朱)씨인지 아니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에게 나직이 물었다.
「그대의 성이 주씨요?」
아주는 미소 지었다.
「저의 성은 원(阮)씨에요.」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설신의, 그녀의 성이 원씨라는 것을 저도 지금에야 알았소이다.」
설신의는 더욱 의아해져 물었다.
「그렇다면 이 소저와 깊이 사귄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오?」
교봉은 말했다.
「이 소저는 나의 친구의 시녀입니다.」
설신의는 말했다.
「귀하의 그 친구는 누구요? 아마도 혈육과 같은 사이인가 보구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친구의 시녀를 이토록 보살펴 줄 수 가 있겠소.」
교봉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친구와는 서로 대면한 적이 없는 사이입니다.」
말이 떨어지자 대청에 있던 군호들은 모두 "아!"하는 소리를 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들은 교봉이 이 일을 꼬투리삼아 어떤 간계를 부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교봉이 평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흉폭하고 악독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 공공연히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속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신의는 손을 뻗어 아주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녀의 맥은 지극히 미약했다. 그러나 체내에서는 진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지 않은가? 극히 어울리지 않는 증세였다.
그는 재차 그녀의 왼쪽 완맥을 짚어 보았다. 그러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교봉을 향해 말했다.
「이 소저가 만약 태행산 담공의 금창약과, 그대가 불어넣어 준 내공을 얻지 못했다면 이미 현자대사의 대력금강장력(大力金剛掌力)아래 죽었을 것이오.」
군호들은 그 말을 듣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담공과 담파 역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어떻게 하여 우리의 금창약을 바르게 되었을까?"
현난과 현적 두 대사는 더욱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방장사형이 언제 대력금강장력으로 저 소저를 때렸단 말인가? 만약 그녀가 정말 방장사형의 대력금강장력에 적중되었다면 어찌 지금까지 살아 있는가?"
그리하여 현난대사는 입을 열었다.
「설신의, 우리 방장사형은 수년 동안 본사에서 떠난 적이 없소이다. 그리고 이 수년 동안 소림사에 여자가 들어온 적도 없었소이다. 따라서 이 대력금강 장력은 우리 사형의 손에서 뻗쳐 나온 것이 아닐 겁니다.」
설신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세상에 누가 또 있어 이 대력금강장력을 펼쳤단 말이요?」
현난대사와 현적대사는 서로 쳐다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 두 대사는 소림사에서 수십 년 동안 현자와 같은 사부에게서 무예를 배웠다. 그리고 힘써 무공을 연마했으며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나 대력금강장력만은 자질의 한계로 말미암아 끝내 익히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력금강장력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섭섭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사실 소림사에서는 종종 백여 년 만에 한 사람씩 특출한 인재가 나타나 그 장법을 익히곤 했던 것이다.
다만 무공을 연마하는 요결 등등은 역대 고승들이 남긴 무학경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백 명의 소림사 제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그 장법을 연성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어떤 무공요결을 잊는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현적 대사는 정말, "당신은 정말 대력금강장력에 상처를 입은 것이오?"하고 묻고 싶었으나 차마 그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묻는 것은 바로 설신의의 의술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였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개를 돌리고 교봉에게 물었다.
그대는 소림사에 와서 우리 현고사형을 죽였고 우리 방장 사형의 대력금강장력에 일장을 맞은 적이 있소. 그런데 만약 그 일장이 이 소저에게 적중되었다면 어찌 살아 숨쉴 수가 있었겠소?
교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현고대사는 나의 은사입니다. 그 분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고도 보답을 못해 드렸습니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분을 해친 흉수를 잡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현난대사가 노해 말했다.
「그대는 그래도 잡아떼려는 것이오? 그렇다면 사로잡아간 소림승은 어떻게 되었소? 그 일도 설마 그대가 부인할 텐가?」
교봉은 말했다.
「대사께서는 내가 한 분의 소림 고승을 사로잡아갔다고 했는데 그 고승이 누구지요?」
현적과 현난은 서로 쳐다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현자와 현적, 그리고 현난 삼대 고승은 교봉에게 함께 협공을 했으나 교봉은 유유히 달아났었다. 그리고 분명 한 명의 소림고승을 잡아 갔겄만 그 후 소림사의 모든 승려들을 살펴본즉 어느 한 사람도 없어진 사람이 없었다. 이와 같이 괴이한 일은 실로 백 번 생각해도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이때 설신의가 입을 열었다.
「교형이 어제 홀로 소림사에 들어갔다 나왔으나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림의 고승까지 사로잡아갔다니 그것 정말 이상하구려.」
교봉은 말했다.
「현고대사는 결코 내가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소림사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나 한 분의 소림고승도 잡아간 사실이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상하시겠지만 저 역시도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난대사는 말했다.
「어찌 되었든 이 소저는 우리 방장 사형의 장력에 맞은 것이 아니오. 그래도 우리 방장사형은 득도한 고승이고 일파의 장문지존인데 어찌 나이 어린 소녀에게 상처를 입히겠소? 이 소저에게 아무리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 방장사형은 결코 그녀를 상대로 하여 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오.」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두 화상이 차라리 아주소저가 현자방장에게 맞은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설신의는 소림사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치료를 해주지 않으려고 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교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소. 현자방장은 자비로우신 분이오. 결코 중수법으로 나이 어린 소녀에게 중상을 입히지는 않았을 것이오. 십중팔구는 누군가가 소림사의 고승으로 변장하고 소녀에게 상처를 입혔을 것입니다.」
현적과 현난은 서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교봉 이 녀석은 간악하기는 하지만 말에 일리가 있다."
아주는 속으로 웃었다.
"교나리의 말이 옳다. 정말 소림사의 고승으로 변장하여 사람을 속이고 함부로 손을 써서 상처를 입힌 사람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데 변장한 사람은 현자방장이 아니라 지청화상이었지."
설신의는 현적과 현난 두 분 고승이 그렇게 말하니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대력금강장력을 쓰는 사람이 또 있는 모양이오. 그 사람은 힘을 쓸 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소. 그래서 원소저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거두지 않게 된 것이요. 그러나 그 자의 장력의 웅후함은 아마도 현자방장보다 뒤지지 않을 것이오.」
교봉은 속으로 탄복해 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자방장의 그 일장을 내가 구리거울로 막았기 때문에 그 힘이 현저히 약화 되었다. 이 설신의의 의술은 정말 신과 같구나. 맥을 한번 짚고 그 당시의 손을 쓴 상황까지 확실하게 짚어내는 것을 보아도 그에게 아주를 치료할 의술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생각한 그는 얼굴에 기쁜 빛을 띠우며 말했다.
「이 소녀가 만약 대력금강장력 아래 죽게 된다면 소림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셈이니 설신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깊히 읍을 했다. 현적은 설신의가 미쳐 대답을 하기 전에 아주에게 물었다.
「그대에게 금강장력으로 상처를 입힌 사람이 누구요? 그대는 어디서 상처를 입었소?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소?」
아주는 짖궂은 데가 있었다. 그녀는 교봉처럼 있었던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녀는 때로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기도 했고 때로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해서 사람을 골려 주기도 했다. 그녀는 현적의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화상들은 우리 공자를 모두 두려워하고 있으니 나는 아예 그를 내세워 그들에게 겁을 주어야겠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젊은 공자였어요. 얼굴 모습도 준수하고 풍채도 훤칠한데 나이는 이십팔세 가량 되었어요. 나는 이 교나리와 객청에서 설신의의 의술이 얼마나 뛰어나며 이 세상에서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옛 부터 그와 같은 분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칭찬하는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신의는 한 평생 그와 같은 칭찬을 수없이 듣고 살았지만 묘령의 소녀로부터 듣기는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조금도 스스럼없이 과장까지 해가며 칭찬하는지라 설신의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은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교봉은 눈살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일이 언제 있었다고 이 소저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지?"
아주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세상에는 설신의가 계시니 모두들 무공을 배울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러자 교나리가 물었지요. "어째서?"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때려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설신의는 살려 놓을 수 있다지요? 그러니 검법을 배워서 무엇 하겠어요? 교나리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그 분이 한 사람을 살려 놓고, 교나리가 두 사람을 죽인다면 그분이 다시 한 쌍의 사람을 살려 놓을 테니 모두들 헛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녀는 정말 언변이 좋았고 음성 또한 맑았다. 중상은 입었지만 그 고운 음성으로 청산유수같이 지껄여댔다. 그녀의 음성은 마치 옥쟁반에 구슬을 굴리는 듯 듣기가 좋았다. 뭇사람들은 그녀의 말이 재미있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웃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아주는 한 번도 웃지 않고 계속 지껄여댔다.
「그런데 우리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 공자는 냉소를 치는 것이었어요.」
"천하의 장력에는 공력이 실려 있다. 그러므로 그 설가라는 사람은 헛되이 명성을 날리고 있을 뿐 내상을 치료하지는 못한다. 나의 이 일장을 그가 치료할 수 있는지 보아야겠다."
그렇게 몇 마디 말하더니 갑자기 저를 향해 허공을 격하고 일장을 후려쳐왔어요. 나는 그가 나와는 삼장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저 해본 소리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그러자 교나리는 깜짝 놀랐어요.
그때 현적이 물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뻗쳐서 막았소?」
아주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교나리가 만약 손을 뻗쳐서 막았더라면 그 젊은 공자는 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없었을 거예요. 교나리는 나와 무척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미처 저를 구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나리는 급히 의자를 던져 장력을 막았지요. 그때 교나리는 힘을 매우 적절히 사용하였어요. 따라서 "우지끈"하며 그 의자는 젊은 공자의 벽공장력에 박살이 났어요. 그 공자는 바로 부드러운 소주땅의 말씨를 썼는데 손의 재간만큼은 절대로 부드럽지가 않았어요. 저는 대뜸 온몸이 두둥실하니 구름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으며 반 푼의 힘도 쓸 수가 없었어요. 그러자 그 공자는 말했지요.
"너는 설신의에게 가서 치료를 해보라고 해.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현자대사의 상처를 치료하게 될 때 손발이 어지럽지 않게 될 것이다."
현난은 눈쌀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지?」
아주는 대답했다.
「그는 장래에 대력금강장력으로 현자대사에게 상처를 입히겠다는 듯이 말했어요.」
군중들은 모두 "아"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몇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그 자의 방법으로 그 자에게 펼친다는 수법이군!」
그리고 몇 사람은 말했다.
「그 사람은 과연 고소 모용이군!」
그들이 과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들이 짐작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유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교형은 조금 전 그 누군가가 소림의 화상으로 사칭해서 떠돌아다니다가 이 소저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했소. 그런데 이 소저는 젊은 공자가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했소.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이오?」
아주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소림의 화상으로 사칭한 사람이 있긴 있었어요. 저는 친히 두 사람이 소림의 승려라고 자칭하면서 남의 집 검은 개를 잡아서 먹는 걸 보았어요.」
그녀는 자기의 거짓말 가운데 많은 허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터무니없는 소리로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설신의 역시 그녀의 말이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는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어야 할지 어떨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서 현난과 현적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유기와 유구 형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교봉과 아주를 쳐다보았다. 교봉은 말했다.
「설신의께서 오늘 이 소저를 구해 주신다면 이 교모는 이후 설선생의 은혜를 길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설신의는 냉소했다.
「허허허, 이후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설마 하니 오늘 그대가 살아서 이 취현장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교봉은 말했다.
「살아서 나가든 죽어서 나가든 상관할 바 없겠지요. 어쨌든 이 소저의 상처만은 치료해 주십시오.」
설신의는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왜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야 하오?」
교봉은 대답했다.
「사람의 한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층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소녀가 무단히 목숨을 잃고 있는 상태이니 선생님이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설신의는 말했다.
「그 어떤 사람이 이 소녀를 데리고 와서 치료를 부탁해 왔다면 나는 분명 치료해 주었을 것이오. 그러나 흥! 당신만은 안 되겠소. 당신이 데리고 온 사람이라면 나는 치료를 해 줄 수가 없소.」
교봉은 안색이 변하여 싸늘히 말했다.
「여러분이 오늘 취현장에 모인 것은 이 교모를 상대할 방법을 의논하자는 것이 아니오? 이 교모가 모를 줄 아시오?」
아주는 불쑥 입을 열었다.
「어머, 교나리. 그렇다면 저를 위해 이곳으로 오는 모험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교봉은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당당한 사내대장부이며 분명히 시비곡절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하오. 당신들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교모가 아니겠소? 이 소저는 나와 아무 관계도 없소이다. 설선생님은 이 교모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소. 그 감정을 이 원소저에게 연루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된 것이 아니겠소?」
설신의는 그 말에 할 말을 잊은 듯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사람의 병을 치료해 주거나 목숨을 구해 주는 일은 내 기분에 따라 행할 일이지 남이 억지로 권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오. 교봉, 그대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소. 우리는 그대를 포위 공격해서 난도질을 해 그대의 부모와 사부 앞에 제사를 지낼까 하던 참이오. 그런데 그대 스스로 찾아왔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소. 그대 자신이 스스로 자결토록 하시오.」
거기까지 말한 그는 오른손을 들어 한번 흔들었다. 그러자 뭇 영웅호걸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다투어 무기를 뽑아 들었다. 대청 안은 즉시 싸늘한 광채로 눈이 부실 정도가 되었다. 가지각색의 칼(刀)과 검(劍), 그런가하면 도끼나 채찍들이 번뜩거리게 되었다. 곧이어 높은 곳에서 함성이 들렸다. 또 처마 위와 집 모퉁이에 잠복해 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 역시 무기를 들고 있었고 각처의 요로를 지키고 있었다.
교봉은 적지 않은 싸움을 치르어 왔으나 대부분은 개방의 제자들을 이끌고서였었다. 그러니만큼 자기 쪽에서 언제나 사람이 많은 편이었으며 한 번도 이처럼 많은 적들 속으로 홀로 뛰어든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심한 중상을 입은 소녀를 데리고 있지 않은가? 아주는 두려운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부르짖었다.
「교나리, 어서 혼자서 도망치세요! 저는 상관하지 마시구요. 저들은 저와 아무런 원한이 없으니 저를 해치지는 않을 거예요.」
교봉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의협심이 강한 사람들이니 이유 없이 그녀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역시 이 시비의 장소에서 떠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사내대장부가 사람을 구하겠다고 나섰으면 끝까지 구해야 한다. 이 교봉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떠나다니 말이 될 소리인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한 그는 즉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취현장에 모여 있는 고수들 가운데 태반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절기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기도 했다. 그는 그들을 대하게 되자 즉시 호기가 치솟아 올랐다.
"이 교봉이 피를 취현장에 뿌리게 되고 난도질을 당하게 된다해도 대수로울게 무엇이랴? 사내대장부라면 살아있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으며 죽는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그는 소리 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 당신들은 모두 나를 거란 사람이라고 말하며 나라는 사람을 죽여 없애려고 하고 있소! 하하하... ! 거란 사람인지 한나라 사람인지 이 교모 역시 모르고 있소이다! 하하하!」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 틈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지. 당신은 잡종이지! 당신 자신도 누구의 새끼인지 모르는 게 당연해!」
이 음성은 바로 조금 전 사람들 틈에서 개방의 사람들을 비웃었던 사람의 음성이었다. 이 자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가끔씩 한 마디를 내뱉고 입을 다물기 때문에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군웅들은 누구인지 살피려고 시종 고개를 돌렸지만 입술을 움직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교봉은 그 말을 듣자 눈을 가늘게 뜨고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설신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만약 내가 한나라 사람이라면 오늘 당신이 나를 거란인이라고 모욕했으니 이 교모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만약 내가 정말 거란 사람이고 대송나라의 호걸들과 적이 되어 싸울 작정이라면, 대송나라의 영웅 한 사람을 해치게 되었을 때 당신이 그 사람을 다시 살려내지 못하도록 먼저 당신부터 죽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설신의는 대답했다.
「그렇소. 어찌 됐든 당신은 나를 죽이려 하겠지.」
교봉은 말했다.
「그래서 오늘 당신에게 이 소저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외다. 한 목숨과 한 목숨을 바꾸자는 것이오. 이 교모는 평생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않겠소.」
설신의는 냉소했다.
「허허허... 노부는 이제껏 사람을 치료해 달라는 부탁은 받았지 한 번도 협박을 받은 적은 없소.」
교봉은 말했다.
「한 목숨과 한 목숨을 바꾸는 것은 무척 공평한 일이오. 어찌 협박이라고 하시오?」
그러자 사람들 틈에서 그 가느다란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당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가? 당신 자신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난도질당해 죽을 판인데 누구의 목숨을 용서하고 말고 하겠다는 것인가? 당신은...」
교봉은 갑자기 노해 소리쳤다.
「썩 이리 나서랏!」
그 소리에 대청 안이 쩌렁하게 울렸고 대들보 위에 쌓였던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군웅들은 귀에 "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 틈에서 한 대한이 쓱 나섰는데 그는 비틀거리고 있었으며 제대로 서있지도 못했다. 아니 술취한 사람 같았다. 그자는 몸에 청포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은 잿빛이었다. 군웅들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담공이 갑자기 부르짖었다.
「아, 저자는 추혼장(追魂杖) 담청(譚靑)이로군! 맞아! 저자는 악관만영(惡貫滿盈) 단연경(段延慶)의 제자야!」
개방의 군호들은 악관만영 단연경의 제자라는 소리에 더욱 화가 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하나같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 그 날 서하의 현련철수 장군과 일품당의 고수들이 그들 자신의 "비소청풍"에 중독되어 개방의 방도들에게 사로잡혔을 때 갑자기 단연경이 나타났었다. 개방의 군호들 가운데 그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단연경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해약으로 일품당 고수들이 중독된 독을 풀었었다. 그리고 떼를 지어 오히려 개방에 반격을 가해왔었다. 그러므로 개방의 군호들은 단연경이라고 하면 한편으로는 화도 났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느꼈다. 개방에서 교봉이 떠난 이후 "천하제일의 악인"을 만나게 된다면 끝끝내 대항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던 것이다. 이때 추혼장 담청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고통이 극에 달한듯 두 손으로 연신 자기의 앞가슴을 쥐어뜯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의 배에서 사람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는... 당신과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어째서... 나의 법술(法術)을 깨뜨리는 것이지?」
여러 사람들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모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청에 있는 사람 중에 극소수만이 그의 이런 재간이 복화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복화술이라는 것은 높은 내공과 결합시켜 펼쳐내면 상대방의 심신을 흔들리게 만들고 혼백을 앗아 죽게 하는 무예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공력이 자기보다 더 심오한 적을 만나게 되면 그 공력이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펼친 사람이 해를 입게 되는 것이었다.
설신의는 노해 부르짖었다.
「너는 악관만영 단연경의 제자가 맞느냐? 이 영웅연에 초대된 사람들은 천하의 호한들이다. 너와 같이 몰염치한 망나니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오게 되었느냐?」
갑자기 높다란 담장 밖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영웅연이야? 내가 보기엔 개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데!」
처음 한 마디는 매우 먼 곳에서 들려왔으나 마지막 말이 끝나면서 그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높은 담장 위에서 표연히 내려서는데 키는 매우 컸고 행동은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지붕 위에 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먹을 쓰거나 칼로 막으려 했으나 그 자는 유유히 피해냈다.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바로 궁흉극악(窮兇極惡) 운중학이었다. 운중학은 표현히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몸을 흔들 하며 대청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담청을 안더니 질풍과 같이 설신의에게 다가들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설신의를 해칠까봐 칠팔명이나 서서 설신의를 보호하려 했다.
운중학은 이미 그러한 것을 계산에 넣고 있는 듯했다. 그는 공격하는 듯하면서 뒤로 물러섰고 또한 동쪽을 치는 듯하면서 서쪽을 쳤다. 뭇사람들이 설신의를 보호하자 그는 번쩍 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높은 담장 위로 뛰어올랐다. 이번 영운연에 참가한 고수들은 실로 많았다. 운중학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진 고수들이 오륙십명은 안 되어도 삼사십명은 족히 되었다. 그러나 운중학은 선기를 먼저 점하고 그 누구에게도 방비할 여유을 주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운중학의 경공법이 지극히 탁월하기 때문에 그가 담장 위로 올라가자 그 누구도 그를 쫓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군웅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가죽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암기를 꺼내려 했다. 그리고 원래 지붕 위에 있던 사람들은 다투어 호통을 내지르며 운중학을 뒤쫓으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이때 교봉이 호통을 내질렀다.
「거기 서랏!」
그리고는 손을 들어 허공을 사이에 두고 일장을 후려쳤다. 장력이 질풍과 같이 뻗어나갔다. 마치 한 줄기 무형의 기운이 운중학의 등을 후려쳐가는 듯했다. 운중학은 답답한 신음소리를 내더니 힘없이 담장 아래로 떨어지더니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담청은 여전히 뻣뻣하게 서 있었다. 다만 몸이 휘청하며 동쪽으로 기울어졌다가는 또 갑자기 서쪽으로 기울어지곤 했다. 그리고 입으로는 "야, 야"하는 매우 이상한 소리를 흥얼거렸는데 그 모양이 몹시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대청에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웃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광경은 한평생 듣지도 못했던 광경이라서 두렵기만 했다.
설신의는 운중학이 무척 중한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빨리 손을 쓰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청은 혼이 떠나간 상태라서 천하의 어떤 영단(靈丹)으로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교봉이 아무렇게나 호통을 내지르고 일장을 들어 허공을 격하고 후려쳤는데도 그와 같은 위력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교봉이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편 담청은 꼿꼿이 선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커다란 눈망울은 똑바로 뜨고 있었다. 이미 숨이 끊긴 것이었다. 조금 전 담청이 개방을 모욕하였을 때 모든 개방의 군호들은 십분 화를 내었으나 그 장본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헛되이 화만 내고 있었다. 그러나 교봉이 나타나자마자 쉽게 그 자를 죽여 버리는지라 하나같이 통쾌하게 생각했다. 송장로와 오장로같이 솔직한 사람들은 하마터면 소리 내어 갈채를 보낼 뻔했다. 다만 교봉이 거란의 원수라는 생각에 그러한 감정을 억지로 참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생각하였다.
"그가 우리의 방주가 된다면 개방은 언제나 승리를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의 개방은 걸음마다 가시밭길일 것이다. 따라서 개방은 다시 옛날의 위풍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운중학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어슬렁거리며 문을 나섰다. 그러나 역시 몇 걸음 가지 못해 입으로 다시 피를 토해내었다. 군웅들은 그의 상처가 깊은 것을 보자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저자는 우리들을 개들의 모임이라고 욕했으나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자를 어찌할 수 없었다. 오히려 교봉이 손을 써서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것이 아닌가?"
이때 교봉은 입을 열었다.
「두 분 유형, 불초는 오늘 여기서 적지 않은 옛 친구를 만나 보게 되었구려. 이후에는 적이 되면 되었지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니 불초로서는 서글픔을 금할 길이 없구려. 따라서 몇 잔의 술을 얻어 마시고 싶소이다.」
뭇사람들은 그가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자 모두들 매우 놀랍고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유구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 그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두고 보아야지."
그는 장정들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취현장에서는 영웅연을 열기 위해 술과 음식을 충분히 장만해 놓고 있었다. 삽시간에 장절들이 술 주전자와 술잔을 갖고 왔다.
교봉은 이를 보고 입을 열었다.
「작은 잔으로써야 어찌 흥을 돋굴 수 있겠소. 수고스럽지만 큰 잔을 갖다 주구려.」
두 명의 장정은 곧 큰 대접을 가져왔다. 그리고 한 주전자의 술을 교봉의 앞에 놓인 대접에 모두 부었다. 교봉은 말했다.
「모든 대접에 술을 가득 따르도록 하시오.」
두 명의 장정은 그 말을 따라 몇 개의 대접에 가득 술을 따랐다. 교봉은 한 대접의 술을 들고 입을 열었다.
「이곳에 모인 분들 가운데 많은 분이 교봉의 옛날 친구였소. 그러나 오늘 나를 사악한 사람으로 보고 있으니 우리 함께 건배함으로써 절교합시다. 어느 분의 친구이고 간에 이 교모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와서 한 대접의 술을 함께 마십시다. 그 사람에게는 지금까지의 교분을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소이다. 따라서 그대를 죽이는 것은 결코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대가 나를 죽이는 것도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외다.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증인이 되어 줄 것이오.」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잠시 흠칫했다. 대청 안은 조용했다. 여러 사람들은 한결같이 생각했다.
"내가 만약 먼저 나가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신다면 반드시 그가 쓰는 암수에 걸려들고 말 것이다. 그의 공격이 펼쳐진다면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조용한 가운데 갑자기 소복을 걸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바로 마대원의 부인인 마부인이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대접을 받아들더니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돌아가신 주인이 그대의 손에 목숨을 잃었으니 그대와 무슨 옛정이 있다고 하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술대접을 입가로 가져가더니 한 모금을 마시자 입을 떼고 말했다.
「양이 많아 다 마시지는 못했으나 서로 간에 원수가 되었음은 이 술과 같을 것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대접에 남은 술을 모조리 땅바닥에 쏟아 버렸다. 교봉은 얼굴을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목이 청수했고 얼굴은 상당히 고왔다. 그날 밤 은행나무 숲 속에서는 횃불이 어른거려서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제 서야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무서운 여자가 이렇게 가냘픈 모습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교봉은 아무 말 없이 대접을 들어서는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옆에 있는 장정에게 손짓하여 다시 술을 따르도록 했다. 마부인이 물러간 후 서장로가 뒤어어 나왔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 대접의 술을 들이켰다. 교봉은 그와 함께 마주 바라보고 서서 다시 한 대접의 술을 비웠다. 전공 장로가 그 다음으로 나왔고 그 다음으로 집법장로 백세경이 걸어 나왔다. 그가 대접을 들고 술을 마시려 할 때 교봉이 입을 열었다.
「잠깐!」
백세경은 물었다.
「교형, 무슨 분부하실 일이 있소?」
그는 교봉에 대해서 평소처럼 공손했으며 이때의 어조도 평시와 다름이 없었다. 다만 방주라고 칭하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교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다년간 우애 깊은 형제로 지냈소. 그런데 이후부터는 원수가 되겠구려.」
백세경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교형의 신세에 대해서 불초는 일찌기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만약에 나라의 원한이 아니라면 이 백세경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교형에게 감히 덤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교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내가 잘 알고 있소이다. 나중에 친구가 원수로 변하게 된다면 한바탕의 큰 싸움을 면할 수 없을 것이외다. 따라서 교봉은 한 가지 부탁이 있소이다.」
백세경은 말했다.
「나라와 대의에 관계가 없는 일이라면 이 백모는 명을 받들겠습니다.」
교봉은 빙그레 웃으며 아주를 가리켰다.
개방의 뭇 형제들이 만약 이 교모가 옛날에 조금이라도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한다면 저 소저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뭇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그가 한 말이 곧 유언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러 친구들과 일일이 건배를 한 뒤에 곧이어 큰 싸움을 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내다보고 있었다. 중원의 뭇 고수들의 포위 공격하에 그가 십 명이고 팔명이고 죽인다 해도 죽음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군호들은 그의 늠름한 기상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세경은 평소 교봉과 교분이 지극히 두터웠다. 그의 몇 마디 말이 일종의 유언과 다름이 없는지라 처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교형, 안심하시오. 백세경은 반드시 설신의에게 부탁을 드려 저 소저를 치료하도록 하겠소이다. 저 원소저에게 어떤 변고가 생긴다면 이 백세경은 자결을 하여 교형께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이 몇 마디의 말은 명백했다. 설신의가 치료해 줄런지 그것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반드시 전력을 기울여 간청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교봉은 말했다.
「그러면 이 형제는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백세경은 말했다.
나중에 싸우게 될 때 교형은 조금도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백모가 만약 교형의 손에 죽게 된다면 개방에선 자연히 다른 사람이 이 원소저를 돌봐 드릴 것입니다.
그는 큰 대접을 들어 그 안에 들어 있던 술을 단숨에 비웠다. 교봉 역시 한 대접의 술을 단번에 마셨다. 그 다음으로 개방의 송장로 해장로 등이 다가와 그와 술을 마셨다. 개방의 옛 사람들이 모두 술을 마시게 되자 나머지 문파의 영웅호걸들이 일일이 다가와서 그와 마주보며 대접의 술을 비웠다. 뭇사람들은 보면 볼수록 놀랐다. 교봉은 이미 사오십 대접의 술을 비운 것이다. 그러니까 커다란 통의 술을 모두 혼자 마신 격이었다. 따라서 장정은 다시 한 동이의 술을 내놓게 되었는데 교봉은 여전히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었다. 배가 약간 불룩해지는 것 외에는 다른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뭇사람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저렇게 마시다가는 취해서 죽게 되겠다. 손을 써서 싸울 필요도 없겠구나!"
그런데 교봉은 술기운이 있을수록 정신이 더 맑았고 기운도 더 용솟음쳤다.
이 며칠간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였고 답답한 심정을 풀 길도 없었다. 그는 마음껏 마시고 크게 싸워 보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가 육십여 대접의 술을 마시게 되었을 때 포천령과 쾌도 기육 역시 그와 술잔을 나누었고 이어 상망해가 술잔을 들고 말했다.
「이 교가야, 나도 너와 술잔을 나누기로 하겠다.」
그 말투는 매우 무례했다. 교봉은 술기운이 올랐다. 그를 쏘아 보며 말했다.
「이 교모가 천하영웅들과 절교의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바로 옛날의 은혜와 우의를 단번에 없애자는 것이다. 그런데 네까짓 것도 나와 술을 마실 자격이 있는가? 너와 나 사이에 무슨 교분이 있었지?」
그는 상대방의 대답도 듣지 않고 한 걸음 나서며 오른손을 뻗어 상망해의 가슴을 움켜쥐고 그를 대청 문 밖으로 내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상망해는 심하게 벽에 부딪혀 대뜸 기절을 하고 말았다. 대청 안은 대뜸 소란스러워 졌다. 교봉은 마당으로 나가 호통을 치며 말했다.
「어느 분이 먼저 나와 싸우겠소?」
군웅들은 그의 늠름한 기상을 보고 일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교봉은 호통을 쳤다.
「당신들이 손을 쓰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손을 쓰겠소!」
그는 손을 쳐든 채 펑펑하며 이미 두 사람을 벽공장으로 후려쳐 땅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이어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와 팔굽으로 치고 주먹으로 때리는가 하면 손으로 내리치고 발로 걷어차면서 삽시간에 몇 사람을 쓰러뜨렸다.
유기는 부르짖었다.
「모두들 벽에 기대어 서되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대청에는 삼백여 명이 모여 있었다. 만약 이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교봉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더라도 결코 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중앙에 모여 있으니 교봉의 앞에 나설 사람은 불과 오륙인에 지나지 않았다. 칼과 창검을 사방에서 휘둘러댔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편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때 유기가 부르짖게 되자 대청 한 복판에 빈터가 생겨나게 되었다. 교봉은 부르짖었다.
「나는 취현장 유씨쌍웅의 수단을 가르침 받고 싶소이다!」
그리고 왼손을 쳐들더니 커다란 술항아리를 들고 유기 쪽을 향해 던졌다. 유기는 두 손을 들어 막는 동시에 장력을 돋우어 술항아리를 치려고 했다. 그런데 교봉이 잇따라 오른쪽 손을 뻗어 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술동이가 수천 조각으로 나누어졌다. 그 조각들은 지극히 예리했다. 교봉의 날카로운 장력에 밀려서 마치 수백 수천 자루의 강표와 비도처럼 날았다. 유기는 얼굴에 세 조각을 얻어맞아 얼굴이 핏물로 낭자하게 되었다. 옆의 십여 명도 상처를 입었다. 이렇게 되자 욕하는 소리, 놀람에 찬 소리, 경고하는 소리 등이 크게 일어났다. 갑자기 대청 한 모퉁이에서 한 소년이 놀라 부르짖었다.
「아버님! 아버님!」
유기는 자기의 외동아들인 유탄지(游坦之)인 것을 알고 촉망 중에 곁눈질을 해보니 그의 왼쪽뺨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역시 술동이의 파편에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그는 호통 쳤다.
「빨리 피해라!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나서느냐?」
유탄지는 말했다.
「네.」
그리고 대청 뒤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개를 내밀고 교봉의 움직임을 살폈다. 교봉은 왼팔을 내밀어 또 다른 술항아리를 허공으로 쳐올렸다. 그리고 다시 일장을 가하려고 했다 그런데 별안간 등 뒤에 부드러운 장력이 휙 밀려왔다. 이 장력은 부드럽기는 했으나 웅후한 내력을 싣고 있었다.
교봉은 고수가 격출해 낸 것임을 알고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손을 뒤로 돌려 일장을 받았다. 두 사람의 내력이 펑하고 부딪치면서 소용돌이를 쳤다. 각자 정신을 가다듬고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교봉이 바라보니 그 사람은 바로 그 형편없이 생겼으며 자칭 조전손이 주오정왕이라고 하는 무명씨 조전손이 아닌가? 그는 생각했다.
"이 사람의 내력이 대단하구나! 결코 얕볼 수 없는 상대이다."
그는 숨을 들이키며 제 이장을 쳐냈다. 산이라도 넘어뜨리고 바다라도 가를 듯한 장력이 뻗쳐나갔다. 조전손은 두 손을 일제히 뻗어 교봉의 일장을 맞받으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자가 호통을 쳤다.
「죽고 싶어요?」
그러면서 그를 비스듬히 끌어당겨 교봉에 의해 갈겨진 일격을 피하도록 했다.
그러나 교봉의 장력은 여전히 거세게 앞으로 밀려나갔다. 이렇게 되자 조전손의 뒤에 있는 세 사람이 그 장력을 맞게 되었다. 펑펑펑 세 번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세 사람이 일제히 날아서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 바람에 벽에 발라 놓은 회가루가 펑펑펑 하며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조전손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를 잡아당긴 사람은 바로 담파였다.
그는 기뻐서 말했다.
「소연, 그대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구려!」
담파는 말했다.
「내가 그의 왼쪽을 공격할 테니 그대는 오른쪽을 공격하도록 해요.」
조전손이 좋다고 응낙했을 때 갑자기 한 왜소하고 비쩍 마른 늙은이가 교봉에게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담공이었다. 담공의 몸은 매우 왜소한 편이었으나 무공은 확실히 뛰어났다. 왼손으로 장력을 후려치더니 곧이어 오른손을 질풍같이 내밀었다. 그리고 왼손을 일단 움츠렸다가 오른손이 장력을 뻗어낸 후 곧이어 왼손으로 장력을 보태어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연이어 펼치는 이 삼장은 세 겹으로 밀려오는 파도처럼 보였다.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면서 그 힘이 한군데 모여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 위세는 그가 한 손으로 뻗어내는 장력보다 세 배나 큰 위력을 나타냈다.
교봉은 말했다.
「훌륭한 장감삼첩랑(長江三疊浪)이오!」
그러면서 그는 왼손을 뻗어냈다. 두 개의 장력이 서로 부딪치면서 소용돌이쳤다. 그 기세에 사람들은 양편으로 물러섰다. 바로 이때 조전손과 담파 역시 공격을 해왔다.
곧이어 개방의 서장로와 전공장로 집법장로 등이 다투어 싸움에 가입했다. 전공장로는 부르짖었다.
「교형제! 거란과 송나라는 세불양립이오! 우리는 공을 위해 사사로운 정을 잊기로 합시다! 이 형이 실례를 무릅써야겠구려!」
교봉은 웃으며 말했다.
「절교의 술까지 마셨는데 형이고 아우가 어디 있소? 자, 받으시오!」
그리고 왼발을 내밀어 그를 걷어찼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개방에 대해 의리와 정이 남아있었다. 그들의 생명을 해치고 싶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외부 사람들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이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의 발길질은 중도에서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다. 그 순간 쾌도 기육이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둥실 떠올랐다. 그는 스스로 뛰어오른 것이 아니고 교봉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게 된 것이다. 그는 본래 손에 칼을 들고 교봉의 머리를 내려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몸은 위로 떠올랐으나 팔은 여전히 맹렬히 내려치는 자세가 되니 그만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대들보를 내려치게 되었다. 그 칼은 한 자 정도 대들보에 박히게 되었고 그는 그만 허공에 매달린 꼴이
되었다.
쾌도 기육의 이 칼은 그로 하여금 명성을 떨치게 한 무기였다. 오늘 대적을 맞이했는데 어찌 손을 놓을 수 있겠는가? 그는 오른손으로 힘주어 칼자루를 쥐고 놓지 않았다. 이러자 그의 몸은 높이 허공에 매달린 셈이 되었다. 이 같은 광경은 괴이했으나 대청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생사의 기로에 임한 때라 그 누구도 정신이 헛갈리도록 그에게 주의할 수가 없었다. 누가 여유가 있어 웃음을 띠우겠는가? 교봉은 강호에 뛰어든 이후 많은 싸움을 겪었고 또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처럼 많은 사람과 대적하기는 한평생 처음이었다. 이때 그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내력이 소용돌이침에 따라 술기운은 더욱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는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뭇 고수들이 감히 덤비지 못하게 했다. 설신의는 의술은 지극히 고명했으나 무공은 보잘 것 없었다. 그는 의술에 대해서는 뛰어난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서 환자를 보지 않고도 병세를 알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공은 좋아했다. 그의 사부는 무학의 조예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설신의와 그의 일곱 사형제들은 동시에 사부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다. 설신의는 달리 스승을 모시지 않고 남들이 일찌기 생각지 못한 수단을 썼다. 즉 병을 치료해 주고 상대방의 무공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동쪽에서 일초를 배우고 서쪽에서 일식을 배워 그가 아는 무학의 종류는 강호에서 가장 많았다.
나쁜 것은 박식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만큼 박식하다보니 욕심만 많았지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무공도 익숙하게 연마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의술은 신과 같다는 칭송을 받는 만큼 그가 이르는 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삼 푼 정도는 우러러 보았다. 그가 상대방에게 무공을 겨루자고 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어느 누구도 설신의와 진짜로 무공을 겨루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아도취하여 천하의 무공을 십중팔구는 자기가 다 배웠다고 생각했다. 이때 교봉과 군웅들이 싸우는 것을 보니 출수의 재빠름과 뻗치는 힘이 실로 무겁기 짝이 없어 한평생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바라 얼굴이 잿빛처럼 창백해졌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 나가 손을 쓴다는 것은 더욱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있었으며 속으로 존경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살그머니 대청을 빠져나가자니 체면이 손상되는 것은 뻔한 노릇이 아닌가. 그가 흘낏 바라보니 한 노승이 자기 곁에 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현난대사였다.
그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현난대사에게 말했다.
「조금 전 제가 실례된 말을 했소이다. 대사께선 탓하지 마시기 바라오.」
현난은 온 정신을 쏟아 교봉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여 설신의의 말을 듣지 못하고 두 번 째로 말했을 때에야 어리둥절해 물었다.
「무슨 말을 했길래 그토록 실례를 했다는 것이오?」
설신의는 말했다.
「나는 아까 교봉이 혼자서 소림에 들어갔다가 소림을 나오면서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았고 또 한 분의 소림 고승을 인질로 사로잡아 왔다니 그것 참 대단하다고 했죠.」
현난은 말했다.
「그게 어떻게 되었다는 것이오?」
설신의는 겸연쩍게 말했다.
「이 교봉의 무공을 보니 실로 세상에서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 것 같소이다. 이제 서야 나는 그가 소림에 들어갔다 나오고 사람을 해쳤을 뿐 아니라 승려를 인질로 사로잡아서 나갈 충분한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몇 마디는 본래 현난대사에게 사과를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난대사가 들었을 때는 기분이 나쁜지라 코웃음을 쳤다.
「설신의는 소림사의 무공을 시험해 보자는 것이오?」
그는 설신의에게 핀잔을 주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커다란 소맷자락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소맷자락 아래서 휙휙하는 힘이 교봉에게 발출되었다. 이 재간은 소림사 칠십이 절기 가운데 하나로서 수리건곤(袖裏乾坤)이었다. 소매를 펼치면서 주먹의 힘을 소맷자락 밑에서 발출하는 수법이기도 했다. 소림의 고승들은 참선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근본으로 했다. 그리고 무공을 익히는 것을 그 다음으로 쳤다. 화를 낸다는 것은 이미 계율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림사는 수백 년 동안 천하 무학의 종주격이었다. 따라서 권각법은 탁월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이 수리건곤은 주먹을 소맷자락에 숨기고 주먹의 힘을 뻗쳐내기 때문에 보기에 우아했다. 그러니까 옷자락으로 주먹의 힘을 슬쩍 뒤덮고 있기 때문에 적이 주먹의 힘이 어디로 뻗치는지 볼 수 없게 할 수 있었고 상대방에게 손 쓸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옷자락에도 매섭고 날카로운 힘이 실려 있다는 것을 일반 고수들은 몰랐다. 이같이 소맷자락을 펼치며 주먹의 힘을 발출하기 때문에 적은 온 신경을 그의 소맷자락에 숨겨진 권초에만 쏟게 되는데 이때 그는 수세에서 공세로 나오고 소맷자락의 힘으로 상처를 입
히는 것이었다. 이때 교봉은 그가 공격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넓은 소맷자락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마치 태풍에 밀려오는 바닷물처럼 위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크게 호통을 쳤다.
「수리건곤! 역시 대단하군!」
그리고 휙 하며 그의 옷자락을 내리쳤다. 현난의 옷자락은 넓게 퍼졌고 교봉의 일장은 힘을 한 곳에 집결하고 있었다. 두 힘이 서로 부딪치자 수십 마리 의 잿빛 나비들이 날아오르는 듯했다. 군웅들이 깜짝 놀라 바라보니 그 잿빛나비는 모두 현난대사의 옷자락이 조각조각이 나서 날아오른 것이었다. 군웅들이 바라보니 현난은 두 팔의 피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비쩍 마르고 뼈마디가 툭 튀어나왔는데 보기가 흉했다. 두 사람의 내경이 부딪히자 소맷자락이 힘을 감당치 못해 찢겨나간 것이었다. 현난은 소맷자락이 없어졌으니 소맷자락 안의 건곤이 자연히 없어지게 되었다. 그는 크게 놀랐다.
또한 체면을 크게 깍인 것에 화가 나서 두 팔을 곧장 뻗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뭇사람들은 그가 펼치는 수법이 강호에서 널리 전해진 태조장권(太祖長拳)임을 알았다. 원래 송태조 조광윤은 한 쌍의 주먹과 한 자루의 간봉(桿棒)으로 대송나라의 금수강산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제왕들 가운데 송태조처럼 용맹한 자가 없었다. 태조장권과 태조봉(太祖棒)은 강호에 흘러나오게 되었고 그 당시에 무림에서 가장 유행하는 무기가 됐었다. 군웅들은 소림의 고승이 펼치는 수법이 천하에 널리 알려진 권법임을 알자 어리둥절해졌다. 그가 세번째 주먹을 내지르자 군웅들은 찬탄을 토했다.
"소림사가 명성을 떨친 것은 우연이 아니구나! 똑같은 일초의 천리횡행이지만 저 손 안에선 엄청난 위력이 쏟아지는구나!"
본래 수십 명이 교봉을 포위공격 하는 상태였으나 현난이 손을 쓰게 되자 나머지 사람들은 방해가 될까봐 자연스럽게 멀리 피하게 되었고 교봉이 도망칠 수 없도록 에워싼 채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교봉은 다른 사람들이 물러서자 마음에 움직이는 바가 있었다. 그는 휙하고 일권을 펼쳐냈다. 이 일초는 형진참장(衡陳斬將)으로, 역시 태조장권 가운데 한 초식이었다. 이 초식은 날렵하면서도 의젓했다. 굳굳한 가운데 부드러움이 엿보이고 부드러운 가운데 굳굳함이 엿보였다. 무림고수들이 한평생 바라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여지없이 내보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갈채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퍼지는 순간 곧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 갈채소리의 상대는 바로 대적해야 할 오랑캐가 아닌가.
이때 교봉은 다시 제 이초인 하삭입위(河朔立威)를 펼쳐냈다. 그의 일초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초식이었다. 대청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갈채를 보냈다.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아아" "오오!"하는 나직한 탄성을 발했던 것이다. 이때 교봉와 현난은 칠팔초를 겨루게 되었으며 우열은 이미 판가름이 난 셈이었다. 그런데 교봉의 매일초는 조금 늦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현난이 초식을 펼치면 교봉이 잇따라 펼쳐내는데 그가 젊고 힘이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행동이 신속해서 그런지 매일초가 상대방에 먼저 닿는 것이었다. 이 태조장권은 육십사초 밖에 되지 않았으나 매 일초가 서로 상극하고 있었다. 현난이 이 일초를 펼치면 교봉은 그 일초를 제압할 수 있는 일초를 펼쳤으니 현난이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이 도리는 누구나 알지만 뒤에 손을 써서 이긴다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었다. 현적은 현난이 열세에 몰리자 말했다.
「저 거란의 오랑캐 수법은 너무나 비열하군!」
교봉은 늠름하게 말했다.
「내가 펼치는 것은 송나라 태조의 권법인데 어찌 비열하다고 하시오?」
군웅들은 그 말을 듣고 그가 태조장권을 쓰는 의도를 알아차렸다. 만약 그가 다른 권법으로 태조장권을 패퇴시킨다면 그의 공력이 심후하지 않고 송나라를 세운 태조의 무공을 모욕하려고 했다고 탓하였을 것이다. 즉 오랑캐와 중화의 차이를 뭇사람에게 더욱 심어주고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모두들 양편에서 태조장권을 쓰고 있으니 무공을 겨룬다는 그 자체에 아무런 명목도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현적대사는 삽시간에 현난이 생사의 고비 길에 이르게 되자 더 말하지 않고 "찍"하고 일지를 날려 교봉의 선기혈(琁璣穴)을 짚으려 했다. 그 점혈법은 소림사의 점혈절기인 천축불지(天竺佛指)였다. 교봉은 그가 일지를 찔러내자 경미한 소리가 일어나는 것을 듣고 몸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천축불지의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는데 정말 대단하구려! 그런데 천축 오랑캐의 무공으로 송나라 태조의 권법을 공격하여 이긴다면 오랑캐와 내통하고 나라를 팔아먹게 될 뿐 아니라 중화라는 상국(上國)을 모욕하는 꼴이 되지 않겠소?」
현적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소림사의 무공은 달마조사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달마조사는 천축의 오랑캐인이 아닌가? 지금 군웅들은 교봉이라는 오랑캐를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소림의 무공은 이미 중원 땅에 전래된 지가 오래되었고 중원 각 파의 무공은 어느 정도 소림사와 연관을 갖고 있었다. 모두들 소림사와 오랑캐의 관계를 잊고 있다가 교봉이 하는 말을 듣자 모두 마음이 흔들렸다. 뭇 영웅들 가운데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생각했다.
"우리들은 달마조사를 신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거란사람만 뼈에 사무치도록 미워하는 것일까? 모두 오랑캐가 아닌가?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물론 크게 다르다. 천축 사람들은 우리 한민족을 잔혹하게 죽인 적이 없으나 거란 사람들은 포악하고 무섭게 우리 중화 동포를 죽이곤 했다. 그렇다면 결코 오랑캐라고 해서 모두 죽여 마땅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도 선하고 착하다는 구별이 있을 것이다. 거란사람 중에도 착한 사람이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 대청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군웅들은 생각했다.
"교봉이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이 아닌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히 옳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현난과 현적대사는 협공을 펼쳤으나 여전히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고 있었다. 현난대사는 자기의 권법이 매 일초마다 적에게 당하게 되자 권법을 변화시켜 즉시 소림의 나한권법으로 공격했다. 그러자 교봉이 말했다.
「이것 역시 천축 오랑캐의 무술이 아니오? 오랑캐의 무공이 훌륭한지 아니면 우리 송나라의 무공이 훌륭한지 두고 봅시다.」
그러면서 그는 태조장권을 휙휙하고 격출했다. 뭇사람들은 교봉의 말을 듣고 입맛이 썼다. 모두 그를 오랑캐라는 이유로 포위공격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오랑캐의 무공이고 교봉은 송나라 태조가 직접 전해 준 권법을 펼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조전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가 어떤 권법을 펼치든 부친을 죽였고 모친을 죽였으며 사부를 죽인 사람이니 죽여 마땅하오! 달려듭시다!」
그가 외치면서 달려가자 담공과 담파, 개방의 서장로, 진장로, 철면판관, 단씨 부자 등 수십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무공이 높은 고수들이었다. 이들은 이쪽이 공격하고 쉬면 저쪽이 공격하는 형식으로 차륜전(車輪戰)을 펼쳤다. 교봉은 주먹을 휘둘러 초식을 해소시키면서 낭랑히 외쳤다.
「당신들은 나를 거란인이라고 했소. 그렇다면 교삼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의 부모가 아니란 말이 되오. 그 두 분 어르신을 나는 한평생 받들어 모셔 왔으며 또 사랑했고 절대로 해를 입힐 생각이 없었소. 내게 부모를 죽이고 사부를 죽였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지 마시오. 현고대사는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은사요. 소림에서 현고대사를 나의 사부로 인정한다면 난 소림의 제자요. 여러분들이 소림제자를 포위공격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소?」
현적은 코웃음을 쳤다.
「흥! 터무니없는 소리! 그런 말로 변명을 하지 마라!」
교봉은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소림제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부를 죽였다는 죄명을 나에게 씌울 수는 없소. 흔히들 죄를 가하려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소? 당신들이 나를 죽이고 싶으면 공명정대하게 손을 쓰면 될 것이지 왜 말도 되지 않는 죄명을 뒤집어 씌우시오?」
그는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손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주먹으로 단중산을 치고 발로 조전손을 걷어찼고 팔굽으로 백발의 노인을 후려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이 간악한 자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손에 사정을 두고 시종 싸움에 임했다. 그에게 쓰러진 사람이 십칠 팔명이나 되었으나 한 사람도 목숨을 잃은 자가 없었다. 또한 개방의 형제들에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서장로가 손을 써오면 그는 몸을 날려 피하곤 했다. 그러나 영웅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십여 명을 쓰러뜨리면 다시 십여 명으로 바꾸어지는 것이었다. 잠시 싸운 교봉은 놀랐다.
"이대로 싸우다간 나는 언젠가는 지칠 대로 지칠 것이다. 빨리 물러나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한편으로 손을 쓰면서 한편으론 빠져나갈 기회를 살폈다. 조전손은 땅바닥에 쓰러져 꼼짝할 수 없었지만 교봉이 떠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그를 놓치지 말고 붙잡고 계시오! 저 용서할 수 없는 자식이 도망을 치려고 하오!」
교봉은 한참 술기운이 오르고 점점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러다가 조전손이 욕하는 소리를 듣자 밀려오는 노기를 억제할 수 없었다.
「이 자식이 처음으로 당신을 죽여 살인을 해야 하겠소!」
그는 공력을 돋우고 일장의 벽공장력으로 조전손을 격타했다. 현난과 현적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야단났다!」
두 사람은 각기 오른손을 뻗쳐 교봉의 일장을 받으며 조전손의 목숨을 구하려고 했다. 그때 별안간 허공에서 사람 그림자가 번쩍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악"하고 기다란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앞쪽으로는 현난과 현적 두 사람의 장력을 받게 되고 뒤로는 벽공장력에 격타되었던 것이다. 그는 대뜸 늑골이 산산조각나서는 오장육부가 파열되어 입으로 선혈을 내뿜고 땅바닥에 힘없이 움츠려들었다. 그 사람은 쾌도 기육이었다. 원래 그는 허공에 매달려 있던 시간이 짧지 않았다. 흔들흔들 거리고 있던 중 대들보에 박혔던 검이 뽑혀지면서 아래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이 전력을 다한 장력의 중앙으로 떨어졌으니 어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는가? 현난은 말했다.
「아미타불, 교봉 그대는 더 많은 죄를 짓게 되었소.」
교봉은 대노해 말했다.
「이 사람은 반은 내가 죽였고 반은 그대 두 사람이 죽인 것인데 어찌 내가 죽였다고 하시오!」
현난은 부르짖었다.
「아미타불, 업보로다! 업보로다! 만약 그대가 먼저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면 오늘 이 같은 싸움이 어찌 있었겠는가?」
교봉은 노해 부르짖었다.
「모두 내 앞으로 달아놓도록 하시오. 그렇다고 나를 어떻게 하겠소?」
네 사람을 상대로 싸우다 그는 성질이 복받치게 되었다. 갑자기 그는 맹수로 변한 듯 한 사람을 움켜잡았다. 바로 단중산이었다. 그러면서 왼손으로 그 사람의 칼을 뺏고 오른손으로 내려놓으며 왼손으로 내려치자 단중산의 머리는 두 쪽이 나고 말았다.
군웅들은 놀랐으며 분노했다. 교봉은 사람을 죽인 후 더욱 미친 듯 싸웠다. 칼을 춤추듯 휘두르며 오른손으로는 주먹을 내지르곤 했다. 왼손의 칼의 기세는 감당할 수 없었다. 점점이 선혈들이 뿌려지고 대청 안에는 시체들이 늘어갔다. 두 눈이 붉게 충혈돼 개방이고 뭐고 간에 닥치는 대로 죽이는 것이었다. 해장로가 그의 칼 아래 죽음을 당했다. 대청에는 피와 살이 튀고 머리가 굴러다니고, 단말마의 처참한 비명소리로 가득찼다. 교봉에게 죄가 있건 없건 그 자신은 이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아 태반의 사람들은 도망치고 싶었다. 유씨쌍웅은 정세가 불리해지자 한 사람은 단창을 들고 한 사람은 칼을 들었다. 두 사람은 소리를 내지르며 왼손의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좌우 양쪽에서 교봉을 공격했다. 교봉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면서 싸우고 있었다. 공격해오는 일초일식은 눈을 떠 주시하는데 마음은 조금도 흐뜨러지지 않았다. 그는 상처를 전혀 입지 않았다. 유씨형제의 날아오는 기세가 날카로운 것을 보고 휙휙 하고 칼질을 해 옆에 있는 두 사람을 쓰러뜨렸다. 곧이어 기선을 제압하며 유기에게 공격해갔다.
그가 칼을 내려치자 유기는 방패를 들어 막았다. 교봉의 칼이 튀어 올랐다. 칼날이 이미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무디어진 것이다. 유씨형제가 들고 있는 방패는 무슨 무기든 막을 수 있는 방패였고 교봉이 가지고 있는 칼은 단중산에게 빼앗은 강도(鋼刀)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기가 교봉의 아랫배를 찌르려고 하자 싸늘한 섬광이 번쩍하면서 유구의 손에 들린 방패가 교봉의 허리를 그었다.
교봉은 크게 외쳤다.
「좋아!」
말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집어던지고 왼쪽 주먹으로 유기의 방패를 후려쳐 갔다. "창"하는 커다란 음향이 울려퍼졌다. 그 순간 교봉은 오른쪽 주먹을 날려 유구의 방패를 곧장 내질렀다. 유씨쌍웅은 반신이 저려옴을 느꼈다.
교봉의 강맹한 주먹질에 한 번 맞자 팔이 시큰거려 방패를 땅에 떨구고 말았으며 눈에서 불똥이 튀는 걸 느꼈다. "쨍그랑"하고 방패와 칼이 떨어졌다. 유씨쌍웅의 오른손 손아귀가 길게 찢겨져 있었으며 손바닥엔 선혈이 낭자했다.
교봉은 껄껄 웃었다.
「좋아! 방패는 내가 사용하도록 하지!」
그는 한 손에 하나씩 강철로 만든 방패를 들고 사람들에게로 덮쳐들며 마구 휘둘러대었다. 둥근 테가 예리한 방패는 공격을 할 수도 있었고 수비를 할 수도 있었다.
「으아악!」
「퍽!」
「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보라가 자욱이 번져 오르는 가운데 삽시간에 다섯 명의 고수가 방패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대청 안은 즉시 핏물로 질퍽거리게 되었다. 유씨쌍웅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유기가 부르짖었다.
「아우, 사부님께서는 방패가 있으면 사람이 있고 방패를 잃으면 사람도 없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유구는 말했다.
「형님, 이와 같이 수치를 당한 마당에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 자기의 무기를 집어 들더니 한 사람은 칼로 한 사람은 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찔러 죽고 말았다. 군웅들은 일제히 부르짖었다.
「아앗!」
그때 교봉이 풍차처럼 방패를 휘둘러 대었다. 그 누구도 그의 곁으로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한 소년이 대성통곡을 했다.
「아버지! 아버지!」
바로 유구의 아들 유탄지였다. 교봉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유씨쌍웅이 자결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술이 한꺼번에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사방에 즐비하게 죽어 있는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수 십 명이나 되는 시체들은 팔다리가 잘리거나 목이 달아났거나 허리가 동강났으며 두개골이 짓이겨지거나 배가 터져 오장육부가 쏟아져 나온 끔직한 모습으로 죽어 있지 않은가? 교봉은 몸서리쳤다. 그는 스스로가 그토록 잔인무도한 살인을 저질렀다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교봉은 버럭 소리쳤다.
「유씨 형제,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어디 있소? 내가 방패를 돌려드리리다!」
그는 두 개의 방패를 유씨쌍웅의 시체 옆으로 던졌다. "퍽"소리와 함게 방패는 그들의 발 옆에 반 이상이나 파고들었다. 이때 갑자기 한 소녀의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하세요.」
교봉은 급히 왼쪽으로 껑충 뛰어 나갔다. 푸른빛이 번쩍이며 그의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갔다. 만약 아주가 소리를 질러 경고하지 않았다면 교봉은 큰 상처를 입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공격을 가한 사람은 담공이었다.
그는 일격이 빗나가자 이미 멀찌감치 피해 버리고 있었다. 이때 아주는 대청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으나 체내의 공력이 점점 사그러지고 있었다. 아주는 교봉이 스스로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아주를 위해 용담호혈로 뛰어든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고맙고도 초조했다. 담파는 노해 부르짖었다.
「잘한다! 육실한 년! 우리가 네 년을 죽이지 않았더니 이제는 적을 도와주기까지 해?」
그녀는 노갈을 터뜨리며 아주에게 달려들며 손을 들어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교봉이 어느 샌가 알려와 대뜸 담파의 뒷등을 움켜잡더니 한 쪽으로 내던졌다. "우지끈"소리와 함게 매화나무로 만든 의자 하나가 그녀의 몸에 부딪쳐 박살이 나버렸다. 아주는 담파의 일장에서 가까스로 벗어나기는 했으나 크게 놀란 나머지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교봉은 크게 놀랐다.
"이미 아주소저는 진기가 고갈되고 말았구나! 아! 위급한 이때 어떻게 그녀에게 진기를 밀어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이때 설신의가 말했다.
이 소녀는 잠시 후면 내력이 모두 소모되고 말 것이오. 그대는 내력을 그녀에게 주입하시오. 조금만 지나면 신선이 와도 그녀를 구하지 못할 것이오.
교봉은 난처했다. 설신의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말을 따른다면 옆에서 노리고 있는 군웅들이 대뜸 무기를 휘둘러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들 가운데 부친이나 아들이 죽은 사람도 많은데 어찌 교봉을 가만 내버려 두겠는가? 그러나 눈을 멀거니 뜨고 아주가 숨을 거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큰 위험을 각오하고 아주를 취현장까지 데리고 왔다. 그런데 설신의의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고 그녀로 하여금 진기가 소모되어 죽게 한다면 실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내력을 아주의 몸에 주입하게 된다면 자기와 그녀의 목숨을 바꾸는 격이 된다. 아주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에 불과했으며 교봉은 그녀에게 별다른 정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애써 그녀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의협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고 그녀를 구한다는 것은 말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친척도 아니고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도 아니다. 내가 애를써서 이곳까지 데려온 것만 해도 나의 할 일은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 자리를 떠난 후 설신의가 그녀를 구하고 안 구하고는 그녀의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다."
교봉은 두 개의 방패를 급히 뽑아 들고 대뜸 대붕전시(大鵬展翅)라는 초식을 펼쳤다. 두 무더기의 흰 광채가 파도처럼 밖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섬광은 곧장 대청 문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군웅들은 비록 숫자는 많았으나 교봉의 무시무시한 무공과 방패가 무서워 감히 접근할 수가 없었다. 교봉이 대청 문 앞에 이르러 왼발을 막 문지방 밖으로 내딛었을 때였다. 갑자기 늙그수레한 음성이 처량한 어조로 부르짖는 게 아닌가.
「저 계집을 죽이고 형제의 원수를 갚자!」
바로 철면판관 선정이었다. 그의 큰아들 선백산이 대답했다.
「예.」
그는 칼을 들고 아주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교봉은 경악했다. 생각할 여유도 없이 왼손의 방패를 휙 던졌다. 방패는 무겁게 맴을 돌면서 유성처럼 날아갔다. 몇 명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조심하시오!」
선백산은 급히 칼을 들고 막으려 했다. 그러나 교봉의 힘은 이미 인간의 힘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둥근 방패의 가장자리는 너무도 예리하여 "싹"하는 음향과 함게 선백산은 칼과 더불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는 허리가 잘라져 대뜸 즉사하고 말았으며 오장육부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방패는 그러고도 여력이 남아 대청의 한 기둥에 깊숙이 박히고 말았다. 그러자 지붕 위의 기왓장이 와르르 떨어졌다. 선정과 세 아들은 미친 듯 부르짖었다. 그러나 교봉의 태산 같은 위세에 눌려 감히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아주를 향해 덮쳐갔다. 교봉은 욕설을 퍼부었다.
「몰염치한 놈들!」
휙휙휙 하니 일장이 네장(掌)을 후쳐려 그들을 멀리 날려 보냈다. 그리고 왼팔로 아주를 안고 방패로 그녀를 보호했다. 아주는 나직이 말했다.
「교나리, 저는... 틀렸어요. 당신은... 당신은... 빨리 혼자 도망치세요.」
교봉은 군웅들이 중상을 입은 아주를 죽이려는 것을 보자 크게 분기가 치솟아 큰 소리로 외쳤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이상 그들은 결코 그대를 살려 두지 않을 것이오. 우리 죽어도 함께 죽읍시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쳐 한 자루의 기다란 장검을 빼앗아 들고 찌르고 베고 내리치는 등 삽시간에 대여섯 명을 짚단처럼 베어 넘기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교봉이 생사를 도외시하고, 지닌 무예를 다 발휘하자 그 위세는 실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지경이었다. 장검은 무지개 같은 광채를 사방으로 폭사해냈고 그것이 이르는 곳마다 대뜸 피분수가 뻗쳐 올라갔다. 잘라진 팔다리가 허공에 난무했으며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갑자기 교봉은 등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교봉은 왼발을 뒤로 내질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숨 끊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한 사내가 가슴이 짓이겨진 채 뒤로 날아가 어떤 사람의 몸에 부딪혔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즉시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이때 교봉은 다시 오른쪽 어깨에 한 번 창(槍)을 맞았고 오른쪽 가슴팍을 일검에 찔리게 되었다. 교봉은 일성대갈을 터뜨렸다.
그 소리는 마치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우는 듯했고 사자가 포효를 터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 교봉은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나를 죽일 수 없다!」
이때 십여 명의 군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교봉도 이미 태반이나 힘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교봉은 몇 명이 달려드는 것을 보자 눈에서 형형한 빛을 폭사하며 오
른손을 질풍처럼 내뻗어 선두에서 달려드는 한 사람의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그 대한의 가슴뼈가 부러져 나갔다. 교봉은 그 대한을 머리 높이 치켜들었다. 달려들던 사람들은 그의 흉악한 기세에 겁을 먹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교봉은 그 자세 그대로 문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군호들은 슬금슬금 물러섰다. 교봉은 커다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는 처음 소림(少林)의 무예를 전수받았으며 소림 칠십이절기를 약관이 되기 전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내가 어찌 사부님을 해쳤겠는가!」
그는 거기까지 말하고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 사내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늠름하게 말했다.
「당신들은 손을 쓰시오.」
이때 철면판관 선정은 교봉에게 두 아들을 잃게 되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교봉에게로 덮쳐왔다. 그는 칼을 들고 교봉의 가슴을 찍어 내렸다. 순간 여기저기서 교봉을 지켜보던 군호들이 벌떼처럼 다시 교봉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교봉은 갑자기 처량한 심사에 사로잡혔다.
"나는 거란 사람일까 아니면 한인일까? 나의 부모와 사부를 살해한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한평생 어질고 의로운 일을 행했건만 오늘 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되었구나! 나는 아주를 구하기 위해 고집을 피우다가 이곳에서 뼈를 묻게 되었다. 아... “
바로 이때 선정의 칼이 막 교봉의 가슴을 찔러 들어오고 있었다. 교봉은 비분하여 고개를 하늘로 향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 음성은 미친 맹수가 울부짓듯 처절하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이때 그는 선정의 칼이 찔러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많은 살인을 하고 구차하게 살아서 무엇 하랴?」
그는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첫댓글 말이 필요 없구나 ....
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중국인들의 만용인가요 ?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