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엄천사 사적기
엉겅퀴 | 2022.06.21 08:19 1184
1. 아! 엄천
지리산 북쪽의 가장 큰 하천인 엄천(嚴川)은 그 이름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이다. 원래 엄천의 경우, 큰 골짝의 물만 해도 심원‧달궁‧뱀사골의 물이 운봉‧인월에서 내려오는 람천(濫川)에 더해져 만수천이 되고, 마천에서 삼정‧한신‧백무동 물과 합쳐 임천(瀶川)이 되고, 다시 의탄에서 칠선‧국골‧광주리골의 물이 더해지고 신령한 용유담을 거치면서 엄천으로 거듭난다. 엄천은 골골물물을 받아들이면서 화산 열두 굽이를 지나고 생초의 강정에서 위천과 합류하며 그 이름을 경호강에 넘겨준다.
흐르는 물을 칼로 자르듯 어디서 어디까지가 엄천이라고 경계 짓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옛기록상으로는 용유담을 경계로 임천과 엄천으로 구분하였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하다(*화산12곡 용유담下 참조). 그래서 근래 엄천강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면서 임천까지도 엄천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적어도 문헌상으로는 설득력이 없다는 얘기다. 같은 물줄기라도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부른 것은 흔한 일이다. 남강만 해도 상류에서부터 남계 경호강 신안강 광탄 청천강 등으로 불리었다.
사실 엄천이라는 명칭은 역사적 무게가 상당한데도 하천명은 임천에게 그 이름을 내줘버렸고, 지명 또한 엄천리→엄천면이 휴지면과 통합하여 휴천면이 되면서 붙일 데가 없어졌다. 엄천강에서 유래한 동강(桐江)‧동호(桐湖)라는 지명이 아직 남아 있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조차 그 이름의 유래는 잘 모르고 산다.
△ 18C
2. 지명의 유래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엄천은 지리산의 대찰 엄천사에서 유래한 지명이며, 엄천사의 뜻은 “엄하게 계혜를 지키고 한없이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嚴持戒慧福被河沙者如川流之不息也)”라고 알고 있다. 『엄천사 흥폐 사적』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마 맞을 것이다. 반야봉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문수리 내원골 삼장천 등 불교식 지명은 너무나 많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 상식에 딴지를 걸고 싶다. 지리산은 흔히 어머니산이라고 일컫는데, 그건 금강산‧설악산 등과 달리 육산에다 물이 풍부해 사람이 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리산의 성모(聖母) 노고(老姑) 마고할미 신앙도 모두 어머니산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 어머니 품속을 관통하는 가장 큰 냇물은 당연히 어머니내로 불렀을 것이며 발음하기 쉽게 엄니내>엄내로 변천되었을 것이다. 또 ‘엄’에는 엄지 엄니 엄살 엄청 등에서 보듯 크다는 뜻도 있다.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엄내는 엄천으로 바뀌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엄천사 때문에 엄천이 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엄내에서 엄천사 이름을 따온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헛소리 말라고요? 최남선 선생도 엄천사 얘기는 없었지만 엄내에서 엄천이 되었을 거라는 견해를 언급한 바 있다. 사찰명은 불교경전이나 관련설화에서 따오는 것이 일반원칙이지만 지명이나 민간설화에서 유래한 이름도 의외로 많다. 지리산에만 해도 쌍계사 황령암 군자사 두류암 남대암 왕산사 등구사 달궁사 마적사 적기암 등 꽤 된다.
그런데 엄천사 사적기의 내용대로 “엄하게 계율을 지키고 ~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고‧‧‧”처럼 이렇게 복잡하게 절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던가? 어쩐지 嚴川에 맞추어 나중에 그렇게 갖다 붙인 것처럼 뭔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가?
문득 智異山을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智利山>智異山이 되었다는 식의 억지로 끼워 맞추기식 해석이 생각난다. 물론 엄천사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렇다 해도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원래 좀 삐딱하다 보이~.
* 문수보살을 智利보살이라 칭하는 사례는 없을뿐더러 智利山이란 표기도 기록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智異山 이전에 地理山 地利山이라 칭한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엄천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절터마을(동호) / 부춘대 위쪽에서 바라본 절터
3. 풍경
고대 동아시아에서 꿈꾼 유토피아의 지형적 특성 중 하나는 좁은 입구를 통과하면 안쪽은 갑자기 넓어지는 호리병 모양이었다. 호중천지(壺中天地)라 한다. 행치재를 넘어서면 산으로 둘러싸인 단절된 세상에 의외로 넓게 펼쳐진 절앞들과 자혜들, 그 사이로 엄천강은 굽이돌아 흐르고, 동천(洞天)에 그럴싸하다. 게다가 후세에는 엄광의 고사를 끌어와 동강‧동호‧부춘산‧칠리탄‧엄뢰 등의 명칭이 덧붙여졌다(*화산12곡 칠리탄/부춘대를 찾아서 참조).
거기에 지리산의 대찰 엄천사가 자리했으니 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을 남겼다. 그중에 내 가슴을 울리는 매계 조위(梅溪 曺偉 1454-1503)의 시 2수를 소개한다(《천령지》). 그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점필재와 같이 지리산에 올랐으며 1484~1489년 함양군수를 지냈다. 특히 시가 빼어났다 한다.
等閑蕭寺探春遊(등한소사탐춘유) 쓸쓸한 절에 한가로이 봄을 찾아왔더니
處處靑林啼婦鳩(처처청림제부구) 곳곳에는 푸른 숲, 뻐꾸기 우네
薄暮東風微雨過(박모동품미우과) 해질녘 동풍에 가랑비 뿌리더니
落花無數點淸溝(낙화무수점청구) 꽃잎은 무수히 흩날려 맑은 도랑을 점점이 수놓네
山光水氣晩濛濛(산광수기만몽몽) 저물녘 산빛과 물기운은 흐릿하고
杜宇愁啼明月中(두우수제명월중) 두견새 슬피 우는 밝은 달밤에
煮茗圍碁仍不寐(자명위기잉불매) 차 마시고 바둑 두다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木魚呼竹小樓東(목어호죽소루동) 목어소리 대나무에 부딪치니 누각 동쪽이 밝아오네
또 추파 홍유(1718-1774)스님은 『엄천사 종각 상량문』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천 봉우리가 조릿대처럼 빽빽이 모이고 한줄기 물이 감돌아 흐르는데, 산봉우리가 웅장하게 높으니 중국 안탕산의 풍경도 이만은 못하고, 도량이 맑고 깨끗하니 어찌 영축산만 신령함과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겠는가?”
△ 행치재에서 바라본 엄천
4. 흥망(興亡)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 우주에 변치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엄천사 흥폐 사적기』에 따르면 창건(883) 낙성식에 임금(신라 헌강왕)까지 참석했던 엄천사도 무너져 다시 짓고(1126) 또 폐하여 다시 지었건만(1690) 이제는 완전히 허물어져 흔적조차 희미하다. 흥망이 무상하다고나 할까.
다만 절터라는 동네이름과 절앞들이라는 들이름, 절 때문에 명명되었을 당두재‧당두골(*당두는 방장스님을 가리키는 말)과 부도밭이 있었던 부도골, 강 건너편에 절의 재를 쳐서 버렸다는 재깐(잿간)과 절의 장독대가 있었다는 개암터라는 이름만 남아 대찰의 옛 영광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또 절의 진산(鎭山)인 보덕산(寶德山 *보덕은 관세암보살의 어머니)은 기록과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마을 민가의 담장 기초나 축대 아래에는 절의 석물들이 몇 개 눈에 띈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부도골엔 부도가 즐비하였고 마을 안에도 기단과 주춧돌 탑석 등의 석조물이 많았는데 어느 때부턴가 선각자(?)들이 다 반출했다고 한다. 원래 엄천사의 사하촌이었던 마을이 절이 폐허가 되면서 그 영역을 잠식한 것으로 보인다. 평지가람이라 그 위에 바로 여염집이 들어서다 보니 이후에도 발굴조사는 엄두도 못 낸 것 같고 지표조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절은 언제 없어졌을까? 1745~1760년의 비변사인방안지도에는 군자사와 함께 남아 있었고, 1790년 이동항의 『방장유록』에 “엄천사에 묵었는데, 엄천사는 큰절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무너졌다[殘破].”고 하였으며, 1834년의 청구도와 1861년의 대동여지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지도가 항상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1800년대 전반기에 없어지지 않았나 싶다.
△비변사인 방안지도(부분)/대동여지도(부분)
지나다니면서 늘 폐사지의 내력이 궁금하였다.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로는 인산가(仁山家)의 김윤수 교수가 국역한 『엄천사 흥폐 사적기』가 있다. 훌륭한 번역이지만 원문이 없고 전체 분량의 20% 정도의 요약 발췌로 극히 간략한 정보전달에 그쳐 만족할 수 없었다.
그 아쉬움을 일없는 내가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으나 원문을 구할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원문이 휴천면지에 실려 있고 그 책은 함양문화원에는 없지만 절터(동호마을)의 전임 휴천면장이 가지고 있다고 가객님이 알려주었다. 다행히 그 어르신(88세)과는 화산12곡을 비롯한 엄천강변을 훑고다닐 때 맺은 인연으로 책을 쉽게 빌릴 수 있었다. 두 분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고맙게도 거기에는 이일영스님의 초벌 국역까지 실려 있었다. 원문은 선문답처럼 축약과 비약이 심하고 불교관련 일화가 종횡무진으로 인용되어 있어 스님의 나침반이 없었다면 나는 감히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 처음 내놓는다는 심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풀어헤쳐 다시 엮었다.
이제 마음의 짐을 좀 덜었다. 이제는 다른 느낌으로 절터앞을 지나다닐 수 있으리라.
海東朝鮮江右天嶺郡智異山嚴川寺興廢事蹟(해동조선 강우1) 천령군 지리산엄천사 흥폐사적)
하늘이 열리고 땅이 갈라진 이래 왕도(王都)와 불찰(佛刹)이 들과 산에 나란히 벌여 섰고, 왕은 오상(五常 *仁義禮智信 또는 五倫)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부처는 삼혜(三慧)2)로써 뭇 중생을 제도하니 포악한 자는 어질게 되고 삿된 자는 바르게 되어 치우침이 없고 모자라지도 않는 정도(正道)에 함께 돌아가게 된다. 비록 만 가지 방책으로도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부득이한 일이다.
부처의 영이(靈異)함은 멀리까지 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으니 본래 우리 동방에는 이름난 가람과 빼어난 사찰이 어우러져 수려한 땅에 우뚝하다. 놀이 피어나는 아침과 달이 뜨는 저녁에 향을 사르고 복을 빌어 마침내 보력(寶曆 *임금의 나이 寶齡)이 닳지 않고 궁궐에서 길이 평안하게 하며 금지옥엽(*임금의 자손)이 나라 안에 무성하게 한다면 항상 밖에서 나랏일을 돕는 데에 우리 불도(佛道)만한 것이 없다.
천령군 지리산 엄천사는 바로 신라의 결언(決言)선사가 창건한 것이다.3) 우리 동방의 여러 전기(傳記)와 사필(史筆)을 고찰해보니 대당(大唐) 건부(乾符) 10년4) 계묘년(883)5) 봄, 헌강대왕이 화암사(華岩寺)에 사신을 보내 결언스님을 맞이하였다. 스님이 이르자 왕이 예로써 대우하고 말하였다.
“스님을 궁정으로 청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다스림에는 평소 불도로써 간여하였으니 법흥왕의 도리사, 진흥왕의 황룡사, 무열왕의 남은사, 애장왕의 해인사, 경문왕의 숭복사는 모두 선왕을 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때때로 그 절에 불공을 드리고 고유한 천성에 따라 조상의 혼령을 받들며 국운이 무궁하기를 기원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계승하여 한번도 없었던 적이 없는 대업입니다. 만일 지금 차례로 전해지는 그 일을 내 몸에 이르러 빠뜨리고 잇지 못한다면 선왕들이 세세토록 물려준 평소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번거롭게 스님을 여기에 오시게 한 것은 스님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또 듣건대 해동의 명산은 백여 개나 되지만 높고 깊어 장대하기로는 지리산이 으뜸이라 하니, 스님이 이 산에 가서 터를 잡고 불궁(佛宮 *寺)을 개창(開創)하여 길이 우리 선고왕(先考王)의 명복을 비는 인사(仁祠 *寺)로 삼는다면 자비와 보시가 크다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사가 명을 받들고 “예. 예.”하고 물러나 곧장 이 산에 와서 산을 돌아보며 맥을 살피고 물을 따라 그 근원을 찾다가 마침내 이 땅을 얻게 되었다. 연후 글을 써서 왕에게 아뢰기를 “강을 건너 산으로 들어가 나침반을 띄워 땅을 얻었으니 천령군의 남쪽이요 지리산의 동쪽으로 벼랑은 병풍처럼 백겹으로 둘러싸고 물은 천굽이로 돌아흘러 마치 해상의 봉래(蓬萊)요 호중천지(壺中天地) 같습니다. 다행히 농한기를 맞았으니 공역을 일으키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다 읽고 나서 바로 강우 고을에 영을 내려 백성을 동원하여 그 역사(役事)에 부치게 하고 조세를 면제하여 그 비용을 마련하게 하였다. 또 사신을 파견하여 대사와 함께 협력하여 그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다. 만 사람의 일손과 온갖 장인(匠人)이 대숲을 옮기고 땅을 재고 섬돌을 쌓으니 돌 위에 정전(正殿)과 긴 회랑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았다. 이는 귀신의 솜씨를 빼앗은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역사(役事)가 끝나고 사신이 돌아와 일이 이루어졌음을 고하자 임금이 기뻐하고 칭찬하며 명패를 내려주었으니 ‘엄천사’라 하였다. 엄천의 뜻은 ‘엄하게 계혜(戒慧)6)를 지키고 복을 강의 모래알7)처럼 많이 받는 것이 마치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낙성식에 성대한 법회를 베풀어 돈과 곡식을 넉넉히 주고 공양물을 정성스럽게 갖추었으며, 임금이 이 절에 친히 행차하여 선고왕을 위하여 봉안하고 향을 올려 공경을 바쳤다. 마침내 결언선사를 보정사(輔政師 *왕의 정치를 도와주는 국사)로 삼고 사라국사(娑羅國師)라 칭하고 이 절의 주지로 삼았다. 도성에 돌아와서도 말을 달려 안부를 묻는 것이 거의 한 달도 거른 적이 없었다.
이것이 이 절을 처음 창건한 일의 시작과 끝이다.
얼마 후 셋째 왕비 김씨가 벼 일천 섬을 희사하여 죽은 동생을 위해 길이 명부(冥府)에 복을 빌었다. 최치원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지었는데, 대략 이러하다.
“제자8)의 자매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깊이 원통함을 품었으며, 믿고 의지할 데가 없어 마음이 무너지고 우러러 의지할 곳이 없어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습니다. 하물며 형제를 잃은 슬픔을 머금었으니 형제가 그리워 그 슬픔이 갑절이나 됩니다. ‧‧‧”9)
아! 당시에 명찰(名刹)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건만 벼슬아치와 문인들이 한결같이 이 절에 마음을 둔 것은 이 절이 해동의 기이한 경치를 독차지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일어났으며 풍상이 거듭 바뀌었고 산천도 많이 변하였다. 이 절 또한 퇴락하였으나 미처 보수할 겨를이 없어 세(勢)를 떨치지 못한 것이 오래된 것 같다.
남송 건염(建炎) 2년 무신년(1128) 고려 인종대왕 즉위 6년, 이때 덕이 높은 승려 성선(性宣)이 강을 건너 서쪽에서 노닐다가 이 절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이미 쇠락한 것을 보고 감개(感慨)가 일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절은 바로 신라 헌강왕의 인사(仁祠)요 사라국사의 도량이다. 비록 나라가 멸망하고 사람은 없어졌지만 道가 어찌 없어지겠는가? 마땅히 폐허의 흔적을 따라 고치는 것은 고인이 남모르게 베푸는 선행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널리 시주(施主)를 모아 사찰을 중건하니 무너지고 부서진 것들이 성대하게 일신되어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였다.
이것이 이 절을 중흥한 대략이다.
더욱이 인종대왕이 보위에 머물 때 설법(說法)에 매우 주의하였는데, 이 산 수정사(水精舍)의 진억율사에게 특별히 명하여 3일 동안 널리 법회를 베풀고 이 절의 성선대사를 맞이하여 강법사(講法師)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10) 훌륭하도다, 스님이여!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불궁(佛宮)을 성대하게 장식하였고 또한 힘껏 덕을 쌓고 수행을 지켜 임금을 감동시켰다.
이로부터 나아가 이름난 선승(禪僧)과 시승(詩僧)이 대를 바꾸어 간간이 나와 이어지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워져 갖추지 않는 일이 없었으니 선문(禪門)의 성대한 기풍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다만 해가 중천에 오면 기울고, 달도 차면 이지러진다. 임진왜란과 병자‧정묘호란11)으로 온 나라가 소란하고 만백성이 도망가 숨으니 세상 밖의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한들 어찌 보전할 수 있겠는가? 승려는 흩어지고 도적들이 보찰(寶刹 *寺)을 불태워 만 채의 건물과 천 개의 문이 잿더미가 되었다. 그 이후로 옥 같은 밭과 아름다운 마당은 채마밭으로 잠식되고 절의 샘과 시내는 고기잡이 통발 놓는 곳으로 변하였다. 지나가는 나그네와 길 가는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신라‧고려 때 엄천사의 옛터라고 말한 지 오래되었다.
비록 그러하나 보배로운 운세가 아직 다하지 않아 좋은 인연을 기다렸으니, 마침내 강희 25년 정묘년(1687) 우리 성상(聖上 *숙종)께서 보위에 오른 지 14년, 안양사(安養寺 *법화사)의 승려 인욱(印旭)‧혜문(惠文) 등이 종을 울려서 대중을 모으고 말하였다. “절이 험준한 곳에 있어 오르내리는 데에 수고로우니 마땅히 옛터를 버리고 새터로 나아가 반드시 험지를 평탄한 곳으로 바꾸는 것을 의논해야 하리라. 엄천사의 옛터가 평평하고 넓으니 이를 옮겨 저기에 세울 것을 어찌 꾀하지 않겠는가?”
자리에 가득한 아사리(阿闍梨 *승려 중의 스승)는 모두 한목소리로 동의하였고, 곧바로 소지(所志 *청원서‧진정서)를 작성하여 본군과 감영에 우러러 하소연하였다. 관부에서 답신한 제사(題辭 *所志에 대한 관부의 판결문‧처분문)에 이르기를 “여지승람을 상세히 고찰해보니 엄천고사(嚴川古寺)가 완연히 실려 있고 본래 불토(佛土)로서 선실(禪室 *寺)을 짓는 데에 무슨 걸림돌이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의 무리 수백이 각기 한 가지 일을 맡아 재물을 모으고 역사(役事)를 일으킬 즈음에 그 고장의 사림(士林)들이 이구동성으로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말하기를 “엄천사터가 비록 옛날에 부처에게 희사한 땅이라 해도 지금은 유궁(儒宮 *향교 또는 서원)에서 조세를 거두는 토지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중들이 함부로 그렇게 절을 세우겠다는 것인가?” 하였다.
이와 같이 커다란 차이로 승낙하지 않으니 팔로써 소매를 걷을 수 없고 힘으로 수레를 막으니 일이 되어가는 형세가 낭패에 빠져 진퇴유곡이라,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다투는12) 사이에 이미 세월이 흘러갔다.
경오년(1690) 봄 하늘이 내린 보배에 감응하고 사람들 또한 승낙하였다. 벽암(碧巖)의 손자13)이자 침허(枕虛)의 아들인 죽계당 승현(竹溪堂 僧絢)대사를 청하고 맞이하여 길잡이로 삼아 바야흐로 큰 역사(役事)를 일으켰다. 마침내 여러 사람을 모아 옛 주춧돌을 따라 절집 18동을 세우고 1백간을 개창하였다. 이어 임신년(1692) 봄에 이르러 한 가닥 임금의 말씀이 궁궐에서 나와 차례로 해당관서와 감영에 내려져 금전(金田 *사원)의 토지 4결(結)에 대하여 면세해주었다. 그밖에 온갖 찬란한 것들이 갖추어져 비록 일시에 이루는 방책은 없었으나 장구하게 흥성할 조짐은 있는 듯하였다.
이것이 이 절을 세 번째 창건한 연유이다.
아름답다, 절이여! 결언이 지어 무너진 것을 성선이 뒤따라 계승하였고, 성선이 이었으나 폐해진 것을 승현이 뒤따라 개작하였고, 승현이 개작하였으나 허물어진 것을 또 뒷사람이 행하여 짓고 이어가고 이어가고, 또 이어가고 짓고 다시 짓고 끝없이 이어 짓게 되어 가히 천지와 더불어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다면 우리나라의 복이 될 것이요, 하늘의 신령한 효험은 형언할 수 없지만 저절로 그 가운데 있게 되리라.
진실로 우리 석가모니의 옥호(玉毫 *부처의 미간 사이의 흰털)에서 나오는 서광은 온세상을 두루 비추고 사람의 마음과 뱃속까지 들어오는 것이 깊고도 깊으며 또한 밝다.
어느날 승민(勝敏)상인14)이 찾아와 나에게 서문을 청하며 말하기를 “절집이 다시 열리고 모든 일이 대강 완료되었으나 유감스러운 바는 승려와 속인이 끊이지 않는데 그 고적을 물으면 혀를 놀리기가 어렵습니다. 원컨대 스님께서 비할바없는 재주를 아끼지 말고 시험삼아 특이한 사적을 기술해주시면 구경 오는 자들에게 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본래 나의 짧은 두레박줄과 약한 수레 끌채로는 감히 깊은 우물물을 길을 수 없고 무거운 짐을 실을 수 없으나 거듭 청하는데 억지로 사양함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마른 붓을 잡고 우선 세월을 헤아려보니 때는 청나라 강희 기원 32년 계유년(1693) 2월 5일로 무가암(無可菴)15) 후인 탄부(坦夫)16)가 쓰고, 48년 기축년(1709) 6월 2일 개선(改善)이 중흥시(重興詩)와 서문을 함께 썼다. (*아래는 개선의 서문과 시다.)
천지의 원기는 하늘이 낸 길을 따라 해와 달 별을 거침없이 실어 나르고 조물주의 공으로 땅은 만물을 싣고 있다. 산천이 빼어나 마른 땅 젖은 땅 높은 곳 낮은 곳 그 끝에까지 불찰(佛刹)이 자리하고 신선이 사는 땅이 되었다. 단단하고 정교한 해와 달의 은택은 영구히 티끌 세계에 젖어들고 물결과 연하(烟霞)에 마음은 늘 깨달음의 세계에 근접한다.
저 엄천사는 신라 결언이 초창하고 고려 성선이 중건하였으며 해동 산수의 웅장함을 압도하고 한수(漢水) 이남 고을의 승경을 진압하고 있다. 넓은 장기 바둑판처럼 툭 틔었고 늘어선 산봉우리는 우뚝 솟아 섬 속의 봉래(蓬萊)‧영주(瀛州)라 하겠고 호리병 속의 천지 같다. 벼랑은 병풍처럼 빙 둘러섰고, 학의 날개는 구름을 뚫고, 물은 띠를 두른 듯 감돌아 흐르고, 돌은 규룡(虯龍 *뿔 돋친 용)의 허리처럼 누웠으니 중향성(衆香城 *향적여래의 불국토)의 아름다운 자취를 자랑하는 듯하고 보계(寶界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의 꽃다운 모습을 얻은 듯하다.
까마귀 무리 다투어 날자 온갖 새들 화를 당하고, 황제의 군대가 밤에 물을 건너고 자개성(紫蓋星)17)은 새벽에 기울었다. 재앙이 도성에 미치고 재난이 온 국토에 뻗치니 불은 신전에 타오르고 높은 대(臺)와 안탑(雁塔)18)은 모두 평평해지고, 물이 도성 거리에 차오르고 언덕과 연못도 다 물에 잠겼다. 청조(靑鳥)19)의 반가운 소식이 끊어진 지는 오래되었고 길이 백마20)의 슬픈 울음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성상에 이르러 만고의 정신을 합쳐 천추의 보물을 다잡았으니 안으로 정치에 부지런한 어진 인재들이 요점을 잡고 밖으로 불문(佛門)을 넓히려는 깊은 뜻이 진토(塵土)에 묻힌 것을 일으켰다. 이에 상서로운 일로 추천되어 비로소 임금의 아름다운 말이 내려왔다.
반야대(般若臺)를 중흥하고 다시 보리로(菩提路 *깨달음에 이르는 길)를 열었다. 장자(長者)가 땅을 샀으나 백옥은 아직 남았고 태자가 동산을 시주했으나 황금은 여전히 남았다.21) 지전(芝田 *신선이 가꾸는 지초밭)과 귤부(橘阜)22)는 자하동(紫霞洞 *신선의 거처) 사이에 들쭉날쭉하고, 계관(桂館 *계수나무 우거진 객관)과 송단(松壇 *솔숲 언덕)은 홍진(紅塵 *티끌세상)의 밖에서 적막하다.
회랑은 아득하고 깊어 스스로 회오리바람을 토해내고 늘어선 정자는 높이 솟아 구름과 비를 머금었다. 보개(寶蓋 *日傘)는 달 속에 매달린 듯하고 허공에 뜬 당간의 깃발은 은하수에 닿을 듯하다. 붉은 난간에는 봉황이 깃들고 푸른 기와에는 원앙이 발돋움한다. 종소리는 습염(習染 *나쁜 관습에 깊이 물듦)을 깨끗이 하고 북소리는 진애(塵埃 *세상의 속된 먼지)를 씻어낸다. 달은 금모래를 비추고 놀은 옥계단에 짙다. 옥 같은 나무에 부는 봄바람의 향기는 호랑이 등에 탄 그림 속 선승의 옷자락을 나부낄 듯하고 은빛 연못에 비친 가을 달그림자는 불단 위 부처가 잠긴 것 같다. 바위틈새 꽃은 이슬에 젖어 화려한 비단을 수놓은 듯하고 언덕 위의 대나무는 바람과 어우러져 신묘한 생황의 곡조를 연주하는 것 같다. 숲의 덩굴은 해를 가리어 여름날 한기를 일으키고 폭포수의 물방울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맑게 갠 대낮에 비를 뿌린다.
그리하여 지혜의 칼을 휘둘러 재앙을 베고 지혜의 수레를 굴려 삿됨을 꺾는 것이 온갖 수행의 신령한 비밀이요 성불[一乘果]하여 피안에 도달하는 길이다.
푸른 나귀를 탄 시인은 즐기느라 돌아갈 줄을 모르고 흰 사슴을 탄 진인(眞人)은 배회하며 떠나지 않으니 어찌 진실로 현포(玄圃)의 은(銀) 누각만 장려하며 적성(赤城)의 석실(石室)만 그러하겠는가? (*현포·적성·석실은 모두 선인의 거처)
법사(法師) 승현은 계율에 굳건하고 마음의 기틀이 연꽃처럼 맑아 부처의 광명이 항상 밝기를 바라고 왕의 명령이 장구히 떨치기를 근심하여 이미 끊어진 것을 은삭(銀索)으로 잇고 장차 무너지려는 것을 옥 같은 절로 우뚝 일으켰다. 위엄과 덕망에 더하여 만인이 그 호탕한23) 풍채를 경외하고, 인후함과 자애로움을 입은 온 나라가 그 풍모를 우러러보았다.
군수 제후‧‧‧<몇 글자 빠진 듯>‧‧‧ 태현(太玄 *우주의 근원)은 정기(精氣)를 내려주고 중황(中黃 ←불확실함)은 광채를 준다. 중거(陳仲擧 *후한의 賢者)의 맑은 명망과 사원(士元 *촉나라 유비의 책사 방통)의 높은 재주‧‧‧<몇 글자 탈락>‧‧‧ 비는 매화와 버들을 살찌우고 산문(山門 *寺)을 감싸고 혜택을 입히며, 해는 소나무와 난초를 비추고‧‧‧<글자 빠짐>‧‧‧
깊고 넓은 불법의 바다에서 나의 깨달음은 미약하고 선(禪)의 숲에서 나의 가래나무는 아직 어리고, 문장의 동산에서 나는 거친 잡초일 뿐이니 붓을 놀리는 데 어려움이 많아 깊은 근원에 이르지 못하였다. 다만 얕고 가벼운 것을 좇아 서술하여 서문으로 삼고 시를 읊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다.
玉壺天地剏禪關(옥호천지창선관) 호중천지에 선의 관문을 개창하고
峕倚丹崖俯碧灣(시의단애부벽만) 때때로 붉은 벼랑에 기대 푸른 물굽이 내려다보네.
法鼓虛幢眞世外(법고허당진세외) 법고와 공중의 깃발은 참으로 세상 밖이요
陰風彩霧豈人間(음풍채무기인간) 서늘한 바람과 고운 안개는 어찌 인간세상의 것이겠는가?
淸香襲席龍皈洞(청향습석용반동) 맑은 향기 자리에 스며들어 용은 동부(洞府)로 돌아가고
晩影擁軒鳳下山(만영옹헌봉하산) 저녁 그림자 들창에 비치니 봉황이 산에서 내려온다.
別有開活畫(별유개활화 *이 2句는 글자가 빠진 듯) 딴 세상의 생생한 그림인 듯
幾多遊怡殸(다기유이성) 몇 번이나 노닐며 즐거이 노래했던가?
또 짓다.
畫棟嵯峨紫洞幽(화동차아자동유) 채색 기둥은 우뚝하고 자하동은 깊숙한데
決言陳跡更退修(결언진적갱퇴수) 결언의 옛 자취에 물러나 수행하네
金沙月影推難散(금사월영추난산) 금모래밭의 달그림자는 흩뜨리기 어렵고
玉砌霞光掃不收(옥체하광소불수) 옥 섬돌의 노을빛은 쓸어 담을 수 없네.
百鳥含花啼落日(백조함화제낙일) 온갖 새는 꽃을 머금고 해질녘에 울고
孤猿洗鉢涉寒流(고원세발섭한류) 외로운 원숭이는 바리때를 씻으며 차가운 물을 건넌다.
天開造化無央趣(천개조화무앙취) 하늘은 조화의 끝없는 풍취를 늘어놓는데
摠入山僧一筆頭(총입산승일필두) 이 모두는 산승의 한 붓끝으로 들어오네.
또 읊다.
巨靈神液此雄盤(거령신액차웅반) 거령신(*화산과 태산을 쪼개어 황하를 흐르게 했다는 神)의 영천(靈泉)이 여기 웅장하게 서린 듯
更仁祠闡鎭國安(갱인사천진국안) 다시 절을 열어 나라를 안정시켰네.
瓊塔起尋明月路(경탑기심월명로) 옥 같은 탑은 밝은 달 아래 드러나고
宝簷飛襯白雲壇(보첨비친백운단) 보배로운 처마는 흰구름 낀 단 위에 날아갈 듯 서 있네.
掃塵淸影依岸竹(소진청영의안죽) 먼지를 쓸어내니 맑은 그림자는 언덕 위의 대나무에 견줄 만하고
滌累寒殸迸石湍(척루한성병석단) 더러움 씻어내는 차가운 물소리는 돌여울에서 뿜어져 나오네.
把筆題傳勝事詩(파필제전승사시) 붓을 잡고 시를 써서 아름다운 일을 전하니
一竿春日欲西殘(일간춘일욕서잔) 한 자루 낚싯대에 봄날의 해가 서쪽으로 지려 하네.
때는 청나라 강희 48년 기축년(1709) 6월 2일 무가암의 후인 탄부가 고쳐 썼다.
초창(初創)은 대당 건부 10년 계묘년(883), 신라 헌강왕 9년 결언대사가 하였고
이창(二創)은 남송 태조24) 건염 2년 무신년(1128), 고려 인종대왕 6년 성선대사가 하였으며
삼창(三創)은 강희 26년 정묘년(1687)25), 우리 성상 즉위 14년 죽계당 승현대사가 하였다. (국역 : 엉겅퀴)
【주석】(본문 속의 *註와 더불어 모두 글쓴이가 일일이 찾아서 작성함)
1) 江右는 낙동강 오른편을 말하며 대체로 지금의 경남지역을 가리킨다.
2) 경전을 들어서 아는 문혜(聞慧), 진리를 생각하여 아는 사혜(思慧), 선정을 닦아서 아는 수혜(修慧)
3) 다른 기록도 있다. “지리산 엄천(嚴泉)에 터를 잡아 대가람의 이름을 얻었으니, 고운(孤雲)선생이 머무르던 곳이며 법우(法祐)대사가 창건한 곳이다.” (추파 홍유(1718-1774)스님의 『엄천사 종각 상량문』) 법우화상과 관련하여 많이 알려진 설화는 다음과 같다.
“엄천사에 도(道)가 높은 법우(法祐)화상이 있었는데, 하루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도 홀연히 계곡물이 불어나기에 그 근원을 찾아 천왕봉에 올랐더니 큰 키에 힘센 여자를 만났다. ‘나는 성모천왕인데 인간세상에 내려와 그대와 인연이 있어 물로 도술을 부려 (그대를 불러) 스스로 중매한 것이다.’ 하였다. 부부가 되어 딸 여덟을 낳아 그 자손들이 퍼졌는데 모두 무당의 방술을 가르쳐(*지금의 百巫村) 방방곡곡을 다니며 무업(巫業)에 종사했다. 그러므로 굿을 할 때에는 금방울을 흔들고 삼불(三佛)을 그려 넣은 채색 부채를 들고 춤을 추면서 부처님의 명호를 불렀고 또 법우화상도 불렀다. 따라서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지리산 정상에 올라 성모천왕에게 굿을 하고 접신(接神)을 하였다.” 이능화(1869-1943)의 《조선무속고》와 《조선불교통사》에 보인다.
4) 건부(乾符)는 唐 희종의 연호로 6년(874-879)동안 사용되었다. 계묘년은 희종의 2번째 연호 中和 3년이다. 연호와 간지가 안 맞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다.
5) 최언위(崔彦撝 868-944)가 지은 『낭원대사 개청(朗圓大師 開淸 835-930)의 탑비(940)』에 “대중 말년에 강주 엄천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하였다. 大中은 당나라 선종의 연호(847-859)로 엄천사 사적기의 창건 이전이다. 사적기의 오류로 보인다. 승려는 계단(戒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온전한 승려가 되는데 관단(官壇)은 나라에서 지정한 계단을 말한다.
6) “계율[戒]을 지니고, 선정[定]을 닦고, 지혜[慧]를 구하라.”는 불교의 삼학(戒‧定‧慧)을 말하는 듯
7) 원문은 河沙(하사)인데, 본래는 항하사(恒河沙)이다. 불경에 나오는 河는 중국의 황하가 아니라 천축어를 번역하였으므로 갠지스강(*恒河(항하)라 한다)을 가리킨다. 따라서 불경에 자주 등장하는 恒河沙(갠지스강의 모래)는 셀수없이 많은 것을 뜻한다.
8) 여기서의 제자(弟子)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불제자(佛弟子 *승려‧신자 포함)를 말함
9) 최치원이 지은 발원문이라 했지만 그의 문집에는 없고, 이덕무(1741-1793)의 『엄천사 고적』에 나오는 인목대비의 발원문과 같다. 원문도 동일하다. 절에 전해지던 인목대비의 발원문이 사적기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최치원의 글로 둔갑한 것으로 보인다. 종종 있는 일이다.
이덕무가 소개한 글은 다음과 같다.
「계묘년(1783) 6월에 두류산(頭流山)을 구경갔다가 엄천사에서 쉬면서 이 절의 고적(古蹟)을 물으니 중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글이 실린 책 한 권을 내보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前略> 제자의 자매는 일찍이 불행한 화난으로 깊은 한을 안고 있습니다. 부모를 잃은 뒤 믿을 데 없어 마음이 무너지고 의지할 데 없어 피눈물을 짓는 데다가 형제까지 잃은 슬픔을 더하였으니 그리는 정 갑절이나 더합니다. ‧‧‧<中略>‧‧‧
이제 죽은 아우를 엄천사에 추복(追福 *죽은 자를 위해 공덕을 지어 복을 얻게 함)하기 위하여 삼가 강원(講院) 증축 비용으로 벼 1천 섬을 희사합니다. 또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자세히 물어서 의심을 밝히는 것’은 옛 성인이 말씀한 바이고 후생이 힘써야 할 일입니다. 감히 얼마 안 되는 재물을 여러 법류(法流 *佛徒)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한 줌 흙으로 태산에 보태는 것과 같아 비록 부끄럽사오나 이로 말미암아 법해(法海)에 귀의하여 넓은 법당에 학승(學僧)을 모아놓고 청정한 자리에서 상외(象外 *범속을 초월한 경지)의 종지(宗旨)를 설(說)하기를 원합니다.
또 삼가 원하옵건대 죽은 아우가 번뇌의 굴레를 해탈하고 법회(法會)에 올라서 공덕은 사중(四衆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에 나눠주어 장자(長者)의 좋은 손님이 되고 법(法)은 대승(大乘)을 체득하여 불가(佛家)의 좋은 벗이 되었으면 합니다.
또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용렬한 근기(根器)와 만겁(萬劫)의 혼탁한 무리들이 아우와 함께 반야의 배를 타고 보리(菩提)의 언덕에 이르기를 원합니다.”」 (고전번역원)
10) 권적(權適 1094-1147)이 지은 『지리산 수정사기(智異山 水精社記)』에 내용이 보인다.
“대송(大宋) 선화(宣和) 5년 계묘년(1123) 7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년(1129) 10월에 준공하였다. 낙성법회를 3일간 열었는데, 엄천사의 수좌(首座) 성선(性宣)을 청하여 경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11) 원문은 흑룡지란(黑龍之亂)과 창아지비(蒼鴉之飛)이다.
오행에서 10천간 중 임(壬)‧계(癸)는 흑색으로 친다. 따라서 임진년은 검은 용의 해에 해당하므로 흑룡의 난은 임진왜란을 가리킨다.
아(鴉 갈까마귀)는 아(鵝 거위)의 오류로 보인다. 옛날에는 뜻이나 소리가 비슷한 글자를 흔히 끌어다 썼다. 창아(蒼鵝 푸른 거위)는 오랑캐를 비유한다. 아래 《세설신어(世說新語)》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진 혜제(晉惠帝 재위 290-306) 때에 낙양의 땅이 무너지면서 두 마리의 거위가 그 속에서 나오더니, 푸른 거위는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가고 흰 거위는 날지 못하였는데, 동양(董養)이 이 말을 듣고는 “푸른 거위는 호인(胡人)을 상징하니 뒤에 낙양에 쳐들어올 것이요, 흰 거위는 본조(本朝)를 상징하니 국가가 재난을 당할 것이다.”하고 탄식하였다.」
그래서 ‘푸른 거위의 날아오름(창아지비)’은 양대 호란(병자‧정묘胡亂)으로 해석하였다.
12) 원문은 방휼(蚌鷸 *蚌鷸之爭)이다. 큰 조개가 입을 벌리고 있을 적에 지나가던 도요새가 쪼아 먹으려다가 조개가 입을 닫자 주둥이가 물렸는데, 계속 서로 버티다가 어부에게 모두 잡혔다는 고사. (《전국책(戰國策)》)
13) 법손(法孫) 법자(法子). 불가에서 말하는 손자‧아들은 법맥을 중시하는 선종에서 보통 스승의 법을 온전히 이어 스승이 인가한 계승자를 말한다.
벽암 각성(1575-1660)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고, 벽암의 제자 침허 율계(枕虛律戒)는 1680년 실상사를 크게 중창했다고 하며(《조선불교통사》), 승현은 1685년 안국사(함양)에서 간행한 묘법연화경의 교정자로 이름이 올라 있다.
14) 승민(勝敏)은 명안(明眼 1646-1710)스님의 문집 《백우수필(百愚隨筆)》에 쌍학(雙學)으로 이름을 올린 걸 보면 동문인 것 같으며, 1680년 달성의 지장사 청련암을 세웠다고 하였다. (《남지장사 중수기》)
15)~16) 무가암은 중관대사 해안(中觀 海眼 1567-?)을 말함. 처영과 청허에게 배웠고 의병장으로 총섭이 되었다. 문집 《중관대사유고》를 남겼다. 그의 후예인 글쓴이 탄부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다.
17) 별 이름. 자개(紫蓋)는 임금의 수레를 덮는 일산(日傘)으로 제왕을 상징. 이 문장은 병자‧정묘호란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임.
18) 절의 탑을 말함. 인도의 왕사성(王舍城)에 안탑이 있는데, 한 비구가 기러기가 공중에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장난삼아 말하기를 “우리들이 배가 고프니, 보살님은 몸으로 보시하시오.” 하였더니, 기러기 한 마리가 스스로 죽어서 떨어졌다. 이에 승려들이 감동하여 기러기의 탑을 세웠다는 고사가 있다. (《왕오천축국전》)
19) 청조는 곤륜산의 신녀 서왕모(西王母)의 사자. 변하여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사자(使者).
20) 어떤 왕이 사찰을 모두 없애려고 했는데, 초제사(招提寺)가 헐리려 할 때 백마 한 마리가 밤에 탑을 돌며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왕이 중지하고는 초제사를 백마사라고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승전(高僧傳)》) 여기서는 폐허가 된 절을 슬퍼한다는 뜻.
21)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수달장자(須達長者)가 석가의 설법을 듣고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우려고 기타태자(祇陀太子)의 동산을 구매하려고 하였는데, 태자가 장난삼아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 하였다. 수달 장자가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신 또한 동산의 나무를 희사하여 마침내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하였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22) 귤 언덕. 옛날에 파공(巴邛) 사람이 자기 집 뜰에 있는 큰 귤나무의 열매를 따서 쪼개 보니, 그 안에서 두 노인이 바둑을 두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는 고사를 말하는 듯.
23) 원문은 봉(覂 *뒤엎다)으로 覂駕(봉가)를 뜻하며, 말이 멍에를 벗어나거나 수레를 뒤집어엎는 것으로, 뛰어난 인재나 상식을 벗어난 호걸을 비유한다. 불기(不羈)와 통한다. 여기서는 문맥에 맞추어 ‘호탕하다’로 옮겼다.
24) 사실은 고종(高宗)이다. 여진족의 금나라에 북송(960-1127)이 망하고 쫒겨와 강남 항주에 다시 남송을 열었다고 태조라 한 것 같다.
25) 실제 중창이 이루어진 해는 위에서 보다시피 경오년 1690년이었다.
※ 첨부한 원문 복사본은 철필로 써서[가리방] 등사한 것 같다. 그런 방식은 개화기 이후에 도입된 것이니까 19C 말 이후일 것이다. 철필로 필사(筆寫)했다는 것은 원본이 따로 있었다는 얘기이다. 또 이일영스님이 그랬는지 복사본의 글자를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 더러 있는 걸 보면 참고한 원본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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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에스테야 2022.06.21 09:36
역시 엉겅퀴형
수고 하셨습니다.
산유화 2022.06.21 10:11
역시…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차분히 내용을 읽어도 머리에 남는 것이 별로 없지만 다시 또 아우를 존경하기로 했다.
아우의 성의에 보답하는 길은 내가 읽고 또 읽어 머리에 한 대목이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엄천 =>엄내 엮으면 나도 좋겠네.^^
해영 2022.06.21 11:18
하늘은 조화의 끝없는 풍취를 늘어놓는데
이 모두는 산승의 한 붓끝으로 들어오네........
대단한 엉겅퀴형~~
어려운 이야기도 형이 풀어놓으면 향기가 납니다.
이런 양반이 지리산에 들어가 살아야 보탬이 되고 빛이 나지 나같은 술주정뱅이가
떼쓰듯 살자리 옮기면 벼락 맞을듯 싶습니다.
엄천강쟁이 산새아우나 고향인 보스유키자매들이 부럽습니다.
족보있는 고향을 끄집어 내 주는 엉형아가 있어서..
객꾼 2022.06.21 20:44
이런글 읽기 좋아하는데도 끝까지 다 읽는다고 정말 욕봤습니다
참 즐거우시겠습니다
세상에 제일 즐거운 일이 공부하는 즐거움이라는데 푹 빠져 노시는 모습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제가 읽은 글 중에 도화원기도 꽤 흥미롭던데, 역시나 호중천지가 저변에 깔려있네예
글고 무식하게 묻습니다
성모천왕은 혹시 성모천황 아닙니까예
강호원 2022.06.23 17:57
엄천 강변에 있었던 엄천사가 유명한 절이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이렇게 사적기를 발굴하여 아름다운 문장으로 재 탄생시킨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이재구 선생은 洋의 동서와 時의 고금을 아우르고 유불선에 주역까지 섭렵하시는
박학다식함에 할 말을 잊습니다.
현직에 계실 때에 이미 학문의 경지를 이루었는데 이제 지리산 자락에 은거했으니
이제 그 깊이가 얼마나 심오해질지 사뭇 궁금합니다.
단, 그 학구열에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은 우짤낀고?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하기야 이제 더 빠질 것도 없겠다.
늙은이 침침한 눈으로 다 읽는다꼬 나도 머리 몇 가닥 빠졌어요. ㅋㅋㅋ
이해는 다 못하지만 대충 그러려니 짐작만 합니다.
다시 한 번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지리99에 이 선생이 계셔 우리의 복입니다.
고맙습니다.
꼭대 2022.07.03 21:01
우리나라 사적기 대부분 양난 이후 거의 창조되다시피 만들어진 것이라, 조선 초기에서 올라가는 역사는 거의 믿을 것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엄천사흥폐사적’에 기록된 엄천사의 어원 ‘엄하게 계햬를..운운’ 도 그럴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요.
금산사를 품고 있는 모악산도 ‘높다’는 의미의 ‘어뜸’이 ‘어머니’로 연상되면서 모악산으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만,
높은 산이 아닌 협곡을 치고 나오는 하천인 엄천강이 ‘어뜸’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언뜻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엄천사 지명이 엄천강에서 비롯됐다는 설에 대하여 마음이 가지 않기 때문에 저도 딴지를 걸어 봅니다.
대략 통일신라 시대까지 창건되어 이름을 얻은 사찰명에 주변 지명에서 비롯된 경우는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쌍계사의 경우 지명이라기보다는 주변 산세, 지형의 묘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사찰 이름이 지명을 선도한 경우가 되겠지요.
낭원대사탑비문에 따르면 대략 실상사와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어 분명히 석탑도 강변에 그림자를 내리고 멋지게 있을 텐데 사라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한조각 떠도는 엄천의 어원의 출처에 대하여 궁금했는데, <엉겅퀴>님과 같은 깊은 관심과 파고드는 투지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대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