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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 원했던 사제
방유룡 신부 (상)
가톨릭신문 발행일 201 0-01-24 [제2682호 , 7면] 기획/특집>
▲ 방유룡 신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김춘희(안드레아 클라라) 수녀는 지난해 박사학위 논문 「동방의 빛 -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의 해석학적 전기와 통합 신비 영성의 심리학적 합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 (방 신부님은) 살아계실 때 너무 작은 점과 같아 시대가 그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통합 신비 영성과 면형무아 심리학은 다가올 영성의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모형 이 될 것이 분명 하다."
동서 사상의 융합을 통해 한국적 신앙 사유의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무아(無 我) 방유룡 신부(900-1986)는 동서 사상을 아우른 창조적 생명 철학자 다석(多 夕) 유영모(1890-1981)와 비교된다. 하지만 유영모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통합적 사유 체계를 제시했다면, 방유룡 신부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동 양적 그리스도교 영성을 정 립 했다.
이야기는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유룡 신부는 그해 3월 6일 서울 정동(서소문 안 대한문 옆)의 한 궁내부(宮內部) 주사(主事)로서 영국공사관의 통역관이었던 아버지 방경희와 어머니 손유희 사이에서 육 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방 군수로 발령받고도 , ' 지 방관으로서 향교제사(鄕校祭祀)를 지내야 하는 부담감 ' 때문에 관직을 고사할 정도로 신앙에 열심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아 방 신부는 태어난지 3일 만에 명동성 당에서 ' 레오 '라는 세 례명으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방 신부는 어린 시절 특히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할아버지 방제원은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Muted. 閔德孝)주교와 만주 연길 교구장이었던 불량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한학자였다. 훗날 방 신부의 한학에 대한 뛰어난 식견 또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방 신부의 미래를 미리 보았을까. 할아버지는 방 신부에 대해 입버릇처럼 " 장차 가문을 일으켜 세울 아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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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9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병사(病死)한 것이다. 이후 가세가 기울었고, 소년 방 유룡은 정상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결국, 늦은 나이인 14살 때 정동 관립 보통학교 입학, 16살 때 졸업했으며, 이후 미동 농업 학교에서 2년간 수학했다. 하지만 많은 나이 탓에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방유룡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다. 우연히 소신학교의 전신(前身)이었던 용산 벽암정 신학당의 학생 모집 소식을 듣고 입학하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동료 신 학생들보다 나이가 대여 섯 살이 많았다.
동창 신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신학교 입학 직후 그의 모습은 ' 종로 깍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밉상이었다. 늘 멋쟁이 건달처럼 꾸미고 다녔으며, 잘난 척했다. 씀씀이가 사치스러워 교수들로 하여금 사제 성소를 의심하게 만들기도 했다. 도무지 신학생답지가 않았다. 그래서 일부 교수 신부들은 그를 퇴교 조치하기로 한다. 하지만 한 교수가 나서서 설득했다. " 방유룡 집안의 신앙과 삶을 보아서라도, 일 년 동 안만 더 두고 봅시다. "결국, 방유룡은 간신히 퇴교 조치를 피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방 신부의 동료였던 임충신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 방유릉은 신학교에서 쫓겨나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나갈 사람이지, 신부는 못될 것
이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방학 후에 별안간 변 해서 들어왔습니다. 자기가 선언하기를 ' 오늘부터 나 성인 된다' 고한 후로는 엄격하게 규칙을 지키면서, 말도 잘 안 하고, 화도 난 내면서 새까만 무명 두루마기에 동정도 안 달고 입고 다녔습니다. 그런 경과를 겪고 신부가 된 후도 가장 열심이었습니다."
방 유룡은 달라졌다. 규칙을 엄격히 지켰고, 침묵을 사랑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옷차림도 확 달라졌다.
이즈음 방 유룡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처 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동료들로부터 ' 루나 띠꾸스 ' (달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라틴어 별명을 얻기도 했다. 어떤 동료들은 또 수도 생활을 하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 수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신학생 방 유룡은 수도 생활에 대한 원의를 품고 수도회 입회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 진출한 외국 수도원 몇몇 곳을 방문했는데, 이 과정 중에 자신의 특별한 소명은 외국 수도원의 입회가 아니라 순수한 한국적인 수도원을 건립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소신 학교를 졸업한 후, 방 유룡은 대신학교 6년 과정을 마치고, 1930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당시 나이 30세였다. 함께 서품받은 사제는 노기남, 윤형중, 임충신, 양기섭 등이었다.
방유룡 신부의 첫 부임 는 강원도 춘천 본당이었다. 이후 황해도 장연 본당의 보좌 신부를 거쳐, 1933년에는 황해도 재령 본당의 주임 신부가 된다. 이어 1936년에는 해 주 본당 주임에, 1942년에는 경기도 개성 본당에 각각 부임했다.
본당 생활 가운데서도 방 신부는 수도원 지망자들을 특별히 사랑하고 지도하는데 대단한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방 신부 자신 이 신학교 시절부터 수도 생활을 원했고, 완덕에 이르러 성인이 되고자 하는 원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방 유룡 신부에게 있어서 본당 사목을 하던 기간 15년은 수도원 건립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그는 한 번도 수도 생활에 대한 원의를 잊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일을 원했다. 하지만 그는 기존 수도회에 입회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우광호 기자
26. 사제의 사제 방유룡 신부 (중)
가톨릭신문 발행일 2010-01 -31 [제2683호, 7면] 기획/특집>
한국적 수도회 건립에 모든 것 바쳐
모두가 힘들 때였다. 방 유룡 신부가 사제가 되고, 완덕을 염원하며 영성의 깊이를 심화하고 민족 구원의 염원을 불태우던 시기는 일제 치하, 한국전쟁, 이념의 대립 등으로 우리 민족이 심하게 앓던 때였다.
방 신부는 일제 치하에서 사제생활을 시작한다. 1930년 10월 26일 사제 서품을 받은 방 신부는 강원도 춘천 본당 보좌 신부로 첫 사목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9월 황해도 장연 본당 보좌로 이동한 방 신부는 1933년 2월 제령 본당 주임 신부가 됐으며,
1936년 5월에는 해주 본당, 1942년 2월에는 경기도 개성 본당 주임으로 발령 나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만약 방 신부가 해방 이후에도 개성 본당에서 계속 있었다면 아마도 오늘 우리는 방 신부의 동양적 그리스도교 영성의 지순한 깊이를 접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방 신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불과 한 달을 앞둔 1950년 5월 서울 가회동 본당 주임으로 이동했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제기동 본당 주임으로 임명됐다. 또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부터는 후암동 본당 제4대 주임 신부로 활동했다.
방 신부는 이러한 일선 사목활동 기간 동안 늘 가지고 있었던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는 한국 교회가 실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전통적 정서를 계승해야 한다고 믿었다. 민족의 구원을 염두에 둔 한국인 사제로서 한국인에게 맞는 참된 구도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의 수도회 창설을 꿈꿨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는 여러 방해로 인해 수도회를 창설하지 못했다. 꿈은 해 방 직후에 이뤄졌다. 1946년 4월 21일 예수부활대축일에 개성 본당 사무실에서 윤병현(안드레아) 흥은 순(라우렌시오) 두 수녀가 입회함으로써 드디어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 가 출범한다. 1946년은 한국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병오박해(1846년)로 순교 한지 100주년이 되던 해다. 수도회의 명칭이 ' 순교복자 ' 인 것은 방 신부가 한국인의 수도 생활은 당연히 순교자들의 얼을 이어가는 그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녀회는 이후 1951년 12월 12일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수녀회는 한국 수녀회로는 처음으로 일본에 진출(1967년)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독일과 멕시코에도 선교사를 파견하는 등 지금까지 순교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활발한 사도직 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꿈의 실현을 위한 정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한 것. 방 신부는 이로써 한국적 영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구현해 내는 남녀 수도회를 세우겠다는 소망을 이루게 된다. 방 신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1957년 3월 재 속 회인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3회'(외부화)를 설립하고, 1962년 10월에는 별도의 수도 동체 ' 빨마회'를 설립했다.
이어 방 신부는 후암동 본당 주임을 끝으로 1957년 5월 6일에 자신도 직접 수도회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입회,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동시에 수도회 소속 수사와 수녀들의 영성 지도신부를 맡아 1981년까지 재임했다.
이 시 절 그의 열 정은 놀라운 것이었다. 오직 철저한 낮춤의 기도와 묵상 및 관상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났으며, 불같은 열정으로 완덕을 위해 매진했다. 특히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땀 흘리며 가르쳤다.
그의 사상은 단순히 유럽 그리스도교 사상 및 철학을 한국인 입장에서 변형, 수용한 차원이 아니었다. 철저히 한국인의 정서와 사고방식, 언어, 감정으로 하느님을 말씀을 들었으며 이해하고 사유의 깊이를 심화시켰다. 특히 모든 사도직 활동은 관상에서부터 출발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나온 중심 사상이 바로 점성정신(粘性精神), 침묵(沈默), 대월(對越),
십자가의 비결(秘訣), 면형무아(麵形無我) 등이다. 방 신부는 자신의 호도 ' 무아'(無我)라고 지었다.
방 신부의 영성은 어쩌면 아직도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서양의 사상을 형식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내용으로 통합해 내기란 오늘날의 후학들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풍부한 한국 교회의 유산을 한쪽에 밀어 놓는다는 것은 신앙 후손들의 도리가 아니다.
어렴풋하게나마 방 신부가 사유한 주제들을 눈감고 더듬어 본다면, 그 내용은 이렇다.
■ 방 유룡 신부가 창설한 한국순교복자수도회 가족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 1946년 개성에서 창설된 방인 수녀회. 한국 순교 선열들의 순교 정신으로 생활하며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1951 년 12월 교황청 인가를 받았다. 본원은 서울 청파동에 있다.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1953년 창설된 방인 남자 수도회. 서울 제기동 본당 부속건물에서 시작됐으며 1956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았다. 창설된 이듬해인 1954년 명동 성당 부속건물로 임시 이사한 뒤, 1955년 현재 본원이 위치한 서울 성북동에 흙벽돌집을 만들어 입주했다.
▲ 한국순교복자 빨마수녀 회
1962년 창설되고 1992년 부산교구 인가를 받았으며 1996년 현재의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점성, 침묵, 면형 무아의 삶을 통해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서 하느님 나라 완 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3회(외부회)
복자회 가족의 일원으로 사도직을 수행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서울지구는 1957년 3월에, 부산지 구는 같은 해 10월에 각각 시작됐다. 회원들은 성가정과 성모님을 본받아 가정생활을 하면서, 수도회 영성을 바탕으로 완덕을 위해 정진하며, 이웃에 복음
을 전할 것을 서원한다.
▲ 방 유룡 신부는 한국적 영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구현해 내는 남녀 수도회를 세우겠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수도회 건립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우광호 기자
27. " 저를 온전히 당신께 봉헌합니 다'"
가돌릭신 문 발행일2010-03-07 1제2687호, 20면]
[사제의 해 기획]. 방유룡 신부 영성(하)
정진석 추기경은 지난 2003년 발간된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호J 50년사」에서 수도회 설립 50주년을 축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 지나온 역사의 교훈과 계승된 공동체의 영적 자산을 통해, 각 회원이 ' 면형무아 ' 의 삶을 가꾸시길 바랍니다."
이처럼 방 유용 신부 영성은 ' 면형무아'로 요약된다. 방 신부는 자신의 호도 ' 무아'(無我)라고 지었다. 방 신부에게 있어서 ‘면형무아는' 순교 정신의 최종목적지 이자, 손속 생활의 최종목적지다. 그리고 이 면형무아를 위한 방편이 점성(點性), 침묵(沈默), 대월(對越) 등이다.
ᄆ 면형무아(麵形無我)
면형무아 영성은 성체 신비에 닿아 있다. 즉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시의 모든 것을 비우시고 밀떡의 형상 안에 당신을 닮아 우리에게 온전히 내어주신 신비가 바로 면형 무아다.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완전히 없앰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뤄야 한다. 그리고 이 웃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주어야 한다.
즉 면형무아의 삶은 나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삶이다. 면 형무아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한 이들이 순교자들이다. 방 신부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창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방 신부는 자신의 삶과 영성을 통해, 순교자들이 죽음으로써 자기를 버리고 신앙을 증거 한 것처럼 우리에게 비움의 삶을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방 신부는 이 ' 면형무아 ' 에 도달하기 위해 침묵(沈默)의 길, 사랑의 대월(對越), 점성정신(點性精神)을 강조했다.
■ 점성(點性)
점 성은 일상 안에서 순간순간 성화한다는 의미다. 방 신부는 만물의 기초가 되는 점의 성질처럼 영성 생활도 점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방 신부는 그래서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삶을 살 것을 당부했다. 방 신부는 또 작은 일, 작은 순간을 성화하기 위해서는 ' 정성스러움 ' 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 앞에 정성스러운 태도로 부복하고, 사람들을 정성스럽게 만나는 것, 일을 정성스럽게 처리하고 모든 행동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점성정신은 또한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대한 가치를 알아보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정성으로 자기 본분에서 요구된 범상하고 미소한 일까지도 알뜰하고 빈틈없이 하는 삶이다. 또 한 덕은 일의 종류나 크고 작음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수행하는 마음가짐, 곧 정신에 따라 덕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러한 점성정신은 비천한 곳까지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그분이 걸어가신 무시, 모욕, 천대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희생적인 삶으로 봉헌하는 삶이기도 하다. 이 점성정신이 있을 때 침묵을 하게 된다.
■ 침묵(沈默)
방 신부에 따르면 침묵은 빛이다. 방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 빛은 양심을 비추는 것인데 영혼의 눈도 있고 육신의 눈도 있다. 부활 초는 큰 빛이요, 우리는 작은 초를 가지고 불을 붙인다.
침묵 생활은 말 안 하는 무언(無言)의 상태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삶이다. 침묵은 우리 자신과 정신을 극기로써 밝히며 절제하는 것으로, 방 신부는 분심, 사욕, 귀, 눈. 말, 맛, 코, 수족, 이성, 의지를 다스리는 침묵십계(沈默十戒)를 제시했다.
침묵은 크게 내적 침묵과 외적 침묵 그리고 영혼 침묵(이성 침묵, 의지 침묵)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완덕 오계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완덕 오계에서 1계와 계는 내적 침묵에 해당한다. 1계는 분심잡념을 물리치는 절제된 삶으로 세상사 안에서 하느님 뵙기를 노력하는 것이며 동시에 호기심을 억제하는 것이다. 많이 보아선 안 된다. 많이 들어서도, 많이 말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지향을 하고 상상이나 추측 그리고 오관을 절제해야 한다. 2계는 사욕을 억제하는 것으로 맑은 양심을 기르는 것이다. 나만 편한 이기주의와 교만한 마음과 고집에서 벗어나려는 침묵이다.
외적 침묵에 해당하는 3계는 외적으로 늘 평화의 미소를 띠고 말과 행동에 불만 감정을 발하지 않는 침묵이다. 이 침묵을 지키는 이는 태도에 있어서 단정하고, 흩트려 짐이 없으며, 행동이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럽다.
앞으로 1, 2, 3계를 잘 수행하면 4계가 밝아질 수밖에 없다. 이 단계 바로 뒤에서 설명할 대월 생활이다. 영혼 침묵 중에서 이성 침묵에 해당하는 4계는 양심 불을 밝히는 데 있으며 양심 불을 밝히려면 선행이 필수적이다. 선행이 중단되면 양심 불이 꺼진다. 우리는 선으로서 양심 불을 켜고 덕으로써 양심 불의 촉수를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의지 침묵에 해당하는 5계는 " 내가 가진 모든 자유를 천주께 바치고 그 성의를 따를지니라"라는 삶의 계율이다. 우리의 가장 귀한 자유를 하느님께 바치면 더 완전한 자유를 받는다. 이 단계는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으로 자유의지를 다스리는 행위 이 기도 하다.
이 5계가 바로 면 형무아의 경지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어떠한 수고함 없이 대덕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대덕의 삶은 양심에 어긋남이 없는 자유의 지로 선택한 진(眞)? 선(善)? 미(美)? 호(好)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다.
■ 대월(對越)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기 위해 침묵을 강조한 방 신부는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그분과 마주 본다는 의미를 지닌 ' 대월'을 통해 정화된 영혼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친교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대월 생활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대면하게, 자신을 정화하는 행위다. 이 삶은 3칙과 2효과로 구성 되어있다.
"1칙은 내 자작으로 아무것도 아니 한다. 2칙은 나는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한다. 3 칙 은 나는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바를 항상 해드린다."
그 효과로 두 가지가 있다.
" 첫 번째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는 항상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두 번째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친히 하신다."
결국, 대월의 3칙과 2 효과는 어떠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모든 세상
만물에 제한받지 않는 관상적인 삶으로의 초대를 뜻한다.
이 초대는 하느님을 영적으로 맛들 이게 하고 하느님 계획안에 머물게 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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