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지난9월19일 오후2시에" 문학과 스포츠`란 주제로 서울 여의도 CCMM빌딩 메트로홀에서 제15회 국제문학심포지엄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한국시의 세계화, 멕시코에서의 현재 상황
둘세 마리아 수니가 박사
멕시코 국립 구아달라하라 교수
동 대학 문학 연구소 소장
근대사에 있어서 한국과 멕시코 사이 관계에는 기억할만한 여러 날짜들이 있습니다. 첫 번은 한국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멕시코 오악사카에 도착한 한국 이민자들의 입국인데요, 그 때가 1905년 4월 4일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유까딴 반도의 에니껜 농장에서 일을 하기 위해 오신 1,033명의 한국 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두 나라 사이의 경제적 협력 관계가 성립되었지요. 이 날짜 다음으로는 수십 년 동안 두 나라 사이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 이유에는 고통스러운 외국의 한국 지배의 일화와 세계 대전의 여파로 한반도가 분단되는 역사의 장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중요한 양국 관계는 1962년 1월 26일 남한과 멕시코의 정식 외교관계 설립입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지역적으로는 멀지만 양국 사이 상호 경제 협력은 나날이 발전하고 풍성해졌습니다. 그것은 상당 부분 문화 교류, 기술과 과학 협력에 힘입은 바 크지요. 현재로서는 외교, 무역, 경제 관계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도시와 한국 도시의 자매결연이 있을 정도입니다. 구아달라하라와 대전, 사뽀빤과 마산시가 그 예이지요. 제가 사는 곳에 가까운 곳만 명명하자면 말입니다.
근래 20년 사이 멕시코에는 일종의 한류와 한국의 이미지가 확산 일로에 있습니다. 유까딴 반도에 첫 이민자 후손들이 그 후 100년이 넘은 지금 3만 명 가까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 꼴레히오 데 멕시코 한림원에서 연구한 결과로는 멕시코에 약간의 오류를 감안하더라도 약 4만 5천 5백 명 정도의 한국인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수로 말하면 중남미의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에 비해 아직 많은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멕시코는 한국 투자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한국 기업이 라틴아메리카에 투자한 것의 40 %가 우리나라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멕시코의 제 6 교역국입니다. 현재 양국 자유무역 협정에 대한 말이 오가고 있지요. 양국 정부는 정직으로 학술적이고 문화적인 교류를 강화하기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일반 멕시코 대학생이 한국에 대하여 알고 있는 바는 아직 피상적입니다. 한국이 재봉술이 뛰어나다든지, 세계적인 전자와 자동차 생산국이라든지, 세계 최고 교육 수준 국가라든지 하는 것들이 200년 일본과 한국 월드 컵 때 텔레비전을 통하여 소개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들이 없었지요. 비록 누구에게나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요. 특히 문학 세계 속에서 자라온 문인들에게 말입니다.
한국과 멕시코의 관계를 다시 헤아려보면, 1991년은 의미 있는 해였습니다. 구아달라하라 대학 출판부에서 『한국시선(정권태 편역)』이 나왔고, 두 번째는 고혜선, 민용태 편역으로 『한국단편소설선』이 유명한 “꿀뚜라 에꼬노미까” 출판사에서 나왔기 때문이지요. 이 책들은 출판사나 편역자들 사이 이해와 신뢰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첫 책은 1000부를 찍었고 소설집은 출판사가 커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전파되어 매진되었습니다. 『한국시선』은 라틴아메리카에 한국시를 알리는 첫 번째 책이었습니다. 이 시선은 여러 종류의 시와 조류들, 이 조년으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수 세기 동안의 한국시의 풍성한 발전을 조망할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한국시에 접근하기 위해 필요한 아주 좋은 교과서였습니다. 1991년까지는 한국 문학이 중남미와 멕시코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었으니까요.
스페인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1967년에 스페인 문학 전공(이후 외대, 서울대 교수)김현창이 아빌라의 ‘라 무랄야 출판사’에서 『한국시』라는 시선집을 냈고, 1883년에는 민용태 시인이 『현재 한국 시인선』을 유명한 마드리드 ‘아도나이스 출판’에서 출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시선집에 서반아 권에 크게 전파되지 못한 것은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90년 이후에 와서야 여러 가지 형태로 한국 시인들과 작가들의 책들이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많이 출간되기 시작했지요.
여기 강조할만한 것은 멕시코에서 한국 작가들을 가장 많이 소개하고 출판한 것은 정권태 교수의 경탄할만한 노력에 힘입은 바 컸다는 점입니다. 이미 20년 전부터 구아달라하라에 거주하면서 ‘한국문학 번역원’, ‘대산재단’ 등 한국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아 한국문학을 멕시코에 전파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요. 그 뿐만 아니라 벌써 세 번째에 걸려 주정부의 지원과, 구아달라하라 도서 박람회 등 지원을 받아 ‘한국문화주간’을 구아달라하라와 사뽀빤에서 개최하였습니다.
이 많은 행사에서 한국의 중요한 작가들, 화가들, 교수들, 훌륭한 한국 무용(이 길주 무용단), 한국 영화들을 보여주었고 한국 문화의 위대성을 과시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구아달라하라 시에서 이런 행사가 개최될 때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심미적 충격과 깊은 인상을 멕시코에 남겼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정권태 교수는 한국 대학과 멕시코 대학 간에 학술 교류도 추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학생들이나 교수들, 멕시코 학생들이 서로 상대국을 방문하여 공부하는 길을 텄습니다. 정교수의 한국문화 전파는 실로 경탄할만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1991년 이후 현재 한국 작가들의 책 출판 현황을 살펴보면, 시선집 출판이나 소설집 출간 등이 오늘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동안 억압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닫혀 있었던 양국 간의 문화 교류가 물꼬를 트면서 ,멕시코 문화처럼 천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문화를 접하고자 하는 관심 또한 넓고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초기 멕시코에서 한국 책들이 소개된 뒤,1995년에서는 구아달라하라 대학 출판부에서 민 용태 시인의 『바람의 강』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시인의 1968년 작부터 그 당시에까지 쓴 작품 중에서 고른 시선집으로, 멕시코 시인 라울 바뉴엘로스는 말합니다. “민용태의 시는 세상의 빈곤과 무지개 사이 연줄을 이었다. 순수하게 노래하는 수탉 목소리와 욕망을 창조하는 울부짖음 사이 길을 텄다. 희망에 찬 눈빛과 또 다른 빛의 어두움으로부터 성찰하는 구역질나는 현실과 소망의 모습까지 그의 시는 하나하나 시로 그린 사진이다. 민 용 태의 시는 하오의 호랑이가 핥고 간 한 송이 장미이다.” 그 시집은 모든 대학교 출판물이 그렇듯 500 부에 불과한 전파력이 약한 것이었지만 의미 있는 시도였지요.1996년 1월 19일 민용태 시인은 할리스코 주정부 초청 『바람의 강』출판 기념회를 가졌는데, 거기에서 시인이면서 작가인 라울 아세베스는, “민용태 시인은 우리를 참 어리둥절하게 하는 한국 시인입니다. 한국 시인이면서도 스페인어 시인, 서구적 감성이 조화된 시인입니다. 월트 휘트먼의 정열과 칠레 반시 시인 니까노르 빠르라의 아이러니, 우디 앨런의 털 뽑은 적나라한 유머가 한데 섞여 있지요.”라고 말한다.
민용태는 또 스페인 아르테사 출판사 출판 『민용태 시선1968-1985』을 냈지요.
스페인 교수 인두라인 박사의 서문에서 그토록 섬세하고 황홀한 매력적인 시를 구사한 한국 시인의 놀라운 스페인어 시작 능력을 경탄합니다. 인두라인 교수는 또한 스페인에서의 한국 문학 전파를 크게 치하하기도 했지요.
1997년 또 하나의 경사가 있었는데, 스페인어어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구아달라하라 국제 도서 박람회’에서 도서 전시국 주빈으로 참석한 일입니다. 그 때는 ‘제3회 한국문화주간’을 열고, 고은, 오세영, 김명인, 임영호 시인들이 참석했습니다. 각각 시들을 읽고 독자들과 대화도 나누고 활발한 활동을 벌렸지요. 250여명의 시인, 독자들이 모인 방에서 한국 시인들의 낭독이 번역과 함께 있었고, 곧 이어서 멕시코 시인들 리까르도 가스띠요, 호르헤 에스낀까가 시를 읽었습니다.
그 성과는 실로 대단했습니다. 원 한국어로 읽은 시들의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한국 시인들의 침착하고 강력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에 실린 시들의 강렬한 서정성, 한국어의 매력과 음악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모든 참석자들에게 참으로 감동적이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 한국어와 한국시의 마력이 감각으로 이해되는 기적이었지요. 뒤에 멕시코 시인들이 한국시들을 읽을 때도 감동은 여전했습니다. 비록 청중 앞에서 한국 시를 읽은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 시의 호흡까지 전달하려고 애썼다. 신문 기사들을 보면 그 때의 한국시 낭독은 1997 국제 박람회의 최대의 이벤트로 격찬되곤 했습니다.
이로부터 현대 한국문학과 시에 열심인 독자들이 생겨났지요.
1997년 멕시코시티의 ‘부엘따’출판사에서 『신의 하늘 또한 어둠이 있다』라는 오세영 시인의 시집이 출판되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쓴 작품들이 실려 있습니다. 정권태 교수가 라울 아세베스 멕시코 시인과 함께 스페인어로 번역한 것인데, 참으로 바람직한 결과였지요. 이로부터 두 손으로―두 마음으로―번역하는 것이 두 문화의 연결이라는 행운을 겸비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대단히 훌륭한 경험을 보여주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감성, 다른 생각들이 서로 어울리고 보완하고 풍성하게 한다는 결과였습니다. 라울 아세베스는 한국어를 모르지요. 그러나 20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정 교수와 번역 작업하면서 수천 년에서부터 오늘까지 한국 문학의 맛과 감성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오세영의 『신의 하늘 또한 어둠이 있다』는 멕시코 문화계에서 대단히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출판 된 후 얼마 안 있어 재판이 나왔다. 세계적 명성인 ‘부엘따’에서 출판된 이유도 있지요. 노벨상 시인 옥따비오 빠스가 만든 출판사였기 때문입니다. 빠스는 인도, 일본, 중국 문학을 아주 좋아하고 불교의 ‘공’세계에 빠졌던 시인입니다. 오세영의 시들은 우리에게 한국 전통의 정수와 접하게 했습니다. 허무의 의미, 불교적 텅 빔, 노장적 자연관, 한국 무속적 사고들.
오세영의 시에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교감이 말로 표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섬세한 묘사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상징으로 옮겨져 있었습니다. 전통적 비유와 상징, 그리고 존재와 자신, 초월적 실체에 대한 영원한 의문과 짝을 이루면서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전체적으로 본질적 시, 소박하고 응축된, 그러나 깊고 복잡한 다른 면을 가진 시다. 금강석처럼 빛나는, 연마하지 않은 돌을 발견했을 때의 ‘황홀’ 같은 것이 오 시인의 시라고 정의할 수 있겠지요.
같은 오 시인의 시집 『사랑을 넘어서』가 멕시코시티 알두스 출판사에서 나왔습니다. 역시 정권태 교수 번역이었습니다. 1985년부터 1990년까지의 시작을 모은 것. 서문에서 시인의 자신의 시학과 시를 설명합니다.
“시대가 나에게 말을 하지만, 다른 시인들은 무엇을 찾지만 나는 나의 시를 썼다. 나의 시가 기회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애를 썼다…….”
『사랑을 넘어서』의 독자들은 또다시 한 번 현대 시학과 한국시의 전통성을 조화시킨 그의 서정에 유혹 당하는 수밖에는 없었지요. 오래된 지혜와 세상을 모든 신비의 눈길로 보는 시 정신이 좋았습니다. 사랑의 시, 고통과 절망, 갈등만이 아닌, 그것을 넘어선 총체적 사랑을 노래하지요. 시의 서반아어 리듬은 균형 잡히고 정형적입니다. 강력한 생명력의 고동이 느껴집니다. 그의 시는 세상살이의 빠른 변화, 감적의 전이, 시인의 내적 체험을 담아, 독자를 감동의 물결 속에 끌어들여, 스스로의 내적 체험의 자아로 빠져들게 하지요. 오세영의 시는 “동양시”라는 것에서 이상한 이국취향이나 찾으려 하던 스페인어권 독자들에게 새로운 깊이의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자신들이 투영되는 거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산재단의 도움으로 1998년 이형기 시인의 『불멸의 도시』가 여기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시인 스스로 “영원한 혁명가”라고 서문에서 고백합니다. 자신 스스로 혁명을 하고 남을 혁명시키고자 하는 시인이라는 것. 시는 모든 이데올로기 위에 있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큰 깨달음을 위해 진리를 찾는 게 아니라, 평화롭게 살 곳이 없는 자신의 정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를 쓴다”고 말합니다. 『불멸의 도시』는 현대인이 사는 커다란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시인의 목소리는 블랙 유머와 아이러니로 가득 찬 냉철하고 객관적인 증인의 눈과 차분한 목소리이지요. 도시 사회를 의인화하여 일상생활의 불행의 일기를 제시합니다. 이 재미있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날로 가증스러워지는 세상의 인간성의 위기에 대하여 생각하고 의식하게 만들지요. 그러나 시인의 목소리는 절대 독단이나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재미있고 암시적, 섬세함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멕시코는 시인 고은의 최초 스페인어 시집을 출간합니다. 1999년 멕시코 대학 한림원에서 『불길의 분수』라는 시선집을 냅니다. 빠시엔시아 시인과 서정철의 공역이지요.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 중의 하나인 고은의 시가 멕시코에 출판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30년 가까이의 시적 중에서 뽑아 번역한 이 시선집은 현실적으로 복잡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때로는 평화롭기도 한 양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1999년에 또 다른 고은의 시집이 멕시코에서 나옵니다. 『들판 끝의 돌 하나』가 정권태와 라울 아세베스의 번역으로 출간됩니다. 선시들을 모은 것들. 그 시집은 출판 된 뒤 1천부가 바로 다 팔렸습니다. 그 시집에는 1994년 영어판 『자아를 넘어서』 책 서문의 앨런 진스버그의 멋진 서문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고은 시인의 시낭독을 들으며 우리는 그가 진정한 시인임을 확인했습니다. 말하자면 시와 예술, 그리고 시어에 완전히 심취해 있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시인 스스로 자신의 시를 설명했지요.
“나는 나의 시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세상을 껴안으려고 한다…….”
고은은 스스로를 세상을 사랑하는 시인이며, 시가 자신의 존재의 이유라고 말합니다. 『불길의 분수』는 2005년 스페인에서 재판이 나왔습니다. 스페인에서 『선시』가 2005년에 또 나왔고, 이제는 마드리드의 베르붐 출판사가 『만인보』의 일부를 번역 출판했으며 계속 출간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고은 시인의 목소리의 다양성은 주목할 만합니다. 순수한 서정에서부터 사회참여 시, 하이쿠적 단순함에서 거침없이 쏟아놓는 목소리…….
고은을 만나 본 사람은(그중 나도 하나이지만) 그에게서 세상처럼 가장 오래된 인간을 만나지요. 모든 인간의 고통의 무게를―고통 없이―끌어안는 어른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눈길에는 고통이 없어요. 야단스럽지 않는 침착한 예지와 격정이 함께 있습니다. 강력한 마법사가 고 시인입니다. 쌀알처럼, 밀알처럼 별들을 먹고 살 수 있는 시인입니다. 침묵을 깨고, 갑자기 그의 손이 시를 쓰도록 내버려두지요. 그는 평화를 부르짖습니다. 이성과 감성의 지혜를 믿습니다. 자연의 조화와 선(善)을 강조합니다. 또한 형제 살육, 동족상쟁의 비극을 가장 아파하는 시인이 그이지요. 승려로서의 길보다는 시의 길을 택한 것도 그의 매력입니다.
그의 시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죽고 싶다”는 말처럼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애가 돋보이는 것이 그의 시의 강점입니다.
멕시코에서 다른 한국시를 또 이야기하자. 90년대부터 21세기까지 날마다 풍성해지고 있는 것이 한국시 출판입니다. 민용태 번역 『한국시의 꽃과 보석』(알두스 출판) 총 208 페이지, 5장에 걸쳐 고대 한국시로부터 현대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1. 1세기부터 10세기 통일신라 때까지
2. 고려 시조
3. 고전 한시
4. 조선조 한시와 시조, 가요
5. 현대시
한국 시 선자는 잡다한 한국시 전통을 파노라마식으로 모으는 것보다는 시정신을 중심으로 통일성을 시도합니다. 그 이름이 ‘풍류도’라는 말인데, 한국 시의 시정신으로 민 시인은 ‘풍류도’를 말합니다. 그는 이를 한국 정신의 총화로 보고 유불선의 뿌리를 가진 전통이 한국시에 있다고 못 박습니다.
2006년에서는 멕시코시티에서 『한국 현대시인 5인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구아달라하라에서 『무지개의 계단으로』라는 시집 또한 나왔습니다. 두 시선집 모두 현대 시인들의 작품이지요. 2007년에는 3명의 한국 소설가들이 작품집을 냈습니다. 에르미따뇨 출판사인데 계속 한국 문학을 소개할 계획이랍니다.
한국시 출판으로 가장 최근 나온 것은 민용태 시인의 『우연과 연꽃들』이라는 시선집입니다. 스페인어로 직접 창작하는 민용태 시인의 시집은 많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민 시인은 이미 멕시코 시인으로 봅니다. 민 시인 덕택에 우리는 한국 문학, 문화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우리 문화에 바쳐진 한국 문학에 대한 조망을 해보았습니다. 이제는 멕시코 서점에서 한국 문학, 시집들을 발견하는 것이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또한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들도 많지요.
이런 시 번역들 덕택에 멕시코와 한국 사이에, 비록 무지개처럼 가볍지만, 동시에 튼튼하고 견고한 다리가 생긴 셈이지요.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비쳐보기 위해 늘 오가야 되는 다리가 이 다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미 강화된 양 국가 문학의 유대가 더욱 튼튼해지기를 바랍니다. 한국도 하루 빨리 통일된 국가로 다시 태어나 멕시코에 힘을 보태기를 바랍니다. 곧 구아달라하라 세계 도서 박람회에 명예 초청국으로 또 초청될 것으로 압니다. 이렇게 되면 더 많은 수천의 세계 독자들이 놀랍고 오래된, 또한 가장 현대적인 한국 예술과 시를 읽고 보고 듣고 감상하는 영광이 우리에게 많이 주어지리라 믿습니다.
토론자의 말, 질문
민 용 태(시인ㆍ고려대 교수)
스페인어권에 알려진 한국 문학, 한국시에 관한 자세한 연구 잘 들었습니다. 최근 20여 년 동안 한국 문학 소개가 눈부셨다는 말도 공감이 갑니다. 또한 “한국문화주간”이 벌써 3회에 걸쳐 이뤄진 것도 들었습니다. 영화와 함께 대중문화의 ‘한류’까지 합세하여 앞으로 한국 시, 한국 문학이 멕시코에서 더욱 빛을 바라길 바랍니다.
이미 고은 시인이나 오세영 시인의 시가 재판을 거듭하면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한국 천년의 전통성과 현대시학의 조화가 돋보인다고 말씀하셨지요. 고은 시인의 일본 하이쿠에 가까운 선시, 아니면 인간성 회복과 평화를 갈구하는 현실 참여적 고은 시인의 목소리도 어필했다고 하셨는데, 사실 오늘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정작 우리에 관심 있는 것은 오늘 스페인어권에 어떤 종류의 생각이나 시가 그들을 깊게 매료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둘세 마리아 선생님께서도 이들 두 분의 시의 여러 면을 지적하셨습니다만,
사실 이 두 시인의 멕시코에서의 성공은 유명 출판사라든가, 홍보 등 문학 외적인 요소에 힘입은 바 크다는 느낌이 듭니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한국의 많은 시인들도 좋은 번역, 좋은 출판사, 좋은 홍보를 거친다면 똑같은 인기와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어느 시인이고 개성과 깊이를 갖지 않은 시인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이런 외적인 요소에 힘입었던 한국 시의 성공 예를 떠나서, 앞으로 멕시코나 스페인어권에서 진정으로 그 시정신과 스타일로 어필할 수 있는 바람직한 문학 전망 같은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을 한국시에 기대할 수 있을까요?
가령 옥따비오 빠스의 후광이 아직도 일반적인 스페인어권 문학에서, 빠스가 좋아했던 동양풍의 불교, 노장, 주역의 시정신이 아직도 유효할까요?
사실 멕시코는 불교를 좋아했던 시인 아마도 네르보를 비롯하여, 일본 하이쿠를 모방한 시로 전위 문학을 이끌었던 호세 환 따블라다 등, 스페인어권에서 동양 붐을 주도했던 문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이제는 인도, 중국, 일본을 거쳐 한국에 흥미와 관심을 쏟게 할 방법은 없을까요?
말씀드린 사항들 외에도 교수님께서 특별히 한국문학의 스페인어권 전파를 위해 충고해주실 말은?
시와 축구: 놀이에서 사회 고발로
호르헤 우르루띠아
마드리드 환 까를로스 대학 교수
세계 세르반떼스 문화원 연구소장
요한 호이징가는 그의 유명한 책 『놀이 하는 인간(Homo ludens)』이라는 저서에서 최초로, 가장 체계적으로 문화에 있어서 놀이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한다. 호이징가는 “놀이란 일상적인 생활이 아니다. 우리가 보통 생활이라고 하는 그런 삶의 일부가 아니다. 놀이는 차라리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오히려 어떤 자주적인 성향을 가진 일시적인 행위의 단계로 몰입하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내가 이 말을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놀이란 일시적으로 우리의 생활로부터 벗어나, 현실과의 거리를 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호이징가가 제대로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하나의 의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 현실과의 거리를 둔다는 것은 무슨 목적에서인가? 말을 바꾸면, 현실 도피와 현실 참여라는 인간에게 가능한 두 가지 행위나 의지는 하나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호이징가가 놀이의 성격과 구성 요소들을 언급할 때, “놀이란 가시적인 면에서 시간과 공간, 의미의 한계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며, 놀이는 물질적인 필요성이나 유용성의 단계를 떠나, 자유로이 받아들여지는 규칙에 따라 행하여진다.”고 말한다. “놀이에 상관되는 정신 상태는 흥분이나 열정이다. 말하자면, 놀이에 따라 하나의 쾌락이나 정화 역할을 하는 순수하게 축제적이거나 혹은 성스러운 것이 유희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놀이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별개의 것이라는 사고가 보인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를 쓰면 하나의 ‘기피나 소외(alienation)’이다. 그러나 독일 비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용어로는, 동시에 ‘허구성으로부터의 탈피, 멀리하기(distancement)’이다. 왜냐하면 그 흥분이나 열정은 자아의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스스로 인식하는 개체로부터 낯설어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필연적으로 자아로부터의 탈피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호이징가에게는―호이징가 뿐만은 아니겠지만―시나 예술이란 소위 놀이라고 하는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모든 시창작 행위라든가 노래나 말하기의 문장의 균형이나 율동적 구분, 정형시의 리듬 일치, 의미 숨기기, 어구의 인위적 창조 등은 그 성격 상 이런 놀이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이런 주장의 근거는 시어란 낯설게 하기나 격정적 상태의 언어, 일상 언어로부터 탈피한 언어라는 데에 기인한다.
사실 언어를 시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 시어를 말놀이라든지 유희적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어의 그런 성격을 놀이로 이해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 시적 요소의 사용에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의 기본 기준의 탈피를 통해 의미 증폭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현실을 오히려 더 많이 훌륭하게 포착하고 표현할 수도 있다.
호이징가가 ‘놀이’라는 것으로 말한 개념은 상식적 사고보다는 더욱 깊고 실제 사물들의 본질적 측면을 더욱 고려한 말이다. 그렇게 보면 이런 말이 가능하다. 즉 “이미지를 가지고 시어를 만드는 것은 놀이이다. 문체화된 양태로 정돈하여, 말들 속에 하나의 비밀을 내포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하나의 수수께끼에 답 맞추기 놀이를 하듯이, 다양한 이미지의 상징성을 찾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 ‘수수께끼’란 말에 주의하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바로 시를 말하면서, 시가 바로 그 수수께끼 표현의 의도에 말미암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알아맞히기 놀이의 수수께끼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기본적이고 본질적인인 질문을 시가 하고 있다는 뜻. 그렇다면 시가 가진 놀이 요소에는 전혀 피상적인 점이 없다. 어쩌면 호이징가는 그 ‘놀이’라는 용어의 의미학적 가능성을 가지고 놀고 있는― ‘놀고’라는 말에는 약간 필자의 의도가 있다―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장 형이상학적 시는 놀이보다는 존재의 수수께끼 풀기 쪽으로 더욱 기울고 있다.
유럽의 전위 문학 시기, 특히 그 20세기 20년대 스페인 문학은 전통적인 삶과 문학의 개념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는 젊음에 찬 생명적 열정으로 가득 찬다. 특히 시에 있어서, 말놀이가 유행을 넘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시들은 흔히 허튼 소리, 소리맞추기, 그림그리기, 말장난 등 소위 ‘맛있는 시체 놀이’(의미 없는 말장난)로 변한다. 예술의 진지성을 없애고, 경박성의 강화를 통해 딱딱하고 각질이 잡힌 의미를 없애려 한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경박하고 피상적인 표현에서 참 형이상학성을 찾으려 한다.
스페인 전위 문학의 진짜 선언은 철학자 호세 오르떼가 이 가셑이 쓴 『예술의 비인간화(1925)』이다. 그는 미학에 있어서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철학자에게 스포츠란 특권층만을 위한 오락이라기보다는(당시 스페인 20년대에는 돈 없는 무산계급들이 차는 축구 놀이 외에는 스포츠라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삶의 본질적 의미에 다가가는 가능성으로서의 생의 의미로 이해된다. 호이징가의 시대와 일치하는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같아서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리라. 거기에 세사르 마르꼬나다(시인, 화가)와 같은 공산당 당원의 활동 같은 것에도 감염된 사고이리라. 아르꼬나다는 말한다. “예술은 오직 예술이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정치여서는 안 된다. 사회학이나 도덕이어서는 안 된다.” 그의 이런 말은 예술을 스포츠처럼 스포츠 식으로 삶과 별개의 것으로, 흥분상태로 생각하라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오르떼가 이 가셑은 『우리 시대의 문제(1923)』라는 책에서 말한다. “예술을 엄숙하게 보는 대신 예술 본성 그대로, 하나의 오락이나 놀이, 취미로 본다면, 예술작품은 예술 본연의 매력과 광휘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물론 20년대의 스포츠에 대한 사고를 생각할 때, 현대의 대집단 구경꺼리로서의 스포츠와는 비교가 안 된다. 이미 1950년 호이징가는 이러한 성찰을 한다. “19 세기 말 이후 스포츠의 발달은 놀이라는 것이 갈수록 더욱 중요하게 생각되는 증후가 있다.(… )이렇게 갈수록 조직화되고 훈련된 놀이의 형태는 결과적으로 오래 가게 되면, 원래의 그 순수한 유희 성격을 잃게 된다.(…) 프로 선수의 자세는 이미 진지한 놀이스러운 행동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발적인 자유와 걱정 없이 놀기의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말한다. “현대 사회 기술이 집단적 자기 표시의 외적인 효과를 증대시키고 완벽하게 진행하는 바람에, 문화적 창조 행위의 성격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올림픽이나 미국 대학들 스포츠, 국제 챔피언십 등은 대단히 큰 선전효과를 누리고 있지만 말이다. 참석자들이나 관객들에게 대단히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는 반면에, 오래된 놀이 문화로서의 역할은 전무하거나 없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28년 5월 20일 일요일, 산딴데르 축구장에서 스페인 축구 최종전이 열렸다. 산 세바스티안 왕립 축구단과 바르셀로나 팀의 대결이었다. 바르셀로나 골키퍼 “쁠랏꼬”가 그 경기에서 부상을 당했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시인 라파엘 알베르띠가 이를 계기로 시를 썼다. 「쁠랏꼬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제목으로 『석회와 노래(Cal y Canto)』라는 시집에 들어있는 시가 그것이다. 스페인 1927년대의 가장 중요한 시인의 하나이면서, 그의 전위문학 시기이기도 한 이 때의 작품은 이 문지기 골키퍼를 영웅적 신화의 주인공으로 둔갑시킨다. 그 당시 예술 경향에서 늘 나오는 가치를 부각시켜, 고대 그리스의 전사처럼 그를 추켜올리고 있다.
쁠랏꼬는 헝가리 출신 골키퍼였다. 바르셀로나 팀에서 활동하는 금발의 청년. 산딴데르 축구장은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다. 당시 추구 경기 때는 틀림없이 관중석에서 그 푸른 바다가 보였으리라. 기상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즐거운 일요일은 아니었다. ABC 신문이 다음날 일간지에 발표한 축구 기사를 보면 그 날 바람이 많아 경기에 영향을 미쳤다고 나와 있다. 그 시는 이렇다:
아무도 잊지 못한다, 쁠랏꼬,
아무도, 아무도 잊지 못한다
헝가리의 금빛 곰 한 마리.
바다도, 네 앞에서
너를 구하지 못해 당당거리며 뛰고만 있던 바다도
비도 너를 잊지 못한다, 바람도, 그 때 가장 위세를 부리던 그 바람도.
혹시 이해가 잘 안 된다면, 당시 산 세바스띠안 왕림 축구단은 하얗고 푸른 줄무늬가 있는 셔츠를 입고 있었고, 바르셀로나 팀은 진홍빛 빨갛고 푸른 줄무늬 셔츠를 입었다. 축구 경기 중에 쁠랏꼬는 모든 번개를 붙잡은 피뢰침처럼, 호랑이 맹수 같은 민첩성을 가진 골키퍼로, 골문을 철통 수비하는 자물쇠 역할을 했다. 왕립 축구팀의 센터포드 앞잡이인 촐린이 공을 몰고 들이닥치자 바로 그 발밑에 몸을 던졌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피를 철철 흘렸다. 결국 경기에서 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그 사고로 대단히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뒤 대단히 어려운 경기를 해야만 했다:
바다도, 바람도, 쁠랏꼬여,
피의 금발 쁠랏꼬여,
먼지 속의 골대 문지기,
피뢰침.
잊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대기 위를 나르는 푸르고 하얀 셔츠들,
왕권의 셔츠들이
적으로 날아와, 너를 쓰러뜨려 끌고 갔다.
쁠랏꼬여, 먼 나라 쁠랏꼬여,
무너진 금발의 쁠랏꼬여,
다른 나라의 풀밭에 무너져 불타는 호랑이여. 너는 열쇠다!
너는 황금빛 문 앞에 무너진 황금빛 열쇠!
아무도 잊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잊지 못한다, 쁠랏꼬여.
하늘도 등을 돌렸다.
푸르고 진홍빛 셔츠들이 펄럭였다,
바람 하나 없이, 빛을 잃고…….
바다는 눈을 돌리고
넘어졌다, 아무 말이 없었다.
구멍 마다 피를 흘리며,
쁠랏꼬여, 너를 위하여 피를 흘리며, 너의 헝가리 피를 위하여,
너 없이는, 너의 활력, 너의 막기, 너의 뛰어오름 없이는
깃발들이 공포에 찼다.
아무도 잊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잊지 못한다, 쁠랏꼬여.
그러나 후반전에서 쁠랏꼬가 머리를 붕대로 싸매고 경기장에 나타난다. 관중들을 환호성을 질렀다. 자기 팀,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더욱 신났다:
바다가 돌아온 것.
고삐 풀린 불길들이
발 빠른 열개의 깃발에
붙었다.
바람이 돌아온 것.
희망의 가슴으로 돌아온 것.
네가 돌아온 것.
영웅적 푸르름과 진홍빛이
핏줄에 바람을 보냈다.
날개들, 하늘스런, 하얀 날개들이 날개를 부러뜨렸다,
깃털도 없이 모두 져서, 풀밭을 하얗게 횟가루로 물들였다.
그리고 바람은 다리가 있었다,
몸통이, 팔이, 머리가 있었다.
그리고 쁠랏꼬여, 모든 것은 너를 위하여
헝가리의 금발 쁠랏꼬를 위하여 축배!
너를 위하여 축배, 네가 돌아왔음으로,
너는 싸움에서 잃어버린 힘을 되찾아주었고
바람은 적의 문에 구멍 하나를 뚫었다.
아무도, 아무도 잊지 못한다.
한 골. “바람은 적의 문에 구멍 하나를 뚫었다.” 신문 <엘 솔>에 나온 기사를 보면, “삐에라가 안으로 들어가고, 아리야가의 머뭇거리면서 사스뜨레에게 패스를 늦게 했다. 그 때를 이용하여, 에이사기레는 좀 늦게 출발 볼을 잡지 못한다. 9분이 지나고 있었다.”:
하늘, 바다, 비가 그것을 기억한다.
문장들.
황금빛 문장들과, 단춧구멍에 낀 꽃들,
닫힌 꽃들, 너를 위하여 열렸다.
아무도 잊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잊지 못한다. 아무도, 쁠랏꼬.
그 마지막도: 네가 나올 때,
피의 금빛 큰 곰,
등에 자빠진 깃발을 업고 축구장으로 나올 때.
오 쁠랏꼬, 쁠랏꼬,
너는 그토록 멀리 헝가리에서 멀리 있는데…
어느 바다가 너를 보고 울음을 참을 수 있었으랴?
아무도 잊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잊지 못한다, 아무도, 아무도.
안또니오 갈예고 모렐 교수는 당시 이 시를 연구하고 이렇게 쓴다. “쁠랏꼬는 그 당시의 신문 기사에 오직 산문으로 전해진 이름에 불과했다면, 쁠랏꼬는 어느 하오의 순간적인 영웅이었을 뿐이리라. 그러나 그 영웅의 이름은 때맞은 노래를 부른 시인의 서정을 통해 그 흔적으로 오늘까지 전해진다.” 알베르띠 덕택에 쁠랏꼬는 우리 기억 속에 남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라파엘 알베르띠의 시가 스페인 시 중에서 축구 골키퍼에 바친 유일한 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실 다른 작가들이 스포츠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고, 특히 축구에 대하여 글을 쓴 것이 하나 둘은 아니다. 40년대에 태어난 시인 안또니오 에르난데스는 산문이지만 레알 베띠스 팀에 대하여 많은 글을 썼다. 세비야 시의 인기 팀 말이다. 다른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은 축구 게임에서 사회적이고 감동적인 테마를 찾았다. 그러나 내게 흥미 있는 것은 소위 1936 세대의 시인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습작기의 시에서 「골키퍼에 대한 애가」를 썼다는 사실. 헤라드 디에고 식의 신바로크 시풍을 연습할 때 일이다.
이때는 축구 게임의 콜 키퍼들 중 하나가 골의 골대 기둥에 맞아 잔디 장에 쓰러져 죽은 일이 벌어졌다. 그 때 에르난데스는 알베르띠의 시를 기억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아직 선배를 시를 모방하는 시인이었으니까,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하여 꼭 한 번 쓰고 싶었으리라. 센터포드가 잘 쏜 공을 골키퍼가 잘 잡는다. 시인은 사진사처럼 순간 스냅사진으로 잘 잡아 묘사한다.
멋진 슛을 차면서 미풍에
그 모습의 지상의 표면을 잘 감싸서
찾는데, 이런! 네가 찬 공은 물고기 같이 빠른
재빠른 손길에 잡히고 말았다.
너의 스포츠 역사의 가장 아름다운
그 순간을 한 사진사가 갑자기
잡았는데, 그 바람에 너는 바람 속에 넘어지고
너는 승리를 놓치고,
야자수 부채질이 너에게 영광의 바람을 보냈다.
소름끼친 사건은 ‘이 재빠른 손길’, 훌륭한 공 잡기가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 오죽하면 그러다가 골대에 부딪쳐 머리가 깨졌으니까. 이런 거리 두기, 놀이의 거리 두기에서의 이 두 가지 상반된 의사들은 도대체 무슨 목적을 가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도피일까 사회 참여속일까.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스포츠만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스포츠를 다루면서 어떻게 스포츠를 대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우리는 전위문학에서, 오르떼가 이 가셑이 ‘예술의 비인간화’를 말하고 있는 시점에서, 시인들이 스포츠 놀이를 시의 놀이로 함께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때는 서사시의 영웅들의 성격을 갖다 붙이면서, 바로크적 복잡성에 버금가는 텍스트 만들기 놀이로…….그러나 40년대 이후는 2차대전이후 (스페인에서서는 내란) 분위기에서는 실존주의적 사고가 판치고 문학 놀이 말놀이는 배척되었다. 여기에서 스포츠는 이제 장난스럽게 다루어질 소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회적 의식이 주요 명제로 떠올랐다. 그 때 레오뽈도 데 루이스는, 스페인 내전에 싸운 경험이 있었던지라, 그 후 독재의 억압을 살고 있었기에, 「겸손한 축구」라는 시를 쓴다.
겨울 햇살 아래 버려진 노란 자투리 농토가
그 자비와 따스함을 사물들에게 바친다,
푸르죽죽한 유리창에서 거짓 빛들을 뽑아낸다,
환상적인 꿈의 금강석들, 그 사이로
희망과 고통에 상처 난 개들이 지나간다.
14음절 4구절에 11음절 하나로 끝맺는다. 그 장소를 묘사한다. ‘자투리 농토(desmontes)’는 도시 속에 내버려진 농토 나머지 쪼가리. 이것은 이상한 땅의 모습, 조각 조각난, 반은 들이고 반은 쓰레기통인 그런 곳, 그런 데서는 깨진 병들이나 배고픈 개들이 어슬렁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곳에서 진지하게 축구를 한다. 일요일 아침, 돈 없는 젊은 프롤레타리아들, 도시에 널려있는 공장 조수들이나 견습공들이 추구를 한다. 생존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족속들:
삐쩍 마른 소년들,
닳고 닳은 구두를 신은 창백한 노동자들이
잿빛 옷들을 걸치고 스포츠를 하러 간다
스포츠라기보다 자신들도 저 아픈 공이라는 것을 배우러 간다
삶의 거대한 축구선수들이 발끝으로 끌고 뭉개는.
겉으로 보기에 앞 연의 모양을 그대로 그림으로 흉내 낸 것 같은 구도이다. 앞에 7음절이 하나 나가고, 다음 7음절과 11음절 섞은 구절이 나가고, 결국 리듬 상으로는 4개의 14음절구와 하나의 11음절구. 즉 앞 연과 똑같은 형태이다.
첫 연이 공간 묘사에 상당한다면 ,두 번째는 인물형들, 세 번째는 시간과 그 의미를 짚는다.
일요일 아침. 지치고 지친 육신이
그 먼저 피로를 서서히 하품하듯 뱉어낸다
하나의 초라한 꿈, 유리창에 반짝이는 햇살 같은 것들이
영혼 속에서 기쁨의 불꽃들을 꺼내 든다.
네 구의 14음절 시구들. 이런 형식은 전시대 탐미주의 시의 시구들이었다는 생각을 잊지 말자. 그런 시구가 여기서는 놀라우리만큼 다른 사회적 테마로 사용되고 있다.
놀이가 시작된다. 호이징가가 말하듯 놀이 속에서는 선수나 놀이꾼들이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 자신들의 가난함으로부터 꿈의 세계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하나의 희망을 빚는다. 14음절들이 줄어들고 11음절들이 지배한다. 그리고 서로 같지 않는 시구들이 나온다.
희망으로 바느질한 살갗 아래
희망의 바람으로 부풀린,
어두운 꿈과 슬픈 웃음으로 피부 아래,
한번도 축구장의 햇살 앞으로
나아가보지 못한 빛바랜 색깔들이
오고 가고 또 오고, 셔츠들을 올리고
자기들 꿈의 색깔의 공간을 쫓아다닌다.
시인은 이들 젊은이들이 어디에서부터 운동하러 나왔는가를 상기할 수밖에 없다. 즉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들은 어떻게 사는가.
측량할 수 없는 시간의 우물로부터 시간 시간은
올라온다, 그림자들처럼, 노동이니
고통, 빈곤, 형편없는 음식들,
고무판 위에 상처 난 접시 위에…
깜깜한 갱 속, 그 밑바닥, 밤이면 밤마다
뼈가 녹아드는 침대,
눈물 없는 침묵의 통곡이 무너진 뼈.
여기 피로가 올라온다,
행과 불행을 귀머거리처럼 실천하는 운명,
돌보는 사람 없던 어린시절, 가난한 학교, 집안을
겨우 따스하게 하던 화롯불.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는 다시 11음절이 지배적이다. 시인은 다시 젊은이들이 축구하는 놀이터에 시선을 모은다. 그 곳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투쟁을 상징하는, 사회의 가장 중요하고 고통스러운 실존이 하나로 정화되는 용광로로 비쳐진다.
모든 것은 일요일의 양지로 온다, 혼란스럽게
잿더미처럼, 멀리 ,뛰어오르는 가죽 볼 속에서,
윗도리의 빛바랜 색깔들 사이에서,
희망의 모습을 한 그 볼을 좇는
다리들 사이 모두 엉겨 붙어 하나가 된다.
스포츠에서 스포츠 테마는 고대 그리스의 핀다로로부터 시작된다. 그때 스포츠인들은 모두 영웅 대접을 받았다. 오늘날 시인들이 핀다로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시나 스포츠는 몇 세기 시대를 따라 의미를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면이 시인에게 관심이 없으랴. 시인은 항상 어디서나 생존과 실존의 수수께끼를 표현하는 수수께끼의 답을 찾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