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호국의 달 특집
②임용한 소장·황인희 작가에게 듣는 6·25전쟁과 평화 이야기
조선일보 김성훈 기자 ksh1004@chosun.com 오누리 기자 nuri92@chosun.com
입력 : 2021.06.14 03:00 / 수정 : 2021.06.17 17:19
戰勢<전세> 바꾼 인천상륙작전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
국군과 16國 유엔군 평화 위해 싸웠죠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4세기 로마의 군사전략가 베게티우스의 말이다. '6·25전쟁'이 남긴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다.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6·25전쟁의 역사와 의미를 배우고 되새기고자 전문가 두 명과 어린이 명예기자들이 지난 9일 온라인으로 만났다. 한국역사고전연구소 임용한 소장과 역사 그림동화 '6·25가 뭐예요?'의 저자 황인희 작가 그리고 정재욱(서울 성신초 5)·채연아(경기 오산 운산초 4)·한도현(대구 매동초 1) 명예기자가 함께했다.
6·25전쟁은 왜 일어났어요?(연아)
"1945년 해방 후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오면서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38선이 그어졌어요. 그 결과 1948년에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세워졌죠. 북한은 남한까지 공산화하고 싶어 했어요. 제일 빠른 방법이 무력을 써서 나라를 빼앗는 것이라 생각했던 거죠."(황 작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기습적으로 남침(南侵·남쪽으로 쳐들어옴)했다. 국군은 소련제 무기로 무장(武裝)한 북한군에 밀려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고, 40여 일 만에 낙동강 전선(戰線)까지 밀려난다. 더 밀리면 우리나라가 사라질 수도 있는 위기의 순간, 유엔은 대한민국을 도울 것을 결의하고 유엔군을 파병한다.
국군과 유엔군은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나요?(재욱)
"유엔군 맥아더 사령관을 중심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죠. 이를 통해 상황을 단번에 바꿨습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남북으로 길어서 인천을 차지하면, 낙동강까지 내려온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현대 전쟁은 탄약, 석유 등의 물자가 없으면 싸울 수 없거든요."(임 소장)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고,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북진해 그해 10월 26일 압록강까지 도달했다.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곧 통일의 날이 올 것만 같았다.
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하게 됐어요?(연아)
"1950년 10월 중순부터 중국 중공군이 '인해(人海) 전술'로 밀고 내려왔어요. 최대 70만 명으로 추산되는 어마어마한 군대가 바닷물처럼 쏟아져 내려왔고 국군과 연합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요."(황 작가)
이후 전쟁은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고를 반복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停戰協定)을 맺는다. 정전협정 전까지 영토를 한 뼘이라도 더 늘리고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휴전선 인근에 '백마고지' '후크고지' 같은 주요 전적지들이 생겨났다. 정전 후 한국은 미국과 '한미(韓美)상호방위조약'을 맺으며 국가 안보를 강화했고, 오늘날 한미 동맹의 기틀을 마련했다.
전쟁이 다시 없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도현)
"강한 나라를 만들고 국제 관계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강하다는 게 주먹만 센 것을 뜻하지 않아요. 나라가 강하다는 건 국민이 강하다는 거예요. 자원이 많고 군대가 강해도 국민이 욕심과 향락에 빠져 살면 그 나라는 망해요. 약한 나라로 시작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준비했던 나라들은 살아남았고요. 수많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임 소장)
▲ 9일 비대면으로 진행된 6·25전쟁 관련 대담 장면.
유엔군 195만 명 참전… 국제기구, 의료진 등 지원도
6·25전쟁 당시 유엔 파병국은 총 16국이다. 미국, 영국, 호주, 에티오피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콜롬비아, 프랑스, 필리핀, 터키, 룩셈부르크, 태국, 그리스, 남아공, 벨기에가 군대를 파견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유엔군은 약 195만 명 참전했고 3만8000명가량 전사(戰死)했다. 유엔 회원국과 국제기구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독일 6국이 의료진 또는 병원선(船) 등을 지원했다. 38국과 유엔 기구 9곳은 식량 제공 및 민간 구호 활동에 참여했다. 한편 부산에는 1951년 세워진 유엔기념공원이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유엔군 묘지로, 6·25전쟁 당시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이 직접 조성했다. 현재 유엔군 장병 2300명의 유해가 묻혀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國軍포로들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붙잡혀 돌아오지 못한 국군 포로들이 지금도 북한에 생존해 있다. 국방부 통계 등에 따르면 국군 참전 연인원은 1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전사자는 13만 7899명이고 사상자는 약 62만 명이다. 유엔군사령부는 전쟁 중 포로로 붙잡히거나 실종된 한국군을 8만2000여 명으로 추산했다. 북측은 이 중 8300여 명만 돌려보냈다. 1994년 조창호 소위가 살아 돌아오기 전까지 국군 포로의 존재는 잊혀왔다. 현재 북한에는 국군 포로 300~500여 명이 살아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목숨을 걸고 탈북해, 귀국한 국군 포로는 80명. 이들 중 18명만 생존해 있다. 국군 포로는 북한에 강제 억류돼 강제 노역, 가혹 행위 등을 받아왔다. 최근 탈북 국군 포로가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승소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인터뷰 전문은 어린이조선일보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어린이조선일보 명예기자들이 임용한 소장, 황인희 작가와 대담한 내용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면에 싣지 못한 내용을 함께 담았다.
연아: 6·25전쟁은 왜 일어났어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나라는 일제 시대였지요. 1945년 해방 후 북한에는 소련군이, 남한에는 미군이 들어오면서 한반도 허리를 가르는 38선이 그어졌어요. 그 결과 1948년에 북한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한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세워졌죠. 북한은 남한까지 공산화하고 싶어 했어요. 제일 빠른 방법이 무력을 써서 나라를 빼앗는 것이라 생각했던 거죠. 1949년에 미군이 철수하자 이때다 싶어서 그다음 해인 1950년 6월 25일에 쳐들어온 거예요.” (황 작가)
연아: 전쟁 아닌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요?
“북한은 대화로는 공산화 통일이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북한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 남한보다 군사력이 더 뛰어났어요. 전쟁은 양편의 힘이 비슷할 때보다 한쪽의 힘이 강하고 다른 한쪽이 약할 때 일어나요. 북한은 남한의 힘이 약하니깐 전쟁으로 한반도를 단번에 차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황 작가)
재욱: 북한은 남한이 먼저 침략했다고 주장한다던데요. 그 이유가 뭐예요?
“전쟁은 최후의 선택이고 정당한 방법이 아니에요. 전쟁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게 좋은 건데, 전쟁을 시작한 국가는 전쟁을 정당화시킬 근거를 찾아요. 역사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많은 국가가 저쪽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우리도 공격한 거라고 주장했거든요.
‘누가 우연히 총을 쏴서 전쟁이 시작됐다?’ 이건 대부분 거짓이에요. 수만 명이 넘는 군대가 전쟁을 벌이려면 엄청난 준비 기간이 필요해요. 1개 사단이 전쟁 준비를 하려면 15일에서 한 달간 준비해야 한다고 해요. 북한이 남한을 공격해온 ‘남침’(南侵)이 맞아요. 이건 지금 전 세계가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이에요. 북한에선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켰다’고도 주장하는데, 이렇게 하면서 미국과 한국에 책임을 돌리려는 거예요.” (임 소장)
도현: 세계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를 도와줬다면서요?
“유엔이라는 국제기구가 1950년 6월 28일에 대한민국을 도와줘야겠다고 결정했어요. 전쟁 3일 만에, 그렇게 빨리 결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엔에서 우리나라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적 나라로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유엔의 도움으로 세워진 나라를 쳐들어오니깐, 유엔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던 거죠. 유엔 결의에 따라 군대를 보내준 나라가 16개국이에요. 6개국이 의료 지원을, 38개국이 물자 지원을 해줬어요. 총 60개 나라가 우리나라를 도와주고 지지해준 거예요. 이 도움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이렇게 공부할 수 있게 된 거랍니다. 우리나라를 도와준 국가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간직해야 해요.” (황 작가)
재욱: 북한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전쟁 초반 위기를 맞았다고 들었어요.
“사실 6·25전쟁에서 기습당한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우리군이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거든요. 당시 북한군은 생각보다 준비가 굉장히 잘 돼 있었어요. 전쟁 초반 국군은 남쪽으로 계속 밀려났어요. 미국도 본토에서 군대를 보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일본에 있는 미군들은 훈련이 부족한 상황이었고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나면서, 한 곳만 뚫려도 부산까지 모두 뺏길 뻔한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미군과 유엔군이 오게 된 거죠.” (임 소장)
재욱: 국군과 유엔군은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어요?
“전쟁은 희생을 최대한 적게 하고 이기는 게 중요해요. 우리 편이 한 명이라도 덜 죽고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중요해요. 유엔군은 효과적이고 빠르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어요. 유엔군 맥아더 사령관을 중심으로 이 작전을 성공시켰죠. 이를 통해 상황을 단번에 바꿨습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남북으로 길어서 인천을 차지하면, 낙동강까지 내려온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겁니다. 현대전쟁은 탄약, 석유 등의 물자가 없으면 싸울 수 없거든요.” (임 소장)
“1950년 9월 15일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28일에 서울을 되찾아요. 북쪽으로 후퇴하는 북한군은 전투 능력을 상실한 패잔병 수준이었어요. 서부전선의 경우 한반도의 북쪽 끝인 압록강까지 올라갑니다. 압록강에 도착한 우리 군인이 수통에 물을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 국민은 ‘드디어 통일의 꿈을 이루겠다’고 생각했어요.” (황 작가)
연아: 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휴전하게 됐어요?
“1950년 10월 중순부터 중국 중공군이 ‘인해(人海) 전술’로 밀고 내려왔어요. 최대 70만 명으로 추산되는 어마어마한 군대가 바닷물처럼 쏟아져 내려왔고 국군과 연합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어요. 70만, 실감이 안 나는 숫자죠? 우리나라 전체 군대가 육해공 다 합쳐도 60만이 채 안 돼요. 이보다 훨씬 많은 군대가 한꺼번에 내려온 거예요. 사람이 총알처럼 쏟아져 내려왔다고 표현한 기록도 있어요.” (황 작가)
“북한은 처음에 3달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남한을 너무 쉽게 봤던 거죠. 전쟁을 빨리 마치고 광복절엔 파티를 벌이려 했는데 3년이나 끌어버린 거예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또 한 번 뺏겼고, 두 달 만에 다시 찾습니다. 이후 경기도와 강원도 부근에서 계속 전투가 벌어지면서 밀고 밀리고를 반복했어요.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인명 손실을 겪으며 3년이 흘러간 거예요. 북한군은 대부분의 전력을 잃었고, 중공군도 전력손실이 컸습니다. 미국도 그사이에 대통령이 바뀌었어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거공약 중 하나가 6·25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것이었어요.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停戰協定)을 맺게 되는데, 정전협정을 맺기 전까지 휴전선 근처에선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어요. 파주, 철원, 인제 등 휴전선 인근 지역에 가면 많은 전적비, 기념비가 있어요. 6·25전쟁 때 이 지역에서 치열하게 싸웠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죠.” (임 소장)
도현: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어떤 것들이 있어요?
“전쟁의 가장 큰 피해는 결국 사람의 삶이 망가지고 생명을 잃는 데 있어요. 도시, 집, 공장 등 많은 것들이 파괴됐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것들을 빨리 복구했어요. 사회와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고 성장했지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바로 인명 손실이에요. 한국군 약 13만8000명, 북한군 약 50만 명이 전사했어요. 그때 인구는 지금의 반도 안 되니깐, 지금 인구로 환산하면 두 배가 넘는 인명 피해가 발생했던 거죠. 중공군은 15만 명에서 최대 40만 명까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한 안타까운 것은 민간인 희생이 너무 컸다는 거예요. 남북한 다 합쳐서 250만 명이 넘는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거로 추정돼요. 전쟁이 끝난 뒤 사람이 죽은 것도 슬프지만, 이산가족 문제도 큰 슬픔이에요. 사실 우리 집도 이산가족이에요. 많은 이들이 전쟁 중 가족이 죽거나 잃은 경험들이 있지요. 반세기 이상 많은 사람과 가족에게 큰 상처 남긴 전쟁이었어요.” (임 소장)
재욱: 6·25전쟁이 남북한 어린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전쟁으로 피해를 본 사람 중엔 남자보다도 어린이와 여자들이 많았어요. 부모가 죽거나, 부모를 잃어버리면서 수많은 고아가 발생했어요. 고아원 등에서 살면서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지요. 그런 분들이 지금은 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고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을 해서 오늘날 어린이들의 삶은 좋아졌어요. 그런데 북한의 경우 나라가 많이 가난해졌어요. 어린이들이 심지어 굶어 죽기도 하고, 구걸하러 다녀야 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어요. 6·25전쟁 때 자유대한민국으로 통일됐더라면, 북한의 꽃제비(일정한 거주지 없이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북한 어린이들) 같은 아이들도 다 우리처럼 따뜻하고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황 작가)
연아: 오늘날 우리나라의 군사력과 안전 상태는 어떤가요?
“우리나라 군대는 세계적으로 평판이 높아요. 장교나 부사관, 특수부대 병사들 모두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뭘 해야 한다고 할 때 단합을 잘해요. 국군도 이런 점에서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하면서 군대 수준도 높아졌어요.
중요한 건 우리 주변 나라들이 미국, 일본, 소련, 중국인데 군사력이 1~4위에 해당하는 강한 나라들이라는 거예요. 역사를 보면 아무리 강한 나라여도 ‘편하게 살자’, ‘쉽게 살자’하는 나라는 금방 망했어요.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렵게 시작했어도, ‘주변에 강한 나라들이 많구나’ 생각하면서 긴장하고 준비하면 절대 망한 일이 없어요. 주변에 강대국이 있다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여기서 더 현명하게 우리를 성장시키면 강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 수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 부모님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한국이 빠르게 성장해왔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 우리 집이 잘사는 편이었는데 내 방, 내 책상을 가져보지 못했거든요. 그 당시에 다들 그랬어요. 요즘 어린이 여러분은 대부분 자기 방, 자기 책상 갖고 있잖아요. 물질적 여건은 충분하지요. 하지만 ‘난 여기서 만족해’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 주변에 나보다 강한 사람이 많고, 내가 해야 할 일도 많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늘 긴장하고 노력해야 해요. 그래야만 우리나라의 안전과 미래가 지켜질 수 있어요.” (임 소장)
도현: 6·25전쟁 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오지 못한 국군 아저씨들이 있다면서요?
“전쟁 땐 포로가 생겨요. 대부분 부상하였을 때 생겨나요. 제네바 국제협정에선 전쟁이 끝나면 국군 포로들을 모두 자기네 나라로 돌려보내도록 정하고 있거든요. 6·25전쟁에서 국군 포로의 수가 8만에서 12만 명으로 추산돼요. 그런데 북한은 이 중 8300여 명만 돌려보냈어요. 북한이 국군포로를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남북이 분단되고 많은 사람이 북한에서 못 살겠다며 남한으로 내려왔거든요. 북한에는 나중에 일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북한은 이들을 일꾼으로 부려 먹기 위해 안 돌려보낸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돌려보내라고 얘기하면 ‘북한에 남고 싶어 하는 사람만 남겼다’며 돌려보내지 않고 있어요.
1994년에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가 탈북해서 귀환했는데요. 이분 증언에 따르면 북한에 10만 명이 넘는 국군포로가 있었다고 해요. 처음에 남한으로 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라 해서 손들고 나왔더니 총으로 쏴서 죽였다고 합니다. 그럼 누가 남한에 가고 싶다고 손들 수 있겠어요. 이렇게 손 안 든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남았다고 표현한 거예요.
지금까지 80분 정도의 국군포로가 남한으로 탈북해오셨어요. 6·25 때 20살이라고 해도 지금은 아흔 살이 넘으셨겠죠. 많은 분이 돌아가셨고 18분 정도가 살아 계세요. 현재 북한에는 300~500여 명의 국군 포로가 살아계실 것으로 추정돼요. 우리 정부가 빨리 요청해서 그분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황 작가)
도현: 전쟁이 다시 없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황금, 보석이 잔뜩 있다고 가정해봐요.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누군가가 와서 가져가겠죠. 최소 10명에 한 명은 나쁜 사람이 있어서 이런 보석이 있으면 주인이 아닌데도 집어 가요. 착한 사람도 길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으면 주워가고 싶잖아요. 누가 지키는 사람이 있거나, CCTV가 있거나, 내가 주워갔다가는 처벌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안 가져가겠죠.
전쟁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나라를 잘 지키고 있고,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강한 나라를 만들고 국제관계를 튼튼히 해야 합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라도 혼자서는 나라를 지킬 순 없거든요. 국제관계라는 게 사실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거예요. 국제관계 튼튼히 만들려면 힘도 있어야 하지만, 현명해야 해요. 어릴 때부터 세상에 대한 호기심 많이 갖고, 위인전도 많이 읽고, 똑똑하면서도 건강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 개인뿐 아니라 나라를 튼튼하게 만드는 길이에요.
강해지면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했는데 강하다는 게 주먹만 센 것을 뜻하지 않아요. 세상 많은 나라가 강하다가도 망하고, 약하다가도 강해졌어요. 나라가 강하다는 건 국민이 강하다는 거예요. 국민이 강하다는 것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 그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걸 말해요. 동시에 그런 능력 있다고 해도 생각이 건강하지 않으면 안 돼요. 세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의 능력을 갖출 뿐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돼야 해요. 그런 사람이 많은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는 거예요. 자원이 많고 군대가 강해도 국민이 욕심과 향락에 빠져 살면 그 나라는 망해요. 약한 나라로 시작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준비했던 나라들은 살아남았고요. 수많은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요. 여러분 각자가 꿈을 이루는 사람이 되고, 남들이 보기에도 올바른 사람이 됐으면 합니다.” (임 소장)
끝으로 어린이조선일보 명예기자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우리 어린이들이 6·25의 역사를 꼭 기억해줬으면 해요. 북한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 역사를 절대 잊지 말아 주세요. 70여 년 전 일이니깐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 아픈 역사를 기억해주세요. 그래야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수 있어요.
또 참전 16개국을 비롯해 우리나라를 도와준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있어요. 감사한 마음 늘 가졌으면 하고, 다른 나라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도 돕는 자세를 갖췄으면 좋겠어요.
끝으로 지금도 북한은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기회만 있으면 대한민국에 다시 쳐들어와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고 싶어 해요. 못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강하기 때문이에요. ‘연평해전’,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사건’ 모두 북한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려는 6․25의 연장이라고 보면 돼요. 북한은 여전히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요. 강한 국력을 갖기 위해선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노력해야 해요.” (황 작가)
“어린 시절 가장 중요한 건 꿈을 갖는 거예요. 진정 꿈을 가지는 사람은 드물어요.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회피하는 사람이 많아요. 늘 꿈을 갖고, 그 꿈을 위해서 핑계 대지 말고 열심히 공부했으면 해요.
전쟁사를 보면 한 사람이 백 명, 천 명을 살려요. 그런데 그 사람이 평소에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사람이냐 그렇지 않았어요. 그냥 항상 건전하게 생각하고, 동료들 먼저 생각하고,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일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하고 행동했던 사람이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서도 모두 훌륭한 사람이 돼요. 역사가 이걸 증명하니깐 여러분도 늘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세요.” (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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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100전 10승이라고 했습니다.
평화를 원커든 전쟁을 대비하라
과거와 현재를 통해 진리가 통한다는 것을 모르면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