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경상북도 문경

[비타민C]

중부내륙고속도로 문경새재 나들목을 빠져나가자마자 문경읍 시가지를 발아래 두고 기세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산을 볼 수 있다. 문경의 진산(鎭山)으로 일컬어지는 주흘산(해발 1106m)이다. 양쪽 귀를 추켜세우고 선 기세가 주변을 압도한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조령산(1026m)과 마주 보고 있다. 백두대간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산세다.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 백두대간 마루를 넘는 고개가 문경새재다.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산물과 사람이 오르내리던 중요한 길목이었다. 과거길에 나선 선비들이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어가면 죽죽 미끄러진다고 해서 지명에 ‘기쁜 소식을 듣는다(聞慶)’는 뜻이 담긴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오르곤 했다고 전해진다.

문경새재, 구비구비 선인들의 정취 품은 영남의 관문 슬산

문경새재는 옛날엔 ‘새도 날아 넘기 힘들다’고 할 만큼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지만 지금은 맨발로도 거니는, 아름답고 운치 있는 흙길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조곡관(제2관문)을 지나 조령관(제3관문)까지 이어지는 6.5㎞의 새재 옛길은 국가 명승(제32호)으로 지정될 만큼 경관이 뛰어나다.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진을 쳤던 이진터, 신·구 경상감사가 만나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교귀정, 길손들의 객사였던 조령원터와 주막, 문경새재아리랑비 등 선인들의 자취와 유적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주흘관 안쪽에는 조선시대 궁궐·기와집·초가 등 120여 채로 이뤄진 사극 촬영장, 새재 입구에는 옛길박물관과 자연생태전시관·사계절 썰매장 등 보고 즐길 거리도 많다. 매년 4~10월 보름을 전후한 토요일에 1관문~2관문(왕복 6㎞)를 걸으며 문화 이벤트를 벌이는 ‘문경새재 과거길 달빛사랑여행’ 행사도 열린다. 짚신을 신거나 맨발로 느긋하게 옛길을 걸으며 다듬이소리·가야금 병창·통기타 등의 공연도 즐기고 호롱불 밑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도 쓸 수 있는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이벤트가 진행된다.  

1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전경. <문경시 제공> 2 문경의 ‘진산(鎭山)’으로 일컬어지는 주흘산. 문경새재를 지키고 있는 수문장이다. <문경시 제공> 3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 전경. <문경시 제공> 4 관광객들이 철로자전거를 타며 즐거워하고 있다. 과거 석탄을 나르던 문경선·가은선 철로가 관광용 철로자전거코스로 탈바꿈해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문경시 제공>  5 진남교반 전경. 영강의 물줄기와 오정산의 산줄기가 태극 형상으로 어우러진 가운데 철교와 교량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문경시 제공>

진남교반 절경 속에 감춰진 ‘한국의 차마고도’ 토끼비리

옛날 영남대로를 따라 문경새재로 오르기 위해선 ‘토끼비리’(명승 제31호)를 지나야 했다. ‘비리’는 ‘강가나 바닷가에 있는 벼랑’을 뜻하는 ‘벼루’의 사투리다. ‘한국의 차마고도’로도 일컫는 좁은 벼랑길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에 쫓기다 길이 막혀 헤매고 있을 때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는 것을 좇아 길을 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지나면서 석회암 바닥이 닳아 대리석처럼 반들반들 윤이 난다. 영남대로 옛길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고모산성에서 날개처럼 뻗어나간 석현성벽이 끝나는 지점부터 토끼비리가 이어진다. 고모산성은 4세기 말 신라가 영토 확장을 시도하던 시기에 축성됐다. 이곳에서는 경북 8경중 으뜸으로 꼽히는 진남교반(마성면 신현리)을 조망할 수 있다. 진남교반은 영강의 물줄기와 오정산의 산줄기가 태극 형상으로 어우러진 가운데 철교와 3개의 교량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철 따라 변하는 모습이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고 해서 ‘문경의 소금강’으로도 불린다.

백두대간이 빚어낸 명산마다 살아 숨쉬는 역사의 숨결　

문경은 산세가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문경을 지나는 백두대간이 지도상 거리로 110㎞에 이른다. 방향이 여러 번 바뀌고 암릉이 자주 나타난다. 소백산을 지나 지리산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은 문경에서 많은 명산들을 빚어놓았다. 전국 100대 명산 가운데 4곳(주흘산·대야산·희양산·황장산)이 문경에 있다. 산마다 비경을 자랑하는 계곡과 수많은 문화유적을 품고 있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중간쯤에 우뚝 솟아있는 산이 황장산(1077.3m)이다. 이 산 차갓재에는 이 지역 산악회에서 세운 ‘백두대간 남한 구간 중간 지점’이라는 표지석이 장승과 함께 세워져 있다. 골짜기가 깊어 원시림이 잘 보전돼 있고 암릉과 암벽이 빼어나다. 고구려의 성으로 추정되는 작성(鵲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산이 위치한 동로면은 오미자로 유명하다. 생달1리에는 오미자청을 만들며 농·산촌을 체험할 수 있는 오미자체험마을이 있다. 이 곳에서 시내 쪽으로 차로 10여분 가면 도로변에 황희 정승 후손들이 500년을 빚어온 명주 ‘호산춘’ 제조장(산북면 대하리)이 나온다. 호산춘은 장수 황씨 사정공파 종택에서 전승돼온 솔향 그윽한 가양주로 이 곳에서만 구할 수 있다.

주흘산은 백두대간을 살짝 비켜서서 학이 날개를 펼치며 날기 직전의 모습을 하고 있다. 20 높이에서 떨어지는 여궁폭포,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다는 혜국사와 대궐터 등이 곳곳에 보석처럼 감춰져 있다. 한 굽이 오를 때 마다 크고 작은 하천과 폭포, 수 백길 암벽이 연이어 나타난다. 정상에서는 월악산과 소백산, 속리산도 보인다.

백두대간의 ‘단전’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 희양산(999m)이다.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에 우뚝 솟아 있다. 화강암 바위들로 이뤄진 암봉은 멀리서 봐도 단단한 기운이 느껴진다. 정상 못 미쳐 희양산성이 있다. 신라와 후백제가 국경을 다투던 접전지로 치열했던 역사가 배어있다. 희양산의 역사와 정기는 산의 남쪽 가장 넓고 깊은 곳에 자라잡은 봉암사가 대변한다. 신라 헌강왕 때 지증대사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라며 창건, 선풍을 크게 떨친 고찰이다. 저 유명한 ‘봉암 결사’가 이뤄진 한국 현대불교의 ‘탯자리’ 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인 1947년 성철·청담·자운 스님 등이 “부처의 법대로만 살아보자”며 용맹정진한 곳이다. 1982년부터 봉암사는 물론 일대 사찰림의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다. 일 년에 딱 한 번 부처님 오신 날만 산문을 여는 ‘비밀 수도원’이다. 봉암사 위 더 깊은 골짜기 토굴에서는 큰스님들이 ‘목숨을 건’ 수행을 이어가고 있다. 희양산은 백두대간 일대의 산짐승들이 주변에서 총소리가 나면 이 곳으로 달려온다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생태계의 보고로 이름 높다. 봉암사에는 신라 경순왕이 피난왔을 때 원당으로 사용했던 극락전과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 비문 등 문화재도 즐비하다.           
　
대야산(930.7m)에는 백두대간 답사에 나선 산악인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정상은 어느 방향으로도 막힘이 없어 백두대간을 조망하기에 더없이 좋다. 맑은 물빛이 어우러진 계곡 길은 부드럽고 깎아지른 듯한 암봉·암릉으로 이뤄진 능선 길은 힘차다. 험준하고 장쾌한 능선과 달리 계곡을 따라 난 조릿대숲길은 경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호젓해 연인·가족 단위의 나들이객과 트레킹족이 많이 찾는다.　　 　

수려한 계곡, 옥계수 되어 흐르는 풍류

문경의 산들은 계곡도 수려하게 빚어놓았다. 대야산 용추계곡은 아름다운 폭포와 소(沼), 화강암 암반이 비경을 연출한다. 국토해양부의 ‘한국의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꼽힌 곳이다. 화강암 암반으로 이뤄진 계곡이 대리석을 다듬어 놓은 듯 하고 물빛은 맑고 투명하다. 거대한 화강암 바위에 용비늘 같은 자국이 있고 수천년 동안 깎이고 패인 소(沼)가 하트 모양을 하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여름철에는 해수욕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피서지로 사랑받고 있다. 인근에는 ‘선유구곡’으로 유명한 선유동계곡이 있다.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이재를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정자 학천정이 소나무숲과 어우러져 있고 학천정 뒤편 바위에는 ‘산고수장(山高水長)’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수려한 풍광과 함께 산처럼 물 처럼 군자의 덕을 닦아온 선인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희양산 봉암사 인근 계곡은 예로부터 ‘봉암용곡(鳳巖龍谷)’이라 불려왔다. 말 그대로 봉황과 같은 바위산에 용과 같은 계곡이 힘차게 흐른다. 봉암사에서 10분쯤 오르면 널따란 암반이 나타난다. 백운대다. 집채만한 바위에는 마애보살좌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앞 너럭바위 위로 맑고 차가운 물이 세차게 흐른다. 곳곳에 절묘한 비경을 숨겨놓아 금강산 만폭동에 견준다. 불상 앞 암반을 돌로 두드리면 청아한 목탁소리가 나 신비감까지 느껴진다. 

이밖에 말바위 등 견훤과 관련한 유적들로 더욱 관심을 끄는 쌍룡계곡(농암면 내서리), 원시림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운달계곡(산북면 김룡리) 등 유명 계곡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옛길·막사발·온천…, 탄광도시에서 관광·휴양·스포츠도시로의 푸른 꿈

문경시는 지역의 역사와 특성을 각종 박물관과 전시관에 잘 담아놓았다. 문경새재에는 옛길박물관과 유교문화관·도자기전시관이 있다. 옛길박물관은 문경새재와 토끼비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갯길인 하늘재(명승 제49호) 등 지역의 옛길 위에서 펼쳐졌던 각종 문화상을 담고 있다. 유교문화관에서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관문에 위치한 탓에 영남학파 등 유교문화가 발달한 이 지역의 전통문화를, 도자기선시관에서는 천년을 이어온 이 고장 백성들의 생활도자기 ‘민요(民窯)’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가은읍 왕릉리의 석탄박물관은 이 지역 마지막 광업소였던 은성광업소 폐광을 활용, 당시 광업소 분위기와 갱도를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인근 완장리에는 구한말 의병을 일으킨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 기념관이 있어 문경의 꼿꼿한 기상과 기개를 느낄 수 있다.

문경에는 보고 즐길 거리도 많다. 과거 석탄을 나르던 폐철도를 활용한 철로자전거가 운행되고 있어 이 철로자전거를 타고 문경의 수려한 경관과 옛 탄광도시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문경은 한 때 경북 최대의 석탄 생산지였다. 석탄을 수송하던 문경선과 가은선 철로가 관광용 철로자전거코스로 탈바꿈했다. 문경읍 고요리 단산에는 ‘활공랜드’가 조성돼 있다. 이륙장 까지 접근이 쉬운데다 안정적인 상승 기류로 사시사철 모든 방향에서 활공이 가능, 행글라이딩과 패러글라이딩의 최적지로 꼽힌다. 이밖에 고구려궁 등을 재현해놓은 가은오픈세트장, 초보자도 쉽고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관광사격장과 짚라인 등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문경새재유스호스텔과 불정자연휴양림, 새재스머프마을, 불정열차펜션, STX리조트 등 숙박·휴양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문경온천관광지에서는 칼슘중탄산천과 알칼리성 온천수 두 가지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호계면 견탄리 일원에는 메인스타디움과 축구장, 야구장, 실내외 훈련장 등 각종 운동시설을 갖춘 국군체육부대 이전 조성 공사가 한창이다. 국군체육부대는 2012년쯤 이 곳으로 옮겨올 예정이다. 이에 발맞춰 국방부와 문경시는 2015년 ‘군인들의 올림픽’인 세계군인체육대회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단독 신청으로 유치 가능성이 높다. 문경은 관광·휴양도시에 더해 스포츠도시로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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