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인(沃川人) 조흥빈(趙興賓)이 정원에 나아가 고변하였다. 상이 그 글을 빈청(賓廳)에 내리는 한편, 금부 도사를 보내 권대진(權大進)·권계(權繼)·권락(權絡)·권순(權純)·정담(鄭潭)·양천식(楊天植)·양정식(楊廷植)·이찬희(李贊希)·정후엄(鄭厚淹), 박선검(朴先儉)·박후검(朴後儉) 등 16인을 잡아오게 하고,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국문하였다. 흥빈이 공초(供招)하기를,
“부근 마을에 사는 출신(出身) 권대진이란 자가 지난 기사년부터 요승(妖僧) 두 사람 및 무뢰한들과 왕래하며 회합을 가졌는데, 거동이 수상했습니다. 언젠가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나의 상(相)으로 볼 때 앞으로 아주 귀하게 될 것이며 우리 집의 터도 좋아서 오(午)·미(未)년 사이에 부원군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모두 그가 이상한 모의를 하고 있다고 의심하였으나 그 단서는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 경오년 1월에 대진의 아들 낙이 술이 취한 채 신의 집에 와서 신의 아들 조완(趙浣)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지금 한창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극심해지고 있으며 천변(天變)도 참혹하니 시사(時事)를 알 만하다. 지금 호남과 영남에 8대장이 있는데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 대사를 도모하려 한다. 네가 나와 같이 행동하면 부귀를 얻을 것이니, 절대 전파시키지 말고 남몰래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의 아들 완은 의심을 살까 두려워하여 부드러운 말로 대답해 두었습니다. 낙이 간 뒤에 신이 동생 조희빈(趙熙賓)과 함께 대진을 찾아가 물어 보았더니, 대진이 말하기를 ‘우리 집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는데, 참기(讖記) 가운데에 백마장군에 관한 설이 있으니, 이야말로 우리 집이 일어나는 좋은 징조이다.’ 하고, 8대장에 관한 이야기는 감추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완이 권락·권계와 왕래하면서 물어보니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남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은 생김새가 기이하고 두 어깨에 해와 달의 모양이 있는데, 이 사람을 추대하여 인군으로 삼을 것이다. 이 사람은 가야산(伽倻山) 아래에 사는데, 이름은 담(潭)이고,【 담(潭) 자는 잘못 되었다. 그 뒤 적(賊)의 공초(供招)에서 모두 정한(鄭澣)이라고 하였다.】 나이는 임오생(壬午生)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천식과 이찬희란 자가 그와 왕래하며 모의하였는데, 모두가 승려였다가 환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약속하기를 ‘전일에 실패한 무리들은 모두 문서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나 우리들은 다만 상면해서 약속했으니, 혹시 붙잡힌 자는 죽는다 하더라도 나머지 살아 있는 자들이 이어서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효성(鄭孝成)이 또 공주인(公州人) 한설(韓渫)이 고변한 것을 치계하였는데, 대체로 조흥빈이 고변한 내용과 같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양병(楊丙)이라고 하는 자는 바로 양천식이며, 양팽(楊彭)은 바로 양정식이다. 병 등은 세 번이나 그 이름을 바꿨는데, 10년 동안에 세 번이나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했다.’ 하고, 또 ‘문일광(文日光)·이찬희와 정인홍(鄭仁弘)의 조카인 정류(鄭溜)·정회(鄭澮)·정유(鄭渝) 및 호서 장군(湖西將軍) 김자중(金自重)이란 자가 있는데, 자중은 군사가 일어난 뒤에 장날을 이용하여 난리를 일으켜서 먼저 직산(稷山)·온양(溫陽)·천안(天安) 등지의 수령들을 베고 그 군사를 탈취해 기세를 돋군다고 하였다. 양팽은 「정담이 말하기를 『나라를 얻은 뒤에는 도읍을 진잠(鎭岑)이나 신도(新都)로 옮겨야겠다.』고 하였다.」’ 하였다. 고변자 한설이 공초하기를,
“한임생(韓壬生)은 바로 나의 서제(庶弟)로서 팽이(彭伊)나 병이(丙伊)와는 이부동모(異父同母)의 형제간입니다. 임생이 승려 자장(慈藏)에게 글을 배워 공주(公州) 묘각사(妙覺寺)에 기거하였는데, 기사년 8월에 집에 와서 비밀히 말하기를 ‘병이와 팽이가 대진·희찬과 함께 내가 거처하던 승방에 모였는데, 밤이 깊은 뒤에 서로 역적을 모의하는 것을 깊이 잠든 체하고 엿들었다.’ 하였습니다.
그 해 10월에 병이가 찾아와 말하기를 ‘기미년 사이에 지리산에 가서 글을 읽던 중 어느날 이인(異人)을 보게 되었다. 성은 정(鄭)이고 이름은 담(潭)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과연 신도의 주인이 될만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나에게 시를 주었는데, 그 시에
‘탑전에 올라 앉아 남쪽을 제압하고
권세의 저 위엄 북두성을 두르리라.’
하였습니다. 지난해 봄에 팽이가 신을 보러 왔기에 비밀리에 묻기를 ‘너의 형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의 형이 「우리들은 동방에서 일어나는데, 동방은 푸른 색에 속하니 너의 전복(戰服)도 푸른색으로 하라.」 하였다.’ 하였습니다. 함께 모의한 자를 보면 보성(寶城)에 문일광(文日光), 옥천(沃川)에 권 천총(權千摠)이라는 자가 있으며, 경기에는 홍계남(洪繼男)의 둘째 아들이 있는데 그를 대장으로 삼는다고 하였고, 찬희와 자중(自重)도 모두 동모했다 합니다. 그리하여 지난달 거사하려고 술사를 데리고 경성에 가 보았더니, 궁궐이 그야말로 길지(吉地)에 있고 왕기(王氣)가 아직 쇠하지 않아 경솔하게 움직이지 못하겠기에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그 길로 계룡산(鷄龍山)으로 내려가 지남철로 택지(擇地)한 뒤 도읍을 정할 계책을 세웠다 합니다. 권의립(權義立)과 권인립(權仁立)은 바로 대진(大進)의 아들로서 힘을 다해 그 일을 도왔으며, 팽이의 친구인 정후엄(鄭厚淹), 찬희의 동생 이수남(李守男), 찬희의 가까운 친척인 조이남(曺二男) 등이 모두 흉모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생(壬生)의 공초는 대개 한설의 고변과 내용이 같았는데, 대진의 아들이라고 하던 인립은 바로 권계(權繼)였으며, 의립은 바로 권락(權絡)이었다. 정후엄(鄭厚淹)이 공초하기를,
“이 음모는 모두 찬희에게서 나왔습니다. 찬희가 처음에 대진의 막내 아들에게 말하여 그의 아비 대진에게 이야기하게 하기를 ‘이 일은 처음에 주선하기가 어려우나 나는 군사를 거느린 자이니 그 때에 당하여 우리 측을 위해서 싸울 수 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선검(先儉)과 후검(後儉)도 찬희 및 양가(楊哥)란 자와【 바로 천식(天植)이다.】 대진의 집에 모여 유숙하며 모의하였습니다.”
하고, 권계(權繼)는 공초하기를,
“정후엄이 와서 말하기를 ‘양가란 자가 이 일을 앞장 서서 주도하였는데, 경상도에 내려가 군사를 모집했으므로 영남에 공모한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가(鄭哥)란 자의 몸에는 해와 달의 모양이 있고, 덕산(德山)에 조가(趙哥)란 자가 있는데 옛날 최영(崔瑩)과 같은 자라고 하였으며, 찬희의 족속으로 공주(公州)에 사는 김가 성을 가진 자가 전에 파총(把摠)을 지냈는데, 역시 모의에 참여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권순(權純)은 공초하기를,
“대진이 숙부라고는 하나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또 나는 글도 모르고 무예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일에 참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대진의 종인 영이(永伊)는 공초하기를,
“환속한 양가란 자가 대진을 찾아와 말하기를 ‘침착하여 장수가 될 만한 자는 권 천총(權千摠)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듣건대, 남원(南原)에서 도적이 일어나자 천총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국가에 사태가 발생했으니,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의 병사와 중로에서 회합하여 곧바로 경성을 향하겠다.’ 하였답니다. 옥천(沃川)에 사는 서인 임생, 출신(出身) 박남(朴男)·주명세(周名世)·남신록(南信祿), 신선(新選) 전금세(全今世)도 다 모의에 참여하였습니다.”
하고, 선검(先儉)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자칭 관상을 잘 본다는 어떤 승려가 대진의 집에 와 관상을 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답니다. 그리고 지난 겨울철 끝 무렵에 또 와서 말하기를 ‘경오년의 운수가 좋았으나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이 뒤에 어찌 좋은 기회가 없겠는가. 너는 과연 백마장군이다.’고 하였답니다. 이 말은 대진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하고, 천식(天植)은 공초하기를,
“무진년 봄에 정읍(井邑) 내장산(內藏山) 절에 있을 때 김안국(金安國)이란 자가 불공을 드리러 제문(祭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끝에 ‘집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 길러준 그 은혜 아직도 못 갚았는데, 권력 투쟁도 한계가 있는 법이거늘 지금까지 임금의 은혜 받지 못했네. 나이 삼십이 다 되는데 장한 뜻 아직 펴지 못했네. 그러나 오랜 세월 가노라면 황하수도 다시 맑아지겠지. 그 때 되면 태평성대 이루어져 백성들도 편안하리라. 천안(天顔)을 뵈오니 그대를 가상하게 여기는 임금의 은총이 내려지고, 높은 벼슬에 임명되니 역사에 이름 남겨지리.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될지 모를 나의 길, 닥쳐올 일들을 알려 주소서. 이 때문에 향불을 받들어 불전에 올리나이다.’ 하였습니다. 이 글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져 그 뜻을 물으니, 안국이 ‘대북(大北)·소북(小北)이 다 모여 대사를 거행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한(鄭澣)이라는 이인(異人)이 있는데 머지않아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너는 나와 일을 함께 하기만 하면 된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안국과 함께 정한의 집에 갔는데, 그 곳에서 ‘탑전에 올라 남쪽을 누르고[坐榻南藩壓]’라는 싯귀를 보았습니다.
다시 청주(淸州)로 내려가 출신(出身) 조철(趙澈)을 보았는데, 이 자는 8대장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자에게 간 이유는, 안국이 전에 조가란 자가 거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자의 관상을 보아두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국이 또 ‘순창(淳昌)의 양시태(楊時泰)도 함께 거사하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진년에 정한의 집에서 돌아오다가 찬희와 함께 대진의 집에 갔는데, 대진이 ‘내 조카 집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고 우리 집의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했다.’고 하기에, 내가 바로 말하기를 ‘그대가 바로 백마장군이구나.’ 하였습니다. 대진이 또 ‘무진년 3월에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마침 고변하는 일이 있어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정한 등이 처음에 유효립(柳孝立)의 무리와 결탁하고 모의하였으나 효립 등이 잡혀 죽을 적에 정한만이 면하게 된 것은 달리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에 또 일어나려고 하였으나 한회(韓會)의 옥사(獄事)로 인하여 정한의 도당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한회와 약속하기로는, 북쪽 지방에서 변란이 일어나면 정한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어나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안국이 처음에 정한을 보고서 그의 뜻을 탐지할 목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양후영(楊後瑩)이라 하고 그를 보며 말하기를 ‘최영(崔瑩)의 후신이 이제 또한 있다.’고 하자, 정한이 ‘북쪽 지방에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들이 남쪽에서 일어나겠다. 남쪽 지방에 변란이 일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안국의 승명(僧名)은 회옥(懷玉)이며, 양시태는 안국의 친구로서 공모한 자입니다. 대개 정한·김안국·문일광·권대진·양시태·조철 등이 근간을 이루고 있으나, 그 가운데 정한이 주동자입니다. 그리고 정한의 형인 정숙(鄭潚)의 아들 정부(鄭榑)도 동모하였습니다.”
하고, 권락(權絡)은 공초하기를,
“지난해 2월 조완(趙浣)의 집에 갔더니 조완이 한사코 만류해서 함께 잤는데 조완이 ‘변란이 있게 되면 너와 함께 뛰어들겠다.’ 하였습니다. 그 뒤 정후엄과 동행하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는데 환속한 승려인 것 같았으며, 정후엄이 ‘이 사람은 풍수지리를 잘 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자에 대해서는 완의 아비 조홍빈도 ‘그 승려는 사람의 관상까지도 잘 본다.’고 하였는데, 그가 바로 병이(丙伊)였습니다. 병이는 ‘좋은 기회가 필시 멀지 않아 있을 것이다. 조가(趙哥)란 자가 북쪽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성사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정한(鄭澣)은 공초하기를,
“기사년에 양천식이 왔기에 문일광과 함께 정부(鄭榑)의 집에서 잤습니다. 이때 천식이 먼저 ‘탑전에 올라 남쪽을 누르고……’ 하는 시를 지었고, 나도 백설(白雪)이란 시를 지었습니다. 지난해 천식이 또 와서 말하기를 ‘금년은 국운이 가장 불길하여 무슨 일이 있을 것이고 15년 뒤에도 불길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천식과 회옥이 말하기를 ‘평안도에 냇물과 못이 마르고 재변이 많으니 5월 사이에 병화(兵禍)가 있을 것인데, 7월 이내에 철병하지 않으면 변란이 있게 될 것이다. 전주(全州)의 이일명(李一命)과 김대해(金大海)는 다 쓸 만한 자들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문일광(文日光)은 공초하기를,
“약재를 구하러 정부의 집에 갔더니 승려 사성(師聖)과 승윤(勝允)이 자리에 있었는데, 자칭 바둑을 잘 둔다고 하기에 두 판을 두고 헤어졌습니다. 그 뒤에 또 정부의 집에 갔더니 그 두 승려가 자리에 또 있었는데 ‘진인(眞人)을 보지 못하였더니 가까이에 있지 아니한가.’ 하며, 이어 ‘머나먼 길 눈이 쌓여 막혔네.[長途阻積雪]’라는 시귀를 지어 주었습니다.”
하고, 정부(鄭榑)는 공초하기를,
“무진년 봄에 거창(居昌)에서 집에 돌아왔는데, 어느 승려가 찾아 왔기에 누구냐고 물으니 ‘지리산에서 왔는데 산수 구경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누구를 찾아보려고 왔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유숙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승려가 말하기를 ‘지리산 아래에 가기(佳氣)가 있으니 신인(神人)이 나오게 되어 있다. 예전부터 허교(許喬)의 손자나 허의(許懿)의 아들 가운데 신인이 있다고 들었기에 찾아보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8일 초저녁에 두 승려가 찾아 왔는데 그 중 하나는 전에 보지 못했던 자라서 이름을 물었더니, 태허(太虛)라고 하였습니다. 밥을 먹이고 유숙케 했는데, 이튿날 문일광도 왔기에 정한의 집으로 가서 잤습니다. 그 승려에게 나와 일광과 한의 관상을 보게 하자, 승윤(勝允)이 ‘정한의 상이 가장 좋다. 귀 아래에 줄줄이 반점이 있으니, 이것이 좋은 상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일광이 나에게 ‘승윤의 손바닥에 붉은 반점이 있는데, 이것이 매우 기이하다.’고 하였습니다. 사성이 ‘전주에 이일명이란 자가 있는데, 그 자는 시운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였으며, 또 ‘양시태란 자가 있는데, 양후영과 동성(同姓)으로서 또한 시운을 타고 태어난 자이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7월 사이에 승윤이 환속하여 양천식이라 칭하고 와서는 정한과 밀담을 나누며 ‘전라도 영웅과 사귀고 싶다.’고 하였으며, 한은 또 ‘홍가(洪哥)란 자의 손아귀에 군사 1천여 명이 있는데, 이 내용을 박희집(朴禧集)에게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회옥이 또 말하기를 ‘어느 곳에 김자중(金自重)이란 자가 있다.’고 하기에, 그가 있는 곳을 물으니, 자칭 자기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김자중이라고 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교생(校生) 박희집(朴禧集)이 공초하기를,
“금년 정월에 홍성징(洪聖澄)이 집에 와서 ‘천재와 시변(時變)이 겹쳐 일어나니 세상 일을 알 만하다. 영천(榮川)에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가 많고 경기에도 있는데, 너도 같이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길에서 박흔(朴訢)과 유지수(柳之燧)를 만났는데, 그들이 ‘영천의 홍성징이 의기가 많아 장수가 될 만하다고 들었다. 한번 보고 싶으니 혹시 오거든 꼭 소식을 알려 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녕인(昌寧人) 성지도(成至道)는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에 들어 갔고 시운(時運)마저 불길하다.’고 하였으며, 박흔은 ‘요즘 각 고을의 천총(千摠)들을 대부분 전에 경력이 있는 자로 차출하니 나도 천총이 될 것이다. 만약 은혜와 의리로 맺어두면 누구인들 따르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징은 ‘강화도에는 군사 1백 명만 보내도 폐주를 모셔 올 수 있다.’고 하였으며, 여후망(呂後望)은 또 ‘고령(高嶺)에서 귀양살이할 때, 첨사 정여린(鄭汝麟)이 어느 날 밤 함께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박승종(朴承宗)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다. 지금 비록 이 직책에 임명되긴 하였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하고, 홍성징(洪聖澄)은 공초하기를,
“전에 박광선(朴光先)의 집에 갔더니, 말하기를 ‘귀양살이하는 사람을 자주 이배(移配)시키니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하였으며, 떠나올 때 회양 부사(淮陽府使) 조찬한(趙纘韓)을 보았는데,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벼슬을 하고 있긴 하나 옛 임금을 잊을 수는 없다. 박노(朴)도 옛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희집(禧集)의 집에 갔더니, 말하기를 ‘지난 겨울 나의 할아버지를 적소(謫所)로 찾아가 뵙고, 인하여 귀양살이하는 심지청(沈之淸)을 만나 나의 옷을 벗어주면서 「언제나 옛 임금을 복위시킬 것인가.」 하니, 지청이 「우리가 얼마나 여기에 있겠는가.」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여후망(呂後望)을 보았더니 ‘최내길(崔來吉)이 귀양사는 사람을 박대하는데, 어느 때나 이 놈을 죽일 것인가.’ 하였으며, 정여린(鄭汝麟)도 ‘내가 북병사만 되면 내 뜻을 펼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희집은 또 ‘성주(星州)의 박흔은 바로 지수의 6촌인데 나와 일을 같이 한다.’고 하였으며, 또 ‘성지도(成至道)는 점술에 능한데, 이괄(李适)의 난 때에 국운이 불길한 것을 점치고 이괄을 맞이하려고 떠났다가 3일만에 다시 성상의 팔자(八字)를 점쳐 보니 너무 좋아 머지 않아 회복되겠기에 돌아왔었다. 요즘 또 국운이 불길한 것을 점쳤기 때문에 합천(陜川) 사람들과 거사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작별하면서 희집이 또 말하기를 ‘성주(星州) 초군(哨軍)의 경우는 정담(鄭澹)이 천총(千摠)이 되었으니, 마병(馬兵) 2개 초(哨)를 강화(江華)에 보내 옛 임금을 모셔와야 하겠다. 다만 아들이 없으니 인성군(仁城君)의 아들로 동궁을 삼아야 할 것이다. 전라도에서는 정여린(鄭汝麟)과 고용후(高用厚) 숙질간이 모두 우리를 따를 것이다.’ 하면서 용후의 시를 외웠습니다. 그 시는
‘대궐의 주인 새로 바뀌었는데
신하인 나는 아직도 살아 있네.
강촌에 나 홀로 돌아오고 보니
이 몸의 벼슬이 부끄럽기만 하네.’
이었는데, 이는 옛 임금을 생각한 시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꼭 박흔을 찾아보라고 하기에 돌아오는 길에 들렀더니, 흔이 말 한 마리를 주면서 ‘정인홍의 조카 중에 호남에 귀양간 자가 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이 나에게 준 말이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성지도(成至道)는 공초하기를,
“기사년 겨울에 희집의 집엘 갔더니 희집의 5촌숙부인 종형(宗衡)과 서숙(徐淑)·성람(成欖)·송지술(宋知述)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희집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일광과 지수 및 합천 사람들과 거사를 꾀하고 있는데, 요즘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에 들어갔으니, 이것은 무슨 조짐인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사략(史略)》에 「형혹성이 남두에 들어가면 천자가 대궐에서 도망친다.」고 하였는데, 내가 아는 것은 그저 이 정도이다.’고 하였습니다. 희집이 ‘오랑캐들도 천상(天象)에 나타나는가?’ 하고, 또 ‘주상의 팔자는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내가 전에 점을 쳐 보고 아주 좋다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거사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하였는데, 희집은 말하기를 ‘호란이 발생하면 일이 쉽게 성공할 것이다.’고 하면서, 술을 마시고 헤어졌습니다.”
하고, 양환(梁桓)은 공초하기를,
“지수의 동생 지환(之煥)과 나의 첩의 집이 서로 가까워 절친하게 지낸 관계로 그들이 모의했던 일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창녕(昌寧)의 성지도는 점술에 능한데, 자기의 상에 대해서 스스로 말하기를 ‘구레나룻이 미간까지 뻗쳤으니, 당상과 가선대부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이 수염이 상당히 길었기 때문에 감히 모의를 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성람은 폐조 때에 급제하였는데 반정 후에 삭과(削科)되었으므로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성주(星州)의 여효증(呂孝曾), 창녕(昌寧)의 성창리(成昌履) 및 박흔·정부·정니(鄭柅)·유지수 등이 천식과 정부의 집에서 함께 자면서 모의했습니다.”
하고, 유지수(柳之燧)는 공초하기를,
“정부와 양환이 항상 집에 왕래하였습니다. 어느 날 부가 말하기를 ‘천식이 사람의 관상을 잘 보고 풍수설도 아는데, 정한과 금산(金山)을 왕래하면서 함께 역적 모의를 하고 있으니, 너는 그 사람과 생사를 같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양환은 말하기를 ‘어떤 승려가 호서(湖西)에서 왔는데 「진인(眞人)이 이 부근에 있어 찾아 보려고 한다.」 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태경(李泰卿)의 일을 이야기하자, 부도 말하기를 ‘호남과 호서에 이일명(李一命)·권대진(權大進)이란 자가 있는데 같이 모의할 만하다. 영남에서는 최현(崔睍)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현이 천식을 보고 영웅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박희집의 동생 박경집(朴慶集)은 ‘허완(許完)·정여린(鄭汝麟)·김신국(金藎國) 형제들은 유효립(柳孝立)과 같이 일했는데 법망에서 빠졌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일명(李一命)은 공초하기를,
“나는 본래 천식과 절친했는데, 천식이 일반 사람들의 옷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환속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큰일을 거행하려는 자가 있는데 내가 그 자를 따라야 하겠다. 전일 경상도에 가서 성인을 찾아보았는데, 성인이 남쪽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 때 내가 다시 올테니 너희도 준비하고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하고, 이정(李侹)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천식과 절친했는데, 천식이 ‘ 정한의 생김새가 웅대하고 훤칠하여 끝내는 귀인이 될 것이다. 대진은 그 집의 검은 말이 흰색으로 변하였으니 이것은 좋은 징조이다. 박흔은 경상도에서 병사를 모으게 되어 있다. 배상룡(裵尙龍)은 침착해서 큰일을 도모할 만하다. 그래서 모두 모의를 함께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박광선(朴光先)은 공초하기를,
“홍성징이 와서 ‘내가 신라(新羅)를 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한두 고을을 쳐부순다면 조정이 반드시 놀라 두려움에 떨 것이다. 그런데 호군(犒軍)할 주미(酒米) 15석을 마련했는데도 군사를 얻지 못하고 있으니, 한스럽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들은 모두 복주(伏誅)되었다. 국청이, 권순(權純)은 이미 모의의 내용을 알고 있었으니 율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상이 용서할 만한 정상이 없지 않으니, 3천리 밖으로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대신·금부·양사를 인견하고 옥사의 상황을 하문하니, 여러 신하가 역변을 모의한 흔적이 의심할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역적의 두목을 죽였으니 끝까지 다 다스릴 필요는 없다.”
하고, 그 뒤에 또 하교하기를,
“이 무리들이 뜻을 잃어 앙앙불락한 나머지 서로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니, 그 심사가 괘씸하고 그 죄도 죽여야 마땅하다. 다만 그들이 끌어댄 말들을 보면 진실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으니, 맹렬한 불길 속에 옥석을 구분할 수 없게 될까 하는 이 점이 매우 두렵다. 더구나 요즘 한재(旱災)가 무척 혹심한데, 이것은 무고한 자가 원통하게 죽는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많이 죽여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기보다는 조금 늦추어 그들 스스로 새로워지게 해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들의 괴수는 이미 전형(典刑)에 복주되었으니, 나머지 조무라기들을 죽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리고 한창 씨뿌리고 경작할 이 절기에 계속 잡아들인다면 필시 놀라 흩어져 농사를 망칠 염려가 있으니, 자세히 헤아려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국청이, 박종형(朴宗衡)·서숙(徐淑)·성람(成欖)·송지술(宋知述)·오익환(吳益煥) 등도 역적을 따른 정상이 있다는 이유로 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백성들이 원망하고 배반하는 것은 내가 임금답지 못한 탓으로서 위를 쳐다보고 아래를 굽어봐도 부끄럽고 두렵기만 할 뿐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겠다. 이 무리들은 모두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와 다름이 없으니, 묻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 옥사에서 승복(承服)하여 정형(正刑)에 처한 자는 정한 이하 30여 인이었으며, 장하(杖下)에 죽은 자는 양시태 등 10여 인이었으며, 유배된 자는 고용후 등 6인이었으며, 방면된 자는 최현·박로 등 50여 인이었다. 최현이 방면될 적에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해 야대(夜對)할 때에 마침 미진하게 처치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때 입시하여 극력 간쟁해 마지않았으므로 내가 꽤나 괴롭게 여겼다. 그런데 그 뒤에 생각해 보니, 참으로 나를 아끼는 자였다. 이번에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필시 초심(初心)은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니 용서하여 방면하라.”
하였다. 예조가 역적을 토멸한 경사로써 종묘에 고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다만 사면령을 반포하라고 명하였다. 백관에게 가자(加資)하고, 고변한 조흥빈은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한설은 6품의 실직(實職)으로 올려 제수하였다.
○丁未/ 沃川人 趙興賓, 詣政院告變, 上下其書于賓廳, 遣禁府都事, 拿 權大進、 權繼、 權絡、 權純、 鄭潭、 楊天植ㆍ 廷植、 李賛希、 鄭厚淹、 朴先儉ㆍ 後儉等十六人以來, 設鞫廳鞫之。 興賓供稱: “近村有出身 權大進者。 自己巳年間, 與妖僧二人及無賴之徒, 往來聚會, 蹤迹詭秘。 嘗言于衆中曰: ‘吾相極貴, 吾家地理亦吉。 午未年間, 當爲府院君’ 云, 皆疑其有異謀, 而莫測其端。 庚午正月, 大進之子 絡, 醉到臣家, 密言于臣之子 浣曰: ‘方今民怨日極, 大變亦慘, 時事可知。 今湖嶺有八大將, 同時起兵, 將圖大事。 汝若同我,富貴可致, 幸勿傳播, 潛自裝束’ 云。 臣子 浣, 恐其致疑,答以溫言。 絡旣去, 臣與弟 熙賓, 往見 大進問之, 則言: ‘吾家黑馬變白。 讖記中有白馬將軍之說, 是乃興家之祥也’ 云,而諱不言八將之說。 其後 浣與 權絡、 權繼往來, 問之則云: ‘ 楊天植ㆍ 廷植及 李賛希等, 爲謀主而徒黨甚多。 約先起兵於湖嶺間, 稱以 倭來, 則渠父與諸人, 名以討賊起兵, 直擣京城’ 云。 且言: ‘ 嶺南有 鄭姓人, 相貌奇異, 兩肩有日月狀。 當推此人爲主, 而居在 伽倻山下, 其名則 潭, 【潭字誤。 厥後賊招, 皆稱鄭澣。】其年則壬午生’ 云。 楊天植、 李賛希者, 往來謀議, 而皆是以僧還俗者云。 渠輩相約以爲: ‘前日見敗之徒, 皆以文書發覺。 吾輩則只面約, 雖或被捉者死, 而餘存者當繼起’ 云。” 公淸監司 鄭孝成, 又以 公州人 韓渫所告馳啓, 大槪與 興賓所告同, 而其中 “ 楊丙卽 天植, 楊彭卽 廷植也。 丙等三變其名, 十年之間, 三爲僧, 三退俗。” 又有 “ 文日光、 李賛希, 鄭仁弘之姪 鄭溜、 鄭澮、 鄭渝及湖西將軍 金自重者, 而 自重則當於起軍之後, 因場市作亂, 先斬 稷山、 溫陽、 天安等倅, 奪其軍, 以助聲勢云。” 楊彭云: “ 鄭潭以爲: ‘得國後, 當移都 鎭岺、 新都’ 云。” 告者 韓渫供稱: “ 壬生卽渠之孽弟, 而 彭伊、 丙伊之異父同母兄弟也。 壬生學書于僧 慈藏, 居 公州妙覺寺。 己巳年八月, 來到其家, 密語曰: ‘ 丙、 彭, 與 大進、 賛希等, 來會于所居僧房, 夜深後相與謀逆, 渠陽爲熟睡而聞之’ 云。 其年十月, 丙伊來見言: ‘己未年間, 往 智異山讀書, 一日得見異人, 姓 鄭名 潭, 此果 新都主人也。’ 將行, 以詩贈之曰: ‘坐榻南藩壓, 威權繞北斗’ 云云。 前年春, 彭伊來見臣, 密問: ‘汝兄所爲者, 何事?’ 云, 則答以 ‘吾兄以爲: 「吾等起於東方, 東方屬靑, 汝之戰服, 亦須用靑色。 云。’ 所與同謀者, 則 寶城文日光、 沃川權千摠、 京圻則有 洪繼男第二子爲大將, 而 賛希、 自重, 皆與同謀。 前月欲擧事, 與術士,到京中見之, 則宮闕正在吉地, 王氣未衰, 不可輕動, 故還寢, 而仍往 雞龍山, 泛鐵相宅, 以爲定都之計。 義立、 仁立, 卽 大進之子, 而力贊其事。 鄭厚淹, 彭伊所親; 李守男, 賛希之同生; (曹二男)〔曺二男〕, 賛希之切族, 而皆參兇謀云。” 壬生所供, 槪與上同, 而 大進子 仁立, 卽 繼也; 義立, 卽 絡也。 鄭厚淹供稱: “此皆出於 賛希。 賛希初言于 大進末子, 使言于其父 大進曰: ‘此事初雖難辦, 吾是領兵者, 臨時, 豈無倒戈之便乎? ’ 先儉、 後儉, 亦與 賛希及 楊姓者, 【卽天植。】會 大進家, 留宿謀議云。” 權繼供稱: “ 鄭厚淹來言曰: ‘ 楊姓者首倡此事, 往 慶尙道募兵, 嶺南多有同謀者’, 而有 鄭哥, 身有日月狀云, 德山有 趙哥, 其人如古之 崔瑩云。 賛希之族 金姓者, 在 公州, 曾爲把摠, 亦與同謀云。” 權純供稱: “ 大進雖是叔父, 而不能頻數相見。 且不文、不武, 有何預知之事乎? 云。” 大進奴 永伊供稱: “還俗人 楊姓者, 來見 大進曰: ‘深沈可爲將帥者, 莫如 權千摠。’ 云。 厥後聞, 南原盜起, 千摠喜曰: ‘國家已有事, 吾當領軍, 與 南原兵, 會于中路, 直向京城’ 云。 沃川居庶孽 壬生, 出身 朴男、 周名世、 南信祿, 新選 全今世, 皆預其謀云。” 先儉供稱: “己巳年, 有僧自稱善相人, 來 大進家, 觀其相曰: ‘甚好。’ 去冬末又來言: ‘庚午是吉年, 今已過矣。 然此後, 豈無好時乎?汝果是白馬將軍’, 大進以此言之云。” 天植供稱: “戊辰春,居 井邑內藏山寺, 有 金安國者以供佛, 持祭文來。 其文曰: ‘鶴髮在堂, 尙不報劬勞之德; 龍鬪有數, 迄未蒙眷顧之恩。年將三十秋, 壯懷未展期。 臻一千載, 河水再淸。 時逢太平之日, 民有鼓腹之秋。 獲覩天顔, 有玉音於嘉汝之恩; 得拜丹墀, 題姓名於竹帛之上。 告以倘來之迷塗, 指以未知之機事。 故將香火, 仰瀆威神’ 云。 見此文而怪之, 問其意, 則 安國曰: ‘大小北皆會, 將擧大事, 而又有異人, 此則 鄭澣也。 不久當有好事, 汝可同我’ 云。 遂偕往 鄭澣家, 乃見坐榻南藩壓之詩。 轉往 淸州, 見出身 趙澈, 澈則八大將之一也。 蓋以 安國曾言: ‘ 趙也擧事’ 云, 故要看其相, 而往也。 安國又云: ‘ 淳昌楊時泰, 亦與同事。’ 且戊辰年, 自 澣家還, 與 賛希, 往 大進家則曰: ‘吾姪子家, 雌鷄化雄, 吾家黑馬變白’ 云。 吾卽曰: ‘君是白馬將軍也。’ 大進又曰: ‘戊辰三月, 欲起兵, 而適値告變, 不能發。’ 蓋 澣等初與 孝立輩連謀, 而 孝立等之死, 澣得獨免者, 各有派脈故也。 前年八月, 又欲發, 而因 韓會之獄, 澣黨多死, 故未發矣。 初, 與 韓會相約, 北方有變, 則 澣等當乘此機而發矣。 安國初見 鄭澣, 欲探其意, 以渠之名爲 楊後瑩而見之曰: ‘ 崔瑩後身, 今亦有之’ 云, 則 澣曰: ‘北方有變, 則吾輩當從南而起; 南方有變, 亦如之’ 云。 安國僧名 懷玉, 楊時泰, 則 安國之所相親, 而同謀者也。 蓋 鄭澣、 金安國、 文日光、 權大進、 楊時泰、 趙澈等, 乃其根柢也, 鄭澣爲謀主, 澣之兄 潚之子 榑, 亦同謀云。” 權絡供稱: “前年二月, 往 趙浣家, 則固留同宿, 仍言: ‘有亂則當與若同赴’ 云。 其後與 鄭厚淹同行, 路遇一人, 似是還俗僧。 厚淹曰: ‘此人善相地’ 云。 浣之父 興賓又言: ‘其僧且善相人’ 云, 乃 丙伊也。 丙伊曰: ‘好時必不遠。 有 趙姓人, 起於北方, 則可以成事’ 云。” 鄭澣供稱: “己巳歲, 天植來見, 與 文日光同宿於 鄭榑家。 天植先作詩曰: ‘坐榻南藩壓’ 云云, 渠又作白雪之詩。 前年 天植又來言: ‘今年國運最不吉, 當有某事, 十五年後, 又當有不吉之事’ 云。 天植、 懷玉又曰: ‘ 平安道川澤枯渴, 多有災變,五月間當有兵禍。 七月之內, 若不撤兵, 則當有變亂。 全州李一命、 金大海, 亦皆可用’ 云。” 文日光供稱: “爲覓藥材, 往 鄭榑家, 僧人 師聖、 勝允在座。 自言善奕, 對着二局而罷。 其後又往 榑家, 則兩僧又在坐言曰: ‘未得見眞人, 無乃在近否?’ 仍贈以長途阻積雪之詩云。” 鄭榑供稱: “戊辰春, 自 居昌還家, 有僧來謁。 問之則曰: ‘來自 智異山, 而非爲遊山, 有欲訪見者矣。’ 因留宿。 僧曰: ‘ 智異山下有佳氣, 神人當出。 故曾聞 許喬之孫, 許懿之子有神人, 以此欲訪見之’ 云。 其後八日初昏, 兩僧來見, 一則曾所未見, 問其名則曰 太虛, 饋飯留宿。 翌日 文日光亦來, 往宿于 澣家。 榑與 日光、 澣, 使僧相之, 勝允曰: ‘ 澣相最好。 耳下有疊疊痕, 此好相也。’ 其後 日光謂 榑曰: ‘ 勝允之手, 掌有赤痕, 此甚奇’ 云, 師聖曰: ‘ 全州有 李一命者, 其人應時而生, 又有 楊時泰者, 楊後瑩之同姓, 亦是應時之人’ 云。前年七月間, 勝允還俗, 稱 楊天植而來, 與 鄭澣密語, 欲交結 全羅道英雄, 云。 澣又曰: ‘ 洪姓者手下, 有軍千餘人, 此意言于 朴禧集’ 云。 懷玉且言: ‘一處有 金自重者’ 云, 問其在處, 則自言吾名, 欲以 金自重稱之云。” 校生 朴禧集供稱: “今正月, 洪聖澄來到其家曰: ‘天災時變層出, 時事可知。 榮川多有與我同心者, 京畿亦有之。 汝亦宜同事’ 云。 其後路遇 朴訢、 柳之燧則曰: ‘聞 榮川洪聖澄, 多有義氣, 可爲將帥。 願一相見, 如或來, 須相報知’ 云。 且 昌寧人 成至道曰: ‘熒惑入南斗, 時運且不吉。’ 朴訢曰: ‘近來各邑千摠, 多差以前銜, 吾當爲千摠。 若結以恩義, 孰不從乎?’ 聖澄曰: ‘ 江華則只送兵百人, 可以奉還廢主’云。 呂後望且言: ‘謫在高嶺時, 僉使 鄭汝麟, 夜與同坐, 墮淚曰: 「吾受 朴承宗厚恩。 今雖授此任, 常有爲國之心」 云’” 洪聖澄供稱: “曾往 朴光先家則曰: ‘謫客數被移配, 何以堪之?’ 出來時, 見 淮陽府使 趙纉韓, 則墮淚而言曰: ‘吾今雖仕宦, 不能忘舊主, 而 朴亦多戀舊主之心’ 云。 今年春, 往 禧集家則言: ‘去冬往覲祖父謫所, 仍見謫客 沈之淸,解衣給之曰: 「何時復舊主乎?」 之淸曰:「吾輩亦幾何在此?」, 又見 呂後望則曰: ‘ 崔來吉薄待謫客, 何時殺此漢乎?’ 鄭汝麟亦曰: ‘吾若得北兵使, 可以伸吾志’ 云。 禧集又言: ‘ 星州朴訢, 卽 之燧之六寸, 而與我同事’ 云。又曰: ‘ 成至道善占術。 适變時, 占國運不吉, 將欲迎賊, 發行三日, 又占聖上八字, 則極吉, 恢復不遠, 故還歸矣。 近來又占, 國運不吉, 故與 陜川人等將擧事’ 云。 臨別又言: ‘ 星州哨軍, 則 鄭澹爲千摠, 當以馬兵二哨, 送于 江華, 奉舊主出來, 而但無子, 當以 仁城之子爲東宮矣。 全羅道則 鄭汝麟、 高用厚叔姪, 皆當從之。’ 仍誦 用厚詩云: ‘北闕更新主, 小臣餘此生。 江村獨歸處, 身上愧簪纓。’ 是戀舊主之詩也。 且言必須往見 朴訢, 故來路果見之, 則 訢以馬給之曰: ‘ 仁弘之姪, 有謫湖南者。 其子以此馬給我’ 云。” 成至道供稱: “己巳冬, 往 禧集家, 則 禧集之五寸叔 宗衡及 徐淑、 成欖、 宋知述皆來會。 禧集曰: ‘吾輩與 日光、 之燧及 陜川人同謀擧事。 近來熒惑入南斗, 此何象耶?” 答曰: ‘ 《史略》云:「熒? 腎恤皺軗 天子下殿走」 云。 所知, 只此而已。’ 禧集曰: ‘虜亦應天象耶?’ 又曰: ‘主上八字如何?’ 答曰吾嘗推占, 知爲極吉, 似難擧事。’ 禧集曰: ‘若有 胡亂, 事可易成。’ 仍與飮酒而罷云。” 梁桓供稱: “ 之燧之弟 之煥, 與其妾家相近, 往來親切。 所謀之事, 曾所預知。 昌寧成至道善占術, 自言其相: ‘髯及於眉間, 則當爲堂上嘉善, 而近來其髯頗長, 故敢生兇謀。’ 成欖廢朝時及第, 而反正後削科,有怨國之心。 星州呂孝曾、 昌寧成昌履及 朴訢、 鄭槫、 鄭柅、 柳之燧等, 與 天植, 同宿于 鄭榑家, 而結謀云。” 柳之燧供稱: “ 鄭榑、 梁桓常往來其家。 一日, 榑曰: ‘ 天植善相人,亦曉風水。 與 鄭澣往來 金山, 共謀兇逆, 汝可與其人, 同死生’ 云, 桓則曰: ‘有僧自湖西來言: 「眞人在近地, 將欲訪見」 云。’ 又以 李泰卿之事言之, 榑亦言: ‘湖南、湖西有 李一命、 權大進者, 可與同謀。 嶺南則 崔睍爲謀主。 睍見 天植, 稱爲英雄’ 云。 朴禧集之弟 慶集則曰: ‘ 許完、 鄭汝麟、 金藎國兄弟, 與 柳孝立同事, 而網漏’ 云。” 李一命供稱: “本與 天植極切, 天植乞製給俗衣曰: ‘吾有所爲之事, 欲還俗矣。’ 問其爲何事則曰: ‘有擧大事者, 吾當往從之。 頃往 慶尙道, 訪見聖人。 聖人當自南而起。 其時吾當更來, 汝等須整理而待之’ 云。” 李侹供稱: “曾與 天植相切, 天植曰: ‘ 澣相貌魁碩, 終爲貴人。 大進則其家黑馬變白, 此眞瑞也。 朴訢則當於 慶尙道聚兵。 裵尙龍則沈重可謀大事, 故皆同兇謀云。” 朴光先供稱: “ 洪聖澄來言: ‘吾以復立 新羅爲號, 打破一二縣邑, 則朝廷必震恐。 且備犒軍酒米十五石,而以未得軍兵爲恨’ 云。” 竝伏誅。 鞫廳以爲: “ 權純旣已知情, 宜伏其律。” 上以不無可恕之道, 命流三千里。 上引見大臣、禁府、兩司, 問以獄情, 諸臣對以逆狀無疑。 上曰: “旣殲渠魁, 不必窮治。” 其後又下敎曰: “此輩失志怏怏, 相與思亂, 其心可惡, 厥罪當誅, 但援引之辭, 眞贗相雜,火炎之烈, 玉石難辨, 此甚可懼也。 況近日旱災甚酷, 此豈非無辜冤死而然也? 其與多殺而致傷和氣, 莫若小緩而開其自新也。 渠魁旣伏典刑, 其餘枝, 倘似不必盡誅。 當此耕種之節, 連續拿來, 則必有駭散失農之患, 商量以啓。” 鞫廳以 朴宗衡、 徐淑、 成欖、 宋知述、 吳益煥從逆之狀, 請拿問, 答曰: “民之怨叛, 由予不辟。 俯仰慙懼, 無以爲心。 此輩皆與脅從無異, 竝勿問。” 是獄, 承服正刑者, 鄭澣以下凡三十餘人; 斃於杖下者, 楊時泰等十餘人; 定配者, 高用厚等六人; 放送者, 崔睍、 朴等五十餘人。 崔睍之被釋也, 上下敎曰: “頃年夜對時, 適有處置未盡之事。 此人適入侍, 力爭不已, 予頗苦之。 厥後思之, 眞是愛我者也。 今雖被罪, 必不負初心, 分揀放送。” 禮曹請以討逆之慶, 告廟、陳賀, 上只命頒赦, 加百官資, 陞授告變人 趙興賓堂上, 韓渫六品實職。
배상룡묘표(裵尙龍墓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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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숙종16)에 세워진 배상룡(裵尙龍)의 묘표로, 찬자는 허목(許穆, 1595∼1682)이고, 서자는 배정휘(裵正徽, 1645∼1709)이다. 배상룡(1574∼1655)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이다. 할아버지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이고, 아버지는 영남수군절도사 설개(楔皆)이며, 어머니는 자야성충순위(藉冶城忠順衛) 야성송씨(冶城宋氏)로 원(源)의 딸이다. 부인은 사재감정 신인서(愼仁恕)의 딸이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여러 차례 그의 공거문(公車文)이 뽑혔으나 아버지가 비명으로 죽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동생을 열심히 가르쳐 태학에 올렸으나 일찍이 죽자 더욱더 인사(人事)에 뜻을 잃고 몇 번 천거되었음에도 거절하였다. 또한 그는 끝까지 자신을 추천하는 자 없이 죽기를 원하였다. 1631년(인조 9) 권대진(權大進) 등이 영남의 최현(崔睍)·승려 천식(天植)과 함께 일으키려고 했던 모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심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1637년 천거로 선교랑의 벼슬이 내렸으나 받지 않고 임종 때 벼슬을 쓰지 말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만 쓰라 하였다 한다. 1774년(영조 50)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고, 1785년(정조 9) 유림들이 세운 성주의 도천사(道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등암집』이 있다. 비문의 초반부와 중반부에는 배상룡의 엄격한 성격과 뛰어난 재능, 효성에 대해 서술하였고, 후반부에는 그의 선조와 후손에 대해 기록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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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암 배공 묘비(藤庵裵公墓碑) 조선국 처사 등암 배상룡(藤庵 裵尙龍)의 묘 : 유인(孺人) 거창(( 巨倉) 신씨(愼氏)를 합장함. 숭정 병자 후 55년 경오년(1690, 숙종 16) 5월 일 세움. 후손 통훈대부 전 행사헌부장령 배정휘(裵正徽) 글씨. 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 때의 연호) 말에
내가(허목) 영남으로 관직을 맡아 가게 된 아버님을 따라 갔다가
거타(居陀 : 거창의 옛 이름)의 객관에서 공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공은 스스로를 엄하게 지키고 주고받음을 바르게 하며
군자의 풍모에 대해 즐겨 말했으므로 나는 마음속으로 존경했다.
그 뒤로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 : 정구)이 별세하여
가마(加麻 : 제자나 친구가 두건 등에 삼베를 두름)의 대열에서 함께 조문하였다.
그로부터 10여 년을 만나지 못했다.
남쪽 지방의 선비가 이전 현인들의 유적을 구해보고자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고변이 있었는데,
선한 무리가 연루되고 공 역시 죄인으로 묶여 서울로 들어왔다.
공이 5선생의 예설(禮說)을 가지고 와서 주며 말했다. “나는 죽어도 저버릴 수 없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뒤
내가 영남으로 피난을 가서
어른들로부터 알지 못했던 일을 더 많이 듣게 되어,
공이 사는 곳을 지나갈 때마다 연세 많고 덕망 있는 분으로 모셨다.
몇 년 뒤 공의 부음을 듣고는
침문 밖에서 곡을 하고 장례를 치를 때는 애도하는 글을 지었다.
공이 남긴 두 아들이 삼년상을 마치고 아버지의 묘표를 세우려 하면서
내게 명(銘)을 부탁했다.
나는 공의 덕을 성심으로 그리워하기 때문에 사양할 수 없어
뚜렷하게 드러난 공의 선행을 밝혀 다음과 같이 짓고 비석에 썼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와 식견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문장을 잘하여 여러 번 과거에 선발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아버지이신 장군이 참형을 받고 세상을 떠나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고 이름 없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채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힘썼다.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어리고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공은 더욱 마음을 기울였다.
병이 나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서 구하고 예를 가르치며,
잘못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면서 매로 다스렸다.
그러자 학문이 날로 발전하여 남쪽 지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사람이 바로 계장 배상호(季章 裵尙虎)인데,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명을 타고나지 못해 일찍 사망했다.
공은 통곡하고 상심하여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져
간혹 누가 천거하더라도 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평생을 마쳤다.
일찍이 정선생(정구)의 문하에 들어가 의리에 관한 학문을 배웠다.
평생 끝없이 선을 좋아했는데,
또한 다른 사람의 악을 수치로 여기고 보아 넘긴 적이 없을 만큼 엄하고 깨끗했다.
가까운 사람과 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밀어 먼 사이까지 미치게 하니
문중 전체가 권장되게 되었다.
자제를 교육할 때는 엄하면서도 은의가 있었으며, 관혼상제를 소중히 여겼다.
정선생의 문집을 편집해 간행하고 비를 세웠으며
서원을 지어 사문(斯文 : 유학)에 큰 공로가 있었다.
종적을 감춘 처음에
무흘(武屹 : 금릉군 증산면)에 집을 짓고 자연 속에서 세월을 보내며
별호를 등암이라고 지었다.
공의 이름은 배상룡이고 자는 자장(子章)이며 성주(星州) 사람이다.
대부(大父)가 사재감 정 배덕문(裵德文)이고,
아버지는 영남수군절도사 배설(裵楔)인데, 모두 호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정부인 송씨(宋氏)는
본관이 야성(冶城)이며, 충순위 송원(宋源)의 딸이다.
공은 명나라 만력 2년
우리 선조 임금 7년 갑술년(1574, 선조 7) 10월 6일에 태어나
효종 6년 을미년(1655, 효종 6) 8월 28일에 운명했다. 향년 82세였다.
부인 거창신씨(居昌愼氏)는
군자감 정 신인서(愼仁恕)의 딸로, 정숙하고 온화하며 인자하였다.
공이 지성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선조를 받들며 동생들을 보살피자,
부인은 마음을 다해 뜻을 받들고 순종하여 덕이 공의 배필로 딱 들어맞았다.
공보다 23년 먼저 계유년(1633, 인조 11) 7월 3일에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과 합장했다.
묘지는 성주 서쪽 후리동(厚理洞)에 있다.
2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세유(世維)와 세면(世綿)이고,
사위는 이유전(李惟銓)과 김시수(金是燧)인데, 모두 사인이다.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유풍과 남긴 가르침이 또한 자손에게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아, 보물을 품고 세상을 피해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았네 굳세고 온화하고 충성스러우며 성실하고 자랑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두려워 복종하고 오히려 뛰어난 덕행이 있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춘추관·관상감사
허목(許穆)이 짓고 전서(篆書)함. |
등암집 (藤庵集) / 서지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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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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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암집 (藤庵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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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배상용 (裵尙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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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자장 (子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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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
등암 (䕨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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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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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版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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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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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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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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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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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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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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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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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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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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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집류 | |
『등암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배상룡(裵尙龍 ; 1574∼1655)의 시문집이다. 배상룡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사재감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의 손자이며, 영남수군절도사 설개(楔皆)의 아들, 어머니는 자야성충순위(藉冶城忠順衛) 송원(宋源)의 딸이며, 부인은 사재감정 신인서(愼仁恕)의 딸이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이 책은 1799년(정조 23) 배석일(裵錫一) 등에 의하여 편집, 간행되었다. 시는 대부분이 차운과 서정시이며, 만사는 시와 별도로 분류되었는데, 정구(鄭逑)·이윤우(李潤雨)·등 당시의 유명인사들에 대한 것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경재잠해(敬齋箴解)」는 주희(朱熹)의 「경재잠」을 저자가 모두 10개 조항에 걸쳐 주석을 붙이고 소상하게 해석한 것이다.
여러 차례 그의 공거문(公擧文 : 應試·應製·疏章 등의 詩文)이 뽑혔으나 아버지가 비명으로 죽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어머니를 봉양했으며, 동생을 열심히 가르쳐 태학에 올렸으나 일찍이 죽자 더욱더 인사(人事)에 뜻을 잃고 몇 번 천거되었음에도 거절하였다. 또한 끝까지 추만(推挽)하는 자 없이 죽기를 원하였다. 1631년(인조 9) 권대진(權大進) 등이 영남의 최현(崔睍)·승려 천식(天植)과 함께 일으키려고 했던 모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금부도사에게 붙잡혀 추국을 당하기도 하였다. 1637년 천거로 선교랑의 벼슬을 쓰지 말고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만 쓰라 했다. 1774년(영조 50)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 시정에 증직되고, 1785년(정조 9) 유림들이 세운 성주의 도천향사(道川鄕祠)에 배향되었다. 정교는 발문에서 이 책의 시문을 평하여 ″담박하면서도 고상하고 원활하면서도 평정하여 도학적인 운치가 있다.″고 하였다. |
첫댓글 * 상기 자료상 주요 인물의 생몰연대
1. 배덕문(1525~1603)
2. 배설(1551~1599)
3. 배상룡(등암;1574~1655)
4. 배상호(괴재;1594~1632)
5. 배정휘(고촌;1645~1709)
6. 배석휘(겸옹;1653~1729)
7. 배석일(부지암;1813~1888)
* 이상한 점(당시 왕가.사대부가에서 15세 전에 대부분 혼사를 치루었다는 전제)
1.배덕문이 배설의 진짜 아버지라면, {만26세에 장남인 배설을 낳았다}가 됩니다.
2.배상룡이 배설의 진짜 아들이라면, {만23세에 장남인 배상룡을 낳았다}가 됩니다.
3.추정 결론: 1세를 25년 전.후로 하여, 계대를 인위적으로 짜맞추었다는 증거입니다.
1. 정구(한강;1543~1620)
2. 장현광(여헌;1554~1637) :정구의 조카사위이자 고제자
3. 문위(모계;1554~1631) :거창출신, 정구의 수제자
4. 허목(미수;1595~1682)
5. 장응일(청천당;1599~1676) :장현광의 조카이자 양자
만력말에거창의 객관에서등암 배상룡을미수 허목이처음 만나다
만력말이면 1620년
한강 정구가 죽자함께 조문하다
정구가 죽은 해는만력말인 1620년
정구의 제자라는데제자가스승의 몰년을 몰랐단 말인가등암 묘표문은허목이 작성하지 않았다는 말씀효숙공신도비문과친형제인 것 같슴미다
그후
허목은
고로
조작수법과 수준이
* 위조족보가 만들어진 근거자료들의 주요 연대
1. 등암(배尙龍)묘표 : 1690년에 세움
2. 가범 : 1723년 7월 16일, 배석휘(碩徽)가 간행(비고:역대 조상들에 대한 기록)
3. 등암(배尙龍)집 : 1799년(정조23) 배석일(錫一) 등에 의하여 편집.간행
4. 서암선생실기 : 배석일(錫一)이 1860년에 간행
5. 고촌(배正徽)집 : 1940년에 고촌의 8세손=정환(貞煥)에 의하여 편집.간행
* 이상한 점
1.등암집과 서암선생실기를 편집.간행한 배석일(錫一)이란 사람이 동명이인?
2.등암집이 1799년에 편집.간행된 것인데, 배석일의 출생년도는 1813년?
* 상기 실록자료의 연대순서별 인물 기록
1. 배덕문 : 1574년(49세) - 사판 삭제 요청
2. 배덕문 : 1593년(68세) - 군공의 잘못(정3품)
3. 배설 : 1599년(48세) - 배설 처형
4. 배상룡 : 1631년(56세) - 권대진 모역사건 연루
*이상한 점
선조실록에 의하면,
배덕문이 정3품직(사재감정?)을 부정하게 제수받은 것은, 1593년 4월 12일 이전입니다.
그런데,
배덕문신도비문엔,
"정유년(선조 30. 1597)에 적의 재침에 加藤淸正이 그 무리들에게 경계하기를,
「현풍의 곽망우당(郭再祐)과 성주의 배제독은 그 예봉을 가히 감당할 수 없으니 조심해서 피(避)하라.」
고 했다. 그 후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 옮긴것은 군공(軍功) 때문이다." 라 하고 있고,
배덕문실기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난이 끝난 후 사재감정에 올랐다." 라 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어리석은 조작의 명수들이지요.
참고1 :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선조 25)년부터 1598(선조 31)년까지 7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참고2 : 사재감정(司宰監正)
조선시대 사재감(司宰監)에 두었던 정삼품(正三品) 관직으로 정원은 1원이다.
* 공거문(公車文) => 조선 후기에 각종 상소문을 모아놓은 책
정조(1776년~1800년 재위) 때부터 각종 상소를 분류.편집하여, 공거문이란 명칭을 붙이기 시작하였다.
등암(배상룡)묘표문에 공거(公車)란 용어가 있다는 것은,
등암묘표가 허목이 찬한 것이 아니며, 1690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란 반증입니다.
배상룡묘표가
성주에서 발굴되어
일본 경도대학에 가있는 사유가 무엇일까요?
실록엔 배설이 "<경상>우수사"인데
묘표와 등암집엔 "<영남>수군절도사" 인 것은 왜일까요?
배설개(楔皆)에 대하여!
묘표 원문을 보면
해석의 오류로 빚어진 사단입니다.
諱楔(二世)皆贈戶曹參判<휘설(이세)개증호조참판>
이세(배설+배덕문)가 모두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인데
해석자가 二世 부분을 못보았는지 안보았는지
楔자와 皆자를 붙여서 두 자의 이름을 만든 결과일 뿐입니다.
해석문이
원문보다 더 조잡하다 할 것입니다...
묘표문 원문을 보면
정구(鄭逑)의 호가
한강(寒岡)이 아니라
송강(松岡)이라 되어 있습니다...
실록에
배상룡(尙龍)은
침착해서 큰일을 도모할만 하다(沈重可謀大事)
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631(인조9)년
권대진 등의 모역사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금부도사에 붙잡혀 추국을 당하기도 하였다?
실록의 관련내용은
포리(捕吏)가 사방으로 나가고
연루자가 서로 잇달아 처음부터 끝까지
3개월 동안에 베어 죽인 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인조 9년(1631)2월 : 성산현으로 읍격을 강등
權大進의 모역사건에 성주인 朴炘(박흔)이 연루된 것으로 인함.
(출처 : 성주군 연혁.역사)
五先生禮說(分類) :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엮은 예설서.
수량 : 20권 7책
창작/발표시기 : 1629년
간행/발행처 : 이윤우, 권태일
題五先生禮說後(미수 허목 識)에는
계장 배상호(尙虎)로부터 전해받은 것으로 되어 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