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국민학교 5학년때 우리는 갑자기 전쟁 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구국민학교 5학년 때인데 전쟁이 나자 며칠후 학교 건물이 육군본부에 접수되어
우리들은 처음에는 한 반에 있던 이재원(李在元)의 집 慈惠병원에서 며칠 공부했으나
잠시후에는 대봉동(?)에 있던 육군관사로 옮겨 수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한참 지난 8월 18일에야 팔공산 가산에 침투한 북한군이 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에 있던 임시정부는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고 대구시내에는
갑자기 피난령(소개령)이 내리기도 했다.
다행히 대구에서 그대로 있었어도 별다른 전쟁의 피해를 보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식구들은 멀리 가지 않고 가창면 냉천동에 있던 과수원으로 가서 서너달 지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세좋게 남하하던 북한군이 다부동(多富洞) 전투에서 저지 당해
영천 방면으로 방향을 돌렸고 곧 이어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과 9.28 수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즉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서 일어난 한국군 제1사단, 제6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의 합동 방어전투로
8월 13일~8.30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결국 북한군이 패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사실이지만 이때 제1사단장은 백선엽(白善燁)장군 (1920~ ).
그는 평남 출신으로 일찍 월남하여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승진도 가장 빨랐고
다부동 전투때에도 전력을 다해 지휘에 임했다고 한다.
다부동에서 대구까지는 불과 20Km, 만약 이때 방어 전투가 실패했다면 곧 대구는 인민군의 점령하에
들어갔을 것이고, 바로 부산까지 북한군은 진격했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 군사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우리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래서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의 유적이나마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7년 전(정확하게는 2011년 1월 17일) KB 39 사이버팀과 三木會가 주동이 되어
대구, 부산의 동창생 일동과 함께 1박 2일간의 여행 코스의 첫 방문지로 이곳을 찾아간 것이다.
趙芝薰 선생의 詩라고 쓰여 있다.
(芝薰 선생은 전쟁 때 종군기자로 다부동전투를 취재한 적이 있다고 한다.)
대구의 박창규 동창이 당시 반공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어 우리 일행의 안내를 자청하여
그의 노고로 전적지 현장으로 안내와 관계자로 부터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가 해운대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거가대교를 건너
거제도로 갔다. 거제도 해변에서 참가자 일동 22명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7년의 세월이 지나니 이 중 3명의 친구들 모습은 이젠 볼 수가 없게 되었다.
(2018년 6월 24일 아침 鶴軒 記)
(2019년 1월 13일 일부 增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