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바다와 소설
강 인 수
나는 지금도 영화 『노인과 바다』를 즐겨봅니다.
쿠바의 작은 어촌 마탄자의 어부 산치아고 노인(안소니 퀸)이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고 난 뒤, 소년 마놀로는 식당에서 빌려 본 신문에서 양키팀의 다마지오가 히트와 홈런을 쳤다는 소식을 알게 됩니다. 바닷가 잔교(棧橋) 끝에서 먼 바다로 향하여 다마지오의 소식을 고함쳐 알립니다. 하바나에 사는 산치아고의 딸이 방문하여 마놀로가 고함치는 걸 보고는 들리지도 않는데 무슨 짓이냐고 핀잔을 주지만, 마놀로는 자연의 소리를 산치아고 할아버지는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장면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물론 산치아고 노인이 엄청 큰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도 명장면이지만.
나는 어릴 때 특히 일곱 살 때(1945년) 일본 군항 사세보와 아이노우라(相浦) 포구에서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2차대전이 한창일 때, 항구에 떠 있던 회색빛의 군함들. 옆 조선소에서 선박 만드느라 밤에도 쇠붙이 두드리는 깡깡이 소리들. 미군기의 폭격, 굶주린 한국 징용병들의 초췌한 모습들.
전쟁말기에는 사세보의 변두리 아이노우라로 이사를 갔습니다. 바닷가 철둑길 안쪽의 작은 분지마을에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을 모아 방공호를 파는 군역(軍役)을 맡아 일했습니다. 배급으로 나오는 것은 만주콩(大斗)뿐이어서 그해 여름은 내내 콩밥만 먹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장성해서 30대까지도 콩은 먹지 않았습니다. 콩밥이 먹기 싫어 어머니에게 투정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곧잘 바다 건너 멀리 고향 울산에 가면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또래들은 철둑 굴다리를 지나 바닷가로 자주 나갔습니다. 자갈과 모래와 풀이 듬성듬성 나 있는 자갈밭을 지나면 바로 바다로 이어졌습니다. 바닷가에서 게와 조개를 잡았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면 제법 큰 무인도 바위섬(모자섬)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가끔 노는 날에는 뗏목을 만들어 모자섬으로 게와 조개와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우리 또래 아이들 나까무라 리슈 히데오 마사꼬는 바닷가에서 초여름부터 퐁당거리며 여름을 보내다 보니 한 여름이 지나갈 무렵에는 헤엄을 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다 갈 무렵 상륙한 미 해병대들의 완전무장한 행렬이 철둑길을 지나가는 것을 숨어서 보았습니다.
45년만인 1990년 겨울, 일본 여행을 하면서 사세보항구와 아이노우라를 방문했더니 조금은 변했지만 내가 살던 집은 옛 모습 그대로이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어릴 때나 청소년시절에 아무도 내게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내 주변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민학교 4학년 때의 담임선생이었던 이병화 선생님은 오후 수업시간 때는 반드시 당신이 읽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신설학교이어서 교실이 없어 동사무소(마을회관)에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 들은 것이 『장발장』『몬테크리스트 백작』『홍길동전』『유불란 탐정』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간혹 독립투사 김구선생 윤봉길의사 이재명의사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던 선생님의 말씀과 그때 내가 생각했던 영상들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나는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고 방과 후 이야기 시간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병화 선생님은 좌익사상(사회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해 6.25전쟁이 나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마 빨갱이였을 거라 했습니다. 선생님은 늘 두루마기를 즐겨 입어셨고 총각선생이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 분에게서 소설이란 걸 처음 접하게 되었고 그분을 부모처럼 따랐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집에 하숙을 했었는데 아침마다 내가 솥에 불을 지펴 물을 데워 세숫물 대야를 준비했었습니다.
서른 살이 되어 부산의 고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게 되자 결혼도 하여 안정이 되어 소설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7년 계획으로. 소설가가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소설가로 등단하면 명예도 명예지만 대학교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요산 김정한 선생에게 소설을 공부하기 위해 부산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의 대표 단편「사하촌」과「모래톰 이야기」를 여러 번 정독했습니다. 4년 동안 열심히 창작 연습을 하고 단편소설을 매일 두 편씩 읽고 카드에 메모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 카드가 수백 장 남아 있습니다. 단편 다섯 편을 습작하자 신춘문예의 현상응모에 3년을 계속했습니다. 1월 1일만 되면 신새벽에 일어나 첫 버스를 타고 부산역에 신문을 사러 갔습니다. 절망의 연속. 1977년 정초에는 화도 나고 하여 바로 해운대 바다로 가서 목이 터져라 고함도 쳤습니다.
모두 낙방이었지만 1975년 조선일보에 「변신」이란 작품이 최종 5편에 들어갔고 76년에 <세대>란 문학잡지에 중편 소설 「황산기행」이 최종 3편에 들어간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로 했습니다. 신춘문예나 현상 응모를 포기하고, <현대문학>에 추천받기 위해 오영수 선생님에게 이태 동안 사사했습니다. 그때는 오영수 선생께서 울산 웅상면 곡천리로 낙향했을 때입니다. 1977년 봄부터 만 2년 동안 12번 정도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은 필화사건으로 1979년 5월에 영면하셨습니다. <문학사상> 1979년 1월호에 「특질고」란 좀 특별한 단편으로 각 지방의 특질을 서술하면서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 좋지 못한 내용을 다루었기 때문에 일어난 필화 사건으로 <문학사상>이 당분간 정간하고 사과문을 신문에 게재하는 와중에 선생님은 위장병이 도져 운명하셨습니다. 선생님의 묘소와 오영수문학관은 내가 중학생(언양중학교)이었을 때 걸어서 통학하던 길 옆의 언양 화장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즈음 “과연 문학적 제능(文才)이 나에게 있는 것일까?” 자문(自問)해 보았습니다. 모든 예술인들은 창작을 하다가 몇 번이나 자신의 예술적 유인인자에 대해 상당히 고민합니다.
오영수 선생님을 뵈러 가기 전 선생님의 대표작 「갯마을」「메아리」「수련」「머루」「고개」등을 여러 번 정독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의 배경은 거의가 고향 언양이었습니다. 나는「갯마을」을 읽고는, 내가 해녀 이야기를 쓴다면 해녀가 물밑에서 전복 해삼 고동을 직접 채취하는 물질작업을 중심으로 구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바다를 좋아하고 수영선수는 아니지만 물질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으니 ‘해조음’이나 ‘밀물’이란 제목으로 작품을 쓰기로 계획했습니다. 친구들과 1975년 6월 하순 토요일 오후 늦게 영도 태종대에 놀러갔었는데 황혼녘 물질하고 나오는 해녀를 만나 대화를 하다가, “물질하면 제일 무서운 게 뭡니까?” 나의 질문에 초로의 해녀는 “그야 인골(人骨)이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순간 섬광처럼 떠오른 생각 “아 인골을 보는 것을 클라이맥스로 하면 되겠다.”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다행히 단편「밀물」이 1979년 11월호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되었습니다.
등단 이후 바다에 대한 그리움은 계속되어 섬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기장군 대변항에는 시간만 나면 차를 몰고 주말마다 갔었습니다. 김종근 선장을 알게 되어 멸치배도 타고 오징어잡이배도 타게 되었습니다. 칠순 나이인 2008년에는 운수가 좋아 장편 『어부의 노래』로 한국해양문학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20년 4월에 KBS라디오 문학관에 2018년 5월호 <한국소설>에 발표한 「살구꽃이 피면」이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간 단편소설 82편 중편소설 10편 장편소설 9편을 발표했지만 이렇다 할 좋은 작품이 없습니다. 지나온 세월이 나의 노력에 비해 그 효과가 적음은 나의 문학적 재질이 부족하고 내 노력이 부족하여 좋은 작품을 쓰지 못했음을 스스로 통감하면서 허탈한 마음에 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팔순 넘은 이 나이에도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습니다.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시간 많은 노년에 무엇으로 위안과 즐거움을 누리겠는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 (2020 작가교수세계24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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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수: 1979년 11월호 <월간문학>에 『밀물로 등단. 부경대명예교수. *대표저서: 『낙동강』『최보따리』『아버지 어렸을 적에』『어부의 노래』『이것이 일본의 힘이다』 『하얀 노을』 *수상: 부산광역시문화상, 한국해양문학상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