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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누보
1. 턴 오브 더 센추리(Turn of the century)
올드 구디즈(Old Goodies)는 무엇이 good이었을까?
또한 벨 에포크(Bell Epoque, 아름다운 시대, 1880∼1900)라는 것은 누구에게 아름답게 빛나는 시대였던가?
그것은
신흥 부르조아지의 상승기였다. 현대로의 서막인 동시에 과거의 환영을 농후(濃厚)에게 남긴 일막이기도 했다. 따라서 어느 사람에게 있어서는 귀족적
우아한 잃어버리는 애석한 시절이었으며, 어느 사람에게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강하게 의식되기 시작하는 시절이었다.
러시아는
별개로 하고, 보불전쟁 종결의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동안에, 유럽에는 전쟁이 없었고 사회에는 평화가 가져온 향락적 분위기와 함께
세기말적 퇴폐기와 무정부주의 등 새로운 사상들이 잡탕처럼 공존하였지만, 그 나름대로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의 『현실의 세계』에 의하면 - 인간을 놀라게 하고 의표를 찌르는 것과 같은 것은 그 모든 것을 세기말이라고
명명하고, 천진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가볍게 받아들여 안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말에는 큰 기대가 잠재해 있었다. 어떤 마법의 지팡이를 한번
흔들면 세계의 시작과도 같이 기다리던 1900년이라고 하는 순간으로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롭게 빛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고 모두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890년 전후에는 하나의 저류(低流)가 있었다. 급기야는 종말을 맞이한 19세기의 일체를 잔재,
낡아빠진 사상을 불식(不息)시키려고 하는 욕구였던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원망(願望)에 대응하여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는 "에펠탑(the Eiffel Tower)"과 "기계관"이 출현했다. 에펠탑의 건설 계획에 대해서는 문화인이 강경한 반대운동을
일으켰지만, 이 새로운 랜드마크(Landmark)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다. 1891년 3월에 사망한 쇠라(Georges Seurat)는 생전에
에펠탑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서 이미 화제가 되어 있었다.
7,300톤의 연철을 사용한 에펠탑은 제철 기술의 혁신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 시대의 조류는 러스킨류 수공예에 편들지 않았으며 과학기술과 공업디자인이 착착 진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양식
"아르누보"에는 예술과 산업의 융합을 도모하려고 하는 이원성(二元性)이 내재되어 있었다. 즉, 아르누보는 아츠 앤드 크래프츠의 흐름을 참작함과
동시에 윌리엄 모리스와 양립하지 않는 수정궁과 헨리 콜의 계보를 끌어냈고, 쌍방의 유대를 통해 아르누보와 현대를 연결시켰다.
당시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반 데 벨데는 "철골의 강한 역할이 아름다움을 인도하는 한 미를 창출한다"라고 말했다. 신예술 =
아르누보의 작가들은 모두 모여 철, 유리, 콘크리트 등의 미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오르타(Victor Horta)의 유명한 『츄링가의 집』계단
난간의 곡선이나 기마르(Hector Guimard)의 파리 메트로의 입구도 철의 신기법 없이는 불가능한 디자인이었다.
아르누보는 본질적으로 고전적 자본주의 체제하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귀족지배 이후의 최초의 보편적
디자인 양식이었으며 새롭게 대두한 산업 부르조아지의 지지를 받으면서 세계적 추세가 되었다. 아르누보가 부르주아 사회의 공간을 연출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미술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2. 아르누보의 흥륭(興隆)
순수미술의 팽 드 셰클(fin de siecle, 세기말)은 1886년 인상파 전시회의 개막에서부터 1905년
포비즘(Fauvisme-야수파) 등장까지의 약 20년 사이에 세기말 아르누보는 거의 중첩되어 있었다.
아르누보의 흐름에는 윌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 / 라파엘 전파(煎派) / 고딕 부흥 / 켈트 부흥 (Neo Celfic) / 자포니즘 등등 수많은 원류가
있지만, 1883년 영국의 맥머드의 『렌스시립교회(Wrens City Churches)』의 그림이 명확한 아르누보 양식의 최초의 작품이었다고
인정되고 있다. 이후 머지 않아 1892년경 브뤼셀에서는 홀트와 반 데 벨데가 활약을 시작했다. 그때까지의 역사주의, 절충 양식에 대한 반발이
먼 과거의 기억이나 일본 등 이국(異國)의 미를 참조하면서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신언어로서 아르누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라
베르나르(Sahra Bernard)의 앞가슴을 라리크(Rene Larigue)의 브로우치로 장식하고, 뮤사가 포스터, 그리고 나다로는 사진을
찍었다. 그것은 루돌프 사리가 몽마르뜨에 연 최초의 예술 카바레 "검은 고양이"의 전성 시기였다.
신예술 = 아르누보라는
말은 1894년 반 데 벨데의 선언에서 유래한다. 그 반 데 벨데에게 함부르크 출신의 미술상 지그프리드(사뮤엘) 빙(Siegfried
Bing)이 인테리어를 의뢰하고 일본의 거점으로서 이 점포는 아르누보의 명칭을 세상에 넓혀갔다. 출품자로는 보나르, 드니(Maurice
Denis), 피사로, 쇠라(Georges Seurat), 시냑, 로트렉, 베르나르, 부르델, 로댕, 무네 등등이 이름을 늘어놓고 있었고,
외국으로부터는 비어즐리, 매킨토시, 휘슬러, 티파니 등등이다. 유리세공과 보석품으로는 갈레와 라리크도 참가했는데 빙의 개점 이전부터 갈레의
유리그릇은 파리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아르누보라는 하는 것은, S. T. 마도센에 의하면 '장식만을 생명으로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도'이다. 또한 에밀 갈레는 1900년 '장식이 갖는 상징성을 추방하려고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달을 내쫓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장식으로 꽃피운 상징성이 아르누보의 본질인 것이다. 그 장식의 특징이 관능적이고 환상적인 예의 여러 가지들을 - 백합의 줄기를 생각하게 하는 긴
감각적인 곡선이 그를 휘감으며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의 귀퉁이에서 싹을 틔워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덮어버렸다. - N. 펩스너(Nicolaus
Pevsner)는 그와 같이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폴 모란은 스틸 뉴(스파게티 양식)로 명명하고 벨기에에서는 파링
스틸(뱀장어의 양식)이라고 명명했다. 반 데 벨데는 자기의 작품이 독일에서는 "소용돌이 양식"이 아닌 '벨기에의 사나다
벌레(Bandwurmstil)'라고 불린다고 보도하고 있다.
아츠 앤드 크래프츠 추진자의 한 사람이었던 월터 크레인은 아르누보를
'기묘한 장식의 병(病)'이라고 평하지만, 사실은 이 얽매인 곡선이야말로 한 시기를 풍미하는 《새로운 양식》이었던 것이다.
세기가
바뀌어 1900년에는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이 스타일이 정점에 달했다.
일반론으로서 아르누보는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용하는 새로운 태도에 있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다. 하나는 반 데 벨데나 기마르와 같이 장식과
오브제를 일체화하려고 하는 의식적 노력이며, 결과로서 형태 그 자체도 솜씨 좋게 배합하고 표면과의 조화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노력이다. 어느
것이나 당대의 디자이너에게는 형태의 구성을 강조하는 능력과 대상 및 장식적 요소를 하나의 유기체로 얽어내는 능력이 기대되고 있다.
3. 아르누보의 의미
곡선의 미술사 빅토르 오르타의 명작으로 유명한 『츄링가의 집』(타세르
저택)이나 『소르베이 저택』에 있는 리드믹컬한 조형은 부르주아층을 위하여 디자인되었다. 시대는 이미 왕후 귀족층의 것이 아니었다.
새롭게 발흥한 부르조아 사회를 연출하기 위해서 아르누보는 근대생활의 환경을 스스로의 디자인 양식으로 철저하게 엮어내려고 하였다.
집의 설계는 물론 내실의 모든 것 = 모든 종류의 텍스타일, 가구, 조명기구, 팬(pan)이나 나이프, 잉크 스탠드, 도어 노브(door
Knob), 관절의 이음새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은 체계적으로 통일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뜰리에를 병설한 오르타의 4층 건물의 자택(현재는 오르타
미술관)에서는 퍼블릭 스페이스(거실)에 벨기에파의 비술(秘術)을 집중시키고 있지만, 그 자신이 항상 기거하는 생활공간은 흰 벽이 아닌 윌리엄
모리스의 수수한 벽지로 바른 간소함 그 자체였다. 요는 아르누보의 페티쉬한 공간은 감각성의 과잉이며 작가 자신조차도 질릴 정도였다. 또한 그것은
탄생의 경위로부터 보아도 중류 이상의 신흥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아직 대중을 의식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따라서 잘못하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흐르기 쉬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9세기부터 20세기의
변환기에 거주 공간은 유겐트스틸(Jugend Stil)에 의해 충격을 받는다. 반 데 벨데의 경우 집은 개성의 표현이며, 집에 있는 장식이라는
것은 회화에서의 서명과 같다. 그러나 유겐트 스틸의 참의미는 기술로 포위된 상아탑에 틀어박힌 예술의 최후의 출현의 출격 시도이다.
이 독일어 원문에서 "유겐트 스틸"이라고 하는 것은 광의의 아르누보 양식을 말한다. 실제 반 데 벨데의 아르누보는 '과학성에
저항하는 최후의 출격 시도'라고 되어 있다. 상품디자인이나 건축의 규격화를 추진하는 헤르만 무테지우스(Hermann Muthesius)의 구상이
이후 주류를 이루어 갔다.
그러나 실제는 아르누보의 디자인들도 기계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핵심적
지도자인 반 데 벨데는 물론, 외연(外延)에 위치하는 빈의 오토 바그너와 아돌프 로스, 또는 시카고파의 설리반이나 라이트에게도 보이지 시작한
공통의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N. 펩스너가 '기계를 찬미하고 그 기본적 성격과 그것이 건축, 공예에 미치는 영향의 심리적 결과를
이해한 최초의 사람'으로서 열거한 것이 그 다섯 사람이다. 르네 라리크 또한 보석 연마기를 스스로 개량하고, 신소재를 도입했다. 공업디자인과
근대 건축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러한 진취적인 정신이었다.
그러나 아르누보에 대한 재평가의 기운이 일어난 것은 1960년대부터일
것이다. 사람들은 기능 우선의 디자인에 저항감을 느껴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오로지 물건의 기능성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배제되어 온 장식성이 다시
주목을 받아, 그쯤부터 백화점의 식기 코너에서도 주류는 이미 "good design"이 아니라 꽃무늬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선풍이 되었다.
디자인사(史)가 S. 기디온에 의하면 "인간의 장식하고 싶어하는 욕망은 생리적 현상이며 사랑하거나 배고픔을 견디는 욕구와 같으므로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기계적 대량생산은 역사의 필연이라고 해도 "거기에서 초래된 공예기술의 저하와 소재 감각의 퇴폐가
인간환경을 깊은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4. 각국의 아르누보 양식
아르누보는
19세기 말의 대량생산화 사회를 배경으로 구미로부터 일본에 이르기까지 넓혀져 온 장식 양식이며 윌리엄 모리스의 경우와 달리 짧은 생명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네뷰라스(Nebulars - 성운상태<星雲常態>)한 현상이었기
때문에 그 일곽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별이 제각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독일 오스트리아에 있어 유겐트스틸 / 매킨토시 등의
글라스고파 / 가우디로 대표되는 바르셀로나파/설리반의 시카고파-그것들의 별들은 거시적으로는 확실히 아르누보의 변주를 이루지만, 각자 뉘앙스를
다르게 하고 있었으며 결코 성운의 핵심에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후의 디자인 사조에서는 오히려 외곽의 모든 별들의 영향력이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어느 것이나 협의의 아르누보에서 잘려 나와 단독으로 설명해야 할 큰 존재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르누보 성운의
중추는 벨기에와 프랑스였다.
당시 공업 선진국이었던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은 세기말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거점(大據點)이었다. 젊은
학도 츠바이크(stefan Zweig)는 하계휴가의 여행지를 완벽히 검토하고 뜻을 벨기에로 결정했던 것이다.
벨기에서 아르누보의
형태는 현저하게 추상성이 풍부하여, 꽃모양 등은 준엄하게 거절되었다. -"벨기에 곡선"(리네 베르쥬)의 대표인물 빅토르 오르타는
낭시(Nanci)파의 루이 마조렐과 같이 클레이(clay - 점토)모델을 만들어서 건축이나 가구를 디자인한 것처럼, 그의 조소적 디자인의 비밀은
그 주변에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반 데 벨데는 기능 우선주의자이며 그런 이유로 오르타와는 달리 작가 생명이 길었다. 그는
아루누보의 창시자이자 이론적 지주로 주목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일찍이 묘사적 장식의 배제를 제창하고 "장식은 항상 기능을 암시하고 이성에
기초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제언했다.
쇠라 숭배의 화가로서 출발한 그는 러스킨/모리스/톨스토이/바쿠닌/니체의 저작의 영향을
받아, 생활 환경의 미적 형성이야말로 예술가의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계기로 디자인의 길에 들어선 것은 새로운 가정에 필요한
세간의 모든 것에 '형태의 속임수'를 느끼고 스스로 디자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모리스의 『레드 하우스』과 같은
상황이었다. 가구, 인테리어, 식기, 금세공, 그래픽 등 모든 종류의 디자인분야에 활약한 그의 본래의 특색은 흐르는 듯한 형태의 금속제품과
가구에 있다고 생각한다.
반 데 벨데는 당시 가장 영향력이 풍부한 저술가의 한 사람이기도 했으며 활동영역은 아르누보에 그치지 않고
독일공작연맹(DWB)에 참가하는 등 광범위했다. 1905년에는 바이마르 미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고, 이 학교가 그로피우스에게 계승되어
바우하우스로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적 조부라고조차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무테지우스와 함께 근대 디자인의 윌리엄
모리스와 그로피우스를 연결하는 중요한 존재일 것이다.
이 두 사람 이외에도 세류리에-보비의 가구 디자인 등은 대단히 멋있다.
더욱이 브뤼셀은 보석과 상아의 집산지이기 때문에 아르누보풍 악세사리가 번성했다. 그렇지만 벨기에는 아르누보 초창지라고 알려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이 사라진 것도 가장 빨랐다. 모더니즘의 물결은 도도히 밀어 닥쳤지만 그것 또한 시시각각 변모해 갔던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 19세기는 이 나라를 중심으로 유럽이 격심하게 요동하는 시기였다. 대혁명이 도화선을 끊고,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것에 대신하는 반동기 7월
혁명, 2월 혁명, 보불전쟁과 파리콤뮨 등등. 격동에 이은 격동으로부터 비스마르크에 의한 굴욕의 한 때를 지나 프랑스 제3공화정은 순식간에
패전의 깊은 상처로부터 다시 일어났고 유럽 제일의 금융국이 되었다.
프랑스의 아르누보에는 파리(Paris)와 낭시(Nanci)라고
하는 두 가지의 중심지가 있었다. 전자는 국제적인 트랜드 센터이고 추상적, 상징적인 반면에 후자는 향토색이 짙고 보다 구상적, 실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단 조형의 몽환성(夢幻性)은 양자 모두에 공통되는 요소이다.
로렌 지방의 고도 낭시에는 에밀 갈레를 중심으로 하는
낭시파가 이미 1890년에 그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갈레는 청년기에 영국으로 건너가 모리스에 심취하면서 동양의 도자기나 중국 도기를 연구했다.
그의 유리그릇의 구체적인 장식은 아르누보의 장인 중 한 사람인 티파니의 추상적 장식 수법과 대조적이다.
낭시파의 발전에는 두
가지의 요인이 있었다. 하나는 이 지방의 전통인 꽃을 모티브로 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용법은 로코코 부흥의 흐름으로 되어 있었다. 또 하나는
일본의 영향이다. 1985년 이후 3년간 낭시에 유학하고 있었던 다카시마는 일본 화가이기도 하여, 이 지방의 공예가에게 대단한 감화를 미쳤던
것이다. - 갈레의 작품은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유리공예가로서는 물론 가구 디자이너로서도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 좋고 나쁜 것은 구별되어야
하겠지만.....
파리의 아르누보의 경우도 빙의 내력으로부터 이해가 쉽듯이 좌우비대칭의 장식 감각 등기타, 자포니즘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 일본 취향은 세기말의 현저한 현상이고 이집트, 중국, 동남 아시아 등 오리엔탈리즘의 저류도 자포니즘에는 비교할 바가 안 되었다.
엑토르 기마르는 브뤼셀의 아르누보 건축에 감명을 받아 실천자가 되었다. 그의 기호는 강철이나 동보다도 주철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지의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가볍고 오묘한 선의 놀림은 벨기에파와 다른 산뜻하고 매우 세련된 분위기를 보였다. 파리 지하철의 입구는
그의 걸작이며, 아르누보를 별칭 메트로 양식이라고도 부를 정도이지만 3차원적으로 굴곡이 교차하는 음악적인 조형은 S. T. 누드센의 주장에
의하면 네오 바로크의 맥류인 것이다.
미국의 티파니도 여기에서 언급해 두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루이스 콤포트 티파니는 처음
회화를 공부했지만, 모리스에게 감화되어 1878년 이후 응용 예술에 전념했다. 로맨틱한 독창성에 의해 아르누보의 혁신적 실험자가 되었다. 특허를
얻은 “파블리 글래스”라고 불리는 수공 유리그릇의 형상, 기법, 채색은 유럽의 유리 공예에 큰 영향을 주어 다수의 모방자를 낳았다. 얇고 가벼운
브라운 글래스에는 꽃이나 수술을 암시하는 미묘한 아르누보풍의 리듬이 새겨져 있었다. 그도 또한 일본의 인테리어에 관심을 갖고 때로 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유리의 가능성을 가장 열심히 추구했지만, 금 세공품이나 ‘티파니 비잔틴’ 이라고 일컫는 일종의 장중한 창(窓)
장식을 포함한 건축 디자인도 중시했던 것이다. 1900년 이후의 티파니는 도기, 보석 세공, 브론즈 품의 조명기구 등으로 관심의 폭을 넓히고
있다.
5. 리버티 양식
아르누보는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레 플로레알” (꽃의 양식) 이라고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스틸레 리버티”(리버티 양식)라고 한다. 그 명칭은 런던의 번화가인 리젠트 스트리트에 있는 ‘리버티 백화점’에서
유래한다. 이 기업은 당초보다더 국제적으로 성공했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그 상품의 매력이 어필하였던 것이다.
1862년
주일(駐日)영국공사 올콕은 일본의 산물을 수집해서 런던의 국제박물관에 전시했다. 유럽의 반응이 좋아서 재패니즘 유행의 단서가 되었다. 폐막 후,
출품물의 판매를 담당했던 '파마 & 로저스 상회'는 일본의 물산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 상회의 지배인인 젊은 아더(Arthur) /
래젠비 리버티(Lasenty Liberty). 그는 1875년에 독립해서 리젠트가에 "동인도관(東印度館)"을 개업한다. 그것이 리버티 백화점으로
발전해서 지금도 이 가게의 지하매장에 있는 오리엔드 코너에는 창업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중근동이나 극동의 물품들이 바자회처럼 진열되어
있다.
아더 리버티의 상선은 중근동, 인도, 극동을 순회하며 이국의 물건을 사들였다. 특히 동양의 실크, 도자기, 부채, 불상,
칠보자기 등이 인기 상품이 되었다.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아더가 기행문을 쓰고 그 부인이 사진을 찍은 사진집도 이 가게에 보존되어 있다.
거기에다 리버티는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감정가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프로듀서였다. 아름다운 디자인을 공급하고자
하는 모리스의 디자인을 발전시켜서 그는 버킹험의 W. H. 헤이슬러 상회에 아르누보의 양산품 제조를 위탁, 디자인의 대중화에 주력했다. 또한 반
데 벨데로 하여금 '봄이 온 듯한 디자인'이라고 감탄하게 만들어 무테지우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찰스 보이지나, 켈트 양식의 미를 최선을
형태로 공예품에 도입했다고 하는 아치볼드 녹스 등, 아츠 앤드 크라프츠계의 디자이너와도 제휴했다. 지금도 인기가 높은 리버티 프린트는 동양의
섬유 제품에 대한 수요에 부응한 아더 리버티 자신의 아이디어이다.
그의 최대의 공적은 우키요에(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화)의 영향을
받아서 여백의식을 현대 디자인에 도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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