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첫 대면
해군 장관 부인 차영순이 강화 국도 상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된 후
정부측의 비대위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정말로 그들의 말대로 스물 두명의 사모님들이 차례로 희생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장관들도 있었다.
더구나 정일만 정보국장이 그 자리에서 물러 선후 비대위를
이끌고 갈만한 뱃장있는 사람이 없는 상태였다.
제기랄. 정부라는 게 이렇게 무력한 줄 몰랐어.
차라리 국민들에게 알리고 공개 수사를 하는 것이 옳은 일일지도 몰라.
함부로 말을 뱉는다고 총리한테 여러 번 핀잔을 들은 공보부장관 박인덕이 불평을 했다.
이 일을 세상에 알려 보세요. 그날로 우리는 모가지가 열 두개라도 못 당해요.
고일수 법무장관이 거들었다.
이렇게 질질 끌려 다니다가 사람 다 죽인 뒤에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박상천 해군장관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는 부인 장례식에도 가지 않고 비대위 대기실로 쓰는 효자동 안가에 틀어박혀 있다가
총리실겸 비대위 사무실인 이곳에 나타났다.
정일만 전 국장은 장관들의 이런 불평을 듣는지 안 듣는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는 국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정보국의 자문역이라는 명목으로 비대위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에처럼 사태를 손에 쥐고 능동적으로 일하지는 않았다.
저어...
그때 총리 비서실장인 김영기가 들어오면서 입을 열었다.
총리 각하께서 모두 회의실로 모이시랍니다.
뭐야? 또 탁상공론이야?
박인덕 장관이 불평을 하면서도 제일 먼저 일어섰다.
곧 총리가 들어와 비대위 공식 회의가 열렸다.
방금 민독추 집행위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총리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가 긴장한 표정이었다.
거의 점퍼 차림이었으나 고일수 법무장관과 김휘수 재무장관 만은 단정하게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그들을 민독추 집행위라는 명칭으로 총리께서 호칭 하셨는데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까
정채명 내무장관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아, 인정한다기 보다...
총리가 갑자기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똑똑하고 분명하고 부러지게 하십시오!
박상천 해군장관이 다시 큰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술에
취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술이 셀뿐 아니라 아무리 마셔도 전혀
표가 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왕에 현실로 다가온 것을 인정하고 안하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형식론은 집어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박인덕 장관이 손을 흔들어가면서 말했다.
총리 주재하의 국무회의가 열리던 과거와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누구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독불장군들의 모임 같은 회의 분위기였다.
제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소위 민독추 집행위라고 하는 자들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내용은 성유 내각정보국장이 보고하겠습니다.
총리는 국무위원석 뒷좌석에 앉아있는 성유 국장을 돌아보았다. 성국장
옆에는 정일만 전 국장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예. 보고들이겠습니다. 지금부터 23분전인 19시 정각에 소위 민독추
집행위의 자칭 백장군이라는 자가 비대위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녹음한
것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성국장이 손짓을 하자 곧 녹음된 전화 대화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다.
...나는 민주독립정부 수립 추진위원회의 집행위원 백장군 입니다.
내각정보국장을 바꾼대 대해 다시 한번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작
그런 우리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면 무고한 인명의 희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남은 사모님들은 안전합니까?
김영기 비서실장의 목소리였다.
...물론 입니다 숫자는 스물 한 명으로 줄었지만 모두 안전합니다. 그
여자들은 지금 참회의 의식을 치르고 있습니다...
...참회의 의식이라니...또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김영기 실장의 목소리가 흥분되었다.
...우리 여성부장의 인도하에 그녀들과 남편들인 소위 장관님들의 과거
잘못을 낱낱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야? 고문을 하고 있단 말이요?...
...아아, 흥분하지 마십시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우리들이 그런
비민주적인 일을 할 것 같습니까? 고문 같은 것은 당신들의 무기가
아닙니까? 다만 사모님들은 스스로 옷을 모두 벗고 깨끗한 몸으로 그들의
잘못을 한사람 한사람 고백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맙소사! 옷을 모두 벗겼다고?...
이런 나쁜 놈들!
대화 녹음을 듣고 있던 김교중 육군장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스피커가
일단 멈추었다.
파렴치범들 아니야. 내 마누라 몸에 손만 댔어봐라!
팽인식 장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 조용히 합시다. 설마 그런 야만스러운 일이야 일어났겠습니까? 자
다시 시작합시다.
총리의 말이 끝나자 곧 스피커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벗긴 것이 아니고 참회하기 위해 그녀들이 택한 일입니다. 몇
명이 살아서 돌아갈지 모르지만 모두 새 사람이 되어 돌아 갈 것입니다.
...사모님들은 지금 어디 있나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절대 안전하니까 안심하시구요... 오늘
요구 사항은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날까요?...
...내일 아침 한강 유람선 위에서 만납니다. 아침 7시에 여의도
선착장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에 우리 대표가 타고 있을 것입니다. 배가
한남대교 근방에 이르면 우리 대표가 얼굴을 보일 것입니다. 당신들
대표는 두 사람만 허용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성유 국장이여야
합니다....
....또 한사람은...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들 대표가 누군지 어떻게 압니까?...
...그건 염려 마십시오. 우리가 성유국장의 얼굴을 아니까 승객 중에
우리가 타고 있다가 나타날 것입니다. 당신들 대표는 두 사람 외에는
안됩니다. 엉뚱한 짓 하면 보복 당합니다. 배가 폭파될 뿐 아니라...
한시간뒤 전화 할 테니 회답 주십시오...
스피커는 거기서 끊어졌다.
자, 여러분 잘 들으셨지요. 다음 전화가 올 시간은 20분 남았습니다.
의견이 있는 분은 말씀하십시오.
총리가 의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비대위를 하는 겁니까 국무회의를 하는 것입니까?
김교중 육군 장관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총리가 다시 의석을 돌아보았다.
비대위 멤버가 아닌 국무위원들이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도가 없어져 회의도 중구난방 일뿐 아니라 참석자도 기준이 없었다.
비대위면 어떻고 국무회의면 어때? 지금 꼭 그걸 따져야겠어? 제,
제기랄...
술취한 해군장관이 떠들었다.
그럼 축소 국무회의라고 해둡시다. 의견이 없으시면 제가 결론을
내겠습니다.
총리의 말이 끝나자 조용해졌다.
성유 국장을 단장으로 하고 합동 수사본부의 제3부장 신대령을 대표로
지명하겠습니다.
신대령이 누구야? 육군이야 해군이야?
해군 장관 박상천이 또 혀곱은 소리로 떠들었다.
신동훈 육군대령입니다. 합동수사본부 제3부장이고 육군 특무부대에서
차출된 요원입니다.
성유 국장이 차분하게 설명을 했다.
그러면 그렇게 가결 된 것으로 알고 회의를 마치겠습니다.
총리가 의사봉을 세번 두드리고 김실장에게 말했다.
빨리 대통령 각하와 통화하게 해주어.
그로부터 정확하게 20분 뒤 민독추 집행위의 백장군으로부터 총리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국무총리 좀 바꿔 주시오. 나는 백장군입니다.
자칭 백장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내가 총리요. 백장군 어서 말해 보시요. 아니 내가 먼저 묻겠소. 우리
국무위원 부인들은 무사하오?
우리가 잘 모시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총리께서 결단만 잘 내리신다면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 아내 노릇 어머니 노릇 잘 할겁니다. 그러나
국무위원 여러분이 미련하게 처신한다면...
알겠소. 그래 요구사항은 뭐요?
총리가 백장군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쪽은 성유 국장과 또 한사람을 정했습니까?
그렇소. 성유 국장의 비서나 보좌관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좋아요. 그러면 회담이 성립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시간을 바꿔도 좋습니까?
말해 보시요. 처음엔 아침 7시 첫 출항 배라고 하셨지요?
아침 일곱 시에는 유람선을 타는 손님이 너무 적어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오후 2시로 변경하려고 합니다. 오후 2시 정각에
여의도 선착장을 떠나는...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총리가 즉석에서 대답했다.
수정 제의를 받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경고했지만 엉뚱한
일을 하시려고 한다면 큰 낭패를 당할 테니 이 경고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우리 사모님들이나 잘 모셔 주십시오.
염려 마십시오. 그럼...
백장군이 전화를 끊었다.
곧 총리실에는 성유 국장과 정채명 내무, 김교중 육군장관, 정일만 전
국장이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그자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길밖에 없는 가요?
총리가 정일만 전국장의 얼굴을 보고 물었다. 그는 이미 현직을 떠난
사람이지만 그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성 유국장이 대답을 했다.
그들에게 끌려 다닐 수만은 없습니다.
김교중 육군장관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잡혀있는 인질을 다 죽이고도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기회를 이용해
우리도 그들을 인질로 잡아야 합니다. 협상을 하자면 틀림없이 그들 중
핵심 인물이 나올 테니까 그자를 잡는다면 그들의 본거지도 알아 낼 수
있을 것이고....
그건 지극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만일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면 스물 두
부인의 목숨을 잃게 됩니다.
정채명 내무장관이 조용한 목소리로 반대 의사를 말했다.
이제 스물 한 명밖에 안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스무 명, 열아홉명으로
계속 줄어듭니다.
김교중 장관이 목청을 높였다.
그들이 유람선 위에서 만나자고 하는 것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난 뒤의
일이라고 보아야합니다.
아무 말도 않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던 정일만이 입을 열었다. 그는 말을
계속했다.
한강 복판에 떠 있는 유람선은 외부에서 함부로 공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영문을 모르는 시민들이 많이 타고 있어서
어떤 작전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놈들은 참으로 묘한 착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합니다. 그 대신 눈에 뜨이지
않게 강변에서 유람선을 감시하거나 공격할 수 있는 조치를 해 두어야
합니다. 유람선 내부에도 물론 감시장치나 비상시의 대비책을 세워 두어야
합니다.
정일만의 말을 들으며 총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변 양쪽에서 유람선을 계호하는 일은 김육군 장관이 맡으시고...
내무부에서도 협력해 주시죠. 그리고 유람선내의 일은 성유 국장이 알아서
하십시오. 오후 두시까지면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나가서 일들을 하세요.
총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모두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김교중 육군장관은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튿날 오후 2시.
추병태 경감은 시골 중늙은이로 변장을 하고 못생긴 중년 여자 한사람과
부부로 가장하고 유람선에 올랐다.
추경감은 2시 출발하는 배에 중년 여자와 함께 서로 손을 잡고 올라탔다.
쑥스럽기 짝이 없었다. 추경감은 배에 오르면서 집에 있는 아내를
생각했다. 손잡고 외출을 해본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낯선 여자와 손을 잡고 생전 처음으로 한강 유람선에 오르다 보니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못생긴 중년 여자는 과거 정부의 첩보기관에서 일한 여자 같았다. 그러나
일단 시골 중늙은이의 아내 역할을 맡자 진짜처럼 잘 해냈다.
넝감 이쪽이유. 이쪽...
그녀는 어리둥절해 있는 추경감의 손을 이끌고 유람선 아래층 뒷자리로
갔다.
유람선 안은 평소 추경감이 강둑에서 바라보던 것보다는 훨씬 넓고
화려했다.
아니 이곳은 2층이 있잖아? 우리는 어느 층이지?
추경감이 당황해서 말했다.
넝감은 이층이 좋겠수? 이층에 가면 멀미 헐틴디유... 그래도 좋담
이층에 가봐유?
추경감은 이 배를 타기 직전 합동 수사본부 제3부에서 간단한 브리핑을
받고 왔었다. 그의 역할은 끝까지 시골서 온 중늙은이 관광객 부부다.
여하한 경우에도 신분을 노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관찰해 두었다가 보고서를 쓰는 일이었다.
유람선을 처음 탔기 때문에 이 배가 2층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는 아래층보다 전망이
좋고 앞에는 반주를 하는 악단도 있었다. 아마 신나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것 같았다.
그들이 2층 의자에 앉아 올라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은...
승선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던 추경감이 갑자기 여자의 팔을 흔들었다.
추경감은 막 배에 오르는 수사본부의 신동훈 대령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디? 원숭이라도 배에 탔시유?
여자는 추경감의 실수를 숨겨주려는듯 엉뚱한 소리를 했다. 추경감은
그제야 눈치를 채고 입을 다물었다. 배에는 빈자리가 별로 없을 만큼
사람이 탔다.
2시 5분. 유람선이 서서히 한강 복판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추경감은 아무래도 위층보다는 아래층에 문제의 인물들이 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밑으로 내려왔다.
우리 제일 뒤에 가서 앉아요.
그녀가 추경감 곁에 딱 붙어 서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추경감은 너무
밀착해 온다고 생각하자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집에 있는 마누라
얼굴이 떠올랐다.
두 사람은 아래층 제일 끝 좌석에 앉았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 시야에 들어왔다. 추경감은 중간쯤에 앉아있는 신대령을 보았다.
그는 흰색에 검은 칼라가 있는 점퍼 차림이었다. 그의 옆에는 머리를 짧게
깎고 다부져 보이는 40대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추경감은 그가 정부측의
고위층 대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안에 앉은 사람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았다. 거의 남녀 짝을 지은
사람들이거나 여자끼리 온 사람들이었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이 많고
농사를 짓다가 온 듯 얼굴이 볕에 그을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도
데이트를 나온 듯한 젊은 커플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추경감은 테러리스트들을 만나게 되리라는 명령을 받고 왔기 때문에
그럴듯한 사람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그런 사람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배가 잠수교의 낮은 다리 밑을 빠져나가 한남 대교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신대령 곁에 앉아 있던 40대 신사가 일어서서 좌석 밖으로
나왔다. 그가 성 유 내각 정보 국장이란 것을 그제야 추경감은 알았다.
성 유 국장이 좌석 밖 통로에 나와서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선
내의 스피커에서는 서울의 강변 풍경을 설명하는 안내 스피커가 계속 왕왕
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 같았다.
추경감이 선 내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자기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일어나서 황급히 통로로 다가갔다.
그녀는 성국장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추경감이 잔뜩 긴장하여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성유국장을 보고 무어라고 간단히 말을
건넜다. 성국장이 여자를 돌아보며 대꾸를 했다.
여자 테러리스트구나!
추경감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황급히 선실 밖으로 나갔다. 추경감이 나가려고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곁에 있던 파트너 여자가 그의 허리춤을 잡아끌어
앉혔다.
넝감은 가만 있어유. 내가 좀...
그녀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늙은 여자치고는 행동이 대단히
재빨랐다. 추경감은 다시 숨을 죽이고 성국장 주변을 응시하고 있었다.
밖에 나갔던 그녀가 금시 들어왔다.
아니여유. 그 젊은 여자가 멀미를 해서 뱃전에서 토하고 있어유.
그녀가 웃으며 추경감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추경감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저기!
그때 그녀가 나직하고 날카롭게 말했다. 성유국장 곁에 한 남자가
다가갔다. 신사복 차림의 그 남자는 뒤로 돌아서 있기 때문에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신사의 말을
듣고 있는 성유국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두어 마디 서로 주고받던 두
사람은 나란히 뒤쪽으로 걸어왔다.
이쪽으로 오는데... 늙었어요. 쉰 살은 훨씬 넘었겠는데... 저런
테러리스트도 있나?
추경감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딴 곳을
보고 있었다.
추경감이 앉아 있는 뒤쪽으로 걸어온 두 사람은 맨 뒤의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추경감은 자기 뒤에 와서 앉았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귀를 바싹 곤두세우고 두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노형! 앞에서 두 번째 칸 내가 앉아 있던 자리가 보이지요?
늙은 테러리스트의 말 같았다.
예. 저기 검은 가방이 놓인 곳 말이지요?
성유 국장의 대답이었다.
그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내 호주머니에 있는 리모콘의
스위치만 눌으면...
아니!
성유 국장이 짤막한 신음 같은 말을 토했다.
추경감은 그것이 성능이 강력한 폭탄일 것이란 것을 금방 알았다. 만약
서툰 일을 하면 그 것을 폭파시켜 여기 탄 사람은 모두 물귀신을
만들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 스위치를 눌러야 할 일은 없을 것이요. 우리는 백장군이 하라는 대로
충실히 하고 있소.
성유 국장이 곧 냉정을 되찾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저기 한강 양쪽 강변에 특수부대 요원들이 쫙
깔렸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뿐 아니라 이 배 밑 한강 수중에도 무장
병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뿐 아니라 이 배안에도 도청장치가
있어 외부에서 유리알 들여다보듯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다행이
이 배에는 당신들 부하가 별로 없는 것 같소.
사실과 다릅니다.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것을 나는 문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내가 이 스위치만 누르면 무고한 유람선 관객 수백 명과 함께 당신네
정부는 수장이 되는 거요.
제발 그런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라겠소.
같이온 보좌관은 어디에 있소?
백장군의 목소리였다. 추경감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앞에서 열 두 번째 줄 흰 점퍼를 입고 있는 사람이요. 육군 소속입니다.
백장군 일행은..
가운데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젊은 여자가 보이지요? 그 여자가 들고
있는 큼직한 가방도...
제발..
성유 국장이 더 듣기 거북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민주화 운동을 시작할 때 이미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들이요. 우리는 언제 죽어도 좋아요. 필요 할 때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잘 알고 있소.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우리는 추호도 백장군
일행을 해칠 생각은 없소.
나도 이 리모콘 스위치를 누르는 불행이 없기를 바라오. 또 나하고
같이온 동지가 저 가방 속에 든 것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도록 해 주시요
백장군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가방 속에 든 것이라뇨?
성 유 국장이 당혹해 했다.
나중에 갈 때 한부 드릴 테니 가져가서 검토해 보시요. 그건 그렇고
우리가 처음에 요구한 일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처음에 요구한 일이라뇨?
이때 추경감이 슬그머니 일어나 배 밖을 구경하는 척 하고 백장군이라는
사람을 흘깃 보았다.
약간 희끗한 짧게 깎은 머리에 하관이 쪽 빠져 날카롭게 보이는
인상이었다. 얼굴 표정을 읽기가 어려운 차가운 사람 같았다.
저기 아파트들이 꼭 벌집 같지유?
추경감 옆에 앉아 있던 파트너도 함께 일어서며 한마디했다. 그녀는 또
슬그머니 추경감에게 팔짱을 끼고 겨드랑이로 파고들었다.
어흠, 어흠...
추경감은 몹시 겸연쩍어 계속 잔기침을 하며 그녀의 팔을 떨쳐 내려고
했으나 쉽게 되지 않았다.
백장군과 성국장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장군이 요구한 일은 대단히 무리한 일이요. 갑자기 대통령과 내각이 몽땅
사퇴를 해버리면 그 공백 기간은 무정부 상태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소? 혼란이 일어나도 보통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요
그런 염려는 없을 것이요. 우리가 즉각 임시 과도 정부를 구성해서
질서를 잡을 테니까요.
그렇게 쉽게 될 일이 아니요. 우선 당신들이 정권을 담당한다고 나서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노출되어 국민들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정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민이 따를만한 범국민적 지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덮어놓고 낯선 사람들이 나와 우리가 이 나라를
맡겠소 하고 나서면 누가 그것을 따를 것입니까? 정권이 창출되자면
모택동의 말처럼 총구가 있던지, 국민의 지지표가 있던지 해야 하는
것이지...
우리는 총구로 정권을 창출하는 일은 인정하지 않소.
하여튼 어느 날 갑자기 내각이 총사퇴를 해버리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요. 그리고 이 나라 국민들을 무질서와 범죄와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갑자기 정부가 없어지면 이 사회는
주먹센 놈이 지배를 하게 될 테니까 약탈, 방화, 강간 ,살인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결국은 아무도 통제 할 수 없는 지옥으로 이 나라가 변하고 말
것이요. 그렇게 되면 북쪽의 공산주의자들이 가만있을 것 같소? 결국은
나라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요.
그런 엉뚱한 상상은 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그만두고 나가더라도 곧 모든
국민들이 납득 할만한 능력 있는 지도자가 이 나라를 이끌 것입니다.
백장군이 단호하게 말했다.
국민들이 납득 할만한 인물 ? 그게 누굽니까?
성유 국장이 눈이 둥그래졌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 것은 당신들이 물러 나보면 알게 될 것이요
추경감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저들의 배후에는 지명도가 높은 거물이
있다는 짐작을 했다. 그것도 한 두사람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하여튼 그런 기발하고 이상한 방법으로는 정권교체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요. 그러니 우리 정부측에서 몇 가지 제안을 하겠소.
제안? 좋아요. 이야기 해보시오.
성유 국장이 호주머니에서 메모한 것을 끄집어냈다. 성국장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백장군의 얼굴이 극도로 긴장되는 것을 추경감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무기를 꺼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첫째, 민독추측과 정부는 상설 협의체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명칭은 국가
개혁 비상회의 같은 것으로 하고 우선 이런 기구를 만들어 정권을
넘기던지 개선하던지 하는 초헌법적인 문제를 협의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구를 국민 앞에 노출시키기 위해서는 당신들의 민독추를
세상에 공표하고 그 구성원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도 당신들의
단체를 인정한다는 전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당신들의 기구는 그
목적이나 강령을 세상에 알려 국민들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성유 국장이 잠시 말을 끊었다.
우리의 목적을 국민들이 안다면 틀림없이 지지를 할 것입니다.
백장군이 자신에 넘친다는 투로 말했다.
한가지만 묻겠습니다. 민독추의 중요 멤버 중에는 현재 정부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런 건 얘기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성국장이 제안한 초헌법적
협의기구라고 하는 것은 내가 돌아가서 위원회에 보고를 하겠습니다. 내가
이 자리서 어떻게 하겠다는 회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제안이
있나요?
있습니다. 지금 인질이 되어 있는 국무위원 부인들을 즉각 무조건
석방하십시오.
그건 안됩니다. 무조건 다 석방 해버리면 당신들이 우리를 상대나
하겠습니까?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개별적으로 가족과 전화로 안부통화나마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만약에...
만약에 무엇입니까?
만약에 국무위원 부인중 다시 희생자가 나온다면 정부는 더 이상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전적으로 지금 정권 담당자들의 태도에 달린 것입니다.
정권이 설사 당신들한테 넘어간다고 할지라도 당신이 무고한 해군장관의
부인을 살해한 죄과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성유 국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격해졌다.
그건 우리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당신들의 책임이지요.
어쨌던 정부측 제안은 이제 더 없나요?
인질들과 전화 통화가 안된다면 가족들이 한번 만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가족들 모두가 안된다면 몇 사람이라도 대표가 가서 만나도록
해 주십시오. 장소를 비밀로 한다면 그 일에도 협조하겠습니다.
성국장의 태도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건 가서 협의를 해보겠습니다. 이제 우리의 제안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백장군은 한참 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24시간 여유를 주겠습니다. 24시간 이내에 행동을 취하십시오.
어떤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까?
백장군은 한참동안 성유국장의 얼굴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24시간 이내에 당신들의 자가 비판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당신들 말대로
어느 날 느닷없이 정권이 총사퇴를 한다면 국민들이 우선 어리둥절해 할뿐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실정, 독재, 인권유린 등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퇴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실정, 인권유린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그런 사레가 별로 없어서 비판 할
것이 없는데요...
성유국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
백장군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가 주위를 의식했는지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했다.
저기 나하고 같이온 여성동지가 당신들이 비판받을 자료를 가지고
왔어요. 그걸 가지고 가서 이래도 할말이 없는지 반성해 보시요. 24시간
이내에 시작해서 매일 한 두건씩 당신들의 비정(秕政)을 폭로하는 거요.
만약에 24시간 이내에 이일이 시작되지 않으면 국무위원 부인은 스무
명으로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이제 제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짓밟는 일은 제발 그만 둡시다.
여자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성유국장이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전적으로 당신들 정권 담당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소위 국무위원
부인들도 그들이 스스로 밝힌 자기들의 죄를 보면 백번 죽어도 할말없는
여자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민초들을 우롱하고 양심 파는 일을 예사롭게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백장군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단호하게 들렸다.
그 분들을 심문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빨리 풀어주고 우리 이야기합시다.
그건 글쎄 당신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두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서로 딴 곳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배는 다시 떠났던 선착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자 그럼 자리로 다시 돌아갑시다.
백장군이 일어서서 걸었다.
다음 연락은 어떻게 합니까?
성유 국장이 물었다.
당신들의 회답이 어떻게 나오는지 내일 아침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겠소.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부인들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십시오.
백장군은 그 말을 남기고 자기자리로 돌아가 빨간 모자를 쓴 여인한테서
서류 봉투 같은 것을 받아 성유국장에게 전달했다.
배는 곧 선착장에 닿고 장내 안내 방송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쳤다.
추경감은 배 밖을 내다보았다. 선착장 근방에 허수룩하게 차린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그게 모두 위장한 수사, 경호 요원들 같았다.
추경감이 다시 선내 좌석으로 눈을 돌리자 백장군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추경감은 벌떡 일어서 사방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눈에 얼른 띠어야할
빨간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봐요. 어떻게 되었어요? 그자들이 어디로 갔어요?
추경감은 곁에 있는 짝인 여자를 보고 물었다.
저기 계단위로 올라가고 있어요.
그녀가 턱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추경감이 계단을 오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으나 백장군이나 빨간 모자의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빨간 모자가 안 보이는데?
빨간 모자요? 그게 뭐 머리카락처럼 머리에 붙어있나요? 남의 눈을
피하려는 사람이 그렇게 표적이 되는 차림을 그대로 하고 다닐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추경감은 멍청한 자신을 나무랐다.
그들은 가버렸으니 우리도 내려요.
추경감은 하는 수없이 그녀와 함께 배에서 내렸다.
우리 어려운 커플 해냈으니 차나 한잔해요.
그녀가 추경감의 팔을 끌었다. 추경감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따라
여의도의 어느 찻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테이블 앞에 마주 앉은 그녀를 보고 추경감은 깜짝 놀랐다.
아니?
지금까지 같이 있던 늙은 여자는 간데 없고 젊고 발랄한 여자가 미소를
띠며 앉아 있지 않는가?
전 전미숙이라고 해요. 주제넘게 경감님 사모님 노릇을 해서 미안해요.
갸름한 얼굴에 뾰족한 턱이 그녀를 약간 날카롭게 보이게 하기는 했으나
상당한 미인 축에 드는 여자라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아이 경감님도 뭘 그렇게 들여다보세요?
예? 제, 제가요...
추경감은 당황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근데 어떻게 그렇게 변장을 할 수가 있었나요?
아까 화장실에 가서 다 지워 버렸지요.
그녀의 목소리도 완전히 달라졌다. 사투리를 쓰는 중늙은이가 아니라
발랄한 젊은이였다.
우리 보고서는 각각 쓰기로 되어 있지만 오늘 여기서 헤어진 두에도 모른
척 하기는 없기예요?
그녀가 아이스커피 한잔을 단숨에 마신 뒤 한 말이었다.
추경감은 사무실로 돌아와 거기서 관찰한 일들을 자세하게 보고서로
꾸몄다.
그는 보고서를 쓰다가 문득 승무원복을 입고 다니던 한 여자의 얼굴을 떠
올렸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영 생각이 나지 않아 그냥 넘어갔던
여자였다.
맞아. 그 여자다!
추경감이 혼자 고함을 질렀다.
그 여자가 왜 거기에 나타났을까?
추경감이 그 여자라고 한 것은 얼마전 그가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페닌슐라 호텔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전동타자기를 치던
여자라는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나봉주. 피살된 조은희의 남동생
조준철의 애인이기도 한 그 정체불명의 여자가 이번에는 유람선의
승무원으로 둔갑하고 나타난 것이다. 추경감은 그 여자가 승무원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어느쪽 정보기관의 요원으로 유람선에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추경감의 추리는 맞았다. 유람선 회사에는 그런 승무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