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가는 길
(5)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부모가 마지막에 유언을 할 때 자식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너희들 사이좋게 잘 지내라.’는 말일 것이다. 어느 부모든지
임종할 때 자녀들 앞에서 하는 유일한 말이 있다면 ‘서로
사랑하고 잘 지내라.’는 그 말을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도 똑 같다.
임종할 때가 온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신 것 같다. 사도 요한도 마지막에는 사랑하라는 말만 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 할 말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사람이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달라진다.
우리가 다 사랑하면 그게 끝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었으니까 서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기는 하는데 서로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사랑이지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될 수 없다.
제자들도 3년 반이나 같이 살았는데 서로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서 사랑의 성질도 달라지기 때문에 그 말만 가지고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은 서로 사랑하라 했으니까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사람이 바꿔지고 난 후에 그 사람의 사랑이다.
사람도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사랑하기도 하고 저렇게 사랑하기도 하니까
사랑이라는 말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할 수가 없다.
문제는 사람이 바꿔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14장에 가면 거처와 보혜사가 나왔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한다.
이것을 옛날 사람들은 천당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천당을 준비하러 가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이 아니다. 생명의 세계 안에서는 거처와 집이 하나다. 거처와 사람은 하나다.
그 사람이 있는 곳이 그 사람의 거처다. 그 사람 자신이 그 사람의 거처다.
그래서 또 묻는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라고 했더니
하시는 말씀이 너희와 3년 동안이나 함께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했다.
그러면 결국 아버지 집이니, 아버지께 갔다 오느니 아버지 이랬던 모든 말들이
어디로 가 버리고 없고 나를 본 자는 다 본 것이 아니냐? 내가 있으면 다 된 게 아니냐? 이 말이 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8)고 했으니까
제자들이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멍했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까지도 다 해결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물어보라. 물으면 천국가려고 믿는다고 한다.
요즘은 천당이라는 말은 잘 안하고 천국가려고 믿는다고 한다.
목표가 있는 것이다. 간단한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 안에서는 그 목표가 지금이고,
지금이 목표다. 내일이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애매하고 힘이 든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2)는 처소가 많다는 말이다.
그곳은 잠깐 머무르는 곳, 아니면 길게 머무르는 곳, 이런 뜻이다. 또 집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있기 전에 하나님이 계신다. 만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있다.
안 보이지만 먼저 있는 것이다. 먼저 있기 때문에 만물이 생겼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니까
길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했더니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한다.
나무에 열매가 맺히면 처음에는 나무와 열매가 하나다.
나무속에는 열매가 없고 안 보인다. 그런데 열매는 나무에 열린다. 열매가 다 익고 나면 그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그때 갈라지는 것이다.
알고 보면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내 생명의 근원이 없이는 나는 없다.
그 생명의 근원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 먼저다.
보이는 것은 다음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먼저다.
거처를 먼저 말하고, 보혜사를 말한다. 보혜사 성령, 파라
클레토스(palakletos) 곁에 있는 위로자, 혹은 보호자, 혹은 격려자, 이런 뜻이다.
para란 말이 ‘곁에’라는 말이니까 합성어로 곁에 있는 자, 항상 곁에 있는 자다.
이제는 주님이 떠날 때가 되어서 제자들이 불안한 것이다. 어디로 간다는 말인지 불안하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너희 곁에 내 대신 보낼 보혜사가 있는데 내가 아버지께 구해서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그것을 알겠는가? 그런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여기는 함께 라는 개념인데 사실은
알고 보면 창조 때부터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사람을 떠난 적이 없다.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떠난 적이 없다.
알고 보면 항상 함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있다면 아브라함이 혼자 있었는가? 아니다.
그를 부르신 이가 함께 있었으니까 100살이 되었을 때 다시 찾아왔다.
처음에 부르시고 끝나 버린 것이 아니고, 부르신 분이 항상 함께 있었다.
결국은 그것이 보혜사가 아닌가? 곁에서 말씀도 하셨고 또 아니라고도 하시고 그렇게 하신 것이
전부 자기 곁에 누가 있는 것이다. 보혜사는 항상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이 아니다.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으로서는
빈 통이다. 형상이다. 형상이니까 항상 내용이 되시는 하나님이 있어야 된다.
만약에 형상이 아니고 하나님 비슷한 존재라면 항상 있을 필요가 없다.
사람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형상으로 지어졌다.
절대로 하나님과 비슷한 것이 아니다. 비슷해서 잘하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해도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내 내용이 되실 때 그렇게 되는 것뿐이지 내가 어떻게 변해서,
내가 어떻게 발전해서, 내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형상이 변질될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사탄에게 팔려가서 사탄의 형상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이다.
형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비슷하게 되어서 따라가는 존재라면 한 번 가 버리면 안 된다.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과 비슷해질 수가 없다. 내용이 와야 된다.
변해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내용이 들어와야 된다. 사람은 형상이고 빈 그릇이다.
흙과 마찬가지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혼)이 되니라.”(창2:7) 산 혼은 우리의 생각과 정서와 의지와 이런 것이다.
사람이 바꿔지면 생각이고 모든 것이 다 달라진다. 속의 내용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다 달라진다. 흙과 똑 같은 것이다.
내가 흙인데 흙대로 되었으면 뭐가 되었겠는가?
흙이 오래되어서 단단해지면 돌 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자기들끼리 놓아두니까 뭐가 되겠는가?
인생은 이것이로구나. 벽돌이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니고 영원히 흙이구나.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이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보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형상이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그 안에서 그렇게
쓰시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려고 하면 사람을 통해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겠는가? 우리도 하나님이 그렇게 쓰시면 그렇게 될 수 있다.
모두 그렇게 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빈 그릇이다. 그러니까 여자다. 모두 하나님 앞에 오면 여성화 된다.
아담이 이것을 버리고 나갔기 때문에 이것이 파괴되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따라 다녀야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따라다닐 필요가 없었다.
자동적으로 움직여 갈 텐데
사람이 이것을 버려 버렸으니까 하나님이 붙어서 따라다녀야 된다.
사람을 택해서 그 사람 곁에 항상 따라 다녀야 된다.
항상 하나님이 보혜사가 되어야 되니까 하나님이 피곤하시다. 그런데 따라 다녀도
안 된다. 따라다녀도 순간순간 잘못돼 버린다.
아브라함 같은 사람도 실수를 했다. 야곱은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는가.
여기서 새 연약이 필요하게 됐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 연약이 채결되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저희 마음에 두겠다. 그날에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라 말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렘31:31~34, 히8:10~11)
그날에는 어디로 갑니까?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 날에는 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완성된 날이다.
지금 제자들이 묻고 있다.
어디로 갑니까? 길을 모르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8)고 하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대답하신다.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는 우리가 푹 빠질 수 있는 분이다.
우리가 푹 빠진다. 그 안에 있으면 물이 모자랄 일이 없다.
바다 속에 있는 컵이
물이 모자랄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이것이 영원한 복음이다. 영원한 생명이다. 이제 생명의 보혜사가 된다.
전문가가 늘 말하는
그 보혜사보다 더 완전한 보혜사다.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어떤 보혜사보다
더 완전한 보혜사인 것이다. 나와 그분이 한 생명이 되면, 한 생명 안에 있으면, 보혜사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율법이 없어졌다. 그러면 보혜사가 있어야 된다.
이 보혜사가 내 옆에 따라 다닌다고 되겠는가? 그러면 또 종교생활을 또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가 내 보혜사가 되어버리면 된다. 지금 14장을 읽어보면 다시 예수님 자신이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요14:19) 세상은 모를 것이다.
보혜사가 와도 세상은 모르지만 너희는 알지 않느냐?
왜? 네가 나를 봤고 나를 알지 않느냐고 한다. 결국 그분이 그분이다.
발을 씻는 분도 그분, 거처를 구하러 가겠다고 한 분도 그분이다. 그런데 그 거처가 바로 그분이 거처다.
우리의 영원한 거처는 예수 안이다. ‘In Christ’가 우리의 영원한 거처이다.
그 거처 말고 또 다른 거처가 있으면 가짜다. 다른 것은 다 가짜다.
요한1서 5장 23절에 보면
우리가 참된 자를 알게 했다고 한다. 그 참된 자를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 그런데 왜 그 다음에 한 구절을 더 해놓았는가?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5:21)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다 너 자신을 버리라고 하는데 거기서 자기 자신을 지키라는 말이 나온다.
누구를 지키라는 것인가? 구속 받은 나를 지키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있는 나를 지켜야 한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도로 말짱 도루묵으로 구약으로 돌아간다.
그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내가 그분 안에 있는 것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나는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우상이 무엇인가? 가짜다. 가짜가 우상이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는가?
우리가 참을 알려고 하는 것이다. 참되게 살려고, 참 사람이 되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예수 안으로’ 밖에 없다. 길이 없다.
불교인보고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면 들어오겠는가?
안 들어온다. 예수 안이라고 할 필요 없다. 인간의 진실 속으로, 본질 속으로 인도하면 된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기독교를 전파하면 안 된다. 사람이 살 곳을 살 길을 전파해야 된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인간답게 되겠는가? 어떻게 인간이 회복 되겠는가? 이것을 전파해야 된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려면 예수 안, 십자가 안, 거기 있어야 된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십자가, 예수, 이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실재를 알면
그 실재를 이야기하면 된다.
우리는 참을 봤다. 참된 자를 알게 하신 분,
요한1서 5장 20절에 보면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라고 했다. 참된 자를 알고 우리가 가야 된다.
예수 안에 종교가 있는가? .
교파가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예수는 우리를 사람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사람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놓았다. 이것이 구속이다.
나는 구속에 있어서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속 주님이다. 나의 구속 주다. 나는 이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면 뭐가 복음인가?
죄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이 죄다. 그러면 사람자리에 돌아오면
죄가 다 원인무효다. 무슨 죄를 따로 사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아버지께 내가 구해서 보혜사를 보내겠다.
그가 와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모든 것을 너에게 다 생각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그 영원히 함께 하실 보혜사를 어디서 만나서 영원히 같이 살겠는가?
예수 안에 푹 빠지는 것밖에 없다. 술독에 빠지면 술 사러 다닐 필요가 없다.
술병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구속 주! 그 구속 주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
그리고 알고 보면 생명의 보혜사가 되시는 것이다.
완전한 보혜사가 되신 것이다. 그때는 보혜사로 밖에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에게 와서 볼 때는 완전한 그분 자신이 보혜사다. 보혜사 다르고, 예수 다르겠는가?
모든 것이 하나다.
거처도 하나, 아버지도 하나, 보혜사도 하나, 모든 것이 하나다. 한분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면 이것을 맛 볼 수 없다.
구주, 구속 주 예수 안에 푹 빠지는 것 그것밖에는 길이 없다. 술 안 마셔도 항상 취해 있으니까,
인생도 예수 십자가 안에
푹 빠지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 여러 말 할 필요도 없다. 다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