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1;1-23, 시온에 대한 영원한 구원
이사야 51장은 세 가지 도전으로 시작합니다.
과거에 주의하라, 미래에 주의하라, 현재에 주의하라.
1-3절, 과거에 주의하라
이 말씀은 온 힘을 다하여 의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위로입니다.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릴 것이며 힘이 들 때마다 자신들의 뿌리를 생각하며 견디어 내라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1)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여호와를 찾는 자들에게 이 말씀이 임하고 있습니다.
천국이란 보화를 찾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억눌려 있는 자들에게 과거를 회상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에 대한 확신을 얻으라고 권면합니다.
먼저 그들은 자신들이 떨어져 나온 바위와 구덩이를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를 일컫는 말이며 비록 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채석장의 비유를 구상하면서 백성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강암이 나오는 채석장에서는 화강암만, 대리석이 나오는 채석장에는 대리석만 산출됩니다. 비록 이들이 타국에서 마치 사람들의 발에 채이는 돌과 같은 신세가 될 지언정 그들이 채취된 광을 생각하면 결코 희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2)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축복한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혈혈단신이었고 사라는 임신을 못했지만 이들은 큰 나라를 형성하게 됩니다.
(3)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광야를 에덴처럼 아름답게,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처럼 풍요롭게 만드실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회복시키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출발점이 아브라함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서 에덴 동산에까지 이르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출처는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4-6절, 미래에 주의하라,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4)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돌아보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이미 2;2-4에서 선포된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될 율법 훈계에 의하여 성취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회복하실 때 온 세상이 여호와의 빛을 볼 것이며 그분의 공의에 의하여 통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공의는 공평함을 뜻하기도 하지만, 질서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즉 공의의 반대는 불의와 혼돈입니다.
(5)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 내 팔이 만민을 심판하리니 섬들이 나를 앙망하여 내 팔에 의지하리라
여호와의 의 즉 하나님의 구원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구원이 임하는 날, 섬들이 눈을 들어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그의 능력을 의지할 것에서 역력합니다.
구원이 세상에 임하는 날, 하나님의 팔이 뭇 백성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 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재판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창조의 섭리와 원리에 의하여 통치한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전반부에서 메시아가 이 일을 감당할 것이라 선포했었고(9:7; 11:4; 16:4-5), 후반부에서는 종이 이 일을 할 것을 선언했습니다(42:1-4; 49:6).
이제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6)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세상은 끝나도 여호와의 구원은 꼭 이루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하늘과 땅을 보라고 권면합니다.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은 영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지식을 구할 때 바라보는 곳입니다.
7-8, 현재에 주의하라.
(7)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8)그들은 옷 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 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꼭 성취될 것을 확언한 선지자가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신앙적인 강권함으로 여호와의 약속을 신뢰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4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갈망하는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율법을 기다리는자들”이었다면, 7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아는 자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 속에 간직한 자들” 입니다.
이들이 선지자의 가르침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신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한마디로 여호와의 작은 종들이 되어 세상의 수모와 멸시를 견디어 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비방하는 것에 놀라지 말라는 50:6-7에 묘사된 사람들에게 당해야 하는 종의 고통을 연상케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멸시하는 자들을 “좀이 옷을 먹듯이 그들을 먹을 것”(8절)은 50:9의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지고 좀을 먹힐 것”과 흡사한 표현입니다.
비록 세상이 그들을 비방할 지라도 끝까지 견디어 낼 것은 그들을 비방하는 자들이 슬슬,그러나 확실히 사라질 뿐만 아니라 종의 수난에 동참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9-16절, 구속된 자들을 위한 길, 탄식과 구원에 대한 예언입니다.
(9)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얻은 자들로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전통적인 탄식으로 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깨우려 했습니다(시 80편).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해 주는 창조와 출애굽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그 모든 일들을 행하신 이가 정말 하나님이 맞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면 왜 자신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 왜 그 능력을 다시 한번 더 보여 주시지 않는 것인가를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는 구원을 약속하는 노래로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따라서 슬퍼하고 탄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라합, 용은 고대 근동 설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괴물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질서와 균형을 파괴하려고 노력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이 신화적인 언어들을 언급한단 말인가?
성경에서 이러한 신화들이 언급되는 것은 한결같이 B.C.750년 이후입니다.
그 때에는 이미 반신화적 입장을 고수하는 여호와 종교가 단단히 뿌리를 내린 상황입니다.
성경에서 이들 신화를 언급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를 예로 삼아서 무언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일종의 문학적인 예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라합과 용이 이집트와 연관된 문학적 이미지로 사용되고 있음이 재확인됩니다(10절).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것은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즉 출애굽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괴물들을 신화적인 뉘안스를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구원사역에 반대하는 요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팔이 해낸 일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다시 움직여주신다면 주의 백성들이 환희와 기쁨 속에 예루살렘으로 귀향할 수 있습니다.
“머리 위에” 라는 말을 화관을 쓴 것으로 해석하여 돌아오는 자들이 영원한 즐거움을 화관으로 쓰고 오는 자들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시는 즐거움이 이들의 삶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12-16절, 여호와의 대답을 들으라
본문의 예술성에 대해 학자들마다 평가가 차이가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극찬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형편없는 날림공사로 평가합니다.
그만큼 히브리시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12)가라사대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예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4)결박된 포로가 속히 놓일 것이니 죽지도 아니할 것이요 구덩이로 내려가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양식이 핍절하지도 아니하리라 (15)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바다를 저어서 그 물결로 흉용케 하는 자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려 하였음이니라
내가 바로 너희를 위로할 그 하나님이다.
백성들의 호소는 한마디로 “하나님 정말 하나님께서 옛적 우리 조상들에게 이러한 기적을 베푸셨던 바로 그분이십니까?” 라는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우 열정적으로 확실하게 그들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반면에 여호와의 백성들이 될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죽을 인간을 두려워하며 한갓 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닌가?
하나님은 영존하시지만 인간은 모두 죽게 됩니다.
인간을 두려워 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이 초래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커다란 문제입니다.
비록 주의 백성들이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구원 받을 자격을 상실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속박된 상태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하나님의 성품에 의하여 보장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나의 백성이다.
우주의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신 분이 선포한 사실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17-23절, 정복자들을 위한 분노의 잔, 구원에 대한 예언
(17)여호와의 손에서 그 분노의 잔을 마신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일어설지어다 네가 이미 비틀걸음 치게 하는 큰 잔을 마셔 다하였도다
주의 백성들의 문제는 그들의 하나님께서 힘이 없으신 것이 아니요 졸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취기에 졸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며 깨어나야 할 자도 자신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진노의 잔에 취해 있었습니다.
(18)네가 낳은 모든 아들 중에 너를 인도할 자가 없고 너의 양육한 모든 아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도 없도다
그러나 시온은 스스로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자녀들이 부축할 수 있는가?
시온은 부축해 줄만한 자녀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19)이 두가지 일이 네게 당하였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이라 내가 어떻게 너를 위로하랴
이 두 가지 일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바로 뒤에 나오는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
이 경우 시온이 자식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47:9에 의하면 “자식을 잃고 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황폐와 멸망이요 기근과 칼은 이미 자식들을 잃고 과부가 된 시온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쪽으로 이해하더라도 본문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은 미치지 않게 됩니다.
(20)네 아들들이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누웠으니 그들에게 여호와의 분노와 네 하나님의 견책이 가득하였도다
시온이 과부로서 자녀를 모두 잃은 어미로서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다면 남에게 끌려간 그녀의 자식들의 형편은 어떠한가?
그들 역시 타국에서 “곤비하여 그물에 걸린 영양 같이 온 거리 모퉁이에“ 내 팽개쳐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 가장 잘 보이는 거리에서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싸워볼 의욕도 없습니다.
(21)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22)네 주 여호와, 그 백성을 신원하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너로 다시는 마시지 않게 하고 (23)그 잔을 너를 곤고케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찌기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의 앞에 네가 네 허리를 펴서 땅 같게, 거리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시온이 독한 술에 비틀거리고, 그녀의 자식들이 타국으로 끌려가 열방의 구경거리가 되었다면, 이들에게 과연 어떤 소망이 있단 말인가?
그들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술취한 시온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메시지는 두 개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진노의 잔을 시온에게서 거두실 것이다
둘째, 시온에게서 거두신 진노의 잔을 시온의 원수들에게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돌아보시는 날, 그들의 운명과 원수들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셨지만, 꼭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열방에 책임을 물으시는 날,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했던 잔혹함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