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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성무역은 서울의 테헤란로에 있다. (주)흥인무역과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12층 건물의 7,8,9층의 3개층을 사용하고 있다. 그 얼마 안 되는 거리가 늘남국현에겐 노여움의 표적이었다. 경인지부의 본부가 경기도나 인천에 있지 않고 왜 서울에 있어야하는지, 그것도 서울지부와 1킬로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있어야하는지를 그는 절대 이해하지 못
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회가 조직간의 내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참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두지부중의 한곳이 예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남국현은 그리 크지 않은 키와 몸집을 가진 40대 후반의 사내였다. 미남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이마에 생기기 시작한 주름만큼의 세월이 주는 무게가 있었다. 9층 사장실에서 팔짱을 끼고 창밖의 밤하늘을 보고 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김주혁이 곤란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
"그렇습니다, 사장님"
단정한 자세로 보고를 하는 사내의 이마에 땀이 스며나왔다. 김주혁에 대한 보고는 늘 조심스럽다. 어떤 내용이든 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 눈앞에 있는 사람의 신경을 거스르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남국현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보고를 계속했다.
"최근 흥인쪽의 움직임이 바빠졌습니다. 이준형이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이준형이?"
남국현의 시선이 보고하는 자에게 돌려졌다. 폐부를 꿰뚫는 듯한 시선이다. 뜻밖의 이름이었다. 정보를 총괄하는 이창영의 어깨가 저절로 굳어졌다.
"이준형이 움직인단 말인가? 김주혁에게 그자가 움직여야할 정도의 일이 생겼다는 건가?"
"이준형과 그의 그림자들이 안양, 군포, 의왕, 용인, 수원등지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인 것은 4년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남국현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내용은 파악되었나?"
"죄송합니다. 지금 지부의 전력을 기울여 그들이 움직인 이유를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총회가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어. 이준형이 움직일 정도의 일이 생겼다면 좋은일일 수 없지. 그는 김주혁의 집행자야. 김주혁에게 이준형을 움직여야할만큼 다급한 일이 생겼다는 건가? 경인지부의 적을 제거할 때외에는 움직이지 않던 자가 움직이고 있다면 김주혁의 위
상에 타격을 주는 일이 생겼다는 뜻인데......"
혼잣말처럼 생각을 정리하던 그의 눈빛이 날카로와졌다.
"이부장!"
"예, 사장님!"
"지부의 모든 정보력을 모아라. 이준형이 왜 움직이는지, 목표가 무엇인지 파악될때까지 다른 모든 일은 후순위에 둔다. 이일에 관련된 모든 보고는 특급으로 분류해라!"
단호한 남국현의 음성이 사무실을 울렸다. 이창영의 허리가 깊숙이 숙여졌다. 그는 사장실을 나섰다. 남국현의 지시를 이행하려면 이제부터 정신없이 바빠질 터였다. 남국현은 다시 팔짱을 끼고 창밖의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사위는 어둠에 잠겨 고요했다. 네온사인과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드러나는 불빛의 전부였다. 방금전과 바뀐 것이 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남국현의 마음은 태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격랑치고 있었다. 이준형의 움직임은 그에게 기회일 수 있는 것이다.
총회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무엇이든 흘려버릴 수 없는 시점이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문진혁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전원스위치를 누르자 묵직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준형이었다.
"어딘가?"
"수원호텔입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 거냐?"
이준형의 목소리에 질책이 담겨있음을 느낀 문진혁이 조금 의아해졌다. 자신이 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준형도 안다.
"지난 밤 이종하를 만났나?"
"예, 그렇습니다. 삼일의 시간여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현재 가용가능한 모든 조직원을 움직여 그 자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이종하가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
어젯밤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작별인사를 하던 이종하였다. 헤어진 지 여덞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핸드폰에서 들리는 이준형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지난 밤, 몇시에 이종하와 헤어졌나?"
"새벽 두시가 조금 안되어서였습니다."
"흐음........"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이종하의 음성이 다시 문진혁의 귓전을 울렸다.
"네가 떠나고 난 직후에 그곳에서 큰 소란이 있었다. 소란이 가라앉고 나서 30여분 정도 후에 화성파 조직원 50여명이 긴급 소집되었다. 그들이 이종하의 저택에서 수십 명의 부상자를 데리고 나와 여러대의 봉고차에 태운 후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전화를 받는 문진혁의 눈에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당시 그 저택안에 수십 명의 사내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보았었다. 이종하가 당하려면 그들이 무력화되어야 한다. 그 숫자가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이준형의 말을 바로 납득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준형이 언급한 시간이 중요했다. 자신들이 떠난 직후에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오해하고 있었다. 한은 이종하를 찾아간 것이지, 그를 추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진혁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가능성이 너무 희박한 일이었다.
"설마 지역조직간의 전쟁이.....?"
"수원은 안산이 아니야. 조직간 전쟁이 사라진 지 이미 수년이 지난 곳이다. 이종하에게 전쟁을 걸만한 조직은 없어."
"................."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이종하를 찾아서 만나보도록 해라. 그가 어떤 단서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와 만난 직후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미심쩍다."
"알겠습니다."
핸드폰의 연결이 끊어졌다. 문진혁의 눈매에 날이 서고 있었다. 무언가 꼬이고 있다는 느낌
이 그의 심사를 뒤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방을 나섰다. 바로 옆방에 최윤길이 머물고 있었다. 이종하를 찾으려면 최윤길의 도움을 얻어야한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속한 조직은 밤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힘이 있는데도 그걸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윗분들이 지금 문진혁을 답답하게 했다. 하지만 회의 방침을 거역할 담량을 가진 자는 없다. 김주혁이나 이준형도 거역은 꿈도 꾸지 못한다. 하물며 문진혁으로서야.... 그는 최윤길의 방문에 노크를 했다.
"들어오시오"
방에 들어서자 식탁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다가 일어서는 최윤길이 보였다. 잠을 잘 잔 얼굴이었다. 어제까지만해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침잠해 있는 듯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최윤길이 문진혁의 굳은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얼굴이 않좋아 보이는군요. 잠을 잘 못 주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식사를 방해하게될 것 같군요."
문진혁은 별로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쇼파에 앉았다. 당당히 방해할 것이라며 앉는 자를 쫒
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윤길은 속이 부글거렸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고
문진혁의 맞은 편에 앉았다. 조직을 관리하는 자에게 표정관리는 기본인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어젯밤 이종하가 누군가에게 당한 모양입니다."
"예?"
최윤길도 문진혁과 별다를 바 없었다. 최윤길이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문진혁이 덧붙였다.
"어젯밤 우리가 이종하와 헤어진 직후에 누군가가 이종하를 쳤습니다. 꽤 많은 숫자가 크게
다친 듯합니다."
어차피 최윤길도 이계통에 있는 자다. 보는 시각이 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오는 질문도 문진혁이 이준형에게 한 것과 비슷했다.
"이곳에서 그럼 전쟁이 있었다는 겁니까? 수원은 이종하의 장악력이 큰 곳이라 그에게 전쟁을 걸만한 조직이 생각나지 않는데....."
"그걸 알아봐 주셔야겠습니다. 이종하에게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종하를 친 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제가 부탁한 일의 진척도 더해서요."
문진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윤길의 시선이 빛났다. 그의 뇌리에 어제 자신을 방문한
자와 이종하를 방문한 자가 동일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는 자신을 방문했던 자가 이종하와 어떤 관련이 있는 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 한은 그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어 그래, 임형사. 일찍나왔네. 너희 반이 오늘 당직이지! 수고 좀 해야겠다. 날이풀리고 있어서 그런지 사건이 많아!"
출근하는 한에게 인사를 받은 강력3반의 박광우형사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날을 꼬박 샌 얼굴이었다. 박형사는 소문난 꼴초라 이렇게 당직한 날의 다음날 아침에는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있다. 한은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갔다. 피의자 대기실에는 아직도 조사를 받지 못한 지난밤의 사건 관련자 6-7명이 의자에 쪼그려 자고 있거나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내근당직반은 비어 있었다. 당직을 선 형사1반은 날새고 난 아침에 반 전원이 꼭 라면이라도 아침을 먹는다. 구내식당에 간 모양이었다. 한이 자리를 정리하고 청소를 마무리지을 무렵 이정민과 장문석, 김철웅이 차례로 출근했다.
"임형사, 가서 총타와!"
"예."
한은 간단하게 문서를 작성한 후 반장 결재를 맞고 상황실에서 3.8 권총 네 자루를 받아왔다.
강력반 형사라고 모두 평상시에 권총을 차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아니 형사중 누구도 사실 권총을 차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한민국은 총에 엄청나게 민감한 나라다.
민간인이 총을 쏘는 것뿐만이 아니라 총의 소지, 사용이 허락된 부류의 사람들이 쏘는 총알하나하나에 온나라의 관심이 집중되는 나라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미국처럼 이민자들이 모여서 원주민을 학살하고 세운 나라가 아니다. 멀리 올라가면 중국인, 몽골인의 피가 섞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조상을 가진 나라다. 족보를 파고 들어가면 몇 대전에는 조상중 서로 사돈의 팔촌이 나오는 민족이다. 모계조상까지 파고들면 그것은 더 가까워진다. 그런 사람들이 죄를 저질렀다고 총
을 쏴서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는 형사가 많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극악한 범죄자라면 사정은 달라지지만.
몇 개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당직을 서는 반의 형사들만 권총을 차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있다. 예외가 되는 도시들은 다른 도시보다 강력범죄가 많고 조폭들이 전쟁중인 곳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살인과 강도같은 강력사건이 발생해서 현장에 출동하는 경우등을 제외하면 권총의 상시휴대는 거의 없는 편이다.
대한민국에는 나쁜놈들 너무 많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실상 현장에서 만나는 범죄자들도 사연없는 사람이 거의 없고 극악하게 나쁜 놈은 더 만나기 어려운 것이사실이다. 아
직도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의 몇만배는 많은 곳이 대한민국인 것이다. 글로 나쁜 놈을 만나는 것은 쉽지만 실제 사람으로 나쁜 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조회가 끝나고 자리에 앉은 이장후가 반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사건이 늘어나는 추세야, 어제는 오토바이 날치기가 네 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은행가나 현금인출기가 설치된 곳을 중심으로 순찰을 돌도록 해."
"알겠습니다."
"일 해!"
이장후가 일제히 대답하는 반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근강력반이 당직을 맡게 되면 운행하는 차량이 형사기동대라고 겉에 적혀있는 봉고차다.
사용하는 사람들이 매일 바뀌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해도 차 상태는 늘 말이 아니다. 이정민은 형기차에 타며 인상을 썼다.
"정말 이 놈의 냄새는 어떻게 해야지. 맨날 사내놈들만 타서 우글거리니 홀아비 냄새가 차에 뱄어요, 뱄어!"
"그럼 형님이 어디서 작은 형수 하나 남자옷 입혀서 데리고 오시지 그러셔!"
장문석이 웃으며 말하자 이정민의 작은 눈이 부릅떠졌다.
"임한!! 니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니까 장형사가 배웠잖아!!"
"형님은 작은 형수 얘기만 나오면 왜 저한테 시비를 걸어요? 정말 어디 작은 형수 계신 것 아닙니까?"
한이 농담을 받자 이정민이 조수석에 앉으며 차문을 소리나게 닫았다. 이정민은 끔찍한 경처가다. 작은 형수라니 이런 농담을 와이프가 듣기라도 한다면... 하는 생각에 이정민은 몸서리를 쳤다.
"시끄러! 출발해!"
한은 빙긋이 웃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은 당연히 막내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