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저녁, 하고 싶어요 외 4편
이효성
산발머리 날리는 모습으로
당신을 만나려 합니다
그래야
저놈이 정말 나한테 미쳤나보다
할
것인즉
그래도
금방 만나주지는 마셔요
밥 뜸들이듯 그렇게, 그러니
시계도 스맛폰도 안보기로
빤히 쳐다보지 않았으면 해요
마치, 니가 그 절도범이지? 하듯이
차마 말할 수 없지만 난 당신을 어쨌든
훔치려고 맘 먹었으니까요
그저 쿨하게 저녁해요
제 말에 호응하며 문장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갈 때
저녁이 새처럼 날아와
우리 곁에서 날개 접을 때
요릿상 앞에
이효성
바삭한 가지반찬 영감밥에 얹어주고
이거 심혈관에 좋다는 디요
서빙 아가씨가 웃음짓는다
정승을 모시고 살아유
말수적은 영감님 먹다가 말고
이거 골다공에 그만이라네
연어구이 한토막 아내에게 건넨다
우리집엔 호랑이 한 마리 키운다우
이곳 저곳에서 고기굽는 냄새와
웃음기 풍기는 가족들로 기분이 들뜨는데
정승도 호랑이도 요릿상 앞에서
그렇게 세월을 먹는다
남의 얘기도 아닌
문풍지
이효성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에
낙엽소리와 밝은 달빛 어우러진다
한옥문살에 창호지 바르는 날
책속에 눌려둔 국화꽃잎을
손잡이에 애써 대칭으로 붙여준다
잘 마른 격자무늬 창틀에 둘러주는 문풍지
한겨울 찬바람도 틈새는 넘지못해
문풍지 휘~하며 떠는 울림
안방의 속삭임 새나가지 않게
나노시대의 척후
밤이 수직으로 줄지어 온다
문살의 얼개에 녹여진 숱한 사연들
미세한 떨림
일렁이는 리듬으로
알파파의 강을 건넌다
삶을 음유하라
이효성
어느 순간 시는 다년생 넝쿨
어려움 속에도 제 속에서 뽑아올린 여린순이
맨처음의 자유를 품고 있음을*
아침나절의 볕이 석양으로 이어지고
이브닝과 굿모닝이 계주하듯
오늘을 내일에 접안한다
비발디가 악보에 은닉한 질문을
교향악단 지휘자가 ‘사계’의 풍경으로 답하고
음악은 아치형으로 우거지고
등굽은 정신을 무두질하는 선원(禪院)의 뒤꼍에서
찰나의 사냥꾼이 덩굴더미를 헤집듯이
한 땀 두세 땀 촘촘하게 박음질한다
틈새의 아픔을 땡감같은 시어로
*이원 ‘시를 위한 사전’에서 인용
종이달*
이효성
당신이 믿어주기만 하면
더 이상 가짜가 아니죠**
시계탑에 머물던 시간이
타종 소리에 흩날리고
초침따라 심장이 파동칠 때
현실의 고삐를 쥐고 태엽을 감는다
실체를 숨기고 그림자로 살면서
물류창고의 밤처럼
우리는 저마다 다른 국적의 언어로 잠꼬대를 하지만
새벽같이 인력시장에 몸팔아
정육점 코너를 무겁게 지나친다
오늘도 당신에게 담담히 다가가듯
커져가는 달만 보고 또 웃는다
*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 <종이달, Pale Moon>, 2014
**영화 속에서 변용된 냇 킹 콜의 노래(It's only a paper moon)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