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드라마 - 성 금요일 수난
오늘 성 금요일을 맞아 요한복음 18-19장의 말씀을 듣습니다. 수난 예식에서 우리가 듣는 긴 복음에서 특히 앞부분인 요한복음 18장은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 한편의 드라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연은 예수님, 조연은 빌라도, 그리고 군중이라는 많은 엑스트라들이 엮는 스릴과 긴장이 감도는 드라마입니다.
장면은 재판이 열리는 법정입니다. 재판장은 로마 총독 빌라도. 원고는 유대인 군중, 피고는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법정의 분위기입니다. 법정에서 재판장은 서슬이 시퍼렇고, 원고는 기세 등등, 피고는 주눅이 들고,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를 압도하는 법정의 분위기는 피고 예수님의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권위입니다. 도저히 그가 피고라고 느낄 수 없게 만드는 법정의 묘한 상황 전개에 우리는 압도됩니다. 그분의 모습을 대면하면서 뭔지 알 수 없는 힘에 우리는 경이를 느낍니다.
본시오 빌라도. 그가 누구입니까? 대 로마 제국의 팔레스타인 지역의 총독입니다. 그는 천부의 재능으로 말썽 많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전의 어느 총독보다 순탄하게 지배하는 실력자였습니다. 그는 총독으로서 많은 유대인들을 다루었었고, 언제나 자신 만만한 인물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유대인 죄수를 다루는 것은 그에게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도도한 권위 앞에 굴복하지 않은 유대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서 있는 예수라는 인물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예수라는 이 사람을 다른 유대인들처럼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법정의 모습을 상상의 눈으로 바라봅시다.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드라마에서, 고요함과 평정 속에서 서 있는 쪽은 피고 예수님이고, 당황스러움으로 더듬거리며 질문을 하는 쪽은 재판장 빌라도인 것입니다. 이 재판정에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예수님의 권위가 찬연히 빛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왕국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었다면, 나를 유대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시며 당신의 왕국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시는 것은 이 세상에서처럼 강제적인 힘에 바탕을 둔 왕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자리하는, 다시 말해, 마음의 왕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복해야 할 당신의 왕국이 있다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적인 정복이 아니라 마음을 압도하는 정복, 바로 사랑의 정복입니다.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빌라도가 예수님께 “아무튼, 네가 왕인가?”라고 재차 묻자,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려고 오셨다면, 그분의 왕국은 또한 진리의 왕국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진리, 인간에 대한 진리, 삶과 죽음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아니, 그분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진리 편에 서는 것이고, 진리의 왕국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삶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면, 진리 앞에서 머뭇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오늘의 드라마에서 빌라도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당신이 진리를 위해 오셨다고 하시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묻습니다. 빌라도의 이 물음은 우리 모두에게 그렇듯이 그에게 절실한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시민으로서 거의 정상의 자리인 식민지의 총독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뭔가 부족한 어떤 것이 있었습니다. 여기 법정에서 평정을 잃지 않고 고요하게 서 있는 피고 예수라는 인물 앞에서 빌라도는 무언가 자기가 지니고 있지 않은 어떤 것이 이 사람에게 있음을 느낍니다. 참으로 크고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니시고 계시는 어떤 것, 그것은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영원한 것에의 목마름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다만 눈빛으로 답하실 뿐입니다. “바로 내가 진리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의 삶 깊숙한 곳으로 예수께서 들어오셨을 때, 그는 이 예수라는 인물이 뭔가 자기가 지니고 있지 않은 소중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그것을 놓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영원한 것을 위해 잠시 지나가는 것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이 영원한 왕이시라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을 귀담아 들으며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눈을 바라보며 그분을 자기 삶의 왕으로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닌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분 예수님을 진리로 받아들일 때, 그분을 우리 삶의 왕으로 받아들일 때,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기준을 버릴 용기가 필요합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빌라도처럼 진리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갈등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진리 앞에 갈등합니다. “갈등하는 인간은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더군요. 그러나 갈등을 뛰어넘어 진리에로 나아가는 사람은 더 아름답습니다.
오늘 성금요일을, 십자가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갈등을 뛰어넘어 진리이신 그분께로 나아가도록 용기를 지닙시다. 참다운 용기를 주십사고 그분께 청합시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
첫댓글 +, 어제 저녁 미사를 보면서... 말씀하신 그런 용기조차 없으면서도 ...요한이 전한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마음속으로 따라 읽으면서 간혹 눈시울이 적셔짐을 보면서 괜히 제게 부끄러워했던 그 때가 생각납니다. 생활속에서 사소한것조차 포기하기를 두려워함을 지난사순기동안 나를 지켜보면서 슬펐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