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는
12월 26일 새벽에 강릉부 북평촌, 지금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인데, 고려시대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가 시조이다.
이돈수가 풍덕군 덕수현 출신이기 때문에 덕수를 본관으로 삼았다.
율곡의 조상은 고려 시대에 대대로 벼슬을 했으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둘째 사위가 육곡의 5대조이다.
·율곡이 39세 때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는데,
그 때 율곡은 황해도 황주 관아에 딸린 기생 유지(柳枝)와 각별히
가깝게 지냈는데, 유지는 본래 선비의 딸로 신분이 몰락하여 기생이 되었으며,
율곡이 보기에 유지는 도의를 사모하는 기생이었기에,
율곡과 유지가 서로 몸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은 ‘도의’를 지키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래 율곡은 유지의 정신세계를 아름답다고 하여, 유지를 노래하는
긴 시를 적어주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짧은 시 3 수를 덧보탰다고 한다.
이쁘게도 태어났네 선녀로구나
10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
돌 같은 사내기야 하겠냐마는
나뉘며 정든 이같이 설워하지만
서로 만나 얼굴이나 친했을 따름
다시 나면 네 뜻대로 따라가련만
병든 이라 세상 정욕 찬채 같은걸
길가에 버린 꽃 아깝고 말고
‘운영이’처럼 ‘배항이’를 언제 만날꼬
둘이 같이 신선 될 수 없는 일이라
나뉘며 시나 써 주니 미안하구나.
그리고 유지가 찾아 온 날 밤에 율곡이 지었다는
아래 시구는 인간적인 고뇌가 짙게 배어 있다.
문을 닫으면 인(仁)을 강할 것이요
동침을 한다면 의(義)를 해칠 것이다.
인과 의 사이에 갈등하던 율곡은 문을 열고 유지를 맞아들임으로써
인을 실천했고, 유지와 몸을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써 의를 지켰다.
원접사로 황해도 황주에 갔던 그 해(1583) 율곡은 늙고 병든 몸이었다.
율곡은 이듬해 사망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유지는 3년 상을 치른 후에
머리깎고 산속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김권섭 지음 <선비의 탄생>에서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철학사상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이 가지는 특색은 다음과 같다(성리학, 주기론).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며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이다.
즉 이는 이념적 존재이므로 시공을 초월한 형이상적(形而上的) 원리로서 만물에 공통적인 것이며, 기는 질료적(質料的)·작위적(作爲的) 존재로서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이하적(形而下的) 기재로 국한적인 것이다. 이이는 이와 같이 무형과 유형의 차이로 이통(理通)과 기국(氣局)을 설명하고, 유위와 무위의 차이로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을 설명했다(이통기국론). 이처럼 이이는 이존론(理尊論)을 주장하는 이황과 달리 이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이기의 부잡(不雜)보다는 불리(不離)를 강조했다.
즉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묘합(妙合)한 가운데 이는 이이고 기는 기여서 서로 협잡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일물(一物)이 아닌 것이며, 이는 이이고 기는 기라고 하더라도 이와 기는 혼륜무간(渾淪無間)해서 선후와 이합이 없기 때문에 이물(二物)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따라서 이와 기는 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와 기의 성질을 구분하여 형이상·형이하라고 말하는 것이다(기발이승일도설).
이러한 그의 이기관은 그대로 인간관에 반영된다.
먼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칠정은 사단을 포괄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본래 하나의 성으로 여기고, 이만을 지칭할 때에는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와 기를 서로 관련시켜 파악할 때에는 기질지성이라 한다고 했다.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인간의 모든 감정을 총괄하여 말하면 칠정이고 그중에서 특히 선일변(善一邊)만을 지칭하면 사단으로서,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단은 도심이라 할 수 있고,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총괄해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심에는 천리(天理)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어서 인심과 도심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은 다만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했는가, 육체적 욕망을 위해서 발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인욕을 천리에 배치된다고 보는 기존의 천리인욕설과는 대비되며,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초보적인 욕구를 당연시함으로써 생산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긍정하는 견해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이이는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고 여겼다. 그는 변화의 기초에 음양에 구비되어 있는 동(動)과 정(靜)의 속성과 그 음양을 동정하게 하는 법칙성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운동변화의 원인을 기 자체의 속성 대신 소이연(所以然)으로 설명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변화에 대한 이해를 사회현상에 적용한 것이다.
그의 변법사상의 기초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