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벅 문화마을
안내도
펄벅 기념관 앞에 있는
포토존에서
이성수
펄벅 기념관 자리에 있었던
초창기 소사 희망원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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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펄벅기념관
소재지 : 부천시 성주로214번길 61(심곡본동)
소설 「대지」로 미국역사상 여류작가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펄벅(Pearl S. Buck, 1892. 6. 26. ~ 1973. 3. 6.)은 문학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였다. 1960년대 초 한국 배경의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방한했던 펄벅은 출생으로 인해 고통받는 혼혈 아동들을 위해 1965년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하고, 1967년에는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로부터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한 1만평 부지(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 부천펄벅기념관 자리)에 ‘소사희망원(Sosa Opportunity Center)’을 세웠으며, 1973년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전쟁고아와 혼혈 아동 2,000여 명을 돌보면서 미용과 양장기술 등을 교육시켰다. 소사희망원은 1975년 문을 닫았다. 부천시는 한국에서 보여준 그녀의 고귀한 박애정신을 기리기 위해 옛 소사희망원 터에 2006년 9월 30일 부천 펄벅기념관을 설립하였다. 기념관 개관식에는 펄벅 여사의 딸 제니스(당시 81세)가 참석했다고 한다. 부천시가 2019년부터 부천문화원에 위탁하여 운영하고 있다.
부천펄벅기념관 시설 및 이용 안내
상설전시실 : 소설 「대지」와 「살아있는 갈대」를 비롯한 각종 서적들과 펄벅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영상자료, 소사희망원 출신 1,030명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펄벅의 80세 생일에 선물한 산수화 족자, 방한할 때 사용했던 가방, 생전에 즐겨 사용한 머리핀 등 펄벅의 다양한 개인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09:30 ~ 18:00(입장마감 17:00)
휴관일 :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월요일, 법정공휴일 다음날
관람료 : 무료
관람문의 : 032-668-7563~5
펄벅과 한국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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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과 유일한과의 인연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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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의
혼혈아동들에 대한 관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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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소사 희망원의 역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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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 여사의 노년 모습
펄벅 여사가
80세 생일에 한국에서 받은
생일 기념 선물
펄벅 여사가
80세 생일에 한국에서 받은
생일 기념 선물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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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에 관한 안내문
펄 벅 (Pearl Sydenstricker Buck)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지>의 작가
출생 – 사망 : 1892.06.26. ~ 1973.03.06.
1892.6.26.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권운동가 펄 벅 태어나다
19세기 말 중국에서 10여 년 간의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Absalom Sydenstricker)는 만삭의 아내 캐리를 데리고 웨스트버지니아 힐스버러로 돌아왔다. 남북전쟁 당시 남과 북 사이에 끼어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던 지역인 힐스버러는 캐리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캐리 시던스트라이커는 딸을 낳았다. 첫째 아들 에드거 이후 중국에서 낳은 세 아이를 모두 잃고서 미국으로 돌아와 낳은 아이였다. 부부는 딸아이의 이름을 펄(Pearl) 이라고 지었다. 이 딸아이는 훗날 소설 [대지]를 써 미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동양과 서양, 여성과 아이, 인종을 아우르는 열정적인 사회 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푸른 눈의 중국인으로 산 반평생
생후 3개월 만에 아기 펄은 그녀의 부모와 함께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간다.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가 다시 중국선교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펄은 중국에서 자랐다. 펄에게 생후 3개월 만에 떠나온 미국은 그저 모국일 뿐 피상적인 이미지의 나라였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중국이 발 디딜 수 있는 굳센 땅으로 느껴졌고 중국 사람들의 삶이 더욱 친숙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중국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중국을 가까이 느낀다고 하여도 중국인들에게 그녀는 벽안(碧眼)의 서양인이었을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포교하는 엄격한 선교사로서 중국인들과 자신들의 삶을 확실히 분리하였다. 서양인으로서의 자각도 완전하지 못하고 중국인으로 동화될 수도 없는 사춘기를 보낸 펄은 18세에 어머니 캐리의 강력한 원조로 미국 랜돌프-메이컨 여대에 진학했다. 이때의 4년이 그녀가 1934년 중국을 완전히 떠나기 전 가장 긴 시간 미국에 머문 기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펄은 3년 뒤 미국인 농학자인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고 벅이라는 성을 얻었다. 펄 벅의 남편 로싱 벅은 여성에게 다감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에는 열정적이었지만 아내를 이해하고 가정에 충실한 스타일의 남편이 못됐다. 선교 일에만 열중하며 가정을 나몰라라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펄 벅은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결혼생활에 절망했다. 더구나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캐롤은 펄 벅의 절망을 더욱 가중시켰다. 캐롤은 정신지체아였다. 펄 벅이 딸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닐 때 남편 로싱 벅은 아내와 딸에게 무심했다. 남편의 무관심과 딸로 인한 죄책감과 고통을 잊기 위해 펄 벅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지>가 준 선물, 새로운 인생 그리고 노벨문학상
1927년 국민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펄 벅은 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는다. 이때 그녀는 중국과 서양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균열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무리 중국에 살면서 중국을 사랑한다 하여도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미국인이라는 뼈아픈 자각은 그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었고 이것은 펄 벅 문학의 평생 테마가 되었다. 1930년 그녀의 처녀작 [동풍 서풍]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었다. 미국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1년이 채 안되어 3번이나 인쇄하는 인기몰이를 하였다. 펄 벅 문학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자, 그녀의 남은 반평생을 확정 지을 소설을 발표하였다. 1931년 출판된 소설 [대지]는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부와 명성을 주었다, [대지]는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주인공 왕룽을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들들의 역사를 그린 장편 소설이다.
[대지]는 왕룽이 죽은 후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한 [아들들](1933년), [분열한 집](1933년)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을 구성한다.
[대지]는 수많은 독자들의 탐독 속에서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스웨덴의 노벨상 심사위원들은 그 해의 문학상으로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 [대지]를 결정하였다.
펄 벅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미국의 여성작가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대지]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40여 년을 산 펄 벅이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동시에 안긴 선물이었다. [대지]의 성공은 펄 벅에게 작가로서의 성공도 주었지만 그녀의 개인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무심한 결혼생활에 지쳐있던 펄 벅은 작가로 얻은 명성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출판해주던 출판사 J.데이의 사장 R.J.월시에게 사랑을 느끼고 로싱 벅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1934년 딸 캐롤과 입양한 딸 재니스를 데리고 미국행 배에 오른 펄 벅은 중국에 남은 로싱 벅과 중국 땅에 영원한 이별을 고하게 된다. 이 날 이후 펄 벅은 단 한번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열정적으로 사회 인권운동에 투신하다
미국에 돌아온 후 펄 벅은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더불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사회 인권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비록 아버지 압솔룸의 교조적 선교 활동에 염증을 느끼고 남편 로싱 벅의 계몽사상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40여 년 간 선교사의 딸로 계몽운동가의 아내로 산 사람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사회활동은 그녀의 운명이었다. 작가의 조용한 은둔생활은 그녀의 인생에 맞지 않았다. 의욕적인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사회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녀는 1930년대 미국 내 인종 차별에 반기를 들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1942년에는 민족 간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동서협회(The East and West Association) 설립하였고 1949년에는 세계, 특히 아시아 지역의 전쟁과 가난 속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웰컴하우스(Welcome House.Inc)를 창설하였다. 그녀도 이 기관을 통해 7명의 피부색이 각기 다른 아이를 입양하였다.
또한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주둔한 뒤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 펄 벅 재단(Pearl S. Buck International)을 세웠다. 이 재단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의 중국계 아내 호미리와 친분이 있던 펄 벅이 소설의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버려진 미국계 사생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만든 것이었다. 펄 벅 재단은 한국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1개의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데 현재는 혼혈 아동뿐만 아니라 고아, 신체 장애우 등 사회에서 고통 받는 소외 아동을 돕고 있다.
펄 벅에 대한 엇갈린 평가
펄 벅의 사회활동이 너무 지나친 것이었을까? [대지] 이후 나온 그녀의 소설들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평단에서는 반응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의 평론가 일부는 [대지]가 어쩌다 우연히 노벨상을 타게 된 작품이라고 폄하하였다. 또한 그녀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은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및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중국 및 공산권의 미움도 샀다. 펄 벅은 닉슨 대통령 때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될 시기 중국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그녀의 반공산주의적 입장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거부로 방문은 끝내 무산되었다.
펄 벅에 대한 세간의 인상도 말년 행보 탓에 상당히 구겨졌다. 펄 벅은 두 번째 남편 R.J.월시를 사별하고 외로움을 겪었다. 그런 그녀의 외로움을 파고 든 것은 40여 살 연하의 댄스 선생이었던 테드 해리스였다. 테드 해리스는 70대의 펄 벅을 쥐고 흔들며 그녀의 돈을 빼내 사리사욕을 채웠다. 펄 벅 재단에 들어갈 돈의 일부를 횡령하였으며 유산을 가로챌 궁리를 하였다. 늙은 펄 벅은 젊은 애인의 요사스러운 말에 눈이 멀어 그의 부정을 알면서도 그를 옹호하였다. 이것이 펄 벅 80 평생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펄 벅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 섰다. 그녀는 미국의 인권과 여권운동, 매카시즘 시기의 마녀사냥 같은 민감한 주제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기꺼이 논쟁에 참여했으며, 신념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남성 평론가들은 펄 벅의 문학적 성공이 그녀의 주 독자층인 여성 독자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며 펄 벅이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차별에 고통 받던 아동들이 그녀가 만든 펄 벅 재단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펄 벅이라는 이 불세출의 작가이자 사회인권운동가의 삶을 더욱 값지게 해주고 있다.
펄 벅 연보
출생 1892.6.26~ 사망 1973.3.6
1892년6월 26일 웨스트버지니아주 출생.
장로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감
1910년 대학 입학을 위해 미국으로 귀국.
1914년 랜돌프매콘여자대학 졸업 후 중국으로 돌아감.
1917년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 박사와 결혼.
1927년 국공내전 와중에 정부군의 난징 공격 때 가족이 몰살당할 뻔 함.
1930년 첫 장편 《동풍 서풍 East Wind:West Wind》 출간.
1931년《대지 The Good Earth》출간.
1933년《대지》의 후속인 《아들들 Sons》과 《분열된 일가 A House Divided》출간. 《대지의 집 The House of Earth》3부작을 완성.
1934년 자신의 저서들을 출판해온 출판사의 사장 R.J.월시와 재혼, 미국에 정착.
1938년 미국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
1963년 한국 농촌을 배경으로 한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The Living Reed》출간.
1964년 사회복지법인 한국펄벅재단 설립.
1968년 한국 혼혈아를 소재로 한 《새해 The New Year》 출간.
1973년 3월 6일 미국 버몬트에서 사망.
대지(大地, The Good Earth)
미국의 작가 펄 벅의 장편소설.
수상 : 퓰리처상(1932), 노벨문학상(1938)
《대지 The Good Earth》(1931), 《아들들 Sons》(1932), 《분열된 가정 A House Divided》(1935)의 3부작으로 되어 있다.
왕룽에서 비롯한 3대에 걸친 중국 근대사가 작자의 연민에 찬 시선 아래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제1부 《대지》는 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출간 다음해인 1932년 퓰리처상(賞)을 받았으며 1938년 3부작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펄 벅의 자서전에 의하면, 《대지》를 쓰게 된 긴박한 동기의 하나는 외동딸이 백치였기 때문에 그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룽의 큰딸 백치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줄거리
1부
가난하게 살지만, 성실한 농부인 주인공 왕룽(王龍)은 성 안에서 가장 부자인 황씨 댁의 여종 오란(玉蘭)을 아내로 맞이한다. 오란은 외모는 못 생겼지만 알뜰하고 강직한, 전형적인 농부의 아내 감이었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농부인 왕룽과 오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생활에 점점 여유가 생긴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오란이 살던 황씨 댁에 돌아가서 예쁘게 옷을 지어 입힌 아이를 보여주고 오기도 하고, 거기서 황씨 댁 사정이 안좋게 돌아간다는 걸 알고는 힘들게 모은 돈으로 황씨 댁 전답을 사들이기도 한다. 식구도 늘어나고 재산도 늘어나고 만사가 다 잘 풀리는 듯 했지만, 그들 사이에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날 무렵, 큰 가뭄이 들어 무서운 굶주림이 시작되자 죽기 직전까지 몰린 왕룽 일가는 오란의 의견에 따라 남방으로 떠난다.
남방으로 내려간 일가는 왕룽은 인력거를 끌고, 오란은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구걸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나간다. 고향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나마 굶지나 않을 뿐, 객지 생활도 궁핍하고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상황.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둘째 아들이 푸줏간에서 고기를 훔쳐온 것을 본 왕룽은 이대로는 아이들이 도둑놈으로 자라겠다는 걱정에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사는 처지인지라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을 간 도시에도 불경기가 닥쳐 공황이 일어나고, 빈민들이 들고 일어나 부잣집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왕룽과 오란은 군중 틈에 끼어 한 부잣집에 들어갔다가 뜻밖에도 많은 돈과 보석을 손에 넣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황씨 댁의 남은 땅을 모두 사들여 큰 부자가 된다.
그러나 왕룽은 지주가 되어 재산을 불리고 소작인들을 부리면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성내 다방의 롄화(蓮華)라는 기생을 첩으로 맞아들이는 등 농사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롄화는 왕룽의 둘째 아내로 시집오면서 몸종 겸 식모로 두쥐안(杜鵑)도 데려오는데, 이는 롄화를 첩으로 들인 것보다도 더 왕룽의 집안에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롄화는 오란에게 생판 모르는 남이었지만, 두쥐안은 오란이 황씨 집에서 종살이하던 시절 황씨 집 주인영감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란에게 횡포를 부린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란은 남편이 젊고 예쁜 첩을 맞이한 사실을 알고 가슴앓이 하며 나날을 보냈고, 그동안의 고생이 겹쳐 극도로 쇠약해진 오란이 끝내 고생스러웠던 한평생을 마치자 그제야 왕룽은 오란이 이 집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는다.
이후 도적 집단의 두목급임을 슬쩍 내세워 일가를 위협하던 작은아버지와 말썽꾸러기 사촌에게 골치를 썩이던 왕룽은 첫째 아들의 제안에 따라 이제는 셋집이 된 황씨 댁 저택으로 집을 옮기고, 넓은 저택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고독 속에서 지내다가 결국은 젊고 어여쁜 종 리화(梨花)를 셋째 아내로 삼고 외로움을 달랜다.
리화는 왕룽의 둘째 아내 롄화의 시중을 드는 종이었고 흉년에 그 아버지가 은 20냥에 왕룽에게 팔았는데, 난봉꾼인 왕룽의 사촌 아우에게 희롱당할 위기에서 구해 왕룽 곁에 잠시 두었다. 사실 리화는 왕룽에게 첩이라기보다 양딸 같은 존재이다. 리화 역시 아버지한테 하는 것처럼 왕룽에게 매달렸다.
큰 아들은 그의 뒤를 이어 대지주가 되고, 둘째 아들은 거대한 상인이 되며, 막내아들은 집을 뛰쳐나가 남방의 군벌에 입대해 군인이 된다. 어느 날, 훌륭한 관을 준비해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던 왕룽은 두 아들이 토지를 팔려고 의논하는 것을 듣고 크게 노한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안 판다고 얼버무리고 뒤로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는다.
2부
왕룽이 결국 노환으로 사망하고, 호사스럽고 게으른 지주가 된 첫째 왕이(王一, 왕따(大)로 적은 판도 있다), 약삭빠른 장사꾼이 된 둘째 왕얼(王二), 군벌이 된 셋째 왕싼(王三, 후에 불리는 이름은 왕후王虎.). 2부는 왕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첫째는 두 아내를 두고 가족 모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재산과 토지는 점점 줄어들고, 둘째는 형이 소유한 전답을 대거 사들여 소작료를 챙기고 상인 기질을 발휘해 여러 곳에 사업을 벌여 부를 증식시켜 크게 성공하지만, 인정이라고는 없고 검소하여 자신의 아들들에게 원망을 산다. 왕룽의 둘째 첩이었던 리화는 왕룽이 죽자 천치 딸과 왕이의 자식이지만 거의 버려진 취급을 받는 곱사등이와 같이 산다. 무엇보다 왕싼을 중심으로 군벌이 되어가는 영지물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전투 묘사 등 여러 모로 볼거리도 있다.
왕싼은 초기에 지역의 군벌 아래서 인정받는 부대장이 되고, 혁명은 말로만 외치며 현실에 안주하는 상관을 혐오하여 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독립탈영한다. 그 부하 백 명으로, 술이 유명한 작은 현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표범'이라는 소군벌을 물리치고 현장(우리나라의 군수에 해당)을 협박해 현의 사령관 신분이 된다. 사령관이라지만 사실상 현을 통치하는 건 현장이 아닌 사령관 '호랑이 장군 왕싼'이어서, 현장이 죽은 뒤에도 현으로 부임해오는 관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시대가 청 말기의 치안 공백 상태이긴 하나, 엄연히 '도적' 신분인 타 군벌과 다르게 토벌에 나선 관군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치고 공문을 올려 명목상으로는 관군 신분이 될 정도로 꽤 머리를 썼다.
그렇게 작은 군벌에서 차츰차츰 무기를 늘리고 병사를 늘려가며 2만 명에 이르는 중대 규모 군벌이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왕싼은 아버지가 되고, 안정을 원하게 되면서 자신이 꿈꾸던 신중국 건설에는 결국 나서지 못한다.
3부
왕룽의 손자들, 그 중에서도 왕싼의 외아들 왕위안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왕위안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군벌 집단의 후계자로 꼽혔지만 그러한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억지로 결혼할 위기까지 처하면서 결국 아버지의 다른 부인이 있는 상하이로 이주해서 거기서 신식 교육을 받게 된다. 거기서 학생운동에 가담하다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미국 유학을 가는 등의 스토리가 펼쳐지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가 3부 후반의 줄거리.
이후 소설의 말기에서는 고향에서는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가의 기반이었던 농토를 모두 다 잃는다. 첫째 왕이의 집안은 아들 하나가 상하이에서 가장 큰 은행의 부은행장이 되어 있어서 상하이로 이주하고, 둘째 왕얼의 집안은 2부에서 삼촌 왕싼 밑에 들어간 아들 곰보가 부유한 상업도시 하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도망간다. 문제는 셋째 왕싼인데, 왕싼은 도망간다는 게 아버지의 옛집이었고, 당연히 들키는 바람에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그 후유증으로 앓다가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왕위안을 만나고 죽는다.
애초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은 왕얼에게 있었다. 왕싼이 아들의 유학 자금이나 군자금 등으로 왕얼에게 돈을 빌려 썼는데, 왕얼은 동생에게 가차 없이 이자와 대부 원금을 상환 받았다.
이 비용 부담 때문에 한때 2만의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던 왕싼의 군대는 건달패 백여 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들었고, 조카인 왕 얼의 아들조차 자기 지배구역에서 걷는 세금을 삼촌에게 바치지 않을 정도였다. 가문의 배경인 왕싼의 군대가 없어지자 왕얼의 착취를 참고 참던 농민들이 일시에 봉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벌의 보호를 받는 유력자들이 그들에게 자금 지원을 해 주면서 상부상조한다는 걸 감안해 보면 왕얼은 결국 그 탐욕스러운 본성을 못 버려서 동생에게 자금 지원은 못 해 줄 망정 철저히 잇속만 따지다가 결국 화를 자초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왕싼의 봉기 초기부터 보면 왕얼이 돈을 안 받고 넘어간 건 왕싼이 늘어난 군대를 무장시킬 총을 구입했을 때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무사히 수령한 2천 정 정도에 대한 대금은 전부 받았고, 소실된 1천 정 가량에 대한 대금만 왕싼이 못 받은 것에 대해선 지불할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안 받고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한편 그 시기, 왕이의 두 아들은 혁명군에서 중책을 맡아 공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위안을 혁명군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그의 군사학 가정교사는 고위직에 올라 있었다. 위안의 이복누이 아이란은 속도위반으로 부유하지만 여자 관련으로 소문이 좋지 않은 연애 소설가와 결혼했으며, 위안은 의붓동생 메이링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3부가 종료된다.
4부
펄 벅은 <붉은 대지>라는 4부 격의 소설을 집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이 붉은 대지는 왕룽의 손자들이 공산화된 중국에서 겪는 헬게이트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었다. 실제로도 이 소설 미완성된 부분을 봐도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모습과 문화대혁명으로 왕룽의 증손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그리는 걸로 기획되었다.
1967년 펄벅 여사는
부천에서 소사 희망원을 설립
펄벅 소설 속의 한국
[힘은 희망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고,
용기는 가슴 속의 의지에서 일어난다]는
펄벅 여사의 말씀
펄벅 여사의 흉상과
그 뒤로 보이는 펄벅 기념관
2023년11월25일(토요일) 부천시 [부천 펄벅기념관&부천아트벙커B39&부천 자유시장] 탐방기 탐방지 : 부천시 [부천 펄벅기념관&부천아트벙커B39&부천 자유시장] 탐방코스 : [ 부천역 1번 출구 –(1.4km를 도보로 이동)- 펄벅 기념관 – 펄벅 기념관 탐방 –(6.0km를 택시로 이동)- 부천아트벙커B39 – 부천아트벙커B39 탐방 –(5.1km를 택시로 이동)- 부천자유시장 –(170m를 도보로 이동)- '백구회 포차 부천1호점' 식당 ] 탐방일 : 2023년 11월 25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부천시 심곡본동 최저기온 영하 5도C, 최고기온 3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식사시간 포함 총 탐방시간 5시간20분 소요) * 12:59~13:49 서울 구산역에서 지하철 6호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신도림역으로 간 후 1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 번지에 있는 부천역으로 이동 [50분 소요] * 13:49~14:05 경기 부천시 심곡본동 316-2 번지에 있는 부천역 1번 출구로 나와서 탐방 동행자와 회동 * 14:05~14:27 부천역 1번 출구에서 탐방 출발하여 부천시 성주로214번길 61(심곡본동)에 있는 펄벅 기념관으로 이동 [부천 펄벅기념관 소재지 : 부천시 성주로214번길 61(심곡본동) 소설 「대지」로 미국역사상 여류작가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펄벅(Pearl S. Buck, 1892. 6. 26. ~ 1973. 3. 6.)은 문학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였다. 1960년대 초 한국 배경의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방한했던 펄벅은 출생으로 인해 고통받는 혼혈 아동들을 위해 1965년 펄벅재단 한국지부를 설립하고, 1967년에는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구입한 1만평 부지(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 부천펄벅기념관 자리)에 ‘소사희망원(Sosa Opportunity Center)’을 세웠으며, 1973년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전쟁고아와 혼혈 아동 2,000여 명을 돌보면서 미용과 양장기술 등을 교육시켰다. 소사희망원은 1975년 문을 닫았다. 부천시는 한국에서 보여준 그녀의 고귀한 박애정신을 기리기 위해 옛 소사희망원 터에 2006년 9월 30일 부천 펄벅기념관을 설립하였다. 기념관 개관식에는 펄벅 여사의 딸 제니스(당시 81세)가 참석했다고 한다. 부천시가 2019년부터 부천문화원에 위탁하여 운영하고 있다. 부천펄벅기념관 시설 및 이용 안내 상설전시실 : 소설 「대지」와 「살아있는 갈대」를 비롯한 각종 서적들과 펄벅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영상자료, 소사희망원 출신 1,030명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펄벅의 80세 생일에 선물한 산수화 족자, 방한할 때 사용했던 가방, 생전에 즐겨 사용한 머리핀 등 펄벅의 다양한 개인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09:30 ~ 18:00(입장마감 17:00) 휴관일 :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월요일, 법정공휴일 다음날 관람료 : 무료 관람문의 : 032-668-7563~5 ] * 14:27~15:01 펄벅 기념관을 관람 [펄 벅 (Pearl Sydenstricker Buck)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대지>의 작가 출생 – 사망 : 1892.06.26. ~ 1973.03.06. 1892.6.26.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인권운동가 펄 벅 태어나다 19세기 말 중국에서 10여 년 간의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Absalom Sydenstricker)는 만삭의 아내 캐리를 데리고 웨스트버지니아 힐스버러로 돌아왔다. 남북전쟁 당시 남과 북 사이에 끼어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던 지역인 힐스버러는 캐리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캐리 시던스트라이커는 딸을 낳았다. 첫째 아들 에드거 이후 중국에서 낳은 세 아이를 모두 잃고서 미국으로 돌아와 낳은 아이였다. 부부는 딸아이의 이름을 펄(Pearl) 이라고 지었다. 이 딸아이는 훗날 소설 [대지]를 써 미국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동양과 서양, 여성과 아이, 인종을 아우르는 열정적인 사회 인권운동가로 활동하였다. 푸른 눈의 중국인으로 산 반평생 생후 3개월 만에 아기 펄은 그녀의 부모와 함께 미국을 떠나 중국으로 간다.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가 다시 중국선교활동을 재개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스무 살이 될 때까지 펄은 중국에서 자랐다. 펄에게 생후 3개월 만에 떠나온 미국은 그저 모국일 뿐 피상적인 이미지의 나라였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중국이 발 디딜 수 있는 굳센 땅으로 느껴졌고 중국 사람들의 삶이 더욱 친숙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가 중국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중국을 가까이 느낀다고 하여도 중국인들에게 그녀는 벽안(碧眼)의 서양인이었을뿐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 압솔룸 시던스트라이커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포교하는 엄격한 선교사로서 중국인들과 자신들의 삶을 확실히 분리하였다. 서양인으로서의 자각도 완전하지 못하고 중국인으로 동화될 수도 없는 사춘기를 보낸 펄은 18세에 어머니 캐리의 강력한 원조로 미국 랜돌프-메이컨 여대에 진학했다. 이때의 4년이 그녀가 1934년 중국을 완전히 떠나기 전 가장 긴 시간 미국에 머문 기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펄은 3년 뒤 미국인 농학자인 로싱 벅(John Lossing Buck)과 결혼하고 벅이라는 성을 얻었다. 펄 벅의 남편 로싱 벅은 여성에게 다감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일에는 열정적이었지만 아내를 이해하고 가정에 충실한 스타일의 남편이 못됐다. 선교 일에만 열중하며 가정을 나몰라라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펄 벅은 남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결혼생활에 절망했다. 더구나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캐롤은 펄 벅의 절망을 더욱 가중시켰다. 캐롤은 정신지체아였다. 펄 벅이 딸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다닐 때 남편 로싱 벅은 아내와 딸에게 무심했다. 남편의 무관심과 딸로 인한 죄책감과 고통을 잊기 위해 펄 벅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지>가 준 선물, 새로운 인생 그리고 노벨문학상 1927년 국민군이 난징을 공격했을 때 펄 벅은 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는다. 이때 그녀는 중국과 서양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균열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아무리 중국에 살면서 중국을 사랑한다 하여도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미국인이라는 뼈아픈 자각은 그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들었고 이것은 펄 벅 문학의 평생 테마가 되었다. 1930년 그녀의 처녀작 [동풍 서풍]은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이었다. 미국에서 출간된 이 소설은 1년이 채 안되어 3번이나 인쇄하는 인기몰이를 하였다. 펄 벅 문학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 최고의 전환점이자, 그녀의 남은 반평생을 확정 지을 소설을 발표하였다. 1931년 출판된 소설 [대지]는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확고한 위치와 부와 명성을 주었다, [대지]는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주인공 왕룽을 중심으로 왕룽의 아내 오란과 세 명의 아들들의 역사를 그린 장편 소설이다. [대지]는 왕룽이 죽은 후 세 아들이 지주, 상인, 공산주의자로 각자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묘사한 [아들들](1933년), [분열한 집](1933년)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을 구성한다. [대지]는 수많은 독자들의 탐독 속에서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38년 스웨덴의 노벨상 심사위원들은 그 해의 문학상으로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작품 [대지]를 결정하였다. 펄 벅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미국의 여성작가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대지]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40여 년을 산 펄 벅이 미국과 중국 두 나라에 동시에 안긴 선물이었다. [대지]의 성공은 펄 벅에게 작가로서의 성공도 주었지만 그녀의 개인사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무심한 결혼생활에 지쳐있던 펄 벅은 작가로 얻은 명성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출판해주던 출판사 J.데이의 사장 R.J.월시에게 사랑을 느끼고 로싱 벅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1934년 딸 캐롤과 입양한 딸 재니스를 데리고 미국행 배에 오른 펄 벅은 중국에 남은 로싱 벅과 중국 땅에 영원한 이별을 고하게 된다. 이 날 이후 펄 벅은 단 한번도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열정적으로 사회 인권운동에 투신하다 미국에 돌아온 후 펄 벅은 본격적인 집필활동과 더불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기반으로 사회 인권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비록 아버지 압솔룸의 교조적 선교 활동에 염증을 느끼고 남편 로싱 벅의 계몽사상을 비웃었지만 그녀는 40여 년 간 선교사의 딸로 계몽운동가의 아내로 산 사람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사회활동은 그녀의 운명이었다. 작가의 조용한 은둔생활은 그녀의 인생에 맞지 않았다. 의욕적인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사회활동에 더 많은 정열을 쏟았다. 그녀는 1930년대 미국 내 인종 차별에 반기를 들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1942년에는 민족 간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동서협회(The East and West Association) 설립하였고 1949년에는 세계, 특히 아시아 지역의 전쟁과 가난 속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미국으로 입양시키는 웰컴하우스(Welcome House.Inc)를 창설하였다. 그녀도 이 기관을 통해 7명의 피부색이 각기 다른 아이를 입양하였다. 또한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주둔한 뒤 생긴 미국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1964년 펄 벅 재단(Pearl S. Buck International)을 세웠다. 이 재단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의 중국계 아내 호미리와 친분이 있던 펄 벅이 소설의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버려진 미국계 사생아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만든 것이었다. 펄 벅 재단은 한국을 시작으로 현재 세계 11개의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본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데 현재는 혼혈 아동뿐만 아니라 고아, 신체 장애우 등 사회에서 고통 받는 소외 아동을 돕고 있다. 펄 벅에 대한 엇갈린 평가 펄 벅의 사회활동이 너무 지나친 것이었을까? [대지] 이후 나온 그녀의 소설들은 여전히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평단에서는 반응이 좋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의 평론가 일부는 [대지]가 어쩌다 우연히 노벨상을 타게 된 작품이라고 폄하하였다. 또한 그녀의 맹렬한 사회 인권운동은 에드거 후버 FBI 국장 및 많은 반공주의자들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그녀는 자신이 스스로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밝힘으로써 중국 및 공산권의 미움도 샀다. 펄 벅은 닉슨 대통령 때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될 시기 중국방문을 열렬히 희망했지만 그녀의 반공산주의적 입장표명에 불만을 가진 중국의 거부로 방문은 끝내 무산되었다. 펄 벅에 대한 세간의 인상도 말년 행보 탓에 상당히 구겨졌다. 펄 벅은 두 번째 남편 R.J.월시를 사별하고 외로움을 겪었다. 그런 그녀의 외로움을 파고 든 것은 40여 살 연하의 댄스 선생이었던 테드 해리스였다. 테드 해리스는 70대의 펄 벅을 쥐고 흔들며 그녀의 돈을 빼내 사리사욕을 채웠다. 펄 벅 재단에 들어갈 돈의 일부를 횡령하였으며 유산을 가로챌 궁리를 하였다. 늙은 펄 벅은 젊은 애인의 요사스러운 말에 눈이 멀어 그의 부정을 알면서도 그를 옹호하였다. 이것이 펄 벅 80 평생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펄 벅은 언제나 열정적이었으며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 섰다. 그녀는 미국의 인권과 여권운동, 매카시즘 시기의 마녀사냥 같은 민감한 주제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기꺼이 논쟁에 참여했으며, 신념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남성 평론가들은 펄 벅의 문학적 성공이 그녀의 주 독자층인 여성 독자들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며 펄 벅이 과대평가된 작가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계의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차별에 고통 받던 아동들이 그녀가 만든 펄 벅 재단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펄 벅이라는 이 불세출의 작가이자 사회인권운동가의 삶을 더욱 값지게 해주고 있다. 펄 벅 연보 출생 1892.6.26~ 사망 1973.3.6 1892년6월 26일 웨스트버지니아주 출생. 장로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감 1910년 대학 입학을 위해 미국으로 귀국. 1914년 랜돌프매콘여자대학 졸업 후 중국으로 돌아감. 1917년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 박사와 결혼. 1927년 국공내전 와중에 정부군의 난징 공격 때 가족이 몰살당할 뻔 함. 1930년 첫 장편 《동풍 서풍 East Wind:West Wind》 출간. 1931년《대지 The Good Earth》출간. 1933년《대지》의 후속인 《아들들 Sons》과 《분열된 일가 A House Divided》출간. 《대지의 집 The House of Earth》3부작을 완성. 1934년 자신의 저서들을 출판해온 출판사의 사장 R.J.월시와 재혼, 미국에 정착. 1938년 미국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 1963년 한국 농촌을 배경으로 한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The Living Reed》출간. 1964년 사회복지법인 한국펄벅재단 설립. 1968년 한국 혼혈아를 소재로 한 《새해 The New Year》 출간. 1973년 3월 6일 미국 버몬트에서 사망.] [대지(大地, The Good Earth) 미국의 작가 펄 벅의 장편소설. 수상 : 퓰리처상(1932), 노벨문학상(1938) 《대지 The Good Earth》(1931), 《아들들 Sons》(1932), 《분열된 가정 A House Divided》(1935)의 3부작으로 되어 있다. 왕룽에서 비롯한 3대에 걸친 중국 근대사가 작자의 연민에 찬 시선 아래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제1부 《대지》는 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출간 다음해인 1932년 퓰리처상(賞)을 받았으며 1938년 3부작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펄 벅의 자서전에 의하면, 《대지》를 쓰게 된 긴박한 동기의 하나는 외동딸이 백치였기 때문에 그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왕룽의 큰딸 백치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줄거리 1부 가난하게 살지만, 성실한 농부인 주인공 왕룽(王龍)은 성 안에서 가장 부자인 황씨 댁의 여종 오란(玉蘭)을 아내로 맞이한다. 오란은 외모는 못 생겼지만 알뜰하고 강직한, 전형적인 농부의 아내 감이었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농부인 왕룽과 오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생활에 점점 여유가 생긴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오란이 살던 황씨 댁에 돌아가서 예쁘게 옷을 지어 입힌 아이를 보여주고 오기도 하고, 거기서 황씨 댁 사정이 안좋게 돌아간다는 걸 알고는 힘들게 모은 돈으로 황씨 댁 전답을 사들이기도 한다. 식구도 늘어나고 재산도 늘어나고 만사가 다 잘 풀리는 듯 했지만, 그들 사이에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날 무렵, 큰 가뭄이 들어 무서운 굶주림이 시작되자 죽기 직전까지 몰린 왕룽 일가는 오란의 의견에 따라 남방으로 떠난다. 남방으로 내려간 일가는 왕룽은 인력거를 끌고, 오란은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구걸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나간다. 고향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나마 굶지나 않을 뿐, 객지 생활도 궁핍하고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상황.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둘째 아들이 푸줏간에서 고기를 훔쳐온 것을 본 왕룽은 이대로는 아이들이 도둑놈으로 자라겠다는 걱정에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사는 처지인지라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을 간 도시에도 불경기가 닥쳐 공황이 일어나고, 빈민들이 들고 일어나 부잣집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왕룽과 오란은 군중 틈에 끼어 한 부잣집에 들어갔다가 뜻밖에도 많은 돈과 보석을 손에 넣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황씨 댁의 남은 땅을 모두 사들여 큰 부자가 된다. 그러나 왕룽은 지주가 되어 재산을 불리고 소작인들을 부리면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성내 다방의 롄화(蓮華)라는 기생을 첩으로 맞아들이는 등 농사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롄화는 왕룽의 둘째 아내로 시집오면서 몸종 겸 식모로 두쥐안(杜鵑)도 데려오는데, 이는 롄화를 첩으로 들인 것보다도 더 왕룽의 집안에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롄화는 오란에게 생판 모르는 남이었지만, 두쥐안은 오란이 황씨 집에서 종살이하던 시절 황씨 집 주인영감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란에게 횡포를 부린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란은 남편이 젊고 예쁜 첩을 맞이한 사실을 알고 가슴앓이 하며 나날을 보냈고, 그동안의 고생이 겹쳐 극도로 쇠약해진 오란이 끝내 고생스러웠던 한평생을 마치자 그제야 왕룽은 오란이 이 집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는다. 이후 도적 집단의 두목급임을 슬쩍 내세워 일가를 위협하던 작은아버지와 말썽꾸러기 사촌에게 골치를 썩이던 왕룽은 첫째 아들의 제안에 따라 이제는 셋집이 된 황씨 댁 저택으로 집을 옮기고, 넓은 저택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고독 속에서 지내다가 결국은 젊고 어여쁜 종 리화(梨花)를 셋째 아내로 삼고 외로움을 달랜다. 리화는 왕룽의 둘째 아내 롄화의 시중을 드는 종이었고 흉년에 그 아버지가 은 20냥에 왕룽에게 팔았는데, 난봉꾼인 왕룽의 사촌 아우에게 희롱당할 위기에서 구해 왕룽 곁에 잠시 두었다. 사실 리화는 왕룽에게 첩이라기보다 양딸 같은 존재이다. 리화 역시 아버지한테 하는 것처럼 왕룽에게 매달렸다. 큰 아들은 그의 뒤를 이어 대지주가 되고, 둘째 아들은 거대한 상인이 되며, 막내아들은 집을 뛰쳐나가 남방의 군벌에 입대해 군인이 된다. 어느 날, 훌륭한 관을 준비해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던 왕룽은 두 아들이 토지를 팔려고 의논하는 것을 듣고 크게 노한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안 판다고 얼버무리고 뒤로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는다. 2부 왕룽이 결국 노환으로 사망하고, 호사스럽고 게으른 지주가 된 첫째 왕이(王一, 왕따(大)로 적은 판도 있다), 약삭빠른 장사꾼이 된 둘째 왕얼(王二), 군벌이 된 셋째 왕싼(王三, 후에 불리는 이름은 왕후王虎.). 2부는 왕싼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다. 첫째는 두 아내를 두고 가족 모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재산과 토지는 점점 줄어들고, 둘째는 형이 소유한 전답을 대거 사들여 소작료를 챙기고 상인 기질을 발휘해 여러 곳에 사업을 벌여 부를 증식시켜 크게 성공하지만, 인정이라고는 없고 검소하여 자신의 아들들에게 원망을 산다. 왕룽의 둘째 첩이었던 리화는 왕룽이 죽자 천치 딸과 왕이의 자식이지만 거의 버려진 취급을 받는 곱사등이와 같이 산다. 무엇보다 왕싼을 중심으로 군벌이 되어가는 영지물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전투 묘사 등 여러 모로 볼거리도 있다. 왕싼은 초기에 지역의 군벌 아래서 인정받는 부대장이 되고, 혁명은 말로만 외치며 현실에 안주하는 상관을 혐오하여 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독립탈영한다. 그 부하 백 명으로, 술이 유명한 작은 현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표범'이라는 소군벌을 물리치고 현장(우리나라의 군수에 해당)을 협박해 현의 사령관 신분이 된다. 사령관이라지만 사실상 현을 통치하는 건 현장이 아닌 사령관 '호랑이 장군 왕싼'이어서, 현장이 죽은 뒤에도 현으로 부임해오는 관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시대가 청 말기의 치안 공백 상태이긴 하나, 엄연히 '도적' 신분인 타 군벌과 다르게 토벌에 나선 관군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치고 공문을 올려 명목상으로는 관군 신분이 될 정도로 꽤 머리를 썼다. 그렇게 작은 군벌에서 차츰차츰 무기를 늘리고 병사를 늘려가며 2만 명에 이르는 중대 규모 군벌이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왕싼은 아버지가 되고, 안정을 원하게 되면서 자신이 꿈꾸던 신중국 건설에는 결국 나서지 못한다. 3부 왕룽의 손자들, 그 중에서도 왕싼의 외아들 왕위안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왕위안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군벌 집단의 후계자로 꼽혔지만 그러한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억지로 결혼할 위기까지 처하면서 결국 아버지의 다른 부인이 있는 상하이로 이주해서 거기서 신식 교육을 받게 된다. 거기서 학생운동에 가담하다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미국 유학을 가는 등의 스토리가 펼쳐지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가 3부 후반의 줄거리. 이후 소설의 말기에서는 고향에서는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가의 기반이었던 농토를 모두 다 잃는다. 첫째 왕이의 집안은 아들 하나가 상하이에서 가장 큰 은행의 부은행장이 되어 있어서 상하이로 이주하고, 둘째 왕얼의 집안은 2부에서 삼촌 왕싼 밑에 들어간 아들 곰보가 부유한 상업도시 하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도망간다. 문제는 셋째 왕싼인데, 왕싼은 도망간다는 게 아버지의 옛집이었고, 당연히 들키는 바람에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그 후유증으로 앓다가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왕위안을 만나고 죽는다. 애초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은 왕얼에게 있었다. 왕싼이 아들의 유학 자금이나 군자금 등으로 왕얼에게 돈을 빌려 썼는데, 왕얼은 동생에게 가차 없이 이자와 대부 원금을 상환 받았다. 이 비용 부담 때문에 한때 2만의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던 왕싼의 군대는 건달패 백여 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들었고, 조카인 왕 얼의 아들조차 자기 지배구역에서 걷는 세금을 삼촌에게 바치지 않을 정도였다. 가문의 배경인 왕싼의 군대가 없어지자 왕얼의 착취를 참고 참던 농민들이 일시에 봉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벌의 보호를 받는 유력자들이 그들에게 자금 지원을 해 주면서 상부상조한다는 걸 감안해 보면 왕얼은 결국 그 탐욕스러운 본성을 못 버려서 동생에게 자금 지원은 못 해 줄 망정 철저히 잇속만 따지다가 결국 화를 자초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왕싼의 봉기 초기부터 보면 왕얼이 돈을 안 받고 넘어간 건 왕싼이 늘어난 군대를 무장시킬 총을 구입했을 때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무사히 수령한 2천 정 정도에 대한 대금은 전부 받았고, 소실된 1천 정 가량에 대한 대금만 왕싼이 못 받은 것에 대해선 지불할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안 받고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한편 그 시기, 왕이의 두 아들은 혁명군에서 중책을 맡아 공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위안을 혁명군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그의 군사학 가정교사는 고위직에 올라 있었다. 위안의 이복누이 아이란은 속도위반으로 부유하지만 여자 관련으로 소문이 좋지 않은 연애 소설가와 결혼했으며, 위안은 의붓동생 메이링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3부가 종료된다. 4부 펄 벅은 <붉은 대지>라는 4부 격의 소설을 집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된다. 이 붉은 대지는 왕룽의 손자들이 공산화된 중국에서 겪는 헬게이트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었다. 실제로도 이 소설 미완성된 부분을 봐도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 모습과 문화대혁명으로 왕룽의 증손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그리는 걸로 기획되었다.] * 15:01~15:08 펄벅 기념관 앞 도로에서 택시 승차를 대기 * 15:08~15:25 펄벅 기념관 앞 도로에서 택시를 타고 경기도 부천시 삼작로 53 번지에 있는 부천아트벙커B39로 이동 [6.0km, 17분 소요, 택시비 9,900원] * 15:25~16:05 부천아트벙커B39를 관람 [부천아트벙커B39 위치 : 경기도 부천시 삼작로 53 관과 지역 주민 모두가 철거될 것이라고 기대하던 삼정동 폐기물 소각장은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도시재생 지원의 일부인 ‘폐산업시설 문화재생 사업’을 만나게 되어 극적인 운명의 변화를 겪게 된다. 4년간 방치되던 폐 소각장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이 공간을 새로운 문화예술 플랫폼으로 리노베이션 하기로 계획하였다. 건축가 김광수의 지휘 아래 쓰레기의 반입과 저장, 소각, 처리 과정을 하나의 축으로 따라가는 동선을 기반으로 공간을 배치해, 투박한 과거 공장의 모습과 세련된 현대 문화공간의 모습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018년 6월 1일 부천시 ‘삼정동 폐기물 소각장’이 도시의 새로운 복합문화예술공간인 ‘부천아트벙커B39’로 재탄생했다. 총 대지면적 12,663 m2, 연면적 8,335 m2, 건축면적 3,417 m2인 삼정동 소각장은 지하 1층, 지상 6층의 소각동과 지하 1층, 지상 2층의 관리동, 그 외 계측실 등 작은 부속 건물이 함께 있는 장소였다. 과거 산업시설의 모습을 보존한 독특한 공간의 매력을 살려 미디어아트 전시, 퍼포밍 아트 등 다채로운 융복합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여왔다. 영화 <승리호>, <길복순> 등과 함께 ‘BTS’ 화보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B39의 B는 부천(Bucheon)과 벙커(Bunker)의 앞 자인 B를 뜻하기도 하고, 경계 없음(Borderless)의 이니셜 B를 의미하기도 한다. 39로 명명된 이유는 과거 쓰레기 소각장의 쓰레기 저장고(Bunker)의 높이가 39m이며, 소각장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39번 국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천아트벙커B39는 ‘BTS-루이비통 패션쇼’, ‘길복순’, ‘스위트홈 시즌2’ 등 인기 프로그램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부천 8경 중 제8경이기도 하다. 현재 부천아트벙커B39는 (재)부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주거지역과 산업 지역의 완충지에 위치해 기술과 문화예술이 결합한 디지털·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 문화·예술적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Bucheon Art Bunker B39(부천아트벙커B39) TEL : 032 321 3901 FAX : 032 321 3902 E-MAIL : b39@bcf.or.kr 이용시간 : 화요일 ~ 일요일 (월요일, 공휴일 휴관) 10am ~ 5pm 주소 : (14449)경기도 부천시 삼작로 53, 부천아트벙커B39] 16:05~16:13 부천아트벙커B39 앞 도로에서 택시 승차를 대기 16:13~16:35 택시를 타고 부천아트벙커B39에서 부천자유시장으로 이동 [5.1km, 22분 소요, 택시비 11,300원] [부천 자유시장 부천 자유시장은 복사골로 유명한 부천에 개설되어 있는 전통시장이다. 부천 자유시장은 주변에 위치한 부천청과물시장과 함께 1970년대까지 부천의 유일한 시장이었다. 청과물과 수산물, 잡화, 생활필수품 등을 판매하고 있다. 소재지 : 경기 부천시 소사구 자유로 33 시장 유형 : 상설시장 형성 시기 : 1947년(개설) 시장 현황 : 점포 수 257곳, 면적 24,647m2 같은 지역 다른 시장 : 소사종합시장, 청과물시장, 역곡북부시장 주변 볼거리 : 도당산 벚꽃, 백만송이 장미공원, 부천활박물관 전화번호 : 부천 자유시장 상인회 032-656-1892 목차 1. 부천자유시장 개요 2. 부천자유시장의 어원 3. 부천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1) 부천자유시장과 부천청과물시장 2) 소사종합시장 3) 그 밖의 시장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6.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7. 먹을거리 1. 부천자유시장 개요 부천 지역은 오랫동안 인접한 부평에 속해 있었다. 북쪽으로 흘러가 한강과 만나는 하천들이 일구어 놓은 평야와 산지를 중심으로 농산물과 과일, 채소 등을 생산하던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복숭아 과수원이 많이 생겨나 복숭아가 지역의 특산물이 되었고, 복사골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부천 지역이 성장하게 된 계기는 경인선이 지나면서 소사역(현 부천역)이 세워진 것이었다. 소사역 주변에 점포와 노점들이 들어서고, 소사시장이 형성되었다. 그 이후 부천과 시흥의 길목에 뱀내시장, 부천과 김포 사이에 황어시장이 개설되어 소사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했다. 또한 서천리와 장기리에 우시장이 개설되어 인근 지역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부천 지역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과 인접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급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이와 더불어 인구 또한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1970년대까지 자유시장 외에 다른 시장이 없었던 부천이지만 1980년대부터 시장들이 지역 곳곳에 개설되었다. 2016년 현재 부천 지역에는 19개의 전통시장이 개설되어 있고 대부분 활성화되어 있다. 2. 부천자유시장의 어원 부천 지역은 삼국시대에 주부토라고 불렸다. 그것이 고려시대에 들어서 수주로 바뀌었고, 조선시대에는 부평에 속해 있었다. 부천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시행된 행정구역 개편 때였다. 부천은 부평과 인천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천자유시장은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3. 부천의 지리적 특색과 시장 형성 과정 부천 지역은 오랫동안 부평에 속해 있던 곳으로,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복숭아밭이 많아서 복사골이라고 불린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부평과 서울 사이에 위치해 농업을 주로 하는 논과 밭으로 형성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부평에 속해 있던 부천 지역의 특산물은 소금과 조기, 소라, 새우, 조개 등의 수산물과 소, 돼지, 복숭아, 대리석, 구리 등이었다. 조선시대에 오늘날의 부천 지역이 주목받은 것은 세곡의 운반과 관련된 육로의 개설이었다. 조선시대에 삼남 지방에서 세곡을 싣고 올라오는 배들이 인천과 부평을 지나 강화도 수로를 거쳐 한강의 마포나루로 들어갔다. 그런데 강화도의 수로인 손돌목은 물살이 거세어 배들이 자주 가라앉았다. 그래서 2가지 방안이 마련되었다. 하나는 인천 연안에서 직접 한강으로 들어갈 수 있는 수로를 만드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부평 지역에 항구를 건설하고 조창을 설치해 그곳에 세곡을 집산해 우마차를 이용해 한양으로 운반하는 방법이었다. 육로를 이용한 방법은 부평 지역에 전초장을 설치해 세곡 운반을 위해 새로 만든 새고개를 넘어서 계산과 서운동, 부천 오정동을 거쳐 양화나루를 지나 서울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오래 활용되지 못했고, 1899년 경인선 철도의 개설과 도로의 신설로 인해 폐기되었다. 지금은 그 도로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한편 새롭게 수로를 내는 것은 중종 연간에 추진되었다. 하지만 이내 중단이 되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 2011년에 굴포천을 따라 경인아라뱃길이 되었다. 부천 지역이 제 이름을 갖고 군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인천항의 개항과 깊은 연관이 있다. 역시 작은 어촌이던 인천이 개항한 뒤에 인천항을 통해서 외국의 교역품과 사람들이 유입되었다. 그리고 인천과 서울이 연결되면서 그 중간 지점에 있던 부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경인선이었다. 1899년에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의 노선 안에 오늘날의 부천역인 소사역과, 오늘날에는 서울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역이 생기면서 부천은 성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경인선에 소사역이 설치된 것은 넓은 김포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집산해 인천항으로 보내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경인선은 인천항의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경인철도의 경우 아직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철도 체계였던 협궤식이 아닌 미국과 영국식으로 부설되었다. 그러나 곧 철도의 부설권이 일본으로 넘어갔고, 철도를 개통한 것은 일본이었다. 경인선에 소사역이 생기면서 주변에 큰 변화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생겨났고, 음식점 등의 점포들이 생겨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소사역을 중심으로 개설된 시장은 2, 7일이 장날이었던 소사장이었다. 소사장은 소사삼거리 초입에 위치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부천 지역에 2개의 시장이 더 생겨났다. 하나는 경기도 시흥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뱀내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경기도 김포로 가는 길목에 개설된 황어장이었다. 황어장은 지금의 소사 2동에 위치했던 시장이었다. 뱀내장은 한자로 표기하면 사천장(蛇川場)이 되는데, 장날은 매월 끝자리가 1, 6일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주변에 금광이 있어서 일본인들이 금을 캤다. 한편 황어장의 장날은 3, 8일이었다. 당시 부천 지역에는 2개의 우시장이 있었다. 하나는 황어장이 개설되어 있던 장기리의 우시장이었고, 뱀내장과 가까운 곳에 있던 서천리 우시장이었다. 장기리 우시장은 부평역에서 북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개설되었는데, 장날은 5일이었다. 7~11월 사이에 매달 평균 500~600두의 소가 거래되었다. 장기리 우시장은 김포와 강화, 시흥 등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서천리 우시장은 성주산 남쪽에 있었는데, 당시의 지명은 부천군 소래면 사천리였다. 규모는 장기리 우시장과 비슷했고, 우시장을 찾는 상인은 평균 100명, 고객은 250명 정도였다. 서천리 우시장은 1973년 부천이 시로 승격될 때 시흥군 소래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한편 시흥의 주민들이 부천에 개설되어 있는 뱀내장이나 황어장을 보러 가기 위해서는 성주산의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여우고개와 하우고개, 마니고개가 있었다. 이곳에 도둑들이 들끓어서 장꾼들이 고개를 급하게 넘어야 했기 때문에 숨이 헉헉거린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하우고개이며, 마니고개는 산에만 가면 시신은 없이 머리만 발견되는 일이 많아 머리의 옛 말인 마니가 붙은 이름이었다. 여우고개는 이 고개에 여우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0년대 후반에 부천 지역에는 세 곳에서 장이 서고 있었다. 소사장과 뱀내장(사천장), 황어장이 그것이었다.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 부천 지역은 1975년까지만 해도 인구가 10만 정도였다. 그것이 1980년에 20만 명을 넘었고, 1990년에는 60만 명이 넘었다. 2005년에는 80만 명을 넘을 정도로 그 증가세가 폭발적이었다. 2016년 현재 부천의 인구는 84만 8,190명을 기록하고 있다. 인구의 이러한 급격한 증가와 더불어 교통이 편리해지고, 시장 또한 크게 증가했다. 시장의 증가는 인구의 증가와 비례했다. 부천 지역의 시장은 1970년대까지 단 1곳이 개설되어 있었을 정도로 열악했다. 당시 부천의 주민들은 생선과 같은 수산물은 인천에서, 혼수품은 서울 광장시장에서 구입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시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부천 지역의 시장은 1970년대 말까지 오늘날의 부천역인 소사역 주변에 위치한 자유시장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78년에 부천종합상가와 부천지하상가가 개설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장이 크게 늘어난 때는 1980년대였다. 1981년에 백화점을 포함해 23곳으로 증가했고, 1983년에는 26곳에 이르렀다. 부천 지역의 시장들은 서울처럼 사설시장, 상설시장이 중심이었다. 1980년대에 부천의 중심 시장은 자유시장과 대보시장이었다. 자유시장과 대보시장을 중심으로 규모가 작은 역곡북부시장과 동부시장, 원미시장 등이 상권을 떠받치는 형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에 대형마트가 등장하면서 전통시장이 약화되고 현대식 대형매장의 신설이 늘어났다. 당시 대형백화점은 자유시장의 일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서 1984년 4월에 개장한 장안쇼핑이었다. 장안쇼핑은 이후 이름을 그레이스쇼핑으로 변경했다. 또한 시장의 발달과 관련이 깊은 또 하나의 요소가 교통이다. 부천 지역은 기존의 경인선에 더해서 1960년대 후반에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경인고속도로는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고속도로로, 부천은 그 중간에 위치해 있다. 경인고속도로가 지나는 오정구 내동과 삼정동, 약대동을 중심으로 공업 지대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서울과 인접하다는 지리적 이점과 농촌 지역이던 부천의 많은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또 1930년대 초반에 합자회사로 설립된 소사여객이 한국전쟁 이후 소사와 신천리를 왕래하면서 운행했고, 1950년대에 김포국제공항까지 운행하면서 인천항과 공항, 부천을 연결했다. 1965년부터 소신여객이 부천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을 형성해서 상업 활동의 활성화에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1) 부천자유시장과 부천청과물시장 부천자유시장은 경인선 부천역 주변에 형성되던 소사시장이 개설되었던 곳에 건립된 전통시장이다. 자유시장은 해방 이후 1947년에 심곡동에서 문을 열면서 부천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후반까지 부천 지역의 유일한 시장이기도 했다. 부천 지역에서 가장 먼저 수도가 개설된 곳도 자유시장이었다. 인천에서 부천 삼정동을 거쳐 들어온 수도를 자유시장에 공급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공사를 했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모았던 작업이었다. 이 무렵 부천 지역에서 수도가 나오는 곳은 자유시장뿐이었다. 자유시장은 1980년대까지 큰 호황을 누렸다. 오후 4시가 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몸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자유시장에는 부천의 주민들 외에 인접한 도시인 김포와 광명, 시흥에서도 고객들이 찾아왔다. 자유시장은 경기도 내에서도 손꼽히는 시장의 하나였다. 자유시장의 장세가 약화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형마트와 백화점들이 등장하면서 생긴 상권의 변화 때문이었다. 또 부천역 외에도 주변에 소사역과 중동역 등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분산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과거에는 부천역이 교통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부천역에 있는 자유시장이 사람들로 붐빌 수밖에 없었지만 교통의 분산이 일어나면서 자유시장을 이용하는 고객의 숫자가 줄어들었던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눈에 띄게 약화된 장세를 회복하기 위해 자유시장은 두 차례에 걸쳐 시장 현대화 작업을 추진했다. 2009년부터 2012년, 2014년부터 2015년까지 2단계 사업을 통해 아케이드 시설과 간판 정비 등 쾌적한 쇼핑 환경을 조성했다. 한편, 해방 이후에 자유시장과 함께 개설된 것이 깡시장이었다. 깡시장은 과일과 채소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도매시장이었다. 깡이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할인을 의미하는 ‘와리깡’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깡시장에 과일과 채소를 제공한 곳 중 하나가 까치울이라고 불리는 작동(鵲洞)이었다. 작동은 부천과 서울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주변에 산지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작동은 산의 비탈길을 일구어 과일 농사를 많이 지었다. 과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부천의 특산물이었던 복숭아와 수박이었다. 작동의 복숭아와 수박은 워낙 맛이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갔고,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 난 것을 작동에서 난 것으로 속이고 팔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다만 복숭아를 수확하는 계절이 한여름인 6~8월이었고, 수확 시기도 짧고 보관이 힘들었다. 그래서 작동 사람들은 수확한 복숭아를 등짐이나 광주리에 담아 땡볕에 먼 길을 걸어서 깡시장으로 운반했다. 오늘날 자동차를 이용하면 가까운 거리지만 1960년대까지는 길이 제대로 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산을 넘어서 가야 하는 힘든 길이었다. 깡시장에서 팔지 못한 것은 집들을 돌아다니며 행상으로 팔았다고 한다. 작동 외에 깡시장에 과일과 채소를 제공한 곳은 깊은구지라고 불린 심곡동과 소사구의 솔안말이었다. 깊은구지는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심곡(深谷)이 된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산지를 개간해서 복숭아밭을 만들기도 했다. 깊은구지는 부천역 인근의 깡시장과 가까워서 이곳에서 생산한 복숭아를 비롯한 채소들을 깡시장에 내다팔았다. 깡시장에서 청과물 경매가 이루어질 때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시장을 꽉 메웠다. 특히 복숭아가 출하되는 여름이면 이 지역은 복숭아 향기로 가득 찰 정도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에 부천역에서 자유시장 쪽으로 나오면 복숭아를 파는 노점들이 즐비했다. 깡시장은 차츰 규모를 키워서 2006년에는 시장 인정을 받았고, 이때 부천청과물시장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부천청과물시장은 바깥에서 보면 시장처럼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시장의 모습이 드러난다. 인접한 자유시장보다 규모는 작지만 거래 규모는 자유시장보다 크다. 2) 소사종합시장 소사종합시장은 1980년에 소사동 일대에서 개설된 전통시장이다. 1978년 무렵부터 장터에 쌀집과 이발소 등이 들어서고 곳곳에 노점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 처음 시장이 개설되었을 때에는 골목에 있다고 골목시장, 도깨비시장으로 불렸다. 시장의 위치가 대로변에 있었기 때문에 소사 지역의 사람들이 부천역으로 가거나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시장을 지나야 했고, 그만큼 유동 인구가 많아 비교적 큰 상권을 이루었다. 소사종합시장은 달리 대보시장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현재의 시장 입구 쪽에 14층짜리 세영주상복합타워가 들어서 있는데, 이 복합타워가 들어서기 전에 사람들이 그곳에 장터를 만들고 대보시장이라고 허가를 내서 장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사종합시장이 개설할 무렵 시장 이름을 사람들에게 친숙한 대보시장으로 할 것을 고민하다가 소사종합시장으로 정했다. 3) 그 밖의 시장 부천시는 소사구와 오정구, 원미구로 구성된 도시이다. 자유시장과 소사종합시장이 부천 소사구를 대표하는 전통시장이라면 오정구를 대표하는 시장은 원종제일시장이다. 또한 원미구를 대표하는 시장은 원미부흥시장이다. 원종제일시장은 1983년에 개설되었으며 고강동과 원종동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고강동 쪽에서는 고강원종제일시장이라고 부르고, 원종동에서는 원종고강제일시장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50여 개의 노점들이 모여 있다가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노점과 점포도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성장했다. 원종제일시장은 매우 활성화되어 있는 시장이다. 이 지역이 김포공항과 가깝고 서울과 인접해 도시화 과정에서 인구가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시장의 길이는 약 700m 정도인데,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원종제일시장 주변에는 원종중앙시장, 원종종합시장, 베르네풍물시장이 위치해 있다. 원종중앙시장은 1991년에 개설되었고, 원종종합시장은 1985년에 개설되었다. 원종중앙시장과 원종종합시장 모두 주민들이 많이 찾고 있어 장세가 유지되고 있다. 베르네풍물시장은 베르네천을 복개한 곳에 세워진 시장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부천 시내의 노점상들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새로 장터를 조성해 개설되었다. 원미구의 부흥시장은 1981년 원미동에 개설된 전통시장이다. 이곳은 1987년에 발표된 양귀자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주요 무대가 된 동네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노점들이 모여들어 장사하다가 시장으로 발전했다. 1985년에 개설된 원미종합시장이 인접해 있어 두 시장을 한꺼번에 원미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도시화의 과정에서 중동과 상동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이곳에 중동시장과 상동시장이 개설되었다. 이들 시장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을 상대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판매하며 활성화되어 있다.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부천 자유시장은 전철 1호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부천역에서 남쪽 방향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 향하면 곧바로 자유시장이 나타난다. 시장 입구에는 만화 캐릭터인 왈순아지매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부천 자유시장은 동서로 길게 점포들이 이어져 있으며 과일, 채소, 생선, 식료품, 의류, 잡화 등을 판매하고 있다. 자유시장 앞에서 도로를 건너 남쪽으로 길을 따라 가면 심곡본동 주민센터 주변에 부천청과물시장이 위치해 있다. 부천청과물시장은 과일과 채소를 전문적으로 도매하는 시장이다. 소사종합시장은 부천역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소사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소사역을 나와 남쪽으로 큰 길을 따라 가다가 소사사거리에서 부천역 방향으로 조금 가면 나오는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향하면 곧 시장과 만날 수 있다. 소사종합시장에서는 과일과 채소, 수산물, 식료품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판매하고 있다. 6.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부천 지역은 경기도의 중서부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는 서울과 광명, 서쪽은 인천, 남쪽은 시흥, 북쪽은 서울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부천 지역은 남동부 쪽에 산지가 있고, 북서부는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다. 서쪽과 북쪽에서 여러 하천들이 북쪽으로 흘러 한강과 만나는데, 하천 유역에 평야가 발달해 있다. 특히 북서부 쪽에 발달한 평야가 비옥해 농산물의 생산이 많았다. 과거에는 농업이 성행해서 쌀 외에도 감자와 고추, 배추 등이 생산되었다. 복숭아와 포도, 수박도 많이 생산되었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업이 크게 약화되고 그 대신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이들 가운데 부천의 특산물이던 것이 복숭아였다. 1908년 일본 사람들이 부천으로 이주하면서 복숭아 과수원이 많이 생겨났고, 복숭아 산지로 유명세를 떨쳤다. 4월이 되면 복숭아꽃이 만발해 수도권에서 즐겨 찾는 관광명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부천시로 승격된 이후 복숭아 과수원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이다. 오늘날에는 복숭아꽃 대신에 벚꽃과 장미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원미구에 위치한 도당산은 수도권에서 10대 벚꽃 경관으로 꼽힐 정도로 오래된 벚나무들이 터널을 이루며 꽃을 피워낸다. 또한 도당산 초입에는 백만 송이 장미공원이 있어 벚꽃이 지고 난 뒤 화려한 장미꽃들이 피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이 외에 부천둘레길이 조성되어 야트막한 산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부천의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다. 부천둘레길에는 활박물관을 비롯해서 옹기박물관, 유럽도자기박물관 등이 있어서 독특한 문화체험도 가능하다. 또한 부천 지역은 문화의 도시로 불리기도 하는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부천국제만화축제와 같은 굵직한 축제들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젊은 세대에서 관심이 높은 영화와 만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 도시로서의 위상을 보여주는 축제들이다. 7. 먹을거리 부천 자유시장 주변은 부천의 번화가이고 젊은 사람들을 비롯해 유동 인구가 많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파는 음식점도 많다. 또한 과거 깡시장에 과일과 채소의 공급처였던 까치울에는 먹을거리촌이 형성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이 지역에 특히 많은 음식점은 오리고기이다. 오리고기를 파는 오리전문점이 10곳이 넘으며 닭백숙, 보리밥, 스파게티, 한정식, 커피 등 다양한 먹을거리들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반긴다. 또한 서울과 인접해 있고, 지하철 7호선이 개통되어 접근성도 뛰어나다.] * 16:35~16:38 걸어서 경기도 부천시 신흥로 8 번지에 있는 '백구회 포차 부천1호점' 식당(032-665-1145)으로 이동 * 16:38~19:25 부천 자유시장에 있는 '백구회 포차 부천1호점' 식당에서 모듬회에 소맥주를 반주로 일행들과 저녁식사 [모듬회(광어,우럭,연어) 中: 68,000원 (모듬회 구성 음식 : 회, 참소라 야채무침, 바지락탕, 청어구이, 초밥용 밥,고구마 튀김) 소주 3병 15,000원, 맥주 2병 10,000원, 매운탕 5,000원 식사비 합계액 : 98,000원] * 19:25~19:38 걸어서 부천역으로 이동하여 신도림역으로 가는 1호선 전철 승차 대기 * 19:38~20:29 부천역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신도림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1차 환승하여 합정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51분 소요] 부천 펄벅기념관 위치도 부천아트벙커B39 위치도 백구회 포차 부천1호점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