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이전부터 야구팬 이었다면 이 글을 보지 않아도 선동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질 때 노인네(?)들의 황당무계한 억지에 고개를 주억거릴 수 있겠지만요.
민망스럽지만 80년대에 이전부터 야구팬이 아니었던 분들은 선동렬에 대한 중년 팬의 무조건적인 지지에 식상할 것이고....
억지스런 과장을 눈감아주기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선동렬 뛰는거 많이 봤어.” 하면서 싸움이 시작 되겟죠.
90년대 이후 팬이라면 자료를 뒤져가며 그의 이야기를 끄집어 낼 테지만....
단지 패넌트레이스 22연승의 박철순이나 한국시리즈 4승의 최동원 같은 전설일뿐이죠.
이 두 사람의 얘기도 꼭 한번 정리해보고 싶어요.
선동렬 논쟁이 벌어질 때 이 일화들은 유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기억을 적은것이니 수치 자료는 미흡합니다.
구체적 자료 보충은 다른 분이 해주면 좋겠습니다.
선동렬이 미국언론으로부터 "세계적 투수" 라는 평가를 받은건 그의 나이 열여덟인 81년이었습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였죠.
우리가 알고 있는 스포츠 주간지 S. I. 입니다.
무려 25년 전 일입니다. 일본 진출에 비해서도 15년 전이예요.
선동렬은 이후 18년 동안이나 1류였던 셈입니다.
81년
미국의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열린 19세 이하 세계청소년야구 선수권에서 한국은 사상 처음으로 우승했습니다.
선동렬은 베스트 피쳐로 선정됐고 미국의 전문가들은 당혹합니다. 미국의 유망주들은 선에게 압도 당햇어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코리아의 썬은 세계적 투수" 라는 타이틀과 함께 선의 땅바닥에 주저앉을 듯 낮은 피칭모션을 전면사진으로 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S. I. 의 전면사진 그 자체로 화제가 됐죠.
한국은 세계 청소년 야구에서 세 번 우승했고 그때마다 야구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특급스타가 대회에서 수상햇어요.
두 번째로 우승할때는 경북고의 이승엽이, 세 번째 우승때는 신일고의 봉중근이....
야구에서 청소년 대회의 최고스타라는건 타고난 소질이란 뜻입니다.
두번째 챔피언 이승엽은 이미 한국야구의 새 전설을 쓰고있고....
그래서 난 봉중근을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어요. 사실 봉중근은 최고의 타자로 MVP가 된건데.... 투수력을 중시하는 브레이브스가 그의 인생을 망친 결과가 될지도....
이듬해인 82년
역시 한국야구사상 처음으로 세계야구 선수권에서도 우승합니다.
이때도 선은 MVP를 수상햇죠.
77년 슈퍼월드컵(대륙간 컵)에서 이선희와 김재박을 앞세워 우승했지만 세계선수권은 이때가 처음예요.
난 당시의 에이스가 최동원 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한국과 우승을 다툴 3강으로 꼽혔던 미국전과 일본전에서는 모두 선이 선발 등판해 승리투수가 됐죠.
당시 한국야구는 일단 선이 등판하면 중간계투나 마무리 같은건 없엇어요.
미국전에서는 탈삼진을 15개 얻으며 1실점, 마지막 일본전에선 1회에 두점을 줬지만 이후 우승의 순간까지 일본타선을 봉쇄했어요. 한대화의 쓰리런이 터진 바로 그 경기였죠.
MVP 선동렬의 나이는 열아홉살 이었습니다.
쿠바가 불참해서 세계정상 등극이라고 하긴 부족했지만 한국야구의 국제적 성과는 상당부분 선을 앞세워 이뤄졌죠.
이 우승으로 선은 병역특례 보충역이 되었지만 미국으로 가지는 못 햇어요.
병무규정에 “포상으로 병역특례를 받은 선수는 5년간 현업에 봉사해야한다." 라는 치명적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죠.
85년 고려대를 졸업한 선은 자신의 연고팀인 해태와의 입단계약에 합의하지 못합니다.
"올테면 오고 아니믄 군대에 가든지...." 하는 해태의 배짱에 분개한 선은 차라리 군 입대를 강행한 후 메이져로 가겟다고 까지 했지만 결국은 항복합니다.
어떤 천재도 2년반의 공백을 가진후 다시 정상에 오르진 못합니다.
결국 해태에 입단해 시즌 중반부터 리그에 참여합니다.
메이저리그가 선을 포기한 건 이전에 최동원을 스카웃 하려던 볼티모어 오리올스(토론토등 다른팀의 얘길 하는분도 있는데 다른건 모르겠어요)가 한국의 병역법에 혀를 내두르고 물러난 뒤 한국선수를 빼오는 건 불가능한걸 알앗기 때문입니다.
박철순의 경우는 그가 성무를 제대했기 때문에 미국진출에 장애가 없었지만요.
<사족>......
박찬호가 병역을 안 마친채 유학비자로 미국에 가서 다저스로 편법취업(?)한 일이 시빗거리가 된 적이 있었는데요.
어떤 기자가 선에게 “박찬호의 편법에 의한 미국진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어요.
기자가 어떤 생각으로 물었는지 (어떤 기삿거릴 기대했는지) 모르지만...
선은 한숨을 토하며 말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도 그때 그걸 알았더라면....”
실제로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겁니다.
선은 메이저리그의 선발투수가 될 수 있엇겠죠. 물론 성적은 예측불허군요.
“운“이라는 것, 팀, 선수의 정신자세가 결과를 전혀 달라지게 하더군요.
조진호나 추신수도 그렇고....
이 얘기는 뒤로 미뤄야겟습니다.
결국 선은 85년 시즌 중반에 해태에 입단 했는데....
무조건 “선동렬은 국보“를 외치는 사람들은 선이 한국프로야구를 한수 올려놓았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선은 오로지 독주 했을 뿐이죠.
선이 부분적으로 한국야구의 위상을 높인건 인정하지만 수준을 향상시키지는 못햇습니다.
그는 오히려 한국프로야구를 왜곡시켜 해태 천하, 1인천하로 만들엇어요.
일본이라면 어땠을까.....
일본야구는 선동렬 아니라 그 누구라도 독주하게 두지 않았을 겁니다.
철저히 약점을 분석하고 공격방법을 연구했겠죠.
한국야구는 그렇지 않앗습니다. 선의 약점을 전혀 연구하지 못했어요.
5,60년대 일본에서 야구를 배워 한국에서 지도자로 행세하던 성적 지상주의의 감독들은 선을 피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가끔이라도 선과 정정당당하게 에이스 대결을 펼친 팀은 롯데 정도였나 싶기도 하군요.
롯데엔 최동원이라는 자부심에 가득한 당대의 에이스가 잇엇죠.
강타자를 만나도 한가운데 직구를 꽂아넣을 만큼 오기있고 그 이상의 실력도 있었어요.
지난 10년간 한국야구를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그는 선동렬이란 풋내기를 피해서 그에게 최고의 자릴를 내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최동원은 이미 절정기를 넘기고 있엇지만 선과 맞붙으면 화끈하게 타올랐어요.
둘 다 마운드를 내려가지 않고 뜨거운 자존심 대결을 펼쳤는데 신기하게 (혹은 두선수가 너무나 필사적으로 던져서?) 점수도 안 났죠.
코칭스텦의 누구도 그들에게서 공을 뺏지 못 햇어요. 연장까지 0-0의 숨 막히는 대결을 펼치곤 했죠.
이런 대결이 계속되고 당연시 되엇다면 한국야구는 훨씬 좋은길을 갔을겁니다.
하지만 그 뿐였습니다 .... 우승권에 근접한 전력의 다른 팀들은 정말 한심한 작태를 보입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왼손투수이고 해태킬러였던 빙그레의 송진우....
팬들을 위한 축제가 돼야 하고 최고의 선수들이 맞붙어야할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승리 지상주의의 김영덕감독은 선이 1차전 해태선발로 나서자 송진우를 내지 않았습니다.
맞대결 보단 상대의 약한 투수와 붙여 승리를 얻을 생각만 했죠.
1차전이든 2차전이든 리드만 잡으면 송진우를 내려 했겟지요.
하지만 꼼수는 통하지 않고 송진우는 등판기회도 얻지 못합니다.
2연패로 밀리며 절박한 상황이 되자 3차전에서야 송진우를 내보냅니다.
벤치에 앉아서 잔뜩 독이 올라있던 해태킬러는 절정의 피칭을 하며 8회 2사까지 해태타선을 퍼펙트로 막아냅니다.
한국야구에 진기록이 나올 뻔 했지만 8회 투아웃에서 첫안타를 맞은 송진우는 퍼펙트가 깨지자 순식간에 힘이 빠집니다.
고비를 넘지 못하고 연타를 당해 빙그레에 3연패(敗)를 안기고 말죠.
웃기게도 1,2차전과 휴식일까지 3일내내 놀다가 4일째 3차전에서 엄청나게 많은 공을 던진 송진우는 다음날 4차전에서도 후반에 등판합니다.
지게 됐는데 뭐 선수보호는 무슨 얼어죽을 선수보호....
지쳐있던 그는 나오자마자 두들겨 맞았어요. 시리즈는 4연패로 끝났습니다.
팬들은 진정한 에이스끼리 맞붙는 최고의 시리즈를 구경조차 못합니다.
김영덕 감독은 팬들의 비난에 "나보다 야구를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말합니다. 사실이죠. 그는 야구를 정말 잘알고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엇어요. 다만 그꾀에 스스로 당하기도 했죠.
승리만을 좆는 그는 팬에 대한 최소한의 서비스조차도 하지 않았어요.
한시즌을 시작하는 개막전에서까지 해태의 선발로 선이 나오면 김영덕감독은 팬들을 어리둥절케 하는 2급투수를 내보냅니다.
김영덕감독은 한국프로야구를 정체시킨 주요인물입니다.
배명고교 에이스 시절부터 내 우상이었던 프로야구 원년의 전설 박철순.....
그는 후기리그에서 OB가 리드만 잡으면 무차별로 등판해야 햇어요.
김영덕감독은 원년 우승후 자랑스럽게 “후기 리그가 시작되면서 박철순에게 매일 등판할 각오를 하라고 했다.”고 챔피언의 리더쉽을 말하더군요. 당시엔 그것이 얼마나 악랄한 짓인지 몰랏지만....
코리안시리즈가 끝나자마자 박철순은 쓰러졋고 스물여섯 젊은 투수의 전성시절은 한시즌뿐이었습니다.
삼성 감독 시절엔 한국시리즈 상대로 깐깐한 OB를 피하기 위해 시즌 막판 롯데전에서 고의 실책까지 지시해가며 롯데를 시리즈 파트너로 만들었고....
그의 고집과 신념은....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과만을 좆았죠.
이런 야구판에서 선과 정면 승부를 하지 않는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겟습니다.
뭐, 그만 그랫던게 아닙니다.
당시는 다음투수가 자기팀 덕아웃의 외야쪽에서 몸을 풀었습니다. 상대팀도 관중들도 다음투수가 누군지 알수 잇엇죠.
선이 덕아웃에서 나와 느리고 거만한 모습으로 몸을 풀면 관중석엔 "오늘경기 상황종료......" 나즈막한 한숨이 흐릅니다.
몇회쯤 나오냐구요? 아무때나요. 5회든 6회든 한점의 리드만 있으면 나와서 상대팀 응원단에 "이제 그만보고 집에 가." 합니다.
선의 모습이 보이면 상대팀 타자들은 조급해집니다. 선이 등판하기전에 점수를 내야하니까요.
상대 투수도 선이 몸을 풀기전에 이닝을 마쳐야 하니 빠르게 승부를 들어갑니다. 그러다 두들겨 맞아 승부의 균형이 단번에 무너지기도 했구요.
감독은 그때까지 호투하던 투수를 2진급으로 바꿉니다.
괜히 좋은 투수를 선하고 붙여서 낭비하느니..., 투수라도 아껴야죠.
“어쩌다 선의 컨디션이 안좋아서 운좋게 리드를 잡는다면 중간계투고 마무리고 없이 팀의 최고투수를 내보내고 아니면 포기하지뭐....“ 이게 한국야구였습니다.
팬 서비스? 그게 뭔데요? 이기는게 장땡이고 이겨야 안짤리죠.
한국야구가 발전 못한건 물론이고 선도 피해자가 됩니다.
이제부터 그 이유를 얘기하죠.
이듬해인 86년부터 해태는 4년 연속 한국시리즈를 제패합니다.
난 이 당시 선동렬과 해태를 몹시 싫어했는데...
김봉연 이후에도 김성한, 한대화, 김준환, 김종모....
마치 올시즌 초반의 요미우리... 이승엽, 다까하시, 고쿠보, 아베 같은 슬러거들이 한방으로 분전하던 상대의 숨통을 끊는 참살극....
선발투수로 선이 나오는 날은 대략난감이죠. 선의 공을 못쳤다고 욕먹는 타자는 없었으니....
해태는 너무나 강해서 우승이 당연시 되고 선도 달라집니다. 봄날 얼음 녹듯 해이해지죠.
애초에 선동렬은 장차 한국야구의 지도자가 될 걸로 평가 받았어요.
고교시절부터 그는 자신의 매 경기를 연구해 경기상황, 상대타자의 특성, 온갖 공의 구질을 대학노트에 빼곡히 기록해가며 공부하던 선수였습니다.
머리도 좋았고 보스기질도 있엇죠.
원래는 투쟁심이 대단한 선수였고 자기 관리도 잘햇습니다.
그런데.... 적수가 없고 도전이 없는 한국야구,
팀은 자신이 온 뒤 모조리 우승....
상대팀은 그를 피하기 바쁘고... 최동원까지 늙어버린 마운드엔 도전이 없었어요..
연습을 게을리 하는 선수가 됐죠.
새로운 구질개발도 하지 않았고 직구와 슬라이더 두가지만 던졌어요.
그래도 아무도 못쳤습니다. 다른공을 더 가질 필요가 없었죠.
89년, 최동원의 노쇠보다 더 치명적인 일......
조계현, 이강철, 이광우....... 세 명의 일류 투수가 해태에 동시 입단합니다.
난 89년 이후의 한국프로야구를 모릅니다. 아예 경기를 보지 않았어요.
이 세 명의 투수는 당시 태평양 돌핀스에 줘도 돌핀스를 우승시켰을 겁니다. 아니, 어느 팀에 줘도... 쌍방울에 줘도.
선은 자신이 경기에 나가서 이길 필요가 없게 됐어요. 가끔씩 시위나 한번...덕아웃 밖으로 나가 홈팀관객의 환호를.... 혹은 상대팀 관객의 한숨을 듣는 재미가 쏠쏠 했겟죠. 쓰-윽 몸푸는척 하다가 그냥 덕아웃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햇어요.
내가 구단주라면 나는 선동렬을 풀어줬을 겁니다. 한국야구를 위해서도 그했어요.
전문가들도 선을 외국으로 보내줄때가 됐다고 말했지만.... 해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왜 줘? 내껀데..."
하지만......... 선 없이도 해태는 너무나 강했어요.
나는 프로야구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고...... 선동렬도 이기는데 무감각해집니다. 달라지죠.
최동원이 노쇠해서 패전처리로 나오는 걸 보고 선은 충격을 받습니다. “한때는 나의 우상이었는데....”
그 다음 말이 가관입니다. “나는 저렇게 되기 전에 은퇴해야지.”
과거의 선이라면 “나는 끝까지 최고가 되겠다.” 정도는 했겠지요. 도전은 고사하고 말입니다.
89년 이후의 선은 이미 젊은 날의 선이 아닙니다.
연습을 게을리 한건 그렇다 쳐도... 틈나면 술을 먹었고 코칭 스텝과 선배들도 슬쩍 눈감았어요.
술을 먹고 던져도 아무도 못치는데요 뭐.
장채근이 슬그머니 선을 따라가 술을 먹고 들어오면 선배들은 말합니다.
“야, 동렬이는 야구 잘하니까 먹어도 되지만 너는 야구도 못하면서....”
술을 먹어도 선이 사줬으면 그리 혼날 일도 아녔죠.
실제로도 장채근은 같이 술먹는게 팀의 융화를 위해서 라고 말하기도 햇어요.
한국야구의 손꼽히는 꼴통이었던 MBC청룡의 정삼흠...
대학동기인 둘은 선발 맞대결이 결정된 전날 밤 만납니다.
이 놈들은 밤새 술을 쳐 먹었죠.
날이 밝자 술냄새도 가시지 않은 선은 마운드에 올라가 완봉승을 거둡니다.
처참한 한국야구 였습니다.
장담컨대 일본이나 메이저에서는 이런 투수들이 절대 3회를 버티지 못할 겁니다.
어떤 야구기자의 말입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저런 선수는 없다. 그렇게 연습을 안 하면서 저렇게 잘 하는 것도 처음 봤고 그렇게 잘 하면서 저렇게 인간성 좋은 선수도 처음 봤다”
선의 보스 기질은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자기가 연습 안하고 몰래 술 먹는 처지에 동료, 후배를 구박하는것도 민망했겟죠.
그의 보스 기질........
고대출신 동기들이 선을 만나 불평을 합니다. “야, 너무 하는거 아냐? 감독 눈치 보여 죽겠다... 좀 봐주라”
“the 선동렬“의 공을 때려내면 팀에서의 입지가 훨씬 높아졌거든요.
이후...
고대 출신 선수들 사이에 “승부가 결정 난 경기에서 선이 유니폼 앞자락을 잡으면 직구" 라는 은밀한 소문이 돕니다.
그런데... 선이 직구라고 알려줘도 꼭 살살 던져주는것도 아니고 그 공을 아무나 칠수 있던 것도 아녔어요.
이 은밀한 거래가 끝난 건.... 눈치 없는 유지홍 (이름은 틀릴지도 모릅니다. 고대 동기인건 맞는데 유지홍이 아닐지도) 때문이었습니다.
안타나 치라고 적당히 던져준 공을 때려서 홈런을 날려버렸죠.
그 홈런 이후 선은 유니폼 앞자락을 잡지 않았어요.
선은 자신이 더 열심히 해야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팀은 항상 이기고 선발로 나서서도 방어율 0점대를 찍는판에....
박정현이 방어율 2위에 오르자 김성근 갑독이 말하죠. "우리 정현이가 1위다. 선은 인간이 아니니까 빼고."
그의 아까운 재질은 썩어가고 저 레벨의 한국야구에서 젊음은 소비됩니다.
(대학4년. 반년 놀고 해태 10년 반)
중간에 전기가 있엇어요. 하지만 선은 이미 과거와는 다릅니다.
일본야구....
선의 젊은 시절부터 일본야구는 선에게 관심을 가졌죠.
“한국야구“에 대해서는 한수 아래라고 깔봤지만 선동렬 만은 예외로 생각했습니다.
91년 한일 수퍼게임.
팬들의 가슴이 뜁니다.
일본야구가 한국보다 훨씬 위에 있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선동렬. 작년엔 부상으로 몇게임 안나왔지만 올해는 최고.
"야아.... 일본을 혼낸다...." 그렇게 꼴보기 싫던 선이 갑자기 국보로 보입니다. 선은 타자들을 피해가며 승리를 따내는 선수가 아닙니다. 야구장에 가서 보면 마치 선이 타자들에게 강타를 먹여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등산 폭격기"라는 별명도 있죠.
"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선은 프로 입단후 처음으로 전국적 사랑을 받습니다.
일본 야구를 잘 아는 백인천 감독은 “일본이 훨씬 세지만...” 이라는 전제를 깔고도
“선동렬 같은 투수가 던진다면 승산은 반반” 이라고 말합니다.
양국의 수준 차이를 감안하면 일본야구를 경험한 백감독의 이 말은 대단히 충격적으로 들립니다.
일본 선수들은 해이해져 있습니다. 미. 일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메이저리거 들의 느슨함 정도랄까요?
매 경기 올스타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번갈아 감독을 바꿔가며 자기팀에 서너명을 보태 나오는 식입니다.
한국은 그야말로 올스타, 다들 목숨 걸고 덤빌 자세가 되어 있네요.
우동렬 좌진우라 불렸던 왼손 에이스 송진우. 그는 타고난 야구선수입니다. 정신력도 대단하죠.
“차세대 선동렬“로 기대를 모으는 박동희. 그는 150km를 웃도는 강속구를 가진데다 공도 무거웠습니다.
싸움닭 조계현. 볼끝좋은 김용수. 권영호 조규제 문희수 한용덕 정명원 이상군 한희민 이강철...... 투수진은 든든해 보입니다.
타자들의 수준은 좀 불안하지만 김성한 장종훈 이정훈은 어느 정도 쳐줄 것도 같습니다.
해 볼만 하지 않을까요?
일본 언론은 한국팀을 좀 부추겨 줍니다. 그래야 흥행이 되겟죠.
일본선수, 지도자 중에는 “일본은 진다. 지게 되어있다.” 라고 말할 만큼 일본야구의 정신력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오치아이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은 “혹시 망신이라도....“ 하는 불안감이 있어 보입니다.
선은 그야말로 흥행의 초점입니다.
그가 10년전에 아마야구 최고의 투수였다는걸 잘 압니다. 형편없는 리그에 있지만 저놈만은 좀 다른것 같습니다.
일본프로야구의 엘리트들은 대학선발때 저놈한테 녹아났죠.
당시 일본의 최고타자였던 오치아이는
“한 시즌이라면 몰라도 여섯 경기로 선동렬의 공을 치기는 어려울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선은........
“발목이 안 좋아서.....” 로 말을 시작합니다.
연막작전 일까? 팬들은 슬며시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1차전에서 선은 안보입니다. 작전일까요? 일정을 생각하면 빨리 나오는 게 좋은데....
첫날 그럭저럭 싸웠던(6-3 정도인가요?) 한국야구는 2차전에서 올스타도 아닌 지역 선발팀에 박살이 납니다. (8-2 ?)
팬들은 2차전 참패를 선이 통쾌하게 갚아주기 바랍니다.
3차전 복수의 날
왼손의 젊은 에이스 송진우가 혼신의 역투를 합니다.
일본야구의 大 타자 오치아이를 삼진으로 돌려 세웁니다. "야...."
일본은 전통적으로 좋은 왼손투수에 약하죠.
송진우가 한점도 내주지 않고 막는 동안 6회가 되자 선이 3루쪽에 나타나 몸을 풉니다.
티브이를 지켜보던 한국팬들은 신이 납니다. 마침내 참패를 갚아줄 순간이군요.
“드디어....”
“이제 이기겠군.”
“일본에 본때를 보여줘.”
선동렬의 모습을 본 송진우는 더 힘을 내 전력투구합니다.
7회....
송진우는 이제 힘이 빠졌습니다.
벤치를 쳐다봅니다. 그런데.... 선의 모습은 안 보입니다.
한국에서처럼.... 몸만 풀다가 들어가 버렸습니다.
한국에선 그렇게만 해도 해태가 이겼습니다만....
일본의 타자들은 그런 사정을 잘 모릅니다. 선이 몸을 푸는걸 보고도 침착하게 지친 송진우를 공략합니다.
한국벤치는 난감합니다. 바꿔야 하나? 선이 안나가겟다는데 누구로?
송진우도 한국야구에서는 한번 나왔다 하면 경기가 끝날 때 까지 던지는 선수였는데요.
역전패 (5-2)....
송진우는 분해서 눈물이 나옵니다.
“동렬이 형이 몸을 푸는걸 보고 힘을 아끼지 않고 던졌는데...”
사실일 겁니다. 그렇게 보였어요.
선은 자신이 더 피할수 없는걸 압니다. 5차전 선발등판을 선언하죠.
그의 등판은 감독이 정하는게 아닙니다. 그가 나간다고 해야 나가는거죠.
3연패 끝에 4차전에 나선 한용덕은 잘 버텨줬고 타선이 폭발해 한국은 감격의 첫승을 얻습니다.
한신...이었던가요? 4차전 일본팀 감독은 일본언론 으로부터 "역사적 첫 패배자" 라는 조롱을 받습니다.
선은 발목에 테이핑을 한 채 5차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장해 3회만을 던집니다.
비교적 잘 던졌죠. 다섯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우기도 했으니까요.
4회에 전의에 불타는 송진우가 이어받아 9회까지 단 한점도 주지 않고 8-0의 승리를 따냈습니다.
80년대의 선이라면 독을 품고 계속 던졌겟지만요.
하지만 이 승리로 선에 대한 비난은 사라졌습니다.
경기후 장훈씨는 한국팀을 찾아와 "만세"를 부릅니다.
"한번 이기면 성공 이라고 생각햇는데 두번이나... " 그것도 완봉으로 이겼으니 "만세"를 부를만 하다네요.
그는 선동렬과 송진우만 준다면 어느팀 감독도 맡겠다고 말합니다.
일본야구의 선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은 더 커져있습니다.
수퍼게임으로 한국야구가 83년 장명부시대 와는 다르다는걸 알았죠. 그 이전엔 일본의 누가 한국에 가도 휩쓸줄 알앗습니다만....
선의 압도적 활약은 장난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선과 일본프로는 제대로 붙어본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선이 일본프로와 제대로 붙으면 어떻게 될까요?
93년 주니치 드래곤즈가 한국에 옵니다.
친선게임중에는 챔피언팀 해태와의 경기도 준비되어 잇습니다.
파격적으로 일본의 중계 팀이 와서 해태와의 경기를 생방송으로 일본에 중계합니다.
생방송의 이유는 “선이 나올 것이다” 이겠죠.
경기 후 박살난 한국의 챔피언팀 감독에게 질문이 쏟아집니다.
김응용 감독은 “동렬이가 안 좋다는데 내보내서 결과가 좋은 적이 없어.” 라고 말합니다.
선은 이미 감독도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일본은 또 선을 못보고 갑니다.
국내에서 선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듭니다.
일본야구를 두려워 한다는 거죠.
실제로 선은 최고의 컨디션이 아닐 때 일본야구와 부딪치는 걸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사실은 시즌이 끝나고 연습을 안했겠지요.
이젠 일본의 관심도 시들해 집니다.
한국야구의 온갖 규제에 해태구단의 욕심도 벅찬데.... 이젠 선의 나이도 부담스럽습니다.
오랜 1인자 노릇에 그는 타성에 젖은 걸로 보입니다.
선의 시대는 이렇게 질질 끌다 말겠지요.
그런데....
그에게 자극이 옵니다.
아득한 옛날.... 그가 가고 싶어했던 “꿈의 무대” 이야기가 들려와요.
한국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젊은 청년 박찬호가 바다를 건넙니다.
소년시절 그의 영웅이었던 선동렬도 가지 못한 “야구의 본고장”에 두려움과 기대가 가득한 맨몸으로 떠납니다.
거인들과 싸울 생각에 피가 끓습니다.
꿈.....
10년 전 무산된 자신의 도전.......... 선에게 깊은 회한이 옵니다.
10년전엔 이름도 듣지 못했던 무명선수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네요.
고교시절 미국의 포볼 기록을 모두 갈아 치웠을 것이라는 “스트라잌 못던지는 파이어볼러” 랜디 존슨은 메이저에서 빅 유닛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사이 영” 상을 받습니다.
공이 너무 느려서 한계가 있을 거라던 그랙 매덕스는 제구력과 상대타자의 허점을 찌르는 두뇌피칭으로 “예술가”란 찬사를 들으며 가장 위대한 투수의 반열에 오릅니다.
올림픽에서 헛 방망이질로 한국대표 선수들의 웃음을 샀던 미국대표팀의 4번타자 마크 맥과이어는 베이브 루스의 한시즌 홈런기록을 갈아 치우며 도박과 약물로 침체했던 메이저리그를 중흥 시킨 영웅이 됩니다.
평범한 투수라는 평가를 받아 다저스에서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된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다시 태어난 듯 놀라운 피칭으로 사이영 상을 차지하고 “외계인“이라는 찬사가 쏟아집니다.
나는 페드로를 보면 선이 생각났어요.
그의 낮은 자세와 역동적인 투구폼, 강한 투쟁심은 젊은날의 선과 무척 닮아 있었거든요.
그들은 모두 선과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인물들예요.
아마시절 미국과 일본의 타자들은 선의 공에 쩔쩔 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메이저리그와 일본리그의 수준 높은 야구를 접하며 좋은 지도자에게 배우고 강한 적수를 만나 자신을 단련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동안 선은 수준 낮은 한국리그에서 어린애 손목 비틀듯 타자들을 요리했죠.
선의 불행은 한심한 조국의 야구수준과 안이하고 무능한 지도자, 정치현실과 폐쇄성. 부패한 구단, 다른 팀에 비해 지나치게 강한 팀 동료였어요.
94년
미국으로 들어간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등판하는경기를 티브이가 처음 중계합니다. 찬호는 마이너로 가지만.....
티브이를 본 선은 나른해지는 느낌이었겠지요. "아.... 나는 저기에 설 수도 잇었겟지."
선은 94년에 일생 최악의 해를 보냅니다.
지난겨울에 연습도 안했었죠.... "내가 여기에서 야구를 하는 이유가 뭔지......." 20대와는 달리 30대 들어선 연습을 안하면 몸이 무거워지는걸 느꼈겠죠.
그해 겨울, 그는 좀 달라졌다는 소문이 있네요.
열심히 연습한다나요?
95년, 오, 그는 달라졌군요. 장난 아닌거 같애요.
예전엔 5회든 6회든 아무때나 나왔는데 이젠 8,9회에 등판하는 전통적인 마무리 투수로 뜁니다.
95년 한일 수퍼게임
선은 도전자 같습니다. 몇년전 그가 아니네요.
마무리 투수로 변신한 그는 일본 언론에 거침없이 말합니다.
“한국이 리드한 모든 경기에 등판 하겠다.”
“여섯게임 모두 이긴다면 여섯게임에 모두 등판한다.”
그가 이렇게 화끈하게 말하는건 처음본 것 같습니다.
95년의 수퍼게임은 한국야구에 자신감을 줍니다.
"야생마" 이상훈이 시원스런 호투로 일본 타선을 막아내고 9회에 등판한 선은 일본의 타자들을 압도합니다.
2차전. 리드를 안고 등판한 선이 간단히 경기를 매조지 합니다.
이상훈 송진우 정민철의 차세대가 연일 호투했고 결의에 찬 선은 명성에 걸맞는 호투로 일본야구에 두려움을 줍니다.
일본의 타자들은 도저히 그의 공을 칠것같지 않더군요.
기록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일본이 선을 상대로 득점은 커녕 제대로 배트에 맞춘적이나 있었는지요?
그간의 온갖 비난도 일제히 찬사로 바뀝니다.
내가 선을 좋아하게 된건 이때를 전후해서 였습니다. 그 전엔 적이었죠.
베어스에게.... 혹은 해태를 제외한 다른팀의 팬들에게도 선은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못생겨서 그나마 덜 미워했던것 같네요..
일본야구는 선의 위력이 여전하자 다시 영입을 시도 합니다.
이번엔 선도 결심이 굳습니다. 더 늦으면 기회는 없지요.
해태구단은 여전히 “절대불가”를 외쳤지만 선은 “안 보내주면 은퇴”라고 맞섭니다. 여론은 십년 넘게 구단에 봉사한 선동렬 편입니다.
또 그가 가야 살맛나는 다른팀의 팬들도 이적에 찬성이죠.
여론에 떠밀린 구단은 선을 팔아 돈이나 챙기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그들은 선을 아주 여러번에 나누어 팔려 합니다. 비싼물건이죠. 한번에 집 팔듯 팔았다가 그의 값이 더 높아지면 ? 한번에 팔지 않고 전월세로 내주면서 두고두고 돈을 빼먹기로 합니다.
“2년 임대“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선의 은퇴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으로 간 건 만으로 서른세살.... 우리 나이로 서른넷. 황혼이 멀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긴 늦은 나이죠.
하지만 이미 가진 것만으로도 일본무대 정도는 자신이 있습니다. 몇달전에 이미 일본프로를 박살 냇으니까요.
개막 이전엔 일본의 전문가들도 “대단하다”를 연발했습니다만....
시즌 개막전부터 선은 두들겨 맞습니다. 세이브를 날리고 패전투수가 됩니다.
수퍼게임에서 당했던 일본야구는 선이 일본진출을 선언하자마자 그의 모든것을 연구합니다.
상대팀들은 선의 약점을 철저하게 분석해 처절하게 공략했습니다. 직구와 슬라이더 둘뿐임을 알고 어떤 동작일때 어떤 공을 던지는지, 타이밍을 뺏는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냅니다.
한국에서 투수수비로도 최고라던 선은 일본에선 수비에 약점많은 선수가 되버립니다. 한국에선 번개 같다고 햇지만 일본은 선의 느린 셋업 모션의 약점을 파악해 도루를 해댔습니다.
한국에선 선이 마운드에 있을때 도루 전혀 못햇어요.
“견제가 날카롭고 셋 업도 빨라서.....”
사실은... “어떻게 살아나갔는데 황송하게 도루까지....” 였겠지요.
선은 삼십 중반에 일본에서 셋업 모션과 투구 패턴도 바꾸고 구질 개발도 했습니다.
만약 십년전에 갔더라면 일본의 선진 야구를 배워 대단한 투수가 되었겟지요.
선은 둘째 해부터 일본야구에 적응하며 인정받는 마무리 투수가 됩니다.
공의 기본 위력은 여전햇으니까요. 15년 전부터요.
여기서 부터는 누구나 알고있는 얘기지요.
눈에 띄는건... 선의 구속인데
한국에서의 선은 151km이상의 공을 던졌다는 얘기가 없었는데....
일본 진출 후 아주 쉽게 150km이상을 찍어댔습니다.
내가 본 기록으론 153km가 최고였고
다른 얘기론 154, 155km를 찍었다는 신문기사 얘기도 있더군요.
물론 스피드 건의 차이도 있을 테고 겨누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서도 다르다고들 하고....
일본의 스피드 건이 더 후하게 나온다는 얘기도 있구요.
보통은 투수의 손에서 가까운 위치를 잡아 속도 측정을 한다는데..... 그러면 이른바 종속... 배트에 맞는 순간의 위력은 알수 없습니다.
이건 내가 지식이 부족해 뭐라 말하기 힘들군요.
누군가가 전문적인 설명을 해주면 좋겠네요.
30대 중반에 구속이 더 늘어났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지만.... 컨디션에 따라서도 5km이상의 차이가 나니까 그렇게 이해해야 할지요.
<사족>....
80년대 초 서울 시내에는 스피드 측정기가 유행 했었는데.... 지금의 펀치력 측정기처럼 동전을 넣고 다섯 개 씩을 던지면 공의 속도를 알려줬죠.
스피드 건과는 달리 옆에서 측정하는 방식이었어요.
내 경험으론 평균 110 -119 정도의 공을 던지다가 갑작스레 132가 나왔는데...
손가락에서 공이 저절로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 때 구속이 엄청나게 나오더군요.
이 얘기는 지금이니까 별 생각 없이 하지만.... 내가 한참 야구를 할 당시(81년-83년)에는
130km이상의 공을 던졌다면 잘 믿지 않앗어요. 같이 야구한 친구들을 빼면요.
81년 당시의 실업야구를 보면.... 투수들의 평균 구속이 110 - 130 사이였거든요.
82년 프로야구 개막 후에도 135km 이상의 투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40km 이상을 던진다면 엄청난 강속구 투수였어요. 거의 최동원 급이죠.
OB 베어스의 에이스였던 장호연은 아예 120km 이상의 공을 던진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스피드 측정 방법이 좀 달라진 건지.... 아니면 전체수준이 높아지면 공 도 빨라지는지 지금은 웬만하면 140 이상은 던지잖아요?
스피드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건지는 모르지만.... 내 경험으론 매 투구마다 최고속도에 근접한 공을 던지는 건 불가능 했어요. 던지다보면 엄청 빠른공이 하나씩 나오곤 했죠.
그렇게 이해해서인지 내가 “선은 대단하네....“라고 느낀 경기...
내가 티브이로 본 경기(97년?)서는 빠른 볼에 약한 타자가 나오자 149 - 150 - 151 의 직구로 삼구삼진 시키는 장면이 있었어요.
관중석에서 낮은 감탄사가 흘러나오더군요.
“아.... 저 친구는 자기가 원할 때 자신의 최고 구속을 맘대로 찍어 대는군....”
4년차....주니치 드래곤즈는 마침내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 하고 만세를 부르지만 ...... 선의 직구는 위력이 감소하는 징후가 보입니다.
그는 원래 타자를 압도하는 스타일이지 유인구를 던지는 타입이 아녜요.
스피드는 여전하지만 종속이 떨어지고 공끝의 움직임도 약해지고 잇엇어요.
나고야의 태양은 조금씩 서산으로 가고 있었죠.
주니치는 선과의 세 번째 계약을 준비했지만.... 해태는 또다시 세 번째의 돈을 요구 합니다. 맨입으론 안되지....
선심 쓰듯 “이번엔 영구임대 해주겠다.”고 했던 것 같기두 하구요.
또 다시 돈을 요구 받은 주니치는 고심합니다.
“일본 나이로도 서른일곱을 넘기는 선의 위력이 더 떨어진다면....?”
선은 주니치의 고민을 알게 됩니다.
은퇴하죠.
“아쉬움이 남을 때 물러나고 싶다“ 고 말하지만 조국의 친정팀에 대한 서운함은 말하지 않았어요.
선의 보스턴 레드삭스 진출에 대해서도 온갖 억측이 나돌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은 것이 많았어요.
보통은 “테스트를 받아가며 입단하지는 않겟다.” 고 최고투수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는 것이 가장 알려진 얘기지만........
내가 알기론 주변의 돈 장난 때문이었습니다.
아쉬움이 남는건 어쩔 수 없지만....
난 그가 미국에 가지 않은건 다행이라구 생각해요.
혹자는 사사키를 예로 들며 선동렬이 메이져에 가서도 성공 햇을거라고 말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릅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전 86년생이고 전성기를 못 봤음에도 선의 위력을 조금이나마 안다고 생각합니다. 95년인가? 선 감독님의 한국에서의 거의 말년에... 그때도 상당한 투구를 보여주셨었죠. 10살도 안되었을때라서 기억이 잘 안나지만(10년도 넘었고요) 그때의 선 감독님의 투구 위력이나 그런것에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가 해태팬이셨고 해서 야구 종종 봤거든요. 그 나이에 당시에 부상으로 몸이 많이 안 좋으셨다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요. 당시에도 선 감독님의 투구 내용이나 이런 것은 어린 저에게도 뭔가 느껴지는 그런 포스가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그건 거의 말년이었다니...
그런데 이 글 쓰신 분도 조금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게 있네요. 89년 부터 선동렬은 젊은 날의 선동렬이 아니었다고 되어있는데..물론 그만큼 열심히 운동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만 선동렬은 89년부터 내리 3년 연속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죠. 연슺을 게을리 했을 수도 있으나 어느 정도의 자기 관리가 없다면 (자기 몸을 알고 자기가 운동량을 조절하지 않으면) 이루기 힘든 부분이라 생각하구요...89년에 입단한 해태 3인방, 조계현, 이강철, 이광우 중에서 이광우는 아마시절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오비로 이적합니다. 활약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아무튼 당시의 해태와 농구에서 90년대의 기아자동차, 배구의 삼성화재는 정말 왕조체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90년대 기아 독주시에는 농구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배구쪽으로 옮겨간 팬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배구 삼성화재 독주시에는 배구인기자체가 폭락했음에 비해서 해태 독주시에는 야구 인기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더 맨님 그건 서울 얘기죠. ^^ 해태독주시절 서울에서의 야구인기가 조금 하락했을순 있는데 지방에선 해태 독주 시절에도 인기 여전했구요 부산에서는 92년 우승하던해 장난아니였답니다. 그리고 94년에 엘쥐 3인방 들어오며 전국적으로 야구 인기 대폭발 그리고 이어진 95년에 역대 최다 관중동원 했죠. 그뒤로는 쭈우우욱 하락세...;;;;
첫댓글 잘 봤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하지만... 전 86년생이고 전성기를 못 봤음에도 선의 위력을 조금이나마 안다고 생각합니다. 95년인가? 선 감독님의 한국에서의 거의 말년에... 그때도 상당한 투구를 보여주셨었죠. 10살도 안되었을때라서 기억이 잘 안나지만(10년도 넘었고요) 그때의 선 감독님의 투구 위력이나 그런것에 상당히 놀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가 해태팬이셨고 해서 야구 종종 봤거든요. 그 나이에 당시에 부상으로 몸이 많이 안 좋으셨다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요. 당시에도 선 감독님의 투구 내용이나 이런 것은 어린 저에게도 뭔가 느껴지는 그런 포스가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그건 거의 말년이었다니...
그리고 이 글을 읽으니... 새삼 선 감독님의 대단함이 다시 느껴지네요. 정말 선 감독님이 메이저리그로 갔다면...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 무의미한 짓 한번 해보고 싶어요.
잘읽었습니다-_-; 정말 선동렬이 바다를 건넜더라면 어땠을지..
긴글한글자도 안빼놓고 다봤습니다. 동감합니다
멋진 글이네요... 전문적인 식견이 돋보입니다.. 잘봤습니다... 정말 선동열 나오면 상대팀에서는 짐싸기 바밨죠^^ 한국 야구의 병폐를 다시한번 보는 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좋은글입니다. 안타깝네요.. 이런풍토에서 결국 선동렬이라는 희대의 야구천재가 그냥 썩어버리다니..
빙그레 팬이었던 저는 선만 나오면 헤맸던 장종훈형님 때문에 울화병까지 생겼었습니다...
굿 글..조계현, 이강철, 이광우 이 세선수덕분에 해태의 천하였죠..진짜.
잘 읽었습니다~근데 전 선동렬인지 선동열인지 헷갈릴때가 아직도 많은데ㅎㅎㅎ
아재미난글..정말안타깝네요..
그런데 이 글 쓰신 분도 조금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게 있네요. 89년 부터 선동렬은 젊은 날의 선동렬이 아니었다고 되어있는데..물론 그만큼 열심히 운동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만 선동렬은 89년부터 내리 3년 연속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죠. 연슺을 게을리 했을 수도 있으나 어느 정도의 자기 관리가 없다면 (자기 몸을 알고 자기가 운동량을 조절하지 않으면) 이루기 힘든 부분이라 생각하구요...89년에 입단한 해태 3인방, 조계현, 이강철, 이광우 중에서 이광우는 아마시절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오비로 이적합니다. 활약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그렇죠...이광우는 솔직히 해태선수라 보기는 어렵고 신동수,문희수 조금 뒤에 이대진이 합류하면서 무적투수진이 된거죠...송유석,김정수도 있었죠..정말 그리운 우승시절..ㅠㅠ
해태팬으로써 선동열이 몸만 풀면 이겼다! 하며 안심하고 채널을 돌리던 시절이 그립네요
뭐 이광우 없이도 충분히 최강이였죠. 그리고 어느정도의 자기관리와 오프시즌에 빡세게 훈련하는것과는 먼 거리가 있지요.
아무튼 당시의 해태와 농구에서 90년대의 기아자동차, 배구의 삼성화재는 정말 왕조체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90년대 기아 독주시에는 농구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배구쪽으로 옮겨간 팬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배구 삼성화재 독주시에는 배구인기자체가 폭락했음에 비해서 해태 독주시에는 야구 인기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해태 독주시에 야구 인기가 상당했었나요?? 저두 원년부터 야구팬이지만 해태독주시절에는 그전보다 인기가 하락했었을텐데... 그러다가 LG3인방이 나타나면서 다시 인기가 올랐던걸로 기억하는데....
더 맨님 그건 서울 얘기죠. ^^ 해태독주시절 서울에서의 야구인기가 조금 하락했을순 있는데 지방에선 해태 독주 시절에도 인기 여전했구요 부산에서는 92년 우승하던해 장난아니였답니다. 그리고 94년에 엘쥐 3인방 들어오며 전국적으로 야구 인기 대폭발 그리고 이어진 95년에 역대 최다 관중동원 했죠. 그뒤로는 쭈우우욱 하락세...;;;;
야구는 엘지-롯데-해태 이 세팀이 잘해줘야 인기가 좋다는 말이 있죠. 거기에 +@가 삼성, 두산 정도. 워낙 이 세팀의 인기가 대단했었죠.
야구의 경우는 정부와 언론에서 팍팍 밀어주는 상태였기 때문에 해태의 독주라 해도 인기도와는 상관이 없던 것 같아요. 저의 경우도 타도 해태를 부르짖고 있었구요. 정말로 선동렬 이종범 정말 싫어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일본진출하면서 팬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