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내야 할 때는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이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함 때문에 교만에 이르게 되고, 교만은 거친 행동을 낳고 그것이 세상사람들의 비난으로 이어져 스스로 몰락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을 휴브리스(Hubris)라고 한다.
휴브리스란 인간이 주제넘게 신에게 대들거나 신의 영역을 넘보는 짓을 말한다. 휴브리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근거있는 자신감에서 비롯되며, 그 내면에 탁월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자신의 탁월함에서 출발한 존재가 휴브리스에 이르게 되어 징벌의 신 네메시스에게 파멸되는 과정을 네메시스 싸이클[(탁월함(Arete) → 교만(Huris)→ 거친행동(Ate)→ 징벌(Nemesis)]이라 한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대표적인 휴브리스맨들은 파에톤, 아라크네, 카시오페아, 탄탈로스, 오딧세우스 등 무수히 많다. 아폴론의 아들 파에톤은 아폴론만이 몰수 있는 태양마차를 함부로 몰다가 벼락을 맞아 죽게 된다. 아라크네는 직물의 신 아네네보다 수를 더 잘 놓고 직물을 더 잘짠다고 교만해하다가 아테네에 의해 평새 죽을때까지 실을 짜는 거미로 변하게 된다. 에티오피아의 왕비였던 카시오페아는 자신의 딸인 안드로메다가 바다의 요정 네레이스보다 더 아름답다고 자랑하다가 하늘의 별이 된다. 뛰어난 요리사였던 탄탈로스는 신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자신의 아들 펠롭스를 요리하여 신들을 시험하다가 영원히 굶주리는 형벌을 받는다. 오딧세우스는 외눈박이 폴리페무스에게 오만함에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가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0년동안 바다를 떠돌게 되는 형벌을 받게된다.
미국에는 조지워싱턴부터 조 바이든까지 총 46명이 대통령자리에 올랐다. 이 중에서 미 육군장군이 대통령이 된 사람은 11명으로 전체 24%나 된다. 근대 역사에 있어 가장 뛰어난 전쟁영웅은 단연코 맥아더였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대통령에 오르지는 못했다.
군인가문에 금수저로 태어난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를 2470만점에 2424.12점을 기록하며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맥아더도 전설이었지만 그의 어머니의 치맛바람도 전설이었다. 맥아더는 졸업 이후 1919년 최연소 육군사관학교장, 1930년 50세 최연소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된다. 승승장구하는 군 경력을 보내고 있던 그는 스스로 무한한 자부심에 빠져들어 남들과 대화할 때도 스스로를 맥아더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과 같이 2차대전에 참전한 보너스군대를 가혹하게 유혈진압하는 과정에서 5명의 사망자와 1000명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그들이 거주하는 판자집까지 불태워버렸다.
하버트 후버 대통령을 꺽고 32대 대통령에 오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군 예산을 삭감하려고 하자, 맥아더는 전쟁에서 죽어가는 미국의 소년들이 당신에게 저주의 말을 내뱉을 것이라며 루즈벨트를 면전에서 비난했다. 이때 루즈벨트는 이 미치광이 전쟁광을 정치계에 들이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하며 그를 로마공화정을 몰락시키고 종신독재관에 오른 카이사르라고 부르며 죽을 때까지 그를 견제했다.
그러한 맥아더의 오만은 루즈벨트에 이어 33대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에게도 계속되었다. 맥아더는 대학도 나오지 않은 흙수저 트루먼을 대놓고 무시했고,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참전하자 한반도에 핵폭탄을 터뜨리자고 제안했다. 결국 유엔사령관 겸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항명죄로 트루먼에 의해 해임되고 만다.
맥아더가 군인집안 출신의 금수저였다면 아이젠 하워는 가난한 독일 이민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흙수저였다. 그는 무료교육기회를 얻어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지만 맥아더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는 15년간 만년 소령에 머물러 있었다. 맥아더가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가 있는 동안 그도 맥아더를 따라서 10년동안 그를 보좌했다.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야심을 키우고 있었고, 맥아더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정치감각도 익히고 있었다.
2차대전이 시작되자 마샬장군의 휘하로 들어가는데 화려한 명성을 쌓을 수 있는 야전지휘관보다 정보참모로 배정받은 것에 화가 났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처칠수상과 몽고메리 원수, 까다롭기로 소문난 프랑스의 샤를 드골대통령 등과 같이 난감한 인사들과 미군 총사령관 루즈벨트 사이를 능숙하게 조율하면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이젠 하워는 독일 항복일에 워싱턴에 보내는 전보에서도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처칠은 아이젠하워를 “그는 기민하게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감독했고, 엄청난 일을 직접 해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위임된 권한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이후, 마샬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올랐고, 콜롬비아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이후 냉전시대가 되면서 다시 5성장군으로 군에 복무하다가 1952년 미국의 3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37년간의 군인생활을 접고, 정치가로 들어섰을 때 공화당, 민주당 모두가 아이젠 하워를 러브 콜한 결과였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의 극명하게 서로 다른 기질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맥아더와 아이젠하워가 같이 복무하던 시절 미국의 한 여성기자가 맥아더와 아이젠하워를 개별 인터뷰를 한 후에 소감을 밝힌 적이 있다. “맥아더 원수와 대화를 할 적엔 ‘맥아더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와 대화할 적엔 아이젠하워가 ‘내가 위대한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아이젠하워도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맥아더와 같은 네메시스 싸이클에 빠지지는 않았다. 맥아더가 사라져갈 때 아이젠 하워가 미국 대통령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맥아더와 같은 휴브리스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