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저녁
조현석
사내들이 성을 비운 저녁이다
성안 구석구석을 훑으며 바람만 나돌아다닌다
황혼에 점 하나로 새 한 마리 날아가고
붉은 울음 쏟으며 또 날아가고
그사이 검붉어진 구름 사이로 다시 날아가고
여자들의 기도가 간신히 성루를 넘어가고
전장(戰場)은 아무리 멀어도 가깝다
애닯게 애쓰며 살아온 울음 멈추는 밤
상처 입은 깃을 정성껏 다듬고
어둠을 걷고 또 걷고 걸어가
쓰라렸거나 무거웠던 것들 벗어던지고
가벼워지는 스스로를 돌아볼
‘내 탓이오’의 시간 맞을 수 있을까
천천히 날아가거나 잠시 멈추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텐데
외마디 지르는 까마귀 한 마리
달 뒤편으로 사라진다
쓰라린 전사(戰死) 전보가 드문드문 날아온다
말문 막히는 어둠이 지나간다
아침 햇살 속으로 그믐달이 부활의 몸 불사른다
한 사내가 다리를 절며 돌아오는 새벽이다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2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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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석 / 1963년 서울 출생. 1988년《경향신문》신춘문예 등단.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불법, …체류자』『울다, 염소』『검은 눈 자작나무』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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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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