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 함무성
어둠침침한 동굴 문을 통과했다. 청록 물빛의 광활한 바다와 물 위에 군데군데 웅장하게 솟은 바위들이 장엄하다. 하늘에 떠서 내려다본 바닷물 속에는 형형 색색의 물고기가 무리 지어 헤엄치고, 해초들이 넘실거리는 모습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듯 선명하다. 나는 힘껏 양팔을 노 젓듯 저으며 하늘을 날았다. 간밤에 꾼 꿈 이야기다.
나는 잠꾸러기다. 어렸을 때도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네 아침밥은 없다.’라며 깨우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비몽사몽간에 들으면서도, 밥보다는 잠이 더 맛있었다. 태어 날 때 잠의 여신 등에 업혀 나왔나.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에 풀을 뽑던 남편도 안방 창문을 톡톡 두드리며, ‘그만 일어나세요.’하기가 일쑤다.
잠자는 시간은 최고의 여행시간이다. 꿈속에서 ‘알타미라 동굴 벽화’도 생생히 보았고, 전 세계 화가들이 모인다는 ‘몽마르트르 언덕’에도 가 보았다. 언덕이 경사가 심해서 걸어서 오르지 못하고 엎드려서 손톱을 갈고리 삼아 땅을 찍으며 기어올랐었다.
꿈에서 깨고 나면 온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그 꿈속 여행은 감동적이다. 몇 년 전 유럽 여행 중에 프랑스의 몽마르트르 언덕에 갔었다. 내가 꿈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대성당의 위용과 화가들의 그림 그리는 모습, 아기자기한 골목들이 아름다운 예술 도시였다. 꿈에 본 그 도시는 어떻게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점집에 자주 드나드는 친구는, 천연색의 꿈을 꾸는 사람은 ‘신’기가 있으니 무당이 될 조짐이 보인다며 돗자리를 깔아보라고 나를 놀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항상 아름다운 자각몽을 꾸기만 한 건 아니다. 악몽에 시달릴 때도 많다. 꿈속에서 모처럼 고향을 찾아갔을 때였다. 골목길은 불빛 하나 없고, 어둠에 덮인 납작한 초가집들이 가도 가도 끝이 안 보인다. 갑자기 섬쩍지근하여 발길을 돌려 되돌아서 뛰었다. 발이 땅에 붙은 듯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겨우 나와 보니, 강가에 배 한 척이 있고, 그 안에 여고 동창생들이 소복이 타고서 나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꿈에서 깬 후 생각해보니 내가 갔던 곳은 공동묘지였나 보다.
수많은 꿈 이야기 중에서도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는 것도 있다. 푸른 나무 한 그루도 없는 도시에 도착했던 꿈이다. 그룹마다 각기 다른 색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줄지어 서 있었는데, 나는 이름표를 받지 못해서 무리 중에 들지 못했다. 기다리란다. 모든 통신선이 끊겨서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 전화 연결도 안 된다니 난감했다. 두렵고 막막한 슬픔에 소리 내어 울었다.
남편이 흔들어 깨워서 돌려 눕혀줬지만, 그 지독한 슬픔은 쉽게 가시지 않아 꿈에서 깨고 나서도 울었다. 아마도 나는 저승까지 갔다가 돌아왔나 보다.
어떤 때는 송아지만 한 흑돼지가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적도 있다. 횡재할 길몽이며 예지몽이라는 생각에, 아무에게도 꿈을 팔지 않고 복권을 한 장 샀다. 틀림없이 일등 일 줄 알았는데, 역시나 꽝이다.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황진이의 상사몽 같은 꿈을 꿀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꽃구름 위에 올라앉은 듯 나른하고 행복하기도 했고, 감성이 촉촉해져서 정지용 시의 ‘향수’에서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곁에 있는 남편이 새삼 그립기도 했다.
그러나 꿈이 다 좋지만은 않았다. 흉몽에 시달려 비명을 지르다 깨어나면, 얼른 성호를 긋고 주기도문을 외우기도 한다. 아마도 내 머릿속에는 특별한 꿈 제조기가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꿈은 어디서 올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했다. 본능과 무의식이 갈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잠재몽으로 나타나기도 해서 ‘꿈은 소원 성취’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 꿈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거나 해몽할 생각은 없다. 다만 꿈속에서 뜻하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다양한 경험 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며 그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보는 재미를 느끼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꿈은 피곤했던 우리의 뇌를 청소하면서 나오는 부산물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잠들기 전에는 책을 몇 페이지라도 읽고 자는 버릇이 있는데, 그건 이런 저런 낮 동안에 쌓인 ‘생각 상자’의 뚜껑을 닫는 시간이다. 그래도 늘 꿈을 꾸는 것은 뇌 청소 부산물들이 많이 남아서일까.
악몽이든 자각몽이든 꿈을 즐긴다. 다채로운 꿈 이야기가 안개처럼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 남기고도 싶다. 아마도 내가 그림 그리기를 중도 포기하지 않았다면, ‘마르크 샤갈’ 풍의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유아적 발상의 스토리를 현란한 색채로 표현한 샤갈도 나처럼 ‘꿈쟁이’였을까.
지금도 꿈 이야기나, 어렸을 적 추억, 첫사랑의 솜사탕 같은 감정들을 100호 캔버스를 세워놓고 맘껏 그려보고 싶다.
꿈 여행의 입구는 잠이다. 생의 삼분의 일을 잠을 잤으면서도, 나는 늘 졸리다. 나른하게 스며드는 잠을 즐기며 다채로운 꿈 여행을 기다린다.
오늘 밤 꿈에서도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날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