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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문화탐방 자료(2023. 10. 17) 1. 청주 청남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의 대청댐 부근에 있는 대통령 전용별장으로 1980년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이 대청호 일대의 경관에 매료되어 중부권에 별장의 필요성이 논의되었고, 주변 환경과 지리적 요건이 잘 맞아 경호실장에 의해 1983년 6월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완공되었다. ‘청남대(淸南臺)’는 충청북도 청주시 대청댐 부근 1,825,647㎡(약 55만 3천 평)의 면적에 지어진 전용별장으로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는 의미이다. '83년 조성 당시에는 봄을 맞이하듯 손님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영빈관 개념으로 '영춘재(迎春齎)'란 이름으로 준공되었다가 이후 '86년도 7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현재의 청남대로 개칭된 것이다. 이곳은 내륙의 바다인 대청호반을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실 수 있는 장소이다. 대통령들의 온기가 담겨있는 본관 및 별관, 대통령 기념관, 오각정, 골프장, 양어장, 초가정, 하늘정원, 음악분수, 산책길(14km) 등은 찾는 이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줄 것이다. 충북 청주 청남대 역대 대통령들은 여름휴가나 명절 휴가 등 매년 4~5회, 많게는 7~8회씩 이용하여 20여 년간 총 88회 방문 471일을 청남대에서 보냈다고 한다. 국내의 대통령별장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진해를 비롯해 모두 다섯 군데(강원 고성 화진포, 제주시, 경남 진해, 거제시 저도 청해대, 충북 청주 청남대)가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모두 폐쇄하고 이곳 청남대 한 곳만을 남겨 두었다. 강원도 고성 화진포 대통령별장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에는 세 명의 옛 정치인의 별장인 김일성별장, 이승만별장, 이기붕별장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이승만 별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머물렀던 곳으로 1954년에 신축된 뒤 1961년에 폐허가 되었다가 1997년 7월 육군이 재건축하여 1999년 전시관으로 복원되었다. 별장의 외부는 별장답지 않게 아담하고 소박하며 허름하게 보인다. 내부는 침실과 집무실로 쓰이던 방 두 개와 거실로 구분되어 있으며 유족들에게 기증받은 물품들로 전시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기거하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다. 단출한 가구와 소박한 물건들 그리고 생전의 사진들로 그 당시의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다. 이승만별장은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별장 안에서 밖을 바라보면 주변의 울창한 송림과 한데 어우러진 화진포 두 개의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까닭에 화진포의 세 별장 중 가장 경치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조용히 바깥 풍광을 즐기며 편안하게 쉴 수 있는 평온하고 조용한 별장이다. 경남 거제 저도 대통령별장(청해대) 거제 저도 대통령별장은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柳湖里)의 저도(豬島)에 있는 국방부 소유의 군 휴양시설이다. 청해대가 위치한 저도는 원래 1920년부터 일본군의 통신소와 탄약고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후 1950년 주한연합군의 탄약고로 사용되다가, 1954년부터는 해군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휴양지로 활용하였다. 그러다 1973년 연면적 171평 규모의 2층 화강암 건물인 청해대 본관이 완공되면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일명 '바다의 청와대(靑瓦臺)'로 청해대라 불리며, 본관 건물을 중심으로 섬 주변에는 8개 동의 수행원 및 경호원 숙소, 막사, 청기와로 지붕을 씌운 팔각정 건물, 9홀 규모의 골프장, 골프장 주변을 따라 낸 산책로, 전망대, 자가발전소 등이 있었고, 대한민 지도와 태극 문양을 본뜬 연못이 있다. 경남 진해 대통령별장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현동에 있는 고 이승만 대통령이 별장 및 정자로 사용하였던 근대 건축물인 이승만 대통령 별장은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건물이다. 별장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육각정이라 불리는 육각형의 정자가 있는데, 1949년 이승만 대통령과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이 만나 회담을 한 장소이기도 하다. 육각정은 1949년 8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이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莊介石]와 아시아 집단 방위 체제 구상을 위한 예비 회담을 했던 정자로, 그 후 필리핀 대통령 퀼리노에 제의하여 아시아 민족반공연맹[APACL]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와 동아시아 외교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제주 대통령별장 제주 대통령별장은 1958년에 건립된 건물로 제주국립목장 안에 대통령과 국가 귀빈의 숙박을 위하여 지은 별장이다.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머물렀던 것을 계기로 ‘이승만 별장’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와 그 주변에 조성된 울창한 나무숲은 마당 한 가운데에 서 있는 팽나무 한 그루와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는 듯하다. 두 가지 기쁨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쌍희(囍)’자와 모든 일이 뜻대로 되기를 기원하는 회문 장식 등 우리나라의 의장이 일부 포함되어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1950년대 이후 나타나는 서구의 모더니즘 주택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 별장은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 대통령에게 커다란 결단이 요구될 때가 많았다. 역대 대통령들은 국정운영의 중대한 고비에서 청남대에 머물며, 정국 구상하였고, 이때 내린 결단으로 역사를 뒤바꿔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청남대 구상』이다. 그 밖에 역대 대통령들은 청남대에서 다양한 인사들과 회동하며 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한편, 여러 국빈을 맞이하기도 했다. 특히 청남대는 휴양 중에도 항상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완벽한 시설을 갖춤은 물론, 대청호 상수원 보호를 위해 최고의 수질 정화 시스템을 구축·운영하였다. 또한, 청남대가 별장으로 사용되던 시절에는 국가 1급 경호 시설로 청와대에서 관리하고, 4중의 경계철책과 대통령경호실의 지휘를 받는 대한민국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제338 경비대가 청남대를 경비를 수행하여 베일에 싸여 있다가 2003년 4월 18일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양함으로서 비로소 20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이 부대가 운용하던 참호와 초소 등도 일부 남아있어 아직도 관람 시 볼 수 있다. 청남대는 지난 20년간 여섯 분의 대통령께서 휴식과 함께 국정을 구상하시던 곳이기도 하면서, 역사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국내 유일의 대통령별장이다. 2003년 개방 이후 매년 평균 80만 명 이상 방문하여 총 1,300만 명(2022.12.31)이 넘는 많은 분이 찾아 명실상부한 세계적 대통령 테마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 청남대는 국민에 대한 애정과 국가 발전을 위한 고민의 흔적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내륙의 바다 대청호반을 따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실 수 있는 장소이다. 대통령들의 온기가 담겨있는 본관 및 별관, 대통령 기념관, 오각정, 골프장, 양어장, 초가정, 하늘정원, 음악분수, 산책길(14km) 등은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청남대의 대표적인 축제인 '영춘제'와 '국화축제'를 비롯해, 사계(四季)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조경수와 야생화 등은 환상적인 자연경관을 제공하고 있다. 2.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청주 문의문화재단지는 대청댐 건설이 확정되자, 1992년부터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총 4만여 평의 대지 위에 문화재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다. 이곳에 청주 시내 유형·무형 문화재 등을 수집 전시함으로써 인류문명의 발달과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조상의 삶과 얼을 되살리기를 배우기 위한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단지 내에는 인근의 고인돌이 모두 이전되어 있고 문의현의 관아 객사 건물인 지방유형문화재 제49호인 문산관이 이전 복원되었으며 수몰 지역의 민가와 서길덕 효자각, 그리고 임진왜란 때 중봉(重峰) 조헌(趙憲)(1544~1592)과 더불어 창의(倡義 : 의병을 일어킴)하여 1592년(선조 25) 8월 17일 충청도 금산 전투에서 칠백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한 김선복 충신각 및 문의지역에 있던 옛 비석도 함께 이전되었다. 옛 조상들의 생활풍습을 알기 위하여 양반가옥, 주막집, 토담집, 대장간, 성곽 등이 고증을 거쳐 건립되었으며, 유물전시관에는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영조 대왕 태실 조성을 기록한 지방유형문화재 제70호인 영조대왕의 가봉(加封)할 때의 모든 사실을 기록한 문서인 영조태실 가봉의궤를 비롯하여 군내에서 수집한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과 백제부터 근대까지 기와를 시대별로 분류한 기와 전시관이 있다. 청주 문의문화재단지 배치도 이밖에도 이곳 문의에 오면 10분 거리 이내에 청주시민들이 많이 찾는 양성산 등산로, 작은 용굴분수대, 쾌적한 드라이브 코스인 청남대 도로, 청소년들의 체력단련장인 청소년 수련관과 충북지역 작가들로 구성된 예술인촌이 조성되어 있어『문의에 오면 문화가 보인다.』라는 말이 실감 나는 지역이다. 3. 청주 가로수길 ‘맑은 고을’ 청주(淸州)는 충북의 중심도시로, 충청도라는 이름도 충주와 청주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청주 시내를 관통하는 금강 줄기 무심천은 청주의 숨통이다. 이 무심천을 따라 조성된 청주 가로수길은 복대동 가경천 죽천교부터 석소동 경부고속국도 나들목까지의 길을 가리키며 총 길이는 6.3km이다. 이 가로수길에는 1948년 식재된 1,5백여 그루의 플라타너스가 길을 따라 심겨 있어 마치 터널처럼 보인다. 이곳에서는 드라마 '모래시계'와 영화 '만추'가 촬영되었던 곳이다. 청주 가로수길 4. 청주 중앙공원 임산자원이나 관광자원 보호 차원의 국/도립공원과 달리, 주거지 근린공원은 공중의 보건과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예로부터 청주는 지세를 따졌을 때 무심천 위에 떠 있는 배의 형상이라고 해서 주성(舟城)이라고 했다. 청주의 한복판이라 할 남문로2가에 서 있는 용두사 터 철 당간은 그 배를 안정시키고자 세운 돛대라고 전해진다. 중앙공원은 청주시의 한가운데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공원에는 선인들의 숨결이 서린 압각수(鴨脚樹)와 충청도병마절도사 영문인 정곡루(正鵠樓], 그리고 망선루(望仙樓)가 있다. 병마절도사 영문인 정곡루는 목조 2층의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으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청주 중앙공원 정곡루 그 앞에는 1천 년을 헤아리는 은행나무 압각수와 의병장 조헌 선생과 영규 대사(임진왜란 때 가장 먼저 승병을 일으킨 승병장)를 기리는 비석과 한말에는 의병장으로 국권회복운동을 하였으며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한봉수의 송공비,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의병장 박춘무의 碑 및 서원 향약비 등이 있다. 청주 시내 중심에 있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시민을 위한 각종 음악회와 발표회가 열린다. 공원 안에 1,000년 된 은행나무인 압각수(충북기념물)와 목조 2층 누각인 병마절도사 영문(충북유형문화재), 조헌전장기적비(충북유형문화재), 척화비(충북기념물) 등 유적이 많다. 청주 중앙공원 여기서 중앙공원에 있는 은행나무의 전설을 조금 부언하고자 한다. 이 은행나무의 잎사귀가 오리발처럼 생겨서 압각수(鴨脚樹)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며, 고려말 공양왕 3년(1390년) 때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 일파를 없애기 위해 중국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가서 조선의 변고를 거짓으로 밀고하는 사건이다. 정5품의 무관 중랑장인 이초와 윤이는 이성계 일파의 정변 기도를 감지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호소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려 시중 이성계를 없애기 위하여 모의를 하였다. 연경에 건너간 윤이와 이초는 명나라 태조에게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한다고 고하고, 이를 반대한 이색 등을 살해하고, 전판삼사사(前判三司事) 우현보(禹玄寶) 등은 감금, 유배하였다고 하였다. 이때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머물던 동지밀직사사 조빈이 급히 귀국,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자, 1390 이성계 등은 사람을 보내 윤이와 이초를 잡아들였다. 이성계는 즉각 정도전을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이초의 주장이 거짓이라며 변명하고 돌아와 바로 정도전을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하고, 이색 우현보 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꾸민다. 그리고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양촌 권근, 인재 이종학, 우현보 등 고려 유신 10여명을 잡아들여 청주 옥사에 하옥하는 청주옥사가 일어났다. 그밖에 왕족인 남평군 왕화, 수연군 왕규(壽延君 王珪)·영원군 왕기(寧原君 王琦) 역시 투옥당한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수하들은 청주 옥사에 갇힌 이들을 모두 처형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청주 중앙공원 은행나무 압각수 이색· 정지· 이숭인· 권근 등이 청주 옥사에 갇히고 문초를 받자 갑자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져 성안에 큰 홍수가 났다. 이때 옥에 갇힌 죄수들은 옥사 객관 앞에 있던 은행나무에 올라가 모두 목숨을 건졌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공민왕이 특별교서를 내려 모두 방면했다는 일화에는 간계에 굴하지 않는 충신의 기개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는 숨은 뜻이 내포돼 있다. 이 은행나무가 바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된 그 압각수(鴨脚樹)다. 양촌 권근은 후일에 이 은행나무를 찾아와 당시의 마음을 읊은 한시가 시비에 새겨져 있다. 압각수(鴨脚樹) 陽村 權近 流言不幸及周公(유언불행급주공) 떠도는 말이 주공(주나라 성왕 때 최고의 명신)에게 불행이 미치더니, 忽有嘉禾匽大風(홀유가화언대풍)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잘 자라던 벼를 쓰러뜨렸다네. 聞道西原洪水漲(문도서원홍수창) 오가며 듣자 하니 서원(청주의 옛 지명)지방도 홍수가 넘쳤다고 하니, 是知天道古今同(시지천도고금동) 천도(天道= 天意)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네. 5. 국립청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은 청주시 상당구 명암로 143(명암동)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속박물관으로 선사시대 이래 충북지방의 문화재를 한곳에 모아 보존 전시함으로써 이 지방문화의 중심기관이 되고자 1982년에 착공하여 1987년에 완공하였다. 국립청주박물관 국립청주 박물관 조성 배경 이 박물관의 터는 전부 42,000여 평으로 이 지방 출신인 곽응종(1903.5~ 1987.3)옹이 기증하였고, 박물관에는 국보가 1점 있는 등 국가 지정 문화재가 4점 있다. 이 박물관은 1979년 1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하였고, 착공은 3년 후에서야 이뤄졌는데, 10.26 사건 등 긴박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예산 집행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박물관의 터를 기증한 곽응종 선생의 공덕비가 모두 흑색으로 글씨를 알아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청주박물관 부지 기증자 곽응종 공적비 국립청주박물관은 중원지역의 문화유산 수집과 보존관리로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 함양하고 문화유적의 조사연구, 유물의 전시, 사회교육 기능을 통하여 지역문화 발전에 공헌하고 민족문화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고 있다. 또한, 복합문화공간으로 2004년 10월 8일 문을 연 청명관은 어린이박물관과 기획전시실, 첨단 영상시설이 갖추어진 강당 등 이용자들에게 더욱 다채로운 문화생활의 기회와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박물관 건물은 우리나라의 근대 대표적 건축가 故 김수근 선생께서 설계한 한국 현대건축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우암산 동쪽 기슭의 수려한 풍광을 배경 삼았다고 한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은 이 땅에 현대건축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건축도 예술임을 증명해 보였다. 건축을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 여겼던 김수근은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매력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 근대 건축가의 거장 김수근 *근대 건축가 김수근의 이력 김중엽과 함께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의 1세대를 대표한 인물로 그의 행적에선 후술되어있듯 논란과 비판이 있어 평단에서의 평가도 많이 갈리는 인물이다. 김수근은 여러모로 김중엽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김중엽은 서울대 공대 건축공학과 스승임). 김수근은 여러모로 독재 정권에 밉보이지 않아 국가 사업을 도맡았으며, 심지어 서울의 '남영동 대공분실'을 직접 설계했을 정도로 독재 정권의 철권 통치에도 영합한 건축가였다. 반면 김중업은 박정희 정권에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정권과 늘 싸우고 불화하여 급기야 해외로 쫒겨나기까지 했다. 그는 1931년 2월 20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고, 1938년 청진 천마소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2학기 때 경기도 경성부로 이사해 경성교동공립심상소학교에 전학했다. 그 후 경기공립고등학교(現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이 때 건축학을 전공한 미군 병사에게서 영어를 배운 인연으로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1950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교수였던 김중업을 만나기도 했으나 그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통역병으로 징집되었다. 이후 휴가를 받아 부산에 갔다가 누나 김순자의 도움으로 탈영하여 일본으로 밀항했다. 1958년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3월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 홍익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했다. 1972년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교수에 부임했고, 1975년부터 1986년까지 국민대학교교 조형학부의 교수로 재직했다. 대학원 재학 당시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자는 설계 공모가 있었는데 여기서 1등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있던 조선신궁을 허물었는데 터가 탄탄해서 이걸 재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해 백지화되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현재의 국회의사당은 여의도에 있다. 현재 이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김중업과 함께 한국 건축계 태동기를 이끈 인물이고, 이들 이전에는 사실상 선배 건축가가 없다시피한 게 당시 한국의 실정이다보니, 제대로 된 건축학개론서 하나 없던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그나마 현대건축이란 걸 배워 온 김수근이 중용된 것이다. 1961년 김수근건축연구소를 세우고 워커힐 관광사업 시설 설계에 참여하면서 힐탑바 등을 설계하여 김종필과 인연을 맺게 되고, 1963년 자유센터 등을 설계했다. 김종필은 이후로도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정부주도로 설립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 참여하여 여의도 종합개발, 김포공항 종합개발, 경부고속도로 기본 계획, 포항제철 입지 선정, 종로 3가 종합개발을 주도하게 된다. 1966년에는 김종필에게서 받은 200만원으로 건축잡지 월간 '공간'(空間)을 창간하는 등 문화에술활동에도 대단한 열성을 보였다.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서울 남산 워크힐호텔 비자힐, 남산자유센터, 현 경향신문 사옥, 타워호텔, 세운상가, 국립부여박물관과 시도의 박물관, 남영동 대공분실, 서울종합운동장, 주한미대사관, 인천상륙작전기념관, 현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수영장, 사이클 경기장, 구미예술문화회관 등 많은 작품들이 남아 있다. 6. 운보의 집(보조코스) 운보 김기창(蕓甫 金基昶) 화백은 해방 이후 지속해서 한국화의 현대화를 모색한 한국 화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입체주의와 추상화의 경향을 보이는 작품을 제작했고, 1970년대에는 민화를 재해석해 독자적인 바보 화풍을 구축해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했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명되기도 하였다. 운보 화백은 1913년 2월 1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0년 승동(勝洞)보통학교에 입학 후 장티푸스를 앓으며 고열로 청력을 잃고 평생 청각장애인으로 살았다. 언어 장애도 있었으나 후에 구화를 배워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모친 한윤명 여사는 아들 김기창에게 손수 한글과 산수(算數)를 가르쳤으며, 그가 미술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고 1930년 보통학교 졸업 후, 구한말 어진화가(御眞畫家)로 명성이 높았던 김은호(金殷鎬) 화백의 화숙으로 보냈다. 김기창은 김은호 화백의 화숙인 이묵헌(以墨軒)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이름이 알려진 화가로서 일제에 동조하는 활동을 했으나, 광복을 맞아 호를 '운포(蕓圃)'의 '포(圃)'자에서 '口(큰 입구 몸)'이 빠진 '운보(蕓甫)'로 바꾸었다. 이에 관해 전통과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의지의 표현이라는 해석도 있다. 운보 김기창 화백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판상무도(板上跳舞)'로 첫 입선을 한 뒤 연달아 입선하다가 1937년부터 1940년까지는 4년 연속으로 특선을 받아 추천작가가 되어 이름을 알렸다. 이후 친일 미술 전시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조선남화연맹전(朝鮮南畵聯盟展)', '애국 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 전람회'에 참여하고, 강제 징집을 독려하는 연재물인 '님의 부르심을 받고'에 삽화를 그리는 등 일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에 2004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이 시기에는 김기창은 김은호 화백의 영향을 받은 채색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성화 '예수의 일생'에 정열을 쏟던 운보 1946년에 한국화가 박래현(朴崍賢)과 결혼했고, 동양화단의 향후 진로를 모색하며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와 '미술운동과 대중문화제'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후 '자유 신문' 미술기자, 국립민속박물관 미술부장 등으로 활동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군산으로 피난을 가 작품활동을 했으며, 1954년에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자리를 잡았다. 1955년부터는 홍익대학교 시간강사로 교육 활동을 시작했으며, 1962년부터 1974년까지는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를 지냈다. 청주 운보의 집 청주 운보의 집 전경 1976년 박래현이 타계한 후에는 부부전 대신 개인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후 미술계 원로로서 은관문화훈장과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장애인복지에 관한 관심으로 1979년 한국 농아복지회를 조직해 초대회장직을 맡았으며, 1984년에는 청각장애인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설립했다. 1984년 충청북도 청원시에 '운보의 집'을 지어 거주하면서 주로 작품활동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1995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2001년 1월 23일 사망하였고, 정부에서는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하였다. 1950년대 김기창 화백은 크게 두 가지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하나는 '복덕방(1953-1955)'과 같이 정감 있는 거리 풍속을 서양 입체주의를 연상시켜 평면적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김기창 화백의 '복덕방' 다른 하나는 '군마도(群馬圖)'처럼 비교적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졌으나 대담한 묵법으로 율동감을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김기창 화백의 ‘군마도’ 또, 1952년에는 조선을 배경으로 하여 토착화시킨 '예수의 생애' 연작(총 30편)을 제작했다. 김기창 화백 ’예수의 생애 . 승천' 그리고, 1960년대에는 추상화 단계의 동양화를 제작했다. '태양을 먹은 새(1968)'는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기창 화백의 ‘태양을 먹은 새(1968) 김기창 화백의 '바보 산수' 이외에도 1973년부터 세종대왕, 을지문덕, 김정호 등 위인 영정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만 원권 지폐에 그려진 세종대왕이 이에 해당한다. 김기창 화백이 그린 만원권 지폐의 세종대왕 을진문덕 장군의 영정 김정호의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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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번 청주 탐방 자료는 이제야 올립니다. 늦게 신청하여 대기자로 있어 그냥 있었으나
어제 참가 확정되어서 이제 올렸습니다. 시간이 계신 회원님은 한번 살펴봐 주십시요.
자료 읽으며 마음으로 잘 익혔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새기며 봅니다.
번번 찮은 안내 자료를 끝까지 잘 봐주셔 고맙습니다.
이번 달 답사가 폭우로 무산되고 다음 달로 일정으로 추진한다고 하니,
좀 더 쓸모 있는 자료가가 되도록 보완하겠습니다..
언제나 고마운분 후당 전보규선생님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좋은 내용 사전에 잘 숙지하고 참고하겠습니다.
잘 지내시죠? 고맙습니다. 재해가 심한 현실에 이번 답사도 쉽지 않을 것 같네요요.
시월은 청주로 갑니다 . '후당의 문화탐방' 방을 개설하기를 바랍니다.
사전 자료 많이들 숙지하시고 가면 좋으리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