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화길 15 번지에 있는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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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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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42호인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비로서, 현재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고비(古碑) 중 가장 오래된 석비이다.
문화재 지정 : 국보 제242호
건립시기 : 524년
소재지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화길 15(봉평리)
관람료 : 무료
개장시간 :10:00시~17:00시
개설
198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88년 4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석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며, 비의 제작 당시 이미 몇 군데 금이 나 있었으므로 이를 피해 글을 새겼다.
그러나 비가 지상에 노출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파손 없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비석으로 판명되기 전 돌을 옮기는 과정에서 포클레인에 의해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비편도 발견되어 완형을 갖추고 있다. 한 면에만 약간의 인공을 가해 글자를 새겼다.
이 비가 발견된 울진지역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강원도 울진현이며, 이곳과 관련된 비문상의 지명은 거벌모라(居伐牟羅), 남칭지촌(男称只村), 갈시조촌(葛尸條村), 아대혜촌(阿大兮村)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곳과 관련된 지명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울진 바로 옆의 ‘건이치(建伊峙)’. 『여지도서(與地圖書)』 강원도 울진현의 산천조에 갈령(葛嶺)이 보이고 있어 연관성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여지도서』 울진조의 각 면에 소속된 촌·리의 명칭 가운데 원남면(遠南面)에 소속된 ‘갈면리(葛面里)’란 명칭은 갈시조촌과의 상관성을 연상하게 하고 서면(西面)의 ‘남회룡리(南回龍里)’는 남칭지촌과의 관계를 상정하게 한다.
내용
비의 높이는 204㎝, 글자가 새겨진 면의 윗너비 32㎝, 가운데너비 36㎝, 밑너비 54.5㎝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不整形)이다.
비문의 구성은 전체 10행으로 행마다 글자 수가 달라 1행 31자(하부 일부가 파손되어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그렇게 추정됨.),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로 전체 글자 수는 모두 398자로 추정된다.
그러나 논자에 따라서는 1행을 32자 또는 33자로 보아 399자 또는 400자로 보기도 한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풍(北朝風)의 해서(楷書)로 되어 있으나, 자획의 형태에는 예서(隷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비문 자체는 대체로 양호하나 이자체(異字體)가 많고 또 일부는 마멸되어 읽기 어려운 글자가 30여 자에 달한다.
문체(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상 애매한 곳이 적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 파악은 상당히 어렵다. 그 까닭으로 논자에 따라 견해 차이를 심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대충 짐작할 만하다.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에 대군(大軍: 중앙군을 의미함)을 일으킬 만한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해결한 뒤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법흥왕)과 13명의 신료들이 그에 대한 사후처리로서 이 지역에 모종의 조처를 취하고, 소(斑牛)를 죽이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장육십(杖六十)·장백(杖百)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 비문 내용의 줄거리이다.
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국왕이 순행한 것으로 보고 순행비(巡行碑)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율령에 관련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아 율령비(律令碑)로 보려는 견해 등 한결같지가 않다.
비문의 전체적인 구조는 550년대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와 상당히 유사해 이들 사이에 어떤 공통성을 볼 수 있는데, 520년(법흥왕 7) 율령이 반포된 뒤 한동안 같은 성격의 비문 작성에 일정한 정형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특징
이 비는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비보다 많은 글자 수를 보유해 내용이 풍부하고, 문헌사료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따라서 6세기를 전후한 신라사의 이해를 보다 심화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동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법흥왕 때의 율령을 둘러싼 문제들이 해명될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게 되었다. 비에는 영(令)뿐만 아니라 율(律)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장육십·장백이 보여 법흥왕 7년에 반포한 율령의 실재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신라사회에 기능하는 폭넓은 내용을 가진 성문법전(成文法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노인법(奴人法)과 같은 율령의 한 편목(篇目)은 이 비의 성격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 신라에 복속된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율령의 편목이라 생각되나 구체적인 내용 구명은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 여기서 노인(奴人)은 원래는 비신라계였다가 신라에 점령당해 포로로서 집단적으로 복속되면서 집단적으로 노예적 존재가 된 집단적 예속민으로 보인다. 노인법이란 이러한 집단적 예속민을 대상으로 한 법령으로 국가가 노인촌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부담지우는 것을 명문화한 것으로서 율령의 한 편목(篇目)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세운 목적은 6세기 초 이래 영토를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520년에 반포된 율령을 새로이 영토로 편입된 지역에도 시행함으로써 그 지역을 신라적인 지배질서로 전환하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 신라사의 이해를 위한 큰 고리의 하나는 왕경의 육부(六部)에 대한 문제였는데, 그 성립연대나 과정 및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육부의 성립시기를 대체적으로 6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그러나 이 비에 신라 육부라는 말이 보이고 있어 성립 하한선이 6세기 초임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5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소급해볼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리고 성격에 대해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어, 이를 혈연적인 성격의 씨족 혹은 부족 조직으로 보거나, 아니면 왕도의 지역적 구분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 비에 국왕인 법흥왕은 탁부(啄部)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 立宗葛文王)은 사탁부(沙啄部)를 관칭(冠稱)해 형제가 부를 달리하고 있어 부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검토해볼 여지를 마련해준다. 이에 대해서 눌지왕대부터 탁부 소속의 매금왕이 사탁부까지 통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사금 시기(尼師今時期)에 갈문왕에 봉해진 인물들은 주로 왕비나 왕모의 부(父)였다. 그러나 마립간 시기(麻立干時期)부터는 왕의 동생이나 친족이 갈문왕에 봉해지고 매금왕은 탁부에 갈문왕은 사탁부에 소속한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냉수리비와 봉평비를 통해 사탁부 소속의 관리들이 탁부 소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등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사탁부가 매금왕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본피부(本彼部), 사피부(斯彼部), 잠탁부인(岑喙部人)이 칭한 간지(干支)를 부의 지배자인 부주(部主)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관등(官等)이나 직명(職名)의 의미로 이해해서 왕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관리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에 따라 6세기 초반 6부의 성격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운영이나 지배구조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간지’의 성격을 부주로 이해하면, 당시 6부가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부집단을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는 체제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반면 이들을 후자의 성격으로 이해한다면, 당시 6부는 단지 왕경의 행정구역으로만 기능하였고, 왕권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중앙집권적인 정치구조를 기초로 하는 사회였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당시 국왕의 지위와 왕권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국왕도 부에 소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관료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어떤 정책을 결정한 듯하다. 이는 당시 신라 국왕이 아직 초월적 권력자로 부상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비는 그와 같은 국왕의 지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의와 평가
이 밖에 신라 17관등(官等)의 성립연대문제나 지방통치조직 및 촌락구조, 그리고 복속민에 대한 시책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면들을 재검토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지금까지 알려진 어떠한 비보다 학문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의
원문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의
번역문
[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에 대군(大軍: 중앙군을 의미함)을 일으킬 만한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해결한 뒤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법흥왕)과 13명의 신료들이 그에 대한 사후처리로서 이 지역에 모종의 조처를 취하고, 소(斑牛)를 죽이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장육십(杖六十)·장백(杖百)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 비문 내용의 줄거리이다. ]
삼국시대 석비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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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163호인
무열왕릉 지석의
재현물
무령왕릉 지석 (武寧王陵 誌石)
대한민국 국보 제163호
국보 지정일 : 1974.07.09
수량 : 2개
시 대 : 백제시대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공주박물관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국보 205호인
중원 고구려비의
재현물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석비로 5세기 무렵 고구려의 남진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는 역사적 유물. 1981년 3월 1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국보 지정일 : 1981년 3월 18일
소재지 : 충청북도 충주시 감노로 2319 (중앙탑면, 충주 고구려비전시관)
공식 명칭은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이지만, 일반적으로 신라 시대 충주의 옛 지명에서 비롯된 ‘중원고구려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의 석비(石碑)로 1979년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이 발견하였다. 1981년 3월 18일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원본은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
높이 203cm, 폭 55cm, 두께 33cm이며, 커다란 자연석을 다듬어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에 모두 예서체로 글을 새겼지만 뒷면과 우측면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마모되었고, 앞면과 좌측면 일부의 내용만 확인된다. 글자 하나의 지름은 3∼5cm로 앞면에 23자씩 10줄, 좌측면에 23자씩 7줄이 있으며, 우측면에는 6줄, 뒷면에 9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가 세워진 시기에 대해서는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영역을 확장한 5세기 장수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에서는 고구려 왕을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 등의 표현에서 고구려군이 신라의 영토에 주둔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외에 고모루성(古牟婁城), 대사자(大使者) 등 당시의 지명과 관직명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중원고구려비는 5세기 고구려의 남진(南進)과 신라와의 관계를 알려주어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특히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은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등 매우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데, 이 석비는 한반도의 중부 지역인 남한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 높게 평가된다.
국보 264호인
포항 냉수리 신라비의
재현물
포항 냉수리 신라비 (浦項 冷水里 新羅碑)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비. 국보.
국보(1991년 03월 15일 지정)
소재지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토성길37번길 13 (신광면, 신광면사무소, 신광보건지소)
개설
199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건립 연대는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간지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인명으로 볼 때 443년(눌지마립간 27) 또는 503년(지증왕 4)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의 재산 상속 문제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공문서(公文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내용
1989년 3월 말, 이곳에 사는 주민 이상운(李相雲)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발견하여 4월 11일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학술적인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는 발견자의 조부 대(代)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고 하므로 정확한 원래 위치는 알 수 없다. 1989년 9월 현재 영일군 신광면 면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다.
영일 지역은 신라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倭)·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인데 신광면은 안강(安康)·청하(淸河)·흥해(興海)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가 발견된 냉수리는 곡강천과 형산강 지류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곳으로 부근 흥곡리에는 군내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이 비는 자연석 화강암의 전면·후면·상면에 글자를 새긴 삼면비(三面碑)이다. 전면은 면을 다듬었으나 후면과 상면은 다듬지 않은 채로 글자를 새겼다. 형태는 전면 하변 너비 73㎝, 좌변 높이 47㎝, 우변 높이 66㎝, 두께 30㎝의 부정형 4각형이며 밑부분이 넓고 위로 올라가면서 너비가 축소되었다.
비문은 전면에 12행 152자, 후면에 7행 59자, 상면에 5행 20자로 총 231자가 새겨져 있고 음각을 하였다. 서체는 해서체(楷書體)로 보이나, 예서체(隸書體)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글씨체면에서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와 매우 비슷하다. 글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아 전면의 가장 큰 글자는 길이와 너비가 각 5㎝이고, 가장 작은 글자는 1∼3㎝이며, 후면과 상면의 큰 글자의 경우도 5∼7㎝ 정도이다. 비문은 크게 4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자가 파손된 곳이나 마모되어 읽을 수 없는 부분은 별로 없으므로 판독에 큰 문제는 없는 듯하다. 다만 후면 제1행의 제7, 8자의 경우 글자가 불분명하여 판독상에 이견이 있고, 같은 후면 제6행의 제7, 8자도 판독하기 매우 힘든 글자이며 이 이외에도 판독상의 문제가 되는 글자들이 있다.
첫째 문단은 전면의 제1행에서 2행까지로서, 사부지왕(斯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이 절거리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를 인정해준 것이 주된 내용이다. 여기서는 사부지왕과 내지왕이 누구인가도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둘째 문단은 전면의 제3행에서 후면의 제1행까지로서,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6부(六部)출신의 고위관리 7명이 계미년 이전에 있었던 두 왕의 결정 사항을 재확인하면서 절거리가 죽은 뒤 제아사노(弟兒斯奴)가 재산을 상속할 것과 말추(末鄒)·사신지(斯申支)는 이 재산에 관여하지 말 것을 결정한 내용이다.
셋째 문단은 후면 2행에서 마지막 행인 제7행까지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전사인(典事人) 7명이 앞의 고위 관리 7명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제의(祭儀)를 지내고 이를 포고한 것을 기록하였다.
넷째 문단은 상면 제1행에서 마지막 행인 제5행까지로 촌주(村主) 2명이 비의 건립 등의 일을 마친 것을 기록하였다.
특징
냉수리 신라비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항들을 담고 있다. 첫째, 지증왕이 왕이 되기 전에 갈문왕의 지위에 있었고 그가 속해 있었던 부가 사탁부(沙啄部)였다는 점, 둘째, 지도로갈문왕 이하 6부 출신의 고위 관리 7명을 7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 셋째, 신라의 국호로서의 사라(斯羅)라는 명칭과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으로 비정되는 내지왕이라는 인물과 신라 6부 중 습비부(習比部)에 비정될 수 있는 사피(斯彼)라는 부의 이름이 이 비에서 최초로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전사인 7명이 6부 출신이면서 1명을 제외하고서는 관등 표기가 없다는 점, 또한 냉수리비를 제외한 이후의 6세기 금석문에서는 다수의 귀족관료들을 열거할 때에는 동일한 직명을 소지하였을 경우 관등(官等)의 높고 낮음이 기준이 되어 기재하는 것이 거의 예외 없이 지켜진 하나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비에는 관등의 고하(高下)가 아니라 부(部)를 중심으로 인명을 나열하고 있다. 이는 당시까지 정치운용에서 부가 하나의 단위 정치 집단으로 기능하고 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정치가 운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중앙의 고위 관리 가운데 본피부(本彼部)와 사피부 출신자의 관등과 촌주의 관등이 ‘·간지(干支)’로 나오고 있다는 점,
여섯째, 이 시기 개인의 재산 소유와 상속에 관한 사항 및 재산 분쟁 때 이를 해결하는 절차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
일곱째, 촌주와 도사(道使) 등의 지방관직명이 나와 지방 통치 조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는 점 등이다. 종래에는 도사 등 행정촌에 파견되는 지방관이 6세기 초 군주제 시행 이후 또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두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비의 발견으로 신라 지방제의 기원을 훨씬 소급되게 되었다. 그러나 5세기대에서 지방제의 시원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당시 아직 신라의 전체 영역에 대해서까지 직접적인 지배를 실현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왕도와 가까운 인접지역에만 한정하여 지방관을 파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6세기에 들어와 지증왕(智證王), 법흥왕대(法興王代)를 거치면서 전국에 걸쳐 점차적으로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냉수리비에서 재(財)를 가운데 놓고 재지세력 사이의 분쟁을 이용하여 그들 가운데 중앙에 좀 더 충성심을 보여 지방지배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유력자에게 촌락지배권을 인정해주고 그를 매개로 지방을 직접 지배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여덟째,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묻고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행하던 당시 풍속제도의 실상이 잘 담겨져 있다.
이 비는 이처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학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미해결의 문제가 없지 않다.
첫째,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관계로 비면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전문의 판독이 가능하지만 10여 자 정도는 판독자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 앞으로 정확한 판독이 요망된다.
둘째, 상면에 글자를 새기고 있어서 이러한 형태를 비로 보아야 할 것인지의 여부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비의 건립 연대인 계미년이 연구자 사이에 383년, 443년, 483년, 503년 등의 주장이 있어 많게는 12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 건립 연대의 확정은 최대의 연구 과제라 할 수 있다.
넷째, 사부지왕과 내지왕을 전세2왕(前世二王)이라 한 것, 지도로갈문왕 이하 고위 관리 7명을 7왕으로 표현한 것, 본피부와 사피부의 고위 관리와 지방의 촌주가 똑같이 간지(干支)라는 관등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치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성격과 촌주와 지방지배에 대한 것이다. 우선 촌에는 도사가 파견되는 곳과 촌주가 존재하는 촌으로 나누어, 도사가 파견된 촌을 행정적인 촌이며 중심촌으로, 촌주가 존재하는 곳은 자연촌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촌주가 존재하는 진이마촌 같은 경우를 그냥 자연촌으로만 보느냐 역시 행정적 성격을 지닌 촌으로 보느냐에 따라 여러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또한 진이마촌의 촌주를 진이마촌 출신으로 보기도 하고 도사가 파견된 지역에 세력기반을 가진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라 신라의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 양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정부의 직접지배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도사가 파견되지 않고 촌주가 있는 촌에도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게 됨으로써 촌주도 촌에 대한 행정을 담당하고 재산분쟁이 일어나자 그 해결이 어려워 국가에 보고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와는 달리 절거리와 분쟁에 참여한 3인은 중심촌에 부속한 자연촌에 세력 근거를 가진 유력자들로서 도사가 파견된 촌에 예속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상대적 독자성을 가지면서 조세수취권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아 행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아직 신라의 지방지배가 초기 단계이며 국가권력이 여기에 침투해 들어가려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촌과 촌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라의 5∼6세기 지방지배에 대한 이해가 달라 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절거리에게 소유권을 인정한 ‘재(財)’의 내용에 관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토지, 광산(鑛山), 수조권(收租權), 또는 종교적인 제사권(祭祀權)에 부속된 이권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를 규명하는 것이 이 비의 성격을 밝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중 하나이다. 또한 재를 둘러싼 분쟁이 절거리와 말추, 사신지 사이에 벌어진 것인지 아니면 절거리가 죽고 난 뒤 재사아노와 말추, 사신지간에 벌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혈연관계 사이에 벌어진 다툼으로 보아야 하는지 재지세력 사이의 이권 다툼인지에 대한 성격규명도 이 시기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과제이다.
의의와 평가
냉수리 신라비는 형태 및 내용상에서 몇 가지 특징과 의의를 보인다. 먼저 형태상에서 볼 때 상면에 촌주와 관련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상면에 글자를 새긴 것은 이 비가 최초이다.
한편, 내용상 의의는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비 중에서 포항 중성리 신라비 다음으로 연대가 빠르다는 점, 둘째,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시기 경제 관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6부·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다수 보이고 있다는 점, 넷째, 국어학적으로 이두(吏讀)의 성립 시기와 성립 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서체상에서 볼 때 자전(字典)에 나오지 않는 ‘사(斯)’자가 전면에 다섯 번 나오고 있어 신라식 조자(造字)의 방식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이 비는 1988년 4월에 발견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와 긴밀한 상보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5∼6세기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정리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국보 198호인
단양 신라 적성비의
재현물
단양 신라적성비
충북 단양의 성재산에는 신라의 적성이 축조되었고, 그 증거로 신라적성비가 세워져 있다. 신라는 죽령을 넘어 고구려 영토인 적성을 차지한 후 성을 쌓고, 백성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적성비를 세웠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게 신라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 바람이 현실로 다가온 게 제24대 진흥왕이 즉위(540년)한 이후의 일이다. 신라가 백제와 동맹(나제동맹)을 맺고 한강 유역으로 진출을 시도한 것이 진흥왕 때부터다.
신라, 고구려 영토를 빼앗고 비를 세우다
단양 신라적성비를 찾아가는 길은 두 가지다. 단성면사무소를 지나 단성생활체육공원 앞 하방리 마을길을 지나는 것과 중앙고속도로 단양휴게소(춘천 방향) 뒷길로 오르는 길이다. 이중 단양휴게소에서 오르는 길이 수월하다. 휴게소가 산 중턱에 위치해 오르는 길이 짧고 잘 정돈되어 있어서다.
휴게소를 돌아 성재산을 오른다. 이 산 정상부에 적성이 있고, 그 안에 신라적성비가 세워져 있다. 신라적성비까지는 10여 분이면 충분하다. 넓고 평평한 터에 비각이 덩그러니 서 있다. 비각 안에는 윗부분이 잘려나가 왜소해 보이는 비가 있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두께도 아래보다 위가 두껍다. 돌을 가공하지 않고 자연석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의 상단부가 훼손되어 정확한 글자 수를 알기 힘드나 대략 440자 정도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 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 가능하다.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가 1978년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이 땅속에 30cm 정도 묻혀 있는 비를 발견했다.
신라적성비에는 이사부를 비롯한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해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을 빼앗은 후, 자신들을 도와 공을 세운 적성 출신의 야이차와 가족 등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포상을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통치 조직, 촌락의 존재 양상, 율령과 조세제도 등 기존 문헌 자료에 보이지 않는 신라사를 이해할 수 있다.
점령 지역에 비를 세운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신라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신라적성비는 진흥왕 대에 건립되었지만, 아쉽게도 비가 일부 파손되어 비문을 작성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시기가 551년이라는 점, 각종 역사서에 보이는 인물의 관등과 비문에 보이는 인물의 관등을 비교한 결과에 근거해 진흥왕 6~11년(545~550)경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진흥왕 북진정책의 전초기지, 적성
적성은 성재산 정상부와 남쪽 비탈을 둘러쌓은 퇴뫼식 산성이다. 퇴뫼식이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 주위에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축조한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 1,768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적성비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다 왼쪽으로 이어진 길을 가면 북동쪽에 타원형 모양의 적성이 일부 남아 있다. 신라적성비 보러 가는 길 중간에도 성벽이 일부 남아 있지만,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요충지임을 느끼기에는 이곳이 제격이다. 외벽의 높이는 4m, 내벽의 높이는 3m 정도이다. 남쪽으로 죽령, 북동쪽으로 남한강 상류, 북서쪽으로 남한강을 따라 청풍과 충주가 한눈에 보인다. 이러한 지형은 삼국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에 매우 중요한 전략 기지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신라는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한강 상류로 진출하는 북진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듯하다. 성벽 위는 돌들이 울퉁불퉁한 데다 발을 잘못 디딜 경우 무너질 수도 있어 오르지 말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신라적성비에 '적성'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보여 성의 명칭이 적성임을 알게 되었다. 성안에서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을 비롯해 고려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고려 후기까지 단양 지방의 읍성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석기시대 문화를 보여주는 단양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
적성에서 내려와 적성대교를 건너 단양읍으로 가다 보면 애곡리에 자리한 수양개 유적을 지나게 된다. 이곳은 1983년 충주댐 수몰지구 유적 조사로 발견된 이래 2013년까지 모두 11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가 이뤄졌다. 슴베찌르개, 좀돌날몸돌, 긁개, 밀개, 주먹도끼, 찍개, 주먹대패 등 구석기시대의 생활환경을 알려주는 유물 3만여 점이 출토된 곳으로 한반도의 후기 구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선사 유적지다.
수양개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중기 구석기시대부터 삼한시대 취락 유적 등이 발견된 곳이기도 해서 야외에 선사인들의 사냥 모습과 움집을 재현해놓았다. 전시관 안에는 직접떼기, 간접떼기, 눌러떼기 등의 제작 기법으로 만든 주먹도끼, 찍개, 슴베찌르개, 긁개, 밀개, 배모양밀개, 주먹칼 등 다양한 석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돌날몸돌과 자루를 끼울 수 있도록 슴베가 달린 찌르개는 중국 화북, 시베리아 남부, 일본 열도의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에서 나온 석기들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연구 자료이다. 수양개 유적뿐만 아니라 단양의 금굴 유적, 상시 바위그늘 유적, 구낭굴 유적지에서 발굴한 사람뼈, 사슴뼈, 호랑이뼈 등도 전시되어 있다.
삼국~조선시대에 이르는 국보 또는 보물급 석비와
고구려 평양성 석편을
실물크기의 모형으로 전시한
야외비석공원에 관한
안내도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전시관은 총 3개의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실물을 전시하고 비의 발견과정과 해석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의 비 7기와 백제무령왕릉 지석, 임신서기석 등 9종 10점이 실물모형으로 제작 전시 되어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우리나라 금석학의 계보, 시대별 비의 양식, 한자과 한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야외에는 울진지역의 송덕비 45기를 모은 비석거리와 삼국~조선시대에 이르는 국보 또는 보물급 석비와 고구려 평양성 석편을 실물모형으로 전시한 야외비석공원이 있다.
비석거리에는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평해군수, 울진현령 등을 지낸 지방관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세운 선정비와 불망비, 송덕비들이 있다. 조선시대 평해군의 비 9기와 울진현의 비 36기를 합하여 총 45기를 2010년 10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여 비석거리를 만들었다.
야외비석공원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경주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등 우리나라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국보, 보물급 30기의 비와 고구려 평양성 석편과 경주 숭복사지 쌍귀부를 실물모형으로 제작해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야외공원에 各 비의 발굴 위치에 맞게 세워서 전시하고 있다. ]
야외비석공원
야외비석공원에 있는
국보 제47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
야외비석공원에 있는
국보 제315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
국보 제315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에 관한
안내문
야외비석공원에 있는
광개토왕릉비
광개토왕릉비에 관한
안내문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야외공원에
各 비의 발굴 위치에 맞게 세워서
전시하고 있는
야외비석공원
고구려 평양성 석편
고구려 평양성 석편에 관한
안내문
국보 제3호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국보 제3호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에 관한
안내문
대게를 테마로 만든
죽변항 조형물
대게 고르는 법
매일경제 기사입력일 : 2002.06.20.
국내 유일의 활게 찜요리 전문점 유빙(02-409-3600 www.ubing.com)의 김성수 사장이 권하는 대게 고르는 방법을 알아본다. 조리과정도 간 단한 대게찜은 얼마만큼 신선한 대게를 고르느냐에 따라 맛의 99%가 결정되는 만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싱싱한 대게 고르는 방법=수급에 따라 수시로 가격이 변하는 변동 시세가 적용되기 때문에 시장을 한 바퀴 대충 둘러보고 난 후에 구입 한다. 또 싼 맛에 살집이 빈약한 것을 사게 되면 먹을 게 하나도 없다. 좋은 상태의 게를 꼼꼼하게 골라 적정한 가격으로 구입하는 것이 현명하다.
1. 배 부분이 검거나 검은 색이 도는 것은 피하고 신선한 홍조가 도 는 것으로 고른다. 누르스름하면서 투박한 느낌이 드는 것이나 눌러 보았을 때 말랑말랑한 것은 피한다.
2. 들어봐서 다리가 기운차게 움직이는 것을 고른다. 특히 집게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가 싱싱하다. 반대로 다리가 축 처지는 게는 좋지 않다. 집게 다리 다음 두번째 다리가 제일 약한 부분인데 이 부위가 빈약하면 적신호.
3. 게 등딱지에 검은 게딱지가 붙은 것이 좋다. 검은 게딱지는 공생 관계에 있는 일종의 기생충으로 게딱지가 붙은 대게는 게딱지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4. 영덕산과 수입산을 구별하는 요령. 러시아산은 게딱지에 작은 팥알처럼 붙어 있는 하얀 색의 난낭이 있어 어느 정도 육안으로도 구별 할 수 있다.
◇대게 찌는 법=대게는 찜솥에 넣을 때는 죽어 있어야 한다. 살아있는 대게를 그대로 찌면 몸을 비트는 바람에 다리가 떨어지거나 몸통 속의 게장이 쏟아지게 된다. 찜솥의 김이 오르기 시작할 때 엎어서(등딱지가 밑에, 배가 위를 향하도록) 넣는다.
이렇게 하면 장이 밖으로 흘러내리지도 않고 고소한 내장의 맛이 살 에 골고루 스며들도록 찔 수 있다. 찌는 물 속에 정종이나 맥주를 조금 부으면 게 비린내를 제거할 수 있다.
[봉평 해수욕장~죽변항] 구간
탐방로에서 바라본
죽변항
죽변항
수령이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후정리 향나무
후정리 향나무에 관한
안내문
천주교 죽변공소(죽변교회)
죽변항 입구
죽변 등대 탐방로 입구에 있는
안내도
죽변 등대로 오르는
대나무 숲길
독도와
직선거리상 가장 가까운 항구인
죽변항
[ 울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216.8km이다. ]
죽변 등대
죽변 등대
소재지 : 경북 울진군 죽변면 등대길 52
동해의 꿈과 희망 100년을 비추는 죽변 등대는 1910년 11월 울진지역에서 최초로 건립된 등대다. 등탑의 구조는 평면 팔각형 콘크리트조 4층의 탑형 구조물(높이 15.6m)로 상부로 갈수록 체감되어 안정감과 수직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이 등대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인하여 등대 기능을 잃기도 하였으나, 1951년 10월에 등탑을 보수 복구하였으며, 1970년 4월 안개시 보내는 소리신호기(무신호기)를 설치하여, 안개나 풍우 속에서도 선박의 항로를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죽변 등대는 동해안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뱃길을 인도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이 지역의 랜드마크적 역할 뿐만 아니라 어민들의 애환과 역사를 담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전체적으로 벽면의 여러 선들과 형태요소들이 잘 조화되어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죽변만은 국토의 중간지점으로 용의 꼬리 형상의 용추곶에 등대가 위치하여 연안표지 역할을 하고 있다.
최초 점등일 : 1910-11-24
구조 : 백8각 콘크리트(16m)
등질 : 섬백광 20초 1섬광(FlW20s)
[행복한 바다]란 제목의
조형물에 관한
안내문
죽변 등대 앞에 있는
[행복한 바다]란 제목의 조형물
1910년 11월
울진지역에서 최초로 건립된 등대인
죽변 등대
죽변 등대
관리사무소 건물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인
어부의 집에 관한
안내문
[죽변등대 아래쪽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있는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세트장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현준과 현태의 집과 선착장, 대나무 숲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닷가 작은 마을은 1910년에 세워진 하얀 등대까지 어우러져 이국적인 정취가 그만이다. ‘세트장이 거기서 거기지’ 하고 가보지 않는다면 아까운 그림 하나 놓치는 셈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이국적이고 아름다워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집 뒤편으로는 드넓은 동해 바다가 아득히 펼쳐진다.]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인
어부의 집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주인공이었던
김석훈과 송윤아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 2004년 3월 13일부터 2004년 5월 30일까지 방영된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올인의 유철용 PD와 최완규 작가가 재회했고, 태국 로케이션 촬영도 진행하여 《올인》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겠다는 포부로 제작되었으나, 그만큼의 파급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망한 건 절대로 아니고, 상대적으로 올인에 비해서 부진했을 뿐 최고 시청률 25.4%까지 찍으며 이 드라마도 흥행에 성공했다.
다모를 통해 2003년 최고의 신인으로 급부상한 김민준의 다음 작품이라 기대를 모았고, 2002년 《선물》 이후로 2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송윤아는 당시 여배우 중 최고의 개런티를 보장받으며 출연을 확정지었다.
고래잡이를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남자와 그들에게 다가온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린 운명을 장중한 스케일로 그려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외환위기 이후 경제난국을 맞아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조명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
송윤아 : 차미선 역
선술집 작부 딸로 태어나 한 남자만을 사랑하지만 이별과 갈등을 겪고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비련의 여인.
김석훈 : 김현준 역
사법고시를 패스한 엘리트로 성공과 사랑을 동시에 지향한다.
김민준 : 김현태 역
명문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잘난 형에 가려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소년원을 드나드는 골칫덩어리. 격투기 선수가 되어 해외를 드나든다.]
어부의 집에서 바라본
죽변 해안 스카이레일
[죽변 해안스카이레일은 죽변 승하차장과 봉수항을 오가는 2.8km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동으로 움직이는 모노레일로 여유롭게 멋진 자연경관을 관람할 수 있다. 또한 푸른 산과 마음이 뻥 뚫리는 동해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 사계절 색다른 풍경과 절경이 펼쳐지는 죽변 해안스카이레일에서 잊지 못할 추억과 낭만을 만들 수 있다.]
어부의 집에서 바라본
죽변 등대
어부의 집에서 바라본
하트 해변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120-36 번지에 있는 하트 해변은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의 북쪽 해변으로서,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하트 해변 옆으로 죽변 해안 스카이레일이 지나간다.]
[어부의 집~죽변항] 구간
탐방로 도중의
용의 꿈길
용의 꿈길에 관한
안내문
[어부의 집~죽변항] 구간
탐방로 도중의
죽변 해심원온천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중앙로 168번지 1층에 있는
중식당 ‘천궁’
중식당 ‘천궁’에서 먹은
짜장면 곱배기
석양에 물든
죽변항
[울진의 북쪽 관문이자 해산물의 보고이며 동해안 어업전진기지인 죽변항의 옛 이름은 '죽진(竹津)'이다. 낙동정맥이 동쪽으로 뻗어 이룬 동해안 천혜의 항구이다. 죽변항을 에돌아 감싸고 있는 죽변곶 일대에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패총무지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삼국시대 당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죽변성 유적과 당시 사용했던 '전죽(箭竹; 대화살촉을 만든 시누대의 일종) 숲'이 해풍을 머리에 이고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동북아 수탈의 현장'인 죽변등대 구릉 일대에서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초기 '노'와 '목재선박 목편'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과 함께 울진 죽변항 일대가 동해연안 고대사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역사고고학적 유적지임을 확인시켰다.
지난 2010년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죽변등대 구릉 일대에서 출토된 목재 유물이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초기(BC 5500년 전)에 낚시 도구를 싣고서 물고기잡이에 쓰인 '목재 선박'과 '노(櫓)'로 확인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과 함께 죽변지역이 동해연안 고대사의 현장임이 재확인됐다.
'전죽' 숲은 "왜구퇴치를 위해" 고려시대에 조성된 군사용 대숲이다. 울진군은 전죽 군락지를 '대숲길'로 조성하고 '용의 꿈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죽변등대를 품고 해안절벽을 끼며 조성된 하늘을 덮은 대숲길에 들어서면 세상은 고요하고 오로지 절벽을 부딪는 푸른 파도소리뿐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전죽이 울진지방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어, 이의 군락지인 '대가실(죽변항 북동쪽 나들목)'은 국가적 요충지이자 외세 저항의 역사적 현장임을 보여준다.
'왜구퇴치를 위해' 고려시대에 조성된 전죽(箭竹) 숲을 돌아 나오면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과 '하트 해변', '죽변 등대'로 이름난 '죽변대가실' 해변을 만난다. 대가실 해변의 '하트 해변'은 청람빛 바다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는 울진바다의 정수이다. 두 발을 담그면 청람빛 바다가 금세 온 몸을 물들이듯 가슴 속엔 어느새 울진의 바다가 출렁인다.
바다 바람 속으로 '죽변항 스카이레일'이 흰 포말로 부숴지는 파도 위를 느릿한 속도로 지난다. '죽변항 스카이레일'은 동해안 어업전진기지인 죽변항과 봉개포구(봉수동, 烽燧洞), 후정해변을 잇는 '바다 위 레일'이다. 코로나19 기간에도 외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죽변항의 관광명소이다.
죽변항은 우리나라 동해안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울릉도와 직선거리상 가장 가까운 곳이다. 동해안에서 호미곶을 제외하고 바다로 가장 많이 튀어나와 있는 곳이 바로 죽변곶이다. 이에 따라 죽변 등대공원이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파도소리와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죽변곶에는 죽변 등대가 동해를 바라보며 우뚝 솟아 있다. 등탑의 높이는 16m로 백색의 8각형 콘크리트구조로 되어 있고, 불빛은 20초에 한번 반짝이며, 약 37㎞까지 불빛이 전달된다. 등탑은 2005년 9월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등탑 내부 천정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2023년11월26일(일요일) 해파랑길 [25코스 북쪽 구간&26코스] 탐방기 회비 25,100원 9월4일 결제 완료, 10열4번(맨뒤 우측 창가 좌석) 예약 산행대장 : 엄한길 / 010-5297-2911 탐방지 : 해파랑길 [25코스 북쪽 구간&26코스] 해파랑길 25코스 [기성버스터미널~(6.0Km)~기성망양해변~(3.7Km)~망양휴게소~(11.3Km)~망양정~(2.3Km)~수산교] [길이 23.3km, 소요시간 8시간 30분, 난이도 보통] 스탬프 QR위치 시점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 86-1 (기성공용정류장 옆) 종점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322-11 (수산교 남쪽) 코스 개요 - 해파랑길의 25번째 코스로 울진 구간 울진군 기성면에서 근남면을 잇는 길 - 기성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해 망양휴게소와 망양정을 지나 수산교에 이르는 구간 - 동해안을 벗삼아 시를 읊던 묵객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해안길 관광 포인트 - 송림과 맑고 얕은 수심으로 울진의 대표적인 해수욕장 기성망양해변 - 망양정 옛터와 현재의 근남면 망양정을 차례로 지남 - 울진의 특산물 대게를 홍보하기 위해 세워진 황금대게공원 - 스쿠버 다이빙과 수상스키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는 덕신해변 여행자 정보 - 울진 종합버스터미널에서 '기성'행 버스 이용, 기성 공용정류장 하차 - 다른 코스에 비해 매점, 쉼터, 화장실들이 중간마다 있어 수월하게 이용 가능 - 포장된 도로변을 걷는 코스로 안전에 주의 - 코스 내 7번 국도의 인기 휴게소, 전망대가 있는 망양휴게소를 지남 해파랑길 26코스 [수산교~(1.2Km)~울진엑스포공원~(3.7Km)~연호공원~(6.8Km)~봉평해변~(1.0Km)~죽변항 입구] [길이 12.7km 소요시간 5시간 난이도 쉬움] 스탬프 QR위치 시점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322-11 (수산교 남쪽) 종점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336-5 (죽변시외버스정류장 공중화장실) 코스 개요 - 해파랑길의 26번째 코스로 울진 구간 울진군 근남면에서 죽변면을 잇는 구간 - 수신교에서 시작해 울진엑스포공원과 연호공원, 봉평 해변을 지나 죽변항 입구에 이르는 걷는 길 - 두 개의 공원과 해변과 숲길, 등대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있는 길 관광 포인트 - 2005년 세계 친환경농업엑스포가 개최되었던 자연 생태계의 보고 울진엑스포공원 - 연꽃으로 유명하며 군민들의 산책공간이자 쉼터인 힐링 산책로 연호공원 - 소나무와 해당화 모래밭, 깨끗한 백사장으로 유명한 봉평 해변 - 폭풍 속으로 드라마 촬영지이자 1박2일 촬영지였던 죽변등대 여행자 정보 - 울진종합버스터미널에서 [울진-평해]행 버스 이용. 노음 정류장 하차 - 엑스포공원 바깥으로 코스가 이어져 있으나 공원을 관통하여 지나는 것을 추천 - 남대천의 경우 잠수교를 지나나 갈수기의 경우 물이 없어 모랫둑으로 이동 가능 - 연호공원은 7월 연꽃이 절정이며 공원 내에서 매점과 화장실 이용 가능 탐방코스: [덕신 해수욕장~(10.1km를 신사산악회 버스로 이동)~망양정해맞이공원 주차장2~(0.3km)~망양정 해맞이공원~(0.4km)~망양정~(0.4km)~망양정 해맞이공원~(1.4km)~수산교(해파랑길 25코스의 종점이자 해파랑길 26코스의 시점)~(1.1km)~울진 왕피천공원(울진 엑스포공원)~(0.9km)~염전해변 캠핑장~(0.5km)~울진 은어다리~(2.7km)~연호공원~(2.1km)~대나리항~(1.3km)~양정항(온양 방파제)~(2.6km)~골장항~(1.3km)~봉평 해수욕장~(0.6km)~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 전시관~(2.3km)~천주교 죽변교회~(1.1km)~죽변등대~(0.3km)~’폭풍속으로 드라마 세트장~(0.8km)~중식당 ‘천궁’~(0.2km)~죽변항] (총 30.3km 중 20.2km를 도보로 이동하고, 10.1km를 버스로 이동) 탐방일 : 2023년 11월 26일(일요일) 날씨 : 높은 구름이 낀 청명한 날씨 [울진군 근남면 최저기온 2도C, 최고기온 11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식사시간 포함 총 탐방시간 5시간40분 소요) 07:10~11:03 "신사산악회" 버스로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 5번 출구 앞에서 출발하여 경북 울진군 매화면 덕신리 414-1 번지에 있는 덕신 해수욕장 입구로 이동 (304km) [3시간53분 소요] 11:03~11:07 경북 울진군 매화면 오산리에 있는 덕신 해수욕장을 사진촬영 [덕신 해수욕장 :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덕신리에 있는 해수욕장. 백사장의 길이는 약 300m 정도이며, 규사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야영장, 민박, 주차장, 화장실 등이 갖추어져 있으며, 스쿠버다이빙과 수상스키 등 레저 활동도 가능하다. 덕신 해수욕장은 망향휴게소에서 울진 방면으로 3~4분쯤 가다가 매화-근남 간 해안도로 진입로에 위치해 있다. 인근의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다. 매화면 덕신리에서 근남면 수산교를 잇는 18㎞의 해안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덕신해수욕장을 끼고 있는 마을은 우렁쉥이(멍게) 양식을 주업으로 하고 있는데, 피서철이 되면 싱싱한 우렁쉥이를 즉석에서 잡아 판매하기도 한다. 울진읍 내에서 수시로 운행하는 평해행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덕신리에서 하차하면 된다. 인근 관광지로는 성류굴, 불영계곡, 망양정 등이 있다. 근처에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편이 발견된 유적지 등이 있고, 가까운 오산항에서는 싱싱한 활어회를 맛볼 수 있다.] 11:07~11:26 "신사산악회" 버스로 경북 울진군 매화면 덕신리 414-1 번지에 있는 덕신 해수욕장 입구를 출발하여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658 번지에 있는 망양정해맞이공원 주차장2로 이동 (10.1km 이동) 11:26~11:29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691 번지에 있는 망양정 해맞이공원으로 이동 [망양정 해맞이공원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해안과 망양정을 중심으로 조성된 관광 공원. 망양정 해맞이공원은 본래 일출 장소로 유명했던 곳으로, 해발 45m 정상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섬이나 다른 장애물이 없어 한눈에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인근 주민들은 공원이 조성되기 전부터 12월 31일과 1월 1일 해맞이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울진군에서는 경상북도 북부 유교 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인근 망양정(望洋亭)과 함께 아름다운 해안으로 알려져 있는 산포리 일대를 관광 상품화하기 위해 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공원의 중앙부에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으며, 해맞이 행사의 타종식을 위한 울진대종과 종각이 세워져 있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제12호인 박한종이 약 5개월에 걸쳐 높이 286㎝, 무게 7,518㎏의 대종을 2006년 12월 제작하였다. 서울대학교 정밀기계설계공동연구소에서 설계 및 감리를 담당하였고, 제작비는 약 2억 원이 소요되었다. 대종의 종명은 한글로 울진군을 상징할 수 있고 부르기 쉬운 이름인 울진대종으로 하고, 문양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의 아름다운 비천상을 응용하였다. 명문은 향토 출신 김명인이 맡아 울진군의 무궁한 발전과 화합을 염원하는 내용을 새겼다. 울진대종 옆에는 ‘소망나무 전망탑’으로 부르는 전망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 곳에 오르면 해맞이광장 全景과 망양정, 그리고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소망나무 전망탑’의 아래쪽에는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가 1943년 발표한 소설 ‘어린 왕자’의 등장인물인 어린 왕자와 어린 왕자가 지구에서 만난 동물들 중 하나인 사막 여우의 조형물이 있다. 망양정 해맞이공원은 대외적으로는 망양정과 산포리 해안을 널리 알리고, 대내적으로는 군민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2010년까지 정비 완료하였다. 망양정 주변을 정비하고 해맞이광장의 순환도로 공사와 함께 산포리 해안가로 내려갈 수 있는 산책길 등의 시설도 추가적으로 설치되었다.] 11:29~11:33 울진대종과 ‘소망나무 전망탑’에서 바라본 풍경을 사진촬영 11:33~11:36 바람소리길을 거쳐서 관동팔경(關東八景) 중 하나인 망양정(望洋亭)으로 이동 [망양정(望洋亭)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1번지에 있는 정자(亭子)로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꼽힌다. 소재지 :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716-1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의 정자이다. 고려시대에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망양리 해안가에 처음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이 흘러 허물어졌으므로 조선시대인 1471년(성종 2) 평해군수 채신보(蔡申保)가 현종산(縣鍾山) 남쪽 기슭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1517년(중종 12) 거센 비바람에 파손된 것을 1518년 중수하였고, 1590년(선조 23) 평해군수 고경조(高敬祖)가 또 중수하였으나 허물어진 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1854년(철종 5) 울진현령 신재원(申在元)이 이축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여러 해 동안 재정을 마련하지 못하여 추진하지 못하다가 1858년(철종 9) 울진현령 이희호(李熙虎)가 군승(郡承) 임학영(林鶴英)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광복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주춧돌만 남은 것을 1958년 중건하였으나 다시 퇴락하여 2005년 기존 정자를 완전 해체하고 새로 건립하였다. 망양해수욕장 남쪽의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동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정자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조선 숙종이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다. 또 정철(鄭澈)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망양정의 절경을 노래하였고, 숙종과 정조는 어제시(御製詩)를 지었으며, 정선(鄭敾)은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으로 화폭에 담는 등 많은 문인·화가들의 예술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11:36~11:41 조선 숙종이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을 하사한 망양정(望洋亭)과 망양정에서 바라본 풍경을 사진촬영 11:41~11:44 경북 울진군 근남면 산포리 691 번지에 있는 망양정 해맞이공원으로 회귀 11:44~12:01 경북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322-39 번지에 있는 수산교(왕피천에 놓인 다리)로 이동 [수산교는 해파랑길 26코스의 시점이자 25코스의 종점이다.] [왕피천(王避川)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과 울진군 온정면에 걸쳐 있는 금장산(金藏山, 849m)에서 발원하여 울진군을 지나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 왕피천의 길이는 60.95㎞이고, 유역 면적은 514.001㎢인 지방 1급 하천이다. 수비면 신원리·오기리·발리리 등을 지나면서 장수포천(長水浦川)이 되어 북동쪽으로 흐르고, 수하리에 이르러 통고산(通古山, 1,067m) 남쪽사면을 흘러 여러 수계를 묶어 흐르는 신암천(新巖川)을 합류하여 북쪽으로 흐른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울진군, 양양군 등 2개군 1개읍 4개면을 포함한다. 울진군 서면 왕피리 부근에서 심한 곡류를 하고, 통고산 동쪽사면을 흘러 동쪽으로 흐르는 수계를 합류하여 왕피리 한천마을에서부터 왕피천이라 불린다. 옛날 실직국(悉直國) 왕이었던 안일왕(安逸王)이 피난왔다고 해서 마을이름을 왕피리,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왕피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태백산맥을 북동쪽으로 관류하며 흐르다가 울진군 근남면의 선유산(仙遊山, 199m) 서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온 매화천(梅花川)과 합친다. 북쪽으로 흐르다 동쪽으로 흘러 온 광천(光川)과 노음리에서 합쳐 동쪽으로 흐르다가 수산리에서 동해로 흘러드는데, 2대지류 중 매화천은 금장산 북동사면에서 발원한다. 광천은 백병산(白柄山)과 오미산(梧味山)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삼근리·하원리·행곡리를 거쳐 흐른다. 왕피천 본류 주변에는 평지가 거의 없으나 세 하천이 합하는 하류지점에서는 비교적 넓은 곡간평야가 펼쳐진다. 식물구계학적으로 중부아구에 속하지만 지리적, 지형적 특이성으로 인해 북방계식물과 남방계식물이 혼생하는 식물상을 나타낸다. 석회암지대인 성류굴 부근에는 회양묵과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북방계 식물인 백리향이 자생하고 있다. 울진기생대의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기상연보를 분석할 결과 최한월 평균기온은 ·0.3℃, 최난월 평균기온은 24.4℃로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유형인 하우(夏雨)형에 속한다. 지질은 주로 선캄브리아대에 형성된 화강편마암, 수평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왕피천 하구에 매화리에 이르는 지역과 후포에서 하곡리에 이르는 지역에 석회암이 대상으로 분포해 있고, 특히 왕피천 하구 선유산에는 2억 5천만년의 종유굴이 형성되어 있다. 유역내 인구는 2006년 현재 13,181명이다. 매화천과 왕피천이 합류하는 선유산에는 196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석회동굴인 성류굴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든다. 광천변에 있는 하원리의 불영사(佛影寺) 계곡과 구룡폭포 또한 관광객의 발길이 잦은 명소이다.] 12:01~12:05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354 번지에 있는 울진 왕피천 공원(엑스포 공원)으로 이동 [울진 왕피천 공원은 자연생태계의 보고인 왕피천을 끼고,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굽어보는 동해 바다가 이웃하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한국 자연을 축소하여 옮겨놓은 듯한 아름다운 공원으로서, 계절 따라 특색 있는 꽃들이 가득하다. 도시민과 군민의 휴식공간은 물론, 우리나라 친환경 농업의 중심지! 말 그대로 청정낙원 엑스포 공원이다. 또 공원 안에는 유전자 보호림으로 지정된 200년 이상의 소나무 1,000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생태공원으로서, 사람들의 아름다운 손길이 보태져 자연을 찾아가는 현대인의 휴식처로서도 훌륭한 공원이다.] [울진엑스포공원 소재지 :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363-2 2005년 울진 세계친환경농업엑스포의 주행사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부지면적 16만 5,289㎡(사용가능면적 68만 992㎡)의 청정지역으로, 자연생태계의 보고인 왕피천이 흐르고, 수령 200년 이상의 소나무 1,000그루가 자생하고 있다. 전시관·영상관으로 구성된 친환경농업관과 아열대식물관, 허브체험관, 주공연장 등의 실내공간과 일반인에게 분양하는 주말농장·시골농장, 유기농경작지, 야생화관찰원, 자연예술동산, 생태터널 등의 야외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친환경농작물 수확체험행사와 주말장터 등도 운영된다.] 12:05~12:21 울진 왕피천 공원(엑스포 공원)을 탐방 12:21~12:26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76 번지에 있는 염전해변 캠핑장으로 이동 [염전해변 캠핑장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에 자리 잡았다. 울진군청을 기점으로 3km가량 떨어졌다. 자동차를 타고 강변로와 엑스포로를 번갈아 달리면 닿는다.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은 5분 안팎이다. 캠핑장은 울진 앞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공간에 위치했다. 캠핑장에는 데크로 이뤄진 오토캠핑 사이트 19면, 잔디블록이 깔린 일반캠핑 사이트 8면, 카라반 4대가 마련돼 있다. 카라반 내부에는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시설이 완비돼 있다. 주변에는 망양정해수욕장과 울진왕피천공원이 있어 연계 여행에 나서기 좋다.] 12:26~12:32 남대천을 건너는 다리인 울진 은어다리(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178-2)로 이동 [2015년 건설된 길이 243m, 폭 3m의 울진은어다리는 동해 울진 앞 바다와 만나는 남대천 하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대의 은어 서식지로 산란철이면 바다에서 강으로 회귀하는 반짝이는 은어 떼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이 다리의 이름과 모양도 은어에서 따왔다. 울진 은어다리는 銀魚 조형물이 다리 양쪽에 있는 보행교이다. 이 커다란 銀魚 조형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제작되었고, 다리 가운데에 여유로운 공간이 있어 남대천 수생식물과 울진항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다. ‘은어다리’는 낮에는 햇볕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이고, 밤에는 화려한 경관 조명으로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하기에 산책과 울진 지역 사진 명소로도 추천한다. 바다와 강이 맞닿은 곳에 조성된 '은어아치 보행교'를 배경으로 동해 위로 떠오르는 일출은 그야말로 '장엄'이다. 때문에 사철 전국의 사진 마니아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초입에는 공연을 할 수 있는 나무데크가 있고 인근에 울진 왕피천공원과 울진 염전해변, 망양정이 있다.] 12:32~12:58 경북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에 있는 연호공원으로 이동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 자연호수 연호(蓮湖) 주변에 조성되었다. 2006년 8월 조성 사업에 착수하여 2007년 6월 9일 개장하였다. 약 16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면적 9,900㎡에 야외무대, 잔디광장, 휴게시설, LED 조명시설 등을 갖추고, 나무 3,000주와 울진 금강송 13주를 심었다. 2008년 9월 10일 주변의 청소년수련관, 울진체육관 등과 연계된 시설로서 공원 내에 울진과학체험관을 착공하였다. 특히 울진과학체험관 건물의 외양은 대폭발로 우주가 형성됐다는 빅뱅론의 근원이 되는 우주알(COSMIC-EGG)의 원시적 형태를 형상화했으며, 주변엔 전망대와 항공기 야외 전시장도 있다. 연호(蓮湖) 가운데 ‘달에 비친 연꽃’이란 뜻을 담은 월연정(月連亭)이 있고, 월연정과 호숫가는 어락교(魚樂橋)가 연결한다. 어락교(魚樂橋)가 끝나는 호숫가에는 연호정(蓮湖亭)이 있다. 연호(蓮湖)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연꽃이 많은 호수다.] 12:58~13:12 연호공원을 탐방 13:12~13:26 경북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 8-13 번지에 있는 대나리항으로 이동 [대나리항길을 따라 있는 방파제에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Saint-Exupery)의 동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주요 명언들을 그림과 함께 적어 놓았다. 주요 명언들은 다음과 같다. “아이들만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언어는 오해의 근원이다.” “내 비밀은 바로 이거야. 정말 간단해. 마음으로 볼 때만 진정으로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마음으로 보아야만 분명하게 볼 수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사막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거야.” “한 사람이라도 큰 성당의 이미지를 품고 돌무더기를 본다면, 그 순간 더 이상 그것은 돌무더기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이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다.” “당신이 배를 만들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지시하고 일감을 나눠주는 일을 하지 말라.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줘라.” “계획 없는 목표는 한낱 꿈에 불과하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공허해. 누가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나의 꽃도 지나가는 사람에겐 너희들과 똑같겠지. 그렇지만 나에겐 그 꽃 한 송이가 너희 모두를 합친 것보다 소중해. 내가 직접 물을 준 꽃이니까.”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것을 각오하는 것이다.” “나는 오직 하나의 자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정신의 자유다.” ] 13:26~13:39 경북 울진군 울진읍 온양리 301-4 번지에 있는 양정항(온양 방파제)으로 이동 [양정항은 작은 항구지만 여행객들이 미항으로 손꼽는 곳이다. 갖가지 형상으로 바다에서 고개를 내민 갯바위들이 치명적인 자태를 뽐내고, 일출 땐 해가 바다를 때리며 다른 해안과 달리 짙고 옅음을 잘 표현한다는 말이 있다. 다만 양정항은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인지 일부 포털 사이트에 온양 방파제라고 검색해야 함께 나오는 곳이다. 물론 배의 정박 시설이 없어 항구라기보다는 방파제로 보는 것이 더 어울리지만, 서정적인 해변과 파도 소리가 정겹기만 해 여행객이 꼭 들를 만한 곳이다.] 13:39~13:41 양정항(온양 방파제) 주변 풍경을 사진촬영 13:41~14:03 경북 일진군 죽변면 봉평리 266-2 번지에 있는 골장항으로 이동 [골장항은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 있는 어항이다. 1984년 3월 12일 지방어항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시설관리자는 울진군수이다. 계절풍에 의한 NE계 외해파랑이 본항에 직접적 영향을 미쳐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일찍부터 주민 생활 근거지로 발전하여 1984년 2월 12일 2종어항으로 지정하였다. 골장항 방파제는 낚시꾼들에게 꽤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가장 많이 잡히는 魚種은 놀래미라고 한다.] 14:03~14:18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 있는 봉평 해수욕장으로 이동 [봉평 해수욕장은 울진에서 7km의 거리로, 백사장 길이는 2km 정도이다. 이곳에서의 낚시는 백사장과 약 2km 떨어진 죽변 방파제 낚시를 첫손에 꼽는다. 이 방파제는 평상시에는 외항 쪽으로 던질낚시와 막장 대낚시에 가자미, 망상어, 벵에돔 등이 낚이고 파도가 있는 날에는 내항 쪽을 노려야 한다. 봉평리 백사장 남단에서 아래쪽 동대암까지도 던질낚시와 갯바위 낚시의 포인트이다.] 14:18~14:24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화길 15 번지에 있는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 전시관으로 이동 14:24~14:39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제242호) 전시관을 관람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비로서, 현재까지 남한에서 발견된 고비(古碑) 중 가장 오래된 석비이다. 문화재 지정 : 국보 제242호 건립시기 : 524년 소재지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화길 15(봉평리) 관람료 : 무료 개장시간 :10:00시~17:00시 개설 1988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88년 4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석질은 변성화강암으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며, 비의 제작 당시 이미 몇 군데 금이 나 있었으므로 이를 피해 글을 새겼다. 그러나 비가 지상에 노출되지 않고 오랫동안 땅속에 파묻혀 있었던 탓인지 파손 없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비석으로 판명되기 전 돌을 옮기는 과정에서 포클레인에 의해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비편도 발견되어 완형을 갖추고 있다. 한 면에만 약간의 인공을 가해 글자를 새겼다. 이 비가 발견된 울진지역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강원도 울진현이며, 이곳과 관련된 비문상의 지명은 거벌모라(居伐牟羅), 남칭지촌(男称只村), 갈시조촌(葛尸條村), 아대혜촌(阿大兮村)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곳과 관련된 지명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울진 바로 옆의 ‘건이치(建伊峙)’. 『여지도서(與地圖書)』 강원도 울진현의 산천조에 갈령(葛嶺)이 보이고 있어 연관성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여지도서』 울진조의 각 면에 소속된 촌·리의 명칭 가운데 원남면(遠南面)에 소속된 ‘갈면리(葛面里)’란 명칭은 갈시조촌과의 상관성을 연상하게 하고 서면(西面)의 ‘남회룡리(南回龍里)’는 남칭지촌과의 관계를 상정하게 한다. 내용 비의 높이는 204㎝, 글자가 새겨진 면의 윗너비 32㎝, 가운데너비 36㎝, 밑너비 54.5㎝로 전체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부정형(不整形)이다. 비문의 구성은 전체 10행으로 행마다 글자 수가 달라 1행 31자(하부 일부가 파손되어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그렇게 추정됨.),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로 전체 글자 수는 모두 398자로 추정된다. 그러나 논자에 따라서는 1행을 32자 또는 33자로 보아 399자 또는 400자로 보기도 한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풍(北朝風)의 해서(楷書)로 되어 있으나, 자획의 형태에는 예서(隷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비문 자체는 대체로 양호하나 이자체(異字體)가 많고 또 일부는 마멸되어 읽기 어려운 글자가 30여 자에 달한다. 문체(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을 사용해 해석상 애매한 곳이 적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 파악은 상당히 어렵다. 그 까닭으로 논자에 따라 견해 차이를 심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대충 짐작할 만하다.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에 대군(大軍: 중앙군을 의미함)을 일으킬 만한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이 사건을 해결한 뒤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법흥왕)과 13명의 신료들이 그에 대한 사후처리로서 이 지역에 모종의 조처를 취하고, 소(斑牛)를 죽이는 등 일정한 의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장육십(杖六十)·장백(杖百)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 비문 내용의 줄거리이다. 비의 성격에 대해서는 국왕이 순행한 것으로 보고 순행비(巡行碑)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율령에 관련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아 율령비(律令碑)로 보려는 견해 등 한결같지가 않다. 비문의 전체적인 구조는 550년대에 건립된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와 상당히 유사해 이들 사이에 어떤 공통성을 볼 수 있는데, 520년(법흥왕 7) 율령이 반포된 뒤 한동안 같은 성격의 비문 작성에 일정한 정형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특징 이 비는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비보다 많은 글자 수를 보유해 내용이 풍부하고, 문헌사료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따라서 6세기를 전후한 신라사의 이해를 보다 심화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동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던 법흥왕 때의 율령을 둘러싼 문제들이 해명될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게 되었다. 비에는 영(令)뿐만 아니라 율(律)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장육십·장백이 보여 법흥왕 7년에 반포한 율령의 실재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것이 신라사회에 기능하는 폭넓은 내용을 가진 성문법전(成文法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노인법(奴人法)과 같은 율령의 한 편목(篇目)은 이 비의 성격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 신라에 복속된 지방민을 대상으로 한 율령의 편목이라 생각되나 구체적인 내용 구명은 앞으로의 과제라 하겠다. 여기서 노인(奴人)은 원래는 비신라계였다가 신라에 점령당해 포로로서 집단적으로 복속되면서 집단적으로 노예적 존재가 된 집단적 예속민으로 보인다. 노인법이란 이러한 집단적 예속민을 대상으로 한 법령으로 국가가 노인촌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부담지우는 것을 명문화한 것으로서 율령의 한 편목(篇目)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세운 목적은 6세기 초 이래 영토를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520년에 반포된 율령을 새로이 영토로 편입된 지역에도 시행함으로써 그 지역을 신라적인 지배질서로 전환하고자 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 신라사의 이해를 위한 큰 고리의 하나는 왕경의 육부(六部)에 대한 문제였는데, 그 성립연대나 과정 및 성격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 육부의 성립시기를 대체적으로 6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그러나 이 비에 신라 육부라는 말이 보이고 있어 성립 하한선이 6세기 초임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5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소급해볼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리고 성격에 대해서도 일치된 견해가 없어, 이를 혈연적인 성격의 씨족 혹은 부족 조직으로 보거나, 아니면 왕도의 지역적 구분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 비에 국왕인 법흥왕은 탁부(啄部)를, 그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 立宗葛文王)은 사탁부(沙啄部)를 관칭(冠稱)해 형제가 부를 달리하고 있어 부의 성격을 전반적으로 새롭게 검토해볼 여지를 마련해준다. 이에 대해서 눌지왕대부터 탁부 소속의 매금왕이 사탁부까지 통합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사금 시기(尼師今時期)에 갈문왕에 봉해진 인물들은 주로 왕비나 왕모의 부(父)였다. 그러나 마립간 시기(麻立干時期)부터는 왕의 동생이나 친족이 갈문왕에 봉해지고 매금왕은 탁부에 갈문왕은 사탁부에 소속한 관행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냉수리비와 봉평비를 통해 사탁부 소속의 관리들이 탁부 소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등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사탁부가 매금왕의 직접적인 관할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셋째, 본피부(本彼部), 사피부(斯彼部), 잠탁부인(岑喙部人)이 칭한 간지(干支)를 부의 지배자인 부주(部主)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관등(官等)이나 직명(職名)의 의미로 이해해서 왕의 지휘와 감독을 받는 관리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에 따라 6세기 초반 6부의 성격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운영이나 지배구조에 대한 이해를 달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간지’의 성격을 부주로 이해하면, 당시 6부가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지닌 부집단을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는 체제라고 규정할 수 있다. 반면 이들을 후자의 성격으로 이해한다면, 당시 6부는 단지 왕경의 행정구역으로만 기능하였고, 왕권이 권력의 중심에 있는 중앙집권적인 정치구조를 기초로 하는 사회였다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당시 국왕의 지위와 왕권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국왕도 부에 소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관료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어떤 정책을 결정한 듯하다. 이는 당시 신라 국왕이 아직 초월적 권력자로 부상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 비는 그와 같은 국왕의 지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의의와 평가 이 밖에 신라 17관등(官等)의 성립연대문제나 지방통치조직 및 촌락구조, 그리고 복속민에 대한 시책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여러 면들을 재검토해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지금까지 알려진 어떠한 비보다 학문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전시관은 총 3개의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실물을 전시하고 비의 발견과정과 해석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제2전시실에는 고구려, 신라, 백제 등 삼국의 비 7기와 백제무령왕릉 지석, 임신서기석 등 9종 10점이 실물모형으로 제작 전시 되어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우리나라 금석학의 계보, 시대별 비의 양식, 한자과 한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야외에는 울진지역의 송덕비 45기를 모은 비석거리와 삼국~조선시대에 이르는 국보 또는 보물급 석비와 고구려 평양성 석편을 실물모형으로 전시한 야외비석공원이 있다. 비석거리에는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평해군수, 울진현령 등을 지낸 지방관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세운 선정비와 불망비, 송덕비들이 있다. 조선시대 평해군의 비 9기와 울진현의 비 36기를 합하여 총 45기를 2010년 10월에 이곳으로 이전하여 비석거리를 만들었다. 야외비석공원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경주 신라 태종무열왕릉비 등 우리나라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국보, 보물급 30기의 비와 고구려 평양성 석편과 경주 숭복사지 쌍귀부를 실물모형으로 제작해 우리나라 지도 모양의 야외공원에 各 비의 발굴 위치에 맞게 세워서 전시하고 있다. ] 14:39~15:03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중앙로 151-3 번지에 있는 천주교 죽변교회로 이동 15:03~15:17 죽변 등대로 이동 [죽변 등대 소재지 : 경북 울진군 죽변면 등대길 52 동해의 꿈과 희망 100년을 비추는 죽변 등대는 1910년 11월 울진지역에서 최초로 건립된 등대다. 등탑의 구조는 평면 팔각형 콘크리트조 4층의 탑형 구조물(높이 15.6m)로 상부로 갈수록 체감되어 안정감과 수직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이 등대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중 폭격으로 인하여 등대 기능을 잃기도 하였으나, 1951년 10월에 등탑을 보수 복구하였으며, 1970년 4월 안개시 보내는 소리신호기(무신호기)를 설치하여, 안개나 풍우 속에서도 선박의 항로를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죽변 등대는 동해안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뱃길을 인도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이 지역의 랜드마크적 역할 뿐만 아니라 어민들의 애환과 역사를 담고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전체적으로 벽면의 여러 선들과 형태요소들이 잘 조화되어 안정감과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죽변만은 국토의 중간지점으로 용의 꼬리 형상의 용추곶에 등대가 위치하여 연안표지 역할을 하고 있다. 최초 점등일 : 1910-11-24 구조 : 백8각 콘크리트(16m) 등질 : 섬백광 20초 1섬광(FlW20s)] 15:17~15:18 죽변 등대를 사진촬영 15:18~15:24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경북 울진군 죽변면 등대길 74-14)으로 이동 [죽변등대 아래쪽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있는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세트장이다. 드라마의 주인공 현준과 현태의 집과 선착장, 대나무 숲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바닷가 작은 마을은 1910년에 세워진 하얀 등대까지 어우러져 이국적인 정취가 그만이다. ‘세트장이 거기서 거기지’ 하고 가보지 않는다면 아까운 그림 하나 놓치는 셈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이국적이고 아름다워 탄성이 절로 나온다. 집 뒤편으로는 드넓은 동해 바다가 아득히 펼쳐진다.]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 2004년 3월 13일부터 2004년 5월 30일까지 방영된 SBS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올인의 유철용 PD와 최완규 작가가 재회했고, 태국 로케이션 촬영도 진행하여 《올인》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겠다는 포부로 제작되었으나, 그만큼의 파급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망한 건 절대로 아니고, 상대적으로 올인에 비해서 부진했을 뿐 최고 시청률 25.4%까지 찍으며 이 드라마도 흥행에 성공했다. 다모를 통해 2003년 최고의 신인으로 급부상한 김민준의 다음 작품이라 기대를 모았고, 2002년 《선물》 이후로 2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송윤아는 당시 여배우 중 최고의 개런티를 보장받으며 출연을 확정지었다. 고래잡이를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남자와 그들에게 다가온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린 운명을 장중한 스케일로 그려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외환위기 이후 경제난국을 맞아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조명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 송윤아 : 차미선 역 선술집 작부 딸로 태어나 한 남자만을 사랑하지만 이별과 갈등을 겪고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비련의 여인. 김석훈 : 김현준 역 사법고시를 패스한 엘리트로 성공과 사랑을 동시에 지향한다. 김민준 : 김현태 역 명문대 법학과를 나와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잘난 형에 가려 가족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소년원을 드나드는 골칫덩어리. 격투기 선수가 되어 해외를 드나든다.]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120-36 번지에 있는 하트 해변은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의 북쪽 해변으로서,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하트 해변 옆으로 죽변 해안 스카이레일이 지나간다.] [죽변 해안스카이레일은 죽변 승하차장과 봉수항을 오가는 2.8km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동으로 움직이는 모노레일로 여유롭게 멋진 자연경관을 관람할 수 있다. 또한 푸른 산과 마음이 뻥 뚫리는 동해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 사계절 색다른 풍경과 절경이 펼쳐지는 죽변 해안스카이레일에서 잊지 못할 추억과 낭만을 만들 수 있다.] 15:24~15:29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 하트해변, 죽변 등대, 죽변 해안스카이레일 등을 사진촬영 15:29~15:46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중앙로 168번지 1층에 있는 중식당 ‘천궁’으로 이동 15:46~16:39 중식당 ‘천궁’에서 짜장면 곱빼기(7천원)로 식사 16:39~16:43 해파랑길 27코스의 시점이자 26코스의 종점인 죽변항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울진의 북쪽 관문이자 해산물의 보고이며 동해안 어업전진기지인 죽변항의 옛 이름은 '죽진(竹津)'이다. 낙동정맥이 동쪽으로 뻗어 이룬 동해안 천혜의 항구이다. 죽변항을 에돌아 감싸고 있는 죽변곶 일대에는 청동기시대 유물인 패총무지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삼국시대 당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죽변성 유적과 당시 사용했던 '전죽(箭竹; 대화살촉을 만든 시누대의 일종) 숲'이 해풍을 머리에 이고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일본의 동북아 수탈의 현장'인 죽변등대 구릉 일대에서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초기 '노'와 '목재선박 목편'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과 함께 울진 죽변항 일대가 동해연안 고대사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역사고고학적 유적지임을 확인시켰다. 지난 2010년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죽변등대 구릉 일대에서 출토된 목재 유물이 8000년 전 신석기 시대 초기(BC 5500년 전)에 낚시 도구를 싣고서 물고기잡이에 쓰인 '목재 선박'과 '노(櫓)'로 확인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과 함께 죽변지역이 동해연안 고대사의 현장임이 재확인됐다. '전죽' 숲은 "왜구퇴치를 위해" 고려시대에 조성된 군사용 대숲이다. 울진군은 전죽 군락지를 '대숲길'로 조성하고 '용의 꿈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죽변등대를 품고 해안절벽을 끼며 조성된 하늘을 덮은 대숲길에 들어서면 세상은 고요하고 오로지 절벽을 부딪는 푸른 파도소리뿐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전죽이 울진지방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어, 이의 군락지인 '대가실(죽변항 북동쪽 나들목)'은 국가적 요충지이자 외세 저항의 역사적 현장임을 보여준다. '왜구퇴치를 위해' 고려시대에 조성된 전죽(箭竹) 숲을 돌아 나오면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과 '하트 해변', '죽변 등대'로 이름난 '죽변대가실' 해변을 만난다. 대가실 해변의 '하트 해변'은 청람빛 바다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주는 울진바다의 정수이다. 두 발을 담그면 청람빛 바다가 금세 온 몸을 물들이듯 가슴 속엔 어느새 울진의 바다가 출렁인다. 바다 바람 속으로 '죽변항 스카이레일'이 흰 포말로 부숴지는 파도 위를 느릿한 속도로 지난다. '죽변항 스카이레일'은 동해안 어업전진기지인 죽변항과 봉개포구(봉수동, 烽燧洞), 후정해변을 잇는 '바다 위 레일'이다. 코로나19 기간에도 외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죽변항의 관광명소이다. 죽변항은 우리나라 동해안 항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울릉도와 직선거리상 가장 가까운 곳이다. 동해안에서 호미곶을 제외하고 바다로 가장 많이 튀어나와 있는 곳이 바로 죽변곶이다. 이에 따라 죽변 등대공원이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파도소리와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죽변곶에는 죽변 등대가 동해를 바라보며 우뚝 솟아 있다. 등탑의 높이는 16m로 백색의 8각형 콘크리트구조로 되어 있고, 불빛은 20초에 한번 반짝이며, 약 37㎞까지 불빛이 전달된다. 등탑은 2005년 9월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등탑 내부 천정에는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원래는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16:43~17:10 휴식 17:10~21:03 "신사산악회" 버스로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390-250 번지에 있는 죽변항을 출발하여 서울 지하철 3호선 신사역으로 이동 (283km) [3시간53분 소요] 해파랑길 25코스 지도 해파랑길 26코스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