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복음 루카 1,26-38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많은 이들이 집착이 없는 삶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떻게 쉽겠습니까? 그런데 이 집착에서 벗어날 때 훨씬 더 큰 힘을 가질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중국의 현자인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궁수가 질그릇을 걸고 활을 쏘면 질그릇은 흔하기 때문에 자기 기술을 다 발휘할 수 있다. 허리띠 고리를 걸고 내기를 하면 귀한 물건이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다. 황금을 걸고 내기하면 눈이 흐려지고 정신을 잃는다. 그의 기술은 변하지 않았으나 보상에 대한 애착이 그를 분열시킨다. 아껴야 할 물건이 있게 되면 물건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활쏘기보다는 보상금을 더 생각하게 된다. 밖의 물건으로 마음이 기울면, 속마음은 졸렬해지고 힘도 빼앗긴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상을 얻고자 하는 집착의 마음이 생기면 우리는 잘 하던 것도 미숙한 모습으로 빠질 수 있게 됩니다. 문득 제 동창신부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이 신부는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방이 틀린 말을 하는 것 같으면 곧바로 이렇게 말하지요.
“만 원 내기할래?”
이처럼 처음에 그렇게 맞다고 주장했던 사람들도 이 말에 꼬리를 내리곤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말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굳이 내기까지 하면서 주장할 필요도 없는 것 같고 또 상대방이 이렇게 내기까지 걸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무런 내기가 걸려있지 않다면 끝까지 자신의 뜻을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어떤 것에 집착이 없어질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되며, 큰 힘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착에 빠지게 될 때 힘이 사라져서 할 수 있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듣고는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갖는다는 것, 당시에 이렇게 되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거부해야 할 상황입니다. 또한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하느님을 낳아야 한다는 큰 부담감으로 인해서 “저는 도저히 못해요.”라고 부정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기억하면서 자신 안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혹과 불안감에 대한 집착을 버리시고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집착에서 버렸기에 큰일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우리 역시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집착이 사라졌을 때, 자유로움과 함께 큰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곤경에 빠지더라도 거기에 억눌리지 않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절대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약간의 희망은 마침내 용기 있는 사람을 그 곤경에서 구출해주는 길잡이로 작용한다(타키투스).
모든 집착을 버리고 주님께 향한 성모님을 묵상합시다.
말 뒤집어 세상의 이치를 배우기(최천호)
‘성실’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쳐 '실성'하고,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금지’ 당할 날이 오며,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상실'의 아픔을 겪을 수 있지요.
‘체육’으로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육체’를 잃을 수 있으며, ‘관습’을 타파하지 않으면 나쁜 ‘습관’에 얽매여 살게 됩니다.
‘작가’로서의 기질을 보여주지 않으면, ‘가작’도 탄생시킬 수 없으며 ‘일생’을 목숨 걸고 살지 않으면 ‘생일’조차 변변히 맞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똑바로 살지 않는 것은 ‘상세’하게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사상’을 똑바로 세우지 않으면 ‘상사’가 되어서도 무시당합니다.
‘사고’하지 않으면 ‘고사’당하고, 세상의 소음과 ‘단절’하지 않으면 인생이 ‘절단’날 수 있으며, ‘성품’을 곱게 가꾸지 않으면 ‘품성’마저 망가지죠.
‘문인’들의 세계를 파고들지 않으면, ‘인문’의 세계로 진입할 수 없으며, ‘성숙’의 시간을 마련하지 않으면 절대로 사랑이 ‘숙성’되지 않습니다.
‘수고’하지 않으면 ‘고수’가 될 수 없으며, ‘변주’하는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면, ‘주변’에서 영원히 서성거릴 수 있습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역경’을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되며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됩니다.
그리고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되지요.
모든 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말, 늘 나 자신에 가까이 두고 우리 모두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틴어 속담에도 ‘역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집착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역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말만 뒤집어도 세상을 잘 살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모영보성당 내부.
오늘 동정녀 마리아는 아기를 가지리라는 천사의 말에 이렇게 수락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런 대답을 하기까지 마리아는 얼마나 깊게 고심했겠습니까? 만일 아기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앞날에 미치는 영향을 곰곰이 생각했더라면 도저히 승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리아가 받아들인 이유는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성경을 보면, 황당하게 여겨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른 분들이 많이 있지요. 아브라함은 75세에, 낯선 땅으로 떠나라는 말씀을 듣고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까? 그런데도 끝까지 하느님 말씀을 따르다 보니, 결국 시련은 복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도 너무나 많지요. 그래도 많은 분이 이런 일들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하느님께서 그분들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치고, 더는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을 맞았더라도,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하느님께 매달려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성모님처럼 하느님과 일치되는 큰 선물을 받게 되리라 믿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신학교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의 면접이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인성, 지성, 건강, 영성’을 갖춘 학생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인성과 영성은 예비 신학생 모임과 면담을 통해서 파악하게 됩니다. 건강은 건강검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공통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학능력 시험을 통해서 드러난 지성입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적정 수순의 지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지표는 수학능력 시험의 결과입니다.
모든 것을 고려해서 신학교에 지원할 수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면접의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추천서를 받아든 학생들은 결과에 만족하며 돌아가지만 추천서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은 풀이 죽은 모습입니다. 어떤 학생들에게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도 하고, 어떤 학생들에게는 다른 길이 있음을 권하기도 하고, 어떤 학생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 주기도 합니다.
면접을 하면서 3명의 학생이 추천서를 받은 본당을 보았습니다. 11명의 신학생이 있는 본당은 곧 14명의 신학생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 본당을 방문하였었고, 본당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성소자들이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과 보좌 신부님께서 좋은 표징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학생들을 영적으로 이끌어 주시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셨습니다. 신학생들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본당에 숙소를 마련하셨습니다. 본당 성소 후원회에도 기도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비가 자주 내리면 풀이 더욱 우거지듯이, 기도로 함께하니 성소자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선배들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복사들 중에서 공부를 잘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친구들은 당연히 신학교에 가는 전통이 생겼다고 합니다. 가정에서의 기도가 함께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듯이, 사랑하는 자녀가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부모님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표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표징은 불가능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표징은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 있고, 물 위를 건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표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리아는 곰곰이 생각하였고,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에 대한 응답은 ‘순명’입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는 2000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바로 의미의 시간, 가치의 시간, 영원의 시간, 부활의 시간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었어도 다시 살 것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하느님의 시간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말씀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 사랑의 표징이 되기를 바라면서 백범 김구 선생님께서 평생 마음에 담았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