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마태오 25,31-46
내 주위 카인과 아벨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심판을 이기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이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웃사랑을 하라는 것인데, 여기서 신중하게 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그리스도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십니다.
인간은 본성상 피조물이기 때문에 먼저 생존에 대해 걱정합니다.
내가 생존하려면 다른 이의 생명을 먹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랑이 나올 수 없습니다.
어떤 아이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두 가지 때문입니다.
먼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기 때문이고
그 다음은 부모에 의해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선이라고 할 것도 없이 결국엔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부모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형제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생존을 위해 형제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는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브리타니아에서 전쟁 중 사망하면서 시작됩니다.
사실 아우렐리우스는 망나니 아들들보다 피 한 방울, 혈통 하나 없는 당시 최고의 장군인 막시무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합니다. 이것을 질투한 아우렐리우스의 막내아들 컴모두스는 갈등합니다.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막시무스를 죽이려합니다. 코모두스는 황제가 되고 막시무스는 가족을 잃었지만, 결국 유명한 검투사가 되어 코모두스에게 복수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왜 카인은 아벨을 죽였을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존에 대한 걱정이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지만 그 안에 감사가 섞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이 적어지니 당연히 형제에 대한 사랑도 줄어듭니다.
그렇게 형제를 살해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모두가 생존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나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하느님을 믿고 사랑해야만 합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도 사실은 그 부모를 주신 하느님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십계명을 지키고 그러면 부모를 공경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카인과 같은 부류가 확실합니다.
카인은 사실 아벨을 살해하기 위해 먼저 하느님을 저버린 인물의 대명사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믿지 마십시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7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마태오 25,31-46
고통받는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시금 활짝 꽃피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근원적 결핍과 근본적 나약함을 지닌 우리이기에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다양한 고통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때로 그 고통의 강도가 너무 세서 울부짖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혹독한 환난 중에 앉아 있는데, 이렇게 참혹한 곤경에 빠져있는데, 주님께서는 대체 어디 계시는 건가요?
대체 계시기나 한건가요?’
작게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오늘 우리뿐만 아니라 위대한 성인 성녀들께서도 자주 심각한 주님 부재 체험으로 힘겨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양과 염소’ 관련 비유 말씀은 때때로 주님께서 아니 계신 듯하여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좋은 힌트 하나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임마누엘 하느님, 우리 인간과 언제나 함께 계시는 분, 우리와 나란히 길을 걸어가시는 분,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지니신 분,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겪으시고 상처를 입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5~36절)
따지고 보니 그토록 뵙기 힘들었던 주님께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숨어 계셨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도처에 현존해 계셨습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서 무료급식소 봉사를 가면, 그곳에서 굶주리고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을 내서 가출청소년 쉼터에 간식이라도 사서 가면, 그곳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떨고 있는 주님을 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민 가득한 마음을 안고 병실을 찾으면 그곳에서 너무 아파서 신음 중인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꽤나 부담스럽지만 씩씩하게 교도소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 답답해하시는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상 생활 내내 다양한 결핍과 고통 속에 허덕이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우리보다 더 힘겹게 살아가는 동료 인간을 향해 지속적으로 시선을 돌릴 일입니다.
‘내코가 석자’인데! 라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런 우리의 작지만 한결같은 이웃사랑의 실천은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고통에서 벗어날 힘을 선물로 줄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겠지만,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큰 고통은 우리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향한 우리들의 사심 없는 봉사를 통해 서서히 치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 우리가 그토록 뵙고 싶어했던 주님께서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치유하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치유하고 구원해주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시며, 우리에게 다시금 시작할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결국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생기를 더해줄 것이며 우리 인생을 다시금 활짝 꽃피어나게 해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월요일>
(2023. 2. 27. 월)(마태 25,31-46)
<최후의 심판>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4-45)”
여기서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인들입니다.
또 “나는 신앙생활을 잘했다.” 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멸망을 선고받는 것을 수긍하지 못하고, 왜 그런 선고를 내리시느냐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의 뜻은, “주님께서 언제 그런 곤궁한 처지에 계셨습니까?”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런 처지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으면 자기들은 기꺼이 주님을 도와드렸을 것이라고, 몰라서 못한 것이라고 변명하는 말입니다.
주님의 처지를 몰랐다는 것은,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 무관심한 채로 살았음을, 즉 사랑 없이 살았음을 나타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처지에 계신 적이 없었다고 주님의 말씀을 반박하는 말일 수도 있는데, 그런 뜻으로 한 말이라면, 주님의 심판이 잘못되었다고 주님을 비난하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주님을 주님으로 섬긴 것이 아니었음을, 즉 올바른 신앙인이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너희 곁에 있는 ‘가장 작은 이’가 바로 나다.”, 또는 “나는 ‘가장 작은 이’로 너희 곁에 있다.”입니다.
‘작은 이’를 밀어내는 것은 ‘주님’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점에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하느님의 뜻’ 가운데에서 첫 번째는 ‘사랑’입니다. 신앙인이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인이라는 것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여기서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켰다는 그들의 말은,
‘그들의 주장’일 뿐이고, 주님께서 그 일들을 인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런 일을 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심판을 받는다면, 그러면 ‘신앙 없는 사랑’은 어떤 심판을 받게 될까?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들보다 더 착하게 살고, 신앙인들보다 더 많이 사랑 실천을 한 사람들은 심판 때 어떻게 될까?
우리는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또 복음을 전해 준 이가 없어서, 예수님을 모르고 살아야 했던 사람과 예수님을 알았으면서도 믿기를 거부한 사람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은,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구원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사람은, 자기가 거부함으로써
그 나라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선행과 사랑 실천은 아무 쓸모가 없는가? 종교와 신앙과 상관없이, 선행은 선행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거부했더라도 선행과 사랑 실천을 인정받는다면 지옥은 피하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다른 문제입니다.
어떻든 우리에게(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과 사랑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고서 예수님께서 사랑만 강조하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오해하다가 신앙의 중요성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 실천만 잘한다면 신앙이 없어도 괜찮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에게는 사랑 실천을 강조하셨지만,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실현되고, 사랑은 믿음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 때의 일에 관한 말씀이라는 점만 생각해서 ‘나중의 일’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나중의 일’이 아닙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의 ‘지금의 삶’이 심판결과를 결정합니다.
믿는 일도, 사랑을 실천하는 일도, 모두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어제까지 안 했다면, 오늘 회개하고, 오늘 실천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일로 미루면 안 됩니다.
“나는 나중에 믿겠다. 나는 나중에 사랑하겠다.” 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지금 안 믿고 있고, 지금 사랑 실천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 될 뿐입니다.)
“나는 지금 믿고 있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다.”가 되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