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3:1 붙잡아 할 2가지
도시의 편리함을 따라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주거, 병원, 마트, 학교, 일터, 문화시설등 도시의 장점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월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살던 때는 자연의 변화를 보며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고 광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볼품없음과 하나님의 위엄을 불수가 있었습니다. 도시의 약점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 추수되는데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그렇다고 도시를 떠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요13:1의 짧은 본문말씀에는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 아름답게 추수되기 위해서 붙잡아야할 예수님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알곡이 되어 간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이 베어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예수님의 아름다운 첫 번째 모습은 무엇일까요?
돌아갈 때를 알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돌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면 준비 되지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은퇴 후를 위해 물질을 준비하고 건강은 준비하지만 돌아갈 준비는 물질의 준비가 아닙니다. 돌아갈 준비는 신앙의 준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에 시간을 더 내고 물질을 더 드리고 그리고 인생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4:14-16]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시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톨스토이의 단편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를 아실 것입니다.
한 농부가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땅을 사 모으게 되면서 소출이 늘자, 욕심이 생겨 더 많은 땅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많은 땅을 싸게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는데, 그 땅은 1천 루블로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는 곳이 모두 자신의 땅이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 농부는 다음날 일찍 일어나 땅을 밟기 시작했는데,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가면 갈수록 좋은 땅이 나타나서 자꾸만 더 나아갔습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달렸는데 해는 이미 지평선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농부는 있는 힘을 다해 약속한대로 땅 주인이 있는 곳에 도착했지만, 그만 지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농부가 가질 수 있는 땅은 자신의 시신을 누일 반 평의 땅 뿐이었습니다. 이이야기는 [눅12:16-21]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 나라를 준비하는 삶과 그 나라의 영광을 준비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십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우리가 붙잡아야 할 예수님의 아름다운 두 번째 모습은 무엇일까요?
인연을 소중이 여기시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힘든 일을 앞두고 있으면 다른 것에 신경을 쓰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너무도 힘들고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사람들을 챙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삶은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삶입니다.
물론 여러 관계들이 오죽했으면 함께 살지 못하고 헤어졌겠습니까? 그래도 인연을 좀 더 소중히 생각하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모든 관계가 서로 남처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해 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너무 쉽게 아무렇지 않게 헤어져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름다운 인연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삼하23:8]에는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다 면서 나오는 이름들은 다윗과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쓴물인생을 살아가는 나오미를 끝가지 지켜준 룻의 이야기는 이름다운 인연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나오미가 자신을 마라'(쓰디쓴,괴로운)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괜찮을 때, 희망이 있을 때, 함께 가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길이 참으로 괴롭고, 망한 길이요, 쓰디쓴 절망의 길임에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룻은 그 길을 함께 갑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씀이 이해는 되지만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을힘을 다해 참아 보는 것/ 하나님이 맺어준 인연으로 보는 것/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박영희시인의 접기로 한다는 시에 보면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내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 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이처럼 다시 생각 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런 삶을 생명줄처럼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추수하실 때가 가까워오고 있는데 우리가 탐스럽게 익은 알곡이 되도록 본문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두 가지 주님의 모습을 끝가지 붙잡게 되시기를 바랍니다.